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진(白亨珍·84·옥천면 송산리) / 해남신문 기사

2016. 3. 18. 10:59잡주머니



      

20. 백형진(白亨珍·84·옥천면 송산리)

2014년 03월 17일(월) 13:37 [해남신문]

 

ⓒ 해남신문


ⓒ 해남신문


ⓒ 해남신문


ⓒ 해남신문


늘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해 준 아내덕에 건강하게 살아왔다

1931년 3월 10일 강진군 도암면 봉황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봉황리는 해남에 속했었지만 나중에는 강진으로 편입됐다. 본관은 수원이다. 아버지 백주인 씨와 어머니 전덕진 씨 사이에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다들 어려웠던 삶을 살았다. 우리집도 대가족이다 보니 나중에는 자기 살길을 위해 분가했다. 본디 송산이 집이었지만 아버지가 봉황리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쭉 살다 27살이 되던 해 송산리에 분가하고 정착하게 됐다.

제일 큰 형은 작고했고 둘째형은 송산에서 같이 살고 있다. 나머지 형제들도 제각각 정착해 살고 있고 먼저 간 동생들도 있다. 아들만 7형제였으나 형제간의 우애는 돈독했다.

당시 학교는 옥천국민학교를 다녔다. 한학을 가르치던 아버지 때문에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당시 기억으로는 국민학교 내내 일본어만 썼다. 한글은 배우지도 못하게 했을뿐더러 창씨개명까지 강요했던 시기다.

광복때는 특별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6.25가 발발한 다음해인 1951년 5월 징집영장이 나왔다. 결혼한지 4개월밖에 안된 나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옥천예비군 중대에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여수로 이동했고 다시 제주1훈련소에 입소했다. 훈련도중 직립병이라는 병을 얻어 생사를 헤맸다. 지금으로 보면 장염과 비슷해 보이지만 심하게 앓아 고생했다. 그래서 동기들보다 늦게 군생활을 시작했다. 훈련을 마치고 부산으로 옮긴후 다시 광주 포병학교에 들어갔다. 12월의 북풍한설이 힘들게 했다.

1952년 1월 5일 강원도 고성 간성지구 99포병대에 배치받았다. 6.25가 끝나고도 근무를 더했다. 5년 6개월간 복무했으며 당시 이등상사로 제대했다.

2000년 가족사진

결혼은 1951년 2월 27일 일가 아주머니의 소개로 한 살 연하인 임은임(83)을 만나 결혼했다. 계곡면 여수리가 본가인 집사람은 반송리댁으로 불렸다. 장인어른은 임현진 씨이고 장모는 김수기 씨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었다. 나를 위해 정한수를 떠놓고 군대 가 있는 동안 매일 기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부상도 없이 군대에서 제대했고 지금의 가정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지금 치매로 고생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니 아내의 기도가 나를 돌봤다는 생각이 더 든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아내를 돌봐야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결혼 4개월만에 군대를 간 터라 첫 자식이 늦은 편이다. 그래서 군대에서 제대하고 1957년에 첫 아들 관선을 얻었다. 그 뒤로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더 얻어 2남 4녀다. 큰아들은 관선(58)이다. 둘째는 딸 경란(55)이고 셋째도 딸 금숙(53)이다.

넷째가 아들 희선(51)이며 다섯째는 순일(48), 여섯째는 경미(45)다. 큰아들은 큰 해운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서울에 살고 있다. 둘째는 결혼해 캐나다로 이민가서 살고 있다. 셋째는 화산면 사람과 결혼해 화산에서 살고 있다. 가깝게 살다보니 사위가 자식처럼 잘해준다. 넷째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다섯째는 경기도 고양에서 살고 있다. 여섯째도 결혼해 부산에 살고 있다.

손자는 둘째가 막둥이로 얻은 경철(14)이가 있다. 그리고 큰아들에게는 녹담, 재현, 경원 등 3명의 손녀가 있고 둘째에게는 경철이 위로 가은이와 효정이가 있다.

27살 때 송산으로 정착할 무렵 논 7마지기로 시작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들들은 대학까지 보냈지만 딸들은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쳤다. 당시 7마지기에서 나오는 쌀이 부족해 늘 곤궁했지만 통일벼가 공급되면서 먹고 사는 것이 나아졌다. 이후 13마지기로 늘어났고 집도 갖게 됐다. 3년전 화재로 집이 불타 새로 지었다.

아버지는 백수를 누리시고 1995년에 작고하셨고, 어머니는 1986년도에 돌아가셨다. 백수를 누린 아버지를 위해 직접 쓰셨던 한시집도 만들었고, 자녀들이 보내준 편지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한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늘 기록하는 것이 일이고 기쁨이었다.

부인과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지난해 3월 건강진단을 통해 위암진단을 받아 수술했다. 기자가 취재하는 날이 딱 일년된 날이다. 당시 70kg이었던 몸무게는 55kg로 줄었다. 아마도 위를 절반 넘게 잘라낸 후유증 같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로는 3살때 심하게 아팠다고 한다. 약을 먹이고 정성껏 간호해 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80년 가까이 건강하게 산 것 같다.

캐나다에 있는 큰딸 때문에 캐나다 여행도 다녀왔다. 그리고 유림 신미생계원들과 중국과 일본으로도 여행을 다녀왔다. 다른 자식들도 금강산과 제주도를 보내줘 여행도 자주 다녔다.

우리 집의 가훈은 '상경하애, 정직성실, 자립정신'이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갖춰야할 기본적인 덕목일 것이다. 요즘은 위암수술 후 농사는 못 짓고 있다. 농지는 임대주고, 집 앞 텃밭을 일구며 문중일과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남향교 전교를 지냈고 옥천 만의총 유적보적회 회장도 맡고 있다.

아버지 99세 백수연

석정주, 육형주기자 
“”
- Copyrights ⓒ해남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www.bjy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board_data=aWR4JTNEODY1MTYl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