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35·끝> 여래와 예수로 본 동서양의 조형원리

2016. 1. 26. 00:40美學 이야기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35·끝> 여래와 예수로 본 동서양의 조형원리


동양의 영기문·보주 ‘예수의 부활’에도 숨겨져 있었다


입력 : 2015-10-08 17:52 | 수정 : 2015-10-09 01:13


   

      


   필자의 원래 전공은 불상조각이지만 불화(佛畵)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특히 괘불(掛佛)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2004년 9월 통도사 괘불전시실에서 전남 해남달마산 미황사 괘불을 조사하면서 문득 불화에 눈을 뜨는 감동적 순간을 체험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깨달음의 첫 단추를 열었을 뿐이었다. 인생과 학문을 닦는 과정은 단계를 밟아 일시에 깨닫는 점수돈오(漸修頓悟),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소멸시켜 가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름으로 깨달았다.



       



             

   이후 불화의 연구는 속도가 붙었고 국내외에서 관련 논문과 저서를 세상에 냈다. 눈을 떴다고 하나 또 다른 참된 깨달음은 훨씬 후에 일어났다. 안방 머리맡에 미황사 괘불의 상반신으로 만든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 애수(哀愁)에 잠겨 있는데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여래의 머리 선이, 붕긋붕긋한 머리털 중간에 있는 이른바 중간육계(中間肉髻·살이 불룩 솟아 상투 같은 모양)와 연결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머리 맨 위에 정상육계(頂上肉髻)가 있는데, 그때까지 그 두 개의 육계 관계를 세계 학계는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상 계주건 중간 계주건 골육이 융기하되 상투 같아서 육계라 하며, 불상 32상 중 하나인 존귀상으로 알려져 있다. 또 머리칼이 돌고 있어서 이른바 나발(髮·소라껍질 모양으로 돌아 올라간 머리칼)의 형태를 짓고 있다. 그 육계의 연원은 흔히 불교경전에서 찾으려 했다. ‘중아함경’이나 ‘방광대장엄경’ 등은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고 설명한다. 모두 ‘머리칼이 나발임’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래의 머리에는 머리칼이 있을 수 없다. 원래 인도 본토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의 머리에는 하나의 큰 소라 모양이 솟아 있으며, 그다음 단계에서는 작게 도르르 말린 머리칼이 수없이 덮여 있다. 간다라 지방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아 곱슬머리로 표현했다. 그런데 마투라건 간다라건 머리칼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영기문으로, 제1영기싹으로 나타내어 여래와 보살로부터 발산하는 영기문임을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에서 보는 곱슬머리나 상투를 가지고 육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육계의 본질을 어찌 알 것인가.



       



   필자는 미황사 괘불의 석가여래 머리를 과감히 깎았다⑥, ⑦.그러나 깎은 것은 머리칼이 아니라, 제1영기싹이 연이어 여래로부터 발산하는 강력한 기운을 나타낸 붕긋붕긋한 영기문이었다. 그것이 여래의 본질인 큰 보주를 가리고 있었다. 영기문을 제거하니 2000여년 만에 여래의 신비한 모습이 나타났다. 즉 솟아오른 여래의 머리가 보주화(寶珠化)해 맨 윗부분에 구멍이 있지 않은가. 그 구멍으로부터 하나의 보주가 솟구쳐 나오고, 다시 그 보주로부터 강력한 두 줄의 영기문이 나와 서로 나선형으로 꼬이며 양쪽으로 뻗어 나가다 태극을 이루고 다시 강력히 뻗어 나가 우주에 충만해진다. 불교경전들은 결국 정답을 주지 못했다. 여래는 과 마찬가지로 보주의 집적이었다. 여래로부터 하나의 보주가 나오지만 무량한 보주를 발산해 대우주에 가득 찰 것이다. 하나의 보주에서는 무량한 보주가 나온다. 한 분의 용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나오듯이….


이제 기독교에서 예수의 본질을 파악해 보기로 하자.

   아칸서스라고 알고 있는 조형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서양미술사 내지 문화사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지 알았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증명은 부족해 본격적인 영기화생 조형을 해석하려 한다. 서양미술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아칸서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여러 가지 아칸서스의 조형에 대해 생각하고 채색분석하는 동안 문양집에서 불과 27x21㎝에 불과한 흑백 삽화를 접했다. 이른바 아칸서스가 가득한 그림이었다. 스캔하여 확대해 본 결과 엄청난 조형들을 발견했다. 작고 흐려서 안 보이는 부분이 많았으나 백묘를 뜨고 채색분석에 들어갔다. 수많은 보주들과 영기잎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해 가는데, 중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있다. 만일 이것들을 보석이나 아칸서스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지만, 영기잎과 보주로 보면 기독교 미술의 매우 중대한 신비와 상징이 드러난다.

프랑코 왕국의 샤를 2세(823~870), 별칭으로 ‘샤를 대머리’라고 불리는 왕에게 헌정된 미완성의 ‘미사 전례 기도집’에 뛰어난 삽화 여섯 장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필사본 정밀 삽화로 불교회화로 치면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 해당한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와 미사에 쓰이는 기도집이다. 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삽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장면은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보여 준다①. 필자가 처음 접한 흑백사진이다. 영기화생론으로 채색분석하면서 해석해 보자.




전체 그림을 그려서 채색분석하자면 너무도 가슴 벅찬 많은 상징과 세밀한 그림이 치밀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한 회로 끝낼 수 없다. 3년 전에 분석한 것을 부족하나마 싣고, 십자가 오른쪽의 위아래로 긴 장방형 안의 조형은 원래 그림에서는 너무 비좁아 따로 채색분석했다.

가운데 십자가를 중심으로 자세히 새로 다시 그리고 채색분석했다②. 맨 밑 부분의 영기문을 보자. 중심에 빨간 작은 보주들과 일체를 이루는 복잡한 매듭들을 채색분석해 보니 그 흐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전체에서는 세부가 보이지 않으므로 부분을 확대하기로 한다.

맨 밑에 좌우로 긴 영기문을 시발점으로 상하좌우로 복잡하게 전개한다. 좌우로 뻗어 나가 십자가 양옆 공간을 가득 채우고, 위로 올라가 십자가가 화생한다. 자세히 보면 제3영기싹의 제1영기싹 끝에서 각각 초록색과 붉은색 영기문이 생겨나 복잡한 매듭과 보주들을 거쳐 십자가로 연이어 감으로써 십자가는 영기문이 된다. 십자가가 영기문이라면 모두가 의아해할 것이지만, 조형을 따라가 보면 그렇지 아니한가. 제3영기싹의 위치도 매우 중요한 것을 보면 삽화 작가는 누군지 모르지만 무명의 뛰어난 장인임이 틀림없다. 양쪽으로 십자가가 올라가는가 하면 예수의 양쪽 팔이 뻗어 못 박힌 횡으로 긴 십자가는 아랫부분의 매듭으로 얽힌 영기문을 축소한 영기문, 제3영기싹의 제1영기싹 끝에서 생긴 영기문이 뻗어 나와 좌우 십자가를 완성하며 십자가 전체가 양쪽의 영기문과 아래 영기문에서 화생한 셈이다④, ⑤.

   즉 십자가가 영기화생하고, 그 영기화생한 십자가에서 예수가 화생한다. 이미 조형적으로 죽은 예수가 영기화생하고 있다. 화생(化生)의 개념은 서양의 문자언어에는 없지만 조형언어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예수님 자체의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는데 보주로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피다. 옆구리의 창에 찔린 자리에서도 피가 아니라 보주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예수의 머리가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 여래의 머리가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자리 잡은 노란색 공간은 공간이 아니라 영기의 넓은 띠다. 양쪽 맨 가의 제1영기싹 공간에서 넓은 아칸서스 모양으로 끝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 영기잎 줄기마다 보주들과 겹쳐 있다. 끝으로 광배. 둥근 광배는 보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광에서 반복하고 있는 십자가도 보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기문과 보주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 이미지는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뱀. 그러나 뱀이 아니다. 용성을 지닌 영기문이다. 놀랍게도 만물생성의 근원인 제3영기싹에서 화생하고 있다. 그 영기문의 입에서 다시 양 가닥의 영기문을 토해 내고 있다. 뱀만 다시 채색분석한다③. 뱀에서 중요한 것은 부활의 상징성이다. 부활이라는 상징을 놀랍게도 영기화생으로 표현했다. 전체 그림에서 십자가 부분 외의 모든 부분은 힘찬 영기잎들과 보주들로 이루어져서 중심의 예수와 십자가를 화생시키고 있다. 예수의 ‘영기화생’은 예수의 ‘부활’과 일치한다.

뱀은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동시에 오래전부터 두렵고 신성한 존재로 여겨 와서 여러 신화나 설화 속에서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뱀의 특성과 연관돼 있다. 뱀은 죽을 때까지 쉼 없이 탈피하는 동물이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했고, 뱀은 부활·치유·재생의 대명사가 됐다. 그래서 많은 의료기관이 뱀을 심벌로 사용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죽음 및 재생과 관련된 신으로는 오시리스, 아도니스, 예수, 미트라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심리학, 종교학, 신화학 등에서 뱀과 신의 부활이라는 주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십자가 위에 해와 달이 의인화돼 표현되어 있는데,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와 반드시 함께 나타나는 해와 달에 대해서는 놀라운 도상들이 그리스 이래 수없이 나타난다. 놀랍게도 이 십자가를 화생시킨 맨 아래 매듭과 무량한 보주들에서 양쪽으로 뻗어 나간 긴 영기문에서 십자가 좌우에 가득 찬 영기문으로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글씨, ‘Te igitur’(테 이구투르)는 미사통상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Te igitur’(당신께 그러므로), 이 부분을 빼고 다음과 같이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즉 ‘인자하신 아버지 (당신께 그러므로)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간절히 청하오니….’

   아칸서스, 팔메트, 반 팔메트, 인동문(Honey Suckle), 장미, 모란, 덩굴, 석류, 메달리온, 거북~귀갑문, 그로테스크, 스파이럴(渦), 파문(巴文), 만(卍)자문, 뇌문(文), 칠보(七寶) 등 수없이 많은 잘못된 용어들을 바로잡아 가는 동안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연재의 마지막 부분은 아칸서스라고 하는 하나의 틀린 용어를 바로잡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새로이 해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므로 35회에 걸친 이번 연재는 우리가 ‘비의(秘儀)의 무대’를 지나가다가 장막을 한 손으로 걷어 올리며 힐끗 한 번 안쪽을 엿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밀교(密敎)의 속성을 지닌다. 조형언어란 그런 의미에서 밀교적 언어다.

필자가 말하는 ‘인류’란 ‘동서고금’이다. 부분만 연구해서는 인류를 만날 수 없다. 필자는 동서고금의, 즉 인류 조형예술의 비밀을 풀어 내고 있다. 보이지 않았던, 무엇인지 몰랐던 조형의 본질을 풀어 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전부였다고 생각했던 빙산의 일각의 엄청난 오류를 고쳐 나가고 있다. 인류 문화에 대한 근본적 인식 변화가 시작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기화생론’은 인류 조형예술의 기원을 푸는 열쇠가 돼 미래의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용이란 조형의 본질을 파악해 보니 모든 조형이 용 하나에 수렴됨을 알았다. 봉황과 식물 모양 영기문들은 모두 용이나 용성(龍性)으로 귀결한다. 용의 조형은 변화무쌍해 ‘주역’(周易)에 자주 나타난다. 용의 조형에서 추출한 제1, 제2영기싹과 보주 등으로 모든 보이지 않았던 조형들이 완벽히 풀린다. 지금까지 동양과 서양은 전혀 다른 것으로 모든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빙산의 조형 원리는 동서양이 똑같았다. 세계는 하나라는 것을 증명했다. 동서양의 조형 5000여점을 채색분석해 얻은 성과다. 1㎜의 오차도 없다.

‘세계조형예술, 용으로 읽다’라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했을 때부터 가장 염려했던 분은 국제정치학이 전공인 필자의 형 강범석 명예교수다. 매번 가슴 졸이며 연재를 정독하고 이메일로 논평을 해 왔다. 한 해 가까이 과분한 지면을 베푼 서울신문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내 긴장과 환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의 나날이었다. 필자의 학문적 생애의 작은 매듭을 짓는다. 모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서울신문





서울신문- 세계의 조형예술, 용으로 (36)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2015.10.15 15:36
                        

(35회) 여래와 예수

용이 보주의 집적이듯 여래와 예수는 보주의 집적으로 무량한 보주 발산




도 1-1. 미황사 괘불의 상부


   필자의 원래 전공은 불상조각이었다. 그러나 불교회화 연구도 병행하여 오며 불화(佛畵)의 중요성을 인식화면서 특히 괘불(掛佛)에 큰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조사해왔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는 매년 괘불 두 작품을 한 해에 바꾸어 가며 전시해온지 16년째다. 2004년 9월에 통도사 괘불전시장에서 전라남도 해남군 달마산(達磨山)에 있는 미황사(美黃寺) 괘불을 조사하였을 때 문득 불화에 눈을 뜨는 감동적 순간을 체험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깨달음의 첫 단추를 열었을 뿐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끊임없는 체험에 의하면, 인생과 학문을 닦는 과정에서 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 일시에 깨닫는 점수돈오(漸修頓悟),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소멸시켜가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두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름으로 깨달았다. 그 이래 불화의 연구는 속도가 붙었고 국내외에서 불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왔다. 눈을 떴다고 하나 또 다른 참된 깨달음은 훨씬 후에 일어났다. 필자의 안방 머리맡에는 미황사 괘불의 상반신으로 만든 포스터를 붙여 놓았었다. 그 괘불의 얼굴이 애수(哀愁)에 잠겨있는데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래의 머리 선이, 붕긋붕긋한 머리털 중간에 있는 이른 바 ‘중간 육계’(肉髻: 살이 불룩 솟아 상투 같은 모양)와 연결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머리 맨 위에 정상육계(頂上肉髻)가 맨 위에 있는데, 그 때까지 그 두 개의 육계의 관계를 세계의 학계는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상계주건 중간 계주건 골육이 융기하되 상투 같아서 육계라 하며 존귀상의 하나로 불상 32상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또 머리칼은 돌고 있어서 이른바 나발(螺髮: 소라껍질 모양으로 돌아 올라간 머리칼)의 형태를 짓고 있다. 그런데 그 형식변화가 나발 형태로 진행되었어야 하는지는 불경에서 들고 있는 부처님의 특상인 32상의 내용에서 찾아낼 수 있다. 『중아함경』 권11 왕상응품 삼십이상경에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 하는 한 항목이 있다. 대승경전인 『방광대장엄경』 권3에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빛은 검푸르다”는 두 항목을 들고 있다. 모두 ‘머리칼이 나발임’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즉 간다라의 불상에 나타나는 곱슬머리가 나발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육계 연구의 권위자들의 연구성과이고, 불경에서 찾은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그밖에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서양의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그리 성과는 없다. 그러나 정답은 경전에 없으며, 보주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결국 동서양의 조형예술품들을 영기화생론으로 연구하여 풀어나가는 동안 ‘인류 조형의 보주화(寶珠化)’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정립하려면 보주의 개념을 충분히 정립하고 세계의 조형예술품들을 섭렵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조형예술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리고 무엇인지 몰랐던 조형들이 보일 때까지는 불가능하다.

     

  우선 여래의 머리에는 머리칼이 있을 수 없다. 원래 인도 본토의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의 머리에는 하나의 큰 소라 모양이 솟아 있으며,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은 도르르 말린 머리칼이 수없이 덥혀 있다.  간다라 지방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아 곱슬머리로 표현했다. 그런데 필자가 그리스=로마의 여러 신상(神像)들을 관찰하였을 때 그 역동적인 곱슬머리는 신상에서 발산하는 영기문이며, 이미 그리스의 이른 시기의 여인상의 머리칼이 영기문화되는 것은 불교의 보살의 머리가 영기문화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투라건 간다라건 머리칼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영기문으로 제1영기싹을 나타내어 여래와 보살로부터 발산하는 영기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에서 보는 곱슬머리나 상투를 가지고 육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육계의 본질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상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도 1-2. 보주에서 보주가...



   필자는 미황사 괘불의 석가여래의 머리를 과감히 깎았다.(도 1-1, 도 1-2) 그러나 깎은 머리칼은 머리칼이 아니라, 제1영기싹이 보주로 변하고 보주들이 연이어 여래로부터 발산하는 강력한 기운을 나타낸 붕긋붕긋한 영기문이지만, 여래의 본질인 큰 보주를 가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 2000여 년 만에 여래의 신비한 모습이 나타났다. 즉 솟아오른 여래의 머리가 보주화(寶珠化)되어 맨 위 부분에 구멍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구멍으로부터 하나의 보주가 솟구쳐 나와 다시 그 보주로부터 강력한 두 줄의 영기문이 나와 서로 나선형으로 꼬이며 양쪽으로 뻗어나가다 태극을 이루고 다시 강력히 뻗어 나가 우주에 충만해 진다. 불교경전들은 결국 정답을 기록하지 못했다. 여래는 용과 마찬가지로 보주의 집적이었다. 이 밖에 수많은 예를 들어 여래가 보주의 집적임을 증명할 수 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룬다. 여래로부터 하나의 보주가 나와 있지만 계속하여 무량한 보주가 발산하여 대우주에 가득 찰 것이다. 하나의 보주에서는 무량한 보주가 나온다. 마치 한 분의 용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나오듯이.



다음에 기독교의 예수의 본질을 찾아보기로 하자.

아칸서스라고 알고 있는 조형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서양미술사 내지 문화사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증명은 부족하다. 몇 년 전에 서양미술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아칸서스에 의문을 가지며 여러 가지 아칸서스의 조형에 대하여 생각하고 채색분석하는 동안, 문양집에서 불과 27x21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흑백삽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을 스캔하여 확대해본 결과 엄청난 조형들을 발견했다. 안 보이는 부분이 많았으나 백묘를 뜨고 채색분석에 들어갔다. 수많은 보주들과 영기잎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하여 가는데, 중심에는 십자가에 목 박힌 예수의 모습이 있다. 만일 이것들을 보석이나 아칸서스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지만, 영기잎과 보주로 보면 기독교미술의 매우 중대한 신비와 비밀이 드러난다. 영기잎이란 것은 씨방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본 식물의 잎을 승화시킨 것이므로 영기잎 역시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여 영기잎과 보주는 중첩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을 웅변하는 작품이 바로 이 미사 전례집 삽화이다. 마치 연꽃잎과 연 잎이 보주와 중첩하듯이.


도 2-1. 전도



9세기 프랑코 왕국의 샤를르 2세(823~870), 별칭으로 샤를르 대머리(Charles the Bald) 라고 불리는 왕에게 헌정된 미완성의 ‘미사 전례 기도집(Sacramentary)’에 뛰어난 삽화 6매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필사본으로 삽화 정밀화는 불화로 치면 사경 변상도에 해당된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와 미사에 쓰이는 기도집이다. 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 빠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여섯 매의 삽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장면으로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보여준다.(도 2-1.) 그러면 영기화생론으로 이 삽화의 조형을 채색분석하면서 해석해 보자. 채색분석한 종이에 이미 메모를 해놓았으므로 참고가 많이 될 것이다. 따라서 간략히 해석하고자 한다. 



도 2-2


  전체 그림을 그려서 채색분석하는 것은 너무도 많은 상징과 세밀한 그림이 치밀하게 그렸기 때문에 1회로 끝낼 수 없다. 3년 전에 분석한 것을 부족하나마 싣고, 중앙부는 따로 새로이 그려 분석을 따로 하기로 했다.(도 2-2) 그리고 십자가 오른쪽의 위아래로 긴 장방형 안의 조형은 원도에서는 너무 비좁아서 따로 채색분석했다.(도 2-3) 그냥 지나치지 말고 채색분석한 것을 정독하고 재독하기 바란다. 


도 2-3


  이 글에서는 중심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자세히 다시 그리고 채색분석하며 해석해 보기로 한다.(도 2-4) 맨 밑 부분의 영기문을 보자. 중심에 빠알간 작은 보주들과 일체를 이루는 복잡한 매듭을 채색분석하여 보니 그 흐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맨 밑에 필자가 그린 좌우로 긴 영기문을 시발점으로 하여 상하좌우로 복잡하게 전개하므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의 영기문이다.(도 2-5) 좌우로는 뻗어나가 십자가 좌우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위로는 올라가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가 화생하는데, 자세히 보세요, 제3영기싹의 제1영기싹 끝에서 각각 초록색과 붉은 색 영기문이 생겨나 복잡한 매듭과 보주들을 거쳐 십자가로 연이어 가므로 십자가는 영기문이 된다. 십자가가 영기문? 모두가 의아해할 것이지만, 조형을 따라가 보면 그렇지 아니한가. 오래 동안 문자언어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은 조형언어에는 매우 당황해 한다. 제3영기싹의 위치도 매우 중요한 것을 보면 삽화 작가는 누군지 모르지만 무명의 뛰어난 장인임에 틀림없다. 양쪽으로 십자가가 올라가는가 하면, 예수의 양쪽 팔이 뻗어 못 박힌 횡으로 긴 십자가는, 아래 부분의 매듭으로 얽힌 영기문을 축소한 영기문, 제3영기싹의 제1영기싹 끝에서 생긴 영기문이 뻗어나와 좌우 십자가를 완성하며 십자가 전체가 양쪽의 영기문과 아래 영기문에서 화생한 셈이다.(도 2-6, 도 2-7) 즉 십자가가 영기화생하고, 그 영기화생한 십자가에서 예수가 화생한다. 이미 조형적으로 죽은 예수가 영기화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 자체의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는데 보주로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피다! 그런데 굳이 적혈구(赤血球)와 백혈구(白血球)라는 용어의 구(球)를 공 모양의 보주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옆구리의 창에 찔린 자리에서도 피가 아니라 보주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예수의 머리가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도 2-8) 이것은 불교의 여래의 머리가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자리 잡은 노란 색 공간은 공간이 아니라 영기의 넓은 띠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양쪽 맨 가의 제1영기싹의 공간에서 넓은 아칸서스 모양으로 끝나지 않는가. 서양인들이 말하는 아칸서스가 현실에서 보는 아칸서스가 아님이 여기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그리고 그 영기잎 줄기마다 보주들과 겹쳐 있다. 자세히 보세요, 첫 눈에는 안 보인다. 그리고 끝으로 광배. 둥근 광배는 보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광에서 반복하고 있는 십자가도 보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기문과 보주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 이미지는 놀랍기만 하다.


도 2-4



도 2-5


도 2-6

도 2-7

도 2-8



  그리고 뱀. 그러나 뱀이 아니다. 용성을 지닌 영기문이다. 그 영기문은 놀랍게도 만물생성의 근원인 제3영기싹에서 화생하고 있다.(도 2-9) 그 영기문 입에서 다시 양 가닥의 영기문을 토해내고 있다. 뱀만 다시 채색분석해 본다. 여기에서 뱀은 그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인 ‘부활’이다. 뱀은 허물을 벗고 탄생하기를 반복한다. 부활이라는 상징을 놀랍게도 영기화생으로 표현하였다. 전체 그림에서 십자가 부분 외의 모든 부분은 힘찬 영기잎들과 보주들로 이루어져서 중심의 예수와 십자가를 화생시키고 있다. 그 상징은 예수의 부활과 완벽히 일치한다. 



도 2-9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져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뱀을 두렵고 신성한 존재로 여겨와서 여러 신화나 설화 속에서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런 현상은 뱀만의 특성과 연관 되어 있다. 뱀은 죽을 때까지 쉼 없이 탈피하는 동물이다. 뱀의 이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에서 부활해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했고, 뱀은 부활·치유·재생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의료기관에서는 뱀을 심벌로 사용한다. 뱀이 심벌로 사용되게 된 데에 더 깊게 들어가자면, 그리스·로마 신화와 이어진다. 


   죽음과 재생의 신은 세계의 신화에 넓게 볼 수 있는 죽었다 살아나는 신들에 대한 총칭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한 번 죽었다가 재생한다는 설화는 온 세상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죽음」 「재생」은 문자 그대로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일식과 월식, 등에서 상징되는 경우도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남녀로 의인화된 해와 달은 음양과 더불어 매일 태양이 지고 뜨듯이, 또 달이 이지러지다가 없어졌다가 커지면서 상현달(上弦月)로 다시 둥글게 되므로 죽음과 부활의 알레고리가 된다. 이러한 신으로서는, 오시리스, 아도니스, 예수, 미트라 등이 있으며, 여신에서는 이난나, 페르세포네도 죽음의 나라에 가서 돌아왔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은 연금술이나 영지주의 등 신비주의, 아시아·아프리카 등 제민족의 심리도 시야에 넣어 연구를 대성해, 죽음과 재생이라는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에 의해 개인·민족 사이에 공유되는 상징의 일부에서 만나며, 심리학적 통합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논했다.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이 카테고리를 「원형」이라는 통합적 발전은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신화적 예수론). 심리학, 종교학, 신화학 등에서 뱀과 신의 부활이라는 명제는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아칸서스, 팔메트, 반 팔메트, 인동문(Honey Suckle), 장미, 모란, 덩굴, 석류, 메달리온, 거북~귀갑문, 그로테스크, 스파이럴(渦), 巴文, 卍자문, 뇌문(雷文), 칠보 등 수없이 많은 틀린 용어들을 바로 잡아가는 동안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연재의 마지막 부분은 아칸서스라고 하는 하나의 틀린 용어를 바로잡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새로이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용어들을 <영기화생론>으로 바로 잡아가는 동안 우리는 역시 새로운 조형세계를 체험하며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35회에 걸친 연재는, 우리가 무대를 지나가다가 장막을 한 손으로 걷어 올리며 힐끗 안쪽을 엿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동서양의 조형예술품들을 영기화생론으로 연구하여 풀어나가는 동안 ‘보주화(寶珠化)’의 개념을 파악하려면 보주의 개념을 충분히 정립하고 세계의 조형예술품들을 섭렵해야 하며 그 다음에 보주화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조형예술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리고 무엇인지 몰랐던 조형들을 보일 때까지는 불가능하다. 보주화를 충분히 설명하려면 몇 회 걸려야 한다. 채색분석을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영기문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전자 현미경으로 보지도 않고 바이러스를 보았다고 하거나, 허블 망원경으로 관찰하지 않고 저 멀리 있는 별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필자가 인류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인류’란 ‘동서고금’이다. 부분만 연구해서는 인류를 만날 수 없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 같은 강국이 인류를 말하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이 세계를 말하면 어색하고 인류를 말하면 웃는다. 인류 탄생의 과학적 분석은 종의 기원을 낸 찰스 다윈 같은 인물을 우리나라는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동서고금의, 즉 인류의 조형예술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보이지 않았던 무엇인지 몰랐던 조형의 본질을 풀어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전부였다고 생각했던 빙산의 일각의 엄청난 오류를 고쳐나가고 있다. 인류문화 혁명이다. 이미 혁명은 시작되었는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선종은 경전과 불상을 불태웠다. 선종마저 가장 중요한 한계를 넘지 못했다. 不立文字를 내세우면서 다시 경전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조형언어가 존재하고 있는 줄 몰랐다. <종의 기원>은 사실도 아니요 추측일 뿐이지만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대성이론>도 계속 수정되고 있다. 그러나 <영기화생론>은 수정되지 않을 것이고 인류의 조형예술의 기원을 푸는 열쇠가 되어 미래의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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