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 신라, 고구려, 백제의 위치

2015. 4. 27. 14:00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 신라, 고구려, 백제의 위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위치 좀 알려주세요 ?

수도가 아닌 위치요...

 

    < 답변> 

 

고구려 건국 신화

고구려(高句麗)는 곧 졸본 부여(卒本扶餘)다. 혹 지금의 화주(和州)니 성주(成州)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다. 국사 고려 본기(本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시조 동명왕(東明王)은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 보다 앞서,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동부여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그 때 한 여자를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만나 물으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鴨祿)가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중매 없이 남을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여기에 귀양 보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유화를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좇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들이나 되었다. 왕이 버려서 개,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도로 어미에게 주었다. 어미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 백중하였다.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에게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주몽과 같이 놀면 그 재주가 늘 따라가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 말하되,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조금씩 먹여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것을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의 어미가 왕의 다른 아들들이 여러 장수와 함께 주몽을 장차 해치려 함을 알고,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로 간들 안 되겠느냐? 속히 일을 꾸며라.”

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烏伊)등 세 사람의 벗과 엄수(淹水)에 이르러 고하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하고 있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니 어찌하리오?”

하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이 건너자 다리는 사라지고 쫓아오는 군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으니, 그 때 나이 12세였다.



* 해부루 :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아들

* 금와 : 해부루의 아들

* 태백산 : 여기서는 백두산을 이름

* 하백 : 황하의 신으로 곧 물을 맡은 신

* 해모수 : 북부여를 세운 사람

* 웅신산 : 일설에 ‘고마괴’, 곧 개마산. 백두산이 일명 개마산이므로 백두산의 별칭으로 보기도 함

* 모략 : 지모(智謀)와 방략(方略)

* 엄수(淹水) : <동명왕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이규보의 주석에는 일명 ‘개사수 (蓋斯水)’이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함

* 졸본주 : 현토군(玄兎郡). 한사군(漢四郡)의 하나

 

 

 

 



신라 건국신화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을 가지지 못하고 보매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째서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이때야 모두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매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고 밝았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가면서 치하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님이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여자 임금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하였다.
이날 사량리 알영정(閼英井)에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계집아이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월성 북쪽 냇물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撥) 떨어졌으므로 그 냇물의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지라, 알은 바가지같이 생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가지를 “박”이라 하므로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써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살이 되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고 이어 여자로써 왕후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 하였다.
더러는 사라(斯羅) 도는 사로(斯盧)라고도 하며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났으므로 혹은 일러서 계림국이라고도 하니 계룡이 상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合葬)하려고 하였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몸뚱이를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 하였다.

 

 



백제 건국신화

부여에서 나타난 유리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었다. 주몽은 졸본에 와서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 데, 큰아들은 비류였고 작은아들은 온조였다. 그런데 주몽에게는 부여에 두고 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있었다. 유리도 아버지를 닮아 어 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하루는 유리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어떤 아주머니를 보고 활로 물동이를 쏘아서 구멍을 뚫 었다. 그 여자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해't다. "애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버릇없이 남의 물동이를 깨다니." 유리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면서 화살에 진흙덩이를 꽂아 다시 물동이를 쏘아 구멍을 메웠다. 그러자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유리는 조용히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네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 되는 분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셨 단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네가 자라서 아버지를 찾아오려거든 일 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에 감추어 둔 물건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 가지고 오 라고. 그러면 내 자식인 줄 알겠노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일러준 말을 듣고 유리는 그 날부터 산골짜기마다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며칠이 가도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 지쳐버린 유리가 집 에서 쉬고 있는데 기둥에서 이상한 슬픈 소리가 났다. 그래서 그 기둥을 가만히 보니 소나 무였고 일곱 모서리로 되어 있었다. 또 일곱 모가 난 주춧돌이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란 일곱 모가 난 기둥과 주춧돌이고 돌 위 소나무란 기둥이 아닐 까?' 정신이 번쩍 든 유리가 기둥을 살펴보니 과연 기둥에 구멍이 있었다. 조심조심 손을 넣어 보니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부러진 칼 한 조각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유리는 크게 기뻐하며 곧 행장을 차려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드디어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는 왕에게 나아가 가지고 온 것을 공손히 받들어 올렸다. 주 몽왕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 유리가 바친 것과 맞추어 보니, 칼에서 피가 나면서 하나로 이어져 온전한 칼이 되었다. 주몽은 유리가 자신의 자식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남으로 내려간 비류와 온조 비류와 온조 형제는 부여에서 나타난 유리가 태자가 되자 자신들이 유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고구려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신하들 가운데서도 오간, 마려 등 열 명이 이들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이들이 함 께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자 많은 백성들도 뒤를 따랐다. 마침내 한산 땅에 이른 이들 일행은 부아악(지금 서울의 북한산)에 올라가 자리잡고 살 만 한 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비류는 서쪽으로 보이는 바닷가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그를 말리 며 간하였다. "여기서 살펴보니 이 한수(한강) 남쪽 땅은 북쪽에 강이 있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또 남으로 기름진 들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은 얻기 어려울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서쪽 미추홀(인 천)로 갔다. 온조는 그 땅에 도읍을 정하여 하남 위례성이라 하고 열 명의 신하들의 도움으 로 나라를 세워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런데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다 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벌써 도읍이 자리가 잡혔고 백성들도 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으 며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다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비류를 따랐 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백성들이 많아지고 나라의 세력도 커지자 이름을 백제(百 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 조상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부여 (扶餘)씨라고 하였다.

내용출처 : 한메 디지탈 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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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도 : 국내성 - 평양성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발전하였던 고구려는 2세기 고구려의 발전 후반에 이르러 체제의 중앙 집권화와 왕권의 강화에 새로운 진전을 가져왔다. 국가 체제를 크게 개혁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소수림왕 때의 일이었다. 즉, 불교의 수용, 태학의 설립, 그리고 율령의 반포 등은 중앙 집권 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

소수림왕 때의 체제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는 국력을 밖으로 팽창시켜, 그 시호가 의미하는 것처럼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요동 방면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지역이 고구려의 판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를 도와 남해안 일부 지역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당시의 활발한 정복 사업에 대해서는 국내성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고구려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밖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해안으로 적극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는데, 북연 왕이 의탁해 오자 장수왕은 한때 북 중국 지역의 지배자였던 북연 왕을 영토 내에 머무르게 하고 그를 제후로 대하기도 하였다.

 

백제 수도 : 위례성, 웅진, 사비성

근초고왕때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한강 이북 지역과 남쪼으로 탐라까지 영토를 넓힘. 바다 거너가 중국과 일본에도 세력을 떨쳤다. 백제 5세기에는 고구려의 힘에 밀려 세력의 약화.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 빼앗겨 금강 유역의 웅징(공주)로 도읍 옮기기까지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그 후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겨 국력을 회복했다.

 

신라 수도 : 금성(서라벌(경주))

내물왕 시기에 신라의 중앙집권 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처음으로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신라를 침범한 왜구가 너무 많아서 신라의 힘으로는 이기기 힘들자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과의 전쟁으로 서쪽지역의 영토가 축소되고..수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며 국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수세에 몰린 신라에서는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출현..전세를 뒤집으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에 이르고 마침네 676년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2006.05.05 18:20 수정됨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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