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1. 01:50ㆍ집짓기
1 사무실 겸 주거공간으로 쓰고 있는 능소헌 앞 정원. 나뭇가지에 매단 헝겊꽃에 나비가 날아들기도 한다. |
[esc]살고 싶은 집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의 사무실 겸 살림집 북촌 한옥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은
어디에서나 정원이 보인다는 것이다
청송재와 능소헌에는
앞마당과 뒷마당
집과 집 사이, 집과 담 사이에
크고 작은 8개의 정원이 있다
서울 종로구 계동 한옥집 마당 돌확엔 목마른 새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깜짝 놀란 금붕어들은 연잎 아래로 후다닥 헤엄쳐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나뭇가지에 매달아둔 헝겊 꽃들을 본 하얀 나비는 한껏 들떠 꽃잎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가, 이내 가짜에 속은 걸 알고 분노의 날갯짓으로 기왓장 틈에 핀 애기똥풀을 향해 팔랑 날아올랐다.
2 능소헌과 청송재를 잇는 계단과 장독대의 해주 항아리. |
“한옥은 생태계예요. 동식물이 공존하는 건축물이거든요. 기와에 식물이 자라는 건 지붕을 손봐 달라는 신호랍니다. 서울 한복판인데도 달팽이, 무당벌레가 종종 보여요. 나만 살기 좋은 게 아니라 동물들도 풀, 나무, 흙, 기와에서 기운을 얻는구나 싶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양태오(34·모우리스튜디오) 대표는 재작년 연말 서울 종로구 평창동 양옥에서 계동 한옥으로 이사를 왔다. 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때부터 “공간과 사물의 에너지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던 그였다. 2007년께 귀국해 이른 아침부터 자정까지 계속 일에 파묻혀 살던 중 “빌딩 숲에 자리잡은 클라이언트 사무실만 다녀와도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소개로 북촌의 한옥을 만나고 한눈에 반해 무려 여덟달 동안 공사를 한 뒤 살림집과 사무실을 한데 옮겼다. 맘놓고 밤새 일하면서도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집에 정성을 쏟고, 집은 치유 에너지를 주면서 호혜적으로 살아간다.
3 꽃담 돌확에는 이름 모를 꽃이 옹기종기 피어난다. |
이 집은 1928년 조선 후기에 만든 보급형 생활한옥이다. “요즘 개념으로 치자면 궁궐(경복궁) 옆의 아파트인 셈”이라고 양 대표는 설명했다. 미음(ㅁ)자로 된 아랫집 안채는 우아하게 뻗은 소나무를 품고 있어 ‘청송재’란 이름이 붙었고, 능소화가 있던 윗집 사랑채는 ‘능소헌’으로 불린다. 위아래채를 합치면 대지면적 552㎡(167평)가량, 건축면적은 264㎡(80평) 정도 되니 도심 한옥치곤 꽤 넓은 편이다.
청송재의 원주인은 대목장이었다. 다음엔 건축가 김영섭씨가 집을 맡았다. 그는 전문가의 솜씨로 한옥을 리노베이션한 뒤 가족과 함께 살면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아랫집까지 구입해 두채를 이어붙였다. 그 뒤 이 집은 2007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선정한 ‘아름다운 한옥’으로 인정받아 도록에도 올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저까지 3대째 공간과 건축에 기여하는 사람이 살게 된 셈이죠.” 양 대표가 말했다. 운 좋게 공간 전문가인 주인들을 거듭 만나며 미학적 실험이 여전히 진행중인 한옥이다. 몇차례 수리를 했지만 겉모양은 훼손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정갈하게 단장됐다.
“서까래, 기둥, 대들보는 1~2㎜ 사포질만 했는데도 나뭇결이 하얗게 새것처럼 드러났어요. 50년에 한번씩 해주면 됩니다. 100여년 된 소나무 기둥은 아직도 송진을 뿜어내고요. 여전히 허파가 숨을 쉬는 집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4 능소헌 거실엔 직접 제작한 벽난로가 자리를 잡았다. |
안채 ‘청송재’에는 지금 양 대표의 부모님이 살고 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부모님이 자리를 비울 때 이 공간은 외국인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도 쓰인다. 양 대표는 “한옥을 처음 만난 외국인들까지 이 집의 좋은 점을 쉽게 찾는다”고 말했다. 낯선 한옥에서 하루이틀 지내면서도 “비 오는 날이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냐, 한옥에서 자면서 제대로 힐링했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는 것이다. 물론 침실, 욕실, 거실 등을 세련되면서도 편안하게 바꿔낸 집주인 감각 덕분이기도 하다.
청송재에서 이어진 돌계단을 조금만 올라가면 위채 ‘능소헌’이 나온다. 이곳엔 양 대표의 사무실, 침실, 옷방, 식당, 부엌, 지하 미디어룸, 거실, 안마당, 뒷마당이 있다. 거실에 들어서면 덴마크 디자이너 한스 베그네르의 작은 소파와 존 디킨슨의 유명한 사자 발 모양 테이블이 눈에 띄고 전면엔 양 대표가 배우 전지현씨의 신혼집에 설치해 유명세를 탄 벽난로가 놓여 있다.
소품들을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양 대표는 집 내부를 공사하면서 자연 채광에 온 힘을 쏟았다. “공간에서 빛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능소헌 사무실의 경우,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거실의 창호를 떼어내고 통유리를 넣어 빛을 온전히 받게 공사를 했다. 건물 맨 안쪽 대표실 책상 뒤쪽에도 가로로 길쭉한 통창을 새로 뚫었다. 버선코처럼 날렵한 청송재 추녀마루가 보이는 아름다운 창이지만 원래는 흙벽이었다. 양 대표는 “처음 방을 봤을 때 너무 어둡고 음기가 차 큰 창을 트고 싶었지만, 지붕을 떠받치는 나무가 위아래로 지나고 있어 더 크게 낼 수 없었다”고 했다. 다행히 작은 창이지만 볕이 잘 들었다. 흙벽은 허물지 않는 대신 석고보드로 소음을 막고 단정하게 마감했다. 한옥을 고치는 건 이렇게 일일이 건물에 말을 걸고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기도 했다.
5 양 대표의 작업실 뒤로 청송재의 지붕이 보인다. |
또다른 어려움은 지하공간 확보였다. 김영섭 건축가가 먼저 개조해놓은 지하실이 있었지만, 미디어를 이용한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하도록 내부를 넓히려고 했는데 포클레인이 들어올 수 없던 터라 사람이 기계를 써서 몇 날 며칠 땅을 파냈다. 마지막으로 거울 작품을 붙이고 나무 소파를 놓아 완성한 ‘미디어룸’에서 양 대표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쉬기도 한다. “모든 집에는 사람이 위안받고 탈출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을 묻자 양 대표는 “어디에서나 정원이 보인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청송재와 능소헌에는 모두 8개의 정원이 있다. 각 채의 앞마당에 하나씩 있고, 집과 집 사이, 담과 집 사이, 뒷마당에도 정원이 있다. 창살문을 살려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마당에도 살뜰하게 이끼, 작약, 수국, 라일락을 심었다. 곳곳에 숨은 ‘비밀의 정원’에는 집주인도 모르게 날아온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게스트룸 창밖으로도 꽃담과 키 낮은 식물들이 보인다.
한옥에 이사온 건 외국에서의 오랜 생활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뒤 캘리포니아 아트센터 디자인대학에서 환경디자인을 공부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스와 함께 일하며 문화적 깨달음을 얻었다.
6 지하공간의 미디어룸. |
“많은 외국의 디자이너들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에 영향을 받고 새로운 창조에 나서고 있는데 나 또한 뿌리 깊은 문화와 역사를 가진 한국 출신이면서 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한국의 디자인이 대개 서양적 문화에 바탕을 둔 것을 보면서 그럼 나는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내 라이프스타일로 가져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한옥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어렸을 때부터 흙을 이용한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던 양 대표의 컬렉션도 한옥을 꾸미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머니 이수안(59)씨는 “미술작품을 보러 함께 인사동에 들른 중학생 아들이 종종 토기를 사달라고 졸라댔다”며 “기와지붕 위에 얹어놓은 토우도 그때 사 모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가리킨 추녀마루 위에는 와제 토우인 해태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장식기와인 이 잡상(어처구니)은 화마 등 잡신을 쫓는 용도로 옛날부터 주로 사용되던 것이다. 사무실이 있는 능소헌 툇마루 아래엔 양 대표가 모아온 다듬잇돌이 댓돌로 쓰이고 있고, 침실로 들어가는 마루의 한켠에도 어릴 때부터 모아온 토기가 놓여 있다. 그는 요즘 타이 공장에서 청화백자와 비슷한 도자기 소품을 제작하고 있다. 갓을 씌워 만든 도자기 스탠드는 아트숍에서 판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나무와 흙으로 된 집에서 그는 주거 인연을 바탕 삼아 미래를 열어가는 중이다.
“저는 옛사람들이 믿음을 가졌던 것들에 관심이 많고, 수천년 역사 동안 많은 사람들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저랑 기운이 통하는 0.0001%만 사용할 뿐이에요. 한옥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딱 맞는 주거모델 중 하나예요. 많은 사람들이 척박한 삶 속에서 살아가지만, 한옥으로 주거문화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한층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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