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지리의 만성현이 바로 우리의 낙랑군이었다.

2016. 1. 20. 04:06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대지리의 만성현이 바로 우리의 낙랑군이었다. | 고구려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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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156 |추천 0 | 2012.05.09. 10:19

 

 

 

樂良郡天平四年置。   領縣一  戶四十九  口二百三  永樂興和二年置。

북위서

 

   낙랑군은 537년 설치했다. 현이 1개 있는데 호수가 49이고 인구는 203명이다. 영략현이 있는데 540년 설치했다.

 

(당시는 고구려 안원태왕의 시기로 황비 2명이 서로 자기아들을 태왕으로 세우겠다고 난리치는 통에 고구려의 국력이 쇠약해졌다. 당시에 신라에 망명한 승려가 고구려가 곧 망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내분이 심했다. 아직 돌궐이 발흥하기 전으로 북방은 여전히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러니 고구려의 땅인 낙랑군을 북위가 뺏을 수가 없다. 인구수를 보라 한나라때 낙랑군은 수십만명이었는데 북위때 203명이 먼가? 우리나라 이북5도청처럼 어딘가에 교치한 것이다. 아니면 낙랑군의 끝자락 조금이나마 얻어서 현을 설치했겟지?)

 

 

 

 滿城 漢北平縣地,後魏置永樂縣,隋不改。天寶元年,改為滿城。五回開元二十三年,剌史盧暉奏分易縣置城於五回山下,因名之。二十四年,遷於五公城。暉又奏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廢。

구당서

 

만성은 한나라 북평현이다. 북위가 영락현을 두었다. 수나라도 그리했다. 742년 만성으로 개명했다. 중략 756년이후 폐지했다.

 

(당나라 현종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 때 이후로 폐지되었다는 것으로 그 땅주인이 안녹산도 당나라도 아닌 제3자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당시 발해가  당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중국드라마에는 현종 중기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옛성을 모두 반환하라고 협박하자 현종이 반발했고 발해의 수십만 대군이 당나라 북쪽을 침공해서 변경수비대가 모두 전멸했고 급기야 고선지가 현종의 우림군(황실근위대) 2만명을 이끌고 땜빵하러 갔다고 한다. 발해는 그제서야 진격을 멈추었다고 한다 .근위대를 차출할 정도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다.중화사상이 가득한 중국드라마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즉 실제로는 발해가 더 심하게 당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이 시기 이후에 발해 대인수 황제때 원나라기록에 의하면 북방을 모두 평정하고 남으로 신라마저 평정해서 당시 최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듯하다. )

 

북위서와 구당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후대에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되었더라도 한가지는 알수 있다. 바로 만성현이 당시에 낙랑군이라 부른 곳임을!!!

 

,退居河中之永樂縣。

구당서

 

하중의 영락현으로 후퇴했다.

 

 

今河東郡永樂、芮城、河北縣及河曲豐、勝、夏州,皆為實沈之次

구당서

 

지금 하동군의 영락현 예성현 하북현에서 하곡의 풍주 승주 하주까지 모두가 포함하는 것이다.

 

易州中 隋上穀郡。武德四年,討平竇建德,改為易州,領易、淶水、永樂、遂城、乃五縣。五年,割乃縣置北義州。州廢,

구당서

 

역주는 수나라 상곡군인데 래수 영락 수성 등의 5개현이 있다. 분할해서 북의주를 설치했다가 없앴다.

 

懷州雄 隋河內郡。武德二年,於濟源西南柏崖城置懷州,領大基、河陽、集城、長泉四縣。其年,於濟源立西濟州,于武德縣立北義州,修武縣東北故濁鹿城立陟州

구당서

 

회주는 수나라 하내군인데 중략 무덕현에 북의주를 설치했다 수무현 동북쪽에 옛 탁록성이 있는데 주로 승격했다.

 

당나라에서 영락현 즉 북위때 영락현이라 부른 낙랑군의 영락현이 바로 회주이자 하동군이며 하중이라고 부르기도하고 북의주라고 설치한 곳임을 알수 있다. 탁록은 치우와 황제가 싸운 곳으로 지금 위치도 만성현에서 멀지 않다.

 

자주 시청하는 중국드라마 중에 대진제국이란 드라마가 있다. 거기에 보면 고지도가 나오는데 뜻밖에도 심수 정도까지만 등장한다. 심수의 동북쪽은 아예 그리지 않았다. 즉 연나라와 조나라와 제나라가 모두 심수 동북쪽에는 없는 것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중국드라마를 제작하는 PD보다 못한 지식을 가진 한국의 국사학자들이 참 대단하시다.~~

 

 

대진제국에 등장한 지도 중국PD는  전국7국의 위치를 위와 같이 그려서 방영했다.

 

 

 

 

아이고 땅을 치며 탄식할 노릇이다.

 중국역사드라마 PD보다 못한 지식을 가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여 정신좀 차리소!!!

 

 

 

 

 

 

 

   이미 최치원이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유연제노오월을 모두 점령했다고 기록이 있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 블로그에는 그 땅에 있는 고구려성 유적을 모조리 찾아서 올렸다. 최치원이 말한데로 고구려성 유적이 유연제노오월 땅에 고스란히 아직도 남아있었다.  고구려성은 치성과 옹성이 특징인데 그 시작은 바로 지금 터키 동부지방의 히타이트였다. 히타이트의 고성은 치성과 옹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들이 스키타이가 되고 동으로 이동하면서 그 고유의 축성방식을 유지한 것이다. 스키타이를 다른 말로 황금의 종족 즉 칭기즈칸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불렀던  하늘을 사랑하고 하늘의 자손인 황금의 종족인 것이다. 그리스사람들은 노아의 손자인 마곡의 후손들을 가리켜 스키타이라고 불렀다. 왜 고구려 거란이 자신들의 조상을 고신 즉 마곡이라 불렀는지 이해할 것이다.

 

   마는 발음에 따라 모혹은 무로 될수도 있으며 그래서 몽골이란 이름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근원은 마곡이었던 것이다. 고구려 역시 그 이름의 근원은 마곡이다. 말갈역시 헝가리발음으로 마자르라고 하지만 발음에 따라 마가르 혹은 마고르 즉 마곡에서 왔음을 알수 있다. 조상의 이름을 따서 우리 선조들이 나라이름과 종족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언제쯤 마곡의 후손들이 통일되는 날이 오려나~~~~~~~~~

 

 

 

 

 

청송 12.08.12. 17:17
"滿城,漢北平縣地.後魏置永樂縣,隋不改,天寶元年改為滿城."이란 기록 중의 '漢北平縣'地는 아무리 북쪽으로 보아도 작금의 지도들에서 산서성 霍太山 동북록지경에 표기된 '北平鎭'지경쯤이 아니었을런지요? 이 북평진 남방에 永樂과 古縣이란 지명도 보입니다. 필경 上谷(郡,縣) 땅도 이 근처 물줄기에 인접하였을 것이고...

제가 가진 견해로는,
漢4郡이 사실로 있었고 그 낙랑군이 "屯有縣(屯留縣)"을 포함하였던 郡이었었다면,
그리고 후세에 公孫度이 낙랑(군)땅(북부여 이남 최숭의 낙랑고지?!) 屯有 이남에 帶方國을 열었다면,
본시의 滿城은 산서성 곽태산 동북록의 북평진 인근의 어느 古城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history author 12.08.27. 12:54
북평의 위치는 님의 고견이 맞다고 봅니다.
 
 
청송 12.08.12. 17:34
삼국사기 모본왕 2년(AD49)조의
"二年春,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彤以恩信待之,乃復和親."란 기록과, 동등한 내용으로 보이는
남당유고 고구리사초 대무신제기 22년(AD48)조의
"二十二年乙酉正月,遣將軍于刀烏義等伐戴升于潛支落河柵,斬于柵南,進拔赤城蠶支,遂率紫蒙王滿離斯古涉得等分四道進攻右北平漁陽上谷太原等地奪其宝玩美色絹織珍味等多數.歲以爲常,蔡彤大惧約修年貢乞和."란 기록으로 보면
북평(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은 후한(현하남성낙양시)조정 입장에서 보면 매우 위급한 지역이었을, 낙양(도성)으로 가는 중요한 군사요충들이었던 것이지요...
 
 
김태현 13.03.22. 18:57
저가 15살인 학생인데
역사가 너무 좋아서 공부하고 잇는데
교과서에는 고구려 영토가 이 사진보다 엄청 작은데
왜 이 사진의 영토가 교과서의 안실리는거죠? ..
 
history author 13.03.25. 09:20
권력을 잡은 사람 맘이랍니다. 그리고 기존 국사책을 쓰는 이들이 왜놈들의 식민사관 추종자와 그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조선이 개국 당시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가르치고 고구려가 베이징 일대를 점령했다고 가르치는 학자도 늘어나고 있죠 아직 참 ~~ 멀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