삼국사기는 누가 뭐라해도 고대사의 열쇠이다

2015. 4. 26. 14:31우리 역사 바로알기

 

 

 

       삼국사기는 누가 뭐라해도 고대사의 열쇠이다.|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동명 | 조회 252 |추천 0 | 2015.04.07. 00:16 http://cafe.daum.net/alhc/ALGC/3771 

 

<삼국사기는 누가 뭐라해도 고대사의 열쇠이다.>

   삼국사기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알수 있는 유일한 관찬 사서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이 김부식이다. 현대에 이르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불신 문제와 편찬자인 김부식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이 제기 되고 있다. 삼국사기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알수 있는 열쇠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 과정을 심도있게 연구하지 못한 결과물로 이러한 의문점이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어떻게 탄생 되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고려 인종때 김부식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기 1145년에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사(三國史)를 편찬해 올리자 왕은 내시(內侍) 최산보를 집으로 보내 치하하고 화주를 내려주었다.”라고 하여 김부식의 나이 71세에 삼국사를 편찬했음을 알수가 있다. 김부식이 올린 진 삼국사기표에 노신(老臣)에게 명하여 편집하게 하신 것이온데라고 하여 인종의 명에 의해 편찬 되었다. 앞서 김부식은 예종실록 편수관이 되어서 편찬 작업에 임한바 있다. 인종은 왜 삼국사 편찬을 김부식에게 명령하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인종 즉위 때로 돌아가야 한다. 서11224월 예종이 죽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은 인종(왕해)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기도 했으나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그를 받들어 즉위시켰다. 이로써 이자겸은 고려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때 김부식은 친형인 김부일이 맡고있는 보문각대제를 맡았다. 김부일은 직학사로 승진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을 백관들과 같게 할 수가 없어, 여러 관리들에게 이에 대해 의논한 후에 보고하라고 했다. 보문각학사 정극영과 어사잡단 최유가 이제 이자겸은 표를 올릴 때 자신을 신하라 낮추지 말 것이며라고 보고하니 뭇 의견도 다들 그 말을 따랐다. 그러나 당시 보문각대제 김부식은 표를 올릴 때는 마땅히 신이라고 해야 하며, 조정에 있을 때는 왕과 신하의 예를 행하고 궁궐 안에서는 집안 사람의 예로 서로 뵈어야 합니다.”라며 절묘한 해결책을 주장하였다. 언뜻보면 김부식이 이자겸과 대립각을 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치 않다. 당시 모든 권력을 가진 이자겸에게 김부식이 미치지 않고서야 비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얼마후 평장사 한안인이 예종 재위 17년 동안의 업적은 응당 역사에 기록해 후세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송나라의 전례를 따라 실록편수관을 두시옵소서.”라는 건의를 올렸다. 이에 인종은 보문각 학사 박승중, 한림학사 정극영, 보문각 대제 김부식 등을 편수관으로 임명하여 예종실록을 편찬하도록 했다. 김부식이 이자겸을 추종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정도 정치적인 계산이 작용하였다고 본다. 김부식은 예종실록 편찬을 계기로 예부시랑에 올랐다. 이때 김부식의 나이가 50세이다. 예종실록을 편찬한 편수관중 보문각 학사 박승중과 김부식은 이자겸과 척을 지지 않아 출세 가도를 달렸고, 한림학사 정극영은 한안인 사건에 연류되어 척결되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왕비로 들였고, 자신의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작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더욱이 지군국사가 되려고 인종에게 요청해 자신의 집에 와서 책봉하게 했으며 시간까지 강제로 정하였다. 그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후 인종은 이자겸을 싫어하게 되었다. 서기 1126년 내시 김찬과 안보린이 무관인 최탁등과 연계해 이자겸과 척준경을 참살하려 했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척살하였다. 이자겸은 인종을 협박해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이때 금나라가 요나라와 송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차지하였다. 이자겸은 모든 관리들을 소집해 금나라를 상국으로 대우하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불가하다고 했다. 김부식은 그해 어사대부 추밀원부사로 승진하였다. 이로보면 김부식은 이자겸과 정치적 궤를 같이했다고 보여진다.

 

   예종때 요나라가 금나라를 정벌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원군을 요청하자, 모두 원군 파견에 찬성하였지만, 김부일과 동생 김부식은 지금 다른 나라를 위하여 출병하는 것은 스스로 재앙의 실마리를 만드는 것이니, 그 이해 득실은 아마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반대하였었다. 이는 김부식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은 아마 금나라를 상국으로 하자는 이자겸의 생각에 동조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승진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자겸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반란 음모에 인종이 동참한 것으로 보아, 그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이 정말로 인종을 죽이려 했을까? 당시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다. 인종은 고려사에 따르면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관대하고 자애로웠다.”라고 하였다. 이자겸이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외손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인종을 유폐한 일을 두고 이자겸이 왕이 될려고 한다는 소문이 생긴 것이다. 어째든 이 사건으로 인종은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고, 이자겸과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결국 인종은 이자겸을 내치기로 마음먹고 예종때 내의(內醫)였던 최사전과 모의하여 척준경을 설득해 이자겸을 척결하였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체포하고 그 일당들은 유배 보냈다. 이때 예종실록 편수관이었던 박승중도 유배에 처해졌다. 이자겸이 숙청된후 척준경이 조정을 장악했으나, 그는 미미한 집안 출신이며 무인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개경의 문벌귀족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종의 마음을 파고든 세력이 있었으니, 묘청의 학설 따르는 김부식의 숙적인 정지상과 백수한이다. 이들을 서경파라고 지칭한다. 14살에 즉위하여 이제 성인이 된 인종의 입장에서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경파들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정치를 구현 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다.

 

   서기 1127년 정지상과 백수한의 권유로 인종은 묘청을 불러 상안전에서 관정도량을 열었다. 왕이 주체가 되어 부처의 대자 대비함으로 세상의 모든 재해와 위난을 구제하기 위한 의식이다. 관정도량 이후 정지상은 개경 조정을 장악한 척준경을 몰아내고자 인종에게 상소하였다. 결국 인종은 척준경을 유배 보낸다. 인종은 이자겸의 두 딸을 쫒아내고 임원애의 딸을 왕비로 들인다. 개경 조정은 임원애가 중심이 되었지만 이자겸때와는 달리 문벌귀족들간 결속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이에반해 서경파는 정지상을 중심으로 급성장 하였다. 김부식은 서기 1126년 이자겸이 척결된 직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인종이 김부식을 송나라로 보낸 것을 볼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유교사상에 대한 교감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일관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행차하여 지난 허물을 깊이 뉘우치고 혁신된 정치를 행하고자 하니 짐의 뜻을 온 나라에 선포해 백성들이 모두 알게끔 하라.”라는 인종의 조서이다. 자신만의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 싶었던 인종은 서경파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혁신된 정치를 위한 인종의 일시적인 생각으로 서경파를 이용한 것 뿐이다.

 

 

 

   서기 1128년 인종은 예부시랑 윤언이를 남송에 사신으로 파견한다. 이때 김부식은 한림학사승지로서 인종의 왕명을 담당하였다.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문벌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나날이 공고해지는 반면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들은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종이 서경에 방문했을 때, 서경파들은 서경 임원역의 지세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입니다. 궁궐을 세워 이곳으로 옮기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습니다.”라며 서경천도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서기 1129년에 드디어 서경에 대화궁이 완성되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올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인종은 서기 1132년 개경 세력의 중추인 김부식을 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하여다. 이것은 인종이 처음 서경파에게 정치적 혁신을 주문하였는데, 서경파들이 그 뜻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함으로서 벌어진 것이다.

 

   개경 세력에게 점점 힘이 쏠리고 있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들은 서경의 수축이 어느정도 진척되자, 대동강에 서기(瑞氣)가 어려 있으니 이는 신령한 용이 침을 토한 것으로 천년에 한번 보기도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위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소망을 따라 금나라를 제압하소서.”라며 서경천도를 압박하였고, 이에 임원애는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꾀를 부리고 해괴한 말로 민심을 어지럽혔습니다. 몇몇 대신과 근신도 묘청의 말을 따라 국왕을 잘못되게 했습니다. 장차 생각지도 못할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저잣거리에서 죽여 화의 싹을 끊으십시오라고 상소했다.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세력의 반격이었다. 이렇듯 서경파와 개경 세력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때, 인종이 서경파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른데 있었다. 정지상이 인종의 친여동생인 장공주의 나이가 차 대궐에 더 이상 머물러 둘 수가 없으므로 출가시켜야 한다고 인종에게 건의한다. 서경파들에 대한 인종의 신임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서기 1134년 서경파들은 초조한 속내를 들어내며 인종에게 서경천도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김부식은 이번 여름 서경 궁전에 벼락이 쳤습니다. 벼락 친 곳으로 재앙을 피하러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가을 곡식을 아직 거두지도 않았는데 행차하면 벼를 짓밟아 농사에 방해가 됩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서경 행차에 반대했다.

 

 

   김부식의 제동으로 인종의 서경 행차가 없는 일이 되었다. 개경 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디쳐 서경 천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한 묘청은 서경 세력들과 야합하여 1135년 반란을 일으킨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 백수한을 처형하고 출전하였다. 묘청의 반란은 1136년 완전히 소탕되었다. 김부식은 이 전공으로 고려 조정을 장악하였고, 숙적인 정지상을 베고 정적인 윤언이를 축출하였다. 서기 1138년 인종은 김부식을 집현전대학사 및 태자태사로 올려 주었다. 모든 환란이 지나가고 인종과 김부식은 유교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파트너가 되었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사마광의 유표(遺表) 및 훈검문(訓儉文)을 읽게 했다. 그리고 사마광의 충의가 이와 같은데, 그 때 사람들이 간사한 무리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김부식이 왕안석과 서로 화합하지 못했을 뿐 실제로는 죄가 없습니다.”고 대답하자 인종은 송나라가 망한 것은 이런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인종과 김부식의 대화 내용을 다시 풀이하자면, 북송 신종이 즉위하자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하였다. 신법이란 농민생활 안정, 생산의 증가, 조세원의 개발을 목표로 한 부국책, 부병제의 회복을 통한 강병책, 과거제와 관료임용제도의 개혁책 등이다. 당시 한림학사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와 연계하여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낙양에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김부식은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왕안석의 신법보다는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 한 사마광의 구법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 김부식은 왕안석에 빗대어 금나라 정벌과 서경 천도와 같은 정치적 혁신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음을 인종에게 알리려는 것이 그의 진심일 것이다. 인종은 왕안석의 신법이 송나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해 김부식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렇듯 사마광을 높이 평가한 김부식은 후일 사마광이 신종으로부터 명을 받아 편찬한 자치통감의 예에 입각하여 삼국사 편찬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서기 1142년 김부식이 조정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다. 국자사업 기거주 정습명은 김부식의 별장(別第)에 붙여 살기를 청하여 간관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청컨대, 죄주소서.”하였는데, 이에 정습명은 기거주의 벼슬을 떨어뜨렸다. 물론 김부식의 잘못은 없어지만 간관을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끔 했으니, 도의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김부식이 물러나고자 했던 진짜 이유는 지금 어미가 죽어서도 조명(詔命)으로 강연히 기용하시와 소원을 다하지 못하게 하오시면 자식된 도리를 영원히 잃어버릴 뿐아니라, 실로 충성으로 옮기는 길마저 이지러질까 하오니, 신에게 오점만이 남게 되고 나라에는 보익함이 없을 것이옵니다.”라고 했듯이, 어머님의 죽음이다.

 

 

   결국 인종은 김부식의 치사(致仕)를 허락하고, 동덕찬화공신의 칭호를 더하여 내려준 뒤 경의 나이가 비록 많으나 의논할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응당 참여시켜 의견을 들을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치사한 김부식이 언제 삼국사를 편찬하기 시작했을까? 진 삼국사표에 따르면 마땅히 삼장(재주학문식견)의 인재를 구하여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 물려주어, 일성과 같이 빛나게 해야 하겠다.”라고 인종이 삼국사의 편찬을 처음 생각하였다. 노신에게 명하여 편집하게 하신 것이온데, 견식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옵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인종은 삼국사 편찬을 치사한 김부식에게 명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전하지 않지만 서기 1394년 김거두의 삼국사기 발문에 따르면 김부식 이외에 김영온, 최우보, 이황중, 박동주, 서안정, 허홍재, 이온문, 최산보 등이 참고하였고 관구(管句) 김효충과 정습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사를 비롯하여 그 어디에도 이들이 삼국사 편찬에 간여했는지 기록이 없다. 특히 진 삼국사표에 신의 학술이 천박한 것은 이와 같사옵고, 예전 말과 지나간 일은 깜깜함이 저러하오니, 이 까닭에 정력을 소모하고 힘을 다하여 겨우 성편(成編)하였사오나, 별로 보잘 것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라고 하여 김부식 홀로 편찬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물론 김부식은 김거두의 삼국사기 발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협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편찬작업은 홀로 했음이 자명하다. 고려사에는 서기 114512월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해 올렸다고만 했으나, 동국통감에는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김부식이라 하여 삼국사 편찬 시기가 서기 1143년부터 1145년 사이였음을 알수가 있겠다.

 

 

   김부식의 나이 70세에 삼국의 역사 자료를 널리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시간도 촉박했을 것이다. 진 삼국사표에 따르면 노신에게 명하여 편집하게 하신 것이온데라고 하여 기존에 있던 자료들을 모아 단순히 편집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부식은 어떤 자료들을 참고 했을까? 삼국사기 내용에 그것이 있다.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고 하였으며, 신라는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고구려는 임금이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라고 하여 삼국 모두 국사(國史)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구삼국사라 지칭하였다.

 

   고려 이규보가 본 것이 구삼국사이다. 김부식은 구삼국사와 더불어 여러 고기(古記) 및 신라의 유적(遺籍)을 채록하여 삼국사를 편찬 하였다. 삼국사기에 대해 이규보는 김공 부식이 국사를 다시 편찬할 때 그 사적을 너무 간략하게 다루었다. 생각컨대 공은 국사를 세상을 바로 잡는 글로 여겨, 지나치게 이상스런 일을 후세에 보여주는 것은 안되겠다고 하여, 그것을 줄여버리지 않았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하물며 국사(國史)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글이니, 어찌 그 사실을 함부로 전하였겠는가?라고 하며 구삼국사의 가치를 높게 보았다. 따라서 구삼국사를 모태로 편찬한 삼국사기는 그 나름대로 분명 가치가 있는 역사서이다. 다만 서거정은 삼국사는 통감, 삼국지, 남사, 북사, 수서, 당서를 철습(거두어 주워 모음)하여 전기를 만들었으니, 역사를 짓는 체재(體裁)가 아니라고 하였다. 김부식의 공은 삼국 초기의 역사를 보존한 것이며, 실은 중국의 역사서를 판단없이 철습(거두어 주워 모음)한 것이다. 어째든 삼국사기는 누가 뭐라해도 고대사의 열쇠임은 자명하다.

 

 
 
공실불 15.04.09. 00:16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묘청 세력의 제거하고 집권한 개경파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신라본기 마지막 사론에 고려 왕실의 정통성이 자신의 가문인 신라 왕실에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사론을 쓸 정도로 김부식 자신의 주관적인 정치적 의도로 편찬을 하였음을 알수가 있지요 사료의 가치는 객관성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런 정상적인 사료 가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지요 원자료인 중국 신라측 자료의 편중도로 인한 객관적 신빙성의 문제도 그러하고요
 
 
공실불 15.04.09. 00:25
김부식은 관직에 물러났어도 그 개경파 수장이었던 그 권세는 여전하였고 아들 김돈중이 후일 무신정변의 주동자가 되는 정중부가 수염을 태우는 안하무인적 비인도적 만행을 저지를 정도로 김부식 일가의 권세는 김부식의 퇴임 후에도 여전하였고 또한 인종 말년에 대령후 왕경과 태자 의종간의 왕위계승 다툼으로 인해 장남 의종에게 왕위계승시키고 싶어하는 인종으로서는 김부식의 심복인 정습명을 태자 의종의 후견인으로 삼아 태자 의종을 보호할 정도로 김부식 세력에게 의존이 불가피한 상황이기에 김부식에게 삼국사기 편찬을 맡긴건 이런 거래 때문이죠 삼국사기 편찬에 이런 편찬 당시 인종 말년의 정치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지요
 
 
공실불 15.04.09. 18:47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수 없는게 그 본질이듯이 이자겸은 기본적으로 천륜이 중요한게 아니라 권력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자겸은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내어 사실 찬탈 의지가 미약하다고 볼수가 있지요 찬탈 의지가 있었다면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겠습니까 그러나 찬탈로 혜택을 받는건 이자겸이 아니라 이자겸의 아들들이라 이자겸이 왕위에 오른다면 그들에게 최고 통치자인 왕위가 자동적으로 돌아올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찬탈에 적극적일수밖에 없었고 인종은 김찬 안보린에게 외조부의 제거를 지시할 정도로 천륜에 신경쓸 겨를이 없지요
 
 
정성일 15.04.13. 15:18
삼국사기는 관찬 사서로서 현재까지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할 수 있지요. 다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하여 편년이 잘못된 곳이 한 두곳이 아니라서 초기기록이 전면 부인되고 있고, 여기에 대해 해석하는 학자들마다 생각이 다른 게 크나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가 5세기 초반에 60세 전후로(혹은 60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는 눌지왕설에 맞추기 위함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재조사가 필요) 죽은 신라왕이 누구인지도 밝힐 수 없는 책이지요.
 
정성일 15.04.13. 15:23
특히 일식기록에 대하여 중국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바람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가 중국의 영토로 비정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를 편찬했던 서거정의 비판은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삼국사기는 삼국사 연구에 필요하지만 쓸만한 자료가 별로 없으니 계륵이라 하겠지요.
 
동명 15.04.14. 10:46
정성일 정성일님 방갑습니다. 요즘도 남당유고에 전념하신는지요. 아무튼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기본적으로 역사란 선조들의 생활, 풍습 등 문화적 요소들은 발견한 유물들로 유추 할 수 있으나, 어떠한 사건이나 영토를 유추 할 때에는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헌자료는 이것을 특정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지요. 물론 삼국사기가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중에 고기류는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삼국사기의 가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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