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필묵 정신성과 물질성의 두 구조 / 김병종

2016. 3. 18. 14:17美學 이야기



       지필묵 정신성과....... 김병종 교수의 글| 論論

이광수 | 조회 83 |추천 0 | 2002.06.01. 12:13


지필묵 정신성과 물질성의 두 구조

글 : 김병종 교수

지필묵연이라 함은 종이, 붓, 먹, 벼루를 일컫는 것으로 이 네 가지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서로 떨어져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선비들은 금구슬이 앞에 있을지라도 흙처럼 여기는 청렴함을 자랑으로 삼지만 문방사우를 탐내는 욕심만큼은 '선비의 벽(癖, 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병증)'으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이들 문방사우는 서로의 벗일 뿐 아니라 선비에게도 벗이 되어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내내 옆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공부를 통해 귀결(歸結)되는 그들의 글정신을 나타내어 알리게도 하였다.
文房四友는 선비정신의 상징이었다. 이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 등 동양문화 혹은 한자문화권의 바탕을 형성케한 매개체 역할도 해왔다.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는 書家의 필수적인 용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역이었다. 특히 고려이후 과거시험이 선비의 등용문이었음을 감안하면 文房四友는 선비의 뜻을 밝혀주는 필수용구로 立身揚名의 도구였던 셈이다.
여기서 잠깐 지필묵에대하여 알아보면...
종이
'紙千年 絹五百' 종이의 수명은 천년이요 비단은 오백년이라는 말이다. 다라니경문이 현존하는 것을 보면 종이의 생명은 천년이 넘는 셈이다. 이런 종이의 긴 생명이 書畵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해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이의 기원은 약 4천년 전 이집트 나일강변에 무성하게 자랐던 파피루스(papyrus)라는 수초를 가늘게 쪼게 물에 불려서 가지런하게 펴고 돌로 눌로 말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의 後漢때 채륜(蔡倫)이 삼(大麻) 등 식물섬유를 원료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채륜의 종이 발명 연대는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태조왕때이다.
종이는 중국보다 우리나라가 먼저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상황적인 증거만 있지 결정적인 자료는 없는 형편이다. 상황적 증거는 기원전 37년 출범한 고구려가 건국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史書를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또한 낙랑의 고분에서도 닥(楮)종이가 나와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붓은 선비들의 필수용구였다. 고사에 따르면 秦(진)나라 사람 몽념이 맨처음 양털과 토끼털로 붓을 만들었다고 한다. 명나라때의 考槃余事(고반여사)에 보면 '조선에 狼尾筆(낭미필)이 좋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붓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신라때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 흙으로 빚은 벼루와 도자기로 만든 벼루가 출토되어 붓의 역사도 이미 그때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옛부터 먹의 빛은 천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먹의 긴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또 秋史가 말하기를 文房四友 가운데 첫째는 먹이요, 둘째는 붓이라고 했다. 먹의 중요함을 이름이다. 인류가 물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이를 입증하는 유적들이 현존하고 있다. 선사인들은 뼈나 나무에 칼로 형상을 새기고 그 형상이 잘 보이도록 검은색을 칠했던 것이다. 이 검은칠이 먹이며, 이를 원시묵이라고 이른다. 원시묵으로 쓴 글자의 흔적은 기원전 14~13세기 중국의 은하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먹이 나온 것은 중국의 후한시대 (서기 25~220년)로, 扶風 終南山등의 소나무 먹을 많이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시대의 고분에서 먹가루가 발견되었으며 고구려때의 먹글씨(墨書)로 된 고서가 있다. 고구려의 製墨術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고구려의 제묵 제지술을 배운 일본의 기록(日本書記)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서기 610년에 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구려의 먹은 일본만이 아니라 당나라에도 수출되었다. 중국 元나라말기 도종의(陶宗儀)가 쓴 철경록(輟耕錄)에는 고구려의 먹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먹은 신라에서도 생산되었다. 원시묵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 또는 자체 생산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의 제묵술도 고구려에서 전수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라의 명묵으로 楊家 武家의 송연묵이 꼽혔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먹의 역사는 길며 명품도 많이 생산하여 중국과 일본에 그 이름을 떨쳤다. 중국의 문헌인 高麗圖經(고려도경)에는 고려孟州의 송연묵을 명품으로 꼽고 있다. 맹주는 평안도의 孟山.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도 이곳이 먹의 주요생산지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필묵의 역사와 질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았고 이제부터는 지필묵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정신적 물질적 혜택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지필묵의 힘과 정신

첫째, 지-필-수-묵으로 이루어지는 문인화, 특히 산수화는 세상에 대한 어떤 진술로서의 그림이거나 자각적 주체로서의 화가가 세상의 무엇을 대상화하여 재현하는, 그런 재현주의적 그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연에 자신의 넋을 가탁(假託)하고 그곳에 소요(逍遙)하려는 어떤 바람에 대한 회화적 등가물이었다. 그러므로 문인의 산수 감상에서 시각적 리얼리티는 산수양식이 완성되는 송대 이후에는 중시되지 않았고, 그림의 리얼리티는 오히려 화가의 입의(立意)를 중심으로 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림은 하나의 시각적 대상물로서 객관적으로 인증되고 작품으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수신(修身)의 통로이자 문(門)이었던것다. 그러므로 시선의 주체와 시각적 대상 사이에는 어떠한 물질적 위계나 정신적 거리도 들어서지 못하였다. 산수화는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자연, 스스로 그러한, 자유로이 변화하는 생성의 과정 그 자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흠모의 자취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자연과의 지속적 교감을 통하여 육신과 넋을 정화하는, 형이상학적 귀의처였고. 그리하여 필획은 일단 자연을 묘사하는 재현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서예가 그러하듯, 화가의 심회(心懷)를 예민하게 드러내는 추상적 격률(格律)을 가졌던 것이다.

둘째로는 평원(平遠)·고원(高遠)·심원(深遠)이라는 삼원법이나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이 가진 특성을 말할 수 있다. 불합리한, 한자리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공간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도록 구성하는 방법인 이것은 관찰자가 어느 고정된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을 재현하는, 시각-공간 중심적인 데카르트식 일시점 원근법주의와는 전혀 이질적인 재현 노선이며 회화적 이념이다. 일시점 원근법적 재현이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이성적 파악과 지배를 재현하면서 곧 일정한 의미론적 신화로 이어지는 반면, 산수는 시선과 보기의 문제, 즉 인식의 공간적 차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계속 미끄러지고 움직이는 시선의 ‘운동’ 자체와, 공간을 스치고 파묻혔다가 다시 흘러가는, 공간과 시간에 동시에 관여하면서'드나드는' 육신의 수행을 동반하는 시간적 차원의 그림인 것이다.

셋째, 이와 더불어 그림-그리기-감상하기의 호흡. 서구 회화의 경우에는, 벽으로부터 탄생하여 내내 벽을 동경하면서, 벽이라는 건축적 구조 내에서의 그리기와 보기로서 실천되고, 이내 창(window)의 정치학과 형이상학을 구축하였다. 화가는 벽-캔버스에 대하여 1:1로 대립한 채, 큰 화폭을 좌우전후상하로 제 몸을 움직여가며 그리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마치 하나의‘연극적 퍼포먼스'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림이기 이전에 장엄한 하나의 드라마인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상의 호흡으로부터 얼마간 형이상학적 거리(재현 대상과 재현 주체 사이, 또한 그림과 감상자 사이에 가로놓이는 너/나, 주체/대상 사이의 존재론적 분리)를 둔 채 주체의 낭만주의적 신화를 투사하는, 인위(人爲) 곧 ‘작(作)’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옛 문인들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고 사람을 맞고 하는 매우 일상적인 호흡의 장(書案이나 방바닥 같은)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또 거기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감상하고 하였다. 그림은‘호흡’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일단 예술(의 호흡)과 일상(의 호흡)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림이라는 것이 일상 호흡과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적 거리’를 두지 않아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모호했고, 그렇게 서로를 넘나들면서 서로를 무화(無化)시키고, 그렇게 네거티브한 음(陰)적 작용을 통하여 오히려 상대를 양(陽)적으로 발양(發揚)시키는, 가역(可逆)과 교호(交互)의 생성론적 시스템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작과 감상 모두 한몸이 운신할 수 있는 작은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며, 특히 감상하는 경우 화면에 단 한번의 수행으로 드러나는 필획의 자취를 꼼꼼하게 더듬어 가면서, 획 하나하나의 심사(心思)를 추체험하는 것은 필획 하나하나가 모두 최초의 유일한 동작이면서 그것이 최종적인 유일한 자취로 남는 수묵화의 매혹이 빛을 발한다 할 수 있다. '한 호흡'으로 화면에 생성된 필획들은 맺히는가 하면 풀어지고, 흐물거리는가 하면 섬뜩한 뼈가 들어서 있으며, 끊어지는가 하면 어느새 이어져가고, 삐치는가 하면 이내 걸음을 돌려 다른 길을 재촉하고, 섬약한 듯하나 이미 강건한 기세로 흐르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음악적 운율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특정한 형국에 얽매이지 않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는 바람이나 물의 생리(生理)를 그렇게 동경하였던 것이 아닐까? 감상자는 그러한 수묵화를 통하여, 자연과 그 내면적 형상에 가탁하여 붓끝에 실은, 그린 이의 정서와 감수성, 태도들을 필획 하나하나에서 두루 짐작하면서, 그 아득한 추상의 경지를 제 넋과 육신으로 교접(交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감상자는 화가의 시간적 수행의 흔적에서 화두를 얻어 저 또한 자연의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기운을 새삼 감득(感得)하여 제 흉중(胸中)에 아찔한 시정(詩情)을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작이나 감상이나 모두 ‘허(虛)’에 대한 ‘위(爲)’로서는 가하되, 짐짓‘작(作)'이 아니라‘술(述)'의 심미안을 지녔던 것이라 생각된다.

넷째로 여백에 관하여 말해본다면... 여백은 필획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서성거리며 필획을 상대화함으로써 필획이 온전한 실체로 고정되는 것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필획은 여백을 통하여 생성되며, 여백은 필획의 운동에 힘입어 제 육신을 얻을 수 있다. 공백을 미완성적인 것으로 두려워하는 서구 회화와 달리, 필획과 여백은 상호 보족하는 인연을 가지며 서로의 생성을 도우면서도 제 온전한 존재론적‘이름'을 갖지 않는다. 둘은 서로 대치하는 것들이 아니라 서로의 작용을 나누어 가지는 동사이며 '형용사·부사'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는 물리적으로는 그림이 그려지는 바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하늘과 대비되는‘땅'으로서,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그 모든 생명이 일고 지는 최초의 생성의 마당인 셈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두루마리(橫卷)와 족자(縱軸)라는 표구 형식. 이것은 서구식 액자처럼 회화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동시에 벽과의 경계로서 회화/비회화 공간을 물질적으로 규정하는 틀이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벽에 박아 놓고는 거리를 두고 보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말아두었다 펴보았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두루마리의 경우, 감상자는 왼쪽으로 서서히 펴가면서 그림의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펴가게 됩니다.
이러한 형식은 이시동도법과 같은, 화면 내에서의 시공간적 혼돈과 흐름·미끄러짐을 더욱 활성화시킴으로써 감상자는 마치 바람이나 새처럼 그림 속을 오르락내리락, 혹은 수평으로 넌지시 건네보다가, 이내 그윽한 골짝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간혹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다가, 개울을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도 귀기울이다가, 바위턱에 한참을 의지하거나 온 골짝을 울리는 폭포소리에 망연자실하다가, 돌아서 오던 길을 되짚어보다가, 그러다 가슴에 솟구치는 뭉클한 시정(詩情)을 그 자리에서 토로하기도 하였다. 육신과 더불어 운신할 수 있는 두루마리나 축·화첩 같은 형식이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부동(浮動)하는 넋의 경개(景槪)를 그리워하던 문인화가 보여준 너무나 재미있는 회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시·서·화(詩書畵)가 한몸이라는 것. 시-서-화. 시이면서 서이고 시이면서 화이고 서이면서 시이고 서이면서 화이고 화이면서 시이고 화이면서 서인, 야릇한 것. 조선 회화의 경우, 화제(畵題)까지 곁들여 충실히 낙관한 것은 (조선 중 후기부터이지만), 문인화 본산이었던 북송대 이후 이 생각은 문인화의 가장 전형적인 특성이 되었다. 소리와 글씨와 그림, 문학과 서예와 미술이 상생하는 이 희한한 예술적 장, 일종의 공감각적 혹은 통각적(通覺的) 장은 사실상 동아시아 예술의 독특한 미학을 이루었다. 게다가 그림이 화가의 그림만으로 아주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제발(題跋)이나 감상기· 감상인(鑑賞印)을 쓰거나 찍을 수 있으며, 어떨 때에는 합작하기도 하였다(가끔 옛 그림들을 보고있노라면 여러명의 낙관이라던지 글들이 한 그림에 어우러져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림 제작과 감상에서 주객은 온전히 구별되지 않았고, 그림은 둘 사이의 참여와 연속과 교감의 관계로서 미완의 상태를 지속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계회도(契會圖) 같은 그림도 새삼스럽게 깊이 음미할 만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봅니다.

위에 언급한 특성들은 모두 지금의 작업에, 지필묵뿐만 아니라 오일페인팅· 비디오· 사진· 설치 등 다른 매체나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필묵을 고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통 회화의 경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미망(迷妄)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음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인화의 미학, 이를테면 서예적 운필의 생명력이라든지, 여백의 미학, 웅숭 깊은 포용력을 지닌 한지와 더불어 먹의 농담이 리드미컬하게 변화하며 자아내는 음악적·추상적인 운율들은 그 자체로서 회화로 자족할 수 있기보다는 어떤 회화적 가능성이나 조형적 계기라 생각한다. 그보가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새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지필묵-수묵화가 위진남북조시대 현학(玄學)의 후덕한 은덕을 받고 탄생하였다 한들, 수묵이 그다지도 절대적인 가치를 본질적으로 지닌 매체인 것일까?
"得魚忘筌, 得兎忘蹄, 得意忘象”(고기·토끼·뜻을 얻으려거든 그물·덫·심벌을 버려라) 수묵은 무슨 불변적 진리를 그 자체로서 확보한 존재론적 그릇이고 그것에 담기기만 하면 무엇이든 본질적 가치를 얻어 가지는‘실(實)'이라는 것일까? 나는 수묵은 그저 하나의 '그릇', 어떤 만남이 이루어지고 스러지고 하는, 그저 헛헛한 하나의 '그릇'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수묵은 '허(虛)', 곧 존재의 어떤 가능성일 뿐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뭉뚱그리고, 이제 이 '말'의 정신성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른바 한국화라는 치외법권적 우리(cage)를 뽀얗게 뒤덮고 있는 그 관념적·형이상학적 언술들은 이제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다. 차근차근 관찰하고 짚어보고 씹어보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피상적으로 발설하는 '우리심성'이니 '고유의 아름다움'이니 '근원적 형상성'이니‘고유의식'이니 '한국적 미감'이니‘얼'이니‘자연'이니‘민족적 특수성'이니 '정통성'이니‘주체성'이니‘한국적 전통과 정신'이니 '정신의 귀의(歸依)'니 '독자적인 우리 미술의 뿌리'니‘선비(문인)사상의 수묵정신'이니 하는, 정신없고 근거없는 수사들... 도데체 누가 제기한 의문을 누가 답해야하는지도 모른채 그저 그 누구도 챔임의식 없이 그저 내뱉기에만 급급한 말들 말이다.
전통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척하기에 앞서 우리는 당대 삶들이 가졌던 세상살이 풍경의 속내를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 처절한 실존의 그물코를 도외시한 채 탈속적인 관념적 정향만을 전통·정신 운운하면서 추상화하여 섬긴다는 일은, 제게는 넌센스이다. 결국 문제는 삶의 태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줄도 모르고.
삶의 실상을 제대로 꿰자면‘전통' '정신' 운운할 게 아니라, 우리뿐만 아니라 중·일·서구 할 것 없이 미술사·문화사들을 풍부하게, 입체적으로 질문의 틀을 갖추고서 비교문화론 시각으로, 잡다한 이질들을 교차시켜 가며 통관하는 고약한 노동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물론 그 모든 공부는 결국 방편(方便)일뿐이지만].
한낱 화려한 정보·교양·지식으로 그 내역들을 꿰고 있다 한들, 삶을 더듬고 세상을 겪는 이치로 삼지 못한다면,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와 남을 동시에 포괄하는 안목을 지니고서야 나의 그럴듯한 위상을 잠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세상과 역사를, 그리고 그 좋아하는‘전통’과‘정신'을 그럴싸하게 체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여야 그림과 삶이 서로 팽팽하게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바탕을 슬그머니 마련하여 주는 것이 사실상 교육자들이 바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겪는 안목을 다듬고, 그것을 저마다 제 육신에 밀착시키는 버릇을 갖도록 가르쳐야한다. 형이상학이라도 좋으나, 그것을 세상에 접목시키지 못하는 한, 그저 ‘일반 쓰레기’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나와남의 육신과 넋을, 세상을, 현실을 자극하고 추스르고 질타하고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하는, 근본적으로 어쨌든 ‘어떤 힘’이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야, 지필묵이 지금 우리 삶의 얼개와 맺은 인연의 양상이 어떠한가를 살펴서, 그것들의 위상을 조정해야 한다. 우리나라 동양화과(한국화과)에서 다루는 매체는 근본적으로 지필묵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과거 지식인 화가들에게 지필묵은 근본적으로 쓰기(생각을 밝히기)의 도구였고 그것이 그리기로까지 확장되었던 반면, 지금 우리 삶에서 지필묵은 그리기의 도구라는 점이다. [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서구 회화 역시 캔버스-오일페인팅은 전통적으로 재현의 도구였으나, 지금은 개념적 사고의 도구로 변화하여 그 명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문자가 사실상 지식-권력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차츰 그 문자-쓰기에 대한 심미의식이 급기야 하나의 순수예술로 승화하면서 그것의 심미적 전유의 가능성을 미학으로 체계화한 것이 서예의 이론·형이상학이었고, 나중 위 진 남북조시대에 그것이 그림의 형이상학을 세우는 데 하나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아무튼 과거 지식인들이 쓰고 그리는, 쓰기(서)와 그리기(화)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었던, 야릇한 그 행위는 내용 이전에 이미 매우 독특하고 권위주의적인 정치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성장과정에서 전통문화와 그 가치체계·심미의식을 거의 체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지필묵은 다루기가 퍽 까다로운, 그리기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필묵은 물론 멋과 맛이 있는 매체이지만, 그 멋과 맛을 초심자에게 애초부터 강요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아무 선입견 없이 맘껏 가지고 놀고 주무르고 간혹 내동댕이치고 다시 주워 들여다보고 하면서, 그 그릇을 운용하는 이가 스스로 그 멋과 맛을, 혹은 예전 사람들이 몰랐던 또 새로운 멋과 맛을 눈치채고 터득하게 놓아두는 것이 더 좋지않을까? 예술의 근본적인 차원 가운데 하나는 '놀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배우는 쪽의 욕망·성향·문화적 배경들은 각양각색이다. 더군다나 사회구성체의 변질, 계층적 위계의 붕괴와 새로운 계층구조의 형성, 언어·문자의 사회 정치 문화적 의미의 변질, 쓰기·그리기의 양상과 방법, 체계의 변질 등, 이제 우리의 삶은 퍽 낯선 맥락으로 자리를 바꾼 상황에서[20세기 내내 진행된 이러한 변질들이 생성론적 변화가 되지 못하고 민족사의 타락과 왜곡, 민족의 심미의식과 감수성 등을 왜곡했던 것은 아무래도 일제 식민지 체험과 한국전쟁 이후 서구 문화와의 접변과정에서 피상성과 타율성·종속성에 완전히 몸을 내맡겼던 사실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교류와 대화를 통한 공존이 아니라, 서구화를 주도하던 관료·엘리트들에 의한 자해(自害)와 근친강간이나 다름없었다. 여하튼, 삶의 기반과 속도와 풍경이 참 많이 달라졌다. 그리하여 삶과 생각을 담는 그릇 자체가 다른것이다. 지필묵은(그 형이상학조차 어찌 보면)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그릇을 그대로 쓸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릇에 담길 것은 지금 우리 세상살이와 세상살이에서 교차하는 온갖 사실과 생각인 것이다] 과거 문인화가들에게나 가능했던, 지필묵을 놀려 도달해야 할 지고하고 순수한 어떤 경지를 선험적으로 설정해 놓고 그걸 후학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그 강요 자체가 지극히 '한국적'이고‘현대적'인 풍경이라고 생각된다. 진풍경이아니라할 수 없다. “1백억 달러 수출 1천 달러 소득"같은‘한국적’정치문화가 지금 이 미술계에 다시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필묵은 지식인-서예가-화가들의 이데올로기적 전유물로부터, 이제는 사실상 매우 세속적이고 일상적이고 허허로운 삶의 층위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우리 눈과 가슴과 허파를, 저 넓디넓은 세상을 향하여 열어야 한다. 종내 나의 육신으로 하여금, 지금 내가 선 곳에서, 저 광막한 시공간을 맘껏 호흡하도록 '사생(寫生)’의 참뜻을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게 어떨까?

참고문헌 : 월간미술



cafe.daum.net/mingjiamo/LM7/9   수진기봉타초고(搜盡奇峯打草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