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5. 04:16ㆍ美學 이야기
태양을 대신하는 절대왕권의 상징, 숨겨진 고구려 역사 밝혀주다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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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daum.net/kjcultureteacher/5r3Q/667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공통점은 불꽃무늬와 새[鳥] … 관식화한 이유 밝혀야 고대문화 원리 풀려 | ||||||||||||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12. 삼국 冠飾의 비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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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순서 1)‘神’의 해석 2~3)‘神’의 순수고유어와 고대 상징의 세계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명품 백선』 도록 99번째 유물은 傳창녕출토 투조금동관[그림1]을 실어놓았다. 창녕 투조금동관의 뒷쪽 솟음대(金銅柱)가 유달리 눈길을 끌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높이 솟아 있는지,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식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설을 한국과 일본 어느 책에서도 아직 본 일이 없다. 한눈에 봐서도 그것은 고대관식의 어떤 중요한 상징성을 띤 장식구라는 것을 단박 느낄 수 있음에도 왜 상징적 의미를 연구한 글이 단 한 편도 없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해석고고학적 접근이 아니고선 양식의 상징성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김종철 교수(전 계명대 박물관장)가 이양선 박사 기증문화재 도판해설에서 [그림1-3]에 대해 “길이 47.4cm나 되는 細長한 금동판을 길이로 접어 稜角을 세우고 측면관이 완만한 S자형이 되도록 휜 형태로 꿩의 꽁지털을 세운 모양이다. 길이 11cm 정도의 뿌리부분은 펜촉 모양으로 약간 넓게 돼 있어 물체에 부착하기에 편하게 돼 있으며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단까지 세 줄로 길게 46 개의 영락이 달려 있다. 일본 동경박물관소장의 이른바 ‘小倉콜렉션’ 가운데 傳경남 창녕출토품으로 돼 있는 金銅製透彫冠帽에 중앙입식으로 41.8cm나 되는 유사한 長尾形立飾이 꽂혀 있는데, 본품도 그러한 금동관모의 正面立飾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菊隱 李養璿 蒐集文化財』, 1987, 국립경주박물관)라고 해설한 글이 내가 본 유일한 이 분야의 글이다.
혹자는 ‘솔개의 꼬리가 그렇게 긴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새 숭배사상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君長의 심볼이었던 솔개가 점차 봉황이나 꼬리가 긴 꿩 종류로 바뀌면서 그 원형이 흐려져 간 것을 감안한다면, 초기에 날개의 깃으로 장식됐던 절풍이 재질을 금동으로 대체한 문화의 진화현상은 자연스런 변이단계라 할 것이다. 박선희 교수가 이러한 양식을 절풍으로 서술한 것은 매우 훌륭한 판단이라 하겠는데(『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다만 그의 견해는 절풍이 무슨 뜻인지 그 상징 의미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전혀 밝혀놓지 않음으로써 확실한 근거를 세우지 못한 견해가 되고 만 것은 매우 아쉬운 바라 하겠다.
-半球形 장식 : 이영호, 신광섭(『고분미술』, 솔, 2005)
고구려금동관 관식은 한반도 불꽃무늬 祖形
ㅡ 교수신문 기사 |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책 머리에
고구려 금관의 양식사적 이해
우리나라는 금관왕국이다. 고대 금관이 우리나라에 집중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고대 금관은 모두 12점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7점은 신라 금관이고 2점은 가야 금관이며, 나머지 3점만 외국 금관이다. 신라와 가야 금관을 제외하면 세계 금관은 거의 없는 것이나 같다. 이처럼 세계 금관의 대부분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한국은 금관왕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한국 금관에 대한 성급한 단정일 뿐이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금관이 이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신라 금관만 하더라도 금관과 같은 양식의 금동관이 수십 점이나 있으며, 아직 발굴되지 않은 신라 고분에 금관이 얼마나 매장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신라 금동관과 발굴되지 않은 금관을 고려하면 신라는 금관왕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점은 같은 시기에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는 금동관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금관도 다수 있었던 사실을 발굴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 금관이 존재한 사실은 고분에서 발굴된 금제관식 유물들이 입증한다. 현재까지 출토된 금제관식은 ‘전(傳)동명왕릉’, 우산 992호 무덤, 마선 2100호 무덤, 천추 무덤, 태왕릉 등에서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이 5기의 고분에 수장되었을 금관과 ‘전(傳)강서군금관’을 포함한다면 고구려에는 적어도 6점의 금관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금관과 함께 금동관, 은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 고분 속에 잠자는 신라 금관까지 고려하면, 한국은 세계 금관의 중심지로서 금관왕국이 아니라 금관천국이라 일컬어야 제격이다.
그럼에도 금관하면 곧 신라 금관만 떠올린다. 금관은 신라에만 있고 고구려에는 없다는 전제가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는 고구려에 금관이 없다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쓰여진다. 따라서 고구려 금관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의 중요 목적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금관을 해석하는 관점의 확립이다. 금으로 만들었는가 아닌가 하는 소재주의 관점에서 금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관모의 양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역사적 상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양식사적 관점에서 금관을 해석하는 것이다.
고구려 금관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라 금관보다 먼저 존재했다. 소재주의가 아니라 양식주의 관점에서 주목해 보면 한국 관모사는 고조선 관모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금관과 금동관은 관모양식과 관장식의 양식 및 상징성 등에서 고조선으로부터 통시적인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관모들이다. 즉 고구려 관모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절풍양식은 고조선 관모양식을 이은 것으로 신라 금관에 이르기까지 속관양식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고구려 금관과 금동관의 관테둘레에 나타나는 다양한 양식의 크고 작은 점열문양식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금관의 점열문은 신라 금관에서 표현된 것보다 다양하고 화려하다.
최근의 신라 금관 연구에 의하면, 수목양식의 세움장식은 곧 김알지가 출현한 계림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김씨계 왕실을 신성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기능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과 같은 시각에서 보면, 고구려 금관의 관식에서 보이는 말과 새장식도 새롭게 해석된다. 시조 동명왕의 탄생신화에서 말과 새가 등장하여 큰 역할을 수행했던 내용을 관식에 형상화한 것이 고구려 금관의 중요 양식이다. 이처럼 시조신화의 중요한 내용을 왕관장식으로 형상화한 것은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양식과 크게 닮았다.
다만, 신라 금관이 일관되게 계림을 형상화한 수목형 세움장식을 올린 것과 달리, 고구려 금관은 고구려 사람들이 추구했던 정치이념을 정치사의 변화와 맞물려 그때마다 양식을 변화시켜나갔다는 차이를 지닌다. 그러므로 고구려 금관의 양식 변화는 당대 정치사의 변화를 읽는 긴요한 상징물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건국부터 멸망할 때까지 주변의 국가들과 줄곧 전쟁을 했다. 고구려의 대외전쟁은 영토 확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수림왕시기 금관은 왕의 신성한 출현을 세움장식에 형상화하여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광개토대왕시기 왕관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절풍양식이었던 것은 당시의 대내외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고구려는 이 시기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일본까지 형식적이지만 통치권 안에 넣어 조공을 바치도록 함으로써 한반도와 만주를 전 지역으로 하는 천하질서를 확립했다. 이처럼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자로서 천하질서를 확립해 나간 것은 건국초기부터 국가시책으로 추진하여 광개토대왕시기에 명분상으로 일단 완성되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광개토대왕시기 왕관양식으로 고조선과 이후 여러 나라들이 썼던 절풍양식을 택하게 된 까닭이 될 것이다. 왕관이 고구려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서 통치 기능을 발휘하는 구실도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시기로 오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직접지배 영역으로 만들고자 전쟁에 주력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고조선시기의 천하질서를 재건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장수왕시기 금관양식과 그곳에 나타났을 정치이상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전강서군금관’이다. 이 금관은 7개의 화려한 세움장식이 해모수의 출현을 상징하는 태양을 형상화하여 고구려가 추구했던 천하관과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금관을 통해 왜 고구려는 평양천도 이후 금관에 천제 즉 단군의 아들로서 주몽을 부활시켰을까? 고구려에서 단순히 신라 금관처럼 건국신화에 보이는 태양신 해모수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여 왕실혈통과 왕권을 신성하게 강화해 나가고자 불꽃문양 세움장식의 금관을 만들었다고 해석되진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 왕권이 구체적으로 발휘하고자 했을 초월적인 통치력을 강화하고자한 구실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 결과로 고구려 금관의 세계사적인 위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금관을 구성했던 관장식의 양식과 상징성 등 고조선시기로부터 통시적인 발전과정에서 우리나라 금관의 원류가 통설에서처럼 전파론적 관점에서 시베리아 샤먼을 비롯한 유라시아 여러 종족들의 문화적 전통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되는 것은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함을 확인했다. 또한 비교사의 관점에서 역사왜곡을 일삼는 중국은 11세기 무렵 요나라 때에 가서야 비로소 매장용으로 금관을 처음 만든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하면 고대 중국에는 금관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는 우리나라 금관의 지리적 분포와 역사적 기원을 새롭게 밝힌 책이다. 이 연구가 디딤돌이 되어 우리 문화의 북방기원설이나 남방문화전래설에 매몰되어 민족적 창조력을 부정해온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민족 문화는 우리 땅에서 자생적으로 창조되었다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가 한국은 세계적으로 금관왕국이며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구려 문화의 정체성과 고구려가 추구하던 천하질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큰 다행이겠다. 고구려 금관이 고조선 시대부터 사용했던 관모의 고유양식을 계승하여 만들어낸 자생적 관모라는 사실로부터 한민족 금관문화의 독창성과 주체성을 재인식하게 되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실증적 구실도 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를 쓰는 데는 그동안 학계에서 소개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이 이용되었다. 희귀한 고구려 금관 자료는 분주하게 쫓아다녀도 구할 수 없는데, 오히려 이번에는 편안하게 앉아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어서 연구자로서 행운을 누린 셈이다. 2008년에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는 단행본이 시중 서점에 나가자 여러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금관 자료를 가지고 있는 문화재 소장가로부터 놀랄 만한 소식이 있었다.
이 분은 금관 연구의 진전에 반가워하는 한편, 고구려 금관에 대한 논의가 크게 미흡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관련 자료들을 충분히 제공해주면서 고구려 금관에 관한 연구를 독려해 주었다.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가야 금관에 관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자유롭게 열람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높은 식견의 도움 말씀을 주어서, 그 동안 어떤 저서보다 수월하게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료제공과 다양한 도움을 주신 이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고를 보고 흔쾌히 출판을 맡아준 경인문화사 한정희 사장님과 좋은 책을 만들고자 정성을 기울여준 편집진 여러분들께도 감사한다.
이 연구의 다음 작업은 고구려 금관 해석에서 얻은 관점과 방법을 유물 일반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최근 발굴보고서를 보면, 중국학자들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중국 또는 북방민족 문화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중국 중심의 역사연구와 문화해석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금관 연구를 계기로, 고대 역사 유적과 발굴유물을 새롭게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다음 단계의 연구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조선 문화유산의 정체를 오롯이 밝히려는 다음 저서의 집필은 복식사 연구자로서 적지 않은 부담인 동시에 벅찬 꿈이기도 하다. 이제 고구려 금관의 짐을 내려놓고 고조선 문명 연구를 위한 구상을 하며 머리말을 맺는다.
2013년 9월 4일
자하관 연구실에서
박선희(朴仙姬)
출처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2013. 11. 29.
이 책은 우리나라 금관의 지리적 분포와 역사적 기원을 새롭게 밝힌 책이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 한민족 문화는 우리 땅에서 자생적으로 창조되었다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재인식할...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저자소개 - 박선희
책 머리에
제1장 고조선 관모 전통과 고구려 금관1. 고조선 관모양식의 지속성
2. 금제관식의 전통과 상징성
제2장 ‘전(傳)동명왕릉’ 출토 금제관식과 ‘다물’1. 동명왕릉 위치와 ‘전동명왕릉’ 축조시기
2. ‘전동명왕릉’ 금관 제작시기와 정치기능
제3장 동천왕 평양성시기 금관과 요서수복1. 요령성 출토 금제관식의 국적 재검토
2. 동천왕시기 평양성 위치와 최리낙랑국
3. 고구려 금관이 선비족에 미친 영향
제4장 칠성산 211호 무덤 금동제관식과 서천왕1. 칠성산 211호 무덤의 정체와 금동제관식
2. 서천왕시기 왕관의 정치기능
제5장 서대 무덤 금동제관식과 미천왕1. 서대 무덤의 정체와 금동제관식
2. 미천왕시기 왕관의 정치기능
제6장 우산 992호 무덤 금제관식과 미천왕1. 우산 992호 무덤 금제관식과 정체
2. 우산 992호 무덤과 서대 무덤의 연관성
제7장 안악 3호 무덤과 고국원왕1. 안악 3호 무덤벽화 복식의 국적
2. 금테 두른 백라관과 고국원왕
제8장 마선 2100호 무덤 금제관식과 소수림왕1. 마선 2100호 무덤 금제관식과 정체
2. 소수림왕시기 금관의 정치기능
제9장 천추 무덤 금제관식과 고국양왕1. 천추 무덤 금제관식과 정체
2. 고국양왕시기 금관의 정치기능
제10장 태왕릉 금관과 광개토대왕1. 태왕릉 금관과 관식의 정체
2. 광개토대왕 왕관양식과 천하질서
제11장 장군총과 장수왕의 ‘전(傳)강서군금관’1. 무덤양식과 유물로 본 장군총의 정체
2. ‘전강서군금관’의 불꽃문양과 주체
3. ‘전강서군금관’과 장수왕의 정치이념
4. 불꽃문양 금관의 주체와 장수왕 이념
전강서군 간성리 출토 고구려 금관의 성분분석
제12장 고구려 금관의 국제적 위상과 천하질서1. 고구려 금관의 국제적 위상
2. 금관으로 본 고구려의 천하질서
참고문헌
[출처]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박선희|작성자 동산선생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박선희 2016.08.04
sunonthetree.blog.me/220779139112 동산 현관
신라금관 기원 논란 역사문화 산책
신라 금관은 한민족 고유 창작품
《신라 금관의 형태가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 비롯됐다는 이른바 북방 기원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연구서가 동시에 나왔다.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에서 박선희 상명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이상 지식산업사)를 통해 신라 금관은 북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민족 고유의 창작품이라고 말했다. 신라 금관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썼던 사슴뿔 모양의 모자를 본떠 만들었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임 교수는 우선 사슴뿔 모양을 따라했다는 설에 대해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은 대부분 5개며 더러 3개인 것도 있으나 2개인 경우는 전혀 없으므로 사슴뿔 한 쌍의 모양을 장식한 시베리아 무관(巫冠)과는 모양부터 다르다고 지적했다. 또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끝부분이 ♤ 모양으로 처리된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움(새순)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세움장식을 사슴뿔 모양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 모양과 사슴뿔의 연관성을 밝히지 못해 아예 해석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의 이런 연구는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라 금관의 줄기 부분은 김알지가 최초로 발견된 계림(鷄林)의 신성한 나무(신수·神樹)를 형상화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씨계의 왕권 세습이 본격화되던 시기와 신라 금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로 일치하는데 김씨계가 왕권 강화를 위해 시조 신화를 금관에 담았다는 것. 그는 금관의 세움장식이 신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면 나무의 새순인 움(♤) 모양 장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 밖에 새 모양 장식이 붙은 신라 금관이 있다는 점, 태아 모양의 곡옥(曲玉)이 장식품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을 들면서 닭 울음소리를 통해 황금궤 안에 있던 아기(김알지)가 발견됐다는 알지 신화와 연관지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임 교수는 기존의 시베리아 기원설에만 매달리는 학계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신라 금관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임 교수의 주장에 대해 임 교수의 해석은 김알지 신화가 핵심인데 그 신화가 금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5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도 사슴뿔 모양 외에 나무 모양도 많이 나타난다고 반박했다. 박선희 교수는 책에서 고조선시대 이후 나타난 관모(冠帽)의 형태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신라금관의 원형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특히 관모의 한 형태인 절풍(折風)에 주목했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머리를 올려 상투를 트는 고유한 머리 양식을 해왔는데 절풍은 상투를 튼 머리에 알맞은 관모 양식으로서 북방 지역에는 이런 양식이 없다는 것. 박 교수는 신라 금관이 출토될 때 금관 속에 쓰는 절풍도 함께 나왔다면서 고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관모 전통이 신라 금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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