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다도(茶道) 정신

2015. 5. 1. 10:55차 이야기

 

 

 

 

 

      

-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다도(茶道) 정신 -

 

 

▶ <차의 전래와 토종차>

 

   신라의 차 역사는 귀화식물인 차나무의 전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 12월 조에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성행되었다.’ 하였고, 선덕여왕(632~646)을 전후해서 차종자가 중국으로부터 불교 전차와 더불어 전래되었다. 

 

   더구나 중국의 기록엔 “신라의 김지장 스님이 금지차(金地茶)와 볍씨를 가지고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에 심어 중국에서는 공경차(空梗茶)라 하는데 차맛이 특이했다 한다.  이는 중국으로 중국차를 가져갔을 리는 없고 우리 고유의 자생차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중구차의 전래와 상반되게 한국차가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신라 고유의 토종차가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이다.  김지장 스님은 진덕여왕 넷째 아들로 지장법사(地藏法師 : 653~752)우리나라 최초라 할 차시를 남겼는데 그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냇가 늪에 달을 불러

       차 달여 사발 속 꽃놀이도 그만 두었네[烹茗구中罷弄花]

 


   신라에서 차를 자급하기 시작한 시대는 832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 시대의 차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차가 운반이 쉽고 변질의 염려가 적은 떡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끓여 마시거나[烹茶] 가루내어 마셨다[點茶]  전라남도 지방에서 전승된 전차(錢茶)가 다경(茶經)에 적힌 떡차의 제다법(製茶法)과 같은 것에 유의할 일이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있던 차의 풍습의 유습(遺習)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 <원효와 설총>

 

   신라의 차이야기를 하면서 원효대사(617~689)와 그의 아들 설총(薛聰)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원효는 스스로 말하기를 ‘스승을 모시지 않고 배웠으며, 마음에 의지하여 저절로 깨닫는다.’라 하였다.  독자적으로 해동종(海東宗)을 창시하는 한편, 차의 공적을 수양의 방편으로 삼고자 원효방(元曉房)을 차렸다.  화정국사 원효의 화정정신이 바로 한국다도정신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설총은 그 아비의 훈도(訓導)에 의해서 출중한 다인(茶人)이 되어 신문왕(681~691)께 화왕계설화(花王戒設話)를 강론하였다.

 


 

▶ <충담 스님의 차공양>

 

   신라의 차와 신라의 화랑은 신라정신의 쌍벽이다.  화랑도는 그 당시 위상대사에 의해 전도된 화엄종(華嚴宗)을 신봉하면 아침이면 맑은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서 문수보살께 공양하는 것을 일과로 하였다. 신라 경덕왕과 충담사(忠談師)의 이야기는 당시의 다도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왕이 누각에 높이 앉아 말하기를 “대덕 스님으로 하여 3월 3일을 기리고자 하노라“했다.  마침 한 스님이 헤어진 장삼차림에 벗 나무통을 지고 남쪽으로 오고 있기에 왕이 “요행이로다“하여 누각 위로 맞아 들였다.  왕이 “그대는 누군가.“라고 묻자 중이 “충담입니다.“하였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인고,”하니 중이 “산 삼화령(三花嶺)에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거기는 왜?” 하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해마다 삼짇날과 중구날이면 차를 달여서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공양하옵는데 오늘이 바로 삼짇날입니다.”하였다.

 

   왕이 기뻐하고 “과인에게 차 한잔을 주겠는가“ 하니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바쳤다.  왕이 즐겨 마시고 말하기를 ”차에 기미(氣味)가 있으며 향기가 풍기도다(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하고 나서 ”그대가 기파랑(耆婆郞)을 기린 사뇌가(詞腦歌)를 지었는가.“ 하니 ”그러합니다“하였다.  왕이 ”하오면 백성들의 태평을 구가할 수 있겠는가“하니 충담이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충담을 왕사(王師)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충담은 이를 사양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있다. 경덕왕(742~764)대에 차의 기미(氣味)와 향을 식별할 수 있었다면, 760년에 저술된 다경과는 상관없이 신라인들은 이미 차의 진수를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우의 다경에 실내 다법과 야외 다법이 있기는 하니만 신라인들은 이미 이를 개발하여 충담이 차통을 메고 다니듯 화랑들이 산천유오(山川遊娛)에 알맞게 야외다구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 <화랑 사선의 수도차>

 

   정영선의 『다도철학』에서는 화랑의 다문화를 논의하면서 6세기 이전의 인물로 추정되는 신라 사선이 경포대와 한송정에서 「석지조(石池爬)」라는 돌못화덕을 사용하여 차를 끓여 마셨다는 기록이 흔히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선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으로 선인이자 초기 화랑으로 이러한 특수한 다구를 써서 야외의 특정장소에서 차를 끓어 마셨다.

  맨 처음 사선의 다조를 글로 남긴 사람은 김극기(金克己,1148-1209)로서 그는 <한송정>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아래와 같이 읊고 있다.

 


          여기가 네 신선이 자유로이 완상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주대는 기울어 푸른 풀 속에 잠겼고

          다조는 내버려져 이끼 끼었네

 


 

   이러한 사서에 남아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신라의 음다 풍속을 살펴 볼 때, 주류를 이루는 계층은 화랑이었다고 하겠다.  대표적 인물로는 6세기 이전의 초기 화랑인 사선과 후기의 화랑승인 충담, 월명, 보천과 효명 등이라고 하겠다.  사선이 경포와 한송정에서 차를 끓인 이유는 이곡이 쓴 『동유기』에서의 내용과 여지승람을 참고하면 아마 차를 끓여 누군가에게 바치고 기도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차를 바친 대상은 사선과 선인들이 떠받들었던 삼신 혹은 셋을 하나로 본 시조삼신(始祖三神)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용운은 사선랑의 행다법을 재구성하면서 그 의의는 풍류도를 닦은 선인들이 한송정이나 경포대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수련을 하는 선가의 다풍을 알 수 있는 독특한 행다법에 있다고 보았다.  선랑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심신수련을 하였는데 그들의 수련장에는 차를 달이는 돌절구와 돌부뚜막, 돌우물과 다구들이 있었다.  항상 차를 달여 마시기 때문에 깨지지 않는 돌로 만든 다구들을 준비해 두고 사용했다.  산수 간에 노닐면서 오악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또 낭도들이 차를 나누어 마시기 편리하도록 그 자리에 고정시킨 다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차 정신>

 

     신라의 차는 도의연마(道義鍊磨)의 방편과 영육일치(靈肉一致)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미덕’으로 요약된다. 아름다움(美)은 화랑의 산화정신(散花精神)으로, 덕성스러움(德)은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사상으로 풀이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라시대의 화랑정신은 이를 「화합(和合). 충절(忠節). 숭경(崇敬). 청결(淸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다도정신도 화(和). 충(忠). 경(敬). 청(淸)이라고 하겠다.

 


 

▶ <고구려 차 문화>

 

   고구려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 고분 벽화 속에 각종 차그릇과 벽돌차가 그려져 잇으며 덩이차도 발견되었다 합니다.  단차를 마셨다는 증거입니다.

 


▶ <백제 차 문화>

 

     일본에 귀화한 백제의 행기 스님(68-749)이나 왕인박사가 불교와 차와 글을 가르쳤다는 일본의 기록이 있습니다.

 

 

 

◈ 고려시대의 다도(茶道)정신


 

 

▶ < 다소(茶所)의 발달>

 

     고려시대의 차의 특성은 20개 안팎의 다소(茶所)에서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다소란 다원(茶園)을 만들어서 채엽하여 직접 제다(製茶)란 후, 왕실 사원 등에 바치기도 하고 팔기도하는 한편, 다도를 수련하기도 하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동을산(冬乙山)에 있었던 평교다소(坪郊茶所)와 하동(河東) 화개(花開)에 있었던 화개다소(花開茶所)이다.

     평교다소는 사원에 차를 바치는 곳으로 다원의 둘레가 4만 7천 보(步)이다.  화개다소는 주로 조정에 차를 바치는 곳으로 다전(茶田)이 장광(長廣) 50리였다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초의 선사(草衣禪師)가 동다송(東茶頌)에, 이규보(李奎報)는 유다시(孺茶詩)에 고증(考證)하고 있다.

 

 

 


▶ < 고려 차 종류 >

 

     우리나라의 차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점차 좋은 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유차(孺茶)[화개다소의 진상차], 납전차(臘前茶) 가지가지의 연고차(硏膏茶), 그리고 세기의 명류인 중국의 구양수(歐陽修) 채군모(蔡君謨) 조선의 김정희(金正喜) 이하응(李昰應) 등이 감탄하여 마지않았던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 : 송 복건성 북원다공소에서 만든 진상차)까지 수입 또는 제다(製茶)하기에 이른다.  그 밖에 자순차(紫筍茶 : 둥글 넙적한 덩이차) 납면차(蠟面茶) 뇌원차(腦原茶 : 용뇌의 향기를 흡착시킨 착향차) 등도 보인다. 

 

 

 


▶ < 다기의 발달>

 

     좋은 차가 만들어지면 거기에 알맞는 다구다기(茶具茶器)가 개발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신비의 비색(秘色)을 발산하는 청자(靑磁)를 위시하여 차맷돌, 은화로(銀爐), 솥 가지가지의 초두와 차술, 차선(茶?), 차시(茶匙), 연분(硏盆) 기타 약 30여 가지에 이른다.  차와 다구다기가 조화를 이루어 차의 삼미(三味 : 色, 香, 味)가 극치에 달하면 또 거기에 걸맞는 다례(茶禮)가 숭상되기 마련이다. 

 


 

▶ < 관제로 편입된 차>

 

     고려시대에는 차를 관제(官制)로 다스렸다.  다방(茶房) 행노군사(行爐軍士) 다담군(茶擔軍)등이 그것이다.  고려의 큰 명절은 연등회(燃燈會 : 음력 2월 15일)와 팔관회(八關會 : 음력 11월 15일)였다.

 

 


▶ < 이규보의 차정신 / 다도일미(茶道一味) >

 

      먼저 고려시대 이규보의 다시 중에서 다도정신[茶道一味]을 잘 표현한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도(道)는 유교나 불교가 아닌 도교 쪽이다.

        

          밤은 깊어 물시계 칠 때 그대에게 부처 말씀과 차이를 묻노니 말해 다오.

          나는 긴 세월 정진했으나 스스로 구하기 어려웠도다.

          그대를 잠시 보고 나니 모든 것이 비임[空]을 알메라.

          한퇴지(韓退之)의 쌍조부(雙鳥賦)는 싫증나고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구미에 맞노라.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기로운 차는 바로 도의 맛이며

          흰구름과 밝은 달은 곧 나의 가풍이로다.

 

 다음 시도 역시 다도일여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나쁜 평판을 모두 허령한 마음 밖에 던지고 나니

          오묘한 도는 오히려 눈앞에 있구나.

          돌솥에 끓는 차는 향기롭고 흰 젖이 뜨고

          벽돌 화로에 피는 불은 저녁놀 같이 붉구나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호수와 산을 유랑하는 늙은이가 되리라

 


 

   천병식의 한국다시작가론(韓國茶詩作家論)에서는 이 시에 대하여 햇 차의 신선함, 차의 빛깔, 차 솥에 물끓는 소리가 마치 솔바람 소리 같다는 것 그리고 찻잔에 뜨는 무늬의 아름다움 등 찻자리에서의 모든 일들이 거의 다 묘사되어 있다고 논하였다.


 

▶ <고려의 차정신 / 망형(忘形) >

 

    김명배는 고려의 다경을 크게 보아 1. 망형(忘形) 2. 다선삼매(茶禪三昧) 3. 역리의 음양사상 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선 망형사상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茶詩를 들고 있다.

 


강변을 방랑하니 저절로 형체를 잃고 (이규보)

        

 

무너지듯 평상에 누으니 문득 형체를 잊고 (임춘)

    한 낮의 베개에 바람 불어오니 잠이 절로 깨누나

 


나무의 이끼와 흰 납의 차림에 이미 형체를 잊고 (이숭인)

 

이처럼 고려시대의 다시를 살펴 볼 때 자기의 형체를 잊고 자연에 합일되는 초월적 정신이 표현되었음을 이해하겠다.

 


 

▶ <고려의 차정신 / 다선삼매(茶禪三昧) >

 

   그리고 이규보는 「장원 방연보의 화답시를 보고 운을 이어서 답하다.」라는 다시에서 세계 최초로 다선삼매(茶禪三昧)의 경지를 제창하고 있다.

 


          초암의 다른 날 선방을 두드려

          몇 권의 오묘한 책 깊은 뜻을 토론하리

          늙기는 했어도 오히려 손수 샘물 뜰 수 있으니

          한 사발은 곧 이것이 참선의 시작이라네[一구卽是參禪始]

 


    이처럼 이규보는 차를 통해서 참선의 경지에 이르는 지극한 다도정신을 느끼고 표현한 다인이었다. 이러한 다선삼매(茶禪三昧)의 정신이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다도정신이라 하겠다.

 


 

▶ <고려의 차정신 / 역리정신 >

 


          돌솥의 차는 비로소 끓고

          풍로불은 빨갛게 피었구나

          물불[坎離]은 천지[乾坤]의 쓰임이니[坎離天地用]

          곧 이 뜻은 무궁하도다

     위 시는 정몽주의 「역경읽기」라는 다시(茶詩)인데 여기서 역리를 도입한 점이 눈에 띤다. 역경(易經)의 설괘전에 따르면 감리의 괘는 물, 불이다.  정몽주의 다도정신은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천지의 정기를 느끼는 역리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겠다.

  다산 정약용도 다음의 다시에서 역리를 밝히고 있다.

 


         굽지 않은 벽돌의 작은 차 부뚜막은

         불괘와 바람괘의 형상일세[離火巽風形]

         차는 끓고 산동자는 조는데

         간들거리는 연기는 오히려 절로 푸르고나

 


 

▶ < 차산지 차 농민의 참상 >

 

     궁중과 양반들이 차로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요즘말로 웰빙(well-being)을 즐기고 있을 때, 차산지에서 차를 바치는 농민의 어떠했을까?  이규보의 시를 보자

 


         남쪽 사람들은 일찍이 성난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아

         위험 무릅쓰고 칡, 머루 덩굴 헤치며 산속 깊이 들어간다

         일만 알을 따서 떡차 한 개 만드니

         떡차 한 개 값이 천금과도 바꾸기 어렵네


  또 이렇게 참상을 읊고 있다.

  

         화개에서 차 딸 때를 말해 볼꺼나

         관리들이 집집마다 늙은 이 어린 이 죄다 몰아내

         험준한 고개 넘고 넘어 간신히 따 모아

         머나먼 서울 길 재촉에 어깨가 벗겨지네

         이야말로 백성의 기름과 살이 아니랴

         만 사람을 저미고 베어 얻게 되나니 


   잘못된 제도에 녹차인은 할 말을 잃은 이야기다

 


 

◈  조선시대의 차와 다도정신


 

 

▶ < 서산대사 / 청허(淸虛),차선불이(茶禪不二) >

 

    서산(西山)대사는 중종 15년 (1520년) 3월 26일 안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요, 호는청허(淸虛) 또는 휴정(休諍)자는 현응(玄應)이다.  묘향산 에 오래 계셨으므로 서산대사라 하였다.  그의 시 한 편

 


        낮에는 차 한잔하고

        밤이 되면 잠 한숨자네

        푸른 산 흰 구름

        더불어 무생사(無生死)를 말함이여

 


  또 다른 시에

 

        스님 몇 명이 있어

        내 암자 앞에 집 지었구나

        새벽 종에 함께 일어나고

        저녁 북에 함께 잠든다.

        산골 물 달과 함께 길러

        차 달이니 푸른 연기 나고

        염불과 참선일세

 


     걸림 없는 무애(無碍)와 청허(淸虛)함이 잘 나타나 있다.  차가 곧 수행이니 차-염불-참선의 차선일체(茶禪一體), 다선불이(茶禪不二)의 삶과 정신이 표현되어 있다.

 


  또 차선불이(茶禪不異)는 후대의 추사(秋史)도 산집의 선승을 능가하니

 

        조주(趙州)가 끽다거(喫茶去) 소리치니

        연꽃을 손에 쥐고 들어 보이네

        할(喝) 소리 귓 뒤로 천천히 마실 제

        봄바람 부는 어느 곳 산집 아니리

 


▶ < 차로 쌓은 우정 >

 
    이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뺏어 먹는데 이골이 난지라 다음의 ‘’청차(請茶)“를 보면 반 협박 속에 차를 바라는 간절함에 반어적인 넘치는 우정을 볼 수 있다.  초의는 추사와 생일이 두 달 빠른 동갑내기 차벗이라 허물없이 을러댄다.  다음에서 보는 다산이 아암에게 차를 구한 예의를 갖추고 정중한 걸명소와 대비된다

       

        몇 번 편지에도 종내 답장 없는 걸 보니

        이젠 아예 내가 보기 싫은 게로군

        나 보기 싫은 거야 당신 마음이니 어쩔 수 없고

        당신이 들여놓은 차 고질병만은 책임지게

        차를 마시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으니 말 일세

        답장은 필요 없고

        어서 차나 보내게

        숨겨둔 것 작년치 까지 곱쟁이로 보내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닫게

        차 안 보내면 ‘마조할(馬祖喝) 덕산봉(德山棒)'이니

        어찌 당할텐가

        이 고함과 뭉둥이를 수백 천 겁 피할 수 없을 걸세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네

 

 다음 편지에선 차를 받고는

       

        인편에 느닷없이 편지와 차 받았소

        차 향기에 문득 눈이 열림을 깨닫겠구려

        편지가 있는 지는 살펴보지도 않았네

 

또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차는 병든 위를 상쾌하게 하여 골수에 미치는데

        하물며 침울한 요즈음에 느끼는 차의 은혜는 어떠하겠습니까?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끼쳐 주는 두터운 그 뜻은 평생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차벌레라 차욕심은 어쩔 수 없었는 지 급기야 차를 중간에서 가로채기도 한다.  차를 보낼 때가 많은 초의가 백파(白坡)에게 보내라고 준 차다

       

        나누어 주라는 차, 백파에게 주기가 너무 아깝네.

        그 큰 싹과 고아한 향미가 너무도 뛰어 나네

        한 포만 더 보내 주게

        병중에 쓰는 글이라 양해하게

 

    여기서는 칭찬하고 병 핑계로 동정심까지 유발한다.  공갈을 치다 추켜세우다 어쨌든 차 몇 봉지 얻으면 당대의 명필을 휘둘러 글씨를 써 보냈다.  불후의 명작 “명선(茗禪)”이나 현재 대흥사에 걸려있는 운백복(運百福)이란 현판글을, 제주도에서는 반야심경 한 벌을 써 보내기도 했다.

 


 

▶ < 초의스님의 차정신 / 중정(中正) >

 

   다음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의 다신전(茶神傳), 동다송(東茶頌)과 그의 다시(茶詩)에 나타난 다도정신(茶道精神)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선사의 저서 동다송 29송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비록 물의 체(水體)와 차의 신(茶神)이 온전타 하여도

       오히려 중정을 잃을까 두렵네

       중정을 잃지 않는다면

       건령(健靈)이 함께 하리라

 


     여기에서 선사는 차의 정신으로서 중정(中正)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송에서 주를 달아 다도를 밝인 바, “다사 전반에 관해 그 도를 다해야 하는 것이 다도를 다하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 이 요약했다.

       

        차를 딸 때는 때맞춤의 묘를 다하고

        차를 만들 땐 정성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으며

        우릴 땐 중정(中正)을 얻으면

        물[體]와 차[神]이 서로 어울려[相和]

        건전함[健]과 신령함[靈]이 함께 하니

        이에 이르러 다도를 다했다 하리니

 


  또 다른 시에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라네

        .............

       

        물을 길러 가볍고 부드러움 맛보니

        진수(眞水)과 정다(精茶)가 어울려 체(體)와 신(神)이 열리네

        거칠고 더러움 모두 없애 다하면 정기(精氣) 드나니

        대도(大道)를 이룸이 어찌 멀리요

        차를 영산 모든 부처께 바치면서

        범률을 헤아려 보니

        차의 참된 모습은 묘한 근원을 다하고

        묘한 근원 집착 없으니 바라밀이라네

 


 

   위 시에서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차(茶)의 성(性)을 사악함이 없고 진성(眞性)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다도관(茶道觀)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사무사(思無邪)라 하겠다.  또한 깨달음에 이르는 집착 없는 바라밀로 표현했다.

 


 

▶ < 다산의 차정신 / 자득(自得) >

 

   을축(1805)년 겨울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아암 혜장(惠藏)에게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그네는 요즘 차약 겸하여 밥 먹듯 차를 마십니다

 


     차 글의 묘법은 전부 육우 <다경삼편(茶經三篇)>과 통하고,

     병든 큰 누에는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을 다 비웠소.

     비록 정기 뺏겨 수척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 풀고 흉터 없애기 위해 이찬황의 버릇을 얻었소.

    

 

     아침에 차의 꽃 일어나니 맑은 하늘 흰 구름인 듯 희고 희고,

     낮잠 막 깨어나 차를 내니 밝은 달이 푸른 시내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하오.

     잔 구슬인양 눈발 날리는 산 등불 찻잔에 자줏빛 어린 차순 향기 그윽하고

     들에서 새 샘물 길러 힘찬 불로 다리니 신령께 바치는 흰 토끼의 맛이네

    

    

     꽃 자기 홍옥의 차완 호사는 비록 노공에 못 따르나

     돌솥의 푸른 연기의 담소함은 한비에 미치지 못하는데

     게눈, 고기 눈에 비기던 옛 선비의 취미만을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 봉단의 왕실이 준 진귀한 차는 이미 바닥이 났소.

    

 

     나물 캐고 땔감도 못 하는 병이 나서

     애오라지 걸명(乞茗)의 정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고해를 건너는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을 뭉친 차를 몰래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뜻을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풀어 주소서.

 


 

   위 시는 차로 답답한 심경을 달래면서도 아름다운 차생활의 서경과 서정이 잘 묻어난다.  낯선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에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한 다산을 떠 받쳐 준 힘은 차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산골물 차가운 소리 대밭을 감싸오고

       봄은 뜨락의 매화 한 가지에 와 있네

       아름다운 즐거움 여기 있으나 말할 곳 없어라

       맑게 갠 밤에 여러 번 일어나 어정거리네

       산 정자엔 도시 쌓아 둔 책 없고

       오직 이 꽃길과 물길 뿐이네

       새 비 내린 귤숲은 자못 아름답구나

       바위 샘물 손수 떠서 찻병을 씻네

       약 절구질 잦으니 곰팡이는 없건만

       드물게 달이는 차풍로엔 먼지만 있네

 


 

    기약없는 귀양살이 극한상황을 소요(逍遙)와 자득(自得)의 드높은 정신으로 극복함이 보이는 시다 정신적 소요는 현실을 관조(觀照)하고 긍정하는 달관(達觀)의 경지이다.  온갖 욕망을 버리고 유유자적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   자득은 주어진 여건을 긍정하고 수용하는 정신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정신이다.

 

    우리의 자득이란 다산처럼 절망적인 유배생활을, 선택한 운명인 양 역설적으로 극복하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한 품성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선비 다인들은 차와 더불어 검박하게 살아감으로써 자연과 쉽게 동화되어 인간이 자연임을 체득하는 정신적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 < 조선의 차정신 / 비우정신 >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

       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

       -- (중 략) --

       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

       한가롭게 게눈차를 끓인 다네

 


     위 시는 우리나라 다인들 중에서 다사의 달인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의 다시이다.  여기에는 지붕이 뚫린 초가집에서 살며 한가로이 글씨를 쓰며 차를 끓여 마신 청빈한 서거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서거정은 궁핍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조용하게 책을 읽고 차를 달이는 유유자적한 달관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정신이 과거 선비들의 맑은 청백리 정신이라 하겠다.

 

   다도에는 오관(五官)이 동원되는 외에도 그림 ·노래 ·춤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잎차 중심의 조선시대에는 다가들이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청담을 나누는 취미를 즐겼다.  차 마시기의 흥취는 유독한상(幽獨閑賞)에 있었다.  이 때 다가들은 소요(逍遙), ·자득(自得),·무집착, ·비우사상(庇雨思想) 등의 심상으로 다도를 수련하였다.

 

 

    비우사상에 의한 다도정신은 안빈낙도와 청백리 사상을 함께 담고 있는 차때[茶時]라는 미풍양속으로 표출되었다.  비우사상이란 정승 유관(柳寬)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우산각(雨傘閣)의 고사에서 비롯되어 그의 외증손인 이희검(李希儉)으로 이어지고, 그의 아들인 이수광(李光)이 재건한 비우당(庇雨堂)에 이르러 성숙된 청빈사상이다.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사헌부의 관리들이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차때를 적으면서 사헌부 감찰의 검소함을 역설한 것도 비우사상과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다도정신은 시대별로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의식은 무아의 경지이다.  왜냐하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맑은 것, 아름다운 것, 깊은 것이 샘솟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 <선비들의 차생활>

 

   차의 산지로 유명한 필자의 태생지 전남 보성 차밭밑 다전(茶田)부락에는 다잠정사(茶岑精舍)에서 차를 마시며

교유하던 멋진 풍류 시가 있다.

 


한 작은 누각에 아름다운 차나무는 빽빽하고                            嘉木叢叢一小樓

     

주인과 손님 함께 어울려 즐겁게 노니네                                 主賓結社足優遊

    

반평생 맑게 닦아    벼슬없이 지내고                                     半世淸修宜白面

     

세 때 차를 다려 올려 마시곤 하네                                         三時煎供走蒼頭

      

붉게 달아오른 화롯가에서 세월을 보내고                                紫汞爐邊消歲月

    

국화 피온 책상 머리에서   춘추를 가르치네                             黃花案上講春秋

   

그대와 나 사이 숨어 흐르는 맑은 멋스러움                              如何分得淸風味

      

어찌 나눠 가지리                                                              也與君吾作隱流

 


 

▶ < 차로 빌어본 소원>

 

     한편 다소에 차를 만드는 서민들의 차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  민요 한 자락을 보자.  경남 양산군 통도사 절 주위는 나라에서 지정한 다촌이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차는 약이요, 소망의 대상이였음을 차 노래에서 알 수 있다.

        

          둥개둥개 / 두둥개야

          금자동아 / 은자동아

          천리금천 / 내새끼야

          자자암에 / 금개동아

          영축산록 / 차약일세

          좀티없이 / 자라나서

          한양가서 / 장원급제

          이낭자의 / 소원일세

          비나이다 / 비나이다

          부처님전 / 비나이다

 


비슷한 소원으로 차민요를 채집하던 김기원(金基元)씨가 함양군 마천 지리산 골짜기에서 채집한 민요를 보자

        

          초엽 따서 상전께 주고

          중엽 따서 부모께 주고

          말엽 따서 남편께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지어

          봉지 봉지 담아 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경상감사 되어주오

 


  해방 후 어지러운 정국 1947년 초여름 어느 날 육당 최남선이 광주 무등산 증심사 자락 춘설헌의 의재 허백련을 찾아 쓴 시의 소원을 보자

        

          천고의 무등산이 수박으로 유명터니

          홀연히 증심 춘설 새로 고개 쳐들었네

          이 백성 흐린 정신 행여 밝혀 줍소서 

 

 

 

 

◈ 초의스님의 다도도(茶道圖)

 

 

 

(1).초의(草衣)스님을 왜 선사(禪師)라고 부르는가에 대하여는 분명한 대답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존중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조선조 초기를 제외하고는 왕으로부터 스님에게 대사(大師)라는 호칭을 내려받는 일이 아예 없었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오직 초의 스님만이 헌종(憲宗)으로부터 스님의 나이 55세(1840년)되던 해에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게 되어 '초의 선사'라 불리어 오고 있다.

 

   초의 선사(1786∼1866)는 오늘의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저수지 뒤편 원왕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장씨, 본은 흥성(興城), 이름은 의순(意恂), 자는 중부(中孚), 초의(草衣)는 불가의 법명이다.

 

   초의 선사는 평생동안 문기(文氣)있는 선시(禪詩)로서 선풍(禪風)을 진작시켰으며 무엇보다도 다도(茶道)의 정립자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추앙을 받아오고 있다. 다도를 정립하되 불가인 이면서도 불교에 편벽됨이 없고, 다사의 정도(茶史之正道)를 바르게 파악하며 빼고 보탬이 없이 그대로 다도를 정립하였다.

 

 

(2).초의 선사의 대표적인 글은 68행의 칠언시(七言詩)로 된 5백 34자의 <동다송(東茶頌)>이다. 바로 이 시가 다도를 정립한 대표적인 글이다. <동다송>의 68행 전체 내용은 옛날의 역사적인 사실과 고문헌 속의 시구를 인용하여 모두 31송(頌)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다송>의 31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차에 관하여 6송에 불과하고 나머지 25송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오는 다사(茶史)의 일반을 철학적이고 도학적인 차원에서 기록하였는 바, 다도를 정립한 글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차에 대한 6송 중의 한가지는 제 19송에서 "색(色), 향(香), 기(氣), 미(味)가 중국 것에 비하여 뒤지지 않고, 중국의 차는 맛으로 뛰어난 것과 약효가 높은 것이 따로 있으나 우리의 차는 맛과 약효의 두 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으니 만일 당나라시대에 {다경}을 쓴 육우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나의 말이 옳다고 할 것이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동다송>의 핵심이 되는 글은 제 29송이 될 것이다.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한 경지가 있어서 다도(茶道)가 있음이니 초의 선사는 다도관의 핵심을 <동다송>의 제29송에서 피력하여 놓았는데 칠언시(七言詩)가 아닌 파격 시로 다음과 같이 읊어 놓았다.

 

 

體神雖全      몸과 정신이 비록 온전하여도
猶恐過中正    오히려 중정을 지나칠까 두렵도다
中正不過      중정을 지나치지 않는다면
健靈倂        건강함과 영험스러움이 함께 할 것이다.

 

 

   이 시에서 다도란 중정(中正)을 지킴으로서 몸에는 신령스러움을 얻고 건강에는 영험스러움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정이란 물론 주역에서 가장 안정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효위(爻位)를 말한다. 그러나 중정이란 얻기도 어렵고, 얻는다 하여도 지켜 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꾸준한 수양으로 정진을 거듭하므로서 몸은 신령스러운 경지에 다다르고 건강은 영험스러움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다도관(茶道觀)을 확립하는 것이다.
초의 선사가 이 시의 끝에 주석을 붙이기를,

 

   "차를 채취하는 데는 그 오묘함을 다하여야 하고, 차를 만듦에는 그 정성을 다하여야 하고, 물은 그 참됨을 얻어야 하고, 차를 끓이는 데에는 그 중정을 얻어야 한다. 몸과 정신이 서로 고르고 건강과 영험스러움이 함께 하는 것을 다도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如神相和 健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고 하였다.
이렇듯 초의 선사가 말하는 다도관의 핵심은 중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알기 쉽도록 도식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차를 따는 데 묘한 경지에서 따는 것을 '묘리'라 한다.
차를 만들 때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야 맛좋고, 약효가 뛰어나며, 향기가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물의 품질에는 진수(眞水)가 있는데 이 진수에는 여덟 가지 덕(八德)이 있으니 가볍고(輕), 해맑고(淸), 시원하고(冷), 부드럽고(軟), 아름답고(美), 냄새가 없고(無臭), 탈이 없고(無患), 맛이 골라서 비위에 맞는 것(調適)이 진수의 팔덕이 되는 것이다.


   차를 끓이는 표현을 중국에서는 삶을 자(煮), 혹은 끓일 전(煎)을 사용하고 있으나 초의 선사는 독특하게 차를 우려 마시는 포법(泡法)을 말하였고, 물을 끓이는 불길은 고른 불(火齊)로 끓이라 하였다.

 

   물과 불의 작용에서 차의 중정(中正)을 얻어 마시면 곧 몸과 정신이 고르고 건강과 영험이 함께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다도를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3). 중국의 다성(茶聖) 육우의 자는 홍점(鴻漸)이고 우리의 다성 초의 선사의 자는 중부(中孚)인 점을 살펴볼 때에 두 다성이 천년세월을 달리하여 이 세상에 왔건만 약속이나 한 듯이 주역의 경문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 어휘로 자를 삼았다.

 

   홍점(鴻漸)은 여자가 시집갈 때 육례를 갖추되 질서 있게 한다는 의미이고, 중부(中孚)는 주역 61번째 괘이름으로 중이 실하고 미더워서 숲속의 동물과 물속의 고기까지도 믿고 감동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 다성이 주역의 경문에서 어휘를 골라 자로 삼아 썼다는 것은 그만큼 주역의 이치에 따랐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4)  {다경}에서 차나무의 자라는 모습을 그물 한(罕)자를 써서 '한무(罕茂)'라 표현하였는데 '차나무가 잔가지가 많고 잔가지끼리 얽혀있는 모습이 마치 그물 같다'는 뜻이다 .
한무(罕茂)라는 어휘와 주역에서 여자의 절개를 표현하는 '몸은 세우되 그 방소를 옮기지 않는다(立不易方)'는 어휘와 부합하여 전래 결혼풍습이 생겨왔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명나라의 학자 낭영(郎瑛 : 1487∼1566)이 저술한 칠수유고(七修類稿)에 기록되기를 '여자가 시집갈 때에 그 부모는 잘 여문 차종자를 내려주고 여자는 혼례 품으로 차종자를 가져가서 시집식구에게 바치듯 챙겨 올린다' 하였다. 거기에는 '여자로서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음탕한 인욕을 없앤다(存天理 滅人欲)'는 의미가 있는데 전래적으로 차종자를 뿌려서 자라면 그대로 키우되 다른 흙에 옮겨 심지 않는 풍속처럼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다른 남자에게 옮겨 살 수 없다는 '종일이종(從一而終)'의 의미가 있고, 또한 '차나무 가지가 무성하여 그물처럼 엉키듯 재산을 모으고 자손을 번창시키면서 살아가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과연 주역의 이치는 차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오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이 글은 德田 장봉혁 지음 <學易綜述-茶文化>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