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북쪽 고분)과 금관총, 천마총, 금령총, 서봉총에서 나온 금관들(왼쪽 위부터).
나중에 제작된 금관일수록 금 순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동아일보DB
흔히 황금의 나라 신라를 상징하는 유물로 화려한 금관(金冠)이 손꼽힌다. 하지만 신라 금관은 마립간(왕)이 살아있을 때 머리에 쓰던 것인지, 아니면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데스마스크’에 가까웠는지조차 규명되지 않을 정도로 관련 사실들이 베일에 싸여 있다.
최근 발표된 논문에서 신라 금관의 오랜 미스터리를 풀어줄 실마리 하나가 발견됐다. 신용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신라 금관의 성분조성 분석’ 논문에서 신라시대 금관의 금 순도가 후기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현존하는 신라 금관 6개의 금 함량 비율을 모두 조사한 것은 처음이다. 신라 금관은 금과 은의 합금으로 구성돼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가장 이른 시기인 5세기 중엽 제작된 교동 금관의 ‘세움 장식(입식·立飾)’ 금 순도가 89.2%로 제일 높았다. 가장 늦은 6세기 초반에 제작된 천마총(83.5%)과 금령총(82.8%), 서봉총 금관(80.3%)의 순도는 이보다 낮았다. 공교롭게도 늦게 만들어진 금관일수록 금의 순도가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5세기 이후 신라가 가야 등 주변국에 대한 정벌에 나서면서 정복지의 지배층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금 장식품을 대거 하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즉, 이 시기 금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금이 귀해지자 은을 더 많이 첨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5세기 후반부터 가야 멸망 직전까지 신라는 국력의 한계로 지방관을 직접 정복지에 파견하지 못했다”며 “지방 지배층의 충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금귀고리나 금제 허리띠 등을 내려보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의견은 금관 제작 양식 자체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다. 후기로 갈수록 신라 금관의 크기가 커지면서 무게를 줄이는 동시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은을 더 많이 넣었다는 주장이다. 흔히 금-은 합금에서 은의 비율이 높아지면 순금에 비해 강도가 더 높아진다. 함순섭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순금으로만 제작된 금관은 자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기 쉽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금관의 부위별로 금 순도가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컨대 금관 밑에 달리는 금귀고리에서 중심고리(주환·主環)의 금 순도는 100%에 가까운 반면, 서봉총 금관의 머리 부분을 감싸는 반구형 십자(十字) 장식은 73∼74%에 불과하다. 학계 일각에선 중심고리는 금을 동그랗게 말아야 하기 때문에 순도를 높여야 하지만, 반구형 장식은 머리에 직접 닿는 부분으로 강도를 높이기 위해 순도를 낮춘 것으로 본다.
여기서 신라 금관의 생전 사용설과 ‘데스마스크’설이 경합한다. 서봉총 금관의 반구형 장식이 십자로 길게 교차하는 이유를 놓고 해석이 제각각인 것이다. 함순섭 학예연구관은 “상투를 튼 머리를 감안해 반구형 장식을 길게 뽑은 것”이라며 “다른 신라 금관들도 안쪽에 비단이나 가죽을 덧대 생전에 머리 위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한상 교수는 “서봉총 발굴 보고서를 보면 발굴 당시 금관 아랫부분과 목걸이 윗부분이 겹쳐 놓여 있었다”며 “이것은 마치 ‘데스마스크’처럼 시신이 금관을 머리 아래로 내려 썼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