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8. 04:31ㆍ美學 이야기
민화, 상징의 숲 - 월간미술 연재 (9)
월간미술 제 6회
민화는 더 이상 불가사의한 그림이 아니다.
민화에 대하여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은 흥미를 가지고 수집하는 소수의 수집가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흥미를 가진 학자는 그 당시 ‘민예운동’과 ‘공예운동’을 일본과 한국에서 펼치고 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였습니다. 타계하기 두 해 전인 1959년에 민화 두 점을 보고 ‘不可思議한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민화에 대한 최초의 글을 「民藝」지 제 80호에 싣습니다. 그는 전에도 민화를 많이 보았을 것이지만 처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민화를 만나 그 민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차분한 마음으로 적어 나갑니다. 그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라 말했다. 不可思議란 말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오묘(奧妙)한 것’을 말합니다. 불교 경전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서 不可思議란 말을 흔히 씁니다. 요즈음은 漢字를 쓰지 않아 사람들은 不可思議란 말 자체가 얼마나 심오한 뜻인지 모릅니다. 그림이 不可思議하다고 야나기가 말했다면 보통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나기는 철학과를 나와 문학계에서도 활동하는 한편, 안목도 뛰어나서 특히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민예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민예운동을 광범위하게 펼치면서 아시아와 유럽의 민예품들을 수집하여 東京에 ‘日本民藝館’을 세웁니다. 그런 종교철학 연구와 저술에 바탕을 두고 조형예술에 눈을 떴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한 그의 눈앞에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不可思議한 그림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민화에 대한 최초의 글인 「不可思議한 朝鮮民畵」를 다음에 부분적으로 함께 읽어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카무라(岡村)가 나도 일찍이 조선의 그림을 두 폭 소장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그림을 미요자와(三代澤)군에게 주었지만, 만약 그 사람이 그 한 장의 그림을 민예관에 기증한다면 나머지 한 장도 기증하여 나란히 진열하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나는 그 그림이 매우 보고 싶어서 미요자와에게 편지를 내서 결국 두 그림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나는 그 민화를 본 순간 그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에 심취했다....어디에서 그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 솟아나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 불가사의해서, 솔직히 말하건데, 꽤 안다고 하는 나도 2, 3일을 생각다 못해 지쳐버렸다. 병중이라서 이 수수께끼만은 도저히 충분히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붓을 잡는데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문득 생각이 나고 뭔가 실마리가 풀려 쓰고 싶은 요점의 항목을 줄줄이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막상 문장으로 쓰게 되자 그 아름다움의 특성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또 다시 막히기 시작하고 붓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몇 번이나 써내려가다가는 막히고 마침내 방치해 버렸다....다음 날 세리자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가 본 佳品 중에서도 조선화의 정물은 무심코 한데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불가사의한 놀라운 화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분한 기쁨입니다. 』 ...어쨋든 우리의 행복은 함께 아름다운 작품을 즐기고 그에 대한 생각을 서로 나누는 일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생활이 한층 더 밝아지고 또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 하나도 이런 세계를 아직 들여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유익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또 한 세계가 열릴지도 모른다’(필자 따옴표)는 것이 병중에 굳이 내키지 않는 붓을 들게 하는 사정인 것이다.
...畵題는 서재의 한 구석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꽂이가 중심이고 거기에 漢籍이 여러 질 쌓여있고 주변에 문방구를 배열하거나 과일과 채소를 곁들이기도 한다. 필기장에는 글자가 쓰여 있고 안경도 있어 독서인의 생활을 암시하고 있다....도대체 이런 제재를 어떻게 해서 조선의 민화가 다루게 된 것일까. 그것은 필연코 중국에서 배워 받아들인 것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그 중국에서 왜 이런 풍의 그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서양화 전래 이후의 발생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서양화에 「원근법」이란 것이 있고 동양화에는 이제까지 그것이 없었는데 화가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자기가 놀란 것이지 우리나라 화가는 놀라지 않았다.)...조선인들은 도리어 그 법칙을 따르지 않고 얼렁뚱당 그린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중요한 원근법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원래 합리성에서 출발한 원근법을 주로 한 그림이 극히 불합리한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구입자는 대부분 가난한 학자이거나 중급관리일 것이다...아마 근근이 가난을 견기고 살아가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인연에 따라 구매자의 집에서 붓을 잡는 일도 있었을 것이며 이집 저집 전전하면서 장사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그런데 우리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아름다운 바가 있다. 매우 독창적이고 조금도 다른 나라에서 그 예를 볼 수 없을 정도의 그림이다. ...여기에는 모든 불합리가 작용하고 있는데, 물론 그 불합리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無法의 그림이라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無法마저 법으로서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법인 것이다. 여기에 이 그림의 불가사의한 샘이 있는 것이다...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종류의 그림에서 배우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가 무엇을 그리더라도 구제 받는 길이 있다고 하는 진리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면에 無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이렇게 평온한 그림도 없지 않을까...무엇이든지 지나치게 합리적인 세상에 이렇게 불합리함을 태연하게 보여주는 그림과 만나면 뭔가 구제받는 느낌을 갖는 것은 설마 나만이 아닐 터인데 그것을 보는 분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 것인가. 病床에서.
이렇게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을 길게 인용하는 까닭은 민화에 관한 최초의 글이고 이 글에는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여러 가지 중요한 언급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순수하고 솔직한 태도입니다. 나 같은 미술사학자의 눈으로 보면 내용의 불합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시키는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최선의 글이리라. 그러나 비탄스러운 것은 아직도 우리 학계는 이 이상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야나기의 의견의 대부분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글을 하나하나 논의는 할 틈이 없습니다. 내가 이 민화의 조형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야나기가 민화에 대하여 언급한 글이 얼마나 초보적인 것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야나기가 보고 감동을 받았으나 무엇인지 해명하지 못한 문제의 민화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나는 그 그림을 화질이 좋은 것으로 보고 싶어 일본민예관으로 전화를 하여 작품 사진을 그 이튿날 받았습니다. 친절하게 보내준 일본민예관의 시라또(白土新太郞)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진을 확대하여 보니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나도 수 많은 민화를 보아왔지만 이처럼 고차원의 그림은 처음입니다. 야나기씨가 무엇인지 모르는 불가사의한 그림이라고 애타게 글을 쓴 까닭을 알겠습니다.
도 1. 제 1폭 전체 그림
원래 몇 곡 병풍이었는지 모르나 현재 두 폭만 남아 있습니다. 제 1폭의 아래부터 살펴보며 채색분석하겠습니다. 채색분석은 최선의 분석방법이며 해석방법입니다. 그림에 대하여는 야나기씨가 쓴 것처럼 서너 줄 밖에 쓸 것이 없습니다. 제 1폭의 도 2와 그 채색분석을 보면, 영기문과 보주로 가득 찬 그릇(만병)에서 다시 파초 모양 영기문과 잎처럼 긴 영기문과 보주로 가득 찬 그릇(만병)이 화생합니다. 다시 연이어 또 하나의 그릇(만병)이 화생하고 그 그릇에 오이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병에서 화생하는 영화된 오이입니다. 현실에서 보는 오이가 아닙니다. 구태여 제1영기싹처럼 휘게 만들고 굵은 둥근 점들을 표현하여 보주로 삼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 그릇(만병)은 모두 연속하는 만병의 화생 과정이며 마침내 무량한 보주가 화생하는 매우 형이상학적 조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 2-1. 만병-만병-만병-포도 보주
도 2-2. 제1폭 만병-만병(좌) 도 2-3. 만병-오이 보주(우)
제1 폭의 도 3을 보면 역시 사각 목가구(일종의 만병의 성격)에서 두루마리(卷轴)가 화생합니다. 네 다리는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목가구가 영기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 위의 부분이 매우 크고 넓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엇을 담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깊게 넓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영화된 두루마리가 화생합니다. 역시 잎같이 긴 영기문에서 무량한 보주가 화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하였을까요? 두루마리에는 훌륭한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고 훌륭한 진리의 말을 써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림이건 글이건 진리를 표현하므로 두루마리로부터 영기가 발산하는 것이고, 영화된 만병에서 화생하는 극적인 광경입니다.
도 3-1. 기물, '두루마리도(좌) 도 3-2. 기물, '두루마리도(우)
도 4의 책갑들은 싸놓으면 원래 한 면만이 보입니다. 좌측(左側)만 보이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상면(上面)까지 들어 올리며 상면의 영기문을 보여줍니다. 역시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진 길고 짧은 영기문에서 크고 작은 보주들이 화생합니다. 우측면도 보여주고 전혀 안 보이는 뒤쪽 면 까지 꺾이게 하여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영기문들이 대동소이하나, 뒷면은 파초잎 모양 영기문을 두었습니다. 윤곽이 붕긋붕긋하여 영기화시켰습니다. 현실에서 보는 파초 같지만 고차원으로 영화된 존재입니다. 이 모든 영기문들은 진리를 기록한 서책의 생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에서 무량보주가 발산한다는 것’은 금방 이해하기 어렵지요? 이 진실은 내가 건축이나 조각이나 그림에서 발견한 조형적 진리인데 차차 알게 됩니다. 그 인식의 과정은 길고도 깁니다.
도 4-1. 책갑들
도 1. 제 2폭 전체 그림
그러면 제2폭을 보실까요? 역시 책갑들과 기명들이 배치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확대하여 그려서 채새색분석하면 놀라운 조형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대하여 그려서 채새색분석하여 보면 놀라운 조형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체 그림을 보면 평범합니다. 그런데 특히 이 제2폭에는 놀라운 조형이 꽤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했으므로 우리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우리가 그 비밀의 문을 열지 않고는 이 그림의 세계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도 2의 부분 그림은 항아리 같은 것에 부채 둘과 그 사이에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아리가 수많은 역동적인 제1영기싹의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놀라운 조형입니다. 처음 봅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는 이미 항아리가 아니고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제1영기싹의 파동 그 자체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물’ 그 자체입니다. 그 영화된 물에서 부채와 두루마리가 찬란하게 화생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부채가 둘씩이나 있을까요? 부채에는 여러 가지 상징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항마(降魔)의 기능일 것입니다. 부채는 바람을 일으킬 뿐 아니라 먼지 같은 오물을 날려 청정하게 하므로, 재앙을 몰고 오는 액귀나 병을 몰고 오는 병귀 같은 사악한 것을 쫓는다고 믿었습니다. 악마를 쫓고 신명을 부르는 굿에서도 부채는 필수인데, 이때 부채는 삿된 것을 쫓고 신을 부르기 위한 상징적인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에서는 부채에 크고 작은 보주가 가득 차 있고, 하나는 펼쳐서 그렸고 다른 하나는 측면을 보여주어 부채의 모든 면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런 표현도 민화의 한 특징입니다. 두 부채 사이의 두루마리는 참으로 현란합니다. 긴 구름 같은 영기문들이 간격을 두고 있고 사이마다 무량한 보주가 있으며, 뒤의 다른 편에는 긴 잎 같은 영기문이 촘촘히 있고 여백에 보주가 가득합니다. 채색분석해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도 2-1. 기물 도 2-2. 기물
도 3은 영기문과 보주가 가득 찬 그릇에 포도를 놓았는데 이때 포도는 현실에서 보는 포도가 아닙니다. 영화된 포도, 즉 보주입니다. 차차 포도가 보주임을 증명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껏 영화시킨 그릇(만병)에서 무량보주가 화생하는 고차원의 그림입니다. 원래 그림보다 채색분석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하지요? 도 4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 양쪽에 있는 영기문은 최후에 밝혀질 것이지만 ‘무량보주’입니다. 가운데에는 삐죽삐죽한 조형에서 영기싹이 연이어 나오고, 여백에는 보주가 가득 차 있습니다. 입가에도 무량보주가 암시되어 있군요. 조금만 참으면 곧 그 정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시킨 그릇에서 역시 포도 모양 무량보주가 화생합니다.
도 3. 만병-포도 보주
도 4. 만병-포도 보주
도 5는 만병에서 만병이 화생하고 그 위에 무량보주가 화생하는 광경입니다. 만병의 하단에는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진 구름 같은 영기문과 사이사이 여백에 보주를 가득 차게 한 부분이 있고, 중단에는 육각수문이 있으며, 상단에는 직선으로 된 파상문과 하단의 영기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병 옆구리에 큰 구멍이 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도무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민화라는 그림은 보이지 않는 곳 까지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무릎을 쳤습니다. 즉 만병의 옆구리에 큰 구멍을 냈으나 무엇이 들었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병 안에는 우주에 충만한 기운을 압축한 영기가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열어보이되 볼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그 만병에서 다시 만병이 화생하고 만병에 포도 같은 무량보주가 가득 차 있습니다. 자, ‘그릇을 연이어 화생시키며 표현한 생명생성의 과정’의 정상에는 반드시 무량보주가 있습니다. 그만큼 보주가 중요한 것입니다.
도 5. 만병-만병-포도 보주
도 6는 클라이맥스입니다. 즉 그 동안 무엇인지 몰랐던 영기문이 바로 무량보주임을 이 그림에서 그것도 한 귀퉁이만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그 무늬의 중앙에 무엇이 있었는지 표현한 것이 없다가, 이 두꺼운 책갑의 깊은 곳을 여러 겹 거쳐서 들어가 중앙의 일부만 겨우 보여줍니다. 그것을 본 순간 놀랍고 기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나의 홈페이지 불록에 ‘미술사 틀린 용어 바로잡기’는 바로 국화꽃 모양이 바로 무량보주임을 밝히는 길고도 긴 여정이었고 그 비밀이 풀리자 나의 학문에 다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채색분석 위 면에 그 과정을 간단히 그려 보았습니다.
도 6. 책갑 측면과 상면
자, 만병과 서책에는 왜 이렇게 보주의 표현이 많을까요? 만병 안에는 우주에 가득 찬 대생명력이 압축하여 있으며, 서책에도 우주에 가득 찬 진리의 생명을 문자언어로 압축하여 쓰여져 있기에 양자는 공통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책거리에는 항상 만병과 서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책거리는 단지 서책과 기물이 있는 정물화가 아닙니다. 최고도의 차원 높은 정신의 세계를 표현한 위대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위대한 화가가 치밀한 계획으로 화면을 구성하였으며 동시에 빈틈없는 조형으로 고차원의 상징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민화라고 부르는 그림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위대한 그림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한국회화사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걸작품입니다.
http://blog.daum.net/ilhyangacademy/615
강우방 교수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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