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와 분청사기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백자는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사대부라 불리웠던 지배계층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졌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취향의 백자와 서민 취향의 분청사기가 같이 만들어졌으나, 15세기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왕실에서 주로 백자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지방가마들도 지배계층의 수요에 맞추어 분청사기 대신 백자를 만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청자와 마찬가지로 백자는 다양한 형태와 무늬들이 있는데 그 중 순수한 흰색의 자기를 순백자(純白磁)라고 한다. 순백자에는 무늬가 없는 것을 비롯하여, 음각, 양각, 투가 등으로 장식한 백자들을 포함한다.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사회에서는 순백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순백자는 검소와 절제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졌다. 이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순백의 도자기들이 크게 선호되었던 시대적 배경도 백자가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도자기가 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백자(White Porcelain of Joseon period)
백자와 분청사기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가 약150년간 제작된 데 비해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순수와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백자는 유교 이념을 추구한 새 왕조와 사대부층이 애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취향을 담고 있다. 조선백자의 역사는 왕실과 중앙 관청용 백자를 제작한 가마인 ‘관요(官窯)’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관요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설치된 사옹원(司饔院, 궁중의 음식을 담당한 관청) 소속의 분원(分院)을 말하는 것을, 분원 관요의 설치와 운영에 따라 크게 초기.전기.중기.후기로 구분된다. 초기는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지 않은 시기로, 전국의 가마에서 제작된 최고급 백자를 왕실과 중앙관청에서 사용하였다. 전기는 세조 말 예종 초(1467~1468년) 분원 관요가 설치된 뒤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로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을 관요에서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중기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분원 관요가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分院理)에 정착하는 1752년 이전까지이다. 17세기에는 전쟁으로 백자의 질이 떨어져 회백색 백자가 만들어졌다. 또 안료가 부족하여 청화백자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대신 안료를 구하기 쉬운 철화백자가 유행하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는 백자의 질이 나아져 눈처럼 하얀 백자가 제작되었으며, 한국적 정서가 담긴 청화백자도 만들어졌다. 후기는 1752년부터 분원 관요가 민영화되는 1884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순백자를 비롯하여 청화 백자, 동화 백자, 철화 백자, 청색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그려진 백자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백자의 품질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들이 분원 관요의 운영에 개입하였다. 그 결과 1884년에 국가가 운영하던 관요는 상인들이 맡게 되었고, 백자의 질은 급속히 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연꽃 넝쿨무늬 대접(白磁象嵌蓮唐草文大楪, 조선15세기, 국보175호).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 적용된 조선초기 상감 백자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이다. 조선시대 상감 백자가 대개 유약이 거칠고 상감 솜씨도 미숙한데 비해 이 대접은 마무리가 깔끔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게 하며 무늬를 나타낸 수법도 섬세하다.
고려 백자의 흐름을 잇는 조선 초기 연질(軟質) 백자의 전형적인 예로, 기벽이 얇고 정제되었으며, 문양 표현이 섬세한 명품이다. 상감의 장식 기법은 고려의 전통을 보여주지만 그릇의 형태와 무늬의 배치는 같은 시기 중국의 백자 대접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 도자기의 변천.(주요 연표)
조선 도자기, 분청사기와 백자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의 상감청자에서 변화.발전한 것으로 15세기에서 1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으며, 귀족적인 고려청자와는 달리 활달함과 생동감이 돋보인다. 그런데 1467~468년 무렵 경기도 광주에 관요(官窯)가 설치되어 국가가 주로 백자를 생산하면서 그 영향으로 지방 가마들도 점차 분청사기 대신 백자를 만들게 되었다.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제작된 백자는 순백색의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조선 도자 문화를 이끌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모란 나비무늬 편병(白磁象嵌牡丹蝶文扁甁, 조선15세기).
조선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분청사기 편병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선시대 상감 백자는 칠이 무른 연질 백자와 단단한 경질 백자가 있다. 연질 백자는 지방 가마에서 많이 만들었다. 이 편병은 전체적이 느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지방 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차갑고 깔끔한 경질 백자와는 또 다른 미감을 자아 낸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일전’인 새겨진 받침(白磁象嵌草花文太一殿銘托盞, 조선15세기).
잔받침 안쪽 측면에 세로 방향으로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새겨져 있어 용도를 알 수 있다.
태일전이 새겨진 잔.
잔받침은 가장자리가 바깥쪽으로 벌어진 낮은 접시 형태로, 당시 중앙이나 지방에 설치된 도교묘(道敎廟)를 의미하는 ‘太一殿’이라는 글자가 안쪽에 상감되어 있다. 태일전은 도교와 관련하여 북극성의 별칭인 태일(太一), 태일성(太一星), 태일신(太一神)에게 초제(醮祭)를 지내는 전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순백자의 아름다움
‘순백자(純白磁)’ 순수한 흰색의 자기로, 무늬가 없는 것을 비롯하여 음각, 양각, 투각 등으로 장식한 백자들을 모두 가리킨다. 검소와 절제를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사상과 취향이 담긴 조선 백자는 여러 가지 무늬와 장식보다 기본적으로 순백색이 강조되었다. 백자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인 흰색은 시대와 환경 또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윳빛 감도는 유백색, 눈같이 흰 설백색, 회색이 감도는 백색, 푸른색을 띤 청백색 등 다양하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자병(白磁甁, 조선15~16세기, 보물1054호).
희고 단단한 경질 백자로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백자 병이다. 단정한 형태와 고르게 입혀진 맑은 백자 유약이 잘 어울린다.
풍만하면서도 단정함과 기품이 느껴지는 형태와 옅은 청색을 머금은 맑은 백자 유약이 잘 조화된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병이다. 굽은 비교적 높고 넓으며 매우 단정하게 깎았는데 이것이 15~16세기 상품 백자의 특징이다. 순백의 표면과 당당하고 절제된 형태가 조선왕실과 사대부의 미감을 느끼게 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현’이 새겨진 대접(白磁玄銘大楪, 조선15~16세기),
’천’이 새겨진 대접(白磁天銘大楪, 조선15~16세기),
백자합(白磁盒, 조선15~16세기)
조선 전기 백자 항아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안정감 있는 당당한 형태에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백색 유약이 입혀져 기품이 있다. 표면에 흠이 없는 최상품으로 경기도 광주의 분원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중앙박물관>
항아리(白磁壺, 조선15~16세기)
항아리(白磁壺, 조선15~16세기,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발견)
15~16세기 백자.
조선 전기에는 청화 백자를 만들 대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전문 화원의 몫이었다. 해마다 사옹원 소속 관리가 궁중 도화서의 화원을 인솔하고 관요에 나가 백자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 백자에는 우아한 격조를 갖춘 작품들이 많다. <출처:중앙박물관>
‘복’이 쓰인 잔(白磁靑畵唐草文福銘兩耳盞, 조선15~16세기), 잔(白磁兩耳盞, 조선15~16세기)
매화대나무무늬항아리(白磁靑畵梅竹文壺, 조선15~16세기).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청화백자이다.
조선 전기의 청화 백자 항아리이다. 몸체의 넓은 면에 여백을 시원하게 살리면서 매화와 대나무를 그렸다. 무늬에는 농담 변화가 있고 나무의 표현 등에도 조성왕조 초기의 격조와 품위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화무늬항아리(白磁靑畵梅花文壺, 조선15~16세기)
소나무 매화무늬연적(白磁靑畵松梅文硯滴, 조선15~16세기)
끈무늬 병(白磁鐵畵繩文甁, 조선15~16세기, 보물1060호).
몸통에는 마치 넥타이를 매고 있는듯한 모습으로 끈을 그려 놓고 있다. 마치 휴대하기 편하도록 끈을 매달아 놓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하는 그림이다. 현대미술같은 느낌을 주는 해악적이면서, 창의성이 넘치는 무늬이다.
잘록한 목에 한 가닥 끈을 휘감아 늘어뜨려 끝에서 둥글게 말린 모습을 철화 안료로 표현하였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 ‘넥타이병’이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굽 안바닥에는 철화 안료로 ‘니나히’라고 쓴 한글이 있다. 그뜻은 명확하지 않으나 1443년 한글 창제 후의 작품일 것으로 짐작케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화 새 대나무무늬 항아리(白磁靑畵梅鳥竹文壺, 조선15~16세기, 국보170호).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청화백자이다.
도화서 화원이 직접 그린 격조높은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전기 청화 백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은 중국에 이어 경질 백자를 만들어냈도, 경질 백자의 달성은 청화 백자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중국 청화 백자의 문양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가, 이내 조선 사대부의 정서를 물씬 풍기는 회화적인 문양들로 변화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자전접시(白磁搌楪匙, 조선15~16세기)
시가 쓰인 백자청화시명문전접시(白磁靑畵詩銘文搌楪匙, 조선15~16세기)
태항아리(白磁胎壺 內壺, 조선 16~17세기,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발견),
태항아리(白磁胎壺 外壺, 조선 16~17세기,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발견)
태항아리(白磁胎壺 外壺, 조선 1627년, 경기도 고양 지축동 발견),
태항아리(白磁胎壺 內壺, 조선 1627년, 경기도 고양 지축동 발견),
‘천계칠년’이 새겨진 접시 태지(白磁天啓七年銘楪屍胎誌, 조선1627년, 경기도 고양 지축동 발견)
인흥군(仁興君, 선조의 서자, 1604~1651년) 제이녀의 태지로 태항아리와 함께 출토되었다. 태지에는 1627년 6월23일에 태어난 제이소주아기씨의 태를 7월28일에 고양의 동면에 묻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백자 접시를 태지석으로 사용한 예로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이희영 묘지와 합(白磁靑畵李喜榮墓誌.盒, 조선 1692년)
영빈이씨의 묘지(白磁靑畵映嬪李氏墓誌, 조선1764년)
영조가 직접 지은 후궁 영빈이씨(1969~1764년)의 묘지이다. 이 묘지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연세대학교박물관에 총4벌이 남아 전한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장례절차를 기록한 『戊戌苫借日記(무술점차일기)』를 통해 당시 후궁들의 묘지를 2벌 이상 만드는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자로 만든 제기. 고려시대 이래로 중국 은.주대의 동기(銅器)를 본떠 만든 의기(儀器)를 만들었다.
'제’가 쓰인 제기 시접(白磁靑畵祭銘製器匙楪, 조선18~19세기)
시접은 절을 올리기 전에 먼저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가볍게 세번 두드려서 소리를 내어 신령에게 고한 다음 수저를 올려 놓는 그릇이다. 신위(神位) 바로 앞에 잔, 받침과 함께 놓인다. 이 시접의 안쪽 바닥에는 청화 안료로 ‘祭’자를 넣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제’가 쓰인 제기 접시(白磁靑畵祭銘製器楪匙, 조선18~19세기)
‘제현주병’이 쓰인 제기 병(白磁靑畵祭玄酒甁銘製器角甁, 조선18~19세기)
제기접시(白磁祭器炙器, 조선18~19세기)
제기접시(白磁祭器炙器, 조선19세기)
백자제기궤(白磁祭器簋, 조선17세기)
고려시대 자기 가운데는 중국 은대(殷代)와 주대(周代) 고동기(古銅器)의 형태와 문양을 단순화시키면서 그 특징을 본떠 만든 의기(儀器)가 많았다. 조선의 제기 등 도자 의기도 고동기의 복잡하고 난해한 형태와 문양을 극도로 단순화하여 의기로서 품격만을 나타내게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제기향합(白磁祭器香盒, 조선18~19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