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元)나라ㆍ황공망(黃公望)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

2016. 1. 4. 01:37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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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ㆍ황공망(黃公望)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

13:30, July 17, 2014

 

원나라 황공망(黃公望<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종이에 그린 수묵화 세로33cm, 가로 636.9cm

 

 

[인민망 한국어판 7월 17일]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종이 위에 그린 수묵화 세로33cm, 가로 636.9cm로 원나라 시대의 문인화가인 황공망(黃公望)이 지정(至正) 7년(1347년)에 그리기 시작해 3년 만인 지정10년(135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청나라 순치(順治) 연간에 불에 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현재 그림의 앞 부분은 저장성(浙江省) 박물관에 소장(<잉산도(剩山圖)>)되어 있으며, 저장박물관의 보배로 일컬어지고 있다.

 

원나라 시대 미술계의 종사(宗師)이자 ‘원4대가(元四家)’의 필두인 황공망(黃公望)이 만년에 그린 걸작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중국 고대 수묵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중국 전통산수화에서 공전절후(空前絕後)의 예술적 업적을 이룩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긴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에는 가을로 접어든 부춘강(富春江) 강가의 수려한 경치가 담겨 있다. 겹겹이 둘러선 산봉우리, 울창한 소나무와 빼어난 기암괴석, 구름과 안개에 덮인 농가들이 아름다운 정취를 물씬 풍긴다. 아름다운 강남의 산수를 변화무쌍하면서도 맑은 먹빛으로 원근감 있는 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자연과 초목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번역: 김명희)

 

 

 

 

 

 

 

<잉산도(剩山圖)> , 저장성(浙江省)박물관에 소장

 

 

 

후반부 전도

 

 

 

 

황공망(黃公望<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부분도

 

 

 

 

 

 

 

 

 

 

 

 

 

 

 

 

 

 

 

 

 

 

 

 

 

 

 

 

 

 

 

 

 

 

 

 

 

 

 

 

 

 

 

 

 

 

 

 

 

 

 

 

 

 

 

 

 

 

 

 

 

 

 

 

 

 

 

 

 

 

 

 

 

 

 

 

 

 

 

 

 

 

 

 

 

 

 

 

 

 

 

 

 

 

 

 

 

 

 

 

 

 

 

인민망 한국어판>>


 



[스크랩]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문인화, 고서화

이보 | 조회 46 |추천 0 | 2009.04.10. 21:41



<<부춘산거도>>의 뒷쪽 부분

 


절강성박물관의 <<잉산도>>, 부춘산거도의 앞부분

 

   <<부춘산거도>>는 황공망(黃公望)의 만년의 걸작으로, 중국에서 고대 산수화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글씨에 있어서 왕희지의 <<난정서>>를 최고의 걸작으로 꼽듯이, 그림에 있어서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를 제일로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춘산거도>>로 알려진 그림이 세상에 2폭이 전해지고 있는데 보통 <<무용사권(無用師卷)>>으로 불리우는 한 폭과 <<자명권(子明卷)>>으로 불리우는 한 폭이 그것이다. 두 폭의 <<부춘산거도>>는 모두 건륭제때에 황궁으로 들어왔으며, 현재는 대만의 고궁박물원이 모두 보관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첫째, <<무용사권>>과 <<자명권>>중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작인지, <<무용사권>>에서 갈라졌다고 하는 <<잉산도>>는 진품인지 위작인지의 문제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두 폭중 <<무용사권>>은 특히 수장내력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기정의 <<서화기>>에 따르면, 이 그림은 명나라때 오지구(吳之矩)가 수장하였는데, 그 아들 오문경(吳問卿)은 이 그림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문경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 평소에 가장 아끼던 <<부춘산거도>>와 당나라때 지영(智永)의 <<천자문>>을 불에 태워 자신과 순장하도록 후손에게 명한다. 후손은 첫날에 <<천자문>>을 불사르고, 둘째날에 <<부춘산거도>>를 불사르기 위하여 불에 집어던졌는데, 조카인 오자문(吳子文)이 이를 구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길다란 그림은 두 개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앞부분은 나중에 <<잉산도(剩山圖)>>(폭 31.8센티미터, 길이 51.4센티미터)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졌으며, 현재 절강성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뒷부분은 <<부춘산거도>>(폭 33센티미터, 길이 636.9센티미터)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졌으며,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앞부분과 뒷부분이 연결되는 곳에는 오지구의 도장이 찍혀 있으며, 앞부분에는 수장가 오호범(吳湖帆)이 쓴 "산천혼후, 초목화자"라는 여덟 글자가 쓰여 있다. 뒷부분에는 동기창(董其昌)의 발문이 있고, 화폭앞윗부분에는 양시정(梁時正)이 글을 쓰고 건륭제의 도장을 찍어놨으며, 뒷부분에는 심전석(沈田石), 문팽(文彭), 왕서등(王犀登), 주천구(周天球), 추지린(鄒之麟), 김사송(金士松)등의 글도장이 있다.

 

   <<무용사권>>의 창작년대는 원나라 지정7년(1347년)에서 지정10년(1350년)이므로, 이 불후의 명작이 지금까지 6백여년을 전해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원나라 이래로 모든 화가들은 이 그림을 보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이로 인하여 수장가들이 큰 돈을 들여 구매하여 후세에 전하였고, 보물로 모셔두거나, 외부에 비밀로 하여 보여주지 않았었다. 청나라 순치제 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에 탈 위기를 넘겼는데, 이로 인하여 두 조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예술적인 가치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무용사권>>의 첫번째 수장자는 황공망의 도우(道友)인 무용선사(無用禪師)였다. 무용선사는 이 그림을 세력있는 사람들이 탐낼 것을 두려워하여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작가에게 먼저 무용에게 준다는 글을 써넣게 요청하여, 그림의 귀속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후 명나라의 화가 심주(沈周)에게 전해질 때까지 100여년간 이 그림을 누가 소장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심주가 이 그림을 소유했던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다른 사람이 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심주는 집안이 부유하지 못하여 이 그림을 되사올 수는 없었다. 홍치원년(1488년) 소주의 번순거가 많은 돈을 들여 이 그림을 샀고, 심주로 하여금 이 그림에 글을 쓰도록 하였다. 심주는 자신이 보았을 때 이미 그림이 낡았으며 떨어져나갔다는 내용을 기재하였고, 화가의 각도에서 이 그림이 뛰어남을 기재하였다. 심주가 부춘산거도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도 지금은 국보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용경4년(1570년), 이 그림은 다시 화가이자 감상가인 담지이(자는 思重)에게 전해지고, 태원의 왕서등과 화가 주천구는 모두 다음해에 이 그림을 보고 감상후기를 써둔다. 명나라 후기의 저명한 서화가이자 감상가인 동기창은 만력24년(1596년)에 이 그림을 샀고, 오래지 않아 다시 수장가 오지구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오지구는 아들 오문경에게 넘겨주었고, 오문경은 이 그림을 걸기 위해 특별히 부춘헌(富春軒)이라는 건물까지 지어서 보관한다. 그림에 오지구의 인감이 찍혀 있고, 화가 추지린도 그림에 글을 쓴다. 명청 양대의 혼란중에서도 이 그림을 잘 보관하였으며, 후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죽기전에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전반부의 불탄 부분은 오지구의 도장이 찍혀있는 곳에서 갈라졌는데, 오기정의 <<서화기>>에 따르면 길이가 4척여가 되었으며, 완전히 불에 탄 부분을 빼고 그림의 형태에 크게 영향이 없는 부분이 약 1척6촌이었다고 하며, 오기정은 이것을 얻은 후 <<잉산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잉산도>>는 부춘강이 시작하는 부분의 구릉과 산들을 그린 것이다. 청나라 강희 8년(1669년)에 광릉의 왕정빈이 소유하며, 왕이 발문과 제목을 쓴다. 민국27년(1938년)에 오호범이 구매한 후 오호범의 낙관을 찍는다. 오호범은 <<부춘산거도>> 전반부의 진품임을 고증하고 다시 표구하며 일부 떨어져나간 곳은 보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에 절강성박물관이 구매하여 보관하고 있다.

 

후반부는 약 3장여가 되며, <<부춘산거도>>의 주요부분이되는데, 다시 수장가들을 여럿 거치게 된다. 먼저 단양의 장범아(張範我)의 손에 들어가며, 장씨는 매우 아꼈으나, 결국 오래 보관하지는 못하고 다시 계우용(季寓庸)의 손으로 넘어간다. 계우용은 "양주계인시수장인"등 여러개의 낙관을 찍어둔다. 다시 화가인 고사기(高士奇)는 강희 29년(1690년) 600금을 주고 사들인다. 후에 송강의 왕홍서가 원가로 사들이고, 고, 왕은 모두 수장인을 찍었다. 옹정6년(1728년)에 왕홍서가 병으로 죽자, 이 그림은 양주로 흘러가 천금의 가격에 시장에 나온다. 이 때 천진의 소금상인 안기(安岐)가 옹정 13년(1735년)을 전후하여 이를 사들인다.

 

   건륭 11년(1746년)에 서화를 좋아하던 건륭제는 이 그림을 매입한다. 건륭은 서화에 능했을 뿐아니라 감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명권>>을 진품이라고 감정한 바 있었는데, 다시 사들인 <<무용사권>>은 가짜라고 감정하고 석거보급차등으로 정하여 궁중에 보관한다. 이후 가경제때 호경에 의하여 석거보급삼편으로 승급되어 계속 보관되다가 1949년경 국민당정권에 의하여 대만으로 옮겨가서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부춘산거도>>의 진품, 위품 논쟁은 청나라 건륭제에 의하여 한번 벌어지게 된다. 건륭제는 건륭29년(1764년)에 진위논쟁에 대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글을 쓰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10년(1745년) 겨울에 황공망의 <<산거도>>(자명권)를 얻었는데, 필묵이 창고하고 진품이었다. 그런데 다시 심덕잠이 쓴 시문의 원고를 보던 중에 그가 쓴 부춘산거도 발문을 보게 되었고, 안기의 집안에 도 다른 한권의 황공망이 그렸다는 <<부춘산거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륭11년(1746년) 겨울에 안기의 집안에서 <<부춘산거도>>가 당시의 대학사인 푸항의 집안으로 유입되었으며, 다시 푸항의 소개로 청황실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그림을 개략 봤더니 역시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였고, 다섯개의 발문이 심덕잠의 글과 일치하였도 다시 동기창의 발문을 보니 역시 예전의 <<산거도>>에서 본 것과 일치하였다. 내관에게 <<산거도>>를 가져오게 하여 보니 과연 발문, 제문이 일치하였다. 다음 날 양시정등에게 명하여 진위를 가리도록 지시하니, 모두 <<산거도>>가 진품이고 <<부춘산거도>>가 가짜라고 하였다. 심덕잠, 고사기, 왕홍서 등은 모두 감상의 전문가들이면서도 모두 잘못 보았던 것이다. 원래 <<산거도>>는 부춘이라는 글자를 빠뜨린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진짜를 진짜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건륭제는 <<부춘산거도>>(무용사권)도 작품이 뛰어나다고 보고, 궁중에서 사들여 보관하기로 결정한다. 건륭제가 먼저 <<산거도>>(자명권)가 진품이라고 한 바 있으니, 당시의 신하들로서는 건륭제의 뜻에 거스릴 수가 없어 모두 건륭제의 뜻에 따라 <<산거도>>가 진품이고 <<부춘산거도>>는 가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명권>>에는 "子明隱君將歸錢塘, 需畵山居景, 圖此贈別(은거했던 자명이 전당으로 돌아가니 산에서 거주하던 모습을 그려 이로써 떠나는 사람에게 준다)"이라는 글이 적고 "大痴道人公望至元戌寅秋(대치도인 공망이 지정 술인년 가을에 그리다)"라고 적혀 있어 <<자명권>>이라 부른다. 앞에는 동기창의 발문이 있는데, 두 개의 발문을 비교하면 자명권에는 "억장안"으로 시작하는 55글자가 적다. 그림의 끝부분에는 명나라 성화연간의 유각의 감상기가 있고, 추지린의 단구와 공악의 발문이 있다. 건륭제때 심덕잠이 양쪽의 발문을 보고 일찌기 <<산거도>>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다. 그는 자명이 임인발(任仁發)이라는 것을 고증한 후, 임인발은 자가 자명이고 상해 청포 사람인데, 황공망과 동시대의 화가이면서 수리전문가였고, 일생동안 관직에 머무르고 은거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자명권>>은 건륭제에 의하여 진품으로 인정받은 후, 이 그림을 매우 아껴, 궁중에 두고 항상 보았을 뿐아니라 바깥에 나갈 때도 가지고 나갈 정도였다. 1745년부터 1794년까지 전후 54회에 걸쳐 건륭제가 이 그림에 낙관을 찍고 글을 남겨, 크고 작은 도장이 많이 찍혀 그림의 가치를 오히려 많이 깎았다. 대신, <<무용사권>>에는 양시정을 시켜 글을 쓰게 한 이외에는 일체 건륭제가 낙관등을 찍지 않았다.

 

   건륭제의 진위판정은 약 200년간 권위를 발했으나, 결국 근대에 이르러 오호범에 의하여 뒤집히게 된다. 오호범은 연구를 통해, 민국28년(1939년) <<잉산도>>의 앞쪽에 쓴 글이 황공망의 친한 친구인 장우의 글인 "산천혼후, 초목화자"의 여덟글자를 전서로 쓰고 작은 글씨로 "화원의 묵황 대치의 제일 신품 부춘산도, 기묘원일..."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이로서 다시 한번 <<부춘산거도>>의 진위논쟁이 벌어졌는데, 미술계에서 수십년간의 논쟁끝에 나온 결론은 <<무용사권>>이 진품이고, <<자명권>>은 위작이라는 데 대체로 일치를 보고 있다. 다만, << 자명권>>의 예술가치도 매우 높다는데에도 의견이 일치하였다.

 

   <<무용사권>>을 진품으로 인정하는 근거는 다음의 몇 가지 였다. 첫재, 화면자체이다. 구도에서 三遠(深遠, 高遠, 平遠)을 구비하였고, 그림의 내용이 스스로 쓴 발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둘째, 제발문. 스스로 쓴 발문외에 다른 사람의 발문도 대부분 명가의 것들이고 내용도 풍부하며 그림과 일치한다. 그러나 <<자명권>>의 경우에는 내용이 빈약하며, 그림의 내용과 떨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무용사권>>의 제발문이 수장가들의 수장과정이 더욱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셋째, 수장기록과 도장기록. 원나라때부터 진본의 평가나 유전기록이 있고, 명, 청때에는 매우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과 제발문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림 오른쪽 위의 오지구의 도장은 가장 유력한 증빙으로 본다.

 

   한편, <<잉산도>>가 <<무용사권>>에서 떨어져나간 진품인지 아니면 후세의 위작인지에 대하여도 의론이 분분하다. 첫째, 두 그림은 위의 도장부분은 일치하지만 아래의 산 그림은 겹쳤을 때 잘 맞지 않는다는 점, 둘째, 종이색과 먹의 색이 다르다는 점, 셋째, 준법(그림그리는 기법)이 다르다는 점등을 들어 <<잉산도>>는 위작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이 부분은 아직 두 그림이 하나는 대만에 하나는 절강성에 있어 서로 직접 비교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한동안은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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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불교]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23. 황공망, ‘부춘산거도’| 그림감상(불교미술)

갠지스 | 조회 21 |추천 0 | 2015.10.30. 07:39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23. 황공망, ‘부춘산거도’
“마음 여는 순간 삼라만상 모두가 법신”


▲ 황공망, ‘부춘산거도’(부분), 원, 종이에 먹, 33×636.9cm, 대북 고궁박물원.




운문선사, 사량분별 버리고
스스로가 체득할 것을 강조
한 글자로 된 일자선으로
학인들 망상 해결해주기도

구름처럼 유랑했던 황공망
직접 보고 그려내는 대신
사색으로 마음에 산수 담아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가 주장자를 세우더니 다음과 같이 물었다.

“15일 이전은 그대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를 한 마디로 말해 보라.”

운문선사는 기다리지 않고 대신 대답하였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운문문언은 소주(蘇州) 가흥(嘉興)출신으로 속성은 장(張)씨였다. 어려서 가흥 근처 공왕사(空王寺)에서 지징(志澄) 율사에게 출가했다. 그 영민한 기질은 타고난 것이었고, 지혜로운 논변은 하늘이 주신 것 같아 모든 경전을 외움에 번거롭게 다시 열어 보는 일이 없었으므로 지징율사는 그를 대근기라고 높이 평가했다. 지징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율법과 경전을 공부한 후 목주도종(睦州道踪,780-877) 선사를 찾아갔다. 목주선사를 처음 뵈러 갔을 때 세 번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빗장을 열어주었다. 운문이 들어가려는 순간 목주선사는 밀어내면서 말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구.” 운문은 그 말끝에 밝게 깨달았다. 운문은 여러 해 동안 목주선사에게 묻고 참례하였다. 목주선사는 운문의 마음이 빈틈이 없고도 확 트인 것을 알고 설봉의존 선사에게 보냈다. 운문은 설봉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후 수년 간 모시면서 수행을 거듭했다. 그 후 설봉선사의 곁을 떠나 17년 동안 여러 총림을 찾아다니며 철저하게 공부했다. 그는 설봉선사를 통해 선의 종지를 배웠지만 조주선사와 남악혜충선사의 선사상도 흡수했다. 그 후 운문산으로 옮겨 남한(南漢)의 유씨왕(劉氏王)의 귀의와 시주를 받고 널리 교화를 펼쳤다. 운문선사는 선종오가(禪宗五家)의 종조다. 6조 혜능대사의 문하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의 두 계열에서 위앙종(위산영우), 임제종(임제의현), 조동종(동산양개), 운문종(운문문언), 법안종(법안문익)의 선종이 갈라져 나왔다. 운문종은 오대 말에서 송초까지 흥성하다 남송대에 이르러 점차 쇠퇴했다.

운문선사는 언어적인 사량분별을 버리고 반드시 스스로가 실제로 체득하라고 가르쳤다.

한 승이 물었다.

“무엇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佛身)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했다.

“마른 똥막대기(乾屎橛)이니라.”

한 승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진진삼매(塵塵三昧)입니까?”
“밥통의 밥이요, 물통의 물이다.”

어찌 똥막대기뿐이겠는가. 마음을 여는 순간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인 것을. 그래서 운문선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 한 보배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진여(眞如)이고 본체이고 법신이다. 두두물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어떤 것이 진진삼매(塵塵三昧)’냐고 묻는 사람에게 ‘밥통의 밥이요, 물통의 물’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현상세계 이대로가 그대로 삼매라는 뜻이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려주던 운문선사가 종소리를 듣더니 말했다.

“석가부처님이 설법하시는구나.”

운문선사가 어느 날 갑자기 주장자를 잡아 세우더니 한 승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주장자입니다.”“어느 세월에 꿈엔들 보겠느냐?”

종소리가 석가의 설법이면 주장자는 단순한 주장자가 아니다. 주장자도 석가의 법신이고 법신을 취해야 무정설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치는 알지 못하고 수행자들이 ‘성품을 보는 일에 매진해야 할 처지에 재(齋)와 공양을 수시로 받고 가사와 발우를 쉽게 전수받는’ 풍토에 대해 개탄했다. 스승과 부모를 떠났으면 정신을 차려 ‘눈을 부릅뜨고 발우와 벼랑을 높이 올려 걸어놓고 10년 20년 철두철미하게 결판을 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노력하고 전력을 쏟았는데도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면 ‘내생에 사람 몸을 잃지는 않으리라’고 장담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번거롭게 발우를 짊어지고 천 리 만 리를 찾아다니는 헛된 수고를 계속하고 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를 살펴야 한다. 시절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죽는 날이 닥치면 ‘끓는 물에 떨어진 조개나 게처럼 허우적거려봤자 소용이 없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하고 살펴야 한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고 한 번 나간 호흡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운문선사는 한 글자로 된 짧은 말을 써서 학인들을 가르쳤다. 이것을 일자선(一字禪)이라 한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

“무엇이 운문의 한 길입니까?”
“친(親:친절하다)”
“삼신(三身) 가운데 어느 부처가 설법을 합니까?”
“요(要:필요한대로)”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면 되지만, 부처님과 조사를 죽이면 어디다가 참회해야 합니까?”
“로(露:드러내라)”
“무엇이 참선입니까?”
“시(是:옳구나)”
“그러면 무엇이 도입니까?”
“득(得:되었구나)”

운문선사의 일자선은 학인들이 말에 떨어지지 않도록 망상을 해결해주는 일구(一句)로 극찬 받았다. 그런데 그 뜻을 알겠는가? 글을 쓰는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인가? 망상을 피워서인가?

고즈넉한 수면을 따라 올망졸망하게 늘어선 수목을 구경하다보니 아담한 집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살이가 이 정도로 평온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솔길을 걸어 언덕에 올라서자 저 멀리 강 위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가 한가롭다. 눈을 거두어 흙다리를 건너려는데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는다. 한동안은 땀 흘리며 산길을 올라가야 하리라. 황공망(黃公望,1269-1354)은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에서 변화무쌍한 자연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웅장하고 광활한 자연은 담묵(淡墨)과 농묵(濃墨)의 조화 속에 활기가 넘친다. 수목의 줄기와 잎은 구륵과 몰골을 번갈아 사용해 다양한 필선의 변화를 주었다. 산의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무수히 되풀이한 피마준(披麻皴)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기법인데도 마치 그가 처음 시도한 것처럼 신선하다. 범관의 「계산행려도」가 웅장하고 마원의 「매석계부도」가 시적(詩的)이라면 「부춘산거도」는 이 두 가지를 다 갖췄다.

동기창(董其昌)은 「부춘산거도」를 보고 “마치 보배가 있는 곳에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얻어서 돌아오는 것과 같으니, ‘맑은 복을 받은 하루’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마음과 몸이 모두 상쾌해진다”고 찬탄했다. 명대의 화가 장경(張庚)은 “진실로 예림(藝林)의 신선이 되어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난 자가 되었다”고 극찬했고,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추지린(鄒之麟)은 “그림에서 황공망은 서예의 왕희지”라고 추켜올렸다. 현대의 미술사학자 천촨시(陳傳席)는 “중국산수화는 이 그림에 이르러 서정시와 같은 정신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중국회화사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부춘산거도」를 들고 싶다. 황공망이 1347년에 자신이 살던 절강성(浙江省) 부춘산을 그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 두루마리 대작이다. 황공망이 그림에 직접 쓴 화제에는 구도를 잡고 처음 붓질을 시작한 지 3,4년이 지나서야 완성했다고 적혀 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을까? 황공망의 자는 자구(子久), 호는 대치(大痴), 대치도인(大痴道人), 일봉도인(一峰道人)이다. 본래 그의 성은 육(陸)씨였는데 7,8세 때 황(黃)씨의 양자로 들어가 성씨를 바꾸었다. 그는 남송 때 출생했지만 11세 때 송이 망하는(1279) 바람에 원(元) 왕조에서 관리가 되었다. 하급관리 생활을 하던 중 누명을 쓰고 하옥된 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 큰일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사라지자 50세에 신도교(新道敎)에 입교했다. 그는 은둔자가 되어 점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화명(畫名)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명청(明淸)대에는 문인들이 생계수단으로 그림을 파는 것이 유행했지만 원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여기(餘技)나 여흥(餘興)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 생계수단으로 삼는 경우는 드물었다. 황공망은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랑(流浪)생활을 하며 보냈다. 소주(蘇州)의 천지산(天池山)을 비롯하여 화산(華山), 태호(太湖), 소산(小山), 부춘산을 자주 유람(遊覽)했다. 「부춘산거도」를 3,4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한 것도 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세상을 구름처럼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유랑하는 것은 신도교의 계율에 의한 것이었지만 유람은 산수화가들의 예술정신을 함양하고 화격(畫格)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세상의 일을 버린 사람에게 유랑과 유람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유랑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유람을 통해 산수의 정신을 터득했다. 그의 화법은 당말(唐末)에 활동한 동원(董源), 거연(巨然)과 형호(荊浩), 이성(李成), 관동(關同)의 작품에서 배운 바가 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대자연의 가르침도 지대했다. 어쩌면 마음속에 담아둔 대자연이 가장 큰 스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산수화를 남겼지만 직접 산수를 사생한 적은 없었다. 대신 유랑과 유람을 통해 관찰한 산수를 마음에 담아 둔 후 오랜 사색과 성찰을 통해 정화시켰다. 그야말로 흉중구학(胸中丘壑)이 스승이었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쓴 책 『사산수결(寫山水訣)』에는 배우는 자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을까. ‘그림 그릴 때의 큰 요체(大要)는 바르지 않은 것(邪), 달콤한 것(甛), 속된 것(俗), 의지하는 것(賴), 이 네 가지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산수화가 단순히 본 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부춘산거도」를 비롯하여 「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구봉설제도(九峰雪霽圖)」「단애옥수도(丹崖玉樹圖)」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산수화는 후대 문인화가들의 스승이 되었다. 원대에 활동한 4명의 화가 즉 황공망, 오진(吳鎭,1280-1354), 예찬(倪贊,1301-1374), 왕몽(王蒙, 약1308-1385)을 원사대가(元四大家) 또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라고 한다. 그들은 독특한 필묵과 개성적인 화풍을 성취하고 사실성과 사의성(寫意性)을 결합한 산수화를 완성해 후대의 많은 화가들이 도달하고 싶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황공망은 중국과 조선의 산수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원4대가의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황공망에게 그림을 배웠다. 명청대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동기창, 진계유(陳繼儒), 4왕오운【四王吳惲: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鑒), 왕휘(王翬), 왕원기(王原祁), 오력(吳歷), 운격(惲格)】과 그 유파, 금릉8가【(金陵八家:공현(龔賢), 번기(樊圻), 고잠(高岺), 추철(鄒喆) 오굉(吳宏), 엽흔(葉欣), 호조(胡造), 사손(謝蓀)】, 신안4대가【新安四大家:사사표(査士標), 손일(孫逸), 왕지서(汪之瑞), 홍인(弘仁)】와 그 유파 등이 모두 황공망의 산수화를 임모하거나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한 많은 남종문인화가들이 황공망을 추종했다. 특히 조선후기의 정수영(鄭遂榮,18-19세기)과 말기의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황공망의 그림을 모방하여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를 남겼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제자 허련(許鍊, 1808-1893)에게 ‘조선의 작은 대치’라는 뜻으로 ‘소치(小痴)’라는 호를 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부춘산거도」는 역설적으로 그 가치 때문에 불태워질 뻔 했다. 역대 소장가들은 「부춘산거도」를 진귀한 보물 다루듯 소중하게 여겼다. 심주와 동기창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은 강소성에 살았던 오홍유(吳洪裕)에게서 발생했다. 명말청초의 거부이자 소장가였던 오홍유도 「부춘산거도」를 매우 아꼈다. 그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가족들에게 「부춘산거도」를 태워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명화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이기심이 빚은 사건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명화를 불태웠다. 이때 방에 있던 오홍유의 조카 오정안(吳靜安)이 무엇인가 타는 냄새를 맡고 밖으로 나왔다. 천하의 명화가 불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오정안은 황급히 그림에 붙은 불을 껐다. 다행히 불길은 잡았으나 그림은 두 토막이 났다. 두 개의 그림은 현재 두 곳에 소장되어 있다. 시작 부분은 절강성박물관에, 주요 부분이 들어간 다른 그림은 대북고궁박물원에 있다.

위대한 그림이 후손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숱한 위험과 어려움이 뒤따른다. 사량분별을 단칼에 베어버리기 위한 선사들의 가르침인 공안(公案)은 더하다. 말은 말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가르침은 전달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삭제되기 십상이다. 운문문언선사의 가르침은 『운문록(雲門錄)』에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봐도 가슴에 와 닿지가 않는다. 와 닿지 않으니 읽고 싶지가 않다.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니 책에 적힌 내용이 말장난처럼 보이고 일반인은 안중에도 없는 전문가들끼리 ‘그들만의 천국’에서 나누는 대화 같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누군가 눈 밝은 스승이 나타나 운문선사의 가르침을 해설해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어가니 인내심이 줄어든 탓일지도 모르겠다. 잘난체하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치는 사람보다 자분자분 설명해주는 친절한 사람이 더 좋다.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운문록』에 대한 해설이 ‘날마다 좋은 날이다’처럼 가슴에 와 닿았으면 좋겠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몸을 ‘마른 똥막대기’라고 한 말처럼 조금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설이라면 더욱 좋겠다.

(출처: 법보신문)

▲조정육       옥련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