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불교 가르침에 빠지다] 16. 이명기, ‘송하독서도’

2016. 3. 18. 19:03美學 이야기



       [조정육의 그림, 불교 가르침에 빠지다] 16. 이명기, ‘송하독서도’| ******불교미술종합

고집통 | 조회 15 |추천 1 | 2014.04.29. 07:26


 

 

 
16. 이명기, ‘송하독서도’

 

속세 떠났다고 사색도 끝이랴…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불법은 듣는 것만으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천이 필요하다”  화엄경


 

소박한 초옥·솔바람 더불어
글 읽는 선비의 즐거움 담아

신앙의 출발 믿음이지만
정확한 이해 없는 신심은
기복으로 빠질 위험 있어
경전 배워야 흔들림 없어 

 



 

 

이명기, '송하독서도', 종이에 연한 색,

103.8×49.5cm. 삼성리움미술관.































 

 


   봄날은 놀기에 좋은 계절이다. 꽃 피고 새 우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게다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훈훈한 날씨는 봄을 찾아 떠나는 상춘객들에게 최적의 조건이다. 봄날이 어찌 놀기에만 좋은 계절이겠는가. 공부하기에는 더 좋은 계절이다. 요즘 곳곳에서 공부하는 사람 호모 아카데미쿠스 많이 본다. 학교, 도서관, 박물관은 물론이고 기업체, 동호회, 평생학습원 할 것 없이 사방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연령층도 다양하고 공부하는 자세도 적극적이다. 이른 아침이든 늦은 밤이든 자신이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찾아가는 곳이 대세가 됐다. 공부는 단지 학교 다닐 때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사라지고 평생학습의 개념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공부 중의 가장 큰 공부는 역시 책을 읽는 것이다.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18세기 후반)가 그린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는 독서하는 사람의 행복을 노래한 작품이다. 가파른 절벽 아래 지어진 소박한 초옥에서 선비가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고 있다. 선비 한 사람이 들어가 앉으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초옥은 작고 아담하다. 소박하되 허름하지 않은 단아한 집이다. 독서하는 사람에게는 책상 놓을 공간만 있으면 충분한 것을 좁은 방안이 무슨 대수랴. 비좁지만 앞과 옆에 창을 내었으니 고개만 들면 창밖으로 넓은 바깥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섬돌 위에서 동자가 쭈그리고 앉아 화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찻물을 끓이고 있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올 때면 지붕 위로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가 휘파람을 분다. 글 읽는 소리와 찻물 끓는 소리가 솔바람 소리에 섞여 묘한 화음을 이룬다. 아름다운 화음이다.

그림 위에 ‘독서하기 여러 해. 심어 놓은 소나무들 모두 늙어 용 비늘이 생겼네(讀書多年 種松皆作老龍鱗)’라고 적어 놓아 선비의 독서가 하루 이틀 생긴 버릇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비는 오래 전에 심어 놓은 소나무가 고목이 되어 용 비늘이 생길 때까지 책을 읽었으니 독서생활의 유구함이 자못 길다 하겠다. 소나무가 늙는 줄도 모르고 빠져 있을 만큼 즐거운 독서는 어떤 독서일까.

송(宋)대의 시인 나대경(羅大經, 1196~1242)의 ‘산에 사네(山居)’에는 한가한 선비가 읽는 책을 이렇게 나열했다.

  ‘마음 가는대로 주역(周易), 국풍(國風), 좌씨전(左氏傳), 이소(離騷), 사기(史記) 그리고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 몇 편을 읽네(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산골 샘물을 긷고 솔가지 주어와 쓴 차를 끓여 마시며 읽는 책이라는데 의외로 묵직한 고전이다. 철학, 역사, 문학이 고루 섞여 있는 것을 보면 문사철(文史哲)을 중요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삶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 조선 선비들의 생각도 송나라 문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송하독서도’의 주인공이 읽는 책을 어림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선비가 누리는 즐거움의 원천을 찾아 이 책 저 책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독서가 될 것이다. 그렇게 고전은 우리 삶 속에 새로운 뿌리를 내린다. 그의 고민과 우리의 고민이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음이다. 그는 비록 속세를 떠나왔으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산골 초옥이라 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들어갈 수 있으니 오히려 독서에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이명기는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찰방을 지냈는데 아버지 종수(宗秀)와 장인 김응환(金應煥,1742∼1789)이 모두 화원이었다. 그는 초상화를 잘 그려 정조의 명으로 1790년에 김홍도(金弘道,1745~1806)와 함께 수원 용주사(龍珠寺) 후불 탱화 작업에 참여했다. 1791년에는 정조어진 제작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했고 1794년에는 허목(許穆)의 초상을 이모(移模)했는데 1796년에는 다시 김홍도와 함께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그리는 등 김홍도와 인연이 깊었다. 김홍도가 워낙 뛰어난 거장인데다 그의 함께 작업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송하독서도’의 필법과 나무를 그리는 수지법(樹枝法)에는 김홍도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김홍도가 ‘아버지뻘 되는 선배’이고 보면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상당했던 것 같다. 그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장인인 김응환이 김홍도와 같은 연배인 만큼 김홍도를 ‘아버지뻘 되는 선배’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비록 이명기는 김홍도와 같은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열어보이지는 못했으나 ‘송하독서도’에서만큼은 선배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다. 그림 속의 선비를 보는 순간 책을 펼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으니 말이다. 봄날은 간다. 그러니 더워지기 전에 공부하자. 불현 듯 그런 자각이 일어나게 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책은 읽어서 뭐할까. 어떤 쓸모가 있을까.




   선재동자는 합장 공경하며 미륵보살에게 물었다.

“성자시여,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도를 닦아야 합니까?”

미륵보살은 선재동자의 선지식 구하는 구도심을 칭찬하고, 뭇 중생에게 ‘선재를 본받아 도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설한 뒤, 동자에게 말했다.

“기특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중생을 이롭게 하고, 부처님 법을 구하기 위해 최상의 보리심을 내었구나. 그대가 문수보살과 여러 선지식을 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대에게 보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근기가 뛰어나므로 모든 선근을 갖추었고, 선법(善法)을 유지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얻었으며, 여러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염려해주며, 여러 선지식들도 그대를 보살필 것이다. 왜냐하면 보리심은 모든 불법을 성장하게 하는 종자와 같으며, 모든 중생의 밝고 깨끗한 법을 잘 성장시키기 때문에 좋은 밭이고, 모든 세간을 지탱해주는 대지이며, 모든 번뇌의 때를 씻어주는 청정한 물이고, 모든 세간에 있는 장애를 제거해주는 태풍과 같기 때문이다. 이 보리심으로 모든 보살들의 행이 완전해지고, 보리심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다. 보리심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한다.” 

 대승불교의 꽃이라 부르는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축약된 단어다. ‘한없이 크고 바르며 넓고 방대한 부처님의 경전’이라는 뜻이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밝힌 경전인 만큼 보살이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해가는 단계가 순차적으로 담겨 있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위의 내용은 선재동자가 53번째 선지식인 미륵보살을 만나 보살도를 이루는 방법을 묻자 미륵보살이 보리심에 대해 대답한 부분이다. 보리심이야말로 불법의 종자요 밭이요 대지이며 물이고 보살행을 완전하게 해주는 비법이다. 선재동자가 멘토를 찾아 떠난 여행의 끝 무렵에서 듣게 된 대답이다.

그런데 책은 읽어서 뭐할까. 어떤 쓸모가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화엄경’의 앞부분에는 문수보살이 일곱 번째 법수(法首)보살에게 궁금한 사항을 묻는 내용이 나온다

“보살님, 불법을 듣는 것만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습니다. 불법을 들어도 여전히 탐욕을 일으키고, 성내는 마음을 내며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왜 듣는 것만으로 탐진치 삼독이 제거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법수 보살이 대답하였다.

“문수보살님, 다만 듣는 것만으로는 불법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어도 입으로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과 같고, 온갖 약을 알고 있는 훌륭한 의사일지라도 스스로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진리는 절대 듣는 것만으로 공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가난한 사람이 밤낮으로 남의 돈과 보물을 헤아려도 자신에게 한 푼도 없는 것과 같고, 맹인에게 멋있는 그림을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물속에 떠다니면서도 물을 마시지 못해 목말라 죽는 사람처럼, 불법은 듣는 것만으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문수보살과 법수보살의 대화에서도 역시 공부만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고 실천을 해야 한다고 나온다. 실천만 하면 되는데 공부는 해서 뭐하고 책은 읽어서 뭐할까. 경전 읽는 것을 그만 두고 당장에 법당에 달려가서 3,000배를 해야 할까. 갑자기 조급해진다.



   불교 공부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화두참선, 간경, 사경을 비롯해 염불과 절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믿음이다. ‘믿음은 도의 시작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모든 선한 법을 길러내며 일체 의혹을 제거하여 최상의 도를 드러내고, 불도를 열어준다.’ 역시 ‘화엄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앙생활의 첫걸음은 믿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없이 높고 완전하다는 진리를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처음과 끝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해야 한다. 그 어떤 공부도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공부와 이해 없이는 신심이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외쳤던 선사들조차도 경전공부는 기본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로 읽는 것에 머물지 말고 철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 ‘불립문자’다.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의심과 회의를 불러 온다. 이론적인 토대가 마련되지 않는 믿음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비는 기복으로 빠지게 할 염려가 크다. 맹목은 맹목으로 끝날 수 있다. 잠시 동안 복을 빌다 가피를 받지 못하면 시들해지는 믿음을 여여하게 지켜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경전 공부다. 평소에 줄줄 외울 정도로 부처님 경전을 충실히 공부하면 믿음이 잠시 흐릿해졌을 때도 흔들리지 않는다. 강철처럼 튼튼하다. 그래서 책 읽는 것이 먼저고 공부하는 것이 먼저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봄날은 부처님 법을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다.

[1242호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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