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자...달 항아리.

2016. 2. 9. 04:06美學 이야기


조선 백자...달 항아리. | 도자기....

아놀드 2009.03.02 15:44

      



(오마이 뉴스..고진숙기자의 우리 도자기 역사)

 

 ,,달항아리는 두 개의 반구를 합쳐서 굽는다. 그런데 굽는 과정에서 실패 확률이 높아 약간의 변형은 인정된다. 그 약간의 변형이 자아내는 푸근한 인간미와 너그러움이 달 항아리가 갖는 독특한 매력이다.

ㅡ지금 우리 민족의 남과 북으로 양분 됨을 합하면 달 항아리가 되지 않을까...인류의 이미지로는 평화의 메시지로


오마이뉴스 유목민님 글 중...

;; 김환기는 구상과 추상을 마음대로 휘저은 화가라 간결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의 세계를 훤히 꿰뚫고 계셔서 쉽게 풀어 쓰실 수 있으신 것 같아서

;;몇 년 전만 해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독대 -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장독대 거기에는 한국인만의 정겨운 조형미가 있었다. 이것이 김환기 예술 세계를 지배했음에 틀림없다. 「그의 그림 장독대(1936년 작품)참고」 항아리 조형 예술의 백미인 이조 백자에 그가 반한 것은 당연하다. 1944년-1950년 까지 거의 매일 한 점씩 이조 백자를 구비할 정도로 광적으로 열정을 보였던 그에게 백자는 미 이전의 미요, 모든 아름다움의 어머니였다. 김환기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조형미와 민족을 나는 도자기에서 배웠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새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문학 예술1954>

도자기 조형은 한국인의 정제된 미의식이 담겨져 있고,

조형 예술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빚어낸 질서와 조화의 극치다.

그는 이런 조형미 넘치는 한국의 이미지에서 구상을 추상으로 변형시키는(deformation) 뛰어난 안목을 발휘했다. (도자기라는 실체적 구상에서 얻은 조형미를 바탕으로 추상의 세계로 들어갔다.)

 

선과 면과 폭의 요약화와 단순화 이것이 추상 예술의 핵심이다.

서구 회화에서는 그들의 오랜 전통ㅡㅡ현대화한게 몬드리안적인 기하학적 미가 있고ㅡㅡ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우리에겐 시각적 호소력을 주기란 어렵다.

 
그러나 김 환기는 한국적 추상으로 세계 회화의 장을 열었다.
( 내 생각....
 서구적 추상이 아닌 동양적 추상이라 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해서 만든 작품이 <달항아리>, 자신만의 스타일로 추상을 완성했다고 볼수 있는 <언제 어디서 우리가 다시 만나리>만들었다는 점이 있다. )

 


김 환기에게 있어 해방 공간은 행운의 시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작가에 비해 현실 직시적(구상)이기보다는 더 현실 우회적(추상)의 경향을 띠게 된다. 하긴 추상이야말로 현대성을 대변하는 첨단의 기제이다. 20세기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정신이 깔려있다.

그의 경향과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52-1953년 그 난리 통에서 미술만 생각하더군요. 천생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술에 미치면 이 세상의 어떤 난리도 그림으로 보이나봐요. 정상은 아니죠.)

 

파리 유학 시절 즈음의 그림들 「새(1960)」나 「여름날 밤(1961)」 「윤월(1963)」 둥 그의 회화는 아직도 한국적 곡선과 평면 그리고 조형에 머물러 세계적 회화로 진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뉴욕에 와서는 산, 달, 새, 항아리가 사라지고 그것마저도 선과 면, 작은 점들로 그의 회화 공간이 채워진다. 그의 회화가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간다는 증거다.

「7-XI-70#-193(1970)」이라는 그의 작품은 김광섭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작품은 김환기 화백의 추상 회화의 환 획을 긋는 대작이다.


그가 도달한 신비한 조형 세계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반가움을 주면서 김 환기의 충족함이 넘치는 세계-하나의 이데아-를 보여 준다. 이건 그야말로 한 작가의 이상적 꿈이 형상들과 이미지로 꽃 피어나는 순간들의 집합체들이다.

 

 

<항아리와 매화가지>에 대한 내 생각.................................


   과일나무,과일,항아리,우리의 논밭으로 짜집기하고 형상을 오버랩하여 구성한 평면적 조형 그림.

논밭=개인의 기억의편린을 간직한 공간,또는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공간.

        입체파들의 원뿔,사각형, 삼각형같은 표현으로 논밭을 배경에 넣었다.

         --풍경과 서정 그리고 입체파라는 현대적 조형미가 어우러지게 하는 요소이면서 배경이 됨.

과일나무와 과일= 개인의 기억들이 나무처럼 자라서 열매처럼 영글면=전통으로 자리 매김.

항아리=달,

즉, 개인은 기억의 편린들 속에서 과거 일들이 뚜렷이 남은 것처럼

     문화 전통으로 내려온 항아리가  달처럼 변치 않은 형상으로 작가의 가슴에 열매를 맺은 것이다??

   달의 은은한 멋이 우리 문화에선 항아리에 담겨있다..

 

매화와 항아리는 형식적인 서구적 조형미로 표현하여, 매화와 달은 내용적인 동양적 서정미로 보면

...동도서기의 전형적 표현방식이라면 왜곡이 지나쳐  환영(幻影)을 그리는 추상 미술처럼

  감상이 허공 속을 해매는 것일까?

 

한국적 정서라는 구상을 추상적으로 표현.

 즉,한국적 정서가 가득한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한국적인 구상의 미가 되는)

      강,산,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조형언어(형상을 글처럼 표현,즉 그림)를 추상적으로 승화시켜 표현,

 

 또, <어디서....>처럼 점,선으로 표현을...김환기의 순수한 추상의 세계를 "全面點畵(전면점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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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4) 조선백자 달항아리.

 (세계시장과 단절이 빚어낸 예술성 )


--- 달항아리는 크기가 커서 한번에 물레에 돌리지 못하고, 둥근 대접을 2개 맞붙여 구워낸다. 때문에 항아리 가운데에 붙인 자국도 남아 있고, 반듯한 구형(球形)이 아니라 한쪽이 이지러져 보인다. 어떤 이는 거기서 “부잣집 맏며느리의 후덕함”(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보았고, 다른 이는 “눈처럼 흰(설백·雪白) 빛깔은 청렴을 지향하던 사대부의 이상과도 부합한다”(윤용이 명지대 교수)고 말했다. 그만큼 애호가가 많다는 뜻이다.

바닥(굽)이 윗부분(구연·口緣)보다 좁아달처럼 공중에 둥실 있는 같다”(화가 고 김환기)는 이 달항아리는 우리나라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각각 한 점씩이었다. 18세기에 제작된 달항아리(백자대호·白磁大壺)---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가지’(1958년)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조선 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삼불 김원용 ‘백자대호’)

   달항아리로 불리는 풍만한 조선 백자는 한국적 미의 상징으로 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온화한 백색에 아무런 장식도 꾸밈도 없는 달항아리는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달항아리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조형미 대신 약간 일그러진 모습이 더욱 정감이 간다. 이는 달항아리를 만들 때 상·하 부분을 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접합시켜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갤러리현대 강남은 새해 첫 전시로 다음달 10일까지 ‘화가와 달항아리전’을 연다. 달항아리에 심취해 이를 화폭과 사진에 담아온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도예가들이 직접 만든 달항아리 도자도 전시된다.

화가로는 도상봉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걸린다. 도상봉 화가로서 50평생을 바쳐 가장 즐겨 그렸던 소재는 꽃과 백자 등이었다. 그는 “백자가 보여주는 유백색의 변화감은 신비한 기쁨과 함께 한국적 정취와 멋을 풍긴다”고 말했다. 김환기 역시 달항아리를 예찬한 작가였다. 그는 “미에 대한 개안이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돼 조형과 미와 민족을 도자기에서 배웠으며, 나의 교과서는 도자기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여인, 또는 매화가지와 함께 달항아리의 풍요로움을 표현했다.

사진작가 구본창은 달항아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동시에 그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백자는 마음을 비워 무욕의 아름다움을 성취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 무욕의 마음을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의 사실적이고 기계적인 특성과 백자의 자연스러움은 어우러지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백자의 외형적 형태보다는 그 내면에 흐르는 깊고 단아한 감성을 파고들고자 했다.”

( "조선시대 백자가 가진 무욕의 마음을 기계적인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게 구본창의 고백이다.)


   강익중‘이리 봐도 순박하고 저리 봐도 넉넉한’ 달항아리를 파란 하늘을 담아내듯 그려냈다.

 둥그렇고 하얀 모습은 같지만 제각기 다른 달항아리의 멋을 감상할 수 있다.

 강익중의 평면작업 속 커다란 달항아리는 하늘처럼 푸른 빛을 띄고 있다. 정광호는 구리선으로 달항아리를 만들었고, 김덕용은 목판에 새겨넣었다. 표현방법은 각기 다르지만, 달항아리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정감과 풍요로운 기운은 모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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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근 달처럼 다복하고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조선 시대 문화의 꽃이자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백자 달항아리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홍보팀 성은진 팀장은 “불황에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풍요를 상징하는 달의 고유 이미지를 통해 내재된 것을 일깨우는 기회를 찾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달항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자 자신만의 선과 빛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사람마다 개성이 있는 것과 같다. 왜란과 호란으로 한창 나라가 어지럽던 17, 18세기에  중국이나 일본과는 차별된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자각에서 달항아리 제작이 시작됐기 때문일까. 이번 전시에 참여한 사진작가 구본창 씨는 “조선 백자는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비워 무욕의 아름다움을 성취한 놀라운 작품”이라며 “사진기의 기계적 특성상 무욕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고백했다. 기억을 더듬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달항아리의 친숙한 선은 지금껏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안겼다.현대와 접목하기 좋아서 ‘살아 있는 소재’로 평가받는 달항아리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민족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로 발전했다. 도상봉, 김환기 화백은 “내 예술의 모든 것은 조선 백자항아리에서 나왔다”고 극찬하였으며 수십여 점의 달항아리를 수집하고 화폭에 담아냈다.미국 현대미술가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모든 것을 비운 결과물인 조선백자 달항아리의 선에 매료되어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달항아리는 백색의 둥근 생김새가 보름달을 연상시켜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욕의 미를 담은 간결하면서도 기품 있는 선, 온화한 유백색의 빛을 지녀 가장 한국적인 미로 인정받은 달항아리. 혜곡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욕심 없이 어질고 순종적이며 의젓해 잘생긴 며느리 같다’라고 했다.

 




   달항아리는 17,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가마와 분원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를 말한다. 대부분 높이가 40㎝ 이상이어서 백자대호라고도 한다. 원에 가까운 형태가 둥근 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닥에 닿는 굽이 입보다 작아 달이 둥실 떠 있는 것 같아서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몸체가 크기 때문에 물레질로 점토를 끌어 올려 한 번에 형태를 빚을 수 없고 상층과 하층을 따로 만든 뒤 두 부분을 접합시켜 완성한다. 따라서 달항아리는 대부분 이음새가 나타나는데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는다. 심하게 이지러진 것도 있는데 기교에 집착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깊은 맛을 낸다. 기계적인 미끈함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맛이 멋으로 녹아 있다 하겠다. 늘 생생한 느낌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보며 올 한 해가 둥글게 빚어지기를 바라본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되는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한국과
그 예술’ 신판(1954)에도 막상 달항아리를 뜻하는 대호(大壺)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오만한 풍정(風情)이 아니라 쓸쓸한 자태’라고 했을 뿐입니다.


   갈수록 달항아리 열풍이 거세지도록 만든 공은 1950∼1960년대 일찌감치 그 예술성에
눈뜬
김환기 화백이나 최순우 선생에게 먼저 돌려야 합니다.
여기에 20세기 후반기 이후 국내외를 막론한 급격한 산업화도 자연미 그 자체인 달항아리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조선의 도자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무너지다시피 했습니다.
17세기 후반 철화백자가 나타난 것도 청화백자의 재료인 페르시아산 청화안료가 수입되지
못하자, 철사(鐵砂)안료로 대용한 결과입니다.


   달항아리도 이 시기에 금사리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퇴촌에서 들어가자면 분원리로 넘어가는 고개 못미쳐
오른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금사리에는 분원리로 옮겨가기 전, 왕실에 그릇을 공급하는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옹원 분원은 정원이 380명에 이르고,28개 직급 체계로 완벽하게 나눠진 분업
조직이었습니다. 당연히 ‘국영 도자기 공장’인 금사리에서 장인 한둘의 안목으로 달항아리와
같이 완전히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달항아리는 ‘조선왕조의 국책사업’으로 탄생시킨 성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최순우 선생의 말씀처럼 달항아리가 갖고 있는 ‘폭넓은 흰빛과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도 국가적인 차원의 사업으로 빚어냈다는 뜻입니다.

달항아리가 세계 도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독특합니다.
최건 광주관요박물관장“중국의 징더전(景德津)이 명·청대에 걸쳐 도자기 수출의 중심지가
되고, 일본도 조선 도공이 가세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수출국으로 부상했지만, 문양이나 모양
등에서 주문자인 유럽이나 페르시아의 취향을 수용하다 보니 결국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더군요.


   역설적으로 달항아리의 예술성은 세계시장과 소통하지 못한 단절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소외된 상태에서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 조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 것이 곧 달항아리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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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정재숙 기자의 글.

 

   수화(樹話) 김환기는 백자 항아리를 사랑한 화가다. "우리 항아리를 보고 미를 깨달았다"며 희고 둥근 항아리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렸다. 그는 술이 한잔 들어가면 품에 꽉 차는 백자 항아리를 껴안고 "달이 뜬다, 달이 떠"라고 흥얼거리며 춤을 추었다.

수화가 본 대로 대낮 경복궁에 달이 떴다.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옮겨 15일 문을 여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훤하다. 개관기념 특별전 '백자 달항아리'에 모인 큼직한 항아리 아홉 점이 달덩이다. 국내외에서 손꼽히는 명품을 모았으니 8.15 육십 돌이 달항아리로 푸짐해졌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널리 알려진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은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잘생긴 며느리 같다'고 했다. "잘생겼다는 말은 얄밉지 않다는 말도 되고 원만하고 너그럽다는 말도 되며 믿음직스럽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둥글고 풍요한 어깨에 알맞게 솟은 입이 있고, 허리 아래가 너무 훌쳐졌구나 싶지만 자세히 보면 그 상큼한 아랫도리의 맵시가 아니고는 이 항아리의 잘생긴 몸체를 가눌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는 표현도 썼다. 백자 항아리와 잘생긴 며느리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이다.

혜곡이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의 항아리를 비교한 대목은 더 오달지다. "중국의 항아리처럼 거만스럽다거나 일본 항아리처럼 신경질적인 데가 없는 것이 우리 조선 항아리의 특색"이라 했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를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군상이 생각난다는 혜곡은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그들이 즐기는 색채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썼다. 백자 항아리는 혜곡에게 한민족이었다.

   이러한 혜곡이 처음부터 조선미를 알고 미술사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다. 감칠맛 나는 글솜씨가 드러내듯 그는 문학을 꿈꾸던 문청이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던 그가 한 사람을 만나 다른 삶을 일군다. 한국 미술사와 이론의 개척자로 불리는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44)이 그다. 혜곡은 조선미술의 특질을 '구수한 큰 맛'이라 한 우현의 말에 빨려들어갔다. "암흑기를 지내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의 전통미술은 세계에서 특이한 존재이며 장래에 반드시 재평가받을 분야다. 그러니 한국 미술의 체계를 세우고 그 자랑을 민족의 가슴에 올바르게 심어 주는 일도 문학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다." 우현의 제자가 된 혜곡은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미술사를 통하여 한국 사람에게 긍지를 갖게 하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8.15를 맞았다고 회고했다.

   우현 고유섭이 한국 미술을 연구하던 시기는 우리 문화에 대하여 말할 수도, 들을 수도, 가르치기도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였다. 한국의 전통미술을 헐뜯고 깎아내리려는 일본인 학자 사이에서 그는 말 그대로 고군분투했다. 백범 김구가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 외칠 때, 우현 고유섭은 "나의 오직 하나의 소원은 한국미술사의 완성"이라 했다. 개성부립박물관 관사의 단칸방에서 39세로 요절하기까지 우현은 한국미술사 저술이란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올해는 우현 고유섭 탄생 백 돌이다. 고향 인천에서 12일부터 그를 기리는 국제학술심포지엄과 전시회가 열리고 여덟 권짜리 전집도 열화당에서 나온다. 그 자신이 백자 항아리였던 고유섭 선생이 한국미술사학계에 달로 떠오른다. "전통이란 결코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 얻는 "이라 했던 고인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독립을 향한 공부를 '학난(學難)'이라 이름한 선생의 마음을 대한민국 회갑 잔치 전야에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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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장용준 교사.(함평고) 글. 




 

약간 이지러진 둥근 달처럼
완벽하지 않아서 더 친근하고 아름답구나!

‘달항아리’

 

 아아아아아  모양이 달덩이처럼 둥그렇고 원만하여 달항아리로 불린다. 이러한 항아리는 대략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는데, 맑은 흰빛과 너그러운 둥근 맛으로 요약되는 조선 백자의 미를 대표하는 잘 생긴 항아리로 꼽힌다.

 

바라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정이 들고 푸근해지는 그런 항아리가 있습니다.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항아리입니다. 공식 이름은 ‘백자대호(白磁大壺=백자 큰 항아리)’지만 그보다는 달항아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아무런 장식 없이 희고 깨끗한 색깔과 둥글둥글한 생김새에서 넉넉하고 아름다운 보름달이  떠올려지는 까닭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이러한 달항아리를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후덕함을 지닌 항아리라고 하면서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 보는 듯 순정적 헌데 이 항아리를 자세히 보면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튀어 나와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양쪽 면이 틀리게 만들어 졌는데오, 도자기 전체가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확대사진을 보면 균형이 전혀 잡히지 않을 것 같은데, 항아리 전체를 놓고 보면, 매우 안정된 느낌이 드는 것. 그게 바로 이 도자기의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이 항아리가 그야말로 완전한 원형이었다면 아마 너무 답답하지 않았을까요?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약간 이지러진 둥그스르함을 지니고 있기에 오히려 자연스런 아름다움과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내 생각....영정조 당시엔 완전한 구형의 도자기를 만들기를 바랬을 것이다. 기술적 한계로 만들지 못함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엔 대형 달 항아리 완전한 구형 만드는게 도공의 꿈이었는데 그게 안되고 대신에 달항아리의 목적이 감상이 나닌 생활도기 였으니, 실용성으로 제작되 소장자가 여인네들이었고, 감상자는 없었음이 조선의 어느 글에도 달항아리에 대한 감상 평의 글이 없음에서 알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오늘날 도자기 기술의 발달은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인위적인 냄새를 풍기는 자동화 제품을 예술로 여기지 않는. 인간의 제작 한계를 드러내는 도자기가 오히려 작품으로서 인정 받는 시대로 인식이 변하였기에...달 항아리의 예술성이 부각 된 듯하다.)



사실 이 도자기는 제작 기법상 완전한 원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처음부터 타고났습니다. 항아리의 정 가운데를 자세히 보세요. 이음 자국이 보이지요? 이 항아리는 높이가 40cm가 넘는 대형이어서 도공이 물레에서 그릇을 빚을 때 한꺼번에 빚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도공은 머리를 굴렸겠지요.
“그래! 아래와 윗부분을 따로 만들어 두 개를 접합하자!”
어찌 보면 아주 창의적인 발상이지 않습니까? 도공은 물레를 돌려 윗 부분이 될 사발을 만들고, 다시 아랫 부분이 될 사발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접합하려고 보니 저런! 양쪽의 크기가 약간 달랐습니다. 그래서 도공은 자신의 눈썰미와 손재주를 가지고 최대한 자연스런 원이 되도록 양쪽을 접합시킨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약간 이지러진 달항아리가 되었구요.

이 항아리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아시다시피, 영·정조 시대로 문화의 꽃이 활짝 핀 시기였지요. 당시 항아리 도자기는 키가 큰 입호(立壺)와 둥그런 원호(圓壺)가 대세였습니다. 입호의 경우 높이 40cm 이상의 대형 작품이 많았고, 둥그런 항아리, 즉 원호는 높이와 최대 지름이 1대 1을 이루는 달항아리가 주종을 이루었지요.

우리가 보는 이 달항아리는 보물 제1437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항아리에 젓갈도 담고 간장이나 된장도 담는 생활도구로 사용했는데, 현재는 몇 점 남아 있지 않아, 아주 귀하게 모셔지고 있는 것이지요.

달항아리 구입한 영국 도예가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
2005년 광복절에 국립고궁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달항아리’ 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 때 7점은 국내에 있는 항아리였고 2점은 해외에서 물을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온 달항아리 중 하나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소장품이었으며, 다른 한 점은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었지요.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달항아리는 영국의 대표적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 일제시대인 1935년 우리나라에서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던 항아리로 현재는 대영박물관 한국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달항아리는 아주 기구한 사연을 지닌 도자기입니다. ‘달항아리’ 전시회에 맞춰서 우리나라에 온 이토 이쿠타로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장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도자기는 본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동대사(東大寺)라는 절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1995년 7월4일 대낮에 도둑이 들어 이 항아리를 가지고 달아나다가 발각되자, 집어던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300여 조각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동양도자미술관이 기증을 받아 4년에 걸쳐 원형과 거의 비슷하게 기적적으로 복원해 전시회에 내놓았던 것이지요.





수화 김환기의 작품 ‘매화와 항아리’(1957)
산, 달, 매화, 사슴, 여인, 새, 항아리 등 수화가
즐겨 그린 소재들은 한국적이며 동양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애착을 가진 것은 조선 백자라고 한다.

ⓒ 전라도닷컴


   항아리를 소재로 해서 그린 그림이 있는데 아마 본 적이 있으실 거예요. 김환기(1913∼1974) 화백의 작품입니다. 김환기 화백은 우리 민족이 즐겨했던 소재들를 사용하여 작품에 담아 표현함이 민족정서와 감흥을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가로 평가 받아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지요.

 

그의 그림에는 조선 백자가 주요 소재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달항아리는 그의 미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미에 대한 개안(開眼)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됐다”는 그의 고백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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