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광암 이벽

2016. 2. 1. 01:27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과 광암 이벽 자료 / 보정산방 

                                                           

2010.08.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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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꽃을 보며 사람들은 그 꽃잎을 감탄하면서도 그 줄기와 뿌리를 알기는 쉽지 않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의 뒤에는 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일찍이 20여년 전 홍이섭(洪以燮) 교수는 '이벽(李檗) - 한국 근세 사상사상의 그의 위치' 라는 논문에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에게 끼친 한국 천주교의 성조 광암(曠菴) 이벽(1754~1785) 선생의 영향을 처음으로 비교적 잘 서술했다.

   정약용 선생과 이벽 선생은 나이가 8세 차이로, 삼촌이나 큰 형 뻘의 사돈관계였다. 그런데 다산선생의 학식과 사상을 잘 아는 이들도 그러한 사상과 학식의 근원을 캐보며 이벽 선생과의 관계를 아는 이들은 매우 적다. 정약용 선생은 자신이 쓴 글, 특히 그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자신은 이벽을 추종했고(從李檗) , 자기 형 정약전(1758~1816) 은 아주 일찍부터 이벽을 추종했으며(嘗從李檗) , 뿐 아니라 권일신(1742~1792) 은 열성적으로 이벽을 추종했으며(熱心從李檗) , 이가환(1742~1801) 역시 이벽을 추종했다(從李檗)' 고 기록하고 있다.


   강진에 유배돼 있을 때 정약용 선생은 중용강의(中庸講義)를 보충하면서 4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이벽 선생을 사모해 "나에게는 비교가 안될 만큼 출중한 덕행과 해박한 지식(進德博學) 이 있던 이벽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 금할 수 없구나" 하고 그를 그리워했다. 정조 임금이 중용에 관한 질문 70조목을 선비들에게 숙제로 내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수표동에 살던 이벽에게 물어 답을 올린 결과 승지 홍인호 등이 보고 "정약용의 답안을 본 즉 필시 특출난 학식을 가진 선비가 있어 도운 것이 분명하다" 고 했었다.

강진에서의 18년 귀양살이를 끝내고 1818년 고향 마재에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우선 젊었을 때 이벽 선생과 함께 자주 찾았던 천진암(天眞菴)에 와 "30여년만에 다시 찾아오니, 천진암은 이미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전혀 없구나(寺破無舊)" 하며 추억을 더듬었다. 귀양가기 전 일찍이 단오날 둘째 형 정약전 선생과 천진암을 찾았던 정약용 선생은 이벽 선생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서

   '천진암에 오니, 전에 이벽이 늘 앉아서 글을 읽던 자리가 아직도 저기 있네 (李檗讀書猶有處). 그때 짓던 시와 문장의 탁월한 그 풍류 문채는 정말 신비스러운 경지에 이르렀었지 (風流文采須靈境), 그리하여 지금 또다시 한나절 내 술을 마시며 한나절 내내 읊어본다 (半日行杯半日吟)'

고 하고 있다. 정약용 선생이 이벽 선생으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으면 유배지 강진에서 중용강의를 손질하면서 중간 중간 이렇게 고백했겠는가. "내가 써내려 온 문장은 사실 전에 광암 이벽이 썼던 문장이다 (此曠菴之文)" , 또 한 두 쪽 넘어가다가 "이 학설은 광암 이벽의 학설이다(此曠菴之說)" , 또 몇 장 내려가다가 "이런 해석은 광암 이벽이 했던 해석이다(此曠菴之義)" . 광암 이벽 선생이 1785년 봄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식에 참석한 정약용 선생은 존경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다음의 만사(輓詞)를 지어 남겼다.

신선 나라의 학이 우리 인간들 세상에 내려오시니(仙鶴下人間)
신령한 그 풍채가 흔연히 빛남을 볼 수 있었도다(軒然見風神)
그 희고 또 흰 날개와 깃털은 눈처럼 새하얗었는데(羽핵皎如雪)
땅 위의 닭과 오리 떼들이 샘을 내며 골을 부렸네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한번 내면 아홉 하늘 높은 곳까지 진동시켰고(嗚聲動九소)
울부짖는 소리는 풍진 세상에 바람과 먼지를 일으켰네(瞭亮出風塵)
어느덧 가실 때 되어 가을 타고 문득 날아가시니 (乘秋忽飛去)
애달퍼하고 구슬퍼하며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창空勞人)

정약용 선생을 보다 정확히 연구하기 위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광암 이벽 선생에 대한 연구를 선행하거나 병행할 필요가 있음을 제언하고 싶다.

 

변기영 <천진암성지 주임신부> - 중앙일보, 1998.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