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5. 18:26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통일국가의 목표
2005.04.02. 10:10
http://blog.naver.com/rlaaudgns5/60011460014
대한민국 땅이라는 나라에 왕자들이 있었는데.. |
이의제기 내용추가 (2005-03-16 18:53 추가) | 이의제기 내용보기 |
dddd |
옛날에 레포트 한건데.. |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滿鮮史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살펴볼 내용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회의적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한 인식경향이다. 이 경향은 민족사의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과 발해사 서술의 당위성을 인정 하는 입장이다. 발해는 『삼국사기』에 북국으로 표현되어 그 상대인 신라가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 조선 전기까지의 어느 역사서도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발해의 멸망 이후 그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을 상실한 전근대사회의 역사학이 보인 무관심과 인식능력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근대사회의 지향으로 성격이 규정되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실학사상을 배태시킨 현실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실학계열의 역사인식에서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의 역사 서술에서 이른바 통일신라와 상대적 관계에 있었던 발해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계열의 역사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신라삼국통일의 긍정론을 수용하면서도 발해의 역사를 신라사와 더불어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상황 속에서 유득공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신라 중심의 삼국사만이 서술되어 있고, 발해의 역사가 배제된 사실을 고려왕조의 취약성과 결부시켜 비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한국사의 서술공간에 신라와 함께 발해의 자리도 인정하는 남북시대론의 단서가 열렸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적 인식의 시작은 한국사의 인식지평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의 인물인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남북국시대론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아예 언급치도 않고, 고려 태조에 의한 남북국통일론을 제기함으로써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상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으므로 개화기의 전통적인 유가사학자인 김택영도 그 내용을 수용하여 『역사집략』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사학의 요체는 서술방법과 같은 형식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내용의 본질적인 전환에 있는 것이니 만큼 새로운 역사가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 근대사학의 발달과정에서 이 과제는 신채호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는 역사이해의 중심축을 민중과 민족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사료로서 『삼국사기』의 봉건성과 사대성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비판에 입각하여 신라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 마저 극복하고 부정론을 심화시킴으로써 역사인식의 전환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신채호의 부정적인 인식논리는 삼국시대에서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의 상황변화만을 인정하는 양국시대론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인식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통사에서나마 '삼국시대와 남북국' 또는 '남북조'를 표제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심지어 신라보다 발해를 앞세우는 발해 및 후기 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북한학계는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이 갖는 한계성은 신라가 당나라를 동맹자로 여기고 연합함으로써 야기된 역사적 과오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반면에 신라가 삼국의 전체를 통일 하려던 동기와 희망만큼은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60년대에는 발해사가 민족사의 차원에서 올바르게 자리 매김 될 수 있었으나, 신라의 국토남부 통합이 갖는 역사적 부당성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아직 미흡하였다. 그러나 이 과제는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신라와 발해를 병렬적으로 파악하는 60년대의 인식구도는 77년판『조선통사』상권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1962년판에서 독립된 단위의 장이었던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발해의 성립'이 제 4장 '8∼9세기 봉건관계의 발전'속의 한 절로 격하되었음이 외견상 눈에 띄는 차이점 이다. 다시말하면 북한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기본논리의 하나는 대내적인 계급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인 민족문제이다. 이 두 조건의 모순관계에서 우리나라와 그 인민의 발전이 역사의 올바른 도정이라면, 그와 반대의 경우인 봉건통치배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타난 역사현상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에 신라의 봉건통치배가 당나라의 세력을 끌여 들여 같은 겨레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은 반민족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봉건 통치배의 반역사성도 역시 통렬하게 비판될 수밖에 없었다.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신라의 역사를 재해석한 북한 역사학계에서의 인식변화는 1979년에 출간된『조선전사』4권에 총화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를 전기신라로 규정하고, 여기에 제6장 '당나라 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이란 표제의 장을 설정함으로써 역사의 주체인 인민을 비로소 전면에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인식내용을 지양시켰다. 즉 이시기의 북한 역사학계는 신라가 인민대중의 반 침략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는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반침략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국이 세워진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구도의 설정은 신라의 국토 남부 통합과 발해의 성립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종래의 인식방법에서 탈피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전기신라에서 후기신라로의 전환과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국의 창건을 별개의 사실로 분리함으로써 두 사실의 사이에 개재할 수 있는 내적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부정은 물론, 국토 남부통합의 의미조차 희석시키는 반면에 발해국 창건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역사해석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조선전사』5권은 '발해 및 후기신라사'로 구성함으로써 종래의 서술방법과는 달리 발해를 신라보다 먼저 서술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는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인식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는 역사인식으로 여겨진다.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봉건통치배들의 수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인민대중이 결국 봉기하게 된다는 논리를 견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다수 참여한 반란·민란을 예외 없이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천민·노비·농민군의 활동상을 최대한 자세히 다루면서 반봉건적 계급투쟁임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평양에 두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3·1운동이 평양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전 시기의 역사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를 고구려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평양성 건설과 천도를 중시해 "평양이 세계적인 도시이며, 평양성 건설이 고구려가 강대국가이며 경제 문화가 발전된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 되는 발해라든지, 오늘날의 개성과 평양을 2都체제로 운영했던 고려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당시 고구려·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삼국을 과연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점이다. '반민족적'이라는 용어를 당시의 신라에 적용 하려면, 우선 '민족적'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같은 민족' 혹은 '동족'이라는 개념을 가졌다고는 보이질 않는다. 물론 삼국은 혈통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 하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짙은 동족의식, 민족의식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구속력이 전혀 없는 다소 막연한 느낌에 불과 했다. 삼국은 수백년 동안 100여 회가 훨씬 넘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 작전을 펼쳤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삼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생존'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려는 동물적 본능이 정치·군사논리를 지배하고, 국가의 모든 정책을 좌우했을 것이다. 서기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장군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그리고 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게 한 것은 바로 그 같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때 신라인에게 백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원수국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백년 동안 끊임없는 싸움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였다. 더욱이 우리의 삼국은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하나였던 나라가 나뉘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과정이다. 이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리 만무하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민족의식이라는 오늘날의 잣대를 신라인 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공정치 못한 일이다. 아니, 달리 생각해보면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역사상에 민족이라는 개념, 동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둘째, 신라가 만주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앗겼으므로 통일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서이다. 사실적으로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되었던 땅의 상당 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의 영토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당시의 상황을 홀시 한 채 현재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한 결과라 할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먼저 당시의 영토의식, 영토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신라의 만주 지역 병합은 지금 우리의 소망일지 모른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신라를 도와 신라 영토 내에서 장기간 군사활동을 벌였으며, 또한 신라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장수왕때 에는 신라의 수도에 고구려 군사가 주둔할 정도였다고『일본서기』「웅략기」는 전한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의 국가와 영토개념이 지금 우리의 생각 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에게 만주지역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신라의 관심은 오로지 국가보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신라로서도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이라고 하는 중국 최대의 제국과 국운을 걸고 정면 대결해야 하는 일 이었다.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신라였다. 그런 신라에게 만주 지역 병합은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신라의 통일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당신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를 의미하였다. 그런데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닌 왕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이 죽고, 왕실이 몰락 했다면, 그것은 곧 나라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중국 한나라의 왕실과 성이 다른 왕망이 즉위해 신을 세웠다가 다시 왕족인 광무제가 한을 재건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후한이라 하여 전한과 구별하였다. 삼국시대 체제·세력·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었던 왕조는 위나라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단지 한나라 왕족의 일파인 유비가 세운 나라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촉한을 정통왕조로 여겨왔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의 국가개념의 핵심은 왕실에 있었다. 그런데 신라는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건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하였다. 그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출처]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작성자 몬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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