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조윤수의 차 수필집 - <나의 茶馬孤道 - 오심지다(吾心之茶)>의 세계

2016. 2. 1. 06:32차 이야기



      

조윤수의 차수필집 서평/정목일

  두루미          

        



우리 차문화茶文化의 멋, 맛, 향기
                - 조윤수의 차수필집 

 
<< 나의 茶馬孤道 - 오심지다(吾心之茶)>>의 세계
                      鄭 木 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협 부이사장)



1 한국 차문화의 영혼과 향기 

  조윤수의 차수필집을 읽으며 한국문화의 정갈한 영혼과 마음을 만난다.
이 차수필집은 각박한 삶과 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여유와 안식과 사유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 지금까지 차를 주제로 한 수필집이 3~4권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조윤수 수필가의 이번 차 수필은 차인들의 전문적인 차 생활과 방법 등 실용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동양의 차로 대표되는 녹차와 수필의 만남을 꾀하고 있는 조윤수는 우리 차의 맛, 멋, 흥, 미학을 찾아 현대인들의 마음과 정서 속에 녹차 한 잔을 권하고 있다. 이기와 탐욕에 젖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생활인들에게 드리는 마음이 점점 맑아지고 향기로워지는 녹차 한 잔이 놓여있다. 녹차 한 잔엔 산의 만 년 명상과 강물의 유유한 유선(流線)이 잠겨 있다. 차는 그냥 마시는 음료의 하나라기보다 정서와 정신적인 교감과 음미, 소통과 사유의 세계와 닿아 있어서 심오한 세계를 펼치고 있다. 


   독자와 작가가 만나 소통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한 일이 있을까. 이 수필집은 정갈한 차상을 차려 만년 명상을 담은 산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경남 하동 쌍계사 근처의 차 마을에서 만든 우전차를 우려낸 차 한 잔이 놓여 있음을 본다. 한 수필가가 이처럼 오래 동안 우리 문화의 체험을 통한 깨달음 끝에 차 한 잔을 우려 낸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찻잔에 손이 닿고 맛을 음미하게 만든다.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삶 속에서 이따금 마음 맞는 사람과 달빛이 아니더라도, 촛불을 켜 놓고 녹차를 한 잔 마시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촛불이 켜진 자리는 우주의 중심점일 수 있다. 촛불을 마주 하고서 아무 말 없이도 녹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윤수 수필가의 차 수필들은 맑은 선미(禪味)가 있다. 명상의 문(門)이 있고 온정과 그리움이 있다. 범속과 과장을 떨쳐버리고 마음으로 주고받는 대화법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수필가들이 신변잡사의 체험들을 담아내는 수필쓰기에 머물러 있다. 조윤수 수필가가 한국문화의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차문화’에 관심을 갖고, 테마수필집을 펴내게 된 것만 보더라도 개성과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2. 녹차와 혼연일체의 세계

    녹차는 마음을 우려낸 맛이다. 
산의 만년 침묵을 우려내면 무슨 맛일까. 파르르 새로 솟아난 신록의 빛깔을 우려내면 어떤 맛일까. 산의 명상을 맛볼 텐가. 바위의 그리움을 맛볼 텐가. 달빛처럼 투명한 맛을 머금어 볼 텐가. 맑아서 깊어진 마음을 어찌 알까. 내 인생을 머금으면 무슨 맛을 낼 수가 있을까. 


    녹차의 맛은 활활 타는 쇠솥에서 덖어서 낸 맛이다.
오장육부를 불에 볶아서, 순하고 천진하게 만들었다. 샘물과 바람과도 마음을 통하는 벗이 되었다. 푸른 잎을 덖어서 유순하고 향긋한 맛을 볼 텐가.  

 
    녹차의 맛은 손으로 비벼서 낸 맛이다.
햇살, 달빛, 바람, 이슬, 세월을 잘 비벼내서 한 잔의 차를 마셔볼 텐가. 누구와 어디서 마신들 상관할 바 없이. 

 
    녹차는 물맛이다.
산이 높을수록 계곡은 깊고, 땅속에 스민 물은 담담해진다. 새벽 종소리가 온 몸의 신경을 깨우듯 한 잔의 물이 핏줄의 미세관(微細管)까지 와 닿는다.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어 나무와 풀들의 뿌리를 스치면서 맑고 향기로워진 물맛이다.
                            <정목일의 ‘녹차의 참맛’ 일부> 



   글은 필자의 ‘녹차의 참맛’의 일부이다. 녹차의 맛은 담담하고 무미(無味)인 듯하지만,
산의 만년 침묵의 맛과 바람과 이슬의 맛이 있다. 정화수의 맛이 있다. 한국문화의 마음속에는 차문화가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차 그릇으로는 우리의 막사발과 고려청자, 조선 백자의 차 그릇보다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조윤수 수필가의 차 수필을 읽어보면 우리 차 문화를 어떻게 지키고 계승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차문화의 전통과 계승이 필요함을 느낀다. 
 

    산의 연둣빛이 점점 짙어진다. 그 산빛 우려내어 정다운 벗과 마주하고 차를 마시고 싶다 했지. 차나무에도 새 순이 치밀어 오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성거리기 마련이다. 신들린 사람처럼 차밭으로 달려가게 된다. 오늘이 세 번째 찾아가는 길이다. 벌써 열흘이 지나서야 날을 받을 수 있었다. 그새 봄비도 한 차례 지난 후라 찻잎은 많이 피었고 잎을 딸 때마다 송홧가루가 날렸다. 녹차를 만들기보다 발효차를 만들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찻잎과 종일 서로 비벼대며 맛보고 놀고 햇빛이 여려져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한 잎 한 잎 딸 때마다 엎드려 차님을 받았다. 흠모하는 마음으로 천지의 은혜에 감사함이 새록새록 우러났다. 찻물이 우러나듯이 내 마음도 그렇게 우러나는 것 같았다. 황토방으로 가서 같이 찜질도 하고 땀을 흘리면서 찻잎을 애무하고 같이 누워서 잠을 자기도 했다. 찻잎이 익어가는 향에 젖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자정이 다 되도록 서로 젖어들었다.  너 댓 시간 단계마다 습이 빠지고 향이 모아져서 찻잎이 익어갔다. 마침 알맞은 향이 되었을 때 발효를 멈추고 뜨거운 방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도 어느덧 피곤이 가시고 익은 듯했다. 차향이 유념(留念)되어 맛있는 발효향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차향처럼 그렇게 맛있는 향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냥 차향이라도 몸에 베게 하고 싶다. 봄철 한 때, 익어가는 차향을 맛봄으로 한 해의 기운을 보장 받는 것 같다. 아침에 차 한 잔의 준비와 절 운동이 하루를 위한 시작 기도인 것처럼. 참 희한한 일이다.
                        <茶林에서 茶님과 동침하다> 일부 




   조윤수 수필가의 <茶林에서 茶님과 동침하다>는 차와 작가의 혼연일체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신들린 사람처럼 차밭으로 달려가게 된다’는 대목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찻잎과 종일 서로 비벼대며 맛보고 놀고 햇빛이 어우러져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는 구절만 보아도 차와의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경지를 알 수 있다. 우리 녹차의 맛은 우리나라 산의 맛, 물의 맛, 햇살의 맛, 바람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수입한 커피맛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3. 녹차와 커피의 맛

   오늘날의 차는 커피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 삶 속에 차 한 잔을 놓을 수 있는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다. 차란 마음의 소통이고 대화가 아닐 수 없다. 차란 닫힌 문이 아니고 열려 있는 문이며, 새롭고도 넓은 길을 펼쳐낸다. 가정을 방문한 손님에게 제일 먼저 대접하는 게 차다. 
 최근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도시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현상이 있다면, 커피집이 눈에 띄게 도시를 장악했다는 점이다. 그 동안 전통찻집과 커피숍의 전쟁에서 전통찻집이 고배를 마시고 사라지고, 빈자리를 고급 브랜드의 커피카페가 점령했다. 

 
    도심지에서 점심을 든 직장인들이 보란 듯이 7~8천 원대 브랜드 종이 커피 잔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다. 
 커피 맛은 달콤하고 짜릿하며 환상적인 면이 있다. 향기만으로도 매료시키는 자극성이 있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기에 좋은 분위기와 맛을 제공한다. 녹차 맛은 담담하고 미지근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게 한다, 젊은이들은 녹차보다는 커피 맛에 길들여지기 쉽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차 한 잔은 음료라기보다는 말벗이 되기도 하고, 사색을 위한 대화자가 되기도 한다. 삶 속에 차 한 잔을 놓을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마음을 정화하고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다. 차란 마음의 소통이고 대화의 통로이다. 차란 닫힌 문이 아니고 열려 있는 문이며, 새롭고도 넓은 길을 펼쳐낸다. 손님에게 제일 먼저 대접하는 게 차다. 차 한 잔으로써 소통과 교감을 원한다. 

 
   동양은 녹차, 서양은 커피로 차문화가 대별되고 있다. 차는 민족마다의 특성을 나타내며, 산업화에 따라 가장 오래 된 제품이면서 첨예한 문화상품 중의 하나이다.
  녹차는 잎차이며 커피는 열매차이다. 녹차는 커피처럼 유혹적이지 않으며 열매나 꽃으로 만든 차처럼 향기롭지도 않다. 잎차로서 소박과 은근함을 취하고 있다. 열매나 꽃은 절정의 맛과 향기와 빛깔을 보이지만 잎은 평범하고 온유하다.
 녹차의 맛은 담담함과 고요의 맛이다. 한 걸음 물러 선 마음의 경지,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맛이다. 달콤하고 화려한 맛이 아니고 덤덤하고 싱겁고 평범하다. 커피의 맛은 흥취와 즐거움을 주지만, 녹차는 고요와 깨달음에 이르는 맛을 준다. 담담하지만 안정과 깨달음의 맛이다. 


   수필에 있어서도 녹차의 맛 같은 명상과 향기를 지닌 글보다도, 흥분이 되고 쾌락적인 맛을 주는 커피 같은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본다. 조윤수 수필가는 오래 동안의 우리 차 문화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이번에 차수필집을 내게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 차문화의 전통계승과 일반인들이 모르고 있는 귀중한 우리 차의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하는 문화의식이 배여 있다.  

 
   차와 관련된 공예라면 다구(茶具)를 만드는 도예, 다탁(茶卓)을 만드는 목공예, 다포(茶布)를 만드는 섬유공예, 주전자를 만드는 금속공예 등이 따른다. 차 공예의 중심이 되는 것은 도자기이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도자기문화를 꽃피운 나라다. 고려청자찻사발(高麗靑磁茶碗)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맑고 더없이 푸른 우리나라 가을 하늘이 숨 쉬고 있다. 청자비색(靑磁琵色)은 이 세상 가장 맑은 하늘을 보고 살아온 겨레만이 낼 수 있는 영혼의 빛깔이다. 순수와 청명의 빛깔로 볼수록 마음이 정결해지고 그윽해진다. 고려청자는 우리 겨레의 마음과 하늘의 신비가 어우러져 청아, 유현, 고결의 세계를 지녔다. 하늘의 비색과 명상이 담겨 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와 더불어 막사발 등 한국의 다구들은 세계 시장에서도 가장 우수한 도자기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4 우리 차 문화유적지 답사

   조윤수 수필가는 우리나라 차 문화를 체득하기 위해 자료 수집과 취재활동만으로 그치지 않고, 전국의 차문화 유적지와 생산지를 답사하고 체험함으로써 우리 차문화에 대한 정보. 지식을 토대로 한 글쓰기가 아닌 직접 자신이 현장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을 적나라하게 담아보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앉아서 쓰는 글이 아닌 현장을 찾아서 직접 체험을 통한 발견과 깨달음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테마수필을 전개하려는 뚜렷한 작가정신이 엿보인다.
 문헌이나, 전문가의 인터뷰만으로 그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동기유발과 미학을 글로써 드러내고자 한다.     

   흙 계단을 올라 진각국사의 승탑 앞에 다가선다. 복련과 앙련이 맞붙은 기단석이 몸돌을 받치고 있는 아담하고 야무진 승탑이다. 기단에서 날렵한 팔각 지붕돌 위의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풍진세월을 지켜왔다. 몸돌 팔각 면마다 양각으로 부조된 동물상과 승상이 조각되었다. 정면에 ‘진각국사 원조지탑’이라고 희미하게 새긴 글자가 보였다. 탑 아래에는 두 계단으로 된 단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최근에 다례재를 올리도록 마련한 것이지 싶다. 언덕 아래 주변에는 차나무를 둘러 심었다. 차나무 밭 언덕 위의 높은 곳에 승탑이 있다. 올라오면서도 절집 주변에 차나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지금의 스님도 진각국사가 각별히 차를 가까이 했으며 절창인 차시(茶詩)도 많았다는 것을 알고 차나무를 많이 심었다. 마음으로 달인 차 한 잔을 올리고 승탑을 참배하였다.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사리탑은 그 자리에서 절 창건 이래 수차례의 중건을 거치고 전란을 거쳐 훼철될 때까지 법맥을 이어갔던 후학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승탑의 표면에 쌓인 세월의 이끼가 차라리 아름다운 문양으로 보인다. 국사의 말없는 법문인양 새겨진 글자나 되는 것 같아 숨겨진 비밀의 코드라도 찾을 듯 들여다보았다. 바위 누대에 앉은 듯 언덕 아래를 내려다본다. 광원암 맞 건너 편 산 너머 먼 하늘을 바라며 국사의 <인월대(隣月臺)>를 떠올린다.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 그 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巖叢屹屹知幾尋(엄총흘흘지기심)上有高臺接天際(상유고대접천제)
斗酌星河煮夜茶(두작성하자야차) 茶煙冷鎖月中桂 (다연냉쇄월중계)

  차시茶詩)로서 최고의 절창으로 알고 오래전부터 애송하고 있다는 정선생으로부터 듣고 나도 마음에 담았다. 바로 하늘 밑 높은 바위에서 차를 달이니, 손만 뻗으면 북두를 잡아 은하수를 뜰 수 있었으리라. 호방한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은하수와 북두가 뜨지 않더라도 달이 뜰 때마다 달을 에워싸는 차 연기가 그려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도 국사를 그리며 밤차를 우릴 때가 가끔 있다. 매화 철에 섬진강가에서 때마침 보름달이 떠올랐던 초저녁에도 은하수를 뜨는 듯 강물을 떠서 모래밭에서 떡차 한 편을 끓이면 차 연기가 올라 구름에 달 가듯 하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진각국사의 원대한 다풍을 그리다- 광원암 앞에서> 일부

   차인(茶人)이며 차시(茶詩)로 유명한 진각국사의 유적이 남아 있는 광원암 승탑을 찾아보고 감회를 적은 수필이다. 조윤수 수필가의 글쓰기는 일회성 일과성으로 쓰지 않고, ‘보이는 것에 닿아있는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에 닿아있는 들리지 않는 것, 생각나는 것에 닿아있는 생각나지 않는 것’을 쓰려고 했다. 이 말은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가 한 말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경지에 들기 위해선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가 필요하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자연의 이치를 발견하고, 순리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고승과 학자들이 대부분 차인이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차는 오묘한 생각과 명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조윤수 수필가의 수필들은 커피처럼 자극을 주지도 흥분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단 번에 달콤한 맛을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잡된 생각과 허튼 망상들이 사라진다. 순수와 고요의 한 가운데에 앉아 있음을 깨닫는다. 달밤에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윤수의 차 수필을 읽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5 차가 있는 풍경과 서정

   이곳저곳 살펴보다 화개 장터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장터의 옛 맛이 우러나온 반찬들이 관광지답지 않게 믿을 만 했다. 결국 한밤중까지 내 차를 잠재울 수 있는 곳을 못 찾았다. 생각해보니 이미 다 익은 차를 말리기만 하면 될 것을, 내 방을 따뜻하게 데워서 말리면 될 일이었다. 차 보따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잡냄새 없는 한 방을 불을 지피고 종이 위에 찻잎을 널었다.

  2년 전의 달빛 내려앉은 하늘집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는 셋이서 섬진강 물길 따라 하동으로 내려가면서 차 생활에 얽힌 삶의 이야기가 벚꽃구름 피듯 했다. 초록 잎이 하늘을 가린 터널을 지나면서 벌써 녹 빛 우러나는 찻물에 빠져 있는 듯했다. 차(茶)를 하기 위해서 만난 사람들이기에 차의 철에만 만나도 호흡이 맞아 흡족한 길이었다.

  악양 다원에서 맞춤한 차 잎을 소중하게 안고 우리는 차의 전설를 엮었다. 여름 안거 들어간 스님의 빈 토굴은 우리들의 차방이 되었다. 마침 악양 벌판을 내려다보는 보름달이 훤하게 동녘 하늘에 오르니 인적 없는 깊은 산 중턱의 암자, 달밤이 내려앉은 마당은 은빛 물결이었다. 따끈한 방에서 익어가는 차향이 창호지를 뚫으니 달빛 어린 초여름 밤이 그윽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달빛 차를 함께 마셨다. 한밤중에 차 끓이는 일이 어찌 선승들의 옛 고사(故事)만이랴!

  새벽이슬에 젖은 차밭에서 찔레 향으로 입맛 다시며 찻잎을 땄다. 앞치마 가득 찻잎을 안고 내려와서 해 오르기 전에 청차를 덖어 말렸다. 이렇게 달빛과 이슬에 빚은 첫차를 시음하니 하늘 아래 천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이구동성이었다. 그때는 악양 들판의 정기를 먹은 다원들을 답사하고 산책할 수 있었다.

  올해는 서로 시간을 맞추다가 날씨 관계와 차밭의 사정이 어긋나서 각자 따로 했지만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차이야기는 여전했다. 올라오던 길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꽃양귀비들 속을 거닐 수 있었던 것은 예기치 않은 행운의 위로였다. 장마가 오기 전에 한 번 더 찻잎을 따고 싶었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뿐일 것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영락(零落)과 부패(腐敗) 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는 나의 차(茶)를 두고 한 말 같기만 하다. 작은 방문을 열면 아직도 차향이 스민다.
                      <다심가도(茶心佳道)-나의 차마고도(茶馬孤道)> 일부

 대개의 경우 답사기나 순례기 등을 보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혹은 공간의 이동에 따라 순서대로 써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체험의 기록성에 가까운 글들이 많다. 조윤수 수필가의 글을 보면서 자신의 사유와 감성을 유감없이 펼쳐놓고 있음을 본다. 그냥 스쳐가는 게 아니고, 역사, 문화, 영혼에 닿아 상통(相通)하면서 대화하며 느끼고 깨달은 바를 풀어낼 줄 안다. 마음의 경지가 보인다. 이런 깊이와 인내와 눈썰미가 있기에 한 권의 차수필집이 상재됨을 본다.
한 권의 차 수필집을 낸 적이 있는 필자로서 조윤수 수필가의 차수필집 < 다심가도(茶心佳道)-나의 차마고도(茶馬孤道)> 출간을 축하한다. 


                                        2014년 8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