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불교에 빠지다] 25. 작자미상, ‘일월오봉도’ / 신명연, ‘연꽃’ (끝)|

2016. 3. 23. 01:03美學 이야기



       [그림속불교] [조정육의 그림, 불교에 빠지다] 25. 작자미상, ‘일월오봉도’ / 신명연, ‘연꽃’ (끝)| 그림감상(불교미술)

갠지스 | 조회 39 |추천 0 | 2014.02.21. 09:53


[조정육의 그림, 불교에 빠지다] 25. 작자미상, ‘일월오봉도’ / 신명연, ‘연꽃’
육신은 흩어졌으나 가르침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부처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제자가 많아지고 교단이 커지다보니 여러 가지 분열이 일어났다. 부처님이 코삼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한 비구가 계를 범했는데 이것이 파계에 해당되는 지 아닌지에 대해 비구들이 두 파로 나뉘었다. 그들은 서로 다투며 조금도 자신들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부처님은 양쪽 비구들을 찾아가 화합할 것을 타일렀지만 듣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논쟁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 데바닷타의 반역만큼이나 심각한 사태였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며 ‘원한은 원한에 의해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타일렀으나 소용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옳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듣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부처님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길을 떠났다. 분노한 것은 코삼비 신자들이었다. 비구들의 다툼과 분쟁으로 부처님이 코삼비를 떠난 것을 안 신자들은 비구들에 대한 공양과 보시를 그만두어 버렸다. 비구들이 탁발을 나와도 문을 닫아버리고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제서야 비구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소동을 벌인 비구는 잘못을 사과했고 반대파들은 서로를 찾아가 화해를 청했다. 교단의 불화는 해소됐고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계율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자주 발생했다.

비록 교단의 화합을 해치는 무리가 있었지만 불교 교단을 보호하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 훌륭한 제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붓다와 목련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서로 친구였는데 입적할 때까지 불교 교단을 위해 헌신했다. 아무리 훌륭한 수행자라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는 법. 목련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 목련과 함께 출가했던 사리붓다는 친구가 입적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함께 입적하고자 했다. 사리붓다는 부처님께 먼저 입적하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후 고향에 내려 가 친족들에게 최후의 설법을 마친 다음 입적했다. 목련도 고향 친족들에게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사리붓다의 뒤를 따랐다.

두 제자의 입적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탄식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이 세상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현재도, 내가 입적한 뒤에도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 수행에 정진하는 수행승이야말로 내 뜻에 가장 맞는 사람이다.”

부처님이 아프시다는 얘기를 듣고 당황한 아난다에게도 부처님은 똑같은 내용을 말씀하셨다.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부처님도 두 제자가 빠진 자리가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밧지국의 웃카켈라라는 마을에서 설법을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리붓다와 목련이 죽은 이후로 이 집회는 텅 빈 것 같구나.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집회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신명연, ‘연꽃’, 비단에 연한 색, 33.3×20cm, 국립중앙박물관.




진흙 속에서 나왔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애춘(藹春) 신명연(申命衍:1809-1886)이 그린 ‘연꽃’은 보는 사람의 혼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작가는 하얀 꽃잎 끝에 붉은색을 살짝 물들였다. 그 발상이 참신하면서도 감각적이다. 활짝 핀 연꽃을 푸르스름한 연잎 위에 받쳐 놓았다. 그 색감의 대비가 현대 수채화를 보듯 신선하다. 만개한 꽃 아래에는 아직 열리지 않는 꽃봉오리를 배치했다. 오므린 꽃이 가슴을 열면 위에 핀 꽃처럼 절정에 이를 것이다. 두 송이 연꽃 사이에는 기다림의 시간만큼의 떨림과 가슴 조임이 묻어 있다. 그 구도가 절묘하다. 신명연의 붓끝에서 피어난 고운 연꽃은, 진흙에서 피었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구도자의 상징성이 훌륭하게 담겨 있다. 연꽃이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아 군자(君子)의 꽃’이라 칭송했던 이는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1017-1073)다. 신명연의 ‘연꽃’을 보면 주돈이의 주장에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지 않은가.

신명연은 대나무를 잘 그린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의 아들이다. 그는 산수, 사군자, 화조 등 여러 분야에 능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양귀비, 장미, 국화, 모란, 수국, 난초 등 다양한 소재의 화조화를 그린 《산수화훼도첩》은 남계우(南啓宇), 김수철(金秀哲), 전기(田琦), 홍세섭(洪世燮) 등 신감각적인 미감으로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동시대 작가들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연꽃을 그린 화가는 많지만 연꽃의 속성을 신명연처럼 잘 드러낸 작가는 흔치 않다.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신 지 어느 새 45년이 흘렀다. 45년 부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연꽃과 같았다.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진흙탕같은 사바세계를 맨 발로 걸어 다니시며 무명에 쌓인 중생을 제도하느라 보냈다. 그것은 오직 자비로 점철된 삶이었다. 진리를 깨닫기도 쉽지 않지만 깨달은 진리를 실천하며 평생을 바치기는 더욱 어렵다. 쉽지 않은 일을 45년 동안 오롯한 마음으로 실천한 분이 부처님이다. 이제 80세가 된 부처님은 노쇠한 몸에 자주 심한 통증을 느꼈다. 낡아 빠진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몸도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영취산에 모이게 했다.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설법을 하기 위해서다. 설법의 내용은, ‘비구들이 서로 모여 화합하고 계율을 지키며 선배를 존경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불멸의 일곱 가지 법’이었다. 비구들의 승단이 번영하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의 설법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이어졌다. ‘삼학(三學)’에서 ‘학(學)’은 배운다는 뜻이 아니라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계율과 명상과 지혜를 배워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불교는 지식으로만 아는 종교가 아니다. 믿고 공부하고 실천해서 논리를 증명해야 하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종교다. 그 중심에 계정혜가 있다. 계율(戒律)은 생활하는데 필요한 규범이다. 정(定)은 선정 또는 삼매라 부르는 데 마음을 집중시켜 산란하지 않게 하는 생활 태도다. 혜(慧)는 인생 문제의 근본을 깨닫고 해결하는 예지로 계율과 선정이 뒷받침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공덕이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계정혜 삼학에 의해 미혹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병든 몸을 이끌고 바이살리로 향했다. 제자들을 모아놓고 ‘석 달 뒤에 입적할 것’이라 선언했다. 부처님은 입적 후의 제자들을 위해 ‘4대 교법(四大敎法)’에 대해 설하셨다. 앞으로 불교 교단에서 무슨 일을 행할 때 4가지 기준에 의해 비추어 본 다음 결정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설법을 마친 부처님은 금속 세공인 춘다의 과수원에 잠시 머물렀다.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춘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기뻐 이튿날 식사에 초대했다. 춘다의 공양을 받은 부처님은 돌아오는 도중 등에 심한 아픔을 느껴 자리를 깔게 하고 앉았다.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춘다가 걱정됐다. 행여 비구들이 춘다의 공양 때문에 부처님이 탈이 나셨다고 비난할까 봐 아난다를 불렀다.

“아난다야. 춘다가 바친 공양이 여래가 받는 마지막 공양이 되었다. 그것 때문에 춘다가 후회할 필요는 없다. 여래가 처음 도를 이루었을 때 바친 공양과 입적하기 전에 바친 공양은 그 공덕의 크기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공양을 올린 것은 커다란 공덕이지 결코 후회할 일이 아니다.”

춘다의 공양을 받은 다음 날 부처님은 아난다를 데리고 쿠시나가르로 향했다. 도중에 길가의 나무 아래서 웃옷을 네 겹으로 접어 그 위에 앉아 지친 몸을 쉬면서 물을 드셨다. 그 때 풋쿠사라는 말라족의 귀족 한 사람이 지나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감화되어 신자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풋쿠사는 하인 한 사람을 시켜 금실로 짠 천을 두 장 가져오게 해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그 천을 입혀달라고 했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금실로 짠 화려한 천이 부처님 몸의 위엄과 권위에 가려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그 까닭을 물었다.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아난다야. 여래의 피부 빛깔이 유난히 맑고 빛나는 일이 두 번 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열반하는 밤이다. 여래는 오늘 밤 쿠시나가르 말라족의 사라나무 숲에서 열반에 들 것이다. 카쿳타 강으로 가자.”

부처님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카쿳타 강에 이르렀다. 몸소 강물에 들어가 목욕하신 후 근처 암바 숲 속에 들어가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펴게 한 후 그 위에 누웠다. 부처님의 몸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 부처님은 다시 한 번 춘다가 올린 공양의 공덕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처님을 죽게 한 자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춘다를 지켜주고자 한 자비심에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강을 건너 쿠시나가르 말라족의 사라나무 숲 속으로 향했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시켜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했다.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발을 포개어 옆으로 누웠다. 부처님의 열반이 가까워온 것을 안 제자들은 장례 절차에 대해 물었다. 부처님은 여래의 장례는 재가신자들이 치러 줄 것이니 출가수행승은 장례에 상관하지 말고 오직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고 대답하셨다. 부처님의 열반이 임박한 것을 안 아난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리를 떠나 나뭇가지를 붙들고 울었다. 부처님이 아난다를 불렀다.

“아난다야. 너는 오랫동안 여래를 정성껏 섬겨 왔으니 큰 공덕을 쌓았다. 앞으로도 더 한층 정진해 성자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

아난다는 이 궁벽하고 보잘것없는 시골 동네에서 열반에 들지 말고 큰 도시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다. 부처님이 아난다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아난다야. 이곳은 나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이 백성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니라. 여래가 태어난 곳,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곳, 최초로 설법한 곳, 마지막으로 입적한 곳은 아주 중요한 성지가 될 것이다. 먼 미래에 선남선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이 곳을 예배할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오늘 밤 여래가 입적할 거라는 사실을 쿠시나가르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그들 가까이 있으면서 마지막 작별 인사 할 기회마저 주지 않으면 그들이 서운해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수많은 말라족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부처님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러 왔다. 그 때 수바드라라는 늙은 수행자가 부처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그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알고 평생의 의문을 풀기 위해 부처님께 달려와 뵙기를 청했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번거롭게 해드려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그의 간청을 거절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막지 말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수바드라에게 팔정도와 사성제에 대해 설법하셨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눈이 뜨인 수바드라는 그 자리에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출가했다. 그는 부처님의 마지막 직계 제자가 됐다. 부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의문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 앞에 있던 5백 명의 비구들은 아무도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넘치도록 충분히 가르침을 받은 결과였다. 신념에 찬 제자들의 모습을 본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입멸한 뒤 그대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는 스승의 말씀만 남아 있고 스승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여래가 입멸한 후에는 여래가 지금까지 설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마지막 말을 마치신 부처님은 고요히 삼매에 드셨다. 기원전 544년의 일이었다. 이로써 기원전 624년에 탄생해 29살에 출가하고 6년 고행 후 35살에 득도한 후 80세까지 가르침을 주신 전륜성왕의 생애가 문을 닫았다. 이제 새로운 법(法)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작자미상, ‘일월오봉도’, 19세기, 6곡병, 비단에 색, 149.3×325.8.국립고궁박물관.




왕은 보이지 않으나 일월오봉도 속에 현존한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소나무, 폭포와 파도가 그려진 궁궐 그림이다. ‘일월도(日月圖)’,‘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오봉산병(五峯山屛)’‘오봉병(五峯屛)’으로도 불리는데 화려한 채색과 정확한 좌우대칭이 특징이다. ‘일월오봉도’는 왕이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 그 배경으로 그렸다.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덕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경희궁의 숭정전 등 궁궐의 정전(正殿)에는 왕의 어좌가 놓인 당가(唐家:닷집)에 일월오봉도를 설치하여 왕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했다. 왕이 궁궐을 벗어나 행궁이나 사가에 임시로 거처할 때도 일월오봉도는 필수적으로 휴대했다. 왕이 참석하는 연회장이나 왕이 붕어(崩御:돌아가심)하셨을 때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 신위(神位)를 모시는 혼전(魂殿), 그리고 어진을 모시는 진전(眞殿)에도 일월오봉도를 드리워 마치 살아계실 때의 왕을 모시듯 대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월오봉도를 그리면서 그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어좌(御座) 위의 왕은 그리지 않았다. 왕은 워낙 지중(至重)한 분이라 감히 화원의 붓질로 그려서는 안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림 속에 왕은 보이지 않으나 왕은 그림 속에서 여전히 현재형으로 실존한다. 일월오봉도가 왕의 현존을 말해준다.

일월오봉도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왕의 배경으로만 그려지기 때문이다. 일월오봉도가 곧 왕이다. 부처님은 입적하셨지만 여전히 우리들 속에 현재형으로 살아 계신다. 부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부처님이 설하고 제정한 법과 율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계신다. 계정혜 삼학과 불법승이 부처님의 현존을 알려주는 일월오봉도다. 불법승이 곧 부처님이다.(完)



지금까지 ‘그림, 불교에 빠지다(佛)’를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 해에는 ‘그림, 부처님의 가르침에 빠지다(法)’라는 연재로 새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년말연시에 모두 건강하시고 새 해에는 뜻하신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지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법보신문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조정육 합장

(출처: 법보신문)

▲조정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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