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 벽화
|
"수렵도", 무용총 |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하여 잦은 분쟁 속에서도 삼국 중 가장 먼저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고구려의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선진적 통치체제의 완비에 따른 힘의 확산을 반영한 고구려의 미술은 불교의 공인 아래 나타난 불교미술과 고분미술이다.
4세기~5세기초
평양, 안악 지역: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집안, 환인 지역: 각저총/ 무용총/
5세기 중엽~6세기 전반
평양, 안악 지역: 쌍영총/ 수리산변화분/ 진파리4호분/ 진파리1호분
집안, 환인 지역: 장천1호분/ 통구사진총
6세기 후반~7세기 중엽
평양, 안악지역: 강서대묘/ 강서중묘
집안, 환인지역: 오회분5호묘/ 오회분 6호묘/ 외괴분 | 고구려는 4세기 이후 궁궐을 마련하고 거대한 사찰을 지으면서 지배문화의 권력과 힘을 표출하였고 고분축조양식을 변화시켰다. 고분에서는 적석무덤의 전통이 사라지고 석조묘실을 갖춘 거대한 봉토무덤으로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석조묘실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내부 벽면에 그림을 장식하는 일이 유행하게 된다.
고구려의 벽과가 그려진 무덤은 지금까지 약 80 여기가 밝혀져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통구(通溝)지방(중국 길림성 집안)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변에 20 여기,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 50여 기가 넘게 분포해 있으며 황해도 안악지방에서도 발견되었다. 지배층의 소유물임을 나타내 듯 벽화의 내용은 무덤 주인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생전의 기념되는 사건을 그리거나 생활 풍속도, 사진도 등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다양한 장식무늬, 그리고 천정에는 해, 달,별자리와 설화적인 신선이나 동물 등 상상의 천상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
|
고구려 고분 분포도: 전체 |
벽화가 그려진 취지는 시신을 아치하는 무덤의 널방(현실玄室)을 파장자가 살 미래의 영원한 세계로 상정하여 영혼의 실재성을 강조하려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인의 생활 신앙에서 비롯된 영혼불멸사상과 종교관을 엿볼수 있다. 이전부터 존속해 온 조상신, 천지신, 자연신 숭배의 토착신앙과 지배 이념으로 정착된 유교, 불교, 도교 등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분 벽화는 고구려 지배 귀족 층의 세계관과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데 다양한 내용의 인물풍속도는 출습, 복식, 건축 양식 등 고구려의 사회상을 복원시키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런한 장식벽화는 안악 3호분, 통구사신총, 강서대묘처럼 판석을 잘 다음은 석면 위에 직접 그리거나 덕흥리벽화분, 무용총, 진파리1호분처럼 회벽을 바른 위에 그린 프레스코 형식을 취하였다. 벽화수법으로는 먹이나 붉은 선으로 윤곽을 쓴 구륵법과 직접 채색만으로 형상을 그려내는 몰골법이 사용되었다. 벽화의 채색은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과 초록색, 남색, 보라색, 갈색 등 중간색이 혼용되었으며, 검은색, 흰색을 써서 명도나 채도의 변화도 보여준다. 도 무덤에 따라 갈색조, 붉은 색조, 푸른 색조로 통일하는 사례가 많으며, 금박이나 은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무덤도 발견된다.
|
고구려 고분 분포도: 집안(즙안), 환인 지역 | 그 외에 벽화고분에는 스키타이, 만주, 고창국 등 전통적인 북방계 문화와 비단실을 통해 중국에 들어온 서역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묘실구조상 서방에서 전래된 형식으로는 천정축조방법인 묘실 네 구석 위에 삼각형 받침을 얹은 말각조정(抹角藻井)을 틀 수 있다. 이 축조법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의 분묘나 사당 등에 나타나고 한대의 석실묘, 육조의 돈황, 운강의 석굴사원에도 응용된 것이다. 그러한 묘실의 천정구조는 소우주와 상상의 선계(仙界)를 표현한 벽화처럼 영생을 기원하는 종교적, 사상적 차원에서 차용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도굴과 손괴가 심하고 연대가 밝혀진 것이 많지 않아서 정확한 축조시기, 시대에 따른 양식의 변화 등을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무덤의 구조형식과 벽화, 그리고 새로 발견된 명문이 있는 무덤을 통해서 볼 때 그 제작 시기는 고구려가 봉건관료제를 완비하고 맹위를 떨치던 4세기에서 7세기 중엽으로 좁혀진다. 이 시기를 대체로 3기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
고구려 고분 분포도: 평양, 안악 지역 |
4~5세기 초에는 고구려적인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을 정착시켰다. 묘실은 곁간이 달린 다실 구조이나 그것이 퇴화한 감실구조, 그리고 벽화고분의 일반적 구조인 양실과 단실이 혼재한다. 벽화의 내용은 무덤주인의 초상화를 비롯, 인물풍속도가 주류를 이루며 사진상도 함께 등장한다. 5~6세기에는 고구려적인 특질을 잘 살린 내용과 표현력이 크게 진전된다. 묘실은 양실과 단실이 대부분이며, 내용은 인물풍속도 중심이거나 인물풍속과 사신도가 공존하는 경향을 띤다. 후기의 6세기 후반~7세기 중엽에 와서 벽화 고분은 단실 구조에 사진도로 그 전형을 형성하고 완숙한 기교의 회화적인 세련미가 최고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