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 사이에 떠도는 얘기가 있다. 1958년 11월 26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과 밥 먹고 연극까지 즐긴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기분이 좋았다. 숙소에 돌아오자 함께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불렀다.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다. 너 일하는 걸 보면 우리와 다른 구석이 있다. 무슨 일이건 팽팽하고 사람을 긴장시키지만, 결국은 원만하게 매듭을 짓는다. 어디서 그런걸 익혔는지 궁금하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저우언라이가 입을 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 외에 불법(佛法)에 관심을 가진 지 오랩니다.” 마오쩌둥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불법이라니. 누구에게 귀의(歸依)라도 했단 말인가?” “쉬윈(虛雲·허운) 화상 입니다.” 마오도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다. “아직 살아있나?” “청나라 함풍제(咸豊帝)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120살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쉬윈에 관한 얘기를 아는 대로 풀어놨다. 마오쩌둥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번 만나고 싶다. 불러라.” 저우언라이는 당황했다. ”모시고 싶어하는 명산 고찰이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거절하고 운거산(雲居山)에 박히더니 꿈쩍도 안 합니다. 절도 건조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기분이 상했다. “운거산이 한두 군데냐?” 마오의 말이 맞았다. 시안(西安)과 베이징 근교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었다. “남악(南岳), 형산(衡山)에 있는 운거산입니다.” “오건 안 오건 불러는 봐라.” 상대가 쉬윈이다 보니 “오면 돌팔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쉬윈은 마오의 초청을 거절했다. “자고로 법왕이 인간의 왕보다 높다(自古法王大于人王). 귀의할 생각이 있으면, 마오쩌둥이 남쪽으로 와라.” 만화에나 나옴직한 얘기를 믿고 싶어하는 중국인이 아직도 많다.
현대판 신화의 주인공들은 자작(自作)의 대가라고 단정해도 된다. 현대 선문(禪門)의 태두 쉬윈도 자신의 출생에 관한 구술을 남겼다. “나는 태어날 때 둥그런 살덩어리였다. 놀란 모친은 헉 하는 순간 기도가 막혀 사망했다. 이튿날 마을 의사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해부 하듯이 살덩어리를 가르자 남자 애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계모 밑에서 자란 쉬윈은 열세 살 때 할머니를 잃었다. 집안에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유교 경전만 접하던 쉬윈은 불상과 불경을 접하자 환희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열일곱 살 때 불문에 귀의 하겠다며 가출했다. 기겁한 아버지는 사람을 풀었다. 끌려온 아들을 창고에 가둬 버렸다. 숙부가 묘안을 냈다. “저런 애들은 여자와 어울리게 해야 한다. 결혼시켜라. 한 명으로는 부족하다. 빨리 며느리 감이나 두 명 물색해라. 아들 방에 집어넣고 밖에서 자물쇠로 채워버려라. 며칠 지나면 출가할 생각이 가실 게 분명하다.” 아버지는 동생의 의견이 그럴 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명문 집안이라 며느리 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쉬윈은 두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틈으로 엿보던 숙부는 쓸데 없는 짓 했다며 가슴을 쳤다. 형이 장기간 집을 비운 틈에 자물쇠를 풀어줬다. 쉬윈은 산으로 들어갔다. 두 여인에게는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편지를 남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쉬윈이 여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그들도 속세를 뒤로 하겠다며 새벽 길을 자청했다.
쉬윈의 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사람을 떼로 고용해 전국의 사찰을 뒤졌다. 아버지의 성격을 아는 쉬윈은 심산유곡, 동굴에 은거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나물과 솔잎, 석간수로 허기를 달래며 수양에만 몰두했다. 꼬박 3년을 그렇게 했다. 101년간 가사를 걸치고, 120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일년에 한번만 목욕하던 습관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불당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포기했다는 소문을 접하자 정식으로 불문에 귀의했다. 소식을 접한 두 여인도 쉬윈의 뒤를 따랐다. 일년 터울로 삭발했다.
쉬윈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졌다. “오랜만에 득도한 고승이 출현했다.” 행동도 걸맞았다. 가사 걸친 지 20년이 되는 1880년, 불교명산 보타산(普陀山) 법화암(法華庵)에서 3보1배를 시작하는 향을 살랐다. 오대산(五臺山)까지 2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다.
쉬윈은 마오쩌둥 뿐만이 아니라 서태후(西太后)에게도 무안을 준 적이 있었다. 젊을 때부터 권력에 맛을 들인 서태후의 정신 세계는 정상이 아니었다. 관세음보살로 자칭할 때도 있었지만 항상 비정상은 아니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오락가락했다. 8국 연합국에게 쫓겨 시안으로 도망칠 때 쉬윈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쉬윈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유가 별났다. “목욕을 안 한지 오랩니다. 제 몸에서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때 서태후는 정상이었다. 옆에 있던 이홍장(李鴻章)에게 “고승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대범하게 넘겼다.
1937년, 항일전쟁이 터졌다. 군사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면담을 청했다. 쉬윈은 흔쾌히 수락했다. 제자 쥐짠(巨贊·거찬)을 데리고 하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