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허스님의 차"와 왜곡된 선암사의 진실

2015. 7. 26. 11:46차 이야기

 

 

 

 

 

       지허스님 차 논쟁|우리들의 이야기

조계산 | | 조회 5 |추천 0 | 2013.11.03. 09:58 http://cafe.daum.net/Jogyesa/LxJA/3 

 

지허스님의 차"와 왜곡된 선암사의 진실| 綠茶세상

운상 | 조회 17 |추천 0 | 2003.08.05. 14:13  

// ≪사실 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자기의 잣대와 견해를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지허스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지허스님의 차」의 내용 중 지허스님의 선암사 칠전선원차인 「한국전통자생차」 즉, "작설차 중에서도 자색(紫色)을 띠는 차"만이 작설차(雀舌茶)이고 그 외 "대밭이나 보통 차밭 그리고 자색을 띠지 않은 차는 작설차가 절대 될 수 없는데도, 그런 차를 혼동해서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식품명인」제도 시행 등에 있어서 작설차 기능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등 희귀(稀貴)한 작설차의 존재마저 지워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당국과 일부 업자들의 몰인식"(지허스님의 차; 106쪽)이라고 비난하는 내용 역시 과감하게 버려야 할 지허스님만의 잣대와 견해는 아닌지!


   여연스님의 "차 맛 알고 써야…."도 옳다고 했는데 여연스님이 제기한 문제는 대원사의 차종류 뿐 만 아니라 차나무 수령, 초의선사에 관한 내용 및 다맥의 존재 여부 등 여러 문제가 있는데 여연스님의 내용이 옳다면 양쪽 다 옳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고 지허스님의 책 내용이 잘못됐다는 이야기인지? 바닷물, 샘물 또 조주차(趙州茶) 등 선문답만 하여서 나같은 속인들은 진실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 주관이나 논리에 관한 문제라면 몰라도 사실(史實)에 관한 일은 책의 발간 전에 이미 확인이 되었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선암사와의 인연이 있어서 선암사에 관한 일들을 일반 독자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 또한 「지허스님의 차」가 발간되어 기대가 많이 되었으나 필자가 아는 진실과는 내용이 너무 동떨어진 데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선암사의 칠전선원(七殿禪院)은 선암사 칠전선원다맥1세라고 하는 침굉(枕肱)스님(1616∼1684년) 열반 114년 후인 정조22년(1798년)에 해붕(海鵬)스님을 화주(化主)로 신건(新建)되었으므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1세 침굉스님부터 5세 환허(幻虛)스님(1690∼1742년)까지는 칠전선원이 없었으므로 칠전선원장도 없었고 칠전선원 다맥도 존재할 수 없었다. 다맥에 대해서는 「다성초의선사와 대둔사의 다맥 :임혜봉스님 편저」의 첫 부분 '책의 시작하는 말' 중의 "초의선사에서 응송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포함하여 이 책에서 말하는 다맥이란, 사자상승(嗣資相承 : 스승과 제자간 법을 이음)하는 법맥을 포함하여 선맥을 일컫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단지 대둔사의 음다풍(飮茶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는 의미에서 다맥이란 용어를 쓴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내용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선곡 지우(禪谷 智雨)스님은 1947년부터 1968년까지 4대동안 주지스님을 역임하다 입적하였으나 차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해방 이후부터 1976년 무렵까지 선암사의 차밭이 묵혀져 거의 황폐화되어 있었고 1977년 이후 당시 주지스님이셨던 용곡(龍谷)스님과 그 자제인 신광수(申珖秀) 명인(야생작설차부문 전통식품명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당시의 복원과정이 기록과 사진 등으로 상세하게 남아있어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상기 사실 외에도 수많은 오류(誤謬)가 있으나 지면관계로 이만 약한다. 단, 일반독자는 책에 대한 내용을 거의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으나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 잘못된 내용은 반드시 그 사실이 밝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당국의 몰인식을 대신해서 (사)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가 지허스님을 "전통차 법제 인간문화재"로 지정한데 대해 축하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조주스님의 밑바닥 없는 찻잔에 차를 가득 부어 마시고 파안대소하며 활활자재하자"는 말은 모든 사실들이 명백하게 밝혀진 다음에야 가능한 일 일 것이다. 진실은 따로 있는데 즉, 한 책 가득한 오류가 몇 줄의 모호한 글로 적당히 넘어가거나 호도(糊塗)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로 저자 측에서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대로 바로잡음이 옳겠지만 그러한 여건이 안되거나 의향(意向)이 없다면 누군가라도 그 일을 반드시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요즘 시중에는 선암사의 주지인 지허스님이 저술 혹은 구술하고 한겨레신문 여론매체부장인 최성민 기자가 기획한 "지허스님의 차"라는 책이 화제다. 이 책은 선암사의 칠전선원차와 선암사(다맥)를 주요소재로 한 책이어서 우리 차와 불교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이 읽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어릴 때부터 선암사와는 여러 인연이 있어서 선암사와 관계된 일은 딴 독자보다는 많이 알고 있고, 또 우리 차의 애호가인지라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일지암 여연스님이 여러 문제를 제기하였다시피, 필자 또한 필자가 아는 사실들과는 그 내용이 너무 차이가 나므로 그 내용을 얼마 전 인터넷불교신문 자유게시판과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의 홈페이지에 올렸으나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응할 가치가 없어서인지, 사실에 대한 외면인지 잘 모르겠으나 잘못된 내용을 어떠한 해명이나 반론 없이 그대로 방치함은 오류와 왜곡을 그대로 믿으라는 저자 측의 독자에 대한 강요이고, 횡포이며 무례가 아닌가! 


   또한 잘못된 기술(記述)도 문제겠지만 사실(事實, 史實)이 아닌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여 기술함은 조작(造作)이나 날조(捏造)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필자는 사실과 다르게 기술된 부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겠으므로 저자, 아니면 기획자 측에서라도 해명이나 반론을 꼭 해주기 바란다. 또 출판사도 출판과 판매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좋은 책, 양서출판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을 것이므로 잘못된 내용과 왜곡된 부분은 바로 잡아야 하고, 조작이나 날조된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사과하고 정정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의 세계적인 언론사인 뉴욕타임스의 날조된 기사와 기자에 대한 사과문 발표와 그에 따르는 조처는 우리사회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 1. 자생차밭 ; 순수한 자생차밭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과 벌교 징광사지 부근과 순천 금둔사, 보성 대원사 등이며 나머지는 호남과 경남 일대의 사찰등에 돌보는 이 없이 버려져 있다. ( 지허스님의 차 45쪽)


▶ 선암사 칠전선원 차밭 ; 선암사의 재래종 야생차밭은 해방이후 묵혀져 거의 황폐화 되었으나 1977년 이후 당시 주지스님 용곡스님과 신광수명인(申珖秀名人은 야생작설차부문, 박수근명인은 수제녹차부문으로 국내 2인뿐임)에 의해 복원되기 시작한다. 〔참고 ; 『승주군지』, 승주군 /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차밭복원기록(노임지급장부,사진 등) / 한국일보 1982. 10. 28.〕
▶ 벌교 징광사지 차밭 ; 징광사는 조선 영조46년(1770년) 화재로 전소된 후 폐사(廢寺)됨. 차밭은 공세(貢稅)등으로 따로 남아있을 수 없다. 재래종 차나무는 약간 산재(散在)했을 것이나, 상품화는 불가능함. 1980년 이후 한상훈(1998년작고)씨에 의해 선암사, 화엄사 등지에서 재래종 차 씨앗을 구해 파종, 차밭조성을 시작한다.〔참고 ; 『보성문화』, 보성군 1999. 8.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순천 금둔사 ; 금둔사는 1597년 정유재란시 화재로 전소된 후 폐사. 1996년 이후 지허스님이 1만 5천평의 야산에 차밭 조성. 〔참고 ; 한겨레신문 2002. 12. 9.〕
▶ 보성 대원사 ; 여연스님이 문제제기, 언급 생략함.

 

 



□ 2. 가마금 잎차 납품 ; 1980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브리태니커사에 한해 3-5천통(1통에 100g) 납품, 고급차는 벌교 징광리 야생차밭에서, 일반차는 보성 회천의 야생 차밭에서 찻잎을 사다가 만들었다. ( 104쪽)
▶ 덖음차 5천통은 대단한 양이다. 차밭 면적이 최소 4만 평 이상은 되어야 생산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징광리 차밭은 1980년 이후부터 조성되므로 1987년까지는 생산이 전무했을 것이며 따라서 거의 모든 차를 회천 찻잎, 즉 『지허스님의 차』에 의하면 수전증과 시력장애 등이 올 수 있는 야부기다 찻잎, 혹은 그 완제품으로 대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 ; 『보성문화』 /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 3. 대각국사 의천 ; 대각국사는 선암사에서 오도한 뒤 천태선종의 개조가 되었다. 천태선종은 선교겸수 사상이다. (214쪽)
중국 요나라 천우황제가 중국에 온 대각국사를 만났는데 대각국사보다 나이가 적어 "형제국이 되자"고 했다. 나중에 스님이 선암사에서 심은 뇌원차를 보내고 수십 년간 수출…, 선암사 19암자와 본사건물 100여 동을 지었고 차밭을 크게 형성했다. (214, 247, 265, 270쪽)
▶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개창조인 천태종은 숙종6년(1101) 천태종 선시(選試)를 시행한 바 이때를 천태종 개창 시점으로 삼으며, 교관쌍수(敎觀雙修)의 교리를 가지고, 천태선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각국사는 요나라에 간 적이 없고, 당시 요나라 황제는 도종(道宗, 諱; 洪基 ;재위 1055-1100)으로 대각국사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대각국사는 선종11년(1094) 5월부터 다음 해 10월까지 18개월 동안 해인사를 시작으로 화엄사, 선암사, 무등산 규봉암을 순유(巡遊)하였으므로 선암사에 머문 시간은 몇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19암자, 불우(佛宇) 100여동 중창은 크게 과장된 것이며 차밭조성 또한 사실로 믿기 어렵고, 이후 6년 후인 1101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수십 년간 뇌원차 수출운운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선암사의 차나무는 17세 초 100주 가량 이식 재배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승주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 ; 『 한국불교사』, 김영태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 『선암사지』, 승주군 / 『대각국사문집』, 의천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대각국사묘지명』 외 〕


 

 


□ 4. 선암사 칠전선원 다맥계보 ; 칠전선원 다맥제1세 침굉 현변(1616-1684)스님 이하(以下) 선수행(禪修行)과 차가 일여함을 보이기 위해 선암사 칠전선원과 다원을 획기적으로 정비, …익숙한 다각이 조실이나 선원장이 되고 완전한 전수자가 되어 다맥을 계승 ( 215, 262, 265이하 쪽 외)
▶ 선암사의 칠전선원은 정조21년 봄부터 정조22년(1798) 여름까지 해붕당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신건(新建)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 즉 제1세 침굉스님부터 제5세 환허 순민스님(1690-1742)까지는 칠전선원이 없었으므로 조실, 선원장, 다맥, 완전한 전수자가 존재할 수 없었다. 〔참고 ; 『선암사』, 승주군, 남도불교문화연구회〕

 



□ 5. 선곡 지우(1898- 1968) ; 다음 칠전선원 다맥15세가 함양에서 백용성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선곡스님이다. 그분은 선암사 비로암에 와서 10년 수행, 득도 후 용성스님에게 가서 인가받아 손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인 선파(禪坡)스님이 돌아가시자 선암사에 돌아와 선파스님의 선다법맥을 이었다. 다맥14세인 금봉스님(錦峯基林;1869-1916)이 열반하자 선곡스님은 다맥을 이어 15세가 되었다. (216, 268,277쪽)
▶ 『지허스님의 차』의 내용에 의하면 선곡스님은 17세(1913)에 선암사 비로암에 왔고, 29세(1925)에 선파(仙坡)스님의 법등을 이었다. 이후 백용성스님의 함양 화과원(華果院;1927-1936)에 3년 있다와서 선파스님의 선다법맥을 잇게되므로 이때는 34세(1930)이후가 된다. 그런데 '다맥14세인 금봉스님이 열반하자' 즉, 1916년에 열반하신 금봉스님이 14년 후에 어떻게 또 다시 열반하여 다맥을 물려주게 되는가! 칠전선원의 다맥은 시공(時空))을 초월할 수 있고, 혹은 염향사다맥(拈香嗣茶脈)으로 이을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또 선곡스님이 선암사에 온 1913년 이후 선암사에 건립된 일곱큰스님(七大先祖師)의 비명(碑銘)들과 중수비, 기념비의 비문과 선암사의 제 기록, 그리고 용성스님과 관련된 기록 그 어디에도 선곡스님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며, 영정(影幀)도 남겨지지 않았다. 또한 선곡스님의 직계가족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선곡스님은 제자가 한 분인데 그 분이 아직 선파스님과 선곡스님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한다. 禪坡스님은 仙坡스님의 오기(誤記)로 자기 선조사의 법명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큰 불경(不敬)일 것이다. 그리고 지허스님의 법사는 딴 분으로 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참고 ;『선암사지』/ 『백용성스님의 禪農佛敎』, 김광식 〕

 

 



□ 6. 지허스님과 선암사 ; 지허스님(智墟 智雄;1941- )은 14살에 출가하여 60평생 동안 산중절간 안에서…, 선암사의 유구한 정통성과 선다맥을 완벽 유일하게 잇고 있다. (표지 ; 최성민이 지허를 말함. 외)
▶ 지허스님은 17세 되던 해인 1957년 3월 그의 부친(桃擎 丁守一)이 돌아가신 후 선암사에 왔으며, 2년 후인 1959년에 정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암사를 떠난다. 그리고 "부친이 창건하였으나 부친 사후 무방비 중에 폐허가 된 사찰, 즉 벌교읍 월곡리 용연사(龍淵寺)에 1962년(壬寅)에 학업을 마치고 주지로 부임하신 현 주지(1972년 현재) 정지웅(丁智雄 ;智溶)스님께서 중수불사를 단행하여 구태(舊態)를 일신(一新)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사진과 함께 있다. 그 이후 1974년 무렵에 선암사에 왔으며, 1983년에는 선암사를 떠나서 금둔사로 갔다. 1994년 3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선암사주지, 그리고 2000년 12월부터 주지를 다시 맡아 현재에 이른다. 그러므로 꽤 오랜 세월 약 15년 이상을 선암사에서 보냈다 할 수 있으나 1994년 주지 부임 이전까지는 차밭 복원에 관여하지 않았고, 차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으며, 주민등록도 2002년에 처음으로 선암사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 선암사에 처음 와서 1959년에 떠나는 그 짧은 2년 사이에 어떻게 선암사 강원(講院)에서 사집과(四集科)와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할 수 있으며, 다각을 거쳐 칠전선원의 조실이나 선원장이 된 후 완전한 전수자가 되어 1968년에 입적한 선곡스님의 선,다,법맥을 이을 수 있었는지 대단히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 ; 『스님의 맨발』, 한승원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전국사찰약사및불교인사록』, 불교출판사〕

   지면 관계로 이만 약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언급하겠으나, 초의선사의 『다신전』내용을 오역, 왜곡하였고, 작설차와 죽로차에 대한 편향된 기술, 존재하지 않는 칠전선원의 다맥과 조작된 법맥 등『지허스님의 차』의 내용 중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으며, 그 중에는 고의로 왜곡하였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내용도 많이 있다. 만일 어떤 목적에 의해 고의로 조작하였다면 도덕적인 책임문제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 기획자, 출판사 누구든지 또 어떤 형식이든 해명이나 반론해 줄 것을 일반 독자들을 대신해서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필자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하고 반론해 주기를 호소한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저자인 지허스님, 기획자인 한겨레신문의 최성민 부장, 출판사인 김영사 측에서 지금까지 어떤 해명이나 반론이 없었다. 문제점들에 대한 자인(自認)인지, 묵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급했던 여러 문제들은 "지허스님의 차"의 근간(根幹)이 뒤흔들릴 수 있는 문제도 많았다.
필자는 불제자(佛弟子)가 아니고 참선도 해본 적이 없으므로 지허스님처럼 선문답을 할 줄 모르고 법거량, 선거래도 모른다. 필자가 아는 것은 오로지 진실뿐이다. 그러므로 승속(僧俗) 구별없이 누구든지 가능한 진실거래, 즉 참거래를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필자가 아는 진실이 너무 얕고, 또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저자 측의 해명이나 반론을 정중히 요청했었고, 또 계속 요청하는 바이다.


◇ 예로부터 자생 덖음차 중에서 최고로 치는 것이 작설인데…… 찻잎이 자색 빛을 띠고 그 색깔과 모양이 마치 참새 혓바닥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경이나 다신전에서는 특별히 자색을 띠는 잎을 강조했다. 모양만 참새 혀 같아서는 작설차라 할 수 없다. (지허차 53, 73, 95, 105, 211쪽)
칠전 뒤는 일조량이 많고 자갈밭인데다가…….(211쪽)
▶ 작설차(雀舌茶)는 다 알다시피 차나무의 어린잎이 참새의 혀(雀舌)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선조 무렵에는 까치 작(鵲) 자를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진각국사의 시문집(詩文集)에 처음으로 등장하며,『중국다엽대사전』의 작설조에는 "작설은 찻잎이 가늘고 어린것을 쓰는데, 참새 혀와 같은 형태다"라고 되어 있고, 또 『중국다학사전』에는 "작설차는 고대의 명차(名茶)이다. 곡우(穀雨)전 채취하고 차싹의 잎이 어려서 얻은 이름이다.", 또 북송(北宋) 심괄의『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차의 싹을 옛 사람이 작설이나 맥과라고 이르는데 그것은 지극히 어린것이다"라고 했다. 또 모문석의 다보(茶寶)에도 보인다. 위의 기록 및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작설차는 전부 크기와 모양, 채취 시기만 언급되었지 색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또 백과사전에는 품종에 따라 잎의 색이 다르다고 되어 있다.


   "지허스님의 차"에서는 초의선사(草衣禪師)의 『다신전(茶神傳)』 첫부분 중 발아자자위상(發芽紫者爲上)'구절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데, 『다신전(茶神傳)』은 1595년경 명(明)의 장원(張源)이 지은 『다록(茶錄)』을 모환문(毛煥文)이 1615년 만보전서(萬寶全書) 다경채요(茶經採要)에 실었고, 그 후 235년이 지나 1830년에 다시 초의선사가 초록(抄錄), 개명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오식(誤識)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당시의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당시의 중국과 현재의 우리나라가 환경, 토질, 기후조건 등이 같을 수 없으며, 또 중국의 차나무와 현재 우리나라의 재래종 야생 차나무의 품종이 같을 리 만무하다. 400년 전 중국의 다서나 1200년도 훨씬 더 오래된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또 장원의 『다록』에는 ' 차아자자위상(茶芽紫者爲上) 면추자차지(面皺者次之)……'로 되어 있으나 모환문의 『다경채요(茶經採要)』에는 ' 차비자자위상(茶非紫者爲上) 이추자차지(而皺者次之)……'라고 되어 있는 것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또 중국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자금색병차(紫金色餠茶)'라는 구절이 있고, 자순차(紫筍茶)가 고려시대에 많이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신전』의 '…곡중자위상(谷中者爲上) 죽림하자차지(竹林下者次之) 난중석자우차지(爛中石者又次之)…'에 따라서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골짜기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이 대밭 아래, 그리고 그 다음이 자갈밭인 것 같다. 그리고 작설차는 덖을 때 찻잎 본래의 모습과 색이 변한 후, 우린 후에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지허스님의 자생 덖음차도 모양뿐 아니라 색도 원래의 자색(紫色)으로 돌아오는지? 사진(46쪽)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참고 : 『다도학논고(茶道學論攷)』, 김명배(金明培) / 『고려시대 차의 종류』, 용운〕


◇ 초의선사는 『다신전』에서 “우수한 차는 차가 지닌 고유한 색깔인 청취 빛 다색이라야 한다.”고 했다. (132쪽)
▶『다신전』에는“다이청취위승(茶以淸翠爲勝)…”으로 되어 있으므로 청취 빛 다색이 아니라 “차는 맑고 푸른빛이 도는 것이 가장 좋고…”의 의미이다.〔참고 :『다신전』, 초의〕
◇ 초의(草衣)선사는 『다신전(茶神傳)』에서 우리 조상들의 다도(茶道)를 정리하여…,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저장할 때 건조하게 하며, 마실 때 청결하게 하면 다도는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초의선사가 말씀하신 한국의 전통 다도인 정(精), 조(燥), 결(潔)……(203, 207쪽)
▶ 앞에도 썼지만 초의선사의 『다신전』은 중국의 다서(茶書) 『다록(茶錄)』과 『만보전서(萬寶全書)』를 초록, 개명한 것이므로 ‘한국의 전통 다도’나‘우리 조상들의 다도를 정리’라는 말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신전』제22항 다위(茶衛)에 '조시정(造時精) 장시조(藏時燥) 포시결(泡時潔) 정·조·결(精·燥·潔) 다도진의(茶道盡矣)'라고 되어 있다. 그중 포시결(泡時潔)은 마실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달일 때 청결하게'의 뜻이다. 또 제22항 다위(茶衛)도 『만보전서 채다론(採茶論)』에는 다도(茶道)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도가 아니고 채다(採茶)부터 다위(茶衛)까지의 전체과정 혹은 방법으로서의 다도이다. 그러므로 '다도진의(茶道盡矣)'는 '차의 지킬 바를 다함이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도야(茶道也)' 혹은 '……다도의(茶道矣)'라고 하면 된다. 차를 만들고(造), 저장하고(藏), 달이고(泡) 끝나는 다도, 즉 따르지도, 마시지도 않고 끝나는 다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초의선사의 다도정신(茶道精神)은 '중화(中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차의 맛을 내는 일을 유가(儒家)의 윤리적 삶에 비유, 즉 잘 만든 차와 좋은 물, 알맞은 분량으로 '중(中)'을 얻고, 찻물이 잘 우러나 '화(和)'하면 '중도(中道)'를 얻게 되어 이상적 삶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참고 :『다도학(茶道學)』, 정상구 /『다도철학(茶道哲學)』, 정영선〕外

 

 


◇ 자생 찻잎이라도 대밭이나 보통 차밭에서 난 찻잎 또는 자색이 아닌 변종 자생 찻잎으로 만든 차는 작설차가 아니다.(96쪽)
대밭에서 나는 것은 자색 잎과 구별해 죽로차라 한 것이다. 즉 대밭(햇볕1 대 그늘 9)은 작설차가 나올 조건이 절대 될 수 없다.(53, 73, 105, 211쪽)
▶ 햇볕1 대 그늘9의 조건에서는 차나무가 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대나무 밭에 차밭을 조성한다면 필요한 일조량(日照量)을 확보하면 된다.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만큼 대나무를 쳐내면(間伐) 되니까 어려운 일도 문제될 일도 아니다.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정다산(丁茶山)선생도 화개동 죽로차(竹露茶)를 찬양하였고 추사(秋史)선생은“화개동 죽로차는 중국에서 제일가는 용정(龍井)-두망(頭網)보다 질이 좋으며 인도의 유마거사 주방(廚房)에도 이처럼 좋은 묘미(妙味)의 차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글들로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나라의 다인(茶人) 중에도 죽로차를 제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차나무는 대나무 숲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과 또 그 그늘, 반양반음(半陽半陰)에서 자란 죽로차를 제일로 친다."〔『차문화 유적답사기』, 김대성〕
"차나무는 대나무 밑에서 잘 자란다. 대밭에서 생산된 차를 죽로차라 하여 일품(逸品)으로 치고 있다. ……대나무는 신성스러운 나무다. 차나무는 그러한 대나무 아래서 군림하며 사는 지체 높은 나무라 할 수 있다."〔『한국차문화협회지』, 김주희〕
차나무와 대나무는 둘 다 신이 우리 인간에게 축복으로 내린 참으로 유익하고 경이(驚異)로운 식물들이다. 대나무 밭 아래에서는 그 어느 식물도 잘 자라지 못하지만 차나무만은 예외이다. 대나무의 뿌리는 횡근성(橫根性), 천근성(淺根性)이고, 야생 차나무의 뿌리는 심근성(深根性)이므로 서로 간섭성(干涉性)이 적으며, 복하원(覆下園)으로서 햇볕 조절 기능도 훌륭하고, 또한 밤부터 아침까지 맺힌 대 잎의 이슬을 낮에 흘러주어 수분을 공급하는 등 아주 이상적인 연분 즉, 신비한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대나무로서는 차나무에 베풀기만 하는 입장이나 아직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상생(相生)작용이 있는 듯 하다. 또한 차나무의 시배지(始培地)로 화엄사 뒤쪽의 진대밭(長竹田)이 거론되고 있기도 하며, 이능화는 그의 저서에서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金海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持來之茶種)”라고 기록하고 있다.〔참고 : 『고려와 조선의 차살림』, 안광석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이능화(李能和)〕

 

 
◇ "소위 곡우 전후의 어린잎으로 만든 작설차가 차 중에서 가장 맛이 있고, 가장 상품이라는 것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작설은 간이차입니다. 사월초파일 부처님 앞에 올리기 위한 것이고 본격적인 차는 초파일 이후에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해를 지나 이듬해 새 차가 나올 때까지 마셔야 할 차는 8월이나 9월초의 잎을 따 만든 차라야 합니다. 작설을 다음해까지 마신다는 건 넌센스죠.”라는 게 금둔사 지허스님의 주장이다.〔『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 1994년 5월 초판 발행 후 2000년 5월 증보(增補)를 거쳐 현재 시판되고 있는 김대성선생의 저서 중 일부분이다. 위 글의 내용은 사월초파일 이전에 딴 차는 간이차(簡易茶)인 작설차(雀舌茶)이고 그 이후에 만드는 차가 본격적인 차(이름은 없음)라는 것이다. 색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 시판되고 있는, 지허스님의 차를 다룬 책 두 권 중 『차문화유적답사기』는 색에 관한 언급 없이 채취시기(사월초파일)만 강조했고 『지허차』는 채취시기에 관한 언급은 없고 색(자색)만 강조한 셈이다. 더구나 사월초파일은 음력이므로 양력으로는 한 달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똑같은 작설차인데 왜 내용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에서 초의선사(草衣禪師)를 오랫동안 모시고 지냈던 범해선사(梵海禪師)는 시(詩) 「초의차(草衣茶)」에서 이렇게 읊었다.

 


'초의가 법제(法製)한 차'는
곡우초청일(穀雨初晴日) 곡우절 맑은 날
황아엽미개(黃芽葉未開) 노란 차싹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공당정초세(空鐺精炒世) 빈 솥에서 잘 덖어내어
밀실호건래(密室好乾來) 밀실에서 말리네.'

 

 


   그러므로 필자의 소견으로는 사월초파일이나 낮의 온도가 27-8°C이상 올라가는 초여름의 기후에 잠깐 나타날 수 있는 일종의 변이색(變異色)인 자색(紫色)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최성민 기자의 6월 5일자 한겨레신문의 기사중의 사진처럼 실물보다 훨씬 더 크게 확대된 차 한잎의 사진이 아니라 차밭 전체 사진을 공개해야 할 것이다.
지허스님은 "우리 전통차의 정체성에 관한 당국과 일부업자들의 이런 몰인식은 희귀한 작설차의 존재마저 지워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된다.(107쪽)"라고 우려를 많이 하는데 작설차는 절대 희귀(稀貴)하지 않다. 만약 희귀하다면 어떻게 우리 국민차가 될 수 있겠는가? 야부기다도 잎이 참새 혀 만할 때 채취하여 잘 덖으면 작설차가 될 수 있다. 단지 성분과 색, 향, 기, 미만 다를 뿐이다.〔참고 :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초의선사와 대둔사의 다맥』, 임혜봉 / 『역대 한국 고승의 다시』, 무산(撫山)〕

   '읽은 이'의 지적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시시콜콜 진상을 밝히고"와 기독교의 여러 일에 비유한 "사실과 믿음의 차이",라거나 "개인의 과거사를 물고 늘어져"라는 말은 동의할 수 없고 또 건전한 토론을 위해서는 피해야 할 단어들이다. 시시콜콜 진상 운운은 필자가 거론한 문제들에 대해서 해명이나 반론을 제기하면 끝나는 문제들이다. 믿음에 관한 내용은 종교적인 믿음과 지식에 대한 믿음을 착각했거나 구분을 못하는 것 같다. 성서의 내용이나 기적이나 이적(異蹟)등은 수십 세기 내려오면서 "바티칸공의회"같은 대종교회의 등에서 수없이 많은 치열한 검증 끝에 인증(認證) 되고 확인이 된, 일 개인이 감히 함부로 거론할 수 없는 성스러운 일들이다. 그리고 개인의 과거사를 물고 늘어진다는 이야기는 '읽은 이'께서 다시 고찰하여야 할 문제이다. 기획자인 최성민 기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지허스님도 이미 일 개인이 아니라 "근대한국불교선승10인"(최성민이 지허스님을 말함)으로 꼽히기도 하고 (사)"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에서는 "전통차법제인간문화재"로 지정까지 한 공인(公人)이다. 그러니 만큼 지허스님의 저서는 두고두고 우리나라 다인(茶人)들의 지침서, 실용서, 학습서가 될 것이며, 또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존경을 받는 분이므로, 그 행적 또한 투명해야하고 역사 앞에서도 당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의도는 사실과 진실을 밝히자는 데에 있으며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데 있지 않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러나 저자, 기획자, 출판사 모두 책임질 필요가 없는 책을 출간했을 리는 없으므로 지금까지의 묵살이나 무대응(無對應)은 공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지면 관계로 이만 약한다. 또한 반론을 정중히 요청하며, 해명이나 반론이 이루어질 때까지 필자의 참거래는 계속될 것이다. 끝으로 이 글 중에 본의 아니게 거론된 분들과 두서없는 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말씀과 함께 항상 건승하심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