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위에 푸른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말한다. 청색 안료는 산화코발트로 아라비아 원산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푸른 색 안료를 사용한 백자는 청백자(靑白磁)로 불렸다.
하지만 도자기에 이름 붙이는 원칙을 따른다면 백자에 청색 안료(靑)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畵) 것이므로 ‘백자 청화’라고 부르는 쪽이 맞다. 그러나 오래 동안 사용해온 언어 습관도 무시하기 힘든 법. 지금도 청색 안료를 쓴 도자기를 뭉뚱그려 가리킬 때는 청화백자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 청화백자는 15세기에 명나라의 청화백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초기의 것과 한동안 맥이 끊긴 이후 18세기에 들어 다시 제작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청화백자는 특히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고소메(古染)라고 불러서 아직도 일부에서 이런 말이 통용되고 있다. 소메(染め)는 달리 소메츠케(染付)라고도 한다.
초기 청화백자는 당시 명나라 청화백자와 닮은 점이 많다. 대개 중국 청화백자는 도안화된 문양이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가득 차 있는 것이 특징인데 조선초기의 청화백자도 다분히 그렇다. 특히 명나라 8대 황제인 성화제(재위 1465~1487)때 만들어진 청화백자와 조선초기 청화백자는 매우 유사하다.
청화 안료는 중국에서도 명나라 초기 영락제(1403~1424)와 선덕제(1426~1435) 연간에 아라비아와 교류하며 아라비아산 코발트를 수입해 사용했다. 조선은 이를 다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특히 비싸고 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당시 회교권에서 수입해온 이 청색 안료를 회청(回靑),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에 비싼 수입 청화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기 위해 국내에서 코발트 안료의 채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때 발견한 국내산 코발트 안료를 쓴 청화백자도 전해고 있다. 이들은 아라비아산에 비해 맑고 푸른 기운이 덜하며 또 철분이 섞인 탓인지 약간 검게 발색되기도 한다. 국내산 산화코발트는 당시 토청(土靑)이라고 불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다시 제작하게 된 청화 백자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양식을 보인다. 특히 18세기 전반에 경기도 광주 금사리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는 전형적인 조선 양식을 보여준다. 이때 제작된 청화백자에는 국화, 패랭이 등과 같은 들풀 문양이 들어있는 것이 많은데 이런 추초문(秋草文)은 시대적 특징이기도 하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靑華 梅竹文 壺)
1489년(홍치2년명) 높이 48.7cm 동국대박물관
백자청화 오동학문 항아리(白磁靑華 梧桐鶴文 壺)
18세기 높이 18.5cm 선문대 박물관
백자청화 운용문 병(白磁靑華 雲龍文 甁)
15세기 높이 각각 21.5cm, 25.0cm 호암미술관 보물 제785, 7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