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에 기록된 고조선말기(원조선, 이조 아님)의 군대

2016. 3. 3. 19:55우리 역사 바로알기



       중국서에 기록된 고조선말기(원조선,이조아님)의 군대| …‥‥o(㉦)o ‥역사  ─…[古조선]㉪♬…─

『단군 왕검』 |  2006.12.22. 21:51


 

 

남북러 학술회의 발표논문집의 북한쪽 력사 역사연구소

 

   이 내용은 원조선(고조선?)의 군사에 대한 기록을 모아 본 것이다.

조선의 기록이 다 없어지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없는지라, 결국  중국측 사서와 유물로 추론하는 수준의 것임을 참고 바랍니다.

일단, 고조선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본다는 전제 하에- 계급사회의 유지를 위한 강한 군사력이 담보되어야 한다-라는 세계사적 보편사례에 입각해 고조선의 군사력이 체계적이고 상비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암튼 고조선에는 군사를 맡은 관료로서 '웅가'가 있는데- (응가라는 단어의 어원) 이는 군사력의 전문화가 일찍이 이루어져 있었다는 걸 뜻하고... 위만조선 시기에는 웅가의 관직명이 기록명에 보이지 않고 통칭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육군의 무장이라고 한다면 역시- 그 유명한 비파형 단검 혹은 세형동검. 그리고 활, 방패, 창 등으로 무장한 경보병이 주력이었겠시다.
후한서 권85 열전 예조에 보면 고조선의 중장보병들이 길이 5m짜리 장창을 들고 싸웠다고 한다.

또, 기병을 볼 것 같으면- 고조선과 한의 전쟁시기에 강화담판을 위해 우거왕이 태자로 하여금 한나라에 말 5000필을 넘겨주려 했다는 점- (사기 조선렬전) 합리적으로 추론하면 이 몇 배수의 기병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조선 시기의 무덤들에서 각종 수레부속과 마구류가 발굴됨을 볼 때, 귀족 기병전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수군은 한나라의 수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추측된다.
준왕의 위만의 정변을 피해 마한으로 내려갈 때, 수천명의 부하들과 함께 뱃길로 갔다는 사실은 이 시기 수천명의 군사를 비상시에 바로 운반할 수 있는 배들이 상비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BC322년 경에 연나라 역왕의 고조선 침공계획 때 고조선의 무력시위와 외교공세에 의해 침공계획을 백지화한 사실 등은 기자조선의 군사력과 전반적 국력이 상당한 수준에 달해있었음을 보여준다. - 이 시기 연나라는 수십만의 보병과 전차 600승, 기병 6000명이라는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상비무력은 시기마다 일정한 차이가 있으나 기자조선 말기나 위만조선시기에 대략 10만명의 병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병제사-라는 수상한 북한책의 주장)

위만조선 말기로 갈 수록 군의 규모는 계속 커져서 BC109~108년의 대한전쟁 때 전투에 직접 동원된 병력만 10만명에 달하므로 전군의 병력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조선의 무기-하면 역시 대표적으로 다들 비파형 단검을 떠올린다.

비파형 단검은 북방 유목민족의 단검인 '오르도스식 단검'이나 황하유역의 '동주식 단검'과는 형태 및 제작과정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다.

오르도스식 단검은 검몸과 검자루를 함께 주조해서 만드는데 검날은 곧고 검자루 끝은 초기에 짐승 머리 모양과 방울모양 장식이 유행하다가 후에는 촉각식으로 되고 마지막에는 고리자루 형태가 된다.
동주식 단검은 검몸과 검자루를 함께 붙여서 만든다는 점에서는 오르도스식 단검과 같으나 검몸이 일반적으로 좀 길고 릉형의 검코가 있으며 자루에는 2~3줄의 돋친 띠가 돌아간 것이 많고, 모두 작은 원판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비파형 단검은 저것들과는 달리 검몸,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를 따로따로 만들어서 조립하였으며 검날은 독특한 코카콜라 병 실루엣 같은 곡선을 이루고 있다. 검몸의 한가운데에 세로 등대가 있어서 비파형 단검과 오르도스식 및 동주식 단검은 뚜렷한 차이를 갖는다.

저 비파형 단검 이후에는 세형동검이 등장하게 되는데 (시간적 선후관계는 비교적 명확하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날의 모양이 차이가 날 뿐, 검몸과 검자루 및 검자루 맞추개를 따로 만들어서 조립하게 되어있는 형식은 완전히 똑같다.

  그리고 세형동검에서 보이는 날 양쪽의 독특한 에임과 등대의 생김세는 비파형 단검의 형태상 특징과 공통점이 많아. 즉 세형동검의 날에 있는 에임과 돌기의 흔적은 비파형 단검의 날에 있는 오무라든 부분과 돌기의 형식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비파형 단검에서는 오무라든 아래부분이 다시 둥글게 되어 있는데 세형동검도 에임 아래부분이 약간 둥글게 되어 있어서 비파형 단검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세형동검이 비파형 단검의 변화 발전형태-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그리고 위만조선을 대표하는 무기 장검. 이 장검도 역시 검날의 길이와 재질에서 차이가 있을 뿐 검몸,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를 조립하여 만든다는 형식은 비파형 단검, 세형동검과 완전히 같다.
이러한 형태적 일치성은 비파형 창끝과 세형동창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활은- 뿌리나래 활촉등이 발견되었고, 창은 청동 과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만조선 때는 중국의 전국시대와 초한 전쟁 때의 무기들이 그대로 대거 사용되어 동시대 중국의 병장기들과 차이가 없었음이다. ... 가지창, 장검, 장도, 쇠뇌 등등..



그리고 두둥... 드디어 BC109년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한무제는 위만조선군의 요동군 동부도위 기습사건과 섭하의 살인 도주극을 계기로 BC109년에 고조선 침공을 개시한다.
BC109년 가을 한무제는 루선장군 양복으로 하여금 5만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에서 발해만을 건너 뱃길로 공격하게 하고 좌장군 순체는 요동지방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공격케 한다.
이에 대처하여 전쟁 1단계에서 고조선군은 왕검성에 기본 방어군을 배치하고 적의 양면공격을 막아냄으로써 한나라 군대의 수륙양진 기도를 분쇄한다.

   고조선 군이 패수에 의지하여 방어선을 구축했으니- 사기에서 '우거가 군사를 일으켜 험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였다' 함이 이를 뜻한다.
한나라군의 패수도하가 실패함으로서 한나라의 선봉장 중 한명인 다가 군법에 의해 참수되었다.

그리고 고조선군이 아예 패수를 건너 패수서군이 패수를 등지고 배수진으로 한나라에 맞서 싸웠는데- '좌장군이 패수서군을 공격하였으나 격파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왕검성의 방어는 기본적으로 외응내합 작전이었으니, 성에서 지키고 성 밖에서 기병과 보병의 외응하여 적을 쌈싸먹는 작전이다.
결국 한나라 수군7000명이 궤멸당하고 수군 장수 양복이 산속으로 도망쳐 10여일간 숨어있게 된다.

이렇게 한나라의 침공 1단계가 실패로 돌아가고, 한나라의 외교관들이 강화협상을 제의하는데- 이때 고조선 측에서는 한나라 침공군을 국경 밖으로 철군시키는 것을 제 1목표로 삼았다. 이에 태자가 만명의 군사와 5000필의 말, 군량을 가지고 한나라 장군들과 담판하러 적의 진영으로 접근해 갔는데, 태자가 끌고간 기병세력의 말 5000필은 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한나라에 선사할 공물이었으나 회담이 결렬될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무력응대로 들어가기 위한 무력이었다.
한나라 측에서도 이를 눈치채고 담판하러 들어오는 태자와 그 휘화 병력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는데, 태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강화회담은 열리기도 전에 결렬되버렸다.  태자는 끌고왔던 기병세력을 그대로 이끌고 돌아가버렸고 한나라측 강화담판 책임자인 위산은 회담 결렬의 책임을 떠안고 한무제에게 처형당했다.

강화담판 결렬 이후 한의 좌장군 순체 부대는 대릉하 상류지역으로 빙 돌아 올라가 고조선군의 패수상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남진하여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패수 방어선 유지야말로 고조선군의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인데 순체는 이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순체의 이 기동으로 인해 전쟁은 한나라의 승리로 가는 흐름을 타게 된다.

루선장군 양복의 부대도 재편성되어 왕검성 남쪽을 포위하였다.

이 전쟁 3단계에 접어들어 포위된 왕검성은 알력관계에 있던 적의 내분을 이용코자 좌장군 순체의 부대는 쌩까고 루선장군 양복과만 강화교섭을 벌였다. 이로 인해 적의 수륙 협동작전이 크게 지연된다.

   그리고 드디어 한무제가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해 루선장군 양복을 구속해 버리고 좌장군 순체가 군을 총지휘하여 왕검성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된다.
다들 아시다시피 고조선 지도부 고위층에서 한나라에 포섭된 자들이 있어서 결국 왕검성이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