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화가(畫家) - 공민왕, 윤두서 燃藜室記述 / 日得

2015. 12. 11. 12:49美學 이야기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화가(畫家) - 공민왕, 윤두서 燃藜室記述 / 日得

2014.05.17.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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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사람 솔거(率居)를 신화(神畫)라고 일컬었다. 진흥왕(眞興王)이 황룡사(黃龍寺) 장륙불상(丈六佛像)을 만들고, 솔거를 시켜서 절의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리게 하였더니, 새가 바라보고 날아들어서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그림이 오래되어 빛이 바랬기 때문에 중이 고쳐 색칠하였더니, 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 우리나라에는 이름난 화가가 드물다. 근대로부터 살펴보면, 공민왕의 화격(畫格)이 매우 높았다. 지금 도화서에 간직된 노국 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화상과 흥덕사(興德寺)에 있는 석가모니의 산에서 나오는 그림은 모두 왕의 수적이었고, 간혹 갑제(甲第)에 산수화가 있기도 한데, 매우 기이하고 묘하였다. 《용재총화》


공민왕은 큰 글씨를 잘 썼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아방궁(阿房宮)의 인물을 그렸는데, 작기가 파리 머리만 하였다. 그런데도 갓ㆍ적삼ㆍ띠ㆍ신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정묘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한 가지 일에만 능하지 못한 사람이었던가. 《용천담적기(龍泉淡寂記)》

윤평(尹泙)이라는 사람도 역시 산수화를 잘 그렸다. 지금 사대부 중에 이 그림을 간수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필법이 평범하여서 기이한 맛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고려 이영(李寧)의 천수원도(天壽院圖)는 중국에서도 칭찬하였다. 《파한집(破閑集)》에 그 일을 자세히 말하였으나, 그의 필적은 전하는 것이 드물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이 옛 그림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역시 화법에도 정통하였다. 때문에 어떤 사람 집에 좋은 그림이 있다고 하면 끝까지 찾아내었으니, 여러 해 동안에 수백 축에 이르렀다.또한 당(唐)ㆍ송(宋)의 옛 물품이면 비록 훼손된 비단 조각과 떨어진 쪽지라도 거두어서 완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영은 근세의 사람인데, 만약 그의 그림을 과연 세상 사람들이 보배로 여겼다면,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 가운데에 어찌 적히지 않았으랴. 사람이 죽은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흔적이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니 의심스럽다. 《용천담적기》

○ 본조에 이르러서 고인(顧人)이라는 자가 중국에서 나와서 인물을 잘 그렸다. 그 뒤에 안견(安堅)ㆍ최경(崔涇)이 명성이 같았는데, 안견은 산수화로, 최경은 인물화로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으니, 지금 사람이 보배로 생각하여 안견의 그림을 금옥(金玉)처럼 여겼다. 성현(成俔)이 승지가 되어서 궐내에 간수하였던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를 보니, 참으로 뛰어난 보물이었다.안견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평생 정력이 이 그림에 있다.” 하였다. 최경도 만년에는 산수와 고목(古木)을 그렸으나, 안견에게 양보함이 마땅하다. 그 밖에 홍천기(洪天起)ㆍ최저(崔渚)ㆍ안귀생(安貴生)의 무리도 산수화로써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 평범하였고, 오직 사인(士人) 김서(金瑞)의 말과 남급(南汲)의 산수화가 가작으로 일컬어졌다.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은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서 옛 사람도 생각 못하였던 경지를 찾아내어 산수화와 인물화가 모두 우수하였다. 그가 그린 여인도(麗人圖)는 털 하나도 어긋남이 없었고, 청학동(靑鶴洞)ㆍ청천강(菁川江)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이한 보배였다. 배연(裵連)이라는 자는 산수ㆍ인물은 잘 그렸는데, 평소에 최경의 그림을 인정해 주지 않았으므로, 최경과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희안(希顔)이 일찍이 배연의 그림은 아취가 있다고 하였다. 이장손(李長孫)ㆍ오신손(吳信孫)ㆍ진사산(秦四山)ㆍ김효남(金孝男)ㆍ최숙창(崔叔昌)ㆍ석령(石齡)이 지금은 비록 유명하나 모두 그림의 경지를 논할 수는 없다. 《용재총화》

○ 안견(安堅)의 자(字)는 가도(可度), 소자(小字 아명)는 득수(得守)인데, 지곡(池谷)이 본관이다. 옛 그림을 넓게 열람하여서, 그 심오한 경지를 모두 깨쳤으며, 산 그림은 가장 그가 잘하는 바였다. 《용천담적기》 ○ 호는 현동(玄侗)

○ 최경(崔涇)ㆍ안귀생(安貴生)이 덕종(德宗)의 얼굴을 그렸다. 덕종 고사조에 상세하다.

○ 강희안(姜希顔)은 글씨ㆍ그림ㆍ시를 잘하여서 그때에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다.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으며, 벌레ㆍ새짐승ㆍ초목ㆍ인물을 그리면서 색채 쓴 것은 자못 거칠었으나, 제대로 생기가 있었다. 그 짙고 엷은 빛을 조화시킨 것이 전문가의 색상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시인으로서 운취가 녹아 있으니 마땅히 화가들이 이르지 못하는 격조가 있었다. 《용천담적기》

○ 강희안의 뒤에 신세림(申世霖)ㆍ석경(石敬)ㆍ이불해(李不害)ㆍ이상좌(李上佐)ㆍ이흥효(李興孝)가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았으나 우리나라의 풍습이 옛 것을 애호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필적으로 전해진 것이 드물다. 《청죽화사(聽竹畫史)》

○ 이상좌(李上佐)는 사인(士人) 아무개의 종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 공부를 하여서 그의 산수화ㆍ인물화는 당시에 가장 뛰어났다. 중종(中宗)이 특명으로 속량시켜서 도화서에 근무하게 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자 어영(御影)을 그렸고, 또 공신(功臣)의 화상을 그려서 드디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되었다. 그의 아들 흥효(興孝)도 그림을 잘 그려서 명종(明宗)의 어용을 그렸다. 《패관잡기(稗官雜記)》

○ 이뉴(李紐)의 자는 ☐이며 호는 금헌(琴軒)이다. 세조조(世祖朝)의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 이종준(李宗準)의 호는 용헌(慵軒)
연산 조에 상세하다. 이며, 글ㆍ글씨ㆍ그림을 잘하여서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다.

○ 최수성(崔壽城)의 호는 원정(猿亭)
중종 기묘년 조에 상세하다. 인데, 시ㆍ글씨ㆍ그림을 잘 하였다.

○ 유우(柳藕)의 호는 서봉(西峰)
결(缺) 인데, 그림을 잘 그렸다.

○ 신잠(申潛)의 호는 영천자(靈川子)
중종 기묘년 조에 상세하다. 인데, 포도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 근래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산수화에는 별좌(別坐) 김장(金璋)과 사인(士人)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와 학생(學生) 안찬(安瓚)이 있고, 영모(翎毛)ㆍ잡화(雜畫)에는 종실(宗室) 두성령(杜城令)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공조 낭관인 채무일(蔡無逸)이 있고, 묵죽(墨竹)에는 현감 신잠(申潛)이 있으니, 이들이 가장 드러난 자들이다. 
《패관잡기》

○ 종실 두성령은 중종ㆍ명종 때의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 하응림(河應臨)은 명종 기미년에 문과에 올라서 벼슬이 수찬(修撰)에 이르렀는데 일찍 죽었다. 시ㆍ글씨ㆍ그림을 잘하여서 삼절이라고 일컬었다.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의 만사(挽詞)에, “재주는 시와 글씨ㆍ그림에 뛰어났다.” 하였다.

○ 김제(金㮛)의 호는 양송당(養松堂)이며, 또 취면(醉眠)이라고도 한다. 안노(安老)의 아들로서 그림의 품격이 절묘하였다. 인물ㆍ산수ㆍ우마ㆍ영모ㆍ풀벌레에 정교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문장과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글씨를 아울러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청죽화사》

○ 정승 백사(白沙) 이항복이 젊었을 때에 그림 재주가 있어서 자못 뜻이 있었다. 그때에 김제가 그림으로써 온 세상에 명성을 독차지하였으므로 항복이 화법을 배우고자 하여 김제와 친한 사람에게 소개 편지를 받고, 자신의 그림을 소매 속에 넣어 김제의 집에 찾아가 먼저 편지를 전하였다. 그런데 김제가 그림을 구하려는 자로 오인하여 편지도 보지 않고 거만스럽게 흘겨보면서 예를 갖추지 않았다.항복은 매우 후회하고 한탄스러워 찾아온 목적을 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물러나와 마침내 그림에 종사하지 않았다. 재주를 믿고 남에게 교만을 부리는 짓은 이 무리들에게 늘 있는 모습이니, 백사에게는 도리어 지덕(知德)을 닦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어우야담》

○ 이정(李禎)의 호는 나옹(懶翁)이며, 상좌(上佐)의 아들이다. 그 업을 물려받아 8세에 안국사 부도(安國寺浮屠)를 그린 후부터 명성이 온 세상에 떨치었다. 그는 산수화에는 능하였으나 인물화에는 능하지 못하였고, 소품(小品)에는 훌륭하였으나 대작은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완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흠으로 여겼으나 김제의 다음가는 화가였다. 《청죽화사》 ○ 《패관잡기》에는 상좌의 아들이 흥효(興孝)라고 하였으니 이와는 다르다.

○ 종실(宗室) 학림정(鶴林正)의 그림은 품격이 고상하고 깔끔하였다. 인물ㆍ우마ㆍ영모를 모두 잘 그렸으나 산수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은 경윤(慶胤)이며, 호는 낙촌(駱村)이다.

○ 학림의 그림은 고담(枯淡)한 중에도 정취가 있고 고고(高古)한 중에도 색태(色態)가 있다. 십분 단련하고 완전히 일신하여 거칠거나 엉성한 데가 한 점도 없었으니, 김제에게 견주더라도 나으면 나았지 모자람이 없었다. 《청죽화사》 아우 죽림의 그림도 역시 학림에 버금갔는데, 화법이 대략 같았으며 말과 영모의 그림은 그 형을 앞설 정도였다.

○ 이징(李澄)은 학림의 서자(庶子)로서 호는 허주(虛舟)이다. 화가의 집에 태어나서 가업을 떨치고 문호를 넓혔는데 여러 체를 겸해서 잘하였으니 진실로 대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화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비록 넓었으나 웅장하지 못하였고, 비록 정밀하였으나 묘하지 못하였고, 비록 공교하였으나 변화되지 못하였으니 범상함이 그의 폐단이었다. 
《청죽화사》 인평대군(麟坪大君)이 낙산(駱山) 동편에 저택을 짓고서 이징에게 단청을 칠하고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더니, 색을 칠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는 ☐의 딸이고,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인데 포도와 풀벌레를 잘 그렸다.

○ 이우(李瑀)의 호는 옥산(玉山)이니 이이의 형이다. 시ㆍ글씨ㆍ그림을 잘하였으며, 겸하여 거문고도 잘 탔다.

○ 김명국(金明國)의 호는 연담(蓮潭)이다. 그의 화법은 이전 사람의 수법을 답습하지 않고 일반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였다. 작을수록 더욱 묘하고 클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역량이 웅장하고 짜임새가 역시 넓었으나 다만 그의 화법이 기묘한 데에 치우치고, 기세만 숭상하여 자못 주도 면밀한 묘미가 모자랐다.성질이 호탕스럽고 술을 잘하여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술을 요구하였는데 취하지 않으면 재주를 다 쏟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취해 버리면 그 공교로움을 다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뛰어난 것과 졸렬한 것이 서로 섞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화가의 적(賊)이라고 나무라기도 하였다.

○ 명국(明國)이 통신사를 따라서 일본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일듯 떠들썩하여 명국의 그림이라면 한 조각의 종이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여겼다. 한 왜인이 곱게 삼간(三間) 집을 지어 사방 벽을 모단(毛緞)으로 바르고 천금을 폐백으로 하여, 명국을 맞아 벽화 그리기를 청하였다. 명국이 술을 굉장히 마셔 취한 다음 비로소 붓을 찾으니, 왜인이 금가루 즙을 한 주발을 받들어 주었다. 명국이 그것을 받아 한입 가득히 머금고 벽의 네 모퉁이에 뿜어서 그릇이 다 빈 다음에 중지하니, 왜가 놀라고 성내어 칼을 뽑았다.명국은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고 휘두르니 산수와 인물이 그려져가는데 손놀림에 따라서 저절로 이루어졌다. 필세(筆勢)가 힘차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니 아마 평생의 역작이었다. 왜인이 놀라고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자손에 전하고 지키게 하니, 마침내 그 나라의 기관(奇觀)이 되었다 한다. 
《청죽화사》

○ 김식(金埴)ㆍ김집(金㙫) 형제는 김제의 손자이다. 김집은 소와 영모를 잘 그렸다. 김식의 호는 퇴촌(退村)인데 겸하여 산수화도 하였으나 모두 볼 만한 것이 없었고, 비록 소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으나 역시 그다지 정교하지는 못하였다. 김명국(金明國)과 같은 때의 사람이다. 식의 다른 호는 일포(日圃)이다.

○ 황집중(黃執中)은 포도를 잘 그렸다.

○ 어몽룡(魚夢龍)은 매화를 잘 그려서 우리나라의 일인자가 되었다. 먹칠을 너무 진하게 하여 소담한 정취가 조금 모자랐으나 필력이 뛰어나 힘이 있고 기이하며 고아하였다.

○ 석양정(石陽正) 정(霆)의 호는 탄은(灘隱)인데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의 칼날에 오른편 팔목이 상처를 입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는데, 그 뒤로부터 붓을 잡으면 귀신이 도우는 듯하여 갑자기 한 격조가 나아졌으니, 참으로 “팔이 끊김으로써 의원(醫員)이 되었다.”는 속담과 같은 일이었다.

○ 조속(趙涑)의 호는 창강(滄江)인데 타고난 재주가 매우 높았다. 매ㆍ죽ㆍ영모가 모두 깨끗하여 속되지 않았으며, 또 산수화도 잘하여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음이 좋았다.
○ 아들 지운(之耘)의 호는 매은(梅隱)인데 그도 역시 매화ㆍ영모로써 아버지의 명성을 이었다. 자는 운지(耘之)이다.
지운이 능 참봉(陵參奉)으로 있을 적에 우의정으로 있던 허목(許穆)이 능에 봉심(奉審)하러 왔다가 가졌던 부채에 그림을 청하였다. 지운이 붓을 휘둘러 그려서 돌려주었더니 회천(懷川 송시열)을 따르던 사람들이 나무라는 것이었다. 지운이 이로부터 붓을 걷어 치우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한다. 《청죽화사》

○ 허징(許澄)이 매화를 잘 그렸는데 조지운(趙之耘)과 같은 때의 사람이었으나 지운의 명성이 먼저 자자하였다. 허징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 지운이 화본(畫本)을 품고 가서 그림을 청하였더니, 허징이 알지 못하고, “어찌 조지운에게 구하지 아니하는가.” 하였다. 억지로 청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였더니 필법이 과연 고상하고 힘이 있었다. 지운이 놀라 탄복하고 비로소 자기의 이름을 말하니 뜻이 서로 통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허징은 난(蘭)도 아울러 잘 그렸는데 감사 지(墀)의 아버지이다. 《청죽화사》

○ 맹영광(孟英光)은 중국의 화공인데 효종이 심양에 체류했을 적에 영광에게 구천(句賤)이 회계에서 오 나라에게 욕보던 그림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효종이 환국할 때에 따라와서 잠저에 머물러 있었다. 궐내의 병풍과 장자를 많이 그렸으나 항간에는 그의 그림이 전하는 것이 드물다. 《청죽화사보(聽廳竹畫史補)》

○ 양사(兩司)에서 올린 차자(箚子) 가운데에, “가만히 듣자오니 한인(漢人)으로 맹가(孟哥) 성 가진 자가 그림에 능하다 하여 궐내에 점점 가까이 들어와 이징(李澄) 등 몇 사람과 함께 날마다 그림 그리기를 일삼는다 합니다. 완물상지하는 도구로 이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 나라 현종(玄宗)과 송 나라 휘종(徽宗)의 나라가 자연스럽게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한 가지 원인만은 아니나 서화를 몹시 좋아하여 먼저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용주집(龍洲集)》 인조조

○ 능계수(綾溪守)가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였으나 그의 그림이 졸렬하고 생소하여 석양정의 울타리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한다.

○ 석양정의 생질 가운데 김가 성 가진 자가 있었는데, 호는 위빈(渭濱)이며, 강릉(江陵)에 살았다. 화법을 그 외삼촌에게서 배워 대나무 그림도 몹시 같았으나 외삼촌의 명성에 가려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간혹 석양정의 작품과 혼동되기도 하였다.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그림은 품격이 매우 높았으며, 채녀(彩女 궁녀)와 수선화를 잘 그렸으나 재주껏 그리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두서(尹斗緖)가 그의 채녀도(彩女圖)를 보고서 선비의 그림 중에서 제일로 꼽았다.

○ 김창업(金昌業)도 역시 수선화를 잘 그렸으나 수묵화의 법은 전연 알지 못하였다.

○ 화가 진재해(秦再奚)가 숙종의 화상을 그렸다.

○ 허서(許舒)는 미수(眉叟) 허목의 아우로서 역시 그림을 잘 그렸으나 필적이 전해진 것은 드물다.

○ 정경흠(鄭慶欽)의 호는 육군당(六君堂)인데 난ㆍ포도ㆍ매화ㆍ대나무를 자못 잘 그렸으나 다른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 경흠의 아들 정유복(維復)ㆍ정유점(維漸)은 모두 포도를 잘 그렸다. 유승(維升)의 호는 취은(醉隱)인데 인물을 잘 그렸다. 다만 강건함을 숭상하여 기세가 왕성했으나 끝맺음이 긴절하지 못하고 다듬는 것이 정하지 못하였다.
○ 정경흠의 누이동생은 현감 권육(權堉)의 아내인데 그림 품격이 뛰어났고, 그의 손자 권경(權儆)도 포도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 정유점(維漸)의 사위인 심정주(沈廷周)도 권경(權儆)과 같이 꼽았으며, 정주의 아들도 역시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는데, 정선(鄭敾)에게 배웠다.

○ 홍득귀(洪得龜)의 호는 창곡(蒼谷)인데 그의 산수화가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아담하였으나 평생 배운 것이 8폭의 작은 병풍 한 벌에 불과하였다. 천 폭을 그려도 변화가 없이 비슷하였고, 인물화는 모양을 만들지 못하였다. 먹을 쓰면서도 깊고 얕음을 알지 못하여, 다만 진하지 않은 먹물만 사용하였으며, 영모 그림도 김식(金埴)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윤두서(尹斗緖)의 화평(畫評)에 득귀(得龜)가 이징(李澄)보다 낫다고 한 것은 공정한 평이 아니었다.

○ 승지 홍수주(洪受疇)는 포도를 잘 그렸으나 아울러 매화도 잘 그렸다. 어느날 소녀가 남의 붉은 비단 치마를 빌려 입었다가 잘못하여 장을 쏟아 더럽혀서 근심하고 번민하여 어쩔 줄 몰랐다. 수주는 걱정할 것 없다 하며 그 치마를 화본(畫本)으로 하여 진한 먹으로 한 그루의 포도를 그린 다음, 역관(譯官)에게 부탁하여 중국 사람들의 시장에서 팔게 하였더니, 과연 푸른 비단과 붉은 비단 몇 감을 얻어 돌아왔다. 소녀가 크게 기뻐하여 빌렸던 치마를 되갚고 나머지를 차지하고서 또 전과 같이 하기를 청하였다. 수주는 웃으면서, “이런 일은 항상 할 수 없다.” 하였다.

윤두서(尹斗緖)는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의 손자이며, 호는 공재(恭齋)이다. 인물과 동물ㆍ식물을 그릴 적에는 반드시 종일토록 주목하여 그 참 모습을 얻은 다음에야 그렸다. 홍득귀(洪得龜)가 그의 용과 말의 그림을 보고 놀라면서, “공민왕 이후에는 이런 작품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저명해졌다. 두서는 인물화는 잘 그렸으나 산수화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먹을 너무 짙게 하여서 소담(疏淡)하고, 평원(平遠)한 멋이 부족하고 포세(鋪勢)도 익숙하지 못하여서 무르익고 윤택한 태도가 없었다. 일생 동안의 작품이 화첩 정도였고, 병풍ㆍ족자는 드물었다.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은 체하여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작품 내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전해진 그림이 드물다.
윤두서는 긍지가 너무 과하여 남의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으나 오직 이사관(李師寬)ㆍ이하곤(李夏坤)ㆍ민용현(閔龍見)이 요구하면 즉시 응하여서 이 사람들은 모두 3, 4첩(帖)씩 간직하였고, 장자(障子)에 그린 것도 많았다. 하곤에게는 만마도(萬馬圖)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서인(西人)이었으므로 이 때문에 비방(誹謗)이 떼지어 일어났다. 《청죽화사》
숙종 말년에 임금의 화상을 그리려고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이면 벼슬아치거나 선비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청역(廳役 어용청)에 예속시켰다. 그때에 두서(斗緖)는 마침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임금이 기복(起復)시키고자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의논하기를, “예에, ‘군자는 남의 친상(親喪)을 빼앗지 아니하며 또한 친상을 빼앗길 수도 없는데, 오직 전란(戰亂) 때만은 불가피하다.’ 하였습니다.지금 전하의 어용(御容)을 모사하는 것이 사체가 매우 중하나, 전란의 위급함과는 다릅니다. 전하께서 두서를 꼭 기복시키는 것은 남의 친상을 빼앗는 것이며, 신하가 왕명을 그대로 받들면 이것은 친상을 빼앗겼다 할 것이니 결코 좋은 시대에 있을 일이 아닙니다. 전란이라 할지라도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임금으로서 상중의 신하를 기복시키는 것은 잘못이나 상중의 신하라도 임금의 명대로 거행함은 예(禮)이다’ 하였는데, 하물며 전란이 아닌데도 신하를 기복시킬 것입니까. 국가를 유지함은 예법을 엄하게 하는데 있으니, 경솔하게 변경하고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또 명이 내린 뒤에 명을 받은 자가 마침내 그대로 받들지 아니하면 한갓 국가 체면만 손상되고 일에 무익하오니 이 점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두서는 부끄럽게 여겨서 해남(海南)으로 아주 돌아가서 화필(畫筆)을 끊고 그리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죽었다.
○ 두서는 사인(士人) 심득경(沈得經)과 금석(金石) 같은 사귐을 하였다. 득경이 죽으니 두서가 득경의 화상을 추작(追作)하여 그 집에 보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는데, 손숙오(孫叔敖)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 두서의 아들 덕희(德熙)도 역시 그림으로 세업을 이었으며, 덕희의 아들 용(愹)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 유덕장(柳德章)의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수운(峀雲)인데 대나무를 잘 그렸다. 덕장의 6대조인 판서 진동(辰同)은 호가 죽당(竹堂)인데 중종과 명종 연간의 사람으로 대나무를 잘 그려서 품격이 석양정보다 높았으니 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아마 내려온 곳이 있었던 것이다.

○ 대개 사물은 반드시 대(對)가 있는 법인데 화가도 역시 그러하다. 그 시대에 종장이 있어 일대의 재주를 독차지하면 또 반드시 상대할 자가 나서 명성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강희안(姜希顔)이 나오니 안견(安堅)ㆍ최경(崔涇)이 이를 상대하였고, 신세림(申世霖)ㆍ석경(石敬)과 이불해(李不害)ㆍ이상좌(李上佐)가 상대되었으며, 김제(金㮛)가 나오니 이정(李禎)ㆍ학림정(鶴林正)이 이를 상대하였고, 어몽룡(魚夢龍)이 나오니 석양정(石陽正)이 이를 상대하였으며, 김명국(金明國)이 나오니 이징(李澄)이 이를 상대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죽은 지 거의 백 년만에 처음으로 윤두서(尹斗緖) 한 사람이 나왔는데, 아무도 그의 명성을 나누어 차지하는 이가 없으므로 두서의 명성이 이전 사람보다 더욱 성하였다.

○ 정유승(鄭維升)은 비록 뛰어난 예술을 가졌으나, 소탈한 것은 예술가의 상태(常態)이므로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본(畫本)의 정(精)하고 거친 것에 관계없이 문득 그리는 것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이것은 천한 재주이다. 잘 그리나 못 그리나 그다지 관계가 없으니, 헐뜯고 칭찬하는 데 따라 기뻐하고 성낼 것 없다.한때 유희에 지나지 않는데, 홍득귀(洪得龜) 같은 자는 영구히 전할 훌륭한 사업인 양 여기고, 긍지가 너무 심하여 이금(泥金)ㆍ모단(毛緞) 및 비단 등이 아니면 붓 대기를 즐겨하지 않는데 나는 그런 짓을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모두 《청죽화사》에 들어 있다.

○ 겸재(謙齋) 정선(鄭敾) 원백(元伯) 동지ㆍ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ㆍ김홍도(金弘度)현감ㆍ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ㆍ연객(煙客) 허필(許泌)ㆍ신한평(申漢枰)ㆍ심사하(沈師夏)ㆍ변상벽(卞相璧)ㆍ이제현(李齊賢)율촌(栗村)ㆍ칠칠(七七) 자야(字也) 최북(崔北) 호생관(毫生館)ㆍ조영석(趙榮祏) 관아재(觀我齋)ㆍ송민고(宋民古) 포(葡)ㆍ정철조(鄭喆祚) 석치(石癡)ㆍ조세걸(曺世傑) 패주(浿洲) 동지(同知)

 

[주D-001]주서백선(朱書百選) : 정조가 주자의 서한 1백 편을 뽑아 모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