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대신 외지인 가이드로 나선 의사 가흐라몬과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눈 덮인 천산산맥을 넘어 키리기스탄으로 들어섰다. 해발 1천600m 고원에 길게 누워 있는 이식쿨 호수는 길이 170km에 폭이 70km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고인 고산호수로는 지구에서 남미 안데스 산맥의 티티카카 다음으로 큰 호수다. 바닥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솟구치기 때문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이곳은 곳곳에 군사시설이 있어 소련 연방 시절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조주쳥<만화가, 여행가> 친산산맥 아래 이식쿨 호숫가에는 기름진 벌판이 펼쳐져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키리스탄 사람들은 모자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직도 이동천막 주택인 유트르가 간혹 보인다. 키리기즈들의 이슬람식 묘지 여름 휴양객들을 위해 이식쿨 호수가에 세워 놓은 파라솔에 칠면조들이 앉았다. 카라쿨로 가는 길에 어둠이 내린다. 놀라서 달려온 신랑이 배가 부른15세 신부를 껴안아 보인다. 러시안 소년소녀가 이식쿨 호수에서 잡아 훈제한 고기를 팔고 있다. 수도 비슈켁을 벗어나자 밤새 눈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10일 동안 빌린 닛산 페트롤이 샤린 계곡에 닿았다. 눈 덮인 천산산맥을 넘으면 이식쿨 호수다. 자동차정비공장 옥상엔 아직도 레닌의 초상이 건재해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물 닛산 패트롤을 열흘 동안 빌려 카자흐스탄과 키리기스탄을 돌아오기로 했다. 차주이자 운전기사인 가흐라몬(45)은 다른 현지인에 비해 허우대가 멀쩡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타쉬켄트에 자리잡은 제1국립병원의 현직 외과의사란다.
`열흘이나 병원을 비우면 목이 잘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서 동료 의사들에게 술 한 잔 사주면 그만이다`는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 여행길에서 차가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도 병원을 그만둘 걱정은 없겠네`라고 농담을 던졌더니, `천만의 말씀, 내 다리를 고쳐줄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척 받아넘긴다.
몇 푼의 돈으로 국경 검문소 통과해 눈 덮인 천산산맥 넘어 키리기스탄으로
우즈벡뿐만 아니라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나라 모두가 지금 심각한 의료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너희들에게 공짜로 의술을 가르쳐주었으니 너희들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이 그들 나라의 주장이고 `명색이 의사인데 막노동자보다 월급이 적어서 어떻게 살겠나`라는 것이 그 나라 의사들의 항변이다. 따라서 국가에서 병원에 지급되는 좋은 약은 거의 전부 의사들이 빼돌려 자기 집에 갖다놓고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을 자기 집으로 유인, 병원 의료수가의 몇 배를 받는 것이 이곳의 현실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대신 외지인 가이드로 나선 가흐라몬과 그의 동료들의 현실에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나의 당면 문제는 카자흐스탄에서 눈 덮인 천산산맥을 넘어 키리기스탄으로 밤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두 나라의 동쪽 끝, 중국의 신장을 코앞에 둔 카르카라 계곡의 국경 검문소는 원래 카자흐스탄과 키리기즈 현지인들만 왕래하게 되어 있는데, 닥터 운전기사가 몇 푼의 돈으로 검문소 경비원들을 구워삶아 키리기즈 땅으로 무사히 들어오게 되었다.
국경을 넘으니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천산산맥을 넘는 비포장도로에 눈이 쌓이지 않았다. 금상첨화였다. 단지 굽이굽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산산맥을 기어오르는 데 밤길이라 그 웅대무비한 경관을 하나도 못 보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천산산맥을 넘으니 키리기스탄이 자랑하고 신성시하는 만경창과 이식쿨 호수가 해발 1천600m 고원에 길게 누워 있다. 이식쿨 호수는 길이가 자그마치 170km에 폭이 70km로 육안으로는 호수라기보다 바다라고 불러도 될 듯 싶다.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고인 고산호수로는 지구상에서 남미 안데스 산맥의 티티카카 다음으로 큰 호수다.
10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 분지에서 몰려온 키리기즈족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바로 이 호수로, 만년설이 쌓인 천산산맥 가운데 높은 고원에 자리잡았지만 겨울에도 호수가 얼지 않는다. 호수 바닥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이식쿨이란 말 자체가 키리기즈어로 `더운 물`이라는 뜻이다.
이식쿨은 키리기즈어로 더운물을 뜻해 소련 시절엔 아편과 대마초 재배하기도
19세기 중엽,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며 많은 러시안과 우크라이니안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이 호숫가엔 지금 키리기즈인과 러시안의 인구비율이 반반이다. 높은 고원에 자리했고 얼지 않는 호수를 끼고 있는 덕택에 기온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천산산맥과 호수 사이엔 기름진 땅이 펼쳐져 수많은 마을이 호숫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은 또 실크로드의 길목이고, 15세기 중앙아시아의 영웅 티무르가 여름 수도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키리기즈 사람들은 이 호수 전부가 온천이라 생각한다. 불과 8년 전, 소련연방이 와해되면서 키리기스탄이 완전 독립하기 전까지 외국인들은 이곳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소련 연방 정부의 묵인 아래 아편과 대마초를 재배했고, 소련 해군이 서방의 눈을 피해 이 호수에서 어뢰발사 시험을 일삼았으며, 알려지지 않은 많은 군사무기 연구소가 호수 주변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키리기스탄이 독립한 뒤에도 러시아의 엘친은 겨울에 얼지 않는 이 호수를 러시아군이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간청했으나 키리기스탄 대통령은 거부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군사시설이 남아 있어 여행객의 접근을 막고 있다.
지금도 호숫가엔 많은 러시안들이 살고 있다. 소련 연방 시절에는 1등 국민으로 큰소리치고 살았지만 지금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살고 있다. 러시안들은 러시아로 역이민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어 일부 러시안들은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그곳 사정이 너무 엉망진창이라 대부분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호수 주변 벌판에 자리한 러시안 농가를 찾아갔다. 남편은 일하러 가고 장화를 신은 안주인 혼자 장작을 패고 있는데, 나타샤라는 배가 차오른 이 아줌마(?)는 놀랍게도 15세에 불과하다. 1만 평쯤 되는 땅에 사과나무 200그루, 소 40마리, 양 39마리, 말 4마리 그리고 닭과 칠면조를 기르고 있다고 한다. 어디선가 말발굽소리 요란하게 남편 알렉세이(26)가 그의 처남과 함께 달려왔다. `무뢰한들이 쳐들어 왔는가 놀랐다`는 말을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그들이 사는 집은 버스 크기의 녹이 슨 이동주택으로 주거환경이 정말 열악해 보였다. 가축과 땅값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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