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잠재적 위기를 조성했다. 별다른 공도 없이 존엄의 자리를 차지한 갱시제 유현에게는 그것을 위협으로 여겼다. 용맹하기는 했지만 지모가 없었던 신시와 평림병의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수와 함께 기병한 이철(李轍)도 돌아섰다. 유수는 일찍부터 이러한 위기를 깨달았지만, 유연은 자기가 세운 공을 믿고 대의를 망각했다. 결국 유연은 유현에게 피살되었다. 부음을 들은 유수는 즉시 기병하여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자기의 처지는 남에게 얹혀서 살아가는 꼴이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머리가 날아갈 것이다. 유연을 살해한 사람들은 구실을 찾으면 화근을 제거할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청산이 남아 있는 한 땔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굴욕을 참아야 언젠가는 떨쳐 일어날 수 있다. 분노를 누르고 적을 안심시켜야 한다. 그는 즉시 완성으로 달려가 유현에게 사죄했다. 유수가 군사를 일으키면 그것을 빌미로 유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유수는 유현의 성격상 특징을 바람막이로 이용했다. 과연 유현은 스스로 찾아와 사죄하는 유수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연의 일은 그대와 무관하다.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다.”
유수의 도회지술이 성공했다. 유수는 조문객을 맞이할 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구구절절 자기의 죄만 늘어놓았다. 장례식에서는 상복도 입지 않았으며, 식사를 할 때나 이야기를 나눌 때도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적의 경계심을 마비시키기 위해 시치미를 뚝 떼고 바보인 척했다. 그들은 결국 방심했다. 민망한 생각이 들었던 유현은 그를 무신후로 봉하고, 파로대장군으로 임명했다. AD 23년 10월, 유수는 파로대장군행대사마사라는 직책으로 부절을 들고 하북으로 갔다. 유수는 우리에서 풀려나온 맹호처럼 군과 현을 장악하며 정치적 업적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억울하게 투옥된 죄수들을 풀어주고, 왕망의 가혹한 조치를 폐기했다. 한의 제도를 회복하자 민심이 그에게로 돌아섰다. 또 할거하던 세력을 소멸시키면서 자기의 역량을 더욱 발전시켰다. 깃털이 무성하게 자라자, 그는 유현의 명령을 거절했다. 갱시제 정권에서 분리하여 하북을 중심으로 자기의 세력을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다. 마침내 AD 25년, 유수는 황제가 되어 낙양을 수도로 정하고 역사상 동한 정권을 세운 개국황제가 되었다. 유수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지약우(大智若愚)’로 상정지심(常情之心)을 숨기고 비굴하게 행동하며 사지에서 탈출하여 권토중래하는 신화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