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 - 에고가 작동하는 원리

2016. 3. 16. 14:23잡주머니



       톨레 - 에고가 작동하는 원리 (1)| NOW-에크하르트 톨레

가네샤 | 조회 52 |추천 0 | 2010.01.24. 22:36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 목소리-무의식중에 강박적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생각의 흐름,

그리고 그것에 따라오는 감정들-와 너무도 완벽하게 동일시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한,

그 생각하는 자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 에고가 지배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그것을 에고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생각마다-모든 기억과 해석, 의견, 관점, 반응, 감정마다-'나'(에고)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의식이다.

물론 당신의 생각,

당신 마음의 내용물들은 과거에 의해 정해져 있다.

어린 시절의 성장 배경, 문화, 가정환경 등이 그것이다.

마음의 중심부는 당신과 가장 강하게 동일시된

반복적이고 고집 센 특정한 생각들, 감정들, 반응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덩어리가 바로 에고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신이 '나'라고 말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에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에고는 생각과 감정,

당신이 '나와 나의 이야기'라고 동일시하는 한 묶음의 기억들,

부지불식간에 연출하는 습관적인 모습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국적, 종교, 인종, 사회적인 지위,

정치적인 추종같은 집단적으로 동일시되어 있는 것도 그것을 이루는 한 축이다.

에고는 또한 소유물을 포함해 개인적으로 동일시된 것뿐 아니라

여러가지 견해, 외모, 오랫동안 지속된 분노 등과 동일시된 것도 포함하고 있다.

또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거나 못하다거나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거나 하는

자신에 대한 관념도 담고 있다.

 

 

 


 에고의 내용물은 사람마다 많이 다르지만,

모든 에고마다 동일한 구조가 작용한다.

다시 말해, 에고는 단지 표면에서만 다를 뿐이다.

깊이 들어가면 모두가 동일하다.

어떤 방식으로 그들은 같은가? 에고는 자기 동일시와 분리, 이 두 가지를 먹고 산다.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마음이 만들어 낸 자아를 통해서만 살아간다면,

존재에 대한 정의는 그 기초가 불안정해진다.

 생각과 감정은 성질상 오래가지 않으며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는

자신을 보호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생존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나'라는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는

무엇보다 '상대방'이라는 반대되는 생각이 필요하다.

'나'라는 개념은 '남'이라는 개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내가

그들을 나의 적으로 여길 때 상대방은 가장 강력한 남이 된다.

에고의 이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의 한쪽 끝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고 불평을 하는 자기중심적인 충동이 있다.

예수는 그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가?"

그 행동 양식의 다른 쪽 끝에는 개인 간의 물리적인 폭력과 국가 간의 전쟁이 있다.

성경에서 예수의 질문은 대답이 없는 채로 남아 있지만, 당연히 그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할 때,

내 자신이 더 크고 우월한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평은 에고가

자신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잘 쓰는 전략중 하나다.

불평은 어떤 것이든 마음이 만들어 내는 작은 이야기로, 당신은 그것을 완전히 믿는다.

큰 소리로 불평하든 생각 속에서만 하든 아무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할 대상이 그다지 많지 않은 어떤 에고들은

혼자서 불평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살아나간다.

그런 에고들에 붙들려 있을 때는 특히 타인에 대한 불평이 습관적인 것이 되고

또한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얼굴에 대고 하든, 또는 흔히 하듯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든,

심지어 생각 속에서만 하든 타인에 대해 마음속으로

늘 부정적인 분류표를 갖다 붙이는 것이 에고의 행동 양식이다.

 

 

 

욕설은 그런 분류표의 가장 잔인한 형태이며,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이기고자 하는 에고의 욕구이다.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소리 지르고 고함을 치고 있으며,

그것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서 물리적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화는 불평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마음속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행위와 함께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것은 에고에게 더 강한 에너지를 준다.

화는 기분이 나쁘고,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감정에 상처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탐욕, 그들의 부정직함, 진실성 부족, 그들이 현재 행동하는 것,

그들이 과거에 행한 것, 그들이 말한 것, 그들이 하지 않은 것,

그들이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 화를 낸다.

에고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는 대신,

당신은 그것을 그들의 존재 자체로 여겨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당신 안의 무의식,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당신이 상대방 안에서 발견해 내는 그 '잘못'이 실제로는 그곳에 있지도 않은 경우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 탓이며,

적을 만들어 자신의 옳음과 우월함을 주장하도록 조건 지어진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경우는 그 잘못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잘못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들은 다 제외시킴으로써 당신은 그것을 확대시킨다.

 

 

 

또한 당신이 반응하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당신은 자기 자신 안에서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에고에 반응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당신 자신 안의 에고를 뛰어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뿐 아니라,

인간 공동의 에고를 해체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만,

그것이 인간 공동으로 가진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만,

당신은 그것에 대해 무반응 상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만,

마치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양 반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에고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온전한 정신이란 조건 지어진 상태와는 반대로 조건 지어져 있지 않은 의식이다.

때로는 깊은 무의식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질적인 단계를 밟아야만 할 때도 있다.

이것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가장 잘 보호하는 길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갖는 일이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의 무의식을 개인적인 문제로 분류한다면 그 누군가는 적이 되며,

이것이 곧 에고이다. 무반응은 허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무반응의 다른 말은 용서이다. 용서 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당신은 에고를 꿰뚫고 모든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온전한 정신을 그 사람의 본질로 여긴다.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中, 에크하르트 톨레
p.7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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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 - 에고가 작동하는 원리 (2)| NOW-에크하르트 톨레

가네샤 | 조회 26 |추천 0 | 2010.01.24. 22:37



에고는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화내기를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 할 것을 상황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늘 다음과 같은 식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해. 난 이곳에 있는 걸 원치 않아.

난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난 공정하지 않게 대접 받고 있어."

그리고 에고의 가장 큰 적은 지금 이 순간,

즉 삶 그 자체다.

 

 


 누군가에게

실수와 부족한 점을 알려주어 바로잡으려는 것을 불평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 불평을 자제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행동을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만일 당신이 사실 그 자체만 말한다면,

당신의 수프가 식었기 때문에 따뜻하게 데울 필요가 있다고 웨이터에게 말하는 것은 에고가 아니다.

사실 그 자체는 언제나 중립이다.

"어떻게 나한테 다 식어빠진 수프를 갖다 줄 수 있지?" 이것은 불평이다.

차가운 수프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했다고 느끼길 좋아하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잘못되었다고 만들기를 즐기는 '나'가 거기에 있다.

그때의 불평은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고에 봉사해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에고는 계속 불평할 수 있도록 바꿔 주는 걸 원치 않을 때도 분명히 있다.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하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붙잡을 수 있는가,

즉 알아차릴 수 있는가를 보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관찰해 보라.

그것은 에고의 목소리이며,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 목소리를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또한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그 목소리가 아니며,

그것을 자각하는 존재임을.

사실 당신은 그 목소리를 자각하는 자각 그 자체이다.

배경에는 자각이 있고, 앞쪽에는 목소리가 있다.

이런 방법으로 에고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신 안의 에고를 자각하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며, 단지 정해진 오래된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에고는 자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자각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오래된 마음의 방식이나 생각의 습관은 여전히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당분간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배후에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인간의 무의식의 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자각할 때마다 그것은 약해진다.


 화가

불평과 함께 자주 따라오는 감정인 반면에

그것은 심한 분노와 같은 더 강한 감정이나 또 다른 감정적인 혼란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더 격렬한 에너지로 충전된다.

이때 불평은 반발로 바뀐다.

반발은 에고가 자신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세상에는 자신이 반박할,

기분 나빠하고 화낼 상황을 언제나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정말 무례한 일이야." "난 정말 화가 나."

그들은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데 중독이 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하나의 마약과 같다.

이것 또는 저것에 맞서는 반발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강하게 만든다.
 오래 지속된 화를 불만이라고 부른다.

마음속에 불만을 갖고 다니는 것은 계속해서 '맞서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만은 많은 사람들의 에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집단적인 불만은 국가나 종족의 마음속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폭력의 악순환에 계속 기름을 붓는다.

 

(중략)



 당신이 계속해서 불만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

아직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적'이 당신 삶에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감정뿐 아니라 생각 차원 둘 다에서 그 불만을 자각하라.

그것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생각들을 자각하고,

그 생각들에 신체가 보이는 반응인 감정을 알아차리라.

불만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하지 말라.

내려놓고 용서하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 감정이

가짜 자아를 더 강하게 하고 유지시키기 위한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음을 볼 때 용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보는 것이 곧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인간 마음속에 있는

에고 중심의 구조 중 하나를 벗겨 내는 일에 대한 것이다.
 과거는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을 막지 못한다.

오직 과거에 대한 당신의 불평과 불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만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생각과 감정들이 담긴 가방이다.

 


 트집 잡기와 반발도 그렇지만

불평 역시 타인과의 경계선과 분리감을 강화시킨다.

이 분리감에 에고의 생존이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에고를 강하게 만든다.

에고에게 우월감을 주는 것이 그것이다.

우월감 위에서 에고는 크게 성장한다.

 

 

 

교통 혼잡에 대해, 정치인들에 대해,

탐욕스러운 부유층에 대해, 게으른 실업자들에 대해,

또는 직장 동료나 헤어진 배우자에 대해 당신이 늘어놓는 불평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우월감을 주는가는 금방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지 모른다.

여기 그 이유가 있다.

불평을 할 때,

당신은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나 상황은 틀리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우월감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옳은 것보다 에고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은 없다.

자신이 옳다는 것은 마음의 관점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각, 하나의 의견, 하나의 판단, 하나의 이야기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다른 누군가는 틀릴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에고는 자신이 옳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됨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해, 당신은 더 강한 존재감을 갖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뿐 아니라 상황도 불평과 반발을 통해 잘못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이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해."를 의미한다.

 

 

 

자신이 옳다는 것은,

심판 받아 마땅하고 무엇인가 부족한 상대방이나 상황에 비해

자신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갖다 놓는다.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바로 그 우월감이며,

그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더 크게 만든다.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中, 에크하르트 톨레
p.7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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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 - 에고가 작동하는 원리 (3)| NOW-에크하르트 톨레

가네샤 | 조회 29 |추천 0 | 2010.01.24. 22:42


 

 

어떤 모습을 취하고 나타나든,

에고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충동은 생각 속의 자신, 그 환영의 자아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 환영의 자아는 생각이 지배권을 쥐고서 순수 존재,

'근원', 신과 연결되는 단순하고 심오한 기쁨을

희미하게 가려 버릴 때 나타난다.

 

 

에고가 나타내는 행위가 무엇이든,

그 속에 숨은 동기는 언제나 같다.

남들보다 돋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지배권을 가지려는 욕구,

더 많은 힘을 갖고 더 많은 관심을 끌려는 욕구이다.

그리고 물론 남들과의 분리감을 느끼려는 욕구,

즉 반대편의 적을 만들려는 욕구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과 상황으로부터 언제나

무엇인가를 원한다.

언제나 숨은 목표가 있고, 언제나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결핍감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며,

그것에 성공할 때조차도 결코 오래 만족하지 않는다.

종종 에고는 그 목적에 실패한다.

그리하여 대개의 경우 '내가 원하는 것'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간격은 혼란과 괴로움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

 

 

에고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들을 지배하는

밑바탕의 감정은 두려움이다.

하찮은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자기 존재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에고의 행위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 두려움을 사람들과의 만남,

새로운 소유물, 또는 이런저런 승리들로

 일시적으로 덮어 버리는 것뿐이다.

환영은 결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

자기 존재의 진리만이,

그 깨달음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왜 두려워하는가?

왜냐하면 에고는 자신을 형상과 동일시할 때 나타나는데,

깊은 곳에서 에고는 어떤 형상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두가 덧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자신감 있어 보여도

에고 주위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견고한 물질이지만

일단 모든 구조물(형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순간 당신 안에 평화가 일어난다.

 

 

모든 형상의 무상함에 대한 깨달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 안의 형상 없는 차원에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초월해 있다.

예수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자기 자신 안에서 관찰할 수 있는

쉽게 지나쳐 버리는 에고의 많은 모습들이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자신 안의 에고를 자각하는 순간,

그 자각이 바로 에고를 넘어선 자신의 순수 존재이고,

더 깊은 '나'라는 것을.

 

 

가짜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진짜의 나타남이다.
 여기 한 가지 예가 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소식을 말하려 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알아? 아직 모르지? 내가 말해 줄게."

이때 당신이 깨어 있다면,

즉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한다면,

그 소식을 나누기 직전 자신 안에 있는 순간적인

만족감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나쁜 소식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 만족감은 잠깐 동안 에고의 눈에는 당신이

상대방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 짧은 순간, 당신은 상대방보다

 '더 많이' 안다.

당신이 느끼는 그 만족감이 에고이며,

그것은 상대방과 비교해 자신의

존재감이 더 커졌기 때문에 오는 만족감이다.

 

 

설령 상대방이 대통령이든 교황이든

그 순간만큼은 당신이 우월감을 느낀다.

 당신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는 이 이유 때문에

잡담에 중독된다.

여기에 덧붙여 잡담과 수다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과 판단을 동반하며,

따라서 그 속에 담긴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에고가 커진다.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릴 때마다

도덕적인 우월감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그 우월감은 어디까지나 자기 상상에 불과하다.


 

만일 누군가가 나보다 더 많이 갖고 있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할 수 있다면 에고는 위협을 느낀다. '덜'하다는 느낌이 상대방에 비해

생각 속의 자기 존재감을 작아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에고는 상대방의 소유물을, 지식을, 능력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무시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한다.

 또는 에고는 전략을 바꿔,

상대방과 경쟁하는 대신 그 사람과 연결됨으로써

자신을 더 크게 만들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경우에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친구처럼 언급하는 가장 흔한 현상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자기 존재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그럼으로써 '중요한' 인물과의 연결을 통해 스스로의

 눈에도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에고가 쓰는 전략 중 하나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유명해짐으로써 따라오는

재난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관념화된 이미지에 의해

당신의 순수 존재가 완전히 가려지는 일이다.

당신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과 연결됨으로써

자신들의 에고-생각 속의 자기 자신의 모습-를 키운다.

 

그들 자신은 모를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은 당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자신들의

가짜 자아를 부풀리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 아니면 그들이 갖고 있는 당신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마음속 이미지를 통해

그들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실물보다 과장된, 세상 사람들의 관념화된 이미지를 통해.
 명성이 가져다주는 터무니없는 과대평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에고의 정신이상 증세가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유명한 사람들은 집단이 만든 그 허구의 이미지,

사람들과 언론이 그들에 대해 창조해 낸 이미지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실제로 평범한 인간 존재들보다

월하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자신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서

점점 더 불행해지며,

점점 더 그들의 계속되는 인기에 의존하게 된다.

잔뜩 부풀려진 자아 이미지에 계속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들은 진실한 관계를 가질 능력을 상실한다.
 

이 지구 행성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운명을 타고났으며, 거의 초인이라 칭송 받았던 아인슈타인은

집단이 그에 대해 창조해 낸 이미지와 자신을

결코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는 겸허하고, 에고 없이 지냈다.

사실 그는 "사람들이 나의 성취와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과

실제의 나와 나의 능력 사이에 있는 괴상한 모순"

이야기하곤 했다.
 

유명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이유가 그것이다.

진실한 관계는 가짜 이미지를 만들거나

자신을 부풀리려는 에고에 지배되지 않는 관계다.

진실한 관계에는 상대방을 향해 열려 있는 주의력이 있으며, 그 깨어 있는 주의력은 상대방을 향해 외부로 흘러간다.

그곳에 어떤 결핍감도 없다.

그 깨어 있는 주의력이 바로 현존이다.

 진실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것은 필요조건이다.

 

에고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원한다.

 

아니면 상대방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고

믿어지면 철저한 무관심 상태가 된다.

그것은 당신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에고가 지배하는 인간관계의

세 가지 상태는 이것이다.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의 좌절

(분노, 적개심, 비난, 불평),

 

그리고 무관심이다.

 

中, 에크하르트 톨레  p.97~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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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 - 에고가 작동하는 원리 (4)| NOW-에크하르트 톨레

가네샤 | 조회 31 |추천 0 | 2010.01.24. 22:45


 

   물질적인 이득이든,

힘이나 우월감이나 특별한 대접이든,

어떤 종류의 만족감이든,

또는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에고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할 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대개 몇 가지 모습을 연출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연출하는 모습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 모습이 그들 자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모습은 알아차리기 힘들고,

또 어떤 모습은 그것을 연기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명백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뚜렷하다.

어떤 모습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을 품고 있다.

주목을 받을 때 에고는 커진다.

주목은 결국 심리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모든 힘의 근원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을 외부에서 찾는다.

 

 

에고가 추구하는 것은 형상을 초월한 깨어 있음이 아니다.

형상을 초월한 깨어 있음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이다.

에고가 추구하는 것은 인정과 칭찬과 찬사 같은

형상 속에서 주목받는 것이다.

또는 단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고

그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에고의 목적이다.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수줍음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기를 원하고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하는 양면적인 에고를 지녔을 뿐이다.

두려움의 이유는 사람들의 주목이 불인정이나 비난의

형태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그것은 그의 존재감을 키워 주기 보다 축소시켜 버릴 것이다. 따라서 수줍어하는 사람의 경우는

주목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주목받으려는 욕구보다 더 크다.

 

 

부끄러움은 종종 자신에 대한 눈에 띄게 부정적인 자아개념, 자신에게 무엇인가 많이 부족하다는 믿음과 함께한다.

그것이 눈에 띄게 긍정적이든(나는 최고다)

또는 부정적이든(나는 형편없다)

생각 속에서 가지고 있는 자아개념

-나 자신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보는 것-

바로 에고다.

 

 

모든 긍정적인 자아개념 뒤에는

 충분히 좋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다.

모든 부정적인 자아개념 뒤에는 최고가 되고

 남들보다 더 나아지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에고의 자신감,

그리고 계속해서 우월한 존재로 남아 있으려는

욕구 뒤에는 열등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있다.

 

 

이와는 거꾸로 수줍어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에고는

우월해지려는 강한 욕망을 감추고 있다.

많은 이들은 접촉하는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자신 안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누군가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것이 바로 당신 안의 에고라는 사실이다.



 어떤 에고는 칭찬이나 찬사를 얻지 못하면

다른 형태의 주목에 착수하고,

그것을 끌어내기 위한 모습을 연출한다.

긍정적인 주목을 얻을 수 없으면,

그들은 대신 부정적인 주목이라도 얻으려 할지 모른다.

이를테면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자극함으로써

그렇게 할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아이들은 주목을 끌기 위해 말썽을 피운다.

활동적인 고통체에 의해 에고가 매우 강해질 때면,

즉 과거의 감정적인 고통이 더 많은 고통을 통해

 새롭게 되살아나기 원할 때면,

에고는 부정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 특히 두드러진다.

어떤 에고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나쁜 평판과 비난을 통해

주목을 받으려고 한다.

"제발 내가 존재한다고,

내가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줘."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러한 병적인 에고들은 단지 정상적으로 보이는

 에고들의 좀더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에고가 가장 흔히 연출하는 모습이 희생자의 모습이다.

이 경우에 추구하는 주목의 형태는

'나의' 문제, '나와 나의 이야기'

에 대한 타인들의 동정과 연민 또는 관심이다.

불평하고 상처입고 몹시 화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하나의 희생자로 보는 것은

에고의 여러 행동 양식 중 하나다.

물론, 일단 스스로에게 희생자의 모습을 부여한

 하나의 이야기와 동일시되면,

나는 당연히 그것이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심리치료사가 알고 있듯이

에고는 자신의 '문제들'에 종지부가 찍히는 걸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들 존재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도 나의 슬픈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나 자신에게 거듭거듭 말할 것이고,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이나 타인들이나

 운명 또는 신에 의해 불공정하게 취급당한 사람을

자신이라고 정의 내릴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자아 이미지를 명확하게 해주고,

 나를 누군가로 만들어 준다.

이것이 에고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난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말할 때면 나는 그들을 축하해 준다.

그러면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나는 그들에게 한번 살펴보라고 권한다.

정체성의 혼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모른다."는 혼란이 아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난 알아야 한다

." 또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난 알 필요가 있다."가

혼란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만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일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 존재감을 주기 위해 관념적으로

자신에 대한 정의를 찾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자기 존재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하나의 '생각'을 찾는 일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만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을 때, 정체성 혼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진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

당신은 실제로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가 된다.

그것은 생각으로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보다

진정한 자기 자신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제한하는 일이다.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中, 에크하르트 톨레   p.1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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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 + Book 2013.10.02 17: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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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연금술사 | 201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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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부터 365일 매일매일 읽는 명상 서적으로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고 있는데 경험하지 못한 생각들을 이해하려니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순간순간 느껴지는 깨달음이 이 책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두 책에서 말하는 부분이 공통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여태 읽어온 영적 도서들에서 종종 봐왔던 옮긴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이 책의 번역을 위해 앞서 번역했던 책을 절판하고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재번역해서 출간되었다는 소식도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남다르게 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영적 지도자로 잘 알려진 에크하르트 톨레의 <a new earth>를 번역한 이 책은, 기존에 읽었던 영적 서적들과 같은 맥락의 개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고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감정의 미묘함을 에고와 무의식, 동일화라는 개념으로 쉽게 풀어준다. 처음에 접한 시크릿과 같은 끌어당김의 법칙도 같은 맥락에 있지만 사실 그 개념은 말로서 이해가 되면서도 실제로 행동할 때 느껴지는 모순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번 책은 인간의 감정과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왜 우리가 감정의 함정에 빠지는지를 알려주고 추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을 사용해 풀어주는 점에서 받아들이기엔 좋다. 하지만 그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잡힐듯한 지금에서는 도를 깨우치고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절실히 느끼게 되고 그래서 인생이라는 수련의 장을 살아감에 있어 우리가 이겨내고 바라봐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깨어남의 핵심적인 부분은 깨어 있지 않은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다. (p.33)

 

책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나는 누구인지 깨닫고, 진정한 삶으로 다시 떠오르는것이 책의 주제임을 밝힌다. 사실상 책의 많은 분량을 저자는 이 에고에 대한 알아차림을 위한 구조 방식과 작동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책에서 나오는 에고, 무의식은 이름과 성별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국적과 직업과 소유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오류, 즉 허구의 이미지를 가리킨다. 처음엔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생소할지라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도구처럼 쓰이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매 순간 느끼는 불만과 두려움,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에고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요즘 시대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구조는 소유와 존재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항상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배를 채우는 에고는 소유를 통해 보여주는 자신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비난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험담하며 우월성을 느끼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집중력을 분산시켜 허구의 이미지가 우리 자신인 것처럼 부풀려나간다. ,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생각들에 자신을 동일화시키지 말며 생각과 감정을 놓아버려 지금 이 순간에 깨어나 존재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에고임을 깨닫고 어떤 판단이나 동요 없이 일어나는 감정 자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깨어나 지금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이 책은 말한다. 자신의 의식 상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평화는 소음도 없고, 문제도 어려운 일도 없는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는 그런 것들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p.22)

 

대부분의 인간은 살아있는 실체 속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화된 현실에 머물러 있다. (p.66)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종교에 시초가 된 예수나 붓다의 생각이 담긴 경전의 문구가 어떤 의미인지를 짚어나가며 하나의 생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에 얽매어 있어 다른 이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강한 에고로 둘러 쌓여 있어 하나의 방향으로 향해있는 지표만을 바라보며 그 믿음을 신이라고 착각하는데 큰 흐름에서 보자면 결국 각 나라의 종교가신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성경의 구절을 많이 인용했지만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붓다의 말씀에 한층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너와 나라는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자연과 우주, 신이라 불리는 깨어있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걸 몇몇 서적들에서도 느꼈었지만 이 책은 무엇보다 이해하기 쉬운 말로 여러 감정이 일어나는 상황들을 바라보고 깨닫게 해주지만 새로운 정보와 신념을 덧보태는 것 또한 에고임을 상기시키며 좀 더 지금의 나 자신을 느낄 수 있도록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들고 순간의 감각을 살려준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p.136)

 

어떤 상황에서든 역할과 동일화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 각자가 이곳에서 배워야 할 삶의 예술이고 가장 중요한 배움이다. (p.149)

 

책은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 또한 하나의 에고이자 역할, 동일화이기 때문이다. 종종 유명한 예술가들도 처음엔 기교를 배워 최고가 되지만 결국엔 다시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자 최종 목적지임을 보여준다. 책의 주제는 형상과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얘기한다. 현존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자신에게 불필요한 짐을 보태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 예전에 지나가는 글에서 보았던 천국의 생활은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우리는 항상 지금 이 순간만을 살 수 있다. 희망찬 미래도 기대 가득한 내일도 모두 오늘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서 여전히 희망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갈망한다면 미래 또한 오늘과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내 감정과 생각을 다스려 현재에 살아야 하는 이유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행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득도한 몇몇의 선구자들이 수준만큼 깊고 명확하다. 결국 내가 깨닫기 전까지는 그 말을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이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말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던 이번 책을 통해 생각과 나 자신이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놓여나 감각을 되살리는 시간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에 돈이든 인정받는 일이든 사랑이든 부족함이라는 사고방식이 포함되면 언제나 결핍을 경험한다. 이미 있는 자기 삶의 좋은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결핍만 눈에 띈다. 이미 있는 자기 삶의 좋은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풍요의 기본이다. 세상이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인색하게 세상에 주지 않는 것이다.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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