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33, 34, 35, 36. 37 / 긴내 김태준

2016. 1. 3. 06:31잡주머니

 

[김태준의 문향] 33, 34, 35, 36. 37  /  긴내 김태준

 

行雲流水
2010.06.09 14:43

     

 

 

<33> 매창, 재주와 정이 넘쳤던 부안 명기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매창(梅窓)으로 널리 알려진 부안 명기 이계랑(李桂娘ㆍ1573~1610)은 임진란 전후에 한시(漢詩)를 잘 쓴 시인으로,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으로 불리었다. 허균(許筠)유희경(劉希慶ㆍ1545~1636)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 소객들이 그를 찾아 부안을 오르내렸고, 그들과 주고받은 시 58편이 <매창집>에 전한다. 38년이란 짧은 삶에도 그 예술적 재주와 정(情)으로 나라 안에 이름났다.

  "일찍이 남국에 계랑 이름 소문 나/ 글 솜씨 노래 재주 서울까지 울리더니/ 오늘에야 그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하구나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촌은집>"

  유희경이 젊어서 부안에 놀며 <계랑에게 준 시(贈癸娘)>인데, 계랑 또한 그를 보자, "유(劉)와 백(白) 가운데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유희경과 만리(萬里) 백대붕(白大崩)이 문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백대붕은 임진년에 의병활동 중에 전사했고, 유희경도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임란 전 유희경이 마흔여덟, 매창이 스무 살쯤의 일이리라. 그리고 지루한 전쟁이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1601년 7월에 매창은 부안을 지나던 교산 허균과 만났다. 교산은 이때 비를 피해 객사에 머물렀는데, 매창이 거문고를 끼고 찾아와 하루 종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고 했다. 교산이 33, 매창 29살이던 한창 시절에 그는 매창을 이귀(李貴)의 정인(情人)이라 조심했고, 밤이 되자 매창이 자기 조카딸을 교산의 침소에 들여보냈다고 했다. 이귀는 일찍이 장성현감과 김제군수를 지낸 사람이고, 그 전에 매창은 석주(石洲) 권필(權韠)과도 사귀었고, 1602~03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된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과 사귀었다고 한다. 1607년에는 유희경이 일 때문에 부안에 와서 15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열흘만 묵어가라는 시를 주었다 한다.

 

  매창의 정과 그리움을 가장 잘 그려 유희경에게 주었다는 <이화우> 시조 한 수가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창된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을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 <진본 청구영언>

  배꽃 흩날리는 봄날에 울며 잡고 이별한 그 님을 천리 밖에서도 잊지 못하는 가을날의 외로운 정이 살갑다. 그 매창이 38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을 때 유희경은 "이원(梨園)에 한 곡조 남겨놓고 갔구나(只有梨園餘一曲)"하여 그도 '이화'로 조상했다. 허균은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였다(淸歌解駐雲)"는 시를 읊어 통곡했다고 하는데, 남녀의 정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강조했던 교산과 매창의 평생 사귐이 진정(眞情)을 실감케 한다. 부안의 아전들이 그미의 시편을 모아 《매창집》을 전했는데, 그미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는 매창 뜸(매창 마을: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비에서 인용)에선 오늘도 남녀노소 <이화우>를 읊으리라.

 

 

<34> 장유 "시는 천기(天機)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시(詩)는 천기(天機)이다. 소리로 울리고 색깔과 윤기(色澤)로 빛나니 그 청탁(淸濁)과 아속(雅俗)이 자연에서 나온다. 소리와 색깔과 윤기는 사람이 만들 수 있지만 천기의 오묘함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 …… 왜 그런가? 참됨이 없기 때문이다. '참'이란 무엇인가? 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장유;<석주집 서(石洲集 序),《국역석주집)》권 1, 참조)

  계곡(谿谷) 장유(1587-1638)는 이른바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하여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택당 이식 함께 조선조 한문 4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리고 임병양란 이후 양명학을 받아들여 허학(虛學)을 비판하고 '참'을 회복하자는 주장과 실천을 편 실심(實心) 실학자로 이름났다. 조선 후기 비평가의 한 사람으로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양란 뒷시대의 허학을 비판하면서, 이런 풍조와 달리 '참'에 가까웠던 사람으로 서경덕과 함께 장유를 꼽은 바 있다. 서경덕이 주자학의 체계를 기일원론으로 지양하여 안에서부터 개혁하고자 했다면, 장유불교양명학과 같은 주자학 밖의 사상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 사람이었다.

  장유는 말하기를, 중국에는 학술이 여러 갈래여서 문(文)이나 길은 하나가 아닌데, 우리나라는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정자(程子) 주자(朱子)만을 칭송하고 다른 학문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그는 이것이 참됨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이란 무엇인가? 천기를 일컫는 것이다. 그는 이런 꽉 막힌 구속 속에서는 실심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비판하고, 여러 학문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학문이 열매 맺을 수 있다고 했고, 스스로도 애썼다. 열매는 실(實)이며, 가득 참이며, 참됨(眞)이다.

  위에 보인 <천기론>은 이런 그의 사상의 일단이다. 그는 특히 문장으로 뛰어나서, 당대의 명사인 송시열김창협 등이 모두 장유의 문장을 조선 제일 평했다. 그런 장유가 스스로 시는 잘 못한다고 겸사하면서도, 당대의 허학을 비판한 것처럼 또한 시를 천기로 평했다. 천기는 하늘의 기운이며, 자연의 기운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런 천기를 타고난 시라야 참 시라는 것이며, 이런 노래라야 자연을 움직이고 귀신을 통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의 말만으로 시를 볼 뿐, 시인의 사람됨으로 시를 볼 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조선조 최대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조선 건국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천기에서 찾은 사람들에는 허균과 김창협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본바탕을 천리, 천기로, 그 작용을 정(情)으로 본 것은 장자(莊子)나 양명학에 가까웠다.


  "시는 천기다"라고 하는 말은 시의 본바탕이 '참'임을 뜻한다. 장유를 "실심에 바탕하고 실학에 법(法)하였다"(朴瀰, 《계곡집(谿谷集)》序)고 한 평가도 우리 학문의 새 전통으로 '실심 실학'이 참 학문으로 싹트던 변화를 웅변으로 말해 준다.

 

 

<35> 김만중의 비판지성과 실학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중세적 규범에 대한 찬반 논란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17세기였다. 당대 대표적 문인 중 한 사람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92)<서포만필(西浦漫筆)>을 써서, 비판지성으로 새로운 인문정신을 가늠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한 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로 태어나 유학자로 출세한 서포는 임ㆍ병 양란 뒷시대의 허학(虛學)을 비판하면서, 본지풍광(本地風光)과 같은 불교용어를 이끌어 새로운 인문(人文)의 질서를 모색하였다. 유학자인 그가 이런 사상적 변화에 이른 것은 37살, 당쟁에 휩쓸려 유배생활에 내몰리면서부터의 일이다. '본지풍광'은 선불교 용어다.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성품을 찾아 스스로의 본바탕(本地)을 알면, 저절로 흘러 넘치는 지혜(風光)로 부처님의 어진 마음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금강산을 보기로 들어, 정작 산에는 가보지도 않고 그림이나 보고 책이나 뒤지면서 금강산을 말하는 그런 학문을 권리풍광(卷裡風光) 지상면목(紙上面目)이라고 하여, 거짓 공부로 비판했다.

  김만중이 이런 거짓 풍조와는 달리 본지풍광, 곧 '참'에 가까웠던 사람으로 서경덕(徐敬德)장유(張維) 두 사람을 꼽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서경덕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지양(止揚)하려 한 주자학의 체계 장유양명학을 받아들여 주자학 밖에서 부정하는 유학의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선의 건국 이념인 주자학이 뿌리부터 흔들린 것은 임ㆍ병 양란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고, 불교나 양명학과 같은 이단적 사상에서 비판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런 시대변혁의 단적인 보기였다. 김만중이 이 두 선배 학자를 지명하며 불교 논리로 유학의 거짓을 비판한 뜻은 이런 악착스러운 구속 속에서는 실심(實心)으로 향학(向學)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이었다. 서포는 같은 글에서 문학작품에도 본지풍광이 있으며, 이렇게 거짓이 없고 참된 말로 된 문학이라면 모두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다고 하여, 민중의 말과 국어문학을 또한 중시했다.

  이렇게 17~18세기에 발흥한 실심실학(實心實學)은 '참' 학문 운동이며, 실학의 본바탕이 실심에 있었고, 이것이 조선 실학의 제일 개념이다. '실학'은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조선에서 일어나 꽃핀 학문으로, 실학을 일으키고 발전시켜 온 나라는 조선이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제 나라의 학술사상사를 인식하는데 쓰지 않았던 개념이다. 그러기에 실학을 근대 학문으로 체계 세운 정인보(鄭寅普) 선생도 실학을 실심의 학문으로 정의했다.

  실학이 실용(實用)의 학문이란 전제에서 동아시아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경제를 위해서 온 나라 강(江)을 파헤치는 것과 같은 실용주의는 실학이 아니다. 실학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고 지속 가능한 생명의 문명을 만들어 갈 학문, 학문과 삶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할 참 학문운동이다. 함석헌 선생이 <새 삶의 길>에선 한 말로 결론을 삼을 만하다. "참은 맞섬(直面)이다. 하나만 아는 일이다.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하는 일이다."

 

 

 <36> 식산 이만부의 실심실학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17세기 이후에 조선의 '실학 운동'의 첫 명제가 실심실학이었다. 조선의 실심실학은 전통 주자학을 비판하여 김만중처럼 불교 논리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장유정제두(鄭齊斗)처럼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고 정주학(程朱學) 또한 마음의 학문으로 심학화(心學化)하고 있었던 점에서 기호(畿湖)학파의 김원행ㆍ홍대용들과 함께 영남 지방의 고학자(古學者)로 식산 이만부(息山李萬敷,1664-1732)가 주목을 받았다. 이만부는 성호 이익(李瀷)의 친족이 되는 남인계(南人系)의 유학자로, 당대 세속 유학의 거짓됨을 비판하면서, 상주(尙州) 지방에 숨어 연구와 실천적 삶을 산 실심실학자였다(권태을;'식산의 실심실학'<息山李萬敷文學硏究> 참조).

  "왜 참[實]에 힘쓰라 하는가? 요새 사람들이 '참'에 힘쓰지 않고 겉만 꾸미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마땅히 일용인사(日用人事)에서 그 이치[理]를 구하고 본받아 행해야지, 만일 인사의 배움에도 이르지 못하고서 먼저 고원(高遠)한 일을 구한다면, 끝내 실득(實得)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충성과 믿음[忠信]이 있고, 행실에 어긋남이 없으며[篤敬], 들어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히 하는 일이 곧 실학이라고 할 만하다. 실학에 익숙해지면 실심에 이를 수 있지만, 참으로 실심이 없다면 얻은 바인들 어찌 오래 자기 것으로 하리오?" ('書贈柳勵仲',<息山先生文集> 권11)

  친구에게 써 보낸 이 글에서 "참[實]에 힘쓰지 않고 겉만 꾸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라는 전제는 당대뿐이 아니고, 요즘 세상에 더 절실한 비판이며 충고이리라. 이만부는 "하늘도 '참'이 있어서 하늘이 되고, 땅도 '참'이 있어 땅이 되듯이, 사람도 '참'이 있어야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고, 실심이 없으면 실사(實事)가 없음을 강조해 마지않았다.

  여기서 이만부가 '실심'을 사람의 마음뿐이 아니고 하늘과 땅까지도 다름없이 사람답게 하는 요소로 이해했다는 데 주목하면, 내 마음에 실심이 있으면 하늘의 마음[造物의 生意]과 땅의 마음이 같은 실심으로 사람답게 된다는 이일(理一)의 이치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산을 본다고 어질어지고, 물을 본다고 슬기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곧, 어짊[仁]과 지혜[智]를 체득하여 마음에 얻으면 저절로 이 같은 뜻이 있어서 가히 안팎의 몸이 합해진다."('조성지에게 답함(答趙成之'(二書)<文集>卷六)

  산과 물은 우리의 큰 몸이며, 살이며 피다. 우리의 이 큰 몸이 4대강 삽질로 찢기고 신음하며 죽어 간다. 강은 산에서 흘러 스스로 큰물을 이루어 바다에 이른다. 이것이 순리이며, 이렇게 숫만년 오늘에 이른 강 스스로의 지혜이며, 자연이다. 자연은 스스로 있는 '참 마음'이다. 강을 파는 일은 산을 파는 일이며 하늘의 마음을 파는 일이다.

 

 

<37> 살 만한 땅(可居地)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이중환(李重煥,1690-1752)<택리지(擇里志)>를 써서 삶의 지리학을 시도한 실학자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가거지'를 큰 주제로 사대부(士大夫)의 살 만한 땅을 논했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발달한 풍수지리(風水地理)와 함께, 사찬(私撰) 인문지리지로 역사적 저작을 남겼다.

  "무릇 살 터를 잡는 데에는 지리(地理)를 첫째로 삼으며, 생리(生利)가 그 다음이고, 그 다음은 인심(人心)이며, 다음이 산수(山水)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가 모자라도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가 좋더라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수 없으며, 생리가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수 없다. 지리와 생리가 갖추어 좋더라도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며, 근처에 볼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정(性情)을 원만히 할 수 없다. (<복거총론(卜居總論)>)

  18세기 전반기 이익(李瀷) 문하의 실학자로, 정계에서 몰려난 경기 남인인 그는 새로운 가거지를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중환은 일찍이 24살에 과거에 합격하고, 32살에는 정 5품 병조좌랑(兵曹佐郞)의 벼슬에 올랐으나, 보름 뒤에는 당쟁에 휘말려 쫓겨나고, 36살에는 목호룡(睦虎龍)의 일당으로 구금되고 절도(絶島)에 유배되는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 덕분에 전라도와 평안도를 뺀 온 나라를 유랑하며, 그는 사대부의 가거지를 모색했고, 발로 뛰는 지리학자로 이 책을 써냈다. 그런데 가거지가 '지리ㆍ생리ㆍ산수'와 함께 '인심'을 중요 요소로 든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처가 쪽의 풍수가[地官] 목호룡과 20대부터 명당을 찾아 나라 안의 산과 들을 헤맨 사람이지만, 이 책에서는 죽어 묻힐 묘소가 아니라 양택(陽宅), 곧 살 만한 땅에만 관심을 두었다. 사대부뿐이 아니고 모든 백성이 살 만한 땅을 찾아 쓴 글이 '복거총론'이고, 그 중에도 '인심'의 결론은 그의 정치평론이며, 삶의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시골에 살려면 인심이 좋고 나쁜 것을 따질 것 없이 같은 당색(黨色)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고, 문학을 연마하는 일을 닦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을 택하는 것만은 못하니, 문을 닫고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며 혼자 자신을 잘 수양한다면 비록 농민이 되든 공장이가 되든 장사아치가 되든,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인심>)

  '인심'이 아니라 '도심(道心)'을 말하고, 혹은 실심(實心)을 말해온 사대부들이 퇴폐하여,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이라면 인심을 논할 것도 없다는 역설. 사대부라면 오늘날의 사회 지도층? 인심은커녕 민심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가거지라는 결론.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수경 스님 소식이 잠시 요즘 인심을 상징하는 듯 허허하다.

 

 

 http://blog.daum.net/gbbae56/11806633

다음 블로< 배기봉의 '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자료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