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 이광사의 편액(1)-석야 신웅순

2015. 8. 5. 19:06글씨쓰기

 

 

 

 

 

       원교 이광사의 편액(1)-석야 신웅순 유묵,육필,석각 이야기 / 시조

2015.08.0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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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의 편액(1)

 

석야 신웅순

 

   추사는 제주도 유배길에 두륜산 대흥사를 들러 초의 선사를 만났다.

침계루를 지나 대웅전의 대웅보전글씨를 바라보았다. 이 또한 원교의 글씨가 아닌가. 추사와 초의는 유배길의 사정, 부처님 말씀 등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런 와중에 추사는 초의에게 부탁 아닌 명령을 했다.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대흥사 대웅보전편액 이광사 글씨

 

         

대흥사 무량수각편액 추사의 글씨

 

   ‘대웅보전무량수각의 현판을 써주며 원교의 대웅보전글씨를 떼고 이것으로 걸라고 했다. 초의는 추사가 부탁한대로 대웅보전을 갈아달고 무량수각을 대웅전 곁 산방의 벽에 걸었다.

추사가 귀양살이 73개월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 다시 초의 선사와 해후했다. 이 때 추사는 초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어디 있는가?. 내 글씨를 떼고 다시 달아주게.’

기고만장했던 추사는 귀양살이에서 개성이 무엇인지, 진정한 서도의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추사는 원교 사후 9년에 태어났다. 원교는 서예의 역사와 이론을 필결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했고 그의 글씨는 화동서법이라는 목판본 책으로 간행되어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유홍준의 완당평전)

원교의 집안은 대대로 글과 글씨의 명가였다. 이경석이 종고조부이며 증조부 이정영, 부친 이진검 등이 모두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원교는 정제두의 조선 양명학을 이어받아, 강화학파를 형성시킨 사상가이며 문학가이기도 하다.

 

   정인보는 그의 문필을 이렇게 찬양했다.

 

   " 원교부터 國史上의 일들을 歌詠하였으니태백단의 전중함과애식곡의 고박함과황창 무》 《양산가의 비장함과살수첩·성상배의 경건,포석정·낙화암의 애원이 한자 를 빌어 朝鮮心을 그대로 실은 것인데 더욱이 설씨녀와 가실의 선서를 서술한파경합은 이규 보의동명왕 편과 겨룰만한 웅편이라는 것이다. " (鄭寅普,원교집해제(담원국악산고)p.46.)

  

   이광사는 司華보다도 國故에 치중했으며 강화학을 권력을 위한 학문이 아닌 인간 발견을 위한 학문으로 정착시켰다.

윤순에게 글씨를 배워 진···전서에 모두 능했으며 훗날 독특한 자신의 서체인 원교체를 만들어 조선의 서예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산수·인물·초충 등 그림에서도 뛰어났다.

추사는 이런 원교의 필결에 후기를 쓰면서 원교의 글씨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추사가 그렇게 나온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원교는 남파를 지향했고 추사는 북파를 지향했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북조에서는 비석의 글씨, 北碑, 남조에서는 법첩의 글씨,南帖을 스승으로 삼아 글씨를 썼다. 이것이 북비남첩론이다. 추사는 시대에 따라 변질된 법첩이 아니라 처음 새겨질 때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비석의 글을 갖고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서예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왕희지체)니 촉체(조맹부체) 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것이 있다고 여겨 표준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원전으로 삼은 것은 위작이고 그 원류의 고비는 볼 수 없는데 어 떻게 해야한다는 것인가. 완당은 왕희지는 구양순을 통해서 들어가라고 단호히 말한다.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왕희지)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구양순· 저수령)을 경유 하여 진으로 들어가는 길을 삼는다면 거의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유홍준의 완당평전)

 

   왕희지 법첩 같은 것은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되어 사실상 다 가짜라는 것이다. 이것 조차 모르고 쓰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비석의 글씨인 변하지 않는 북비로 원전을 삼아 공부해야한다는 것이다.

원교를 일방적으로 몰아부쳤으며원교필결후로 추사에 의해 원교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이런 추사의 평가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원교의 글씨가 평가 절하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는 원교를 국제적 시각을 갖지 못한 촌티를 벗지 못한 속된 글씨로 폄하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글씨를 흉내내고 있어 추사에겐 가뜩이나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광사의 현판 글씨를 어찌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삼만에게도 추사는 촌티나는 속된 글씨라고 폄하하여 이삼만 제자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김정희가 연경에 갔을 때는 '비파(碑派)''첩파(帖派)'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을 때였다.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고 돌아왔던 국제적 감각을 갖고 있었던 당시 모던한 추사로서는 국내파와는 많은 시각차가 있었을 것이다.

대흥사에는 이광사의 글씨 대웅보전과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이 대웅보전 안마당을 끼고 걸려 있다.

유홍준 교수는 "대웅전 편액은 획이 바짝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갔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고 무량수각은 획이 기름지고 살지고 구성의 임의로운 변화가 두드러져 있다"고 평가했다.

누가 봐도 이 두 글씨체는 대조적이다. 그런데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편액은 귀양살이 할 때 써준 현판으로 이 때의 추사 글씨는 기름기가 빠져있고 말라있다. 개성의 문제이지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글씨체라고 볼 수는 없다.

 

   원교의 편액으로 대흥사의 미끈하면서 힘찬 해탈문글씨, 물 흐르듯 유려한 침계루’ ,‘천불전글씨가 있다. 외에 물 흐르듯 쓴 수체(水體),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천은사의 대웅보전’, 이광사의 인생 역경이 잘 드러난 백련사의 대웅전’, 용처럼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백련사의 만경루’, 내소사의 대웅전’, 선운사의 천왕문정와가 있다.

 

 

          

대흥사의 침계루

 

          

 

지리산 일주문 지리산 천은사

 

     

 

백련사의 만경루

 

   일주문 지리산 천은사는 다른 편액과는 달리 세로로 되어 있다. 숭례문처럼 불의 기운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말은 이렇다.

 

신라 때 창건된 천은사는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가 1679년 천은사바뀌었다. 당시 단유선사가 절을 크게 중수할 때 일이다. 사찰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곤 했다.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 구렁이를 잡아 죽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름을 바꾸고 사찰을 크게 중창했지만, 사찰에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 불상사가 잇따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사찰의 물 기운을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고 이야기했다. 세월이 흐른 뒤 당대 최고 명필인 원교 이광사가 이 사찰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원교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 뒤, 불의 기운은 물의 기운으로 다스려야 한다며 마치 물이 흐 르는 듯한 서체로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편액 글씨를 세로로 써 주었다. 그리고 이 글 씨 편액을 일주문에 걸면 화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의아해하는 스님도 있었으 나 원교의 글씨 편액을 만들어 건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원교의 이 글씨는 특히 수체(水體)라고도 부르는데, 지금도 고요한 새벽에 일주문에 귀를 대고 있으면 물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이도 있다.(영남일보,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18구 례 천은사 지리산 천은사’,2013.7.10.)

 

-한국문학신문, 2015.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