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발해와 고려와의 관계

2015. 6. 21. 04:04우리 역사 바로알기

 

 

 

 

 

     

펌) 발해와 고려와의 관계
글쓴이
셀라맛자린
 
  • 2004-12-04 12:40:09

 


 

 




   발해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고려는 건국 초부터 특히 후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거란에 의한 발해의 멸망이라는 요동상황의 격변에 대해 각별하게 주의하여 적극적으로 대하려 했다. 이에 고려를 건국한 고려태조 왕건은 거란과 수교를 거부하는 한편 중국의 후진(後晉)과 연계해서 거란과 대항하려 했고 동시에 발해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한 특수 상황에 대해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거란이 사절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내오자 고려태조는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연화하였다가 갑자기 딴마음이 생격 맹약을 배신하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한 짓으로 더불어 멀리 관계를 맺고 이웃으로 삼기에 부족하다 하면서 드디어 교빙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자 30인을 바다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묶어두어 모두 굶어죽게 하였다." 이처럼 고려태조는 거란과 수교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후진과 결맹해 거란을 공격할 계획까지 시도했으며  수많은 발해 망명인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중략=========(수많은 발해인이 고려로 망명해온 기록나열)===============================

 

   하지만 이러한 대응은 모두 왕건의 말처럼 발해와 고려가 친척 혹은 인척 사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 건국자들이 심모원략한 결과였을 뿐이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서문에서도 거란은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당연히 먼저 수호하고 그들도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구하였다. 우리가 그들과 교빙을 끊은 것은 그 나라가 일찍 발해와 연화하였다가 갑자기 딴마음을 품어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태조께서 그들의 무도함이 심하여 교빙할 바가 못된다 하여 그들이 바친 낙타를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으셨다. 그 심원한 계책은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고 위태로워지기 전에 나라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되자 그 세자 대광현 등이 우리 국가가 의를 들어 일어났음을 보고 그 무리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속히 도망쳐 왔다. 태조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깊어 그를 맞이하고 대우함이 매우 두터워 성명을 내려주고 종적에 오르게 하였으며 그 본국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도 있게 하였다. 그 문무 참좌이하도 모두 작명을 더하여 주었으니 태조께서 망한 나라를 존속케하고 끊어진 사직을 잇게 하는 일에 힘쓰시며 먼 곳에 있는 사람을 불러 내복케 할 수 있었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고려사 최승로전)하여 고려태조가 꾀한 일련의 거란, 발해대책이 발해와의 인척관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 요동에서 전개된 국제 사회의 격변과정에서 생존하려는 신생국 건립자의 심책원계였음을 강조했다.

 

   또한 고려는 발해유민인 대연림과 고영창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미묘하게 접근하였는데 고려사에는 거란의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의 곽원이 기회를 틈타 압록강 동안을 점령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과 여러 신하들은 저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이 어찌 우리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단지 성지를 수리하고 그 변화를 살필뿐이라 하여 왕이 이를 따랐다.라고 전하며  이후로도 발해유민들이 고려에 칭신하고 군사를 청하였을때에도 소극적이었으며 김가를 거란에 보내 동경의 수복을 축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가 발해 유민이 세운 국가와의 수교와 협조를 기피하면서 한편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요동인 집단의 망명 유입을 (발해52인 해89인 한 6인 거란18인 숙여진 8인이 요에서 내투하였다. 고려사)계속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고려의 발해 유민 수용이 종족적 근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사실 발해인의 고려 망명에 대해서는 제왕운기(우리 태조8년 발해인이 온나라를 들어 서로 이끌며 왕경에 내투하였다), 조선사략(거란이 발해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동단국으로 만드니 세자와 대신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에 상당수의 발해인과 그 중심세력이 고려에 항복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으나 이말은 매우 과장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925년 부터 1117년까지 고려에 내항한 대씨의 후예로 그 성명을 기재한 자는 10명이 되지않고 구신등도 20인을 넘지 않으니 다수는 동단국에 남아서 임직했다. 당시에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의 총계는 10만여명을 크게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멸망 직전 발해의 총 인구가 3백만 정도였다는 연구 성과(위국충 발해인구고략)를 참고한다면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 수는 발해 인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의 인구는 대부분 요동의 동부에서 요양지방으로 옮겨졌지 고려방면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발해가 멸망된 직후인 928년 동단국민을 옮겨 요양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를 승격시켜 남경으로 삼았다(요사38 지리지2)  1029년에 대연림이 요동이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포위를 당한지 1년만에 항복한 뒤에도 모두 京北으로 옮기고 현을 설치하여 거주하였다고 한다. (요사 37지리지1) 이외에도 요사 지리지에는 발해의 인구가 요동의 중심부로 서천했음을 전하는 기록이 많이 있어 발해인구의 한국유입을 근거로 발해를 한국을 형성하는데 주체적 역할을 한 국가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없다. p.s. 인터넷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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