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새우그림의 대가 제백석

2016. 1. 4. 00:15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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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새우그림의 대가 제백석

14:26, August 01, 2014

 

 

[인민망 한국어판 8월 1일] 제백석(齊白石, 1864년 1월1일~1957년 9월 16일), 남, 후난(湖南) 창사푸(長沙府) 샹탄(湘潭) 출생. 원명은 순지(純芝), 자는 위청(渭青), 호는 란정(蘭亭)이다. 후에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를 바꾸었다.

 

제백석은 근현대 중국 회화 화가로 유명한 세계적인 인물이다. 일찍이 목공일에 종사했으며 후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50세 이후 베이징에 정착했다.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 산수, 인물 그리기에 능했으며 필묵에 힘이 있고 색채가 농후하고 그림 전체는 경쾌하며 간결하고 생동감이 넘치며 예술성이 소박하고 인정 넘친다. 물고기, 새우, 곤충을 소재로 삼아 자연의 정취를 끊임없이 그렸다. 제백석은 전서와 예서를 필사하고 진한(秦漢)의 비문을 모방했으며 소박한 행서, 전각, 시문 쓰기에 능했다. 중앙미술학원 명예교수, 중국미술가협회 주석 등을 역임했다. 대표작품으로는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묵하(墨蝦)> 등이 있다. 저작으로는 <백석시초(白石詩草)><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다. 1963년 세계 10대 문화 유명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림의 특징

 

   농후한 향토적 숨결, 순박한 농민 의식과 순수한 낭만이 살아 있는 동심, 여유 넘치는 시적 정취는 제백석 예술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제백석은 예술을 오묘함은 그런 것 비슷함과 비슷하지 않음 사이에 있다(妙在似與不似之間).’라고 주장하며 독특한 사의(寫意,중국화의 전통 화법 중의 하나. 정교함을 추구하지 않고 간단한 선이나 묵색 또는 채색으로 사람의 표정이나 사물의 모양을 묘사하는 것) 국화(國畵) 스타일을 형성하여 홍화묵엽파(紅花墨葉一派)를 열었다. 그는 특히 과일, 채소, 꽃, 새, 곤충, 물고기 및 인물, 산수를 그림의 주제로 했으며 한 때 오창석(吳昌碩)‘남오북제(南吳北齊)’라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꽃과 새우 그림에 능했던 그는 먹 농도의 강약을 조절해 과감하게 터치했으며 그의 그림 속 주제는 그의 붓 끝에서 생명력 넘치는 주인공으로 태어났다. 제백석은 순박한 민간예술 스타일을 전통 문인 화풍과 서로 융합해 중국 현대 꽃, 새 그림의 최고봉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새우를 그리다

 

제백석의 새우 그림은 화단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새우는 제백석의 대표적인 예술 부호 중 하나이다. 제백석은 평생 관찰을 통해 새우의 특징을 심도 있게 묘사하려 애썼다.

 

제백석의 새우 그림은 이미 경지에 이르렀다. 간결하면서도 과감한 필묵은 물 속에서 노니는 새우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제백석의 새우 그림은 활발하고 영민하고 민첩함을 표현했으며 생명력이 넘친다. 한 쌍의 짙은 눈, 머리 중간은 초묵(焦墨)을, 좌우는 담묵(淡墨)을 사용해 그린 새우의 머리 부분을 보면 다양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딱딱한 껍질은 투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먹 농도의 강약을 조절해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표현했다. 한 번 붓질에 한 마디를 표현한 새우의 허리부분은 연속으로 붓을 놀려 점점 가늘어지는 새우 허리의 리드미컬함을 부각시켰다.

 

그의 제자들

 

제백석의 제자는 매우 많다. 그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리쿠찬(李苦禅), 리커란(李可染), 왕쉐타오(王雪濤), 왕수스(王漱石), 왕주주(王鑄九), 쉬린루(許麟廬), 천다위(陳大羽), 리리(李立), 러우스바이(婁師白), 장더원(張德文), 샤오룽스(蕭龍士) 등이 있으며 중국 희극의 대가인 메이란팡(梅蘭芳), 평극(지방 전통극) 대가인 신펑샤(新鳳霞)도 있다. (번역 감수:김명희)

 

중국화가

http://kr.people.com.cn/203114/309853/310021/310135/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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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연재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목수(木手) 출신 근대 중국화의 대가[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36. 제백석
전은자


입력 2012-10-23 (화) 10:03:41 | 승인 2012-10-23 (화) 10:09:03 | 최종수정 2012-10-23 (화) 10:06:50


문인화 바탕으로 민간전통을 파고들어 속되면서도 고상함 추구
사물의 본질만을 묘사하면서도, 신기하게도 내적 생명력을 유지

청나라 말의 중국

    청나라 말 관리들의 행정적 무능함과 부패로 인해 민중들의 삶은 피폐되었다. 관리들은 민중을 수탈하여 사치를 즐겼고, 불어난 인구는 전근대 농업국가의 재정난을 가중시켰다. 18세기 중반 중국 인구는 1억 4천 만 명이었으나 19세기 중반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4억 1천만 명에 이르렀다. 인구에 비해 토지 경작 면적은 1723년에 730만 경(傾)이었던 것이 1824년에 756만 경에 불과해 경작 면적의 증가가 아주 미미하였다.


   청나라의 쇠퇴는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은 백련교도의 난(1796~1805)이다. 어지러운 틈을 타 영국은 자국의 모직물 수출을 위해 중국으로 진출하였고, 1840년 급기야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중국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영국과 화평파들에 의해 양칙서는 파직되었다.

이어 중국과 영국의 2차 전쟁(1856~1860), 중국과 프랑스 전쟁(1884~1885), 중국과 일본 전쟁(1894~1895)을 치르면서 청나라는 극도로 쇠약해졌고 열강들의 의해 대륙이 침탈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기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 농촌 사회의 빈부격차 해소,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지향성을 제시해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태평천국운동이 실패하자 지배층은 개혁을 통해 부강한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양무운동, 변법운동, 신정 및 입헌운동을 추진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신성곤 외, 2008).


   19세기말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격동기를 맞이한 청의 통치자들은 서구미술을 근대화나 제도의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서구문화에 대한 그들의 태도 역시 서구의 무기나 기계에 대한 경우와는 반대로 적대감이나 경멸감을 보였으며, 문화적으로 직면한 문제들은 중국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마이클 설리반, 2000).

중국이 근대화 과정에서는 근대 중국을 형성하는 전통 관념과 새로운 관념, 토착 양식과 외래 양식 간에 빚어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19세기까지 청나라 조정에서 존경받던 궁중화가들은 궁중의 하인만 못한 처지로 전락하여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문인화가들도 청나라와 함께 몰락해 갔다. 그러나 서구 예술의 도전은 중국의 화풍에도 변화를 주었다. 대담함과 새로운 활력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풍조는 조지겸(趙之謙, 1830~1884)과 같은 오파(吳派) 후계자들에게서 나타났다. 조지겸은 바위틈의 포도 그림이나 화훼화로 이름을 날렸던 유명한 학자로서 구도나 필치는 근대 중국화의 거장 제백석(齊白石, 1863~1957)에게 영향을 끼쳤다.


제백석의 생애

   제백석은 중국 호남성 상담현(湘潭縣)의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외할아버지로부터 천가시(千家詩), 논어 등을 배우고 신상(神像)·화훼·주수(走獸) 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림에 흥미를 가졌다. 1878년 12살에 진씨(陳氏)와 결혼, 16세 때 조각장 주지미(周之美)를 따라다니며 목공예를 배웠다. 약 3년 동안 목공예를 배우면서 집안을 꾸려나갔다. 백석이라는 이름은 제백석이 태어난 역참의 이름이 백석포(白石鋪)였고, 또 스승 주지미가 그를 백석산인(白石山人)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주지미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백석을 지목장(芝木匠)이라고도 불렀다.


   20세에 유명한 칼라판 화첩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보고, 현에서 이름난 화가 호심원(胡沁園)으로부터 세필의 그림을 배웠고, 진소번(陳少蕃)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또한 목공 예술을 발전시켜 차츰 현 내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26세에 세속적인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렸다. 이때 이름을 황(璜), 호는 빈생(瀕生), 백석노인(白石老人)을 쓰기 시작하였다. 30세에 산수화, 화조화, 미인도를 잘 그려 제미인(齊美人)이라고 불렸다. 34세에 서법을 배우고 전서(篆書)를 익히면서 전각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40세 이후 황하의 남북과 강남 등 중국의 산천을 7년에 걸쳐 다섯 번 유람하면서 새로운 시계(視界)를 열게 되면서 그의 회화 사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고향의 산 아래에 화실을 짓고 책과 그림으로 세월을 보냈다.


   1917년 제백석이 55세가 되던 해 북경에서 서서히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57세에 북경으로 이사를 가서 그림을 팔면서 생활을 할 때 석도, 팔대산인, 서위, 금농, 오창석 등의 명작을 연구하였고, 송나라 때의 작품과 당인(唐寅), 양주팔괴(楊洲八怪)의 작품을 모사하였다. 제백석에게 영향을 준 화가는 진사증(陳師曾), 석도, 금능, 정판교, 서위, 팔대산인, 오창석, 서비홍(徐悲鴻) 등이다. 58세 때 진사증의 권유로 홍화묵엽법(紅花墨葉法)으로 화법을 바꿨다. 진사증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였고, 제백석보다는 13살이나 어렸지만 제백석에게 그림을 평해줄 정도로 안목이 높았다. 그는 제백석과 6년 동안 교유했으며 제백석을 유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인물이다.


   제백석은 60세 때 진사증과 함께 도쿄에서 열린 중일연합전에 참가하면서 제백석의 삶과 예술이 영화화돼 도쿄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둘은 파리미술전람회에도 나란히 출품하여 서구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서양인들은 북경에 오면 제백석의 그림을 사가게 되었다. 1925년 63세 때 유명한 경극 배우인 매염방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2년 뒤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75세(77세)에 점쟁이의 말에 따라 두 살을 올려 살았고, 북경이 일본군의 손에 함락되자 북경예술전문학교와 경화미전(京華美專)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1946년 86세에 중국인의 항일 전쟁이 8년 만에 끝나자 다시 그림을 그려 팔고 낙관을 새겼다. 중화전국미술회의 주관으로 <백석전>이 열렸는데 작품이 모두 팔렸고 같은 해 상해에서도 작품전이 열렸다. 89세에 북경에 모택동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계속 북경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제백석연보」가 출간되었고, 92세에 『백석노인자전(自傳)』이, 94세에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1957년 97세에 40년간 산 북경의 집에서 타계하였다. 슬하에 6남 6녀를 두고, 생애 95년 동안 수만 점의 작품을 남겼다. 생전에 제백석은 아들과도 합작(合作)하는 일화를 남겼다(許英桓, 1991).



  
 
 

제백석, <송학도(送學圖)>,

 종이에 채색, 33x27cm, 1930년.

 
 

제백석의 <송학도(送學圖)>

   중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바이잉(白塋)은 "제백석은 문인화를 바탕으로 민간전통을 파고들어 속되면서도 고상함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제백석은 새우를 살아있는 듯이 잘 그렸다. 꽃, 새, 곤충, 물고기, 게, 새우를 그릴 때 먹 농도의 강약 조절과 과감한 터치, 그리고 섬세한 붓놀림으로 꽃과 곤충이 절묘하게 어울리게 만들어 전통적인 화조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영국의 동양미술사가 마이클 설리번은 제백석의 그림을, "위대한 대담성과 단순성으로 자신을 표현했으며.....60대에 매우 독창적인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그는 사물의 본질만을 묘사하면서도, 신기하게도 내적 생명력을 유지하였다"라고 평한다.


   <송학도(送學圖)>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학교에 가기를 두려워하여 우는 아이를 달래며 학교에 보내려는 할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에서 따뜻한 가족애와 해학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과감한 필선은 빠르고 힘찬 간필(簡筆)의 묘법인데, 유머감과 암시는 제백석 인물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제백석의 노년기 이후의 작품들에는 반복적으로 고향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화면에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품에 동심을 담고 있는 것은 말년에 이르러 고향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제백석, <고하도(古荷圖)>,

종이에 채색, 137.5x47cm,1934년경.

 

 
   <고하도(古荷圖)>는 화조화인데 연꽃이 결실을 맺고 서서히 말라가는 장면에서 고고한 기품, 그리고 시간의 절실함을 엿볼 수 있다. 주제와 달리 생명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낭소군(郞紹君)은 자신의 저서『중국 근현대 미술』에서 제백석을 오창석 이후 전통파의 대가로서 첫손을 꼽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제백석은 재능이 다양하여 시, 서, 화, 전각, 화훼, 초충, 산수, 인물 등에 모두 능하였다. 둘째, 그는 질박하고 순진한 농민적 정감으로 문인화 필묵에 발랄한 생명력과 강건하고 새로운 특색을 더한 인물이다. 셋째, 그의 예술, 특히 산수와 인물이 지니고 있는 현대성은 그를 진정한 현대화가로 만들었다. 넷째, 그는 묵묵히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다.

근 한 세기에 달하는 제백석의 왕성한 창조정신은 그를 예술가의 모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전은자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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