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초기국가 국명(國名)의 특성-濊·貊·古朝鮮을 중심으로

2015. 4. 27. 13:46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대 초기국가 국명(國名)의 특성-濊·貊·古朝鮮을 중심으로 - <폄> 청동기/고조선 / 역사

2015/03/1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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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 >

1. 序論

2. 本論

2.1 初期國家의 성격 2.4 古朝鮮

2.2 國語와 地名의 表記問題 2.5 三韓

2.3. 濊·?(貊·?)

3. 結論

 

1. 序 論

 

1.1 연구목적 및 연구방법

 

   초기 역사적 전개과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國家的 차원의 정치 단위가 처음에는 조그만 공동집단에서 발생하여 점차 계급을 이루는 거대한 조직사회로 발달해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마치 고유명사처럼 역사적 사료 안에서 쉽게 접하는 韓半島의 初期 古代國家名들도 본래는 집단사회를 일컫는 것으로서, 소규모의 사회 안에서 통용되었던 일반명사들의 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들 고대국가의 이름과 유사한, 혹은 音韻面에서 통용가능한 表記體(地名素)들이 오늘날에 이르는 일반지명의 기록에서도 다수 발견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지명소가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범주를 형성하는 것도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初期國家體制로 가정되는 몇몇 古代國家의 國名에 대한 일반명사적 성격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初期國家의 國名이 갖는 地名으로서의 성격과 동시에 地名의 生成過程이 一般名辭의 독립된 대상 자연물 지칭명에서 시작하여 이를 先行한 後部地名素의 합성으로 이루어짐을 기초로 한 것이다.

 

   본고는 三國史記 地理誌의 國家名에 대한 기록을 기초로 하여, 三國遺事 및 기타 중국의 韓半島 내 國名에 대한 언급을 토대 했다. 한편 地名에 대한 중심자료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古代國語語彙集成(1994)를 참조하였으며, 이영택의 韓國古地名辭典(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95)와 병행하였다.

 

1.2 地名의 特性

 

   地名은 지표상의 위치와 일정한 地域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는 토지와 인간의 교섭관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언어 중 사회성이 가장 강한 語彙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명은 固着性과 保守性이 매우 강하여 한번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하면 일반 언어에 비해 좀처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地名은 그 생성과정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초기단계적인 어휘, 특히 그 지형적 특성이나 자연적 사물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집단내의 계급 발생에 따라 그 지역의 尊長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高句麗의 始祖 東明이 처음 도읍한 곳의 地名은 ‘卒本’이었다.

 

  이것이 본래 그 지방에서 불리어 오던 원래의 地名이었든, 아니면 ‘東明’의 순수한 우리식 이름이었든 간에 지명의 命名과정을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명은 최초의 사회성을 획득한 후 그 一般名辭적 성격을 버리고 固有名辭가 된다.

 

   이러한 固有地名들, 특히 古代國家의 國名들은 國內의 기록에서는 建國神話와 더불어 나타나며, 國外의 기록에서도 변방의 민족적 문화적 특성을 언급하는 장에서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建國神話의 특성상 본래의 사실에서 윤색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것을 허구와 동일시하여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사실에서 제외시켜서는 안된다. 建國神話야말로 古代 初期國家의 國名이 一般地名임을 알려주는 가장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건국신화는 한 나라의 성립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집단의 언어와 地名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가장 기초적인 정보가 된다. 또, 이렇게 구성된 國名은 동시에 지명으로서 그 근원에 민족적 언어특징을 담고 있는 일반언어적 특성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古代國家의 國名 또한 일반적인 명사가 고유명사화 과정을 거친 지명에 다름이 아니다. 歷史的 記錄을 통해 드러나는 地名들이 고대국어의 편린을 보여줌은 지명이 최초의 사회적 통용어 중의 한 부분임을 증명하는 좋은 근거이다.

 

2.1 ‘國’字와 國名

 

   韓國史의 전개과정에서 최초의 歷史體로 등장하는 우리민족의 명칭은 濊·貊·韓 등으로 대표되고 있으며, 이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동예·옥저 및 삼한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후속하는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및 주변 정치체들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國家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인구의 수, 영역의 넓이와 또는 정부의 크기 등에서 하나의 기준을 정해 놓고 국가의 성립 여부를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에 의거해 볼 때, 이들의 家戶나 인구수 등이 일반적 기준에 훨씬 미치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다.

 

   대체적으로 삼국시대 이후의 국가를 古代國家로, 그 이전의 濊貊朝鮮을 초기국가 혹은 부족국가로 분류한다. 이는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초기국가들을 기록할 때 그들의 族屬名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夫餘 이전에는 城邑 名이나 家戶 數, 地理的 位置 등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國’의 개념은 역사가마다 달라서 서양에서의 보편적인 國家發達段階에 그 기준을 둘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초기국가는 都市國家(city-state)의 형태를 띤다. 이것은 즉, 막스 베버(Max Weber)가 사용한 용어인 城邑國家로서 歷史理論에서 지칭되는 부족-국가의 중간 발전 단계에 대응된다. 또, 인류학적 이론에 따라서 君長社會論(chiefdom)도 제기되었다. ‘chiefdom’은 군장(君長·族長)사회 등으로 번역되는데, ??三國志魏志등의 사료에 나타난 ‘君長’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일반적인 과정일 뿐 한국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초기국가적 형태는 部族國家의 前段階인 ‘walled-town state’라 명명된 바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는 ‘古代初期國家의 名稱’을 歷史社會學的 의미에서의 ‘國家’와 대립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신라사회를 斯盧六寸, 斯盧小國, 그리고 백제와 더불은 마한사회를 目支國, 馬韓五十四國으로 표기했듯이 三韓社會의 70여 개에 달하는 國名이 실제로는 村長을 중심으로 하는 村落社會로서, 과거의 ‘國’에 해당하는 의미는 ‘나지막한 구릉에 城을 쌓고 살면서 성밖의 평야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이 있는 정도의 사회’인 것이다.

 

   중국측의 사적에 있어서도 본래 ‘나라’를 뜻하는 한자는 ‘邦’이었으나 漢代 이후에 ‘國’으로 바뀌었으므로, 중국측이나 우리측의 사료를 보면 국가의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國’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경우와, 또한 ‘國’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많은 사회도 실제로는 국가의 단계로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初期國家에 대한 기록 중 國號의 뒤에 붙은 ‘國’字는 체제 수립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접미된 것으로서 ‘무리’, ‘모두(덩어리)’의 의미정도로 파악된다. 더불어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분하여 부를 때 國名에 해당하는 명사의 뒤에 ‘國’에 해당하는 후부지명소를 덧붙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습관은 아마도 정치체제가 완전히 갖추어 지고, 문화적 교류가 매우 높아진 고대국가 성립 이후의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初期古代國名으로서의 地名은 어느 村落의 이름이며 동시에 하나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보통명사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2.2 國語와 地名의 表記問題

 

   國號에 대한 기록은 모두 漢字에 의존하고 있다. 또, 국내외 기록을 모두 합해도 한반도의 고대사 및 고대어에 대한 자료가 零星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 가운데서 체제가 다른 외국어로 표기된 문자를 해독해서 자료 속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올바른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일은 수많은 학문적 성과에 기대어도 여전히 어렵고 難解한 일이다.

 

   특히 表意文字인 漢字를 통해서 表音文字인 國語의 音像을 되새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 한계를 갖고 있는 작업이다. 특히 訓借表記의 경우와 달리 國名이 音借表記된 경우에는 어휘 解讀의 문제가 국어 계통론의 영향아래 놓이기도 하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표기법상의 규칙에 있어서는 訓借字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音借字에 있어서는 한 어형의 표기에 지나치게 많은 用字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어형의 정확한 기준음을 잡기가 어렵고 異表記가 많은 것이 音借表記의 특징이다. 실제로 한자를 이용한 훈?음차 표기들이 얼마만큼 고유 지명을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가를 본다면, 그 표기력은 매우 미약한 편이다. 엇비슷한 한자음들 모두가 동일지명을 표기하는데 차자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차자 표기 결과는 매우 추상적인 데에 머물러 있다.

 

   중국 한자음이 유입되는 시기의 차이에 따라 音像의 변개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시대를 달리하여 類似音의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경우가 지명의 기록의 예에서는 허다한데 이 경우에는 서로간에 국어사적인 비교를 하려고 해도, 그 정확도에 있어서 신임도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대사의 연구에 있어서 대부분 중국의 사료를 통해 연구자료를 획득해야 하는 지금에 있어서는 기록당대의 중국 한자음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 연구결과의 전체를 움직이기도 한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韓國語의 表記를 위한 한자의 선택에 차이나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결국 漢字表記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자료가 주는 정보를 지나친 확대 해석없이 수용할 수 있어야만 순수한 모습의 古代語를 재구할 수 있을 것이다.

 

 

2.3 濊와 (貊)

 

   ‘濊貊’에 대한 기록을 보면, 대체적으로 민족적 특징으로는 말갈족이었을 것과 아니면 어느 고아시아계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고, 특히 중국의 고전에 의해서 기록된 漢字上의 表記를 보면, 詩經과 같은 經典類에서는 ‘貊’으로, 그리고 史記와 같은 歷史書類에는 ‘濊貊’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國志> 魏志 高句麗傳을 보면, 이들이 鴨綠江 유역에 거주한 부족과 運江이 유역에 거주한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각각 별개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있었고, 이들 중 특히 태백산맥 서쪽의 運江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을 일컬어 ‘말갈’, 혹은 ‘貊’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漢族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 ‘濊貊’族들이 기록상으로 보아 韓半島 內에 거주한 집단인 것은 거의 분명하지만, 이들 정치집단의 역사적 생존연대를 과연 그대로 믿을 수 있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문헌의 기록특성상 이 기록에 대한 모든 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해도 濊의 존재가 오래된 것임은 틀림이 없다. 위에서 보였듯이 “‘濊’가 흔히 夫餘의 옛 땅으로 여겨지고 있고, ‘貊’과 함께 중국의 史籍에 기록되어 북방의 주변집단사회로 정의되어 온” 부분은 기타 다른 기록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濊와 貊의 언어가 그 특징적 면모를 문화적인 면에서 언급한 외에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그 관련성을 생각해 볼 때, 夫餘와 高句麗의 언어에서 그다지 많은 차이를 보일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濊貊의 언어도 큰 의미에서는 고대국어의 한 갈래인 같은 만주 퉁구스系의 원시 부여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병도 박사가 ‘濊貊’을 일컬어 [개마/고마]의 音像을 가진 部族名이라고 지칭했을 때 더 이상의 異論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濊國’의 借字表記 ‘濊’는 國外 古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면, 대체로 ‘물 많을 濊’나, ‘거칠고 잡초우거질 穢’, 그리고 ‘풀썩을 獩’ 등의 부정적 의미를 지닌 字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濊’이란 이름은 당시의 우리말로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그곳의 지형이나 성세를 따라 지칭한 地名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편, 이들이 모두 國內의 자체적인 기록이 아니라, 中國의 기록임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漢族이 자신의 역사서에서 異邦族으로 지칭하고 부여한 이름들은 하나같이 그 의미가 부정적인 漢字로 표기되어 있다. 예를 들면, ‘匈奴’는 ‘오랑캐’의 뜻이고, ‘??’은 ‘꿈틀거리는 벌레’를 표사한다. 또 ‘??’이나 ‘鮮卑’도 모두 천하여 때라고 매질해야 하는 ‘노예’를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濊貊’도 기록되는 상황에서 많은 차이를 가졌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본래, 漢字의 表記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漢字를 사용하는 自國民에 의한 것인지, 國內의 어느 史家의 기록인지에 따라 이 借字表記의 해석이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특히 그것이 한자를 自國語로 또 自國文字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의 言語에 대한 기록이라면 더더욱이 그렇다. 이것이 音寫인지 아니면 音譯인지, 또 訓譯인지 訓借인지도 구별해야 한다. <後漢書>에는 ‘濊’를 ‘西夷’,나 ‘徐’로 기록하고 있다. ‘濊’의 漢字音이 [?u/?u/χu]정도일 것으로 볼 때, ‘徐’는 ‘濊’의 音借表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만주어 ‘[urhu-he(太陽)]’와 國號인 [부루/부여]가 音像에서 매우 유사함을 발견 수 있다.

 

   이는 고구려어가 부여어에 소급하고, 부여가 ‘濊’의 古土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太陽)/*蓋(王)]로 이어지는 高句麗語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太陽을 의미하는 만주어의 또 다른 형태인 [eldun]이나 [ehero]가 각각 百濟語의 ‘어른’과 ‘[어라하/於羅瑕(王)]’에 대응됨을 가정할때 한 집단의 지배자를 일컫는 어휘로 擴大를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三國遺事> 北夫餘紀에는 “解를 따서 성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解’는 바로 하늘의 ‘해’를 音借한 것으로 ‘解慕漱’, ‘解夫婁’도 太陽을 의미하는 ‘解’인 것이다. 고대국어의 ‘王’을 의미하는 *[가/개]도 ‘*解/濊’의 지도자인 ‘解/蓋’이다. 이는 ‘濊’를 이은 ‘夫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북부여에서 나와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姓을 ‘解’에서 ‘高’라 한 것도, ‘하늘의 해’와 다른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濊’의 借字인 ‘濊’는 ‘(太陽)’를 音寫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 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江陵은 본래 濊라는 옛나라인데 鐵國으로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鐵原은 본래 고구려의 鐵原郡인데 신라가 鐵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즉위년에 東州로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鐵原’은 *[부루]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東國與地勝覽>에도, “강릉은 본래 濊國이 있던 곳으로 고려 태조때에 東原京으로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太陽)]가 [(新·東)]으로 의미가 확장된 후에 다시 音像이 유사한 ‘?(鐵)’까지 아우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확장은 國名 및 地名에 일반적이어서 ‘東原京’의 ‘東’은 濊國의 ‘濊’와 같이 [?(太陽/?(新)]의 뜻옮김이고, ‘原’은 [버러/바러(太陽·土, 國, 領域)]의 뜻옮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주로 ‘濊貊’이라하여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이들이 분화해 만주 동북부 지방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렇게 불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濊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貊’도 ‘?’ 혹은 ‘?’으로 異記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이들 國號가 音借表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왜냐하면 이 借字의 漢字音이 [hao/he/mo]로 읽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建國神話에 나타난 토템 ‘[고마](熊)’의 音寫가 이를 뒷받침할뿐더러 현재까지 남아있는 백제지역 곳곳의 지명도 이들을 지지해준다.

 

   史記 朝鮮列傳에 의하면, “맥은 조선, 고려, 동옥저 속의 한나라이며, 면적은 동서 1,300리, 남북2,00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三國志 魏志東夷傳의 東沃沮에 의하면, “이 濊國은 북으로 高句麗와 沃沮, 남으로 辰韓과 접하고, 서로는 부루(樂浪)에 이르는 한반도 서북부지방과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넓은 영역을 점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後漢書?? 帝記에는 “濊貊은 곧 烏桓이라”고 하고 있다. 한편, 국내의 기록 중 ??三國史記?? 地理志는 “삭주(朔州)가 貊의 땅이었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東國與地勝覽>의 “春川을 烏斤乃라고 하고 朔州와 같이 옛 貊의 고지임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여기서 ‘貊’은 무엇이었을까. 기록된 借字인 ‘貊(?·?)’은 표범, 담비, 오소리와 같은 맹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기록자가 周邊民族에 대한 卑下의 뜻을 강하게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이 借字의 의미에 대응하는 고어는 ‘삵’ 정도를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는 [스라ㄱ/시라ㄱ]로 재구되고 다시 어두의 [s]를 [?], [k]로 소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만주 동북부 지방에 거주하던 韓民族의 한 갈래에 붙여진 이름 ‘貊’은 *[흙/?(土)]으로서, ‘땅, 벌판,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 *[?]은 新羅語의 ‘羅’, 高句麗語의 ‘忽’, 그리고 夫餘語의 ‘離’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또, 北夫餘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있었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北 = (土), 黑, 烏’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반대로 ‘東 = 太陽, 新, 明’의 관계도 성립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夫餘는 본래 ‘濊’로서 [(太陽)]를 가리키는 部族名이자 國號를 가진 족속의 후예인데, 정치체제의 완비와 더불어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夫餘[pVrV]’의 國號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새 땅으로 宮城을 옮겨오면서 본래의 夫餘는 ‘北夫餘(訖升骨)’로 그리고 새로운 夫餘는 ‘東夫餘(*?夫餘)’로 표기된 것이다. 韓國語가 가지고 있는 방위어사에 대한 토착적 이미지를 생각할 때, ‘北’은 ‘後方/本土’의 개념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2.4 古朝鮮

 

   한국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중국의 <後漢書>를 인용한 <三國遺事> 紀異篇에 실려 있는 자료가 國內의 기록으로선 처음이다.

 

그러나 중국의 史籍에서 古朝鮮이란 명칭은 <管子> 등의 先秦시기 문헌에 이미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언급되고 있으며, 전국시기인 기원전 4세기 경 燕나라와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이미 국가적 수준의 정치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山海經>에는 “朝鮮在列陽 東海北山南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朝鮮天毒”이라 해서 ‘朝鮮’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朝鮮의 존재와 명칭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 卷一 古朝鮮의 기록에 의하면 “檀君王儉이 阿斯達에 도읍하고 국호를 朝鮮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아사달은 弓忽山, 方忽山, 闕山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新增東國與地勝覽> 卷42 文化縣에는 그것을 九月山이라 한다고 쓰여있다.

 

   또, ‘朝鮮’은 箕子가 왕이 된 후에도 ‘朝鮮’이라 했고, 衛滿이 ‘箕子朝鮮’의 왕 準을 몰아낸 후에도 ‘衛滿朝鮮’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朝鮮’의 이름은 ‘樂浪朝鮮’, ‘眞番朝鮮’으로 불렸으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의 국호 또한 ‘朝鮮’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國名으로서의 ‘朝鮮’이 여러 문헌에서 일관되게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이미 사회문화적 정치체제를 갖춘 ‘小國’의 고유지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國號에 대해서 양주동은 朝鮮과 더불어 沃沮, 婁, 濊貊과 같은 古代國家의 國號에 대해 논의하면서, 여기서의 朝鮮과 新羅는 그 본 뜻으로서 모두 /穢/, /新/, /朝/의 훈과 같이 [??]으로 해독된다고 하였고, 이는 다시 ‘빛’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어서 [블(火)], [(明)],[븕(赤)], [벌(國·原)]과 同系語로서 가장 原始語라고 단정했다.

 

   의미의 재구뿐만 아니라 음가면에서의 재구에 있어서도 ‘朝’字의 해독에 있어서 그 음가를 향가의 많은 기록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고대어로 [아?/아?/아친]에 해당한다는 결론은 매우 일반적이다.

 

   어쨌든 古朝鮮의 건국신화와 관련된 國號와 地名의 관계 속에서 ‘新市’에 대응되는 ‘阿斯達’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때, 이는 ‘朝鮮’과 더불어 ‘阿斯達’로 訓音借된 同一地名의 異表記일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추측되는 것은 [아?]의 재구형 *[아사/아시]와 /阿斯/가 音借의 관계를, 그리고 ‘朝’가 訓借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어의 ‘朝’가 [asa]로 音讀되고 있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九月山’이라는 기록의 존재에 대해서는 고대국어에 있어서의 ‘阿斯達’에 해당되는 상고음을 [a-si-dar], [a-sa-dara] 정도로 추정해 보면, [아시다라], [아사다라]는 ‘九月’에 대응될 가능성이 있고, ‘九’의 음을 *[아소/아사]로 추정하면, [아사/아시]와 *[아소/아사]의 어두 자음을 音像에 있어서 유사한 형태소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音借의 記錄過程을 생각해 볼 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東, 新’ 정도의 의미와 관련성을 확보할 수 있고, ‘月’은 [달]로 음독되니, *[다라]로 추정하면 [아사다라/아시다라]가 되는 것이다.

 

   또, [달]과 /達/의 관계 또한 고대 국어의 音寫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鮮’이 과연 訓借字인지 音借字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겨주지만 최초의 국호 “朝鮮”은 바로 [asa+tar]이라 해독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朝’는 ‘太陽, 東, 新’의 의미와 함께 ‘아침’을 이른 것이며 고대국어의 音像이 [asa]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夫餘’가 역사적인 시기에서 ‘古朝鮮’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유지되었다는 기록과 ‘夫餘’가 ‘해’를 의미하는 名辭임을 생각할 때에 ‘朝鮮’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文獻에 기록되어 있는 ‘朝鮮’은 중국에 의해서 훈차된 國名으로, ‘朝鮮’으로 기록된 여러 부족연맹 사이에서 일찍 권력을 획득한 [阿斯達]이었던 것이다.   

 

 

   [아사/아시]의 뜻은 일차적으로는 ‘太陽’을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古朝鮮이 단일 支配體制로 정착되면서 건국신화에서 太陽과 ‘하늘’의 존재가 매우 부각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사/아시]는 곧 ‘?(太陽)’와 ‘하늘’에서 ‘아침(朝)’과 ‘밝음(明)’으로, 그리고 ‘天神(檀君)’의 존재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아사/아시]가 ‘新/東’, ‘金/鐵’의 의미가 되기까지는 의미의 확산이 필요한데, [아사/아시]가 ‘新/東’의 의미를 갖는 경우는 고구려의 朱夢이 ‘東明’으로 기록된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東은 ‘新’의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사/아시]가 [?/?]의 변이형을 가지면서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래 [?]는 ‘鐵’로서, 다시 ‘金’의 의미도 포함하게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金’字는 초기에는 주로 남방지역의 國名 혹은 地名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이 ‘金’의 독자적인 북방계 언어로서의 발생인지, 아니면 확산인지는 정확치 않다.

   이렇듯 語義의 확장과 관련된 것으로서 方位語辭를 생각할 수 있다. <後漢書> 高句麗傳의 註를 보면 고구려는 ‘北部’를 ‘後部’로 여기고, ‘南部’를 ‘前部’로 여김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의식 속에는 ‘北’을 뒤로하고 ‘南’을 앞으로 해서, 北方에서 끊임없이 南方으로 진출해 온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는 國名의 개신과정에서도 보이는데, 부족국가 형태의 小集團 형태에서 國家의 형태를 갖추거나, 혹은 새로이 나라를 세우거나 이동을 한 경우, 대부분 前地名에 ‘北’이 접사되고, 後地名에 ‘東(혹은 南)’이 첨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沃沮/東沃沮, 北夫餘/東夫餘/南夫餘의 경우가 그것이다. 여기서 ‘東夫餘’는 [새(新)+夫餘]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新羅의 ‘東京’도 ‘신도시’를 의미하는 ‘새(新)’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東’의 의미가 ‘新’의 뜻을 가지게 되고 [새]로 훈독되기 위해서는 민족의 이동과 정착이 이루어진 다음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또 ‘쇠(鐵)’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鐵器文化에 익숙한 사회집단이어야 한다.

 

   그러나 古朝鮮이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초기집단공동체라고 생각할 때에 ‘新市’를 [아사/아시]+[달]로 訓讀하면서 [아사/아시]의 의미를 ‘?(太陽)’, ‘새(新)’에서 나아가 古朝鮮 시기에 이미 ‘?(鐵)’로 훈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의 이른 시기의 기록에서 古朝鮮을 ‘朝’가 아닌 ‘鐵’이나 ‘金’으로 전사한 경우가 없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이는 시간이 지나고 建國神話에 윤색이 더해지면서 音像이 유사한 ‘쇠(鐵)’의 의미가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2.5 三韓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條에 三韓의 小國名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후에 伽倻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되는 弁韓의 지명은 문제가 많으므로 논외로 한다. 삼한 지역 내에 분포된 소국(部族國家)들의 數와 位置 및 최고 맹주인 진왕과의 관계를 보면 <魏志>를 근거로 하여 엮은 <後漢書>에는 馬韓에 54국, 辰韓에 12국, 弁韓에 12국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 숫자에 대해서는 고증이 구구하여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다.

 

<馬韓>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 분포한 三韓 중의 하나인 馬韓은 충청남도·충청북도, 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에 산재한 크고 작은 54개의 부족국가를 통칭한 말이다. 금마저(金馬渚), 감해국 (感奚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리국(古離國), 구로국(狗盧國), 구소국(狗素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목지국(目支國), 백제국(伯濟國), 불미국(不彌國) 등이 있다.

 

  [비리(卑離)]는 馬韓의 小國에 많이 붙여지고 있는 말로서, 이는 백제의 ‘夫里’, 新羅의 ‘伐’ ‘弗’, ‘火’과 같이 ‘평야, 邑落, 나라’ 등의 뜻을 지니는 後部地名素이다. 주지하듯이 마한의 지배족은 韓界가 아니라 夫餘系일 것으로 國名에 있어서도 夫餘·高句麗 계통의 語彙가 나타난다. ‘古離·狗盧· 狗素’는 북방계 ‘忽’로서 kVrV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전의 형태인 kVtV까지도 보여준다.

 

‘金馬· 監奚’등은 한반도에 가장 먼저 정착한 族屬인 [고마(kVmV)]를 轉寫한 것으로 이후 백제 지역의 전형적인 前部地名素가 되고 있다.

 

   한편, 兩界의 언어를 모두 수렴한 것으로 보이는(일반적으로 공통어휘로 생각되는) 형태도 보이는데, ‘牟盧’는 ‘쇠·?(鐵·金·東·新)’의 고대국어 형태인 ‘sVrV’를 전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의 문화가 초기 철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촌락국가이며, 고조선 이후의 북방촌락들이 철기문화에 의해 복속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에 鐵·金에 대한 중요도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어휘가 전체적으로 자생적으로 발달한 것인지, 아니면 인구이동으로 인한 문화 전파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삼한의 언어에 대한 자료 부족도 문제이지만, 馬韓의 부족적 성격을 규명하기 어려움도 그 이유가 되고 있다.

 

   百濟로 통칭되는 馬韓의 土着民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피지배족인 토착민이 韓系를 이루고, 그 위에 種族의 이동을 통해 지배족속인 夫餘族이 더해졌다는 설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한의 토착민이 만주-퉁구스에서 먼저 남하한 부여계 민족이며 그 언어도 부여계 언어의 古形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한의 언어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차이는 방언적 차이 이상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弁, 辰韓>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에 지금의 대구?경주 지역에 분포한 12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盟主인 경주의 ‘斯盧國’을 위시하여 기저국(己萌國), 불사국(不斯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염해국(騎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우유국(優由國)이 있다.

 

  新羅의 국호에 대한 음차표기를 보면, ‘斯盧/斯羅/徐羅/徐那/徐耶/尸羅/新羅’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東壤’의 의미인 고유어 [?벌(pVrV)]을 음차 표기한 것들로 짐작된다. 이는 新羅가 고유지명을 반포한 것이 아니라 진한의 여러 부족연맹체 중 ‘斯盧國’에서 발전한 것으로 地名이 곧 國名이 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斯盧’는 [sVrV]로서 그 어원이 ‘鐵/金’에 가 닿으며, 특히 弁辰韓의 지명 중 ‘金’字로의 전사가 많은 것을 볼 때 이 지역에서의 國名에는 이미 ‘東의·新’이라는 의미 외에 ‘金’의 의미가 깊게 침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國名에 [미리/밀(彌理)]의 표기가 보여 이것이 고구려어의 數詞 [밀(三)]과 관련이 있음을 볼 때 弁韓의 부여계 관련성을 시사해준다. 또 後部地名素에 해당하는 ‘城’字가 訓讀되어 [기/지]로 읽히는 것을 볼 때 이것은 馬韓 지역의 後部地名素 [지(支·只)]와의 대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馬韓과 弁辰韓의 國名은 여타 다른 初期國家의 지명과 달리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며, 國名의 어휘구성에 있어서 前部地名素와 後部地名素로 나뉘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前部地名素의 경우는 기초어휘에서 벗어나 의미가 고정화되어 가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3. 結 論

 

   이상으로 三國始期 以前에 존재했던 初期古代國家의 名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각 장에서 논의한대로 초기의 국가적 형태가 촌락을 중심으로 하는 과도기적 정치형태에 있었음과 관련하여 그들의 國名도 대부분 지역적 分派가 이루어지기 전의 ‘무리’의 이름임을 알게되었다.

 

   또한 이들 ‘무리’의 別稱도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人)’과 ‘太陽’, 혹은 ‘하늘(天)’과 땅(地)을 의미하는 가장 基礎的인 語彙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國名도 地名의 전체적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여타 지명보다도 이른 시기에 발생한 語彙群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대의 지명연구에서는 地名의 체계를 前部地名素와 後部地名素로 나누어 후부지명소만을 고대국어의 일반명사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로 갈수록 지명 및 국명은 後部地名素 하나로 이루어진 형태를 갖고 있었고, 이는 少數의 일반명사가 동시에 여러 지역체에서 사용되고 있었고, 또 그 이상만큼이나 다양하게 표기되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國名의 특성상 그 지역적 기반이 커지고 통일된 정치체제가 갖추어질수록 始祖와 建國에 대한 神話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國號에 지나치게 큰 무게가 지워진 것이 사실이다. 결국 완전한 고대국가 시기에 이르면 이미 한 國家의 國名은 그 民族의 信仰, 始祖, 그리고 지역적 특색과 엉켜서 본래의 뜻을 알기 어려워지고 마는 것이다.

 

   한편, 國名을 轉寫한 자료를 해독하는 과정도 漢字 借字의 恣意性에 침해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주로 國外의 歷史的 史料에 의해 기록된 만큼 고유어의 漢字 轉寫의 과정에서 그 본래의 의미가 상실된 채, 소리만이 남아서 해석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해석을 어렵게 하는 이유는 中國側의 우월의식에 의한 기록에만 의존하여 왜곡된 결과를 도출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결국 한반도에 존재했던 初期村落國家의 國號들은 古代 韓國語의 系統的 特性을 그대로 간직한 基礎語彙로 이루어진 一般名辭의 核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