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28, 29, 30, 31, 32 / 긴내 김태준

2016. 1. 3. 05:39잡주머니

 

 

[김태준의 문향] 28, 29, 30, 31, 32 / 긴내 김태준

 

 

行雲流水 2010.06.09 14:18

      

 

 

<28> 임란 포로 강항의 '간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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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은 강항(睡隱 姜沆,1567-1618)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갔던 전쟁포로로, 덕천(德川) 일본에 처음으로 유교를 가르친 사람이며, 죽살이치는 포로 생활을 <간양록>으로 남겼다.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호조랑(戶曹郞)이었던 그는 정유재란을 만나 군량미를 독려하는 직책으로 고향에 내려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다. 정유(丁酉,1597)년 9월 14일에 가족과 함께 영광(靈光) 앞바다에 피난의 배를 띄우고 23일 왜적에 잡혔는데, 이 때 무안 앞 바다를 메운 600~700척의 거의 절반이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남녀를 실은 배였다고 한다. (<적중봉소(敵中封疏)>)

  문벌이 높은 문인학자였던 강항은 왜(倭)의 땅에서도 지방 토호의 보호 속에 일본에 퇴계학(退溪學)을 전한 유학의 스승이 되었고, 그 옛날 백제의 왕인(王人)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던 뱃길로 그는 다시 조선 유학의 씨를 뿌린 제2의 왕인박사였다.

  그러나 4년이나 이어진 포로 생활 속에서 당연히 고국을 향한 망향(望鄕)과 도망할 노력이 이어졌고,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잡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내졌다는 무관 이엽(李曄)이 도망하다 잡혀 자결하며 남긴 한 편의 절명사(絶命辭)에 큰 감명을 받았다.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恨)이 금방 길어지고/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아내는 낮 촛불처럼 아침볕에 곡을 하리./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 게고/ 대대로 지킨 선영(先塋)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모두 다 삼한(三韓)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어찌 쉽게 이역에서 우양(牛羊)과 섞이리.” (원 한문,<국역 해행총재>)


  전라 좌병영(左兵營)의 종3품 우후(虞侯) 벼슬로 포로 된 이엽은 고국 동포들과 결탁하여 배를 사서 하관(下關)까지 가서 왜적의 추적을 받자, 칼을 빼서 자결하며 이 시를 남겼다고 했다. 강항은 이 시를 얻어 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이렇게 차운(次韻)했다.

  “만권의 책을 읽은 서생이 면목 없네/ 두 해나 궁발(窮髮)에서 숫양(羝羊)을 먹이다니/ 인의(仁義)를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가훈(家訓)인데/ 아이들까지 개와 양에게 절하는 것 부끄럽네” (원 한문)

‘궁발’은 초목이 나지 않는 모진 땅, 이 땅에 포로 된 동포들에게 그는 격문을 보내 귀국을 독려하고, <적중봉소(敵中封疏)>로 비밀문서를 조선 임금에게 보냈다. 물론 스스로 귀국을 감행했다. 이 정유년에 포로 되었던 정희득(鄭希得)은 이때 일본에 끌려 간 조선 사람이 10만 이상이리라고 했는데(《月峯海上錄》), 고국으로 쇄환(刷還)된 수는 7,5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內藤雋輔;<文祿慶長役被擄人の硏究>,東京大學出版會).

<간양록>은 같은 이름의 방송극과 조용필의 애끓는 주제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임진란 실기문학이며, 강항의 자취는 그가 머물렀던 일본 땅 애원현 대주시(愛媛縣 大洲市)에 지금껏 역력하다.

 

 

<29> 지봉 이수광의 '조완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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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의 일대 사건으로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무려 7년이나 이어진 장기전쟁으로 문학사에 끼친 영향도 두드러진다. 이 시대의 문인 실학자로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1563-1628)은 이 전쟁 체험과 시대적 반성의 기틀을 《지봉유설》20권으로 정리하면서, 백과전서적 내용 가운데도 세계의 지리와 지도에 두드러진 관심을 보인 사람이다.

  그 가운데 임진란 포로로 일본 무역선의 서기가 되어 안남(安南, 베트남) 등 해외로 활약했던 조완벽(趙完璧)의 사적은 이 책에서는 <이문(異聞)>조에 전했다. <조완벽전>이라고 한 이 글에서는 완벽이 약관에 정유재란을 만나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고, 장사하는 왜인의 서기가 되어 세 번이나 안남에 다녀 온 뒤에 고국에 돌아와 탈 없이 살았다고 전했다. 이 밖에 조완벽의 말이라 하여, 일본과 안남의 여러 이상한 이야기를 소개하여, 임진란 이후에 한국문학에서 지리개념과 세계인식이 확대된 모습을 두루 전한다. 이 조완벽의 전기는 이지항(李志恒) 《표주록(漂舟錄)》에도 전하고, 이보다 자세한 <조완벽전>이 안정복(安鼎福)《목천현지(木川縣志)》에도 실려 전한다. 특히 안정복의 글에서는 조완벽이 안남의 총대감 문리후 정초(文理侯 鄭勦)의 환대를 받아 알게 된 사실로, 안남에서 이수광의 한시집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널리 읽히는 문학 교과서였다고 했다. 지봉은 일찍이 진위사(鎭慰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던 1597년, 안남의 연행사(燕行使) 풍극관(馮克寬)과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서 50여 일간 함께 머물며 사귄 바 있었고, 이때의 창수시(唱酬詩)가 두 나라에 회자(膾炙)되고, 특히 안남에서 지봉의 명성을 높였다.

   두 사람의 옥하관 창수는 그보다 2 세기가 지난 1790년(정조 14) 열하(熱河)에서 조선 연행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월남 이부상서 반휘익(潘輝益) 사이에 "천고의 기이한 만남[千古奇遇]"으로 반추(反芻)된 바 있었다(서호수;《연행기》제 2편). 이때 서호수가 조선의 지봉과 안남 사신의 창수시를 외웠고, 반휘익 또한 "지봉의 시는 운치가 순아(醇雅)하고, 풍극관의 시는 의장(意匠)이 굳세다"고 평하여 두 나라 문학 교류 200년의 역사를 재확인했다. <조완벽전>은 이렇게 《지봉유설》을 통하여 조선과 월남의 문학의 교류사를 전한다.

   이 임란 전쟁에 장기[長崎] 노예시장에서는 포르트갈 상인들에게 팔려 나간 조선 포로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하며, 조선 소년 다섯 명을 사서 인도의 고아까지 데리고 가 풀어 주었다는 피렌체 상인 까르레티의 증언(《동방견문록》)도 전한다. 그 가운데 안토니오 꼬레아는 로마에 이르러 신부가 되었다고 하며, 이 소년을 모델로 그렸다는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소년>은 또 다른 <조완벽전>일 터이다. <조완벽전>은 <한국사전(傳)>으로 방송된 바 있지만, 작고한 소설가 한무숙(韓戊淑) 선생이 소설 작업으로 나에게도 의견을 물으시던 미완의 <조완벽전>은 일본의 조선병합 100년을 뼈아프게 되돌아보는 한일관계사의 한 단면이며, 또한 한국으로 시집오는 수많은 월남 아가씨의 애환이기도 할 터이다.

 

 

<30> 허균이 지어 올린 사명당의 시호(諡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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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임진란의 승병대장(僧兵隊將)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 쇄환(刷還)에 몸바쳤던 사명당 유정(四溟堂惟政ㆍ1544-1610)의 입적(入寂)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란의 뒷수습을 위해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 갈 사신으로 사명당을 뽑았을 때, "성세(盛世)에 이름난 장수도 많았지만/ 기이한 공(功)은 노스님이 으뜸이었네"라 노래한 젊은 문인 이수광(李晬光)의 송별시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이 시는 사명당이 이 전쟁에서 보여준 지도력과 왜국을 상대한 외교 능력을 칭송하고, 스스로 "허리춤에 찬 한 자루 긴 칼/ 오늘날 남아(男兒)된 것 부끄러워라" (《지봉유설》 원한문)고 끝맺고 있다.

  그런데 이런 승병대장 사명당이 해인사 홍제암에서 돌아가자, 그와 서산대사의 문하의 동문 후배이며 호남에서 의승병(義僧兵)을 일으켰던 처영(處英)이 그의 문집을 펴내고 비(碑)를 세우면서, 서문과 비문을 모두 교산 허균(蛟山許筠ㆍ1569-1618)에게 쓰게 했다. 허균은 전 해의 귀양에서 풀려나 전라도 부안(扶安)의 농장에 있으면서, 문집의 서문을 쓰고 또 비문을 지었다고 했다.

  사명당이라면 임진란 7년 전쟁에 승병(僧兵)을 일으켜 싸웠을 뿐 아니라, 임란 뒤 3,000여 명의 포로 송환과 전쟁 뒤처리까지 "그 기이한 공은 노스님이 으뜸"이었는데도, 스님이기에 비문에 시호(諡號)를 쓸 수 없다는 것이 교산의 마음을 짓눌렀다. 시호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존칭인데, 허균은 임금에게 이를 건의할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적(私的)으로 사명당에게 시호를 지어 올리기로 하고,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설명을 붙여, "말법(末法)을 받들어 구한 것을 자(慈)라 하고, 한 교(敎)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통(通)이라 하며, 은택을 많은 백성에게 끼친 것을 홍(弘)이라 하고, 그 공이 국토를 거듭 회복한 것을 제(濟)라 하니, 이것이 시호를 정한 뜻이라 했다."


  허균은 불교와 나라에 아울러 공덕이 많은 큰 스님의 비를 세우면서 시호를 머리에 쓸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는 말로, "참람(僭濫)되게" 개인적으로 시호를 지어 올리는 변(辨)을 삼았다(조영록, 《사명당평전》 <백성이 바친 시호 '자통홍제존자'> 한길사 참조). 이 시호를 올리는 글에서는 종교의 구실을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로 한정하지 않고, 사바세계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했던 사명당의 번뇌와 진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편 시호의 새김은 허균 스스로의 삶의 자세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터이다. 대중을 구제하고 생명의 땅을 회복하고, 모든 종교에 회융(會融)하고자 한 것은 《홍길동전》 <호민론(豪民論)> 등을 지은 허균의 뜻과도 통한다.

  허균이 중형[許篈]을 따라 봉은사(奉恩寺)에서 처음 만난 그 사명당의 인상을 "훤칠한 키에 뜻은 원대했다"고 했는데, 이제 '훤칠한 키에' "진실이 곧 도반(道伴)이라"는 봉은사 현 주지 명진(明進)스님은 사명대사 입적 400년에 맞는 어떤 바깥바람에도 '자통홍제'하시기를.

 

 

 <31> 허난설헌의 꿈과 세 가지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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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조 때 학자 초당 허엽(草堂 許曄)과 후처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봉(篈) 균(筠) 초희(楚姬ㆍ1563-1589)는 모두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남매 문인이었다. 동시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상 속에서 부딪치다가 모두 일찍 세상을 버리는 치열한 삶들을 살았다.

  그 가운데 허난설헌으로 더 잘 알려진 초희는 무한한 꿈과 넘치는 자의식 속에 세 가지 한(恨)을 품고 27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난설헌은 여덟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는 천재로, 일찍부터 신선세계를 꿈꾸었다. 열너덧살에 안동 김씨 명문가의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지만, 그는 난설헌이 죽던 해에야 겨우 문과에 합격했다는 평범한 남자로, 이들 부부는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였다고 한다.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임진왜란 이전 시대를 살았던 난설헌은 자의식이 넘치는 이른바 세 가지 한을 가졌다고 전한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왜 조선에 태어났는가. 둘째,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나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녀야 하는가. 셋째, 수많은 남자 가운데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16세기의 끝자락을 산 깨어있는 조선 여성으로 난설헌의 이런 생각에는 어디까지나 중국과의 관계, 혹은 남편과 자식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존재의식이 뚜렷이 배어 있다.

  최초로 조선 여성 지성사(知性史)의 체계를 세운 이혜순(李慧淳) 교수 조선 후기 여성 지성사를 여는 인물 김호연재(金浩然齋ㆍ1681-1722)를 중심으로, 임병양란(壬丙兩亂)을 한국 여성사의 한 획기(劃期)로 삼은 바 있다(<조선후기조선여성사>ㆍ이화여여자대학교출판부ㆍ2007).

  그러나 예술 작품사의 면에서라면 조선 후기의 시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가 난설헌의 시를 규수시(閨秀詩)의 으뜸으로 꼽았고(<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35수), 중국에서는 <열조시집(列朝詩集)>난설헌 시 19편이 소개됐으며, 1606년에는 <난설헌시집>이 간행됐다. 일본에서도 1711년 난설헌시집이 간행되는 등 그의 한 많은 짧은 생애에 비하면 그의 이름은 동아시아 세 나라에 떨쳤다. 여기 한두 수 한시 작품을 소개한다.

'봄비'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 제/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송이송이 살구꽃 담 우에 지네

(春雨暗西池 輕寒襲羅幕 愁意小屛風 墻頭杏花落)



'수양버들 가지에'(楊柳枝詞)


안개랄까 봄비에 어리운 버들/ 해마다 가지 꺾어 가는 임 줬네/ 봄 바람은 이 이한(離恨) 모르노란 듯/ 낮은 가지 휘둘며 길만 쓰나니

(楊柳含煙溺岸春 年年攀折贈行人 東風不解傷離別 吹却低枝歸路塵) (안서 김억(岸曙 金億)의 <조선여류 한시선역, 꽃다발>)

'봄비'에서는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에 기대는" 아픔이 있고, '수양버들 가지에'서는 "해마다 가는 님"과 "이한(離恨)" 곧 헤어짐의 '한'이 있다. 난설헌의 세 개의 한은 그대로 한국 여인의 한일 터이며, 이 한을 품으며 풀어가며 한국 여인은 또 그렇게 살아가리라.

 

 

<32> 신흠의 교우록과 <선비의 교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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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인파 속에 놀면서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지 못하면 선비가 아니다. 자신이 제일가는 선비가 된 다음에야 제일가는 사람이 찾아오는 법이다.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일이라 하는 것도 한 가지가 아니다. 문장의 분야에서 제일가는 것도 제일이고, 재주 중에서 제일가는 것도 제일이고, 말을 잘하는 것도 제일이니, 제일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모두 내가 말하는 제일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제일은 오직 덕이 제일가는 것과 학문이 제일가는 것이다." (신흠;《국역상촌집 》제39권 《잡저(雜著)》 <택교편(擇交篇)>)

  상촌 신흠의 교우론은 벗 사귀는 도리와 함께 글쓴이의 사람됨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글이다. 이 글은 그 벗을 사귀고 벗이 되는 도리와 함께 스스로의 사람됨을 성찰하는 교우론이다. 그것은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덕과 학문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속에 드러나 있다.

  신흠은 스스로 문장으로 혹은 하는 일로 사귄 벗이 모두 당대의 명류들이었다고 하면서도, 특히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한 사람만을 들어 그와의 사귐을 소중히 한 사람이다. 신흠이 이항복을 위해서 쓴 다른 글에서는, 두 사람이 한 번 보고 곧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었으며, 마을을 마주하고 30년을 살았다고 했다. 망년지우는 나이의 차이를 잊고 친구가 된 사이로, 백사 이항복은 신흠보다 열 살 손위였다. 신흠은 스스로 스승을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고 자주 말해온 사람이지만, 백사와는 서로 말을 나누지 않고도 생각이 같은 때가 많았고, 만년에는 한층 더 뜻이 맞았다고 했다.

  신흠이 이항복을 위해서 쓴 글로 <영의정 백사 이공 신도비명>은 6,200자 가까운 대 장편의 규모에다, 그 격조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영의정을 지낸 백사를 돌에 새기는 첫마디부터 이 글은 "임진왜란에 명나라 원군을 요청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시 찾게 한 신하"라고 평했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이첨 등이 강토를 도탄에 빠트렸을 때는 큰 소리로 고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신하였다고 했다. 그는 백사 밖에도 장유(張維, 1587-1638)이정구(李廷龜, 1564-1635)이수광(李晬光, 1563-1628)과도 친했으나 백사와 같지 않았다.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가 있어야 한다. '내'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의 벗이 될 수 있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중국과 한국에는 이런 '자기'가 있는데, 일본에는 '사회'만이 있고, '자기'가 없어서 우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柄谷行人;《윤리 21》, 송태욱 옮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뜻일테지만, 타산지석을 삼을 만하다. 18세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 쓴 박지원(朴趾源)의 머리말에는 "그 벗 삼는 바도 보았고, 그 벗 되는 바도 보았으며, 내가 벗하는 바를 그는 벗하지 않음도 보았다"고 했다. 교우론의 전통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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