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4. 16:37ㆍ글씨쓰기
[경인일보=김선회기자]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세황 행초 표암유채(姜世晃行草豹菴遺彩)'와 수원박물관의 '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朴泰維 筆蹟 白石遺墨帖)'이 문화재청에 의해 최근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1680호로 지정된 '강세황 행초 표암유채'는 총 13장 26면에 규격은 54.7×31.5㎝로 된 서첩으로 일반 서첩류보다 월등히 크고, 글자의 크기도 커서 큰 글자는 자경이 15㎝에 이른다. 서체는 송나라 양시(楊時) 등의 칠언시를 유려한 행초로 쓰고 발문을 적었다.
강세황(姜世晃·1713~91)은 조선 후기 영·정조 연간의 문인이자 서예가이며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서화 평론가로서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행초 표암유채 글 끝에 경술년(庚戌·1790년)겨울에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강세황이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1~3개월 전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물 제1675호로 지정된 '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은 17세기 후반의 문신이며 명필이었던 백석(白石) 박태유(朴泰維·1648~86)의 필적이다. 박태유는 조선시대 대학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아들로 숙종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으며 철원의 김응하묘비(金應河墓碑), 영상신경신비(領相申景愼碑), 해백박동열비(海伯朴東說碑), 길목박동망갈(吉牧朴東望碣)의 글씨를 남겼던 인물이다.백석유묵첩에는 다양한 크기의 여러 서체가 쓰여 있는데 해서, 행초, 광초(狂草), 예서, 행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해서와 행서는 중국 당(唐)나라의 명필인 안진경(顔眞卿) 서체의 영향을 받아 글씨가 중후하고 호방하면서도 특유의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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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유묵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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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유채 보물1680호 / 경기도박물관 소장
소 재 지; | 경기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경기도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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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영정 보물 250호 傳 이명기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 초상화 (자화상) / 견본채색 보물590호 / 국립민속박물관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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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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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590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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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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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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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6년(1782) | ||
▒ | 규모·양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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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88.7cm 가로 51cm 종축 | ||
▒ | 재 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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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바탕에 채색 | ||
▒ | 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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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동ㆍ강영선 | ||
▒ | 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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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8-5 (국립민속박물관 보관) | ||
강세황영정은 영·정조 때의 문인서화가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자신을 직접 그린 초상화이다. 보물 제590호에는 이 작품 외에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강세황영정이 또 한 점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상화 중 자화상은 매우 드문 것이고 더구나 전신(全身)을 그린 예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강세황은 문신으로 시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서화비평과 감식분야에서도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영정의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된다. |
자화상의 크기는 가로 51㎝ 세로 88.7㎝이고, 다른 초상화는 가로 94㎝ 세로 145.5㎝ 크기이며, 모두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강세황(1713-1791)은 시,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자화상은 검은색 관모에 진한 옥빛의 도포차림의 모습이고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는 관복에 관모를 착용했다.
자화상은 강세황의 7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다른 한 점의 그림은 입고 있는 옷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가 죽은 뒤 그의 자화상을 보고 영정 그림에 뛰어났던 이명기가 그린 것이다.
한편 사모관대정장본(紗帽冠帶正裝本)인 전(傳) 이명기(李命基) 필(筆) 강세황(姜世晃) 초상화 역시 위에서 말한 자화상과 얼굴의 전체 각도에서부터 시선 처리까지 얼굴 모습은 똑같은 양태를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이 화상은 제기(題記)로 미루어 그의 71세상(歲像)임을 알 수 있는데, 어제제문(御製祭文)이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상(像)은 자화상을 보고 화사(畵師)가 사후 추화(追畵)한 본(本)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초상화는 화법상 완전히 명암법으로 그려졌는데, 의습처리(依褶處理) 역시 앉음새로 인해 그늘질 수 밖에 없는 흉배 밑과 양 무릎 사이, 나아가 흉배도 양팔과의 연접 부위(連接 部位)를 어둡게 시채(施彩)하여 소위 그림자에 대한 경험적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또, 조선왕조 전반을 통해서 초상화에서 거의 나와 있지 않던, 간혹 예외적으로 나온다 해도 아주 소홀하게 취급되던 손이 이 화상(畵像)에서는 얼굴이나 의복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비례에 어긋남이 없이 손가락 마디마디의 생김새까지도 여실히 재현되어 있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조선시대 전반기까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회화사적으로 볼 때 의미 있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표암 강세황 <산수대련>
표암 강세황의 시서화 평
2. 표암 강세황 선생 소개
대부분 표암 강세황 선생하면 시. 서, 화, 평론까지 포함하여 4절이라 하면서 그림,서예에만 중점적으로 소개했지만, 문학분야의 시는 별로 소개 된것이 미약하여 시 몇수만 올립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은 450 여수의 "청담하고 우아한"시를 남긴 시인이자 문장가였고 물 흐르듯 유려한 독자적 행서체를 이룬 서예가였으며 산수, 인물,화훼,사군자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뛰어난 남종문인화가이자 동시대의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들에 평을 썼던 화평가이기도 하였다.
또한 종정, 금석, 고이, 동기, 도장등 엣 물건들에 조예가 깊었던 감식가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하 신위(1769~1845)와 단원 김홍도(1745~?)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활동의 다기성, 관심의 다면성, 표현의 다양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대부터 70대 최말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뛰어난 시서,화 작품을 남긴 삼절이었다. 육체적으로는 작고 평범한 용모의 인물이었으나 연부역강하였으며, 정신적으로는 빼어난 재주, 넓은 식견, 높은 안목을 고루 갖추었던 진취적인 문인이자 예술가가였다 그는 조윤형(1725~1799)의 말대로 천품이 매우 높았고 아름다움을 녹여 재창출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이미 청년기부터 국내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1784년(만71세)에 건륭황제의 천수연 참석차 부사로 중국에 연행 했을 때에는 그의 서화에 대한 명성을 익혀 듣고 있던 중국인들이 그것을 구하고자 운집하였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하였다. 특히 그의 글씨를 본 건륭황제는" 미불보다는 못하나 동기창보다 낫다 "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반 사실들을 볼 때 그가 18세기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없다
그를 빼놓고 그 시대의 미술과 문화를 논하기 어렵다. 핵심을 빼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회화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조선후기의 화단을 특징짓는 남종화의 정착, 진경산수화의 유형, 풍속화의 풍미, 서양화법의 수용 등은 모두 강세황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8세기에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문학, 서예, 회화 등 예술의 각분야에서 혜성같은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특히 회화 분야에서는 조선 중기의 절파계화풍을 이으며 남종화풍을 수용하고 풍속화를 개척한 공재 윤두서(1668~1715), 남종화풍을 구사하여 우리 나라에 실재하는 명산승경을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겸재 정선(1676~1759) 남종화풍과 북종화풍을 아울러서 절충화풍을 이루고 수묵사의화조화에 독보적이었던 현재 심사정(1707~1769), 강세황의 제자로 풍속화를 위시한 모든 화목에 뛰어났던 단원 김홍도등이 대표적이다.
정선, 심사정, 김홍도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어서 각기 나름대로의 화파를 이루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에 비하여 화풍의 측면에서 외형상 강세황은 신위, 김홍도, 최북 등 일부의 화가들 이외에는 일파를 이룰 정도로 추종자들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강세황의 대표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정선, 심사정, 김홍도는 내세울 시문학이 없으며 서예가의 반열에도 들지 못한다. 오르지 회화에서만 대표성이 인정된다. 윤두서는 서예와 회화에 모두 뛰어났으나 조선후기 모두의 인물이어서 농익은 18세기 중엽과 말엽 문화의 대표적 인물로 앞장 세우기에는 시기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강세황과 함께 대표적인 남종산수화가였던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는 높은 격조의 훌륭한 남종화가이기는 했지만 폭이 넓지 못했다.
반면에 강세황은 시,서,화 3절일 뿐만 아니라 18세기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광박하고 박고적이면서도 창조적이었으며 당시의 여러 가지 새로운 미술문화의 경향들을 제일 너그럽게 끌어안으며 자리잡게 하는데 선구자적 역활을 하면서 기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8세기 조선후기의 예술과 문화를 포괄적으로 대표하는 한 명의 인물을 선정한다면 역시 강세황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문학에서는
강세황 이름 세자도 찾아 볼수가 없다. 어설픈 현실이다.
3 .표암의 시
시1
쓸쓸히 내린 비 산사람 사립문 닫혀 있고
아침내내 깊은 잠 오후까지 이른다.
고루에서 우연한 술자리 잔을 나누고
잠시 핀 꽃떨기 붓은 날듯이 달린다
요사이 정원 거니는 게 취미가 되어
일찍이 세속과 연을 끊었다.
천자나 되는 폭포 내리쏟는 소리
인세의 시와 비를 칸막아주네.
시2
새허연 머리털 듬성듬성 칠 십 난 노인
시냇가 동쪽에 쓸쓸히 낡은 집
텅 빈 회포야 기한을 멀리 했지만
운명지어진 힘이라 병 우환만 만나네
들에 부딪는 샘물소리 거문고와 축소린데
온 산에 붉은 단풍 그림 같구나
금년에도 쓸쓸히 중앙절 저버렸으니
바위언덕 올라서서 지팡이에 몸 기댄 걸로 비기어
보네.
시3
옷섶 헤치고 두건 벗고 띠집에 앉았는데
가는 대밭엔 석양 비추고 여우비 오네
문안 뜰 돌아 흐르는 푸른 시내는 졸졸졸 소리내고
벽오동에 싸인 집 서늘함 머문다
맛좋은 술 잔에서 넘치는데 때맞춰 채소는 부드럽고
은루 소반에 수북히 쌓인 점심 향길 풍긴다
큰 소리로 시 읊조리다가 어둑해진 날 몰라보는데
주인은 취해 미친 나를 내버려 둔다.
시4
짧은 외나무다리 그윽한 시내에 걸쳐 있고
한 줄기 물 그윽한 버들숲 뚫고 흐른다
주인은 빙긋이 나그넬 맞아
은근히 각자에게 술을 권한다
구슬같응 그대의 아름다운 싯귀
내 손엔 웅장한 서품으로 변한다
온갖 근심 단번에 스러지니
이 즐거움이야 참으로 갖기 어렵지.
시5
아침 오자 많은 원망 사립문 두드린데
나막신굽 이끼낀 뜰에 흔적 여기저기
빈한한 살림이라 채권만 산더미처럼 쌓이고
가을 만난 낙옆처럼 귀밑머리 성글어지네.
시6
가난살이라 매사가 마음과는 뒤틀려
무너진 방 벽 기대 쓸쓸히 나무가지미냥 바보처럼
앉았네
가련한 내 말년 헌 종이에 묻혀
그대 생각에 시비를 기웃기웃
해진 나막신 수선도 하고어제 빤 옷가지 잘 말려 입고......
시7
깊은 임금 은혜 우리집 치우치게 받았는데
도 갚지 못해 옷깃엔 눈물만 고여라
직 할일없다 이르지 말고
에 지녔던 멸사봉공정신 저버릴까 두려웁구나.
시8
가뭄 끝에 밤새 내린 비
교외 들판 흡족히 젖었구나
산나문 장막처럼 드리워 있고
언덕을 내리쏫는 물줄기 대발 이뤘다
농가에 근심 걱정 모두 풀리고
이럴 땐 시경이 문득 더해진다
마른 연못 빗물 넘치는데
뛰노는 물고기 다투며 떳다 잠겼다.
시9
아름다운 경치 찾으려 해도
함께 할 길동무 없네
갑작스레 찾아 온 친구 나를 놀라게 하니
호방한 유흥에 어려울게 없지
게다가 산승의 기쁜 소식
때마침 단풍 여간 곱다나
행장은 퍽 조촐하지만
화필은 시통과 함께 했다네.
시10
서로 만나 기쁜 웃음 되려 수심으로 변한 이별
어쩔 수 없는 이별 술잔 눈물 흐르네
그대 가도 그리움은 여운처럼 남고
때때로 그대와 유람했던 명산 이젠 꿈에서나 노닐겠지
* 표암 시 453수를 특징적 으로 고찰해보면
첫째: 삶의 조각들을 진솔하게 표현, 일상적인 삶의 모습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안빈낙도의 여유로 용해, 초연한 삶을 시로 승화 )
둘째: 시의 철학전 주된 배경은 가풍탓도 있겠지만 유학의 근간인 충효가 바탕으로 작품화 시킴
셋째 : 생활주변을 묘사한 시를 많이 남겨놓음(생활공간들을 수채화 그려내듯 담박한 필치로 묘사)
넷째 : 표암은 인간적 정감을 표현
(특히 부인 유씨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정감, 친구에 대한 애정등)
한국서예사특별전 23 표암 강세황전
안휘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문화재위원)
Focus 한국서예사특별전 23 표암 강세황전
표암 豹菴 강세황 姜世晃 展의 의의
가슴에는 두 산의 동굴을 가득 메울 고서들을 간직하고
필력은 다섯 곳의 큰 산을 흔들 수 있구나
세상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나 혼자서 낙으로 삼는다네
Ⅰ
조선후기의 미술사나 문화사에서 표암 강세황(1713-1791)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주지되어 있듯이 그는 회화, 서예, 문장, 화평, 제자 양성 등 다방면에 걸쳐서 남다른 경지를 이루고 기여하였다. 특히 18세기의 회화와 서예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는 제대로 된 역사를 서술할 수가 없다.
그는 회화에서 초상화, 풍속인물화, 산수인물화, 사의寫意산수화, 진경산수화, 화조화, 정물화, 괴석화, 사군자화 등 실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문인 출신의 남종화가였던 그가 자화상이기는 하지만 주로 화원 등 직업 화가의 영역이었던 초상화와 풍속인물화를 그린 점, 사의산수화만이 아니라 진경산수화도 그린 점, 남종화법을 위주로 하면서 서양화법도 수용했던 점, 김홍도를 위시한 중인 출신 화가의 작품에도 종종 화평을 가했던 점,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와 단원 김홍도와 같은 우수한 제자를 배출한 점 등은 그의 진취적 성향 및 미술인으로서의 위업을 잘 말해준다.
서예에 있어서도 그는 왕희지, 왕헌지, 미불, 조맹부 등의 서체를 소화하여 독자적이고 독특한 경지를 형성하였다. 특히 그가 즐겨 쓴 행서는 물 흐르듯 유려하고 세련된 모습이면서도 짜임새가 뛰어나 일견 그의 작품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워,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의 글씨에는 억지나 허세, 의도된 개석의 표출 등이 없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 언제나 그만의 서체로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게 다가선다.
강세황은 이처럼 조선후기의 서화와 관련하여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제대로 된 전시회가 이제껏 열리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 였다. 강세황이 1995년 1월의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간단한 전시회가 유일한 선례라 하겠다. 그나마 도록조차 발간되지 않아 현재로서 참고의 여지조차 없다. 다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79년에 발간된 『표암유고豹菴遺稿』와 변영섭 교수가 펴낸 『표암강세황회화연구豹菴姜世晃繪畵硏究』 등의 저술이 나와 있어 강세황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고 있을 뿐이다.
Ⅱ
이번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되는 「표암 강세황전」은 앞에서 언급한 저간의 상황을 감안할 때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번 전시의 의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전시작품이 190여 건 200여 점에 달하는 종합적 성격을 띤 전시회라는 점이 주목된다. 강세황의 각 종 그림과 글씨를 비롯하여 관련된 온갖 자료들이 출품되어 그의 생애, 학문과 사상, 회화와 서예, 교유관계 등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동안 깊이 사장되어 있던 미공개 작품과 자료들이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과 함께 대거 출품되어 보다 풍부한 감상과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괄목할 만 하다. 이러한 신출의 작품과 자료 덕택에 강세황 서화의 형성과 변천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상당 부분 가능해졌다.
2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기간에 제작된 그의 서화 작품들은 20대의 미숙한 단계에서 출발 3, 40대와 5,60대에 이르러선 연륜이 쌓여 서화 양면에서 차차 자기화, 원숙화 과정을 거쳤음이 잘 드러낸다. 대표적 서·화가의 성장과 변모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강세황 화풍의 연원이 다양하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는 바이나 이번 전시에서는 그것이 재확인되며 보다 주목할 만 한 점들이 있다. 그가 그림을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미불, 원말사대가-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예찬倪瓚, 왕몽王蒙, 동기창董其昌 등의 남종화가들의 화풍을 참조하였음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나 그밖에 초년에 청대 석도石濤의 화풍을 모방했던 점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강세황의 초년의 호인 산향재山響齋의 관서款署가 쓰여 있는 이 작품은 간결하고 깔끔한 화풍에 석도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후대의 화가들이 석도의 화풍을 많이 따르게 된 연유가 강세황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강세황은 원말사대가들 중에서도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을 많이 참고한 것이 분명하나 그 중에서도 황공망의 영향이 컸음이 분명하다. 이점은 그가 성호 이익의 요청을 받아 만 38세 때인 1751년에 그린 <도산도陶山圖>나 두증痘症을 앓던 손자를 위해 약즙으로 그린 1782년 작품인 <약즙산수도藥汁山水圖>가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로 대표되는 황공망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특히 <도산도>는 강세황이 도산에 직접 가보지 않고 이전의 여러 작품들을 참고하여 그린 점을 감안하면 종래의 안견파安堅派화풍이나 절파계浙派系화풍, 혹은 그 절충화풍을 새로운 남종화풍으로 변화시킨 것이 분명한데 이때 황공망화풍을 택하여 그린 것은 그만큼 화풍을 중시하였음을 말해 준다. 중국의 대표적 화가들과 함께 그가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 등의 중국 화보를 널리 참고하였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개자원화전』에 실린 명대 오파吳派 심주沈周의 그림을 모방한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가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가 만 77세까지도 여전히 『십죽재화보』 등의 화보에 관심을 보인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Ⅲ
강세황이 이처럼 중국의 대가와 화보에 관심을 가지고 참고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가 우리나라의 창강蒼江 조속(趙涑,1595-1668),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9-1759) 등의 선배화가들에 유념하였던 점은 새롭게 느껴진다. 초년기 강세황의 묵매도나 화조화 등에 조선 중기의 영향이 감지되는 것은 조속을 비롯한 중기 화가들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조선중기의 화풍을 계승하여 후기로 이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형성했던 윤두서의 그림을 강세황이 모방했던 점 또한 새로운 사실이다. 강세황의 <춘강연우도春江烟雨圖>가 이를 밝혀 준다. 아마도 강세황의 30대 작품일 것으로 판단되는 이 그림의 오른편 상단에 “春江烟雨 倣恭齋”라고 적혀 있어서 이슬비 내리는 봄날의 강변 모습을 윤두서의 화풍을 모방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구도를 보면 윤두서의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가 연상된다(김원용·안휘준 『한국 미술의 역사』 시공사 2003 p.483 도30 참조). 윤두서를 통한 남종화법의 영향도 감지된다. 이 <춘강연우도>에 보면 강세황이 윤두서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윤두서나 강세황이 전형적인 문인 출신의 화가로서 자화상과 풍속화를 그린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점도 더 이상 우연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강세황이 정선의 <피금정도披襟亭圖>와 <어한도魚閑圖>에 부친 찬문도 크게 주목된다. 이 찬문에서 강세황이 “謙翁之畵 當爲吾東第一 卷中所畵亦皆得意 翁今老矣...(겸옹의 그림은 마땅히 우리나라 제일이다. 두루마리 안에 그려진 것들도 역시 모두 특외작이다. 옹은 이제 늙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강세황이 정선의 그림을 우리나라 제일로 꼽았으며 또 정선을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인 출신의 강세황이 직업 화가였던 정선을 이처럼 높이 평가하였던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뛰어난 서화가와 화평가로서 강세황의 열린 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의산수화만이 아니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위시한 진경산수화도 주저 없이 그렸던 소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강세황과 윤두서 및 정선의 관계는 조선후기의 회화를 좀 더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Ⅳ
강세황의 초상화와 관련된 자료들도 관심을 끈다. 그의 자화상은 이미 학계에 잘 알려져 있으나 이번에 새로 소개되는 이명기(李命基, 1756-?) 필筆이 그린 71세의 강세황 초상화와 이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소상하게 밝힌 강세황의 셋째 아들 관(人+寬)의 『계추기사癸秋記事』는 특급의 자료라 하겠다. 이 초상화는 이명기가 28세 때인 1783년에 그린 그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조선후기 초상화의 높은 격조와 한국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이 초상화 이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계추기사』다. 이 문적에 우리나라 초상화의 제작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강세황이 1756년 음력 4월부터 마음에 차는 초상화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그려 보기로 하고 화원을 시켜 그리기도 했으나 미흡한 채로 있다가 기사耆社에 참여한 1783년 5월 정조의 전교로 이명기에게 그려 받게 된 경위, 이명기가 초상화로 ‘독보일세獨步一世하여 문무경상文武卿相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구했다’는 사실, 이명기가 병자(丙子, 1756)년에 태어나 당시 28세였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여 이명기의 생년이 1756년임이 처음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그가 이미 20대에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궁宮 내외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밖에 초상화의 제작에 필요한 비단(초 )을 병장屛匠인 김복기金福起에게서 열냥에 사들였고, 초상화의 제작은 1783년 7월 18일에 시작했는데 이때 강세황은 서울의 회현동에 있었으며, 19일에 묵초소본墨草小本이 이루어지고 20일에는 묵초대본墨草大本이 완성되었으며 21일에는 묵초대본 위에 초를 대고 23일에는 착색을 시작하여 27일 끝냈음이 밝혀져 있다. 이렇게 하여 이명기가 대본, 소본, 부본까지 모두 마친 것은 열흘 뒤인 28일이며 이때 그가 받은 수고비가 열냥이었다. 그림이 완성된 28일 저녁부터 표장이 시작되었고 이 때의 장수(匠手, 표구사)는 어영청禦營廳의 책공인 이득신李得新인데 이는 판서인 홍수보洪秀輔가 보내준 것이고, 배접에 필요한 각종 종이들은 승지인 신대승申大升의 집으로부터 얻었으며, 향호(香糊, 풀)는 판서인 정창성鄭昌聖의 집에서 구하였는데 장자障子가 완성된 것은 29일이었으며, 청백릉靑白綾·석환錫環·향목축香木軸·선익지蟬翼紙와 장수가 모두 왔는데 공임까지 열냥이었다. 30일 새벽에 보褓가 완성되었는데 경비는 3냥이 들었고 8월초 5일에는 초상화들을 넣을 궤자(櫃子,상자)가 완성되었는데 비용을 4냥으로 장수는 용호영龍虎營의 소목장小木匠이었다.
이처럼 초상화와 그것을 넣을 상자의 제작에 이르는 19일간의 전 과정을 날짜별로 진행 상황을 밝히고 화가, 표구사, 목공, 협찬자들의 이름과 노임 및 소요 경비, 필요한 재료의 확보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개인 기록은 지극히 희귀한 사례로서 앞으로의 초상화 연구를 위해서는 물론 미술사의 사회·경제사적 고찰을 위해서도 더 없이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강세황의 자화상 이외에 <연객허필상烟客許 像>도 간과할 수 없다. 조선후기의 주요 문인화가 중의 한 사람이자 강세황의 제일 친한 친구였던 허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강세황의 인물화의 또 다른 양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강세황의 관서와 도인, “烟客像 男 書”라는 강세황의 막내아들 강빈姜 의 글이 보인다. 배경의 절벽과 그것에서 뻗은 나무가 이룬 공간에 허필로 믿어지는 인물이 무릎을 반쯤 세운 채 앉아 있다. 포치법布置法으로 보면 영락없이 조선중기의 소경산수인물화의 전통을 따랐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배경의 절벽과 나무의 표현 및 인물의 의습선은 강세황의 화풍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기적인 포치법은 강세황이 앞 시대의 화풍을 잘 습득하고 있었음을 밝혀 준다. 인물이 입고 있는 옷도 중기의 신수인물화의 전통을 연상시킨다. 인물의 편안한 자세, 큰 눈과 긴 수염이 두드러져 보이는 얼굴과 시상에 잠긴 듯한 표정 등은 문인으로서 허필의 모습일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Ⅴ
이밖에도 화조, 화훼, 사군자, 괴석 등 실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도 보는 이의 관심을 끈다. 이것과 관련지어 볼 때 미불, 조맹부 등의 중국 화가들의 이름이 자찬에 보이고 조선중기 묵매화의 전통이 매화 그림에 엿보인다. 강세황이 일찍부터 득명하고 인기가 있었음은 그가 1747년(만 34세)에 그린 <맨드라미와 여치>에 적힌 자찬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世之求余畵者多矣 或山水 或花卉草 或樓閣器物 雖隨求而應 세상에는 내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산수, 혹은 화훼초충, 혹은 누각이나 기물 등 요구하는 대로 응한다”는 내용을 보면 그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30대에 인기 있는 화가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세웠음이 분명하다.
강세황은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화평에 있어서도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정선, 심사정, 강희언, 김홍도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작품에 화평을 남긴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도 이 점이 거듭 확인된다. 이처럼 강세황은 다방면에 걸쳐 혁혁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하겠다. 이번에 출품된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은 강세황의 학문과 사상, 서화의 연원과 변화양상,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 안휘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문화재위원)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tjsghdbsgh/4751919
취재 및 정리 이희순(월간 까마 기자)
표암은 18세기의 최고의 문인이자 예술계를 이끈 총수(總帥)이다. 표암에 대해 총체적인 전시는 사실상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각 방면의 자료가 공개되었다. 그 중에는 처음으로 공개된 그림과 글씨 사료도 다수 있어 더더욱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스물세번째 한국서예사특별전으로 <표암 강세황전>이 열렸다. 전시기간은 2004년 2월 29일까지이다.
표암은 죽음에 이르러 ‘창송불노 학녹제명(蒼松不老 鶴鹿齊鳴,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우는구나)’이란 절명구(絶命句)를 남기고 갔다. 문학·서예·회화·비평 등 다방면에 뛰어났고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와 같은 걸출한 제자 양성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특히 18세기의 서예와 회화의 역사는 표암 강세황을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다. 이번 전시에는 총 179건의 작품과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초상 34건, 글씨 40건, 산수인물 30건, 사군자·초충화훼 18건, 서화평·교유 23건과 표암 가문의 필적과 장서 65건에 다다른다. 표암의 생애·학문과 사상·서예와 회화·교유관계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게 된 점도 큰 의의라 하겠다.
생애
가문의 전통과 예술적 측면을 이어받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아버지 문안공이 64세의 늦은 나이에 낳았다. 그의 아호인 표암(豹菴)은 태어날 때부터 등에 흰 얼룩무늬가 표범처럼 있는 것에 연유한다. 표암을 포함하여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아버지 현(金+見)과 조부 백년(柏年)까지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를 자랑하는 명문가이다. 삼대가 연이어 기로소에 들어갔던 가문은 표암가를 위시하여 다섯 가문에 불과했다. 또한 표암의 가문은 소북(小北)의 명가 중 하나이다.
기로소는 조선왕조시대의 관부(官府) 중 서열이 가장 높았던 기구이다. 나이 많고 덕이 높고 후세에 가장 귀감이 될 만한 인물들로 선정하며, 왕이나 벼슬이 정경(正卿) 이상이고 문신에 한해서 입소가 가능했다.
표암의 생애 중 가학과 동국진체의 연마 시기인 초기 학습기와 자아발견과 실험정신으로 일관했던 30여 년의 안산 생활을 뒤로하고 61세 때 영조의 권유와 심경의 변화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영릉참봉이란 낮은 벼슬로 출사해 71세 때에는 한성부판윤에 승차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천수연(千수宴) 부사가 되어 중국 여행을 하기에 이른다. 정조조인 78세 때에는 품계가 한층 높아 정헌대부에 이르렀으며, 8자의 절명구를 남기고 79세에 별세했다.
안산시절 교유와 문예활동
표암에게 안산시절은 침잠하여 자신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을 단련하고 발전 성숙시킨 내부지향의 시기였다. 20대의 표암은 연이은 부모의 상과 시묘살이를 겪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표암 문중의 후손인 강경훈 동국대 교수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표암의 장형인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이천부사로 있을 때 무신란 즉 이인좌란에 연루되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도방위의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주로 중도부처된 것을 계기로 벼슬은 그리워 할 것이 못된다라고 표명하고 처남인 유경종의 권유로 안산에서 학문과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표암이 어릴 때의 재능을 기반으로 처가가 있는 안산에서 30여 년을 살며 학문과 예술을 꽃피우면서 그 중 중요한 일로는 단원 김홍도를 7∼8세 때부터 지도한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단원에 대한 재능을 아끼고 장려하면서 그림의 이론이나 요체를 가르쳤다. 「단원기」에 의하면 김홍도의 재능에 대한 찬사와 촉망, 그리고 서화동원론에 입각한 회화에 대한 긍정적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표암의 말년까지 지속되어 사제관계를 넘어 평생의 동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단원 김홍도나 자하 신위와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게 된 동기와 배경에는 처남인 유경종과의 돈독한 우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안산에는 조선의 4대 만권당 중 두 곳이 있어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좋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같은 시대, 일단의 재야 문인들의 중심인 강세황을 포함하여‘안산 15학사’의 활동무대이기도 한 안산은 학문과 예술에만 전념하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을 지닌 지역이었다. 안산 15학사란 경기도 안산에서 새로운 문학과 예술창작에 정진했던 남인 소북문단 인사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안산의 큰 스승이었던 성호 이익의 영향이 지대했다.
표암은 안산에 은거하면서 발빠르게 중국의 신서적을 접할 수 있었고 청조문화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예민한 관심과 감각으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안산항이 오늘날의 부산과 인천에 버금가는 대중국무역의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문예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의식과 감각을 다룬 여러 갈래의 작품이 대거 등장하는 때이기도 하다. 표암의 세계관과 활동도 그와 같은 분위기와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초상화
현존하는 표암의 초상화는 10점인데 자화상이 4점이나 된다. 이번에 초상화 제작일기인 <계추기사>의 발굴로 표암이 기로소에 입소한 두달 후 정조의 어명으로 당대 주관화사로 선출된 실력자인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계추기사는 표암의 셋째아들이 쓴 것으로 초상화 제작내력과 제작과정, 감상소감, 총 제작비 등 초상화 제작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첫 번째 문헌사례라는 점에서 학계에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표암은 누구보다도 자화상을 많이 그리고 있는데, 자화상은 강한 자아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역대 많은 문인화사들이 자화상을 그리고 있음은 자기의 삶에 대한 자각과 확인을 통하여 자기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자화상이란 화원보다는 여기적(餘技的) 화가 즉 문인화가에게서 발현된 하나의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초상화에서는 형사(形似)에서부터 전신(傳神)을 사조(寫照)해내며 추상적 개념까지도 도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미 교수는 초상화론을 고찰하면서 화풍의 문제 등에는 거의 언급이 없는 것을 미루어 초상화는 객관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서예세계
표암의 패트런은 역시 시서화에 능했던 문예군주인 영조의 배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년기에 대한 표암의 글과 글씨, 그림에 대한 천재적 재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언급된 바 있고 일화도 많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 중 당대 명필인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은 표암이 쓴 문서를 보고 “이 아이는 글씨의 성취가 나보다 뒤떨어짐이 없도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표암자지(豹菴自誌)」의 기록에 의하면 12∼13세 때에는 행서를 잘 써서 이를 사람들이 얻어다가 병풍을 꾸미는 일이 많았다고도 한다. 특히 글씨는 행서와 행초서에 능했는데, 중봉에서 삐치는 결구가 마치 새벽 하늘에 걸린 초승달이나 미인의 자태처럼 미려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표암의 서예학습은 조선초 이래 줄기차게 서단의 종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왕희지·왕헌지의 이왕체, 조맹부의 송설체 그리고 각 시대에 대표되는 사람들의 서화를 폭넓게 수련하고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서체도 일일이 점검하여 그 특장을 체득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옥동 이서로부터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는 동국진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석봉체도 수용한다. 10여세에 글씨에 뜻을 두고 환갑 때까지 하루같이 수련했으니 중국 역대 명필들의 필법을 익히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서법에도 능통했다. 당시 청나라를 주도하던 고증학의 영향으로 한위 비문 탁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비학(碑學)의 단초가 열리는데 표암은 그 정보와 자료를 비교적 신속하게 접하였다는 것이다.
서화를 사랑하여 감식안이 당대 제일이라고 자부하던 건륭황제가 표암의 서법에 대해 미하동상(米下董上, 미불의 아래 동기창의 위)이라는 4자의 편액을 써 준 일이나, 당시 청조 서단을 이끌었던 유석암(劉石菴)과 옹방강(翁方綱)이 그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天骨開張, 천품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이라 칭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중국에서도 표암의 글씨가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50대를 전후하여 이왕과 특히 구체풍(歐體風)의 해서 필의의 장점을 잘 조화하여 자가풍의 행서를 완성하고 있다. 그의 학서지론(學書持論)은 ‘진인(晉人)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먼저 조맹부 동기창 등 원명인을 배운 후 미불, 저수량 등 당송인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광범위한 명가 명법첩의 학서를 강조하였으며 서는 이왕을 본받고 미불과 조맹부를 섞어서 배웠다 라고 자신의 서예의 연원을 직접 밝힌바 있다.
표암의 글씨는 평생 미불의 서를 학서하면서 특별히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고유의 서예 전통 또한 귀하게 여기고 있는데, 『표암유고』에서 우리나라 서예의 가장 대표되는 서가는 김생 이암 안평대군으로 평하고 있다. 『표암유고』에는 손석휘의 임고첩 말미에 써주었던 30여 편의 제발이 남아있는데 당시 서가들의 서예 학서과정, 즉 범본으로 사용한 법첩의 예를 엿볼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정확한 고증을 통하여 진본과 위작을 구별하는 탁월한 감식안을 보여준다 임금탐고(臨今探古)의 학서 방법을 주장한 표암은 글씨를 씀에 중요한 것은 외형만이 아닌 그 안에 깃든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왕첩의 위작문제와 임금탐고라는 학습방법, 구체에 주목하고 자신의 서예에 반영한 점은 추사 김정희가 그대로 주장한 것이기도 해서 강세황의 선구적 안목이 확인되는 점이다. 이는 표암의 제자인 자하 신위와 추사의 친분과 교류에서도 알 수 있듯 나름대로의 깊은 영향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완당이 쓴 <삼세기영지가>의 현판도 선보였다.
회화세계
문인화가로서 표암의 면모는 주로 화가의 측면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기 때문에 서양화법을 최초로 도입했다거나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조선화 내지는 토착화하는데 주도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전시의 회화 특징 중 하나는 25세 때 그린 매화 2점과 산수 2점의 발굴로 기존의 입장을 수정 보완하면서 시서화 삼절로서 표암의 면모가 이미 초년부터 드러난다는 점을 실제 작품으로 확인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사실상 처음으로 공개되는 <방석도필법산수도> <방공재춘강연우> <방십죽재화보> 등으로 보아 평생을 임모와 방작을 통해 자기화를 이룩한데 대한 토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주변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소화해 내고 있으며 사군자·초충도에 색깔을 많이 쓰고 있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그밖에도 표암은 인장과 문자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중국에서 전각이 한 장르로 형성되는 시점에서 공재 윤두서와 같이 표암도 전각에 능통한 전문적인 식견과 수완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예술적인 위대성을 판단함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넓이이며 또 하나는 깊이에 의거한 것이라는 원리이다. 표암은 이 원리에 잘 부합되는 인물이라 평할 수 있겠다.
표암이 살았던 시대의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작과 문화의 수평적 이동현상의 배경은 실학사상의 발흥과 함께 17·18세기에 이룩된 조선의 사회·경제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조선사회의 변모양상이 곡진하게 담겨진 문화예술의 전반 속에 강세황이라는 인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술의 성격은 허탄한 것을 경계하고 실질을 숭상했던 품성으로 사실적이며 실질을 묘사한 것들이 많고 과장된 표현과 허세가 없어 마치 진(眞)과 기신(奇新)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는 서울서예박물관과 작품보관을 잘해온 표암 가문의 후손들 그리고 개인 소장가들의 협력하에 이루어진 대규모 기획전이다. 이번 기회는 표암의 연령별·주제별·학문적으로까지 총체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인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면면히 이어온 우리 문화에 대한 전통이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현장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겠다. 아울러 2월 7일 9시부터 5시까지 서예박물관 문화사랑방에서 표암에 대한 심포지움이 열린다. 서울대 안휘준·명지대 이태호·동국대 강경훈·고려대 변영섭·대전대 이완우·홍익대 한정희 교수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전시기간 중에는 <표암선생 미술교실>이라는 테마로 어린이들의 우리그림 그리기 워크샵도 진행된다.
표암 강세황의 詩.書.畵 '3絶'의 유려한 화풍 한눈에
산수. 풍속화 등 179점 선봬 제자 김홍도 못지 않은 '거장' | ||||||||||||||||||||||||||||||||||||||||||||||||||||||||||||||||||||||||||||||||||||||||||||||||||||||||||||||
- 2003. 12. 27 ~ 2004. 2. 29 예술의 전당 전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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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명작 '표암 초상화' 정조(正祖)의 지시로 19일만에 제작 | ||||||||||||||||||||||||||||||||||||||||||||||||||||||||||||||||||||||||||||||||||||||||||||||||||||||||||||||
- 작가명. 시기. 총비용. 재료등 전과정 담은 '계추기사'(癸秋記事) 공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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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암 선조님 계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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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생애와 예술
고려대 교수 변영섭 | |
1. 표암(豹菴)의 생애 문안공이 64세에 얻은 아들이어서 그를 매우 사랑해 한시도 무릎 앞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는데 6세부터 글을 짖고 10세에 도화서(圖畵署) 생도를 뽑을 때 어른을 대신하여 등급을 매기는데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늙은 화사(畵師)들이 탄복하였으며 이미 12-3세에는 행서(行書)를 잘 써서 사람들이 얻어다 병풍을 꾸미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로 집안의 문서정리는 물론 방문객을 응접하는 일들을 도맡아 했다. 21세 때 84세의 연로하신 아버지가 진천에 갔다 병을 얻어 그 곳에서 별세하시니 3년의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아버지 형제분의 유고를 손수 베꼈고 28세 때 다시 어머니 상을 당해 다시 3년의 여묘를 했다. 아버지가 한성판윤과 호조/병조참판을 지내셨지만 칠순노모를 봉양치 못할 만큼 가난했고 서울살이가 힘들자 32세 때 안산의 처가 근처로 이사를 와 이곳에서 61세에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궁핍한 생활 속에서 학문과 서화에 전념했다.
표암은 자신의 성향을 "심오한 음악의 이치와 교묘한 공예품까지도 한번 듣고 보면 환하게 깨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바둑알을 손에 잡은 적이 없고 노름이나 잡기를 안했으며 관상이나 풍수를 믿지 않았다. 병자년에 아내가 죽어서도 풍수가를 데려다 자리를 보지 않고 과천 사동에 있는 빈땅에 무덤을 썼다"라 기록하고 있다. 매우 소식가였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량도 매우 적으니 제사에는 부디 술을 쓰지 말라. 가난한 집에서 잘사는 사람들이 하는 짖을 흉내낼 필요는 없다"고 경계하였다. 그는 남들과 다투지를 않았고 이해관계에서 있어서도 담박하였으며 살림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풍류를 즐기며 관대하여 남의 근심이나 즐거움은 앞서 하였다. 일상생활의 의복, 장식품, 사용기구 등에서도 화려하고 사치한 듯 하면 곧 없애게 했고 자식 가르침에 있어서도 언제나 차분히 타이르곤 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長壽)의 전통이 있었고, 또한 71세때 기로사(耆老社)에 들어 조선왕조를 통 털어 극히 드문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광을 누렸다. 표암은 61세에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79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가히 "영광스런 노년기"를 보냈다. 계사(1773)년 봄에 영조의 특별 배려로 영능참봉(英陵參奉)으로 등용되었으나 늘그막에 관직에 나가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 하여 곧 사임했고, 이듬해 사포서 별제(司圃署 別提)로 임명된다. 그 후 해마다 승승장구하여 여러 직책을 두루 거면서 66세에는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했다. 71세에 병조참판과 한성판윤을 지냈는데 특히 그 해 수명(壽命)과 지위를 갖춘 사대부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로사(耆老社)에 3대를 이어 들어갔다. 관직생활 중 두 번의 여행은 문인 사대부로서 인생말년을 더욱 활기차게 했는데 첫번은 천추부사(千秋副使)로 중국(1785. 73세)을 가서 건륭(乾隆) 천수연(千受宴)에 참석 해 그곳 학자들을 만나 막혔던 가슴을 터놓고 시(詩)서(書)화(畵)를 교환했던 일이다. 중국인들이 그의 글씨를 천골개장(天骨開張)이나 미하동상(米下董上)이라 칭찬하며 그림과 글씨를 구하려고 모여들었고 이때 그린 실경사생과 문인화 몇 폭이 전해져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또 76세(1788) 가을에는 맏아들 인(人+寅)이 부사로 있는 회양(淮陽)에 가서 금강산을 유람했는데 그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한 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많은 이들이 평생 한번 구경한 것이 무슨 신선이 사는 곳을 다녀온 것처럼 자랑들을 하여 못 가본 사람들은 사람 축에 들지 못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 했다. 금강산 등정에는 김홍도, 김응환, 아들 빈(人+賓), 신(信), 그리고 두 친구와 함께 했는데 장안사, 혈망봉, 옥경대, 명경대, 백화암, 표훈사, 만폭동, 정양사를 거쳐 혈성루에서는 중향성과 비로봉을 바라보았다. 중향성(衆香城)이 옥으로 다듬은 죽순처럼 빼어나고 서릿발같은 칼이 나열된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이곳은 이 산에서 제일 환상적인 곳이다."며 종이를 꺼내 대략 보이는 대로 그렸다. 그때 스케치한 초본들을 정조가 보여달라 하여 올렸고 현재 그 화첩하나가 전해지는데 정조께서는 나이가 들어도 결코 쇄하지 않는 표암을 "풍채가 고상하여 늙은 신선도와 같다"고 평했다. 옹께서는 키가 작고 풍채가 보잘것없어서 모르는 이는 만만히 보아 업신여기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싱끗이 한번 웃고 말았다. 말년에 그는 남산 밑에서 백발에 밝은 용모로 유유자적하니 중년기에 자평했던 자신의 모습과는 대조적 삶이었다. 1791년 정월 그는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蒼松不老 鶴鹿齋鳴) 란 마지막 글귀를 남기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니 정조께서 치제문(致祭文)을 내리고 시호를 헌정(憲靖)이라 했다.
표암은 조선 후기에 활약했던 대표적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였다. 그가 활동하던 조선후기(1700-1850) 화단의 성격은 다양한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기로 일컬어지며, 그 흐름은 대체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유행, 풍속화, 도석인물화의 풍미, 그러면서도 서양화법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어느 때 보다도 월등하게 한국적 화풍으로 발전해 한국회화 사상 가장 다채롭고도 눈부신 "예술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바로 18세기 문예부흥기로 인식되는 영.정조(英.正祖)년 간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작가의 작품에 화평(畵評)을 쓰는 방법으로 당시 여러 화가조류 전반에 관여하였다. 요컨대 강세황은 스스로의 작가적 경험과 해박한 지식 격조 높은 안목을 갖춘 당대 예술계의 선구적이고도 지도적 위치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해낸 인물이다. 그는 문인 사대부로서 그림뿐만 아니라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이였으며 독자적 예술계를 이루어 당시 한국적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3. 안산(安山)시절의 예술 30년 간의 청장년기를 모두 안산(安山 釜谷洞)에서 보낸 그에게는 학문과 예술에 있어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처가와 5분 거리에 마련된 초라한 고옥은 비바람을 제대로 막지 못했고 조석이 간데 없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오직 책과 필묵으로 스스로를 즐겼다. 천부적 재능을 바탕으로 시와 글과 그림의 깊이를 더해가며 경지에 이르러 "홀로 깨닫는 지식을 가졌다"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강세황에게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가 돌보지 않던 집안살림을 대신 꾸려가던 동갑의 부인 진주유씨가 네 아들을 남긴 채 44세로 세상을 떴고, 51세에 붓을 놓은(絶筆) 사건이다. 상처 후 그는 집을 떠나 여행을 하거나 절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때 작화동기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듯 그 후 작품에는 일대 변화가 나타난다. 이 무렵 절친한 친구 허필(許泌 : 1709-1768)과의 풍류여행 그리고 당대 명성 높던 현재 심사정(沈師正 : 1707-1769)과의 그림을 통한 만남이 이런 변모를 한층 더 고무시켰다. 또 40대 중반 이후 예술적 감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활동하던 그가 뜻하지 않게도 화가생활을 중단한다. 51세 때(1763) 둘째아들 완(人+完)이 과거에 급제하여 영조를 만나 뵙는 자리에서 영상(領相) 홍봉한(洪鳳漢)이 강세황은 문장을 잘하고 서화에도 능하다 하였다. 이에 영조는 "인심이 좋지 않아서 기술이라고 업신여기는 무리가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한다는 이야기를 말라"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영조의 특별한 배려에 감격해 사흘동안 눈물을 흘렸고 그 후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 영조의 생존동안 또 어진감동관(御眞監董官)이 되던 60대 후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70대 전후반 작품활동을 재개할 때까지 적어도 10-20년이 작품의 공백기였던 반면 화평가(畵評家)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글씨는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는데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미불(米불)의 서체를 본받았고, 그림에서는 산수(山水)와 사군자(四君子)에 뛰어났으며, 시(詩)는 육유(陸游)를 본받았으나 독자적 풍격을 갖추었다. 강세황의 생애에서 높이 평가 될 것은 제자인 김홍도(金弘道), 신위(申緯)가 각각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고 또 문인 화가로 그의 맥을 이어 발전시킨 스승이란 점이다. 김홍도는 강세황이 쓴 단원기(檀園記)에 "처음 내 문하로 있을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여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에는 같은 관청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함께 지냈고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다운 느낌을 가졌다"하였으며 신위도 "어릴 때 표노(豹老)에게서 배워서 수제자란 말을 들었다."며 각별한 존경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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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의 사군자4폭 중 매화도(梅花圖)에 화제를 쓰다
독립큐레이터 이택용
해설 :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사군자4폭 중 매화도(梅花圖)에 화제를 쓴 그림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 · 화가이다. 일찍부터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 열중했으며, 이익(李瀷) · 심사정(沈師正) 등 명사들과 두루 교제했다. 61세 때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66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한성부 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시 · 서 ·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대한 평을 해 화단의 총수역할을 담당했고, 나아가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새로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림의 소재는 주로 산수 · 꽃 등을 그렸는데 만년에는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묵화(四君子墨畵)를 그려 이름을 떨쳤다. 글씨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본받아 썼다. 그의 서화는 중국에까지 이름이 나서, 1784년(정조 8) 그가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림이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 중에서 김홍도(金弘道) · 신위(申緯) 등이 유명하다.
이 그림에 화제를 쓴 연객(烟客) 허필(許佖)은 조선 후기의 학자 · 서화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정(汝正), 호는 연객(烟客) · 초선(草禪) · 구도(舊濤)이다. 사헌부 지평 허열(許悅)의 증손이며 허의(許顗)의 손자이고 허규(許逵)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가지지 않고 학문과 시 · 서 · 화에 전념하여 당시에 삼절로 불리었다. 이용휴(李用休)가 쓴 그의 지명(誌銘)에는 청빈하고 소탈한 성격과 문학과 고예술품(古藝術品)을 사랑하는 태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서체(書體)에 능통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산수 · 영모 등의 그림을 그렸으며 산수화는 중국 명(明)나라 심주(沈周)의 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몇 폭의 그림들은 명대 오파(吳派) 또는 미가(米家)산수양식의 특징을 보이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남종화라고 할 수 있다. 강세황과는 경기도 안산에 같이 살면서 막역한 지우로 지냈다. 이 그림은 강세황의 사군자 4폭 중에 매화도에 그가 아래와 같이 화제를 썼다.
-강세황(姜世晃)의 사군자4폭 중 매화도(梅花圖)에 화제를 씀-
低頭背面揔佯羞, 嫰泣輕嚬一種愁, 嫁與東風誰氏子, 渭南楊柳最風流. 烟客小者
고개 숙이고 얼굴 돌려 수줍은 듯, 우는 듯 찡그린 듯 근심스럽다. 봄바람 어느 집에 시집 가는가, 버들 늘어진 위남(渭南)이 가장 풍류 있는 곳이라. 연객(烟客) 허필(許佖)이 쓰다.
조선시대 10대 화가
조선시대 회화는 17세기를 경계로 하여 전후 2기로도 나뉘지만, 정확하게는 3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5세기 초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 화원(畵院)의 화사(畵師)가 중심이 되어 송 ·원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한 시기로, 북송(北宋) 곽희(郭熙)를 모방한 안견(安堅)의 산수화(山水畵)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의 회화의 흐름과 작가 안견(현동자) 강희안(인재) 이상좌(학보) 이 암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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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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