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분카칸

2016. 2. 1. 02:04美學 이야기



      

타이틀




       야마토분카칸

 


기업은 돈만 대고 전문가가 모든 것을 꾸민 미술관

   금년 봄 도쿄에서는 대규모 보티첼리 전시가 열립니다.(도쿄도미술관 1.16-4.3) 보티첼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가 그린, 푸른 바다에 조개를 타고 떠밀려오는 <비너스의 탄생>은 누구나 기억합니다.   
유명 컬렉션 전시나 유명작가 전시가 연중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일본이지만 이 보티첼리 전을 기대하는 마음은 좀 남다를 수 있습니다. 그가 유명 화가이기도 하지만 일본과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1925년 런던에서 영어로 된 최초의 본격적인 보티첼리 연구서인 『Sandro Botticelli』를 펴낸 것은 바로 일본의 젊은 미술사학자 야시로 유키오(矢代幸雄 1890-1975)였습니다. 엉뚱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는데 이 야시로 유키오가 야마토 분카칸(大和文華館)실질적인 설립자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고도(古都) 나라(奈良)라고 하면 누구든지 도다이지(東大寺) 절을 떠올립니다. 도다이지 절은 경주 불국사처럼 일본의 고대문화와 예술을 상징하는 절입니다. 야마토 분카칸은 그런 나라를 대표하는 사립미술관입니다. 



 
외관과 메인 로비 




   오사카에서 기차로 나라로 가게 되면 시내 중심지로 들어가기 네 정거장쯤 전의 가쿠엔마에 역(學園前驛) 가까이 이 미술관이 있습니다. 가쿠엔에마라고 한 것은 이곳에 데츠카야마(帝塚山) 대학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국에는 생소하나 이 대학에는 지금은 작고했지만 나라국립박물관 출신으로 고려나전세계적 전문가로 손꼽힌 가와다 사다무(河田貞) 교수가 재직하고 있어, 한때 한국의 박물관 관계자들 사이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 마을 한쪽에 개구리가 다리를 벌린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가에루마타이케(蛙股池) 연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못을 내려다보는 조금 높은 대지(臺地) 위에 세워진 미술관이 야마토분칸입니다. 야마토는 이 지방을 가리키는 옛 이름입니다. 그런데 미술관 대신 분카칸이라고 한 것이 조금 특이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난징의 수도박물관이 자연사 관련유물 소개 건물을 물화관(物華館)이라고 하고 미술, 고고 부문을 문화관(文華館)이라고 했던 데서 따온 것입니다. 


   난징에서 이런 착상을 얻은 사람이 야시로 유키오((矢代幸雄 1890-1975)입니다. 이때가 1944, 45년 무렵으로 그는 당시 긴테츠(近鐵) 촉탁신분으로 중국을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화북(華北)교통철도 그리고 만철(滿鐵)의 촉탁이기도 했습니다. 미술관 이름을 이렇게 일개 촉탁이 결정하게 된 것은 이 무렵부터 그가 설립의 실질적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시로 유키오를 긴테츠 촉탁으로 데려온 사람은 일본 사철(私鐵) 경영의 귀재라 할 수 있는 오이타 도라오(種田虎雄 1883-1948 사장입니다. 그는 경영자인 동시에 탁월한 문화기획자, 문화 후원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입니다. 졸업후 그는 철도성에 들어갔으나 기획부와 같은 엘리트코스를 마다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그는 ‘현업(現業)의 가장 밑바닥부터 일하고 싶으니 지방으로 보내 달라’고 자청했습니다. 그리고 시골의 작은 역을 택해 그곳에서 철도사업의 기본인 고객과의 접점을 몸을 통해 익힌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철도 사업은 첨단 산업이었습니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처럼 태워주기만 하면 돈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고객을 머릿속에 단단히 넣고 있던 그는 달리 행동했습니다. 태워주는 것이 아니라 타고 싶어 하는 기차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춘천 청춘열차이 원조격이랄 수 있는 관광지와 연계된 특별열차 운행을 기획했습니다. 겨울철이 되어 고객이 적을 때에는 ‘설국 여행’과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도 냈습니다.  

이후에도 참신한 마케팅 기법을 속속 선보였는데 그중에는 보다 크게 문화를 후원하는 일도 했습니다. 즉 일본 고대문화가 꽃핀 야마도 일대를 사업지로 하는 이상 이곳의 고대 문화를 소개하는 역사문화총서 『야마토지(大和路)』을 간행해보자는 것입니다. 지역의 재야학자들이 동원된 이 책은 10년에 걸쳐 13권이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다이지(東大寺) 절, 고후쿠지(興福寺) 절, 요시노야마(吉野山) 등을 소재로 한 문화영화도 제작해 상영했습니다.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철도회사(처음 오사카(大坂)전기궤도회사였던 것이 간사이(關西)급행철도회사로 바뀌었고 난카이(南海)철도와 합병되면서 긴키일본철도회사, 즉 긴테츠(近鐵)로 바뀌었습니다)의 사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는 사장이 되고서(53세, 1937년) 일본문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미술에 해박한 전문가를 고문으로 영입했습니다. 이때 영입된 사람이 바로 야시로 유키오였습니다.


   그는 『산드로 보티첼리』발간하고 나서 귀국한 뒤 전공을 바꿨습니다. 일본에서 더 이상 유럽 미술을 연구할 여건이 되지 않았는지 그는 일본미술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서양미술과의 비교 관점에 일본의 미학과 특징을 영문으로 구미에 소개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런 시절에 오이타 도라오가 야시로 유키오를 픽업한 것입니다. 

이때 야시로 문제를 함께 논의 했던 사람이 철도성 출신의 만철 사장을 지낸 오쿠라 긴모치(大藏公望 1882-1968)과 화북교통철도 총재인 우사미 간지(宇佐美寬爾 1884-?)였습니다. 야시로가 중국을 다닐 무렵 만철 촉탁이니 화북교통철도 촉탁이라는 직함을 지니고 다닌 것은 이들 덕분이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야시로를 영입한 도라오는 전적으로 그에게 미술관 설립에 관한 일을 일체 위임했습니다. 미술관 이름 짓는 일에서 작품 구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야시로의 전결(田結) 사항이 됐습니다.
 

   야시로가 본격적으로 작품을 구입한 시기는 오이타 사장이 종전 직후인 1946년 재단법인 야마토분카칸을 설립한 이후부터입니다. 일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이 무렵은 미술품 구입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었습니다. 전쟁에 진 일본의 미술시장에는 옛 명가들이 내놓은 미술품들이 흘러넘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때 야시로는 본인 스스로도 ‘놀랐다’고 회고할 정도로 회사 경리간부에게 백지수표를 받아 미술품을 수집했던 것입니다.  




작자미상 <고다이노기미(小大君)>(삼십육가선에마키 부분) 



   맨 먼저 손을 댄 것이 젊은 시절의 후원자이자 은인인 요코하마 하라 산케이(原三原)의 컬렉션을 인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하라 컬렉션의 명품 14점이 야마토 분카칸으로 옮겨갔습니다. 여기에는 국보인 <네자메모노가타리 에마키(寢覺物語繪卷)>을 포함해 마쓰다 돈노가 절단 판매의 주관했던 <삼십육가선 에마키(三十六歌仙繪卷)> 중 하라 산케이가 손에 넣고 기뻐했던 여류 궁녀시인 ‘고다이노기미(小大君)’도 들어 있었습니다. 

‘고다이노기미’를 조금 소개하면, 그녀는 <삼십육가선에마키>에 나오는 5명의 여류시인 중 하나로 그녀는 10세기경 궁중의 하급 궁녀였으나 미모와 시로 유명했습니다. 그림 속에서도 당시 궁중여인들이 입었던 12겹 의상인 주니히토에(十二單)을 입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이 그림을 하라 산케이는 1919년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은 2만5천엔에 구입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작자미상 <네자메모노가타리에마키(寢覺物語繪卷)>(부분)

지본채색 26.0cm×533.0cm  



   <네자메모노가타리 에마키>는 유명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가 인기를 끌자 이어서 나온 궁중소설인 『요와노네자메(夜半の寢覺)』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현재는 1권만이 전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주인공인 네자메노우에(寢覺の上)가 궁중의 여러 인물들과 벌이는 사랑 내용으로 현재 남아있는 그림은 4폭의 그림과 글뿐이지만 헤이안 시대(794-1185)의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야시로가 산케이 컬렉션에서 가져온 것 가운데는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도 한 점 포함돼 있습니다. 물가의 버드나무 아래에 물새가 놀고 있는 소재는 요나라 벽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고려청자에도 자주 보입니다.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2세기 높이 36.8cm 




   야시로가 이렇게 산케이 컬렉션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인 것은 하라 도미타로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시로는 타고르의 통역을 인해 그를 처음 만났지만 이후 그로부터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유럽 유학시절의 도움도 포함돼 있습니다. 

야시로는 타고르 방일 이후 6년 뒤에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거기서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를 처음 보면서 르네상스 미술에 관심이 생겨 1년 뒤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 본격적으로 르네상스 미술연구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피렌체에는 르네상스 미술연구의 거장인 베르나르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이 살고 있었습니다. 베렌슨은 야시로로 볼 때 전혀 생면부지의 낯선 인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이민가정 출신인 그는 하버드에 다니며 당시 하버드의 제1호 미술사교수인 찰스 엘리엇 노튼(Chartles Eliot Norton 1827-1908) 문하에 있었습니다. 노튼은 물론 제자 베렌슨 역시 모두 당시 보스톤 사교계의 여왕이라 할 수 있는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Isabella Stewart Gardner 1840-1924)의 살롱을 드나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는 동명의 미술관 설립자로 유명한데 그녀는 보스톤미술관 이사회 회장이기도 했습니다. 타고르의 일본 방문시 하라에게 편의를 봐줄 것을 당부한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1863-1913)은 그후 스승 페놀로사와의 인연으로 매년 반년씩 보스톤에 머물면서 보스톤 미술관의 동양미술부 고문직(나중에 동양미술부장으로 승진)을 맡고 있었습니다. 

미국인 이상으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덴신은 금방 이사벨라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주변 인사들과 인맥을 쌓게 된 것입니다.(덴신은 1913년 보스톤 오페라극장이 완성되자 가극 『백호(白狐)』를 써서 이사벨라에게 증정하기도 합니다) 
이사벨라는 이때 이미 미술관 설립과 관련해 상당부분의 컬렉션을 베렌슨을 통해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베렌슨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컬렉터들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일정한 수수료를 받았는데 나중에 이사벨라와 결별한 뒤에는 영국출신의 세계적 화상 조셉 듀빈(Joseph Duveen 1869-1939)의 의뢰를 받아 르네상스 미술품 거래를을 도왔습니다. 듀빈과의 계약은 판매수익의 25%을 받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이 돈으로 피렌체의 중세 대저택인 빌라 타티를 구입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야시로가 피렌체에 왔을 무렵 3부작으로 된 르네상스 화가에 관련된 저서를 마무리 짓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야시로는 그의 집이자 자료실을 드나들며 그를 도우며 한편으로 독자적으로 보티첼리를 전공해 1925년에 런던에서 영문으로 『산드로 보티첼리』를 편낸 것입니다. 그가 동양인이면서 보티첼리 전공서를 낸 데는 그의 치열한 연구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우연이 가져다준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오래된 사진관의 젊은 주인인 자코모라는 사람을 사궜는데 그는 미술관 요청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보티첼리 작품의 부분 사진을 많이 찍어 놓았던 것입니다. 야시로는 이들 사진을 통해 표현양식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즉 확대 사진을 통한 표현방식의 비교 연구라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그는 귀국 후 새로 생긴 제국미술원부설 미술연구소 소장을 맡게 됐습니다. 이 연구소는 근대 초기 프랑스유학파 화가인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가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 중 1/3은 미술계를 위해 써달라고 내놓아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유언 집행을 위한 관련 인사들이 당시 유학에서 막 돌아온 야시로를 불러 자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연구 경험을 비추어 ‘연구자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진 자료를 한데 모아놓은 연구소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미술연구소가 생겼고 운영까지 그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야시로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오이타가 그를 영입하려 했을 때 그는 이곳에서 일본 미술을 대상으로 자신의 방법론대로 표현 양식의 분석이라는 연구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야마토 분카칸으로 자리를 옮겨 오이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단기간에 수많은 미술품을 구입했습니다. 개관 전까지 그가 구입한 미술품은 700점에 이릅니다. 그가 구입한 미술품 가운데 흔히 일본의 사설미술관이 컬렉션하곤 했던 다도관련 자료나 불교 미술은 일체 없습니다. 그가 꿈꾼 미술관은 ‘순전히 미술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인생을 즐겁게 하고 또한 맑게 해주는 미술관이었습니다. 




작자미상 <부녀유락도(婦女遊樂圖)> 6곡1쌍 17세기전반 각 155.6x361.6cm 



   야시로는 이런 구상 아래 하라 컬렉션 이외에도 많은 미의 명품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는 도쿠카와 정권 초기의 여인 풍속을 그린 <부녀유락도> 병풍(일명 마쓰우라(松津)병풍)도 포함돼 있습니다. 6폭 병풍 2틀로 된 이 그림은 18명의 등신대 크기의 여인들이 편지를 쓰거나 사미센을 연주하거나 혹은 가루타(화투 같은 놀이)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이들 중 3명은 여인들 주변에서 심부름을 하는 동녀인 가무로(禿)입니다) 





이적(李迪) <설중귀목도(雪中歸牧圖1)>

 12세기 남송 견본담채 각 24.2x23.8cm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한편에서는 중국의 문인사회에서 문인들의 우아한 행동인 금기서화(琴棋書畵), 즉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며 서화를 즐기는 일을 은유해 그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병풍은 보존 상태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른 시기의 여인 풍속을 보여주고 있어 풍속화 자료가 많은 일본에서도 특히 귀중시 여겨지는 자료입니다 . 




전 모익 <훤초유구도(萱草遊狗圖)><촉규유묘도(蜀葵遊猫圖)>

 12세기 남송 견본채색 각 25.3x4.8cm 




   그 외 야마토분카칸에는 중국과 한국 미술품도 상당수 소장돼 있는데 중국 그림중에는 남송시대의 화원 모익(毛益)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고양이와 개의 가족 그림이 유명합니다.(이 역시 하라 산케이 컬렉션 중 일부입니다) 화사하게 접시꽃과 훤초가 피어있는 정원 한 구석에 고양이 모자와 개 모자를 그린 이 두 폭의 그림은 원체화풍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미술사적 의미 외에도 귀엽고 앙증맞은 동물 표현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청자 구룡형조각 정병 12세기 높이 33.5cm
청자 흑백상감 당초문 병 13세기후반 높이 30.8cm 



   한국 미술로는 아홉 마리 용을 정병 위에 조각한 구룡문 청자정병과 동그란 외형에 흑백 상금으로 당초문을 가득 집어넣은 청자흑백상감당초문 천구병(天球甁)이 큭히 유명합니다. 

   야마토분카칸은 이런 소장품 외에도 1978년 일본 최초로 고려불화전을 개최해 고려불화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특히 야마토분카칸의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 前학예부장은 80년대초 한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것은 물론 귀국 후에 여러 차례 한국회화 전시를 개최해 일본에서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지 않은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y)          

<참고> 
奈良県奈良市学園南1丁目11−6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6.01.31 0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