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이 소장했던 그림과 안견의 작품으로 보는 조선 -2

2016. 3. 21. 21:27美學 이야기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그림과 안견의 작품으로 보는 조선 -2|조선사 일반 이야기 게시판

격물 | 조회 355 |추천 0 |2011.10.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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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글이 길어져 나누었읍니다.

 

4.또 다른 그림으로 팔준도가 있는데 이것은 풍경화가 아니고 말 그대로 8마리의 말 그림입니다.

   8마리의 말은 그 유래가 2가지 있는데 하나는  주나라의 목왕이 8마리의 말 고사가 있고  또 하나는

이성계가 오랑캐를 평정할 때 이 8마리의 말이 수행했다고 해서 그린 조선유래의 팔준도가 있읍니다.

조선의 조정에서 팔준도 에 관련하여 수많은 글과 그림을 남김니다.

 

먼저 주 목왕에 관한 팔준도입니다. 주 목왕의 8마리 말은 전쟁이야기가 아니고 신선놀음하듯 유람할 때

수행한 8마리 말입니다. 대개 평화로운 그림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이태리인으로 청나라에서 활동한 양세령이라는 자의 팔준도로

기백이 넘치는 화풍이라기 보다는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역시 팔준도로 중국 현대화 입니다.

 


아래 그림은 국내 모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그 작자가 윤덕희라는 분이데 제목이 팔준도입니다.




이 그림은 윤덕희라는 분의 그림으로 공재 윤두서의 아들입니다..

   아마도 17세기 초의 그림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윤덕희라는 분의 이 그림은 다른 글(연행기: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인이 소장한 화첩에 들어있는 그림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청인이 그 그림첩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데 조선의 사신 박지원에게 그 그림들의 설명을 달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박지원이 그 설명을 달아주고 있읍니다. 그림의 가치는 없는 듯이 말하고 있읍니다. . 실제로 이 그림은 모 박물관에 소장된 것인데 화첩을 펼쳐 놓은 것 같읍니다.

--------연행기 중의 열상화보에 나오는 팔준도 --------------------

 


관내정사(關內程史)

 7월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월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백 40리다

가을 7월 24일 경자(庚子)

    (전략)  

이때 소주(蘇州) 사람 호응권(胡應權)이란 자가 화첩(畵帖)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겉장에는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되 먹똥이 거듭 앉아 비눌지고 더할나위 없이 해져서, 한 푼어치도 못 되어 보이건만 호생(胡生)의 거조를 보니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배인 듯 사뭇 조심조심하여 이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여닫는 데도 오직 깍듯이 한다. 정군(鄭君)이 침침한 눈으로 두 손에 이를 움켜 쥐고 책장을 풍우처럼 재빨리 넘기니, 호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다. 정군이 다 보고는 획 집어 던지면서,

겸재(謙齋)현재(玄齋)가 모두 되놈의 호이구먼.”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아니 보아도 잘 알 일이지.” 하고, 호생더러,

“당신은 이걸 어디서 구하셨소.” 하고 물으니, 그는,

“아까 초저녁 때 귀국 김 상공(金相公)이 우리 점포에 오셔서 팔고 갔소. 김 상공은 믿음직한 사람이옵고 또 나와는 정분이 자별하여 친형제나 다름 없습니다. 문은(紋銀 품질이 우수한 은) 3냥 5푼으로 샀으니 만일 장황(裝潢)을 고쳐 놓으면 7냥은 실히 가리다. 다만 그린 이의 관지(款識)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선생께서 이를 일일이 고증해서 적어 주시옵소서.”

하고는, 이내 품 속에서 붉은 주사 한 홀(笏)을 꺼내어 패물로 주며, 화자(畵者)의 소전(小傳)을 간곡히 부탁한다. 주인도 주과를 내어 왔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화 권 중에는 연호(年號)도 없고 이름을 적기도 꺼리며, 시축(詩軸)의 끝에도 흔히들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을 뿐 어느 때 어느 곳 아무 성 어떠한 사람의 솜씨인지 알 길이 없다. 이제 이 책 가운데도 간단한 두 글자씩 된 별호(別號)가 적혀 있기는 하나 분명하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를 분간할 수 없으므로, 정군이 겸재ㆍ현재를 되놈이라 한 것도 괴이한 일은 아니다. 정군은 한어(漢語)가 서투른데다 또 이가 성기어서 달걀 볶음을 매우 좋아하므로, 책문에 들어온 뒤로 늘 하는 한어라고는 다만 ‘초란(炒卵)’뿐인데, 그나마 혹시 말할 때 잘못 비어질까, 듣는 사람이 잘못 들을까 두려워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초란’ 하고 불러 보아서 그 혀끝이 돌아가는가를 잘 가늠하므로, 정(鄭)을 ‘초란공(炒卵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광대놀음에 탈쓴 것을 ‘초란(俏亂)’이라 부르는데, 중국말로 계란볶음이라는 ‘초란’과 발음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곧 가서 한 쟁반을 지져 가지고 왔다.

그러나 행적이 마치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한바탕 웃고 나서 주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값을 치르려 하니, 주인이 도리어 몹시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여기는 음식점이 아니어요.”

하고 자못 노여워하는 기색까지 있기에 나는 곧 대강 그림 옆에 적힌 별호(別號)를 상고하여 그들의 성명을 적어서 사례하였다.

            ================(여기까지가 연행기 이며 이 연행기에 별첨된 기록이 아래의  열상화보입니다)===============

            열상화보(冽上畵譜)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 충암(冲菴 호).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이요, 명(明) 가정(嘉靖)때 사람이다.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김식(金埴).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경윤(李慶胤)은 학림정(鶴林正)이다.

녹죽도(綠竹圖), 탄은(灘隱 호).이정(李霆)의 자는 중섭(仲燮)이요, 석양정(石陽正)이니, 익주군(益州君)의 지자(枝子)이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노안도(蘆雁圖) 이징(李澄)의 자는 자함(子涵)이요, 호는 허주재(虛舟齋)니, 학림정(鶴林正)의 아들이다.

노선결기도(老仙結綦圖), 연담(蓮潭 호). 김명국(金鳴國)이니, 명(明) 천계(天啓) 연간 사람이다.

연강효천도(煙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공재(恭齋 호).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이니, 강희(康熙) 연간 사람이다.

춘산등림도(春山登臨圖), 겸재(謙齋 호).

정선(鄭歚)의 자는 원백(元伯)이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겹돋보기 안경을 끼고 촛불 아래에서 가는 그림을 그려도 털끝만큼도 그릇됨이 없었다.( ---->이당시에도 조선에는 안경이 보편적이였던거 같읍니다.)

산수도(山水圖)네 폭인데, 겸재.

사시도(四時圖) 여덟 폭인데, 겸재.

대은암도(大隱巖圖) 겸재. 이 위의 것은 모두 ‘정선(鄭歚)’ㆍ‘원백(元伯)’이라는 소인(小印)이 있다.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종보(宗甫).조영석(趙榮祏)의 자는 종보요, 호는 관아재(觀我齋)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진재(眞宰 호).김윤겸(金允謙)의 자는 극양(克讓)이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금강도(金剛圖), 현재(玄齋 호).심사정(沈師正)의 자는 이숙(頤叔)이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여덟 폭인데, 현재. ‘심사정사인(沈師正私印)’과 ‘현재(玄齋)’라는 소인이 있다.

심수노옥도(深樹老屋圖), 낙서(駱西).윤덕희(尹德熙)의 자는 경백(敬伯)이니, 공재(恭齋)의 아들이다.

백마도(白馬圖) 군마도(羣馬圖) 팔준도(八駿圖) 춘지세마도(春池洗馬圖) 쇄마도(刷馬圖)

이상은 모두 낙서의 ‘윤덕희사인(尹德熙私印)’과 ‘낙서(駱西)’라는 소인이 있다.

무중수죽도(霧中睡竹圖), 수운(峀雲 호). 유덕장(柳德章). ‘수운사인(峀雲私印)’이 있다.

설죽도(雪竹圖)‘수운(峀雲)’이란 두 글자와 ‘수운(峀雲)’의 인이 있다.

검선도(劒仙圖), 인상(麟祥).이인상(李麟祥)의 자는 원령(元靈)이요, 호는 능호관(凌壺觀)이니, ‘이인상(李麟祥)’의 인이 있다.

송석도(松石圖), 원령.‘인상(麟祥)’이란 인과 ‘기미삼월삼일(己未三月三日)’이란 소지(小識)가 있다.

난죽도(蘭竹圖), 표암(豹菴 호).강세황(姜世晃)의 자는 광지(光之)니, ‘표암광지(豹菴光之)’의 인이 있다.

묵죽도(墨竹圖)위와 같다.

추강만범도(秋江晩泛圖), 연객(烟客). 허필(許佖)의 자는 여정(汝正)이니, ‘연객(烟客)’이라는 소인이 있다

 

         ----> 열상화보라고 하는 그림책이 청인이 부탁한 화집이며 그 그림속에 윤덕희의 펄준도가 있읍니다.

                   화집의 이름이 열상화보인지는 정확하지 않읍니다.   그러나 대개 이

                   열상冽上 이라는 말은 열수冽水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양자방언 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열수는 조선과 요동 사이라고 하고 있읍니다.

                  지금 이 박지원이 지나는 곳은  요동을 지나  산해관을 빠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정확히는 산해관을 지나 연경가는 길목인 고 우북평땅인 영평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마도 지은이는 그래서 열수 지방에서 본 화첩이라는 의미로 열상화보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기록에서는 한강이 열수라고도하고 한강의 입구는 열구 라고 하여 헷갈리게 하는 것

      이 많읍니다만 한강의 입구는 한구 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자는 다릅니다.列水)

                  저는 열수가 이곳 요동지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열수를 가지고도  엄청나게 할 말은 많읍니다 만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 미루겠읍니다.

                   그렇다면 저 박물관에서 소장한 화첩에는 저 그림들이 모두 있던가 해야 할 것이며  한편 어떻게

                   이그림이 청인의 손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 왔을까? ... 아니면 모작이던가?

                  물론 이 기록의 화첩에 있는 팔준도가 박물관에서 소장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읍니마

                   아예 청나라가 조선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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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용글은 주나라 목왕에 대한 팔준도 입니다.

홍재전서 제1권 / 춘저록(春邸錄) 1 ○ 시(詩)

주 목왕(周穆王)의 팔준도(八駿圖)에 제하다

옛날엔 화산에 놓아 맘대로 오고 가게 했는데 / 昔放華山任去來

지금은 채찍에 몰려 또 요대로 가 있구나 / 今焉驅策又瑤臺

아 네 준마의 골격이 때를 잘못 타고나서 / 嗟渠駿骨非時出

부질없이 당년에 목야에서 돌아온 걸 생각하누나 / 謾憶當年牧野回

 

청음집 제13권 / 칠언장편(七言長篇)

사군(使君) 이한(李 )이 소장하고 있는 조자앙(趙子昻)의팔준도(八駿圖)에 제하다

여덟 마리 용 교교해 진정 천리마이거니 / 八龍矯矯眞天駟

목왕께서 그를 타고 삼만 리를 갔었다네 / 穆王騎之三萬里

하늘에서 신마 낸 건 필시 타게 한 것으로 / 天生神物必待駕

또한 그때 그 당시에 조보란 자 있었다네 / 亦有當時造父者

요지에서 춤 끝나고 황죽도 다 말랐으매 / 瑤池舞散黃竹枯

지금 와선 영락해져 그림 속에 들었다네 / 零落秪今歸畵圖

어느 누가 그렸기에 묘한 재주 발휘했나 / 圖畵何人擅竗技

오흥학사 같은 이는 이 세상에 또 없다네 / 吳興學士世無二

깊이깊이 생각하여 조화 솜씨 구사하니 / 沈吟繹思驅造化

비바람은 삽상하고 귀신들은 몰아치네 / 風雨颯爽鬼神咤

하늘과 땅 온갖 만사 천백 번이 변한 뒤에 / 乾坤萬事百變後

어느 누가 이 그림을 영원토록 전할 건가 / 誰遣此圖傳不朽

이후께서 그림 얻어 쌍벽인 양 중히 여겨 / 李侯得之重雙壁

정성 다해 내게 제시 써 달라고 부탁하네 / 慇懃勸我添毫墨

예로부터 좋은 물품 편안함을 열었거니 / 古來殊産啓逸豫

포초에다 악와 신마 한나라 때 노래했네 / 蒲梢渥洼歌漢世

그댄 듣지 못하였나 / 君不聞

무왕께서 목야에서 상나라를 이긴 뒤에 / 武王牧野旣克商

만 마리 말 구름처럼 화산 남쪽 풀어놓고 / 如雲萬匹華山陽

비록 준마 있더라도 수레 끌게 하였단 말 / 雖有駿馬但使服車箱

 

       ----->청음의 지인이 조맹부(조자앙)의 팔준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 그림이 주나라 목왕의

                 8준마 입니다. 조선에서는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그림도 쉽게 얻을수 있었나 봅니다.

                 원나라가 망한지 300년이 넘는시점에서 조선에서 조맹부의 그림이 돌아다니고 있을정도로

                 다작을 한것인지 아니면 조선이 원(고려?)의 땅에 일어나 그러한 것이 흔한것인지는 모르겠읍니다.

                조맹부는 같은 나라 사람이어서 쉽게 구한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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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글은 이성계에 관련된 8준마 입니다. 전쟁과 관련된 용맹하고 힘찬 모습일 것입니다.

세종때 화가 안견을 시켜 8준도를 그리고 신숙주 성삼문 등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에 찬을 올리고 있읍니다. 그 그림은 힘차고 씩씩한 모습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성인이 자리에 계셔 / 聖人在位
삼가고 애쓰심이 / 祗懼勵精
무릇 30년에 / 凡三十年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고 밝으사 / 治敎休明
사방에 염려가 없고 / 四境無虞
조야가 태평했다 / 朝野晏清
이에 수성하기 어려움을 알고 / 於是知守成之不易
안락의 해독을 생각하여 / 念燕安之鴆毒
창업의 어려움을 추모하고 / 追惟刱業之艱難
성조의 크신 공적을 선양할 제 / 敷揚聖祖之義烈
여덟 준마의 미미한 것까지 / 乃至八駿之微
포장하여 높이는 축에 있게 하였다 / 亦在褒崇之列

             (후략 .... )

 

    ---> 팔준도 부에 들어있는 이 위화도 회군(1388)까지 "27년동안 몇백번의 싸움 "을 언급하는데

            1361년부터 1388년까지 입니다. 1388년이 홍무 21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시에서는 무릇 30 재위에 있으면서 평화를 이루었다고 또한 기록하고 있읍니다.

            재위기간은 명태조 주원장의재위기간과 완전 일치합니다.

            실제 주원장은(1368-1398) 30 재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성계의 퇴위연도와 같읍니다.

            30 재위기간이 주원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신숙주는 이성계와 함께한 8준마를 이야기 하기위해 이성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계는 30년간 재위한 성인이며 명태조 고황제라는 주원장의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주원장은 이성계의 행적을 베낀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글에서 시사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별개의 내용으로 준비 하려합니다.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성삼문(成三問)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은 천 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은 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을 면하였고, 금(金) 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덕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宣尼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 신숙주와 성삼문이 지어 올린 팔준도 글 입니다.

           전쟁수행한 8마리의 관한 것이고 특히 성삼문의 글에서 그 말들은 한혈마 라고 명기 하고

           있읍니다. 한혈의 특징이 터럭이 꼬부라진 것이라는데 털이 곱슬한 것이라는 것 같읍니다.

           여기서 말하는 터럭은 어느 부분일까?   아마도 말 갈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혈마는 한나라 무제가 서역 대완에서 구하였다는 명마의 대명사로 쓰이는 천리마입니다.

조선의 이성계는 어떻게 이러한 한혈마 8마리을 구해서 전장을 돌아다녔을까요? 아마도 이 말을 구하기 쉬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였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 한혈마가 지금의 Akhal teke (애칼텍)이라는 종자의 말이라고 합니다.

일설에는 대완이 지금의 페르가나 분지 지역이라고 하고 있읍니다.

천산의 서쪽/ 파미르의 서쪽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명마로 이름이 났으나 세계적으로 희귀종으로 3500 두 정도 있다고 합니다. 그 종자의 원산지는 지금의 투르크 메니스탄이라 합니다. 여러 사연을 거쳐 이 종자가 러시아로 들어갔고 초기에는 코카서스 산맥 북변에서 대규모 생산하다 지금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의 농장에서 길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리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엄격히 국외반출을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The Akhal-Teke is a horse breed from Turkmenistan, where they are a national emblem.[1] They are noted for their speed and for endurance on long marches. These "golden-horses" are adapted to severe climatic conditions and are thought to be one of the oldest surviving horse breeds. There are currently about 3,500 Akhal-Tekes in the world, mostly in Turkmenistan and Russia, although they are also found throughout Europe, Australia and North America.

The breed became popular with the Russians, who established a breeding population at their state stud farms. Many Akhal-Tekes were bred at the Tersk Stud in the northern Caucasus Mountains, and later moved with the head breeder Vladimir Petrovich Shamborant to the Dagestan Studfarm.

특징으로는 빠르고 강인하고 인내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한혈이라는 말 자체가 달릴때 목에서 피와같은 땀을 흘리기 때문이며, 또한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한사람만 따른다고합니다.

 

아쉽게도 그 팔준도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있어 어떠하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힘찬 모습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래 그림들은 팔준도라는 제목으로 대륙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원형의 팔준도를 상상하면서 참고로 퍼왔읍니다.

 



         --------------------팔준도 그림들 모음(현대화)-----------------

 

 



 



 



 


 

 

 




   여기에 나오는 그림은 모두 현대 중국대륙의 화가들이 그린 현대화입니다.

이 그림들을 여기에 굳이 올린 이유는 그 팔준도의 원형이 대륙 어디엔가 남아 있다는 방증으로

올린 것입니다.

특이하게 마지막 그림은 무언가 옛날 고사를 상기하는 그림 같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의 의상이 명나라 내지는 조선의 복장으로 보입니다. 청나라의 변발도 아니고.....

   

    희한하게도 현대 중국대륙에서 이 팔준도는 다른 뜻으로 그 그림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팔 '이라는 숫자와 '말'이라는 말의 어감이 합쳐져서 성공을 가져다 준다는 의미로 그려지고 있읍니다.

중국어를 몰라 어떻게 발음되어 성공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달마도를 가져다 놓고 희망을 갖는 것과 비슷한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팔준도를 조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한혈마 8마리의 씩씩한 기상과 비교하면

어딘지 모르게 희화적입니다. 팔준도가 대륙에 남아 그 용어 까지도 유전되다가 이렇게 와전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조선에서는 이 팔준도를 그린 화가가 상당히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안견이 그렸다는 팔준도는 위의 그림처럼 씩씩하고 힘찬 모습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 어디에선가 발견되는 고래의 팔준도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것일 것입니다.

 

       조선은 대륙에 있었다는 또다른 조그마한 증거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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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그림과 안견의 작품으로 보는 조선 -2

 
문 무 11.10.11. 18:57
<태조>와 <팔준도>에 관한 이야기와 그림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으나, 그 실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은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일차적 의문은 <팔준도>에 관한 그 말들의 생산지입니다. 한혈마라는 것은 이 말의 생산지와 태조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며, 당연히 팔준마는 날아오르는 듯한 기상이 있는 그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들을 타고 다니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고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곳이 조선의 변경지방이었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또한 이태조와 명태조의 재위기간이 똑같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明(명)이란 나라의 정체가 풀리는 하나의 사건일 수 있습니다.
 
 
문 무 11.10.11. 19:03
조선사에 기록된 여러가지 사건들을 세밀하게 관찰, 연구하는 것 역시 조선의 진실된 영역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보존하고 있는 고서적들이 너무 많아 일일히 볼 수 없다는 것이 난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국가적으로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분류, 번역작업을 거친다면 정말 획기적 성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역시 오늘 밤 꿈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님의 선전을 기대합니다. 건강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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