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자료 / 보정산방
2010.08.1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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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태산이다.그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은 태산처럼 크고 높고 그리고 여러 깊은 골짜기를 안고 있다.그는 두 세기를 살았다.74세의 수를 누리고 간 다산 정약용은 칼로 벤 것처럼 거의 그 절반인 38년을 18세기 후반에서 살고,나머지 절반 36년은 19세기 초반에 살다가 갔다. 그가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이다.그 생애의 전반기는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왕조 마지막 문예부흥기라 일컫던 18세기의 후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생애 후반기는 조선조 봉건사회의 내부모순이 격화하여 홍경래란에서 진주민란을 거쳐 동학농민운동에 이르기까지「민란의 세기」라 불릴만큼 뒤숭숭했던 19세기의 전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리고 두세기가 바뀌는 바로 그 전환점에 정조대왕의 죽음이라는「이벤트」가 다산의 생애에도 한 이정표를 이룬다. 어떻게 보면 정다산의 생애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삶과 죽음에 운명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783년 21세에 회시에 급제한 다산은 이듬해 경의진사가 되어 정조에게 중용을 진강하면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된다.이때부터 그에게는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의 훤한 벼슬길이 열린다. 그러나 정조의 극진한 총애가 정조의 죽음을 고비로 다산에겐 오히려 화를 초래하게 되었다.1801년 신유사옥에 연좌된 다산은 경북 장기를 거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다.1800년 정조의 죽음을 고비로 18년에 걸친 벼슬살이와 18년에 걸친 귀양살이로 그의 생애가 갈라졌다.이렇게 해서 다산은 비단 두 세기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또한「두 세계」를 살게 된다.출사의 세계와 유찬의 세계를.중앙 조정의 세계와 산림 한촌의 세계를.시무실천의 세계와 학문저술의 세계를.이 두 세계의 벌어짐이 얼마나 큰지,경향 사이의 거리조차도 얼마나 아득히 먼 것인지 요즘 사람들에겐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학문적으로도 다산은 전통유학의 세계와 탈 전통 유학이 두 세계에 걸쳐 사색하였다.다산의 넓고 깊은 사상체계는 섣불리 문외한이 넘볼 수 없으리만큼 넓다.주자학,양명학,북학,서학 등등 여러 세계가 높은 언덕과 깊은 골짜기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실학사상의 집대성자요,조선조의「백과전서파」로 불린 다산의 5백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은 그러한 다산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다산은 그러나 한갓 되게 현학 박식을 뽐내는 석학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실천실용의 학문」을 지향한 다산은『진실로 치민 변속 이재의 일에 볼만한 것이 없다면 그러한 학문은 헛된 학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홍이섭에 의하면 다산의 학문 전체는「조선의 현실」을 바로 잡는 데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다산은 대사상가요,그것도 대단히 비판적인 사상가였다.그가 본 조선의 현실은「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사회였다.그리고 그처럼 병든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그 속에서 살 길을 잃어가는 농민들의 굶주림이었다.이러한 현실 인식이 다산을 단순한 비판적인 사상가로서 머물게 하지 않고 개혁사상가로 몰아간다.그는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산의 개혁사상을 담은 것이 정법삼집이라 일컫는 일표이서,곧「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이다. 이 정법3집이 다같이 경세제민의 학문이면서도 그 성격이 다른 것은 「심서」와 「신서」가 현실의 법질서를 전제로 한 지방행정의 개혁안인데 비해, 「경세유표」는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정일반의 개혁지침서라는 점이다.다산이 국가기구 전체를 송두리째 혁신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본 「혁명주의자」 와는 달리,당장 읍단위의 지방정치부터라도 고쳐야겠다고 나선 것은 그의 「개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목민심서」는 1818년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완성된 저서이다.그것은 지방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들이 백성을 기르는 목민관으로서 마음에 새겨두고 지켜야 할 일들을 조목조목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다.책의 내용은 수령의「부임」에서부터 「해관」(퇴임)할 때까지 모름지기 지켜야 할 「율기」「봉공」「애민」의 몸가짐,마음가짐과 육전의 실무,그리고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진황 등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장은 다시 똑같이 6개조로 나뉘어 모두 72개조로 짜여있다.
「목민심서」가 공허한 설교나 추상적인 지침서에 그치지 않고 조목마다 절실한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 저서가 나오기까지 저자 자신이 지방행정의 말단 현실을 오랜 경험과 실제 견문을 통해서 숙지숙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산은 일찍이 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지방의 실정을 보았으며,장성해서 출사해서는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살펴보았다.특히 전남 강진에서의 오랜 유배생활은 지방관리의 횡포와 무능,아전들의 농간과 농민들의 억울하고 가엾은 사정을 소상히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국가기구 전반에 걸친 제도개혁을 당장에 하지 못하는 한 지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도의 운용을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그러한 지방제도를 운용하는 자들이 곧 수령과 아전이다.그래서 「목민심서」에서는 특히 수령의 청렴을 강조하고 아전들을 단속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수령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도둑으로 지목」한다고 그는 다그치고 있다.「정의가 없다면 왕국도 도적떼와 다를 바 없다」는 성 어거스틴의 말을 연상케하는 지적이다.그러나 수령은 불과 몇 년의 임기가 끝나면 떠나버리지만 아전은 바뀌지 않는다.게다가 수령은 선비로 자처하여 행정의 실무에 어둡다보니 지방 사정을 잘 아는 아전들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기가 일쑤이다.그 아전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단속하지 않고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다고 다산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백성들은 토지로써 논밭을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으로써 논밭을 삼아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일로 여기기」때문이다.
「목민심서」는 18세기말 19세기초 조선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준엄한 비판정신으로 쓰여진,그러나 백성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토로한 책이다.오늘을 돌이켜보건대 우리 주변에 다산이 가르친 애민목민의 문화 유산,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정의 문화유산은 찾아보기가 힘들고,다산이 규탄한 「백성으로써 논밭을 삼는」아전들의 문화유산,부정적이고 부끄러운 부의 문화유산은 넘쳐 모자람이 없는 것 같다.「목민심서」가 그렇기에 여전히 생명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조선일보, 199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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