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의 文響 - 26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2016. 3. 25. 04:16美學 이야기



       태양을 대신하는 절대왕권의 상징, 숨겨진 고구려 역사 밝혀주다| 자유게시판

날자거북아 | 조회 22 |추천 0 | 2016.03.16. 09:02

                 

태양을 대신하는 절대왕권의 상징, 숨겨진 고구려 역사 밝혀주다

김대환의 文響 - 26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2016년 03월 15일 (화) 18:08:56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ditor@kyosu.net






  
 ▲ 사진①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 
 



   세계 곳곳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대왕국의 금관은 12점에 불과하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금관은 1920년대 레너드 울리경수메르-우르의 왕릉에서 발굴한 금관으로 기원전 2700년경에 제작된 것이고, 아프카니스탄의 사르마트금관 틸리아 테베6호분에서 출토된 금관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금관은 4세기말~5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금관을 포함해 주로 5세기~6세기에 제작된 신라금관이 남아있다. 고구려금관 1점, 신라금관 7점, 가야금관 2점으로 모두 10여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경주의 신라고분 속에 매장됐을 금관까지 생각한다면 세계적인 금관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단발성으로 그친 수메르금관, 아프카니스탄 금관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의 금관은 독자적인 발생과 변천을 이뤄 세계적인 古代金屬工藝의 한 장르를 정립했다.


  
 ▲ 사진② 일제강점기 거간인의 명함과 뒷면의 묵서 
 

   고구려고분은 石室墳으로 도굴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져서 고구려 멸망 이후 근대까지 약 13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훼손돼왔다. 때문에 고구려의 왕릉급 古墳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사례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도굴된 후 간신히 남겨진 遺物마저 구한말~일제강점기의 혼란기에 재차 도굴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제강점기 平安南道 杆城里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진①)의 ‘高句麗火焰文金冠’의 존재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이 금관은 박선희 상명대 교수에 의해 최초로 논문(<백산학보> 제90호, 2011년)에 발표, 소개됐다. 이 논문에는 일제강점기 고미술품 거간꾼인 ‘西原隆(用)成’의 명함 뒷면에 기록된 금관(墨書, 江西郡 普林面 杆城里 金冠) (사진②)과 동반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高句麗 金耳飾 1双(사진③), 金銅遺物(사진④)도 함께 보고돼 있다.


   이 高句麗火焰文金冠의 기본형식은 관테에 두 종류의 불꽃무늬 세움 장식 7개를 세워 붙인 전형적인 삼국시대 금관양식으로 1950년대 평양의 청암리절터에서 출토된 高句麗火焰文金銅冠과 같은 모양이다(사진⑤).

  
 ▲ 사진③ 동반출토 고구려 금귀고리 
 

   금관의 높이는 15.8cm이고 금관 테의 지름은 윗지름이 19cm이며 아래지름이 19.5cm이다. 금관테에는 7옆의 꽃 16과를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고 38개의 달개장식을 달았다. 불꽃무늬의 세움 장식에는 202개의 달개장식을 달아 모두 242개의 달개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 했다. 달개장식은 금관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여서 빛을 여러 방향으로 비치게 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움직임을 표현하게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했다. 금관의 세움 장식인 불꽃무늬는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서기 408년(광개토태왕 18년)에 조성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불꽃무늬 장식과 거의 유사하다. 이 고분벽화의 불꽃무늬는 태양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고대왕국의 태양숭배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내재적인 공통된 신앙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자리 잡았으며, 태양의 불멸사상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공통적인 의식이 작용했다. 고구려 역시 태양의 존재로 영원불멸의 불꽃무늬를 帝王의 금관이나 왕릉의 벽화고분에 벽화문양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태양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물질로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금으로, 절대왕권의 高句麗太王만이 이 금관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④ 동반출토 금동유물 
 



   35년간 문화재를 연구해온 필자는 이 高句麗火焰文金冠을 직접 實見하고 實測했다. 2009년에 국립 공주대에서 실행한 금관의 XRF성분분석도 주관했다. 금관의 달개장식과 金絲의 성분분석 결과 금 78.55%, 은 19.92%, 구리 1.54% 로 순도 19K의 金版으로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사진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5년 최초로 금관의 XRF성분분석(新羅 瑞鳳冢金冠)을 발표한 것보다 6년 빠르다(서봉총금관의 달개장식도 순도 19K였다). 



  
 

▲ 사진⑤ 평양 청암리출토 고구려불꽃무늬금동관




 
 
  
 ▲ 사진⑥ 고구려금관의 달개장식 
 


   이 고구려금관은 金의 성분분석, 세움 장식의 절단기법, 관테와 달개장식의 이음기법, 金絲의 인발기법, 달개장식의 연결방법, 金版에 침착된 유기물과 點線彫技法의 특징 등이 기존 고구려유물의 특성과 동일하며(사진⑦), 함께 출토된 유물로 같이 발표된 금귀고리, 금동마구, 금동못, 금동장신구 등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구려유물과 일치한다.


   이 고구려금관은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가야금관처럼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출토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당시의 墨書가 남아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동안 도굴된 고구려고분에 남아있던 금관 잔편만으로 추청만 해오던 고구려금관의 실체가 1천500여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숨겨진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는 유물이며, 특히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이 高句麗火焰文金冠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넘어서고 우리민족과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 사진⑦ 고구려금관의 세움장식과 달개장식(확대부분) 
 


   광복 후 1946년에 우리의 손으로 경주 壺衧塚 최초로 발굴한 이래로 수많은 발굴이 이뤄져서 그동안 잊혀졌던 선현들의 우수한 문화유산들이 속속 밝혀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혼란기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수탈된 수많은 문화재의 행방은 알려진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또한 이 시기의 유물은 대부분이 出土地未詳이지만 국가문화재(國寶, 寶物)로 지정된 유물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아직도 해외에 흩어져서 행방을 모르는 문화재나 국내의 알려지지 않은 중요문화재는 속히 밝혀내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해야 할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cafe.daum.net/kjcultureteacher/5r3Q/667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 자유게시판
윤상호1 | 조회 112 |추천 0 | 2016.08.24. 06:00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첨부파일 신라금관에 선행한 고구려금관의 발전양상과 금관의 주체(박선희).pdf




고구려(高句麗),  금관둘레 59cm, 높이 15.8cm



  고구려 황금관(黃金冠)이다. 전 세계의 고대왕국(古代王國)에서 제작되어 전해지는 금관은 모두 12점에 불과하다. 이 고구려 금관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금관이 10점으로 신라금관 7점, 가야금관 2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경주의 왕릉급 신라고분속의 금관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금관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사진87 금관의 측면



사진88 금관의 후면


 

   고구려의 왕릉급 고분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달리 돌방형 석실분으로 도굴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져서 고구려 멸망 이후 근대까지 약 1300여년 동안 끊임없이 도굴 훼손되어왔다. 때문에 현재까지 고구려의 왕릉급 고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사례가 한 번도 없으며 여러 번에 걸쳐 도굴된 후 간신히 남아있는 유물이나 과거 혼란기에 도굴되어 전해지는 전세품 등으로 추정하여 고구려인의 문화수준, 생활풍습, 부장풍습 등을 추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구려 유물이 빈약한 상황에서 이 금관의 발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출토되었다는 당시에 기록한 묵서(墨書)와 고구려 금귀고리 1쌍, 고구려 금동유물 수십여 점이 함께 박선희 교수에 의하여 연구 발표되었다.


  이 고구려금관의 기본형식은 관테에 두 종류의 불꽃무늬 세움 장식 7개를 이어 붙인 전형적인 삼국시대 금관양식이다. 모두 242개의 달개장식을 달아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며 금관 테에는 16과의 꽃문양을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다. 이 금관의 세움 장식인 불꽃문양은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서기 408년(광개토태왕18년)에 조성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불꽃장식과 거의 유사하다.


  고대왕국의 태양숭배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내재적인 공통된 신앙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자리잡았으며 태양의 불멸사상과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공통적인 의식이 작용하였다. 고구려 역시 태양의 존재로 영원 불멸의 화염문을 제왕의 금관이나 왕릉급의 벽화고분에 벽화문양으로 사용한 것이다. 태양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물질로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금(金)으로, 절대왕권의 고구려 태왕(太王)만이 이 금관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나 가야의 금관 보다 세움 장식이 훨씬 복잡하여 금판을 오려내는 제작과정도 몇 배 힘들었을 것이다<사진89>. 이 고구려 금관은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가야금관처럼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출토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당시의 묵서명이 남아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동안 거의 도굴된 고구려고분에서 잔편(殘片)으로만 추정하던 고구려금관의 실체를 1500여 년 만에 후손들에게 알려주었고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숨겨진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사진89 두 종류의 불꽃무늬 세움 장식의 앞면과 뒷면



  이 고구려금관은 금의 성분분석, 세움 장식판의 절단기법, 관테와 달개장식의 이음기법, 금사(金絲)의 연결방법, 금판에 침착된 유기물과 점선조기법(點線彫技法)의 특징<사진90> 등이 기존의 금제 고구려유물의 특성과 동일하며 동반출토유물로 같이 발표된 금제귀고리, 금동마구, 금동못, 금동장신구 등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구려 유물과도 일치한다. 특히, 고구려의 중요한 유적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이 고구려금관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넘어서 우리민족과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90 - 금관테의 꽃문양과 세움 장식의 내외 접합형태



사진91 금관의 달개장식



사진92 - 금관의 점선조 기법(點線彫技法)




사진93 -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과 금귀걸이



(김대환, <박물관에선 볼 수 없는 문화재>, 2014. 12. 5., 경인문화사, pp.134-141)


* 우리나라 금관에 대한 폭 넓은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라면서....


   

 
관련






공통점은 불꽃무늬와 새[鳥] … 관식화한 이유 밝혀야 고대문화 원리 풀려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12. 삼국 冠飾의 비교


2013년 10월 21일 (월) 18:05:37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ydk629@kmu.ac.kr

연재순서

1)‘神’의 해석

2~3)‘神’의 순수고유어와 고대 상징의 세계
4)한국 최초의 문양 - 빗살무늬
5) 巴形銅器의 기원과 상징
6) 청동기시대 銅鏡과 銅鈴
7) 비파형 동검
8~9)고대 새 숭배사상의 원류와 한국의 고대문화(Ⅰ) (Ⅱ)
10)고구려 折風의 起源과 語源
11)신라 금관
12)삼국 冠飾의 비교
13)曲玉의 기원과 상징
14)신라 金製 銙帶
15)환두대도 三枝葉
16)神市, 蘇塗, 서라벌, 서울의 어원을 찾아서
17)한국 고대음악의 기원
18)한국 고대무용의 기원과 살풀이춤
19)한국 고대미술의 시원과 원형질
20)기와의 명칭과 와당 문양의 상징
21)당초문의 기원과 명칭의 상징성
22)흉노의 칸(干)과 선우(單于) 姓의 문자학적 검토
23)상투와 비녀
24)고대 복식의 형태적 시원
25)Y形器와 鳥翼形 冠飾 그리고 萬歲의 상징성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명품 백선』 도록 99번째 유물은 傳창녕출토 투조금동관[그림1]을 실어놓았다. 창녕 투조금동관의 뒷쪽 솟음대(金銅柱)가 유달리 눈길을 끌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높이 솟아 있는지,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식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설을 한국과 일본 어느 책에서도 아직 본 일이 없다. 한눈에 봐서도 그것은 고대관식의 어떤 중요한 상징성을 띤 장식구라는 것을 단박 느낄 수 있음에도 왜 상징적 의미를 연구한 글이 단 한 편도 없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해석고고학적 접근이 아니고선 양식의 상징성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김종철 교수(전 계명대 박물관장)가 이양선 박사 기증문화재 도판해설에서 [그림1-3]에 대해 “길이 47.4cm나 되는 細長한 금동판을 길이로 접어 稜角을 세우고 측면관이 완만한 S자형이 되도록 휜 형태로 꿩의 꽁지털을 세운 모양이다. 길이 11cm 정도의 뿌리부분은 펜촉 모양으로 약간 넓게 돼 있어 물체에 부착하기에 편하게 돼 있으며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단까지 세 줄로 길게 46 개의 영락이 달려 있다. 일본 동경박물관소장의 이른바 ‘小倉콜렉션’ 가운데 傳경남 창녕출토품으로 돼 있는 金銅製透彫冠帽에 중앙입식으로 41.8cm나 되는 유사한 長尾形立飾이 꽂혀 있는데, 본품도 그러한 금동관모의 正面立飾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菊隱 李養璿 蒐集文化財』, 1987, 국립경주박물관)라고 해설한 글이 내가 본 유일한 이 분야의 글이다.


김 교수의 논급 중에서 ‘꿩의 꽁지털을 세운 모양’이란 표현과 동경박물관소장 창녕출토 금동제 투조관모의 ‘長尾形立飾’과 유사하다는 견해는 형태의 유사성에 의한 추론으로 생각되지만 아주 재미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연히 있어야 할 그렇게 본 까닭, 즉 상징의미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 없어 설득력을 잃고 있는 점이 아쉽다.

“새장식구는 절풍의 또 다른 표현방법”
이 장식구를 나는 절풍의 또 다른 표현방법이라고 해석하며, 그것은 새 숭배사상에서 유래된 冠飾의 표현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장식구의 용도와 재질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금속절풍’이라 부른다면 안성맞춤일 것으로 생각한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가 금동절풍이란 용어를 먼저 사용한 예가 있기도 하지만(『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2008, 지식산업사), 나는 본 연재 제10회에서 절풍을 솔개의 상징으로 해석한 바 있는데, 창녕 투조금동관의 금동절풍은 깃털로 상징한 절풍이 아니라, 새의 꼬리(長尾鳥)를 금속으로 조형화해 멋지게 높이 세움으로써 군왕의 권위와 기운을 상징한 금속절풍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림1-2,3,4]의 유물도 모두 冠의 본체에서 분리된 채 출토된 금속절풍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그리고 출토지의 분포를 살펴보면 이런 君長의 冠飾이 그 당시 백제, 신라, 가야 등 새 숭배의 원시신앙이 분포된 삼국에 형태는 약간씩 달라도 널리 유행된 관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솔개의 꼬리가 그렇게 긴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새 숭배사상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君長의 심볼이었던 솔개가 점차 봉황이나 꼬리가 긴 꿩 종류로 바뀌면서 그 원형이 흐려져 간 것을 감안한다면, 초기에 날개의 깃으로 장식됐던 절풍이 재질을 금동으로 대체한 문화의 진화현상은 자연스런 변이단계라 할 것이다. 박선희 교수가 이러한 양식을 절풍으로 서술한 것은 매우 훌륭한 판단이라 하겠는데(『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다만 그의 견해는 절풍이 무슨 뜻인지 그 상징 의미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전혀 밝혀놓지 않음으로써 확실한 근거를 세우지 못한 견해가 되고 만 것은 매우 아쉬운 바라 하겠다.


[그림2]에서 일본 천황의 즉위식 때의 冠飾을 보면, 천황은 昻尾形을 취하고 있는데 반해 신하들은 모두 굴건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은 천황만이 天命得意의 즉위식에서 擧尾할 자격을 가진 신분이고, 다른 신하들은 屈巾함으로써 복종의 예를 상징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새(鳥)가 득의의 시점에서 취하는 자세와 같은 모양이다. 새의 득의시점이란 교미할 때의 모습인데, 그 때 새의 모습은 꼬리를 바짝 치켜 올려 擧尾의 모양새를 갖춘다. 새의 형상을 통해 인간사유를 상징화하는 것은 동북아 고대민족의 공통된 문화인소다. 長尾鳥를 冠飾化했던 遺風을 현재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예는 喪服의 屈巾 모습이다. 상복의 굴건은 퇴화된 절풍의 희미한 흔적이라고 하겠다.


다시 [그림2]를 보자. 일본 천황관식의 독특한 솟음관식은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 나는 그 상징해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려했으나 끝내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필자는 1998년 일본 쯔쿠바(筑波)대학에서 『金文 ‘唯’ 字 考』란 논문을 통해 “일본 천황의 수직관식은 長尾鳥의 擧尾形式이며 그 祖形은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傳 창녕출토 투조금동관’의 솟음대인 금속절풍에 있다”는 논지를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슬라이드로 양자의 그림을 비교하며 설명했을 때, 많은 참석자들이 커다란 공감을 표해주던 장면이 생생하다.


이러한 관식의 기원은 태양숭배사상과 神鳥숭배사상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신조는 곧 솔개라는 사실을 앞의 연재에서 누차 강조한 바 있지만, 태양숭배사상은 화염무늬나 빛살무늬로 나타나고 새 숭배사상은 神鳥 솔개 및 봉황으로 나타난다. 두 가지 형태가 서로 복합돼 군왕이나 지도자의 관식으로 상징된다. 알타이문화권과 동북아 지역에서 이러한 관식의 공통분모는 문화의 시원적 형태가 비슷했다는 사실을 출토유물을 통해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그림4]의 관식은 새의 긴 꼬리를 치켜세워 형상화함으로써 군왕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화한 것으로 본다. 새 숭배사상의 문화적 동질성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발현되는 형태가 비슷하다. 이 점은 문화의 전파와 접변에서 유의미한 일인데, 절풍의 솟음 관식이 백제시대의 관식에선 기법상 발전된 특이 형태로 나타난다.


  


[그림5]의 (5-1)익산 입점리 출토 금동관과 (5-3)공주 수촌리 고분출토 금동관 및 (5-4)고흥 안동고분 출토 금동관과 (5-2)일본 후노야마 고분 금동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금동관의 뒷쪽이나 정수리 부분에 긴 대롱을 붙이고 그 끝에 나팔모양의 작은 종지 같은 것을 붙여놓은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고고학계에선 그 명칭을 다음과 같이 제각각 부르고 있다.

-수발(垂鉢)장식 : 『百濟의 冠』 도록, 국립공주박물관, 2011
-水盤形 장식 : 노중국(「百濟 冠 裝飾의 象徵性」『百濟의 冠』논고,국립공주박물관, 2011)

-半球形 장식 : 이영호, 신광섭(『고분미술』, 솔, 2005)
-세움장식 : 박선희(『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8)

이렇게 명칭이 연구자들마다 다른 것은 이런 관식의 상징성을 해독해내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까지도 사관학교 생도들이 행진할 때 쓰는 모자 정상에 흰 새의 깃털을 꽂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림5-7]처럼 내몽골 무사의 투구 꼭대기에 꽂힌 깃털은 용맹한 무사나 우두머리 수리급의 고대관식이다. 새 중의 왕자인 솔개를 깃털로 표상한 관식이 절풍이다.


[그림6] 공주 수촌리 금동관의 디자인적 구성을 살펴보면 비상하는 솔개의 좌우 양날개를 조형하고 뒷부분엔 길이 15cm 내외의 대롱을 붙여 그 끝엔 내경 3cm의 발(鉢)을 만들어 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발에 깃털을 빽빽이 심어 아교로 단단히 고착시킨 다음, 긴 대롱은 청홍의 비단으로 겉을 감싸 아름답게 장식하고 높이 세움으로써 넘치는 기상의 솔개 꼬리를 상징한 절풍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런 양식이 일본에 전파된 것이 후노야마 금동관이다. 대롱과 수발의 용도는 이런 해석 말고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말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삼국의 관식에 나타난 새 숭배사상은 태양숭배사상에서 배태된 것이다. 새의 상징은 태양과 등가물로서 디자인돼 전개된다. 화염문의 불꽃봉오리 속에 새가 자리잡은 조형도 모두 그런 이유이다.



  



고구려금동관 관식은 한반도 불꽃무늬 祖形
[그림7]은 삼국의 고깔(弁)이다. 고깔은 한국 고대 관모의 표준인데, 천마총 출토의 금관모를 납작 접은 형태로 보면,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어 양손을 합한 형상이다. 새 머리의 정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기거동작까지 새를 닮고자 했다는 고대인들의 의식이 관에 반영된 예다.


   삼국관식을 비교할 때 공통점은 태양과 새 숭배사상이다. 태양숭배사상을 기본원리로 삼아 화염문과 새(솔개)를 군왕의 심볼로 조형화한 것이 고대관식의 원리다. [그림8]에서 평양 청암리 출토 고구려금동관(8-1)의 관식은 한반도 불꽃무늬 관식의 祖形이 된다. 그 양식이 아직 簡化되지 않은 불꽃형 그대로인 것은 고구려의 신앙의 반영이다. 불꽃무늬를 관식화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해석해야 고대문화의 원리가 풀린다. 부산 복천동 출토 가야금동관(8-2)과 경주 교동출토 신라금관(8-4)의 입식을 고고학계에선 나뭇가지형(樹枝形)으로 부르고, 나주출토 백제 금동관(8-3)의 장식은 草花形이라 부른다. 수지형, 초화형의 조형원리가 무엇인가. 그런 명칭은 빗살무늬와 같이 즉물적 명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런 즉물적 명칭에 견강부회한 이론을 자꾸 갖다대다 보니 원리 해석은 점점 꼬여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림8]의 네 종류 관식의 공통성인 불꽃무늬는 천손족이었던 고대한반도의 거주민들이 태양숭배의 고대사유를 불꽃무늬로 도상화해 관식으로 반영한 공통점만은 확실하다. 논의의 포인트는 여기에 두어진다.
冠은 전회(11회)에서 말했듯이 사용집단의 사유원형을 상징적으로 디자인해 지도자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낸 조형물이다. 그러므로 고대관식은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의 특성을 압축한 대표적 상징물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관식의 상징을 해독하는 길은 수수께끼와 같은 고대문화의 정보를 풀어내는 첩경이 된다. 삼국과 가야 및 일본의 고대관식에 대한 비교연구는 그런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문화원형의 공유 여부와 고대민족간의 교류 및 이동을 체크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거기에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ydk629@kmu.ac.kr


ㅡ 교수신문 기사






동아시아사 (팔각)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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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선생 2016. 8. 4. 3:51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책 머리에

고구려 금관의 양식사적 이해

    우리나라는 금관왕국이다. 고대 금관이 우리나라에 집중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고대 금관은 모두 12점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7점은 신라 금관이고 2점은 가야 금관이며, 나머지 3점만 외국 금관이다. 신라와 가야 금관을 제외하면 세계 금관은 거의 없는 것이나 같다. 이처럼 세계 금관의 대부분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한국은 금관왕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한국 금관에 대한 성급한 단정일 뿐이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금관이 이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신라 금관만 하더라도 금관과 같은 양식의 금동관이 수십 점이나 있으며, 아직 발굴되지 않은 신라 고분에 금관이 얼마나 매장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신라 금동관과 발굴되지 않은 금관을 고려하면 신라는 금관왕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점은 같은 시기에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는 금동관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금관도 다수 있었던 사실을 발굴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 금관이 존재한 사실은 고분에서 발굴된 금제관식 유물들이 입증한다. 현재까지 출토된 금제관식은 ‘전()동명왕릉’, 우산 992호 무덤, 마선 2100호 무덤, 천추 무덤, 태왕릉 등에서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이 5기의 고분에 수장되었을 금관과 ‘전()강서군금관’을 포함한다면 고구려에는 적어도 6점의 금관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금관과 함께 금동관, 은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 고분 속에 잠자는 신라 금관까지 고려하면, 한국은 세계 금관의 중심지로서 금관왕국이 아니라 금관천국이라 일컬어야 제격이다.

그럼에도 금관하면 곧 신라 금관만 떠올린다. 금관은 신라에만 있고 고구려에는 없다는 전제가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는 고구려에 금관이 없다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쓰여진다. 따라서 고구려 금관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의 중요 목적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금관을 해석하는 관점의 확립이다. 금으로 만들었는가 아닌가 하는 소재주의 관점에서 금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관모의 양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역사적 상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양식사적 관점에서 금관을 해석하는 것이다.

고구려 금관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라 금관보다 먼저 존재했다. 소재주의가 아니라 양식주의 관점에서 주목해 보면 한국 관모사는 고조선 관모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금관과 금동관은 관모양식과 관장식의 양식 및 상징성 등에서 고조선으로부터 통시적인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관모들이다. 즉 고구려 관모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절풍양식은 고조선 관모양식을 이은 것으로 신라 금관에 이르기까지 속관양식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고구려 금관과 금동관의 관테둘레에 나타나는 다양한 양식의 크고 작은 점열문양식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금관의 점열문은 신라 금관에서 표현된 것보다 다양하고 화려하다.

최근의 신라 금관 연구에 의하면, 수목양식의 세움장식은 곧 김알지가 출현한 계림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김씨계 왕실을 신성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기능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과 같은 시각에서 보면, 고구려 금관의 관식에서 보이는 말과 새장식도 새롭게 해석된다. 시조 동명왕의 탄생신화에서 말과 새가 등장하여 큰 역할을 수행했던 내용을 관식에 형상화한 것이 고구려 금관의 중요 양식이다. 이처럼 시조신화의 중요한 내용을 왕관장식으로 형상화한 것은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양식과 크게 닮았다.

다만, 신라 금관이 일관되게 계림을 형상화한 수목형 세움장식을 올린 것과 달리, 고구려 금관은 고구려 사람들이 추구했던 정치이념을 정치사의 변화와 맞물려 그때마다 양식을 변화시켜나갔다는 차이를 지닌다. 그러므로 고구려 금관의 양식 변화는 당대 정치사의 변화를 읽는 긴요한 상징물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건국부터 멸망할 때까지 주변의 국가들과 줄곧 전쟁을 했다. 고구려의 대외전쟁은 영토 확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수림왕시기 금관은 왕의 신성한 출현을 세움장식에 형상화하여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광개토대왕시기 왕관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절풍양식이었던 것은 당시의 대내외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고구려는 이 시기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일본까지 형식적이지만 통치권 안에 넣어 조공을 바치도록 함으로써 한반도와 만주를 전 지역으로 하는 천하질서를 확립했다. 이처럼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자로서 천하질서를 확립해 나간 것은 건국초기부터 국가시책으로 추진하여 광개토대왕시기에 명분상으로 일단 완성되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광개토대왕시기 왕관양식으로 고조선과 이후 여러 나라들이 썼던 절풍양식을 택하게 된 까닭이 될 것이다. 왕관이 고구려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서 통치 기능을 발휘하는 구실도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시기로 오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직접지배 영역으로 만들고자 전쟁에 주력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고조선시기의 천하질서를 재건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장수왕시기 금관양식과 그곳에 나타났을 정치이상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전강서군금관’이다. 이 금관은 7개의 화려한 세움장식이 해모수의 출현을 상징하는 태양을 형상화하여 고구려가 추구했던 천하관과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금관을 통해 왜 고구려는 평양천도 이후 금관에 천제 즉 단군의 아들로서 주몽을 부활시켰을까? 고구려에서 단순히 신라 금관처럼 건국신화에 보이는 태양신 해모수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여 왕실혈통과 왕권을 신성하게 강화해 나가고자 불꽃문양 세움장식의 금관을 만들었다고 해석되진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 왕권이 구체적으로 발휘하고자 했을 초월적인 통치력을 강화하고자한 구실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 결과로 고구려 금관의 세계사적인 위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금관을 구성했던 관장식의 양식과 상징성 등 고조선시기로부터 통시적인 발전과정에서 우리나라 금관의 원류가 통설에서처럼 전파론적 관점에서 시베리아 샤먼을 비롯한 유라시아 여러 종족들의 문화적 전통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되는 것은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함을 확인했다. 또한 비교사의 관점에서 역사왜곡을 일삼는 중국은 11세기 무렵 요나라 때에 가서야 비로소 매장용으로 금관을 처음 만든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하면 고대 중국에는 금관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는 우리나라 금관의 지리적 분포와 역사적 기원을 새롭게 밝힌 책이다. 이 연구가 디딤돌이 되어 우리 문화의 북방기원설이나 남방문화전래설에 매몰되어 민족적 창조력을 부정해온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민족 문화는 우리 땅에서 자생적으로 창조되었다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가 한국은 세계적으로 금관왕국이며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구려 문화의 정체성과 고구려가 추구하던 천하질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큰 다행이겠다. 고구려 금관이 고조선 시대부터 사용했던 관모의 고유양식을 계승하여 만들어낸 자생적 관모라는 사실로부터 한민족 금관문화의 독창성과 주체성을 재인식하게 되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실증적 구실도 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를 쓰는 데는 그동안 학계에서 소개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이 이용되었다. 희귀한 고구려 금관 자료는 분주하게 쫓아다녀도 구할 수 없는데, 오히려 이번에는 편안하게 앉아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어서 연구자로서 행운을 누린 셈이다. 2008년에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는 단행본이 시중 서점에 나가자 여러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금관 자료를 가지고 있는 문화재 소장가로부터 놀랄 만한 소식이 있었다.

이 분은 금관 연구의 진전에 반가워하는 한편, 고구려 금관에 대한 논의가 크게 미흡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관련 자료들을 충분히 제공해주면서 고구려 금관에 관한 연구를 독려해 주었다.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가야 금관에 관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자유롭게 열람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높은 식견의 도움 말씀을 주어서, 그 동안 어떤 저서보다 수월하게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료제공과 다양한 도움을 주신 이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고를 보고 흔쾌히 출판을 맡아준 경인문화사 한정희 사장님과 좋은 책을 만들고자 정성을 기울여준 편집진 여러분들께도 감사한다.

이 연구의 다음 작업은 고구려 금관 해석에서 얻은 관점과 방법을 유물 일반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최근 발굴보고서를 보면, 중국학자들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중국 또는 북방민족 문화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중국 중심의 역사연구와 문화해석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금관 연구를 계기로, 고대 역사 유적과 발굴유물을 새롭게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다음 단계의 연구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조선 문화유산의 정체를 오롯이 밝히려는 다음 저서의 집필은 복식사 연구자로서 적지 않은 부담인 동시에 벅찬 꿈이기도 하다. 이제 고구려 금관의 짐을 내려놓고 고조선 문명 연구를 위한 구상을 하며 머리말을 맺는다.
2013년 9월 4일
자하관 연구실에서
박선희()



출처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2013. 11. 29.
이 책은 우리나라 금관의 지리적 분포와 역사적 기원을 새롭게 밝힌 책이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 한민족 문화는 우리 땅에서 자생적으로 창조되었다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재인식할...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저자소개 - 박선희
책 머리에


제1장 고조선 관모 전통과 고구려 금관1. 고조선 관모양식의 지속성
2. 금제관식의 전통과 상징성

제2장 ‘전(傳)동명왕릉’ 출토 금제관식과 ‘다물’1. 동명왕릉 위치와 ‘전동명왕릉’ 축조시기
2. ‘전동명왕릉’ 금관 제작시기와 정치기능

제3장 동천왕 평양성시기 금관과 요서수복1. 요령성 출토 금제관식의 국적 재검토
2. 동천왕시기 평양성 위치와 최리낙랑국
3. 고구려 금관이 선비족에 미친 영향

제4장 칠성산 211호 무덤 금동제관식과 서천왕1. 칠성산 211호 무덤의 정체와 금동제관식
2. 서천왕시기 왕관의 정치기능

제5장 서대 무덤 금동제관식과 미천왕1. 서대 무덤의 정체와 금동제관식
2. 미천왕시기 왕관의 정치기능

제6장 우산 992호 무덤 금제관식과 미천왕1. 우산 992호 무덤 금제관식과 정체
2. 우산 992호 무덤과 서대 무덤의 연관성

제7장 안악 3호 무덤과 고국원왕1. 안악 3호 무덤벽화 복식의 국적
2. 금테 두른 백라관과 고국원왕

제8장 마선 2100호 무덤 금제관식과 소수림왕1. 마선 2100호 무덤 금제관식과 정체
2. 소수림왕시기 금관의 정치기능

제9장 천추 무덤 금제관식과 고국양왕1. 천추 무덤 금제관식과 정체
2. 고국양왕시기 금관의 정치기능

제10장 태왕릉 금관과 광개토대왕1. 태왕릉 금관과 관식의 정체
2. 광개토대왕 왕관양식과 천하질서

제11장 장군총과 장수왕의 ‘전(傳)강서군금관’1. 무덤양식과 유물로 본 장군총의 정체
2. ‘전강서군금관’의 불꽃문양과 주체
3. ‘전강서군금관’과 장수왕의 정치이념
4. 불꽃문양 금관의 주체와 장수왕 이념
전강서군 간성리 출토 고구려 금관의 성분분석

제12장 고구려 금관의 국제적 위상과 천하질서1. 고구려 금관의 국제적 위상
2. 금관으로 본 고구려의 천하질서

참고문헌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박선희 2016.08.04

sunonthetree.blog.me/220779139112   동산 현관





신라금관 기원 논란 | 역사문화 산책

먼 발치 매운 눈 2008.05.22 10:36


신라 금관은 한민족 고유 창작품

 

《신라 금관의 형태가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 비롯됐다는 이른바 북방 기원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연구서가 동시에 나왔다.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에서 박선희 상명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이상 지식산업사)를 통해 신라 금관은 북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민족 고유의 창작품이라고 말했다. 신라 금관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썼던 사슴뿔 모양의 모자를 본떠 만들었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임 교수는 우선 사슴뿔 모양을 따라했다는 설에 대해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은 대부분 5개며 더러 3개인 것도 있으나 2개인 경우는 전혀 없으므로 사슴뿔 한 쌍의 모양을 장식한 시베리아 무관(巫冠)과는 모양부터 다르다고 지적했다. 또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끝부분이 ♤ 모양으로 처리된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움(새순)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세움장식을 사슴뿔 모양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 모양과 사슴뿔의 연관성을 밝히지 못해 아예 해석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의 이런 연구는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라 금관의 줄기 부분은 김알지가 최초로 발견된 계림(鷄林)의 신성한 나무(신수·神樹)를 형상화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씨계의 왕권 세습이 본격화되던 시기와 신라 금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로 일치하는데 김씨계가 왕권 강화를 위해 시조 신화를 금관에 담았다는 것. 그는 금관의 세움장식이 신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면 나무의 새순인 움(♤) 모양 장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 밖에 새 모양 장식이 붙은 신라 금관이 있다는 점, 태아 모양의 곡옥(曲玉)이 장식품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을 들면서 닭 울음소리를 통해 황금궤 안에 있던 아기(김알지)가 발견됐다는 알지 신화와 연관지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임 교수는 기존의 시베리아 기원설에만 매달리는 학계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신라 금관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임 교수의 주장에 대해 임 교수의 해석은 김알지 신화가 핵심인데 그 신화가 금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5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도 사슴뿔 모양 외에 나무 모양도 많이 나타난다고 반박했다. 박선희 교수는 책에서 고조선시대 이후 나타난 관모(冠帽)의 형태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신라금관의 원형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특히 관모의 한 형태인 절풍(折風)에 주목했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머리를 올려 상투를 트는 고유한 머리 양식을 해왔는데 절풍은 상투를 튼 머리에 알맞은 관모 양식으로서 북방 지역에는 이런 양식이 없다는 것. 박 교수는 신라 금관이 출토될 때 금관 속에 쓰는 절풍도 함께 나왔다면서 고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관모 전통이 신라 금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