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원차(腦原茶)의 모든 것 外

2016. 3. 31. 18:59차 이야기


뇌원차의 모든 것

영웅 2011.01.08 15:27


      

 뇌원차(腦原茶)의 모든 것


 

 

 


   뇌원차는 고려 왕실의 애용품으로 모든 진다의식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하사품이나, 외국에 공물로 보내는 예물로서도 사용했고 또는 부의품(賻儀品)으로도 사용 하였다. 이 차는 산지에 다소(茶所)를 설치하여 두고 그 산지에서 생산해서 공납하도록 하였으며 이처럼 거둬들인 차를 중중에 보관하였다가 국가의 대소 행사와 예물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 뇌원차는 병차(餠茶:떡차)로서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는 차였다.

다명(茶名)과 산지(産地)
   뇌원차라는 차 이름이 붙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견이 있다. 먼저 일본인 점패방지진(點貝房之進)씨의 <다의화(茶の話)>를 보면 [뇌원차의 제법과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일체 문헌으로 증거할 길이 없고 다만 고려의 토산차 이름이었다는 것만 추측이 된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뇌원차가 고려의 토산차 임에는 확실하나 그 제조방법과 이름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일본인 도엽군산(稻葉君山)씨의 <조선의 사원차(朝鮮의 寺院茶)>에 보면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이 차를 뇌환다(腦丸茶)라고 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뇌원차(腦原茶)라고 하는데 아마도 용뇌(龍腦)를 섞은 전다(塼茶:벽돌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뇌(腦)는 용뇌 즉 장뇌(樟腦)인데, 지금의 여러 차와는 달리 상당한 자극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것은 당송인(唐宋人)의 제법과 일치될 것이다. 다약(茶藥)이라는 말도 이 시대의 유물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뇌원다는 용뇌를 섞은 벽돌차가 아닌가하고 추측을 하였는데, 이 뇌원차란 이름도 용뇌를 섞었기 때문에 뇌(腦)자를 따서 뇌원차라고 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추리한 것이다. 이처럼 용뇌를 섞었기 때문에 뇌원차라고 한다는 견해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대의 한국인 문일평(文一平)씨는 그의 <다고사(茶故事)>에서 [뇌원다가 잎차가 아니고 떡 모양(餠樣)으로 빚어 만든 차이므로 떡 모양 일편(一片)이 1각(角)이 될지나 다만 몇각이 1근이 되는지 그는 알 수 없다고 하였음은 탁견(卓見)이라 하겠다. 이렇게 토산차 중에 뇌원차 같은 특수 명칭을 가진 우물(尤物)도 있어 국내에서와 함께 국제에서의 증품(贈品)으로 충용(充用)하기도 하였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뇌원차는 떡모양의 덩어리 차로써 특수한 이름을 가진 우수한 차인데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예물로 활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뇌원차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일본인 도엽군산씨의 말처럼 용뇌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뇌원차라고 하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뇌원다라고 하였을까. 이쯤해서 이성우(李盛雨)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우박사는 <고려이전 한국식생활사 연구(高麗以前 韓國食生活史 硏究)>에서 [실제로 전남에 뇌원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산지일런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성우박사는 뇌원차가 전남지방에 있는 뇌원이라는 지방에서 생산된 차일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는데 그러면 이 뇌원 지방은 지금의 어느 곳을 말하는지 이는 알수가 없다.

다음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풍속관계자료찰요(風俗關係資料撮要)>를 보면
[茶ノ一種. 腦原八高麗時代, 全南一地方, 地名 ニ行 其地ニ産七八茶ク如シ. 後ニ名 ヲ腦先茶 ナ代コ. 盖シ忠宣王, 諱ヲシ變更シタクワ王ノナラカ ]
[차의 일종. 뇌원이란 고려시대 전남 지방의 지명으로서 그곳에서 생산되는 차인 것 같다. 후에 그 이름을 뇌선차라 바꾸었다. 그것은 충선왕의 이름을 띠고 있으므로 변경한 것이리라.]
위의 기록을 보면 뇌원이란 고려시대 지명으로 전라남도에 소속된 지방을 가리킨다. 이 뇌원지방이 지금의 어느곳을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뇌원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뇌원차라고 하였으며 훗날 충선왕(忠宣王)의 어릴 때 휘(諱) 원자와 같은 음이라고 해서 원(原)자를 선(先)자로 바꿔서 뇌선차(腦先茶)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뇌원차는 일본인 도엽군산씨의 말처럼 용뇌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뇌원차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전라남도 뇌원지방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 지방의 지명을 따서 뇌원차라고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뇌원의 원(原)자가 충선왕의 휘와 같은 음인 자라서 충선왕 때 이를 뇌선차(腦先茶)라고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처럼 뇌원차는 전라남도의 뇌원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말하지만 고려 왕실에서는 많은 량의 뇌원차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많은 량을 뇌원지방에서만 생산하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외에 다른 지방에서도 뇌원차를 생산했을 것이며 고려때 다소(茶所)가 설치되어 차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지역이면 모두 뇌원차를 생산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량도 많았을 터이나 그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왕실의 대표적인 차이기 때문에 역대로 많은 량을 거둬들였을 것임은 확실하다.

뇌원茶를 만든시기

   뇌원차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이며 또 언제까지 뇌원차를 생산하였을까. 이 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고려사에 보면 고려 초기때부터 원차의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려사, 권 93, 열전(列傳) 권 제6, 최승노(崔承老)조를 보면,
[성종(成宗) 8년(989)에 죽으니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나이는 63세이다. 왕은 몹시 슬퍼하고 하교하여 그의 공과 덕을 표창하고 태사(太師)를 추증(追贈)했으며 베 1천필, 밀가루 3백석(碩) 멥쌀 5백석, 유향(乳香) 1백량, 뇌원차 2백각(角) 대차(大茶) 10근(斤)을 부조했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려초 성종 8년(989)에 이미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 기록이 최초이다. 이를 보면 뇌원차는 이미 성종 8년 5월에 부의품으로 하사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이 차는 그해 봄에 만들어진 차일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와 같이 뇌원차를 부의품으로 사용할 정도이면 차가 만들어 지기는 실질적으로 더 소급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뇌원차를 부의품으로 사용한 임금은 기록상 성종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2년전인 성종 6년(987) 3월에 최지몽(崔知夢)이 나이 81세로 죽자 왕이 슬퍼하며 부의로 베 1천필, 쌀 3백석, 보리 2백석, 차(茶) 2백각(角) 20근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이때 하사한 차가 2백각이라고 하였는데 이 차는 최승노에게 준 2백각과 수량이 똑 같고 차를 세는 단위가 똑 같고, 또 시기적으로도 2년 밖에 안되면 부의품으로 용도가 같고 하사하신 임금도 성종으로 똑 같다. 이로보면 최지몽에게 하사한 차 2백각도 뇌원차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뇌원차의 생산시기는 2년 이상 더 소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차를 하사하신 시기가 3월달이니 이때는 그해 차가 생산되기 전이다. 이 차는 전해(986년)의 생산품일 것이다. 또 이보다 생산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최승노가 성종께 올린 시무 28조(時務 28條)가 있다.

  [듣건데 성상(聖上)께서 공덕제(功德劑)를 설치하여 혹은 친히 차(茶)를 멧돌에 갈기도 하고 혹은 친히 보리도 간다하오니 신은 성체(聖體)의 근로(勤勞)하심이 깊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 폐단이 광종때 부터 시작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왕이 친히 떡차멧돌에 갈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 왕이 가는 차는 덩어리차로서 뇌원차를 말하는 것이다. 왕실에서 공덕제에 쓰는 차는 고려의 토산차 왕실의 전용차이며 고려왕실의 애용품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왕이 손수 차를 가는 의식은 4대 광종(光宗)때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뇌원차를 맷돌에 가는 의식은 광종(949∼975)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종 때(981∼997) 끝이 났으나 이때에 이미 뇌원차는 왕실의 의식용차로 사용 되었던 것이다. 이로보면 뇌원차가 만들어진 시기는 광종(적어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뇌원차 생산을 중지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이에 대해서는 문헌에 확실하게 전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충선왕이 뇌원차의 차이름을 뇌선차로 바꾸었다고 하니 적어도 충선왕(1308∼1313)때 까지는 뇌원차가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뇌원차는 고려 왕실의 전용차로서 고려초부터 고려말(충선왕)까지 계속 생산해서 진다의식에 충당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왕실에서 사용하였을 것으로)

외국에 예물로 보낸 뇌원다

   뇌원차외국에 공물로 보낸 예가 있었다.
고려사 권6, 세가제6, 정종(靖宗) 4년 조 에 보면,
[4년 가을 7월 갑인(甲寅)일에 김원충(金元沖)이 거란(契丹)에서 돌아왔다.(중간생략) 거란의 조서에 "표(表)를 올려 사은(謝恩)한 바를 살펴보니 조공(朝貢)과 아울러 금흡병(金吸甁), 은약병(銀藥甁), 복두사저포(幞頭紗紵布), 공평포(貢平布), 뇌원차(腦原茶), 대지(大紙), 세묵(細墨), 용수등석(龍鬚登席) 등을 진공(進供)한 일을 잘 알겠노라]고 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 공물로 뇌원차를 거란에 보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조공이란 본시 그 나라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으로 거란에 보낸 공물의 품목을 보면 모두가 고려에서 생산한 것들이다. 금흡병이나 은약병은 물론이요. 대지, 세묵 등 모두가 고려의 특산품인 것이다. 이 가운데 들어있는 뇌원차는 물론 고려의 어용차이다.

   궁중에서 어용으로 사용하는데 국가와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공물에 까지 뇌원차를 사용한 것을 보면, 뇌원차가 고려 왕실에서 점유하는 위치가 자못 컷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 예물로 보내는 물건은 그 품질이 뛰어나고 좋아야 하며 그 나라의 자랑거리가 될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고려의 뇌원차는 고려의 대표적인 차라고 할 수가 있으며, 고려왕실의 전용차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전용차가 거란에만 보냈을 이가 없다.

다음은 금(金)나라에 차를 공물로 보낸 기록이다.

고려사 16 세가권16, 인종(仁宗)조 에 보면,
[인종 8년(1130) 2월 기미일에 노영거 등 금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사은을 칭하여 올린 것을 살펴보러, 진상한 은그릇, 차, 베 등 물건과 올린 표는 이미 보았노라]고 하였다.

   인종때 노영거 등을 금나라에 보내서 은그릇, , 베 등을 진상했다고 하는데, 이때 보낸 차가 뇌원차인지 아니면 다른 차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차도 고려왕실의 전요차인 뇌원차일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은 원(元)나라에 차를 공물로 보낸 기록이다.

고려사절요 권 21 충렬왕(忠烈王)조 에 보면,
[충렬왕 18년(1292) 10월 을사일에 장군 홍선(洪詵)을 원나라에 보내서 향(香) 차(茶) 과일( ) 등의 물품을 바쳤다]고 하였다.
(遣將軍洪詵如元, 獻香茶 等物)

충렬왕 때 장군 홍선을 원나라에 보내서 차와 향, 과일 등을 바쳤다고 했는데, 이때 원나라에 보낸 차도 뇌원차일 것이다. 비록 차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고려왕실의 대표적인 차가 뇌원차이고 뇌원차로 모든 예물을 삼았고 또 모든 차의 대명사 처럼 쓰여졌기 때문이다.
(고려사 30, 세가 30, 충렬왕 18년 10월)
[乙巳 洪君還 遣將軍洪詵偕君如元獻香茶 等物]

부의품(賦儀品)으로 사용한 뇌원다 

   뇌원차는 고려왕실에서 역대 임금이 부의품으로 사용하였는데, 성종 임금이 내사령(內史令), 최지몽(崔知夢)에게 2백각(角)을 수시중(守侍中), 최승로(崔承老)에게 뇌원차 2백각대차 10근(斤)을, 평장사(平章事), 최양(崔亮)에게 뇌원차 1천각을 부의하였고 목종(穆宗)이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에게 뇌원차 2백각 대차 10근을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에게 차 2백각부의품으로 내린 일이 있었다.

고려사 권 93, 열전 권6, 최승로(최승로)조를 보면,
[성종 8년(989)에 죽으니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나이는 63세 이다. 왕이 몹시 슬퍼하고 하교하여 그의 공덕을 표창하고 태사(太師)를 추증했으며 베 1천필, 밀가후 3백석, 멥쌀 5백석, 유향 1백량, 뇌원차 2백각, 대차 10근을 부조했다]고 하였다.

   성종 8년(989) 5월에 수시중(守侍中)을 지낸 최승로가 죽자 부의품으로 많은 물품을 부조하였는데 이때 뇌원차 2백각을 함께 내려 주었다. 최승로는 경주(慶州)사람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래서 훗날 시무 28조(時務 28條)를 지어서 올렸는데, 이때 임금이 손수 차를 갈아 공덕제를 설하는 것을 보고 이를 폐지하자고 상소하여 이 제도를 폐지시킨 사람이다.

   다음은 평장사를 지낸 최양(崔亮)에게 뇌원다를 부조한 기록인데, 고려사 열전 6 최양(崔亮)조를 보면,
[성종 14년(995)에 죽으니 왕이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증직하고 부의로 쌀 3백석, 보리 2백석, 뇌원차 1천각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광빈(匡彬)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다.

   성종 14년(995) 여름 4월에 평장사를 지낸 최양이 죽자 성종 임금은 뇌원차를 1천쪽이나 주었다. 최승로와는 달리 대차(大茶)는 주지 않고 뇌원차만 준 까닭은 무엇일까. 6년 전에는 대다 10근을 최승로에게 주었는데 6년 후에는 대차는 주지 않고 뇌원차만 무려 1천각이나 주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에 대다는 보관한 차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은 목종(穆宗) 임금이 내사령을 지낸 서희(徐熙)에게 뇌원차대차를 부조한 일이 있다.

고려사 열전 7 서희(徐熙)조에 보면,
[목종 원년(997)에 죽으니 나이는 57세이다. 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부의로 베 1천필, 보리 3백석, 쌀 5백석, 뇌원차 2백각, 대차 10근, 전단향 3백량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장위(章威)란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다.

   목종 원년(997)에 내사령을 지낸 서희가 죽자 목종은 뇌원차 2백각과 대차 10근을 부조했는데 이는 전왕(성종)의 예를 따른 것이다. 이때 목종이 서희에게 부조한 것이나 성종이 최승노에게 부조한 것이 똑같은 분량이다. 8년전에 성종이 최승노에게 부조한 예를 따르고 2년전에 성종이 최양에게 부조한 사례를 따르지 않은 까닭은 정상적인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외로 성종 6년(987) 3월에 최지몽에게 차 2백각을 부조한 예나, 목종 7년(1004) 6월에 한언공에게 차 2백각을 부조한 사례는 모든 부의품 가운데 들어가는 뇌원차의 양을(2백각) 말하며 대차는 10근을 부조하였다. 이처럼 대신들이 죽으면 왕은 뇌원차 2백각과 대차 10근을 부조하였다



하사품으로 사용한 뇌원차

   뇌원차를 고려왕실에서 하사품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보면 여러 곳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먼저 고려사 7 세가 권 7 문종(문종)조를 보자

[문종 3년(1049) 3월 경자(庚子)일에 80살 이상된 국로(國老)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 ), 태자첨사(太子詹事) 이택성(李澤成) 등을 합문(閤門)에서 잔치했는데 왕이 친히 임석하여 술을 하사하고 이에 최보성과 조옹 등에게는 공복 각각 한벌과 복두(幞頭) 두장과 뇌원차(腦原茶) 30각(角)을, 이택성에게는 공복 한벌을 하사하고 또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正衙門)을 나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세 늙은이는 이를 굳이 사양했다.]

   이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다 나오는 기록인데, 문종이 은퇴한 고령의 노인들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풀고 예물을 주어 대접했는데 이때 뇌원차 30각을 하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신하들이 죽었을 때 부의품으로만 뇌원차를 부조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하들에게도 뇌원차를 하사하신 것이다.

   다음은 성종(成宗) 임금이 국로들과 그의 모처(母妻)에게 차를 하사한 사례를 보자 고려사 3, 세가권 3, 성종(成宗) 조에 보면, [성종 9년(990) 겨울 10월 갑자일에 서경(西京)에 흘러들어온 사람 중에서 88살 이상 자를 가려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3품이상은 공복(公服) 한벌, 5품이상은 채단 2필, 복두 2장, 차 10각, 9품 이상은 비단 한필, 복두 1장, 차 5각을 주고, 입류(入流)자의 모처(母妻)가 80살 이상된 자 중에서 3품 이상은 베(布) 14필, 차 2근(斤), 5품 이상은 베 10필, 차 1근, 9품 이상은 베 6필 차 2각(角), 서민 남녀 백살 이상된 자와 경관(京官) 4품에게 그 집과 겸해서 베 20필, 벼 10석 90살 이상은 베 4필, 벼 2석, 80살 이상과 독질자(篤疾者:불구자)에게는 베 3필 벼 2석을 하사했다]고 하였다.

   성종이 서경에 가서 그곳에 거주하는 자 중에서 80살 이상의 고령자에게 공복과 차, 베, 복두 등을 하사했는데 5품 이상은 차 10각(角)을 주고, 9품 이상은 차 5각을 주고 그들의 모처(母妻)에게는 3품 이상은 차 2근(斤)을 주고 5품 이상은 차 1근(斤)을 주고 9품 이상은 차 2각(角)을 주고 서민에게는 차를 주지 않았다. 이때 성종이 하사한 차는 두 종류인데 남자에게는 뇌원다를 주었고 여자에게는 대다(大茶)를 주었다.



   다음은 현종(顯宗) 임금이 나이 많은 백성과 불구자에게 차를 하사한 예인데, 고려사 4, 세가 권4 현종(顯宗) 조를 보면, [현종 즉위년(1009) 7월 신사일에 왕이 구정(毬庭)에 나아가 백성의 남녀 나이 80세 이상된 자와 불구자(篤疾者) 6백 35명을 모아 술밥(酒食), 포백(布帛), 차(茶), 약(藥) 등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辛巳御毬庭集民男女年八十以上及篤疾者六百三十五人贈酒食布帛茶藥有差)]고 하였다.
   현종이 구정에 80세 이상된 늙은이와 불구자 635명을 모아 술, 밥, 차, 비단 등을 주고 위로하였는데 이때 현종은 일반 서민에게도 차를 하사하신 것이다.

   또 현종은 일반 백성 90살 이상된 노인들에게 차와 약을 하사하였는데,
고려사 4, 세가 권 4, 현종조 에 보면,
[현종 12년(1021) 2월 갑술일에 서울(京城)의 남녀로서 나이 90살 이상 된 자에게 술, 밥, 차, 약, 베, 비단 등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甲戌賜京城男女年九十以上者酒食茶藥布帛有差)]고 하였다.
이번에도 현종은 90살 이상된 노인들에게 를 하사하셨다. 임금이 일반 백성들에게 차를 하사한 사례는 보기 드문 일이다.


   또 그 이듬해 가을에 현종 임금은 서울의 노인과 불구자들에게 차를 하사했는데,
고려사 4, 세가 권 4, 현종조 에 보면,
[현종 13년(1022) 9월 기사일에 서울의 남녀 80세 이상된 자와 불구자(篤疾者)에게 술, 밥,, 베 등을 차등있게 주었다.(九月己巳賜京城男女年八十以上及篤廢疾者酒食茶布有差)]고 하였다.

   현종이 서울에 거주하는 80살 이상 노인과 불구자들에게 차와 밥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차는 그 이름이 밝혀지지를 않아서 알 수가 없지만 뇌원다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원에 시주한 뇌원차

   다음은 사원과 승려에게 차를 하사한 사례를 살펴보자
고려사 8, 제가 권 8, 문종(文宗) 조 를 보면,
[문종 21년(1067) 9월 정유일에 국사(國사) 해린(海麟)이 늙어서 산중으로 돌아 가기를 청하므로 왕이 친히 현화사(玄化寺)에서 전송하고 , 약, 금.은그릇, 비단, 보물을 하사했다. (九月丁酉國사海麟請老還山王親餞于玄化寺賜茶藥金銀기四綠段寶物)]고 하였다.

문종이 해린국사께서 산으로 돌아가고자 청하니 융허하고 친히 현화사까지 나와 전송을 하면서 와 약을 하사했다. 이때 문종은 해린국사에게 차를 주었지만 숙종 임금은 절에다 차와 향을 시주했다.

고려사 11, 세가 권 11, 숙종 조 에 보면,
[숙종 4년(1099) 9월 정묘일에 왕은 왕비, 원자와 양부(兩府)의 군신들과 우세(祐世) 승통을 거느리고 삼각산(三角山)에 납시었다. 윤달 임신일에 상자사(常慈寺)에 행차하였고 갑술일에는 승가굴(僧伽窟)에 행차하여 제(齊)를 설하고 은향완수로(銀香椀手爐) 각 1벌과 금강자수정염주(金剛子水精念珠) 각 1벌, 금대(金帶) 한 개와 아울러 금화과수번(金花果繡幡) 차(茶) 향(香) 옷(衣)을 시주했다]고 하였다.
(金剛子水精念珠各一寶金帶一腰幷金花果繡幡茶香衣)

  이처럼 숙종삼각산 승가굴에 가서 제를 지내고 은향로와 수정염주 그리고와 향을 시주한 것이다. 그리고 어디를 순행하는 길이면 길 옆에 있는 절에는 의례히 차와 향을 시주했다.

고려사 12, 세가 권 12, 숙종조 에 보면,
[숙종 9년(1104) 8월 을사일에 촌부(村婦)와 야로(野老)가 다투어 길가에서 과일을 올렸다. 왕은 각자에게 베와 비단을 하사하셨다. 또 내부(內府)에서 차, 향, 옷가지를 내어 길가의 절에 시주했다.(八月乙巳村婦野老爭獻爪果于路各賜布帛文出內府茶香衣 施于路傍師舍)]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숙종은 순행하는 길 가에 있는 절에 내부에 명을 내려 차와 향 등을 시주 한 것이다.]


유공자에게 하사한 뇌원다

   다음은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포상을 할 때 를 하사한 사례이다.
고려사절요 제6권, 숙종조 에 보면,
[숙종 2년(1097) 가을 7월에 동여진의 적선(賊船) 10척이 진명현(鎭溟縣:한남 親德原의 남쪽 24리에 있음)에서 약탈을 하므로 동북면 병마사 김한충(金漢忠)이 판관(判官) 강증(康拯)을 보내니, 적과 싸워 이기고 배 3척을 노획(虜獲)하였으며 머리 48급을 베었으므로 김한충과 강증에게 은, 비단, 차, 약을 하사 하였다]고 했다.

(秋七月, 東女眞, 賊船十 , 寇鎭溟縣, 東北面兵馬使金漢忠, 遣判官康拯, 輿戰克之, 獲船三 , 斬首四十八級, 賜漢忠拯, 銀絹, 茶藥)
숙종여진족들이 칩입해서 약탈하자 이를 물리치고 돌아온 김한충강증에게 포상으로 은과 비단 그리고 차와 약을 하사하신 것이다.


   또 현종(顯宗)은 바다에서 근무하는 말단 군인들에게 차와 베를 하사했는데,
고려사절요 권 3, 현종조에 보면,
[현종 9년(1018) 2월 무진일에 해(海) 노(弩) 2군(軍)의 교위(校尉)와 선군(船軍) 이하에게 차(茶)와 베(布)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고 했었다.
(二月, 賜海弩二軍校尉, 船軍以下, 茶布有差)


   또 예종(睿宗)은 서북면병마사 박경인(朴景仁)이 임지로 떠나자 차와 약을 주고 위로하였다.
고려사절요 제 8권, 예종조 에 보면,
[예종 10년(1115) 8월에 서북면 병마사 박경작(朴景綽)이 어전에 나아가서 사례하고 떠나니, 이름을 고쳐서 경인(景仁)으로 하사하고 차와 약을 주었다고 했다.
(西北面兵馬使 朴景綽, 階辭, 故賜名景仁, 賜茶藥) ]



   다음은 문하시중 이정공(李靖恭) 흥왕사의 비문을 지어서 올리자 치하하고 를 하사했다.
고려사 절요 제 6권, 숙종조에 보면,
[숙종 2년(1097) 6월 무자일에 문하시랑(門下侍中) 이정공(李靖恭)이 흥왕사(興王寺)의 비문을 지어 바치자 조(詔)를 내려 칭찬하고 겸하여 비단, 은그릇, , 포목(布) 안마(鞍馬 안장 차린 말) 등을 하사하였다]고 했다.

(戊子, 門下侍中 李靖恭, 編進, 興王寺碑文, 賜詔奬諭, 兼賜匹段, 銀, 茶布, 鞍馬等物)


   그러면 이와 같이 공을 세운 신하들이나 나이 많은 국로(國老)들에게 차를 하사하는 관습은 언제부터 행하여 졌을까. 이는 고려사 태조(太祖)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태조 14년(931) 가을 8월 계축일에 보윤(甫尹) 선규(善規)를 보내어 신라왕에게 안장을 얹은 말과, 능라(綾羅), 채금(綵錦)을 선사하고, 아울러 백관에게는 채백(綵帛)을 내려주어 군인과 민간인에게는 차(茶)와 복두(幞頭), 승니에게는 차와 향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고 했다.
(秋人月, 遣甫尹善規, 遺新羅王, 鞍馬, 綾羅, 綵錦, 幷賜百官, 綵帛, 軍民, 茶幞頭, 僧尼茶香有差)
이상과 같이 태조 때부터 차를 선물로 사용하였던 점을 보면 이 관습은 아마도 삼국시대 부터 내려온 관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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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孺茶詩(유다시)와 뇌원차(腦原茶)| 자유게시판
장창환 | 조회 51 |추천 0 | 2012.09.29. 03:50


 

孺茶詩(유다시)

 

                   이규보(李奎報:1168~1241)  백운거사(白雲居士)

 

塼爐活火試自煎 전노활화시자전/ 화로의 센 불에 손수 차를 달여

手點花甕誇色味 수점화옹과색미/ 찻잔 빛깔과 차맛이 서로 버기네

黏黏入口脆且柔 점점입구취차유/ 향긋한 맛 입속에 부드럽게 녹으니

有如乳臭兒與稚 유여유취아여치/ 내 마음 어머니 젖내 맡는 애기 같도다

喫茶飮酒遺一生 긱다음주유일생/ 긱다와 음주로 평생을 보내면

來往風流從此始 내왕풍류종차시/ 오며가는 풍류는 이로부터 시작되리니

蕭然方丈無一物 소연방장무일물/ 적적한 방장엔 한 물건도 없고

愛聽笙聲壺鼎裏 애청생성호정리/ 숲속에서 들리는 생황소리를 즐기네

評茶品水是家風 평다품수시가풍/ 차의 품격과 물을 평하는 것이 가풍일 뿐

不要養生千世榮 불요양생천세영/ 어찌 양생하며 천세의 영화를 바라리오

書生寒餓長流涎 서생한아장류연/ 서생의 시장기가 장류 흐르듯 해도

只將口腹營甘旨 지장구복영감지/ 입과 배에 곡기만 들어가면 되리니

若遺孺茶生雅酒 약유유다생아주/ 만일 내게 보낸 유차(孺茶)가 아주(雅酒)보다 나음을 알면

勝事眞從吾輩始 승사진종오배시/ 이는 참으로 우리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리

 

 

   설봉산(雪峰山) 노규선사(老珪禪師)로부터 조아차(早芽茶)를 선물받고 이규보(李奎報)「유다시(孺茶詩)」를 남긴 것이다.

「유다시」라 한 것은 노규선사가 조아차백운거사(白雲居士)에게 보이면서 유차(孺茶)이름 붙이고 시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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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원차 腦原茶. 다소 茶所

 

뇌원차

 

   고려 왕실의 애용품으로 모든 진다의식에 사용했다.

그리고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하사품이었다.

외국에 공물을 보내는 예물로서도 사용했고 부의품 賻儀品으로도 사용하였다.

 

   이 차는 산지에 다소 茶所를 설치하여 그산지에서 생산해서 공납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거둬들인 차를 궁중에 보관하였다가 국가의 대소행사와 예물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뇌원다병다 餠茶 떡차로서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는차였다

 

   고려시대의 차의 특성은 20개 안팍의 다소 茶所에서 만들어졌다.

다소란 다원 茶園을 만들어서 채엽하여 직접 제다 製茶한 후 왕실 사원 등에 바치기도 했다.

 

   다도를 수련하기도 하는 곳으로 그 대표적인 곳이 동을산 冬乙山에 있었던 평교다소 坪郊茶所하동河東 화개 花開에 있던 화개다소 花開茶所 이다.

 

   평교다소는 사원에 차를 바치는 곳으로 다원의 둘레가 4만7천보步이고 화개다소는 주로 조정에 차를 바치는 곳으로 다전 茶田이 장광 長廣50 리였다 한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 대목은 초의 선사 草衣禪師 동다송 東茶頌이규보 李奎報 유다시 孺茶詩에 고증 考證하고 있다.


 


우리나라 차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좋은 차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차 孺茶.납전차 臘前茶.연고차 硏膏茶 그리고 세기의 명류인 중국의 구양수 歐陽修. 채군모 蔡君謨. 조선의 김정희 金正喜 이하응 李昰膺 등이 감탄하여 마지 않았던 용단승설차 龍團勝雪茶까지 수입 또는 제다하기에 이르렀다.

 

그밖에 자순차 紫筍茶 납면차 蠟面茶. 뇌원차 腦原茶 등 좋은 차가 만들어지게 됐다. 

 

   거기에 알맞는 다구다기 茶具茶器가 개발되는 것은 당연하여 신비의 비색 秘色을 발산하는 청자 靑磁를 위시하여 차맷돌.은화로 銀爐.솥 茶鐺 가지가지의 초두와 차술 茶筅 .차시 茶匙.연분 硏盆 등 약 30 여 가지에 이른다.

 

   차와 다구다기 조화를 이루어 차의 삼미 三味  色.香.味가 극치에 달하면 또 거기에 걸맞는 다례 茶禮가 숭상되기 마련이었다.

고려시대에 차를 관제 官制로 다스려 다방 茶房 행노군사行爐君士 다담군 茶擔軍 등이 그것이다.

 

   고려의 큰명절 연등회 燃燈會 음력2월15일  팔관회 八關會 음력11월15일 이였고 태조 왕건이 내린 훈요訓要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과 팔관이다.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요 팔관은 천령 天靈과 오악명산 五嶽名山과 대천 大川과 용신 龍神을 섬기는 일이니

군신이 회동하여 조진 祖眞께 섬배 贍排한 후에 제악諸樂과 백희百戱를 설하되 차로서 헌수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문신 최승로가 세상을 뜨니 왕이 그를 슬퍼하여 태사로 추증하고 베.쌀.유황 등을 부의 賻儀하였는데 그 속에 뇌원차 200각이 있었다고 한다.

 

   공신에게 차를 내리던 풍습이 있었으며 향가에도 차이야기가 나온다.

 

   충담사는 매년 삼짓날 중앙절에 차를 달여 미륵보살에게 올리는 예를 행하였는데 다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경덕왕을 만난 인연으로 (안민가安民歌 경덕왕742~765 때의 충담사의 향가) 를 지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고려의 대문장가 백운거사 이규보"늙고 병든몸 차품질을 따질 겨를이 있으랴 일곱잔 마시고 또 일곱잔 저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라며 차에 관한 한 호불을 가리지 않았던  다인 茶人원조였다.

 

   이규보 (고려 의종22년 1168~고종 28년 1241)는 고려 전 후기의 분수령이넜던 무신 집정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간 신흥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유교적인 현실관을 견지하면서도 민속신앙과 선도사상 仙道思想에도 깊은 관심을 지녔으며 마침내 불교에 귀의하여 이처럼 폭넓은 사상과 신앙의 층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인정 받았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국가적 요청에 부응하여 나라를 빛내는 이국화국 以國華國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차들은 그러나 대부분 중국 것들일 가능성이 크며 수입해 온 차로 귀한 물품으로 대접받았음도 추측하기 어렵지 않지만 왕이 백성들에게 를 하사했다는 것은 곧 백성들도 차생활을 했다는 반증이다.

 

 

뇌원차(腦原茶)의 견해

 

 「뇌원차는 전남의 뇌원이란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지만

용뇌(龍腦)의 향기를 흡착시켜 만든 단차(團茶)라는 김명배(金明培)의 說이 옳을 것이다.」

 - 설록지 1983년 12월호 P.6 -

 

   현재 뇌원차(腦原茶)에 관하여서는 김명배 說에 무게를 두고 고려시대 향차(香茶)로 단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김명배(崇義女專 茶道學 교수)의 해석과는 다른 견해도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규보의 「유다시(孺茶詩)」「부귀한 가문에서도 오히려 茶를 보기 어럽다」고 한 것이나

또 다른 茶詩에서 「수 많은 잎 따서 한 덩이 이루었으니 한 덩이에 천금인들 어이 쉽게 구할손가」 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그외 고려 문인들이 남긴 다시(茶詩) 중에는 영아차(靈芽茶), 노아차(露芽茶), 자순차(紫筍茶), 유차(孺茶) 등의 茶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찻잎의 어린순(芽)을 채취해서 만든 茶를 맷돌에 갈아 가루를 내어 가루차로 즐겨왔고 이를 통해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차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화려한 고려의 차 문화 속에는 뇌원차(腦原茶)도 있었다.


 

   뇌원차(腦原茶)는 정종 3년에 거란에 예물로 보내지기도 했으며,

문종 3년에는 80세이상의 노인에게 하사되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지몽(崔知夢), 최량(崔亮), 최승로 등이 죽었을 때 왕이 뇌원차(腦原茶)와 대차(大茶)를 내렸다고 한다.

예물 또는 하사품으로 내릴 정도이면 뇌원차(腦原茶)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茶이며 고급차라고 볼 수 있다.

 

   뇌원차(腦原茶)의 뇌(腦)는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를 가리키는 해석으로 보아야 한다.

머릿골 뇌. 초승달 모양 뇌, 눈썹모양 뇌 등으로 해석 된다.

 

   뇌원차(腦原茶)茶의 싹(芽)만을 따서 만든 茶이며, 茶의 어린순(芽)이 초승달이나 눈썹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뇌(腦)를 어떻게 용뇌(龍腦)향으로 해석하였는지에 관한 김명배 교수의 의도는 알 수가 없으나, 그의 해석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으며 뇌원차(腦原茶)가 용뇌(龍腦) 향기를 흡착시킨 향차(香茶)라는 說은 설득력이 약하다.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茶道古時
천사 | 조회 36 |추천 0 | 2010.03.10. 08:18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허흥식(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우리 차의 시대 구분

 

   우리나라에서 차를 유통시키는 공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의 재료를 파는 다상(茶商)과 마시도록 음료로 팔면서 사교의 공간으로 제공하는 다방이 있으나 차방이라 말하지 않는다. 언어는 자주 경음을 거쳐 격음으로 변하므로 서양의 ``티(Tea)``보다 우리 차의 한자음인 ``다``는 기원이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다``나 ``티``는 양자강 하류의 동남방 푸젠성의 사투리에 가깝고 이곳 천주(泉州)에는 아랍인과 유태인이 무역하였던 곳이므로 유럽으로 퍼졌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단군과 연결시킨 백산차(白山茶)가 있지만, 상록관목의 일반차보다 아주 작으며, 아한대 고산식물로 음료와 약으로 사용되었다. 일반 아열대성 식물인 차나무는 재배하였고 이를 채취하여 가공하였다. 차의 원산지는 히말라야 남쪽 산록과 중국 서남이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차는 영하 5℃를 내려가면 동사하며, 10℃ 이상 15℃까지는 뿌리는 자라지만 잎이 자라는 온도는 15℃ 이상이다. 더운 지방일수록 잎이 큰 차가 자라고, 우리나라의 모든 차는 기후의 한계로 잎이 화살촉처럼 좁고 끝이 날카로운 소엽이다.


   금관가야의 황후가 배에 싣고 왔다는 전설이 있고, 《삼국사기》의 공식기록은 838년이지만 이보다 앞서 가공한 차의 수입과 차나무의 재배가 간간히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에서 재배한 차는 모두 산차(山茶)로 변하였고 봄에 꽃이 핀다. 지금 재배하는 차는 1939년에 도입한 종자로서 가을에 꽃이 피는 차이가 있으며, 이를 교배하여 새 품종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는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신라 말기까지로 차의 정착기라 하겠다.

제2기는 고려 시대로 차의 재배가 서남 해안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되었고, 가공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내수는 물론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관찬기록에도 여러 차례 올라 있다.

제3기는 조선 시대로 어육을 제물로 사용하면서 차례라는 용어는 그대로 쓰였지만 내용이 달라지고, 극소수의 차인을 통하여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사용이 점차 줄었다.

제4기는 19세기부터이고 다산해거도인, 그리고 초의 등이 차를 소생시켰다.

제5기는 1939년 새로운 를 도입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계속된다.


   차의 시대 구분은 불교의 시대 구분과 거의 같다. 불교가 전래되었던 삼국 시대 중반부터 신라 말기까지 수용과 정착기이고, 새벽부터 이슬이 마르는 아침에 해당하였다.

 

   차와 불교의 한낮은 고려 시대였다. 이 시기에 제사는 고기를 쓰지 않은 소제(素祭)가 주류를 이루었고, 중요한 제전에서 진차례(進茶禮)가 있었다. 조선에서 차를 제례에 쓰지 않아도 언어의 관성에 의하여 차례라 하였다.

 

   조선 시대는 불교와 차가 극히 위축된 저녁 노을이었고, 19세기부터 소생하기 시작하였으나 어두운 밤의 반딧불과 같았다. 일제는 통계상으로 발전시켰으나 전통에서 발전하였다기보다 한밤의 식민지로서 하청업자와 같은 실험 재배와 수탈의 대상이었다.

 

 고려는 차 생산의 강국

   지금 우리나라는 차(車) 생산의 강국이지만 고려 시대차(茶) 생산의 강국이었다. 신라에서 예불에 차를 공양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자주 확인되고 《삼국사기》에는 828년 대렴지리산 기슭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보다 앞서 백제에서 일본으로 차를 전하였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차의 공양도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 시대에 차를 공양한 기록이 자주 실려 있다. 《고려사》에는 중요한 축제와 사신의 접대에 차를 올리는 진차례와 공신의 포상과 상례의 부의에 국가에서 차를 하사한 기록이 매우 풍부하다.
특히 고려의 지방제도를 갖추었던 성종현종시의 기록은 차의 수량이나 명칭, 그리고 사용에 대해서까지 자세하므로 당시 차의 가공법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라고 간단히 표시하거나 그마저 부의나 장례를 도왔다[賻增 賻恤 賜賻 護喪]``는 표현으로 생략하였다. 차의 이름으로 뇌원차(腦原茶) 대차(大茶)의 두 가지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차의 모양이나 이름, 그리고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거란의 기록에 쓰인 뇌환차(腦丸茶)는 뇌원차이고, 고려 후기에 충선왕의 이름을 피하여 뇌선차(腦先茶)로 실려 있다. 대차보다 고려차의 대명사처럼 쓰인 뇌원차는 고려의 최고급 차인가 일반 차인가 규명할 필요가 있다.


   뇌원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추정이 있었다. 20세기, ``뇌``란 용어가 포함되고 약과 함께 하사한 사실에 초점을 두고 용뇌(龍腦)를 사용한 약차라고 풀이한 일본 학자가 있었다. 용뇌*는 주사(HgS)와 명반이 결합된 광물로서 도가에서 단약으로 사용하였다. 광물질의 독성이 강한 주사를 청정한 차에 포함시킨다는 가공법은 상상하기조차 사리에 어긋나므로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 전재자 註 : 제다에 사용된 용뇌*는 장나무의 수지를 말린 장뇌(樟腦)와 유사한 삼나무 수지를 말린 한약재를 말한다.)


   뇌원차대차와 함께 쓰이므로 가공한 모양이나 크기에 따른 차이에 불과하다는 접근도 가능하겠다. 문종 시에 황보영에게 내린 대차 300근을 다른 예와 비교하면 뇌원차 200각과 대차 10근의 잘못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차는 1근 정도로 만들고, 뇌원차는 10각이 1근 정도로 모두 합치면 30근 정도였으리라 짐작된다. 굳이 뇌원차와 대차로 나누어 주었던 근거는 상례에 쓰기 간편한 소형의 뇌원차가 있었고, 장기 보관으로 조금씩 사용하기 위한 대형의 대차와 차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의 상례는 상례를 지나면 조석의 상식에 차를 사용하였고, 대차를 부수어서 장기간 사용하였다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작설차(雀舌茶)가 주로 쓰였다. 이는 곡우와 하지 사이에 어린잎을 따서 만든 최고급의 차인가? 소엽의 차를 따서 건조시킨 떡차가 아닌 엽차를 의미하는가? 의문이 있다. 소엽차를 말리면 어린잎이 아니더라도 작설차에 가깝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린잎은 우전차(雨前茶)라 엄격히 구분해서 불러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뇌원차나 대차가 엽차가 아닌 떡차일 가능성은 최승로의 상소에서 확인된다. 그는 광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여러 국왕이 사원에서 행하는 제전 진전의 조상 숭배에 몸소 맷돌을 돌려 차를 갈았고 이를 공덕재라 불렀다고 하였다. 차를 부수었다는 연차(碾茶)란 가루로 만들기보다 ?덩어리를 부순다?고 해석된다. 고려의 차가 견고하게 조성된 떡차[餠茶]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에서도 떡차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송의 차로 고려에서 수입한 납차(蠟茶), 용봉차(龍鳳茶), 소단(小團), 각차(角茶) 등이 보인다. 납차는 밀랍을 넣어 점질을 높이면서 차의 쓴맛을 줄이고 차의 부패를 방지한 차이고, 용봉차는 국왕의 사용과 무역에 쓰인 최고급차였다. 나머지는 둥글거나 네모지게 만든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뇌원차는 각이란 단위가 쓰인 바와 같이 소형 각차였을 가능성이 크다. 남연군의 무덤을 옮기기 위하여 넘어뜨린 가야사 탑에서 나왔던 승설차는 눌러서 용을 각인시킨 소형의 떡차였고, 용봉차나 뇌원차도 이와 같은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떡차는 조성 과정에서 벽돌처럼 단단하게 만든 차이다. 차를 덖으면서 짓이기거나 절구로 찌어서 이를 엿기름처럼 틀에 넣고 다져서 형태를 다양하게 만든 차이다. 떡차는 단단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부수어서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덖는 과정에서 짓이기므로 찻잎의 원형과 영양이 파괴되고 잎 모양이 손상된다. 명대에는 떡차가 아닌 잎의 형태로 물에 넣으면 살아나는 엽차로 대세가 변하였다. 조선 시대의 작설차도 물에 넣으면 어린잎이 다시 피어나는 엽차이고 고려의 뇌원차나 대차와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고려에서 공신의 부의뿐 아니라 국가의 유공자, 노인에게 국왕이 고마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사한 물품 가운데도 뇌원차대차가 포함되었음이 틀림 없다. 《고려사》에 자주 등장하는 성종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던 국왕으로 유명하다. 국가 유공자의 포상과 그들의 죽음, 늙은 백성들에게 하사한 물품인 차는 국민통합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려는 국왕의 노력에 사용된 값진 선물이었다.(복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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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자 註

용뇌향(龍腦香) - [한글동의보감]

성질은 약간 차며[微寒](따뜻하고[溫] 평(平)하다고도 한다) 맛은 맵고[辛] 쓰며[苦] 독이 없다. 눈에 생긴 내장과 외장을 낫게 하며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눈에 피지면서 예막이 생긴 것을 낫게 한다. 명치 밑에 있는 사기와 풍습, 적취를 없애며 3충을 죽이고 5가지 치질을 낫게 한다.

○ 영남 지방에서 난다. 생김새는 매화의 꽃판(梅花瓣) 같은 것이 가장 좋다. 그의 맑은 향기는 여러 가지 약들보다 앞설 수가 있으나 늘 먹을 약으로는 못 된다. 한 가지만 쓰면 약힘이 약하고 다른 약을 배합하여 쓰면 효과가 좋다. 차에 넣어 마셔도 좋다. 찹쌀 태운 것과 상사자(相思子, 홍두)를 합하여 저장하여 두면 날아가지 않는다[不耗][본초].

○ 즉 파률국(婆律國)에 있는 삼나무의 진이다. 용뇌향은 흘러내린 향기로운 액체이다. 생김새는 송진과 비슷하고 삼나무 냄새가 나며 투명하고 매화꽃판처럼 깨끗한 것이 좋다. 약에 넣을 때에는 따로 갈아 쓴다[입문].

○ 용뇌는 화(火)에 속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찬 것으로 잘못 알면서 그의 성질이 헤치는[散] 작용이 있어 찬약과 비슷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이면 기가 곧 다 흩어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냄새가 센 것은 헤치는 작용을 빨리 나타낸다는 뜻이다[단심].

○ 용뇌는 신(腎)에 들어가서 뼈의 병을 낫게 한다[강목].

○ 상사자는 영남 지방에서 나는데 나무의 너비가 10여자나 된다. 씨는 검붉은 것이 좋다[본초].

○ 검정콩(흑대두)이나 골풀(등심초)과 함께 보관해도 향기가 날아가지 않는다[속방].






뇌원차| 우리차
늘복 | 조회 76 |추천 0 | 2007.09.14. 02:22



   하동군 쌍계사  입구에 차의 시배지 비석이 있다.  시배지라 함은 녹차를 처음 재배한 곳이라는 뜻인데, 중국사대주의와 왜의 식민지 정책의 표상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우리 녹차는 동차(東茶)라 함이 마땅하다.

동차는 두륜산(해남)일대 (대흥사)보성읍 징광사 그리고, 지리산의 고산 준령에서 고려 때부터 찬연한 자태와 내용으로 발달되어왔다.

   대만「동방미인」이라는 상호(브랜드)가 붙은 넓적한 찻잎의 "오룡차"도 아니고, 순수 신차(新茶)인 「작설차」가 조선조 이후의 왕실전용차이었으며, 고려시대는 녹차를 국가경영의 수단으로 삼았던 송(宋)나라와 교류되었던 각차(角茶)「뇌원차」가 유명했다.

   각차라 하면 덩어리차를 의미하는데 보이차(푸얼차)와 다르다.

묵은 찻잎이 곰팡이가 실어 발효된 「보이차」는 우연한 산물이었지 당초부터 있던 녹차종류는 아니다.


   중국 당나라 때부터 이름을 날렸던 황제만이 즐겼던 공차(貢茶)의 순종은 지금 중국에서도 「대홍포」라는 브랜드로서 그 명맥이 전할 뿐인데, 우리 고려의 동차의 원조이자 암차(岩茶)의 토종일 소위 「뇌원차」는 안타깝게도 실종되고 말았다.

   뇌를 맑게 해서 "뇌원차"인가? 아니면 보이현의 보이차같이 「뇌원」이라는 차 생산지의 고지명(옛 지명)을 따서 뇌원차라고 불렀는지는 학계간의 논의가 분분하다.


   중국 역대 황제만이 애용했던 공차(貢茶)와 대결했던 옛 고려의 자랑 「뇌원차」는 어떤 것이었을까?

뇌원차를 찾아내는데 부수조건 즉 지남철은 

1)조선쑥을 알아야 되며 

2)토종 적송 소나무를 알아야 하며 

3)고려 산삼을 투철하게 알아내야 수수께끼가 풀린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던 고로 고려 명차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차로서 마음을 씻고 성불했던 고승대덕과 그들이 머물던 고찰 예컨대 쌍계사, 대흥사 그리고 징광사(보성 소재)를 검증해 봐야 된다.

원래 고급 녹차 즉, 공차(貢茶)는 불로장생의 원망과 염원이 침전된 양생목적 불로초였지 마시며, 노니는 기호품은 아니다.

진시황이 중국 토종 "녹차"가 없어 동방에 동남동녀 5백을 보내어 불로초인 녹차를 찾게 했던가? 실마리는 여기서 풀어야 된다.

우리나라 고지명(古地名)은 우리나라에 숨겨진 보배의 보물섬 찾기, 지도의 암호이다.  그것이 「왕실양명술」 이경화선생에게서 홀로 전수받은 필자의 비밀이다.


   예컨대, 울진(경북)군은 예전엔 강원도에 속했으며,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지명은 "우진"이었다.  우는 아! 라고 소리치는 감탄사요, 진은 보배진(珍)인데, 우진이 울진으로 변음이 된 것이다.

왜? 고구려인들이 만주 백두산일대의 산삼을 두고 남녘 울진 땅을 <아! 보배>라고 힘주어 말했던가? 그것은 미래지향적으로 그곳이 금강송인 토종 적송나무의 고향이라는 뜻과 고려산 「자수정」이 매장되었다는 지명(地名) 암호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강원도 춘천 춘성군 동명 월곡리에서 연옥인 백옥이 채광되어 웬만한 가정에는 춘천옥 반지, 춘천옥 팔찌 등이 다 있을 만큼 수년전까지 온 나라에 유행 보석 행세를 했다.


   월곡(月谷)이란, 뜻은 바다를 연상시키는데 달의 인력관계로 바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고, 달의 리듬이 지구상 생명체의 바이오리듬과 무관하지 않다.

즉, 백옥과 연옥은 고대로부터 바다 속에서 융기와 침몰을 반복했던 마그네슘성 규소광물이다.

춘성군 동면 월곡리 야산에는 토종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무성하다. 즉, 옥광산의 필수조건은 토종 소나무 숲인 것이다. 

호박색, 비취색, 쪽빛 물감의 색채는 이미 색채로 인간심층의 깊은 병뿌리를 치유하고, 안정시켰던 것이다.


   옛 중국황제의 전유물인 공차(貢茶)인 신차(新茶)의 찻물빛깔은 은은한 호박색이었다.  호박은 엄밀하게 말해서 광물이라기보다 큰 소나무 송진이 뿌리 부근에 수천년 이상 흘러내려 화석과 같이 된 "송진"의 변형이다.

호박보석속에 모기 같은 벌레가 같이 화석이 되어 있음을 본다.

일본인들이 일제 36년간 조선의 불가사의로 숙제를 가졌는데 


1)왜? 왕가에서 황토를 애지중지하고 궁전을 짓는 땅이 황토층이라야만 되었고, 왕이 행차(행궁)시 미리 약황토를 행선지에 뿌렸던가?

 2)고려 시대 도자기(청자)와 함께 동방의 보물일 「뇌원차」의 정체는 무엇이었으며 

3)고려청자, 이조백자의 도기 굽기의 비결은 무엇이고 

4)고려 유밀과는 어떻게 만들었던가? 


등 4대 숙제를 갖고 있었다.


   중국 송나라는 도자기 굽기가 녹차개발에 국력을 기울여 그런 풍조가 고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황제의 애용 공차(貢茶)는 황실 재테크의 상징이었다.


   중국 무이산 제6봉, 제7봉에서 아침 안개와 이슬을 먹고 자란 절벽위의 5백년 이상 된 차나무의 새순을 따서 만든 신차는 이런 차가 움직이는 곳에 정치가 돌아간다.  즉, 권력의 향배가 결정된 1년에 1kg밖에 생산 안 된 「대홍포」라는 암차(岩茶)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도연명 시인이 만년에 뽕나무밭 갖기를 소원했다면 모택동은 만년에 스스로 가꾸는 다원(茶園)에서 옛 황제의 하사차(下賜茶)라는 암차(岩茶)-용정차-밭 가꾸며 이런 장생불로초로 90객의 건강을 가꾸려 했던 것이다.


   스위스의 닐한스 세포 치료 연구소, 루마니아 장수 연구소, 소련의 여류생화학자중탄산수 장수법 같은 것을 전부 도입하고, 치료받았던 불로장수 마니아라면 모택동이 암차(岩茶)의 "불로장수효능"을 놓칠 리가 없다.

명나라 시대 대표적인 공차(황제 전용 녹차)는 소주산 「호구차」, 「천지차」, 강소성산 「양선, 안휘성「송몽차」, 강서성산 「백로차」등이어서 현재도 그 내림밥상인 「여산운무차」, 「계평서산차」등으로 브랜드가 남아있다.


   그런데, 조선조 개국 초기 이성계, 이방원 부자에서 세종 임금 때까지 명나라 황제가 특히 탐냈던 대차, 각차, 뇌원차가 2백근씩 명황제와 황태자에게 국가적 선물로 동지사 등을 통해 호송되었던 것이다.  가치 없는 조선차라면 명황제가 왜 몹시 탐을 냈을까?

옛 송·원·명·청제국에서 환관 즉 내관에 의한 측근정치는 유명해서 정승과 황제를 조정·전복시킨 내관들의 행각은 권력게임의 표본이었거니와 그런 내관들의 파워보다 한수 우위의 배우실력자는 바로 황제에게 공차, 하사차를 수집·납품했던 차장수(차상(茶商)들이었다는 것이다.


   중국황제는 그런 하사차 즉, 공차를 가지고 주변 강대한 호적(오랑캐)을 녹차선물로 다스리고, 자기 막료와 변방 도호부사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있었다.

고려의 황제는 개국공신 등에게 재물(財物)대신 대차, 각차를 하사했다.

중국의 예사 암차(岩茶)밭 무이산 골짜기에서 5백년 이상 된 차나무 새잎차는 현재 1년에 1kg을 생산하여 ⅓은 최고 권력자에게 전해지고 ⅓은 동남아 VIP(경제왕들)의 선물로 전해지며, 나머지 ⅓은 국가공무원들이 보관했다가 봄철에 20g단위로 국제입찰공매에 붙인다는데 20g당 이천오백만원에도 그런 「대홍포차」 순정품이 없어서 못 판다니 옛 고려홍삼의 희귀성은 「공차」와 가격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중국차의 슈퍼브랜드인 녹차절강성산 「서호용정차」, 강소성「벽라춘차」, 안휘성산 「황산모봉」, 청차인 경우 복건성산 「무이암차」, 황차로는 호남성「군산은침차」등이다.  옛 중국송담에 "정치가 움직이면 차(녹차)도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또, 이런 속담의 뒷받침으로 「흑면족」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즉 악랄한 상법으로 가짜차를 만들어 팔고, 호아제를 상대로 농간을 부려 치부하는 차장수를 말했다.


   암차란 보랏빛 안개가 자욱한 지리산 천왕봉 부근 같은 환경하의 절벽바위틈에서 5백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녹차나무의 봄의 새순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그런 바위의 희귀원소(Trace Element)를 흡수한 생명나무를 뜻한다.  (중국 맥반석과 관계가 있다.)

분명 옛 「뇌원차」는 한국 서남해안 두륜산, 지리산의 절벽에서 채취했을 것이고, 계절풍을 타고 한반도로 약바람을 가장 먼저 맞이한 차나무였을 것이고, 거제도 기암괴석위의 천년송, 낙락장송 같이 차나무의 나이가 5백년 이상 되어야 했을 것이다.

혀바닥밑 침샘을 녹이는 듯한 그런 차의 「단맛」 이 맛이 인간의 몸을 알칼리성으로 돋구어주고, 만 가지 병의 뿌리를 삭혀 없애며, 늙음의 원인인 체내 과산화지질을 분해·배출시키는 공능(功能)있는 그런 차라야 미래 한국의 달러박스를 채워 줄 수 있다.

그런 분야에서 최전방에 나선 것이 중국 녹차 행정이고, 대만의 오룡차대책이며, 일본이 혈안이 되어 세계적으로 개최하는 시즈오까현 주최 오·차국제심포지엄이다.


   기후는 완도, 보길도, 해남 암석은 화강암 사질토(운모성 점토광물)로 오대산, 설악산, 외금강의 암석 이런 환경조건이 딱 들어맞는 곳에서 옛 「뇌원차」가 재발굴될 수 있겠다.


 





[인물, 서적] 대각국사 의천의 차선일미와 뇌원차 - 최석환| 2. 차, 다기 이야기
초인목 | 조회 89 |추천 0 | 2003.03.17. 23:58

대각국사 의천의 차선일미와 뇌원차-최석환
차인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지와 차시, 차기록 연구 -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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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의 차선일미와 뇌원차

차문화 2001. 1-2월호

최석환 (사)한국차문화협회 이사·편집주간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조계산(曹溪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仙巖寺)는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를 거쳐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 의천(義天)이 3창(三創)한 이래 송광사와 더불어 남쪽의 가장 유명한 명찰로 이름이 높았다. 육우『다경』에서 “차는 남쪽에서 자란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선암사 주변에는 야생 차나무 군락이 즐비하여 옛부터 불가에 유명하였다.
우리가 선암사를 주목하게 된 까닭은 선암사의 3번째 중창주인 대각국사 의천의 부도 및 금란가사, 진영이 보존되어 있어 국사의 자취와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차문화협회 이귀례 회장과 일행은 고려의 차승으로 상석에 등장하는 의천의 차선일여의 경지를 살펴보고 ‘뇌원차(腦原茶)’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선암사 대각암을 찾았다.

송과의 차문화 교류에 영향 미친 의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문종의 4번째 왕자였다. 하루는 문종이 여러 왕자를 불러놓고 물어 보았다.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도(道)를 닦겠는가.”
침묵이 흐른다.
“어째서 말이 없는가.”
이때 4번째 왕자인 후(煦)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소자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습니다. 오직 아바마마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문종은 놀랍고 기쁜 얼굴로 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의천의 나이 11살이었다. 의천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다. 출가한 뒤 송나라로 들어가 지자탑원에서 서원을 세운 바와 같이 고려에 들어와 천태종을 개창하고 법안종을 흡수하여 5대 선원을 세우고 선교쌍수의 정신을 이어 나간다.
해동 천태종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는 의천을 통해 송과의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각국사가 열반하자 비석이 모두 3곳에 세워진다. 고려 인종 3년(1125) 개성 영통사(靈通寺)대각국사비가 세워지고 고려 숙종 6년(1101)에 개성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칠곡 선봉사(僊鳳寺)에도 대각국사비석이 세워진다. 최근 북한 정부는 개성 영통사 복원을 일본 대정(大正)대학에 의뢰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한 바 있다. 발굴 결과 대각국사 의천의 석함과 묘탑이 발견되었다. 또 개성 흥왕사에 세워졌던 대각국사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터에서 발견되어 조선 총독부 시절에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길이가 50센티가 채 안되는 이 묘비에는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가 재차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어 국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는다.

   이 대목으로 보아 중국의 천우황제가 의천을 차의 스승으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송황실에서는 의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왕실 어용차인 용봉단차를 선물하는 등 중국에 1년 7개월간 머무는 동안 극진한 예를 표했던 것만 보아도 범상한 일이 아니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송나라의 어용차 용봉단차
   송나라 휘종『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도 용봉단차를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였고 왕우칭(954~1001)의 「용봉차시」에도 용봉차의 귀중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樣標龍鳳號題新 용봉무늬 새겨 새롭게 이름지어
賜得還因作近臣 가까운 신하에게만 하사하셨네.

   의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용봉단차를 주었으니 의천은 자연 차선일미의 정신에 젖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천이 남긴 3수의 차시 중 「승에게 차를 준 것에 대한 화답의 시(和人以茶贈僧)」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北苑移新焙 북쪽 동산에 새로 말린 차를
東林贈進僧 동림에 계신 스님에게 선물했네
預知閑煮日 한가로운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泉脈冷敲氷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의천이 입송중 누군가에게 차를 선물받고 고마움의 시를 쓴 것 같다. 북쪽 동산은 복건성 건안현을 말하며 그곳에서 생산되던 용봉단차를 선물 받은 것으로 해석되고 동림은 정토종의 발상지인 혜원법사가 주석하던 동림사를 말한다.
의천이 주석했던 항주 고려사는 중국 차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용정차의 고향으로 자연히 의천은 차와 천태의 사상을 둘로 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송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의천은 귀국한 뒤 천태산 지자탑원에서 발원한 대로 천태종를 개창하고 선과 교의 진리 속에 차선일미의 정신세계로 젖어 든다.

의천의 정신 살아 있는 대각암
   의천을 통해 고려와 송은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송의 용봉단차가 고려로 수입되고 고려의 뇌원차가 송에 수출되는 등 의천이 차문화 교류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보여진다. 의천이 활동했던 고려시대에 차문화는 하나의 정신문화로 자리잡는다. 이때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중에 차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의천은 왕실로부터 어차(御茶) 20각과 약 1은합을 하사받는다. 

   의천의 자취를 찾다보면 차와 만나게 되는 곳이 선암사 대각암이다. 대각암은 의천이 말년에 주석했던 곳으로 의천의 부도가 있는 곳이다. 차인들에게 대각암은 의천의 차향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선암사에는 차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차유적이 남아 있다. 돌을 깎아 만든 찻물받이 상탕·중탕·하탕이 지금도 석간수를 흘러 내리고 있으며 석간수 위로 대각국사가 채다를 했었다는 차밭이 펼쳐져 있다. 그외에도 응진당 부엌에 조왕신을 모셨던 단이 있으며 차부뚜막은 6~7년 전까지 보존되다가 지금은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다. 

   절문 안으로 들어서니 암주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암주인 묘각스님이 차 한 잔을 내어 놓자 이귀례 회장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의천스님에게 헌다하고자 왔습니다.”“대각국사 종제일도 아닌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오셨습니까?”“의천의 법향이 숨쉬는 대각암의 부도전에서 차를 올리고 고려 차문화를 이끌어 온 뇌원차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 왔습니다.”묘각스님은 반기듯 차를 권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스님에게 고려 뇌원차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각암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여쭈었다.
“대각국사의 자취가 곳곳에 있지만 특히 이곳 대각암은 아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국사의 호를 따서 대각이라고 붙였는데 대각이란 깨달음을 뜻합니다.”묘각스님과 차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종남 부회장은 어느새 한복을 갈아입고 헌다준비를 하고 있었다. 묘각스님의 인도로 송부회장이 대각국사 부도전에 헌다를 올렸다.
우리 일행은 대각국사의 차정신이 살아 있는 대각암에서 뇌원차의 의미를 되새겼다. 문득 의천의 차시(茶詩) 한 수가 떠오른다.

이 술에 젖은 몸동산에서 무엇을 구하려나
밝은 달밤에 차 끓이며
속세의 근심 잊어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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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차문화 2001. 11-12월호)


꽃차 달이고 달빛 삶아 세상 근심 씻어낸다
- 차인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지와 차시, 차기록 연구

이형석
본지 주간ㆍ본협회 이사


   고려 제11대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의 넷째 아들이며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속장경 4,740여권을 간행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5)의 생애와 탄생지 그리고 차시와 차에 관련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 송나라 황제와 황태후로부터 최고급 차를 하사받고 이에 사례하는 글을 지어 바쳤으며 음다 생활의 심오한 경지를 아름다운 시로 표현한 차인이었다. 그리고 여러 의식 행사(제사, 봉헌 등)에 다과(茶果)를 올린 기록이 남아 있다.
대각국사가 지은 차시와 글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황제께 차약을 내리신 것을 사례하는 표 / 성자(聖慈;황제)께서 특별히 차(茶)20각(角;도량형 단위)과 약, 은합(銀盒)을 내려 주시며 의관을 단정히 하시고 대하시니 특별히 돌보아 주심에 위로되며 부드러운 싹과 신령스런 약으로 총애를 넉넉히 보여주시니 공경히 받들어 돌아옴에 영화로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쌓였습니다.

●황태후께 사례함 / 용봉다(龍鳳茶)를 하사하는 것을 사례하는 표(대각국사 문집 6권)

●스님에게 차를 준 사람에게 화답함 / 북쪽 동산에서 새로 볶은 차를/ 동쪽 숲에 사는 스님께 보낸다/ 한가로히 차달일 날 미리 알고/ 찬 얼음 깨고 샘줄기를 찾는다.

●농서의 학사가 임천사를 생각하며 지은 시를 보이매 그 운을 따서 화답함 / 한 곳에 옛절이 있어 원람(鴛籃)이라 부르니 / 문으로 가는 길 깨끗하고 푸른 봉우리 마주하고 있네 / 빽빽한 숲에 잠긴 구름 전각을 둘러 싸고 / 엷은 장막 달과 함께 사자자리 호위하다 / 강(講)하고 솔난간 돌면서 시 읊은 마음 괴롭지만 / 차밭의 차볶는 향기 폐를 씻어 서늘하다 / 주장자 걸어둠은 불법을 배우려는 뜻이지만 / 고향산의 옛집을 꿈속에서 그려본다.

●사례로 주는 차에 화답함 / 이슬 동산 봄 봉우리 아래 무슨 일을 할것인가 / 꽃차 달이고 달빛 삶아 세상 근심 씻어낸다 / 가벼운 몸부림 당하지 않고 삼동(三洞)에노니 / 뼛골 속 으쓱하니 가을에 들어 온 듯 / 신선 같은 인품 종과 범패 소리가 적합하고 / 맑은 향기는 시주(詩酒)하기에 좋아라 / 영다(靈丹) 먹고 장생한 것을 누가 보았던가 /불문을 향해 그런 일은 묻지를 마라.

●제문(祭文)
문종에 대한 제문(송나라에 들어 가서 지음); 신(臣)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 등을 갖춰 선고 고려 국왕 영가에 재를 올리고 아뢰옵니다. 아, 슬픕니다!  생각하옵건대 아무개를 길러 주신 은혜 깊으나 낳으신 은덕을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하 생략)
경덕국사에 대한 제문 : 제자 아무개는 다과(茶果)와 제철 음식을 올리고 선사 경덕국사 영전에 경건히 제사 드립니다.
선종에 대한 제문 : 신 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와 깨끗한 제수를 갖추어 대행대왕 영가에 경건히 제사드옵니다.
분황사 원효성사에 대한 제문 : 사문 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와 제철 음식을 갖추어 해동의 교주이신 원효보살게 바치옵니다.
금산사 적법사(寂法師)에 대한 제문 : 사문 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를 올리고...
용두사 우상(祐詳)대사에 대한 제문 : 삼가 시자 아무개를 보내어 다과(茶果) 등의 제수를 갖추어 고 용두사 유가 강주의 영전에 제를 올립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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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부에서 2001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사람은 위와 같이 훌륭한 차시와 글, 행적을 남긴 대각국사 의천이다.
우리 차인들은 국사의 차에 관한 업적과 사상 및 국사와 관련된 개성 영통사를 비롯 중국 산동반도의 판교진(청도), 밀주, 해주, 변경, 남경, 숙주, 양주, 진강, 가흥, 항주, 대주, 천태산, 명주, 정해 등과 우리나라의 순천 선암사 대각암, 송광사, 구미 금오산 선봉사, 영동 천태산 영국사, 합천 해인사 또 천태종 사찰인 단양 구인사, 서울 관문사, 부산 삼광사 등 유적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대각국사 탄생추정지에 비를 세우고 헌다의식 거행.

   의천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김부식이 쓴 영통사 비명의 기록인 ‘을미년(1055)9월 28일,궁중에서 탄생했다’는 내용에 의거해 막연히 개성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1933년, 인천부에서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고려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仁睿)왕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으며 대각국사가 배출된 때문이다. 대각국사는 인천(현 부천군 관교리)에서 탄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871년에 발간된 <인천부읍지>에 고려 순종,숙종 때 군(郡)객사 뒷편 대청을 어실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대각국사는 인천의 어실(별궁) 또는 부근에 위치한 외가에서 출생, 대각국사 비문의 기록인 ‘궁중에서 탄생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인천(인주) 이씨가 고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게된 것은 이허겸(李許謙) 때의 일이고 이자연 때에 이르러서는 왕가의 외척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천을 7대어향(7代御鄕)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 제11대 문종에서 제17대 인종에 이르는 7대, 80년간 왕의 외향(外鄕;외가)이거나 왕비의 내향(內鄕;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御)자는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로서 ‘어향’이란 ‘왕의 고향(뿌리)’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1452년 편찬한 <고려사절요>인종 4년 2월,신유(辛酉)조왕(인종)이 외가에서 생장(生長;나서 자라람)하였으므로 그 은혜를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당여가 조정에 가득하여...’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인종은 확실히 외가에서 낳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열전 ‘명의태후 류씨’조‘숙종 2년 궁주가 아들을 낳으니(生子) 왕은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같은 책’문경태후 이씨’조'예종4년 사저(私邸)에서 원자(元子)를 낳으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고 은그릇,능라 등 선물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공예태후 임씨도 1127년 의종을 낳았을 때,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이는 왕의 비빈이 왕손을 친정에서 출산하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 축하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외가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기른다’는 풍속에 대해 <조선왕조실록>(태종조)권 29‘예조에 아뢰기를 전조(고려)의 구속 혼인의 예는 남자는 여자집에 들어가 자식이나 손자를 낳고 기르므로 외친의 은덕은 중하여 외조부모,처부모의 복은 30일로 한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 때 친정에서 출산하는 일은 당시 생활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은 당시 최고의 벼슬인 시중이었으며 당시 서울인 개성과 친정인 인천은 멀지않은 거리였으므로 대각국사는 외가인 인천에서 출생하였을 가능성과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가천문화재단을 비롯한 인천의 향토 문화관련 단체에서는 공동으로 학술답사, 조사연구, 토론회, 학술발표회 등을 거쳐 지난 해 9월 28일. 인천 남구 학익동 인주골 인주초등학교 교정‘대각국사 의천탄생추정지’비를 세우고 헌다식을 거행한바 있다.



cafe.daum.net/choinmock/Ixuy/832  초인목(艸人木)





우리나라 최초의 차 - 뇌원차| │☆..*크아 茶室 *..☆│
  하얀갈매기 | 조회 54 |추천 0 | 2002.11.06. 16:32
 
우리나라 최초의 명차 (뇌원차)

  우리나라 차시에 처음 등장하는 차 이름은 뇌원차이다.
그동안 뇌원차에 관한 접근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다.

1. 뇌원차는 각차 즉 덩이차로, 헤아리는 단위는 각으로 987년부터 1049년 사이에 생산되었다.
2. 주로 신하들 상례의 부의와 외교상의 예물로 쓰였고, 팔관회, 공덕재 등의 국가행사에 쓰였을것으로 보이는 어용단차이다
3. 그 이름이 상징하는 뜻으로 보아 용뇌 등의 향료가 첨가된 향차일 것이다.   뇌원차(腦原茶) / 한국차문화(정영선, 너럭바위 1992)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뇌원차의 전모이다.  임금이 신하나 백성들에게 차를 하사하는 풍속은 이미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특별히 중국차를 가리키는 말로는 한명이나, 중국의 차이름인 용병봉단 등의 이름이 쓰여졌다.
불교가 국교가 된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보다 저 자주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차를 하사하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에서 차를 하사한 처음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조14년 가을 8울 계축일에 보윤과  선규 등을 보내어 신라의 왕에게 안마, 능라, 채금을 보내고 아울러 백관들에게 채면을, 국민들에게는 차화 복두, 승려들에게는 차와 향을 각각 차별지게 하사하였다.[고려사]

   국민들과 승려들에게까지 모두 하사할 정도의 양이라면 그것은 수입된 차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란 등과 교류할때, 외교상의 물품으로 쓰여진 차로 뇌원차가 나오는데, 주요 토산품을 선물하는 외교상의 관례로 비추어 볼 때 뇌원차가 우리의 토산차 중에서 상당한 고급 수준의 차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기록들을 참고할 때 고려초기에 이미 뇌원차와 같은 고급 토산차와 대차와 같은 일반적인 차가 상당량 생산되어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한 상례에 5번의 차를 영전에 올린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각종 행사에 차가 더 많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례에서의 차의 용도는 영전에 올리는 것외에, 문상객을 위한 접대용 차 그리고 부장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하여 절터에 있는 탑을 헐어 구리로 만든 작은 부처와 사리등과 함께 발견한 승설이라는 4개의 덩이차를 들 수 있다. 뇌원차도 이와 같이 부장품으로 쓰였을 덩이차의 하나이다.
          
 




*** 전재자 註 : 1. " 뇌원차(腦原茶) / 한국차문화(정영선, 너럭바위 1992)"  

                 2.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하여 절터에 있는" 구절은 본문 이해를 위하여 전재자가 추가함.






고려 거상의 현대적 조명高麗巨商 槪觀

高麗巨商 槪觀

   고려 거상이 출현한 배경은 고려가 해상세력이 건국한 나라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알려져 있듯이, 고려를 건국한 왕건 선대의 활동 무대는 개경이었다. 개경 일대는 예성강 임진강한강이 어우러져있으며 이들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강화도 등의 섬들이 위치하고 있다. 한마디로 해상활동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왕건의 선대는 이 지역을 무대로 국내외의 해상무역을 주도하여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호족들과 연합하여 정권을 굳건히 하였다. 이들 호족들 가운데는 여러 인물이 해상에 세력의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정주(오늘날 개풍군 풍덕)의 유력한 해상세력인 류천궁의 딸을 첫째부인(후에 신혜왕후)으로, 그리고 나주 목포의 해양세력인 오다련의 딸을 둘째부인(후에 장화왕후)으로 삼았다. 당진지역의 해양세력으로 추정되는 복지겸박술희도 이때 이미 왕건에게 포섭되었다. 이렇듯 해상세력이 중심이 된 고려는 출범자체가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던 상인들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의 전통은 계승되어 나아갔고 고려는 상업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이러 볼 때 상업을 주도한 상인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사회적 지위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상업이나 상인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며 그나마 내용 자체도 소략하다. 그것은 『고려사』가 성리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상인은 사농공상 가운데 가장 천한 신분이었지만 신분에 걸맞지 않는 편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한 계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상인인즉 아무 일 없이 놀면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누에치지 않고도 비단옷을 입고 지극히 천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라는 『고려사절요』 권35 공양왕 3년 3월조의 기록은 상인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기록으로 미루어 상인 가운데는 상업 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했던 거상이 출연했음을 알 수 있다.“부유함이 공실(公室)을 능가하여 참람하게도 왕후에 비기어질” 정도로 그들이 축적한 부의 규모는 왕후에 비견될 정도였다.

   고려시대에는 곡물, 포, 자기, 차, 인삼 등 수요가 많은 물품을 품목별로 취급했던 상인이 나타나고 송, 거란, 여진, 일본 등의 나라와 무역을 하는 무역상도 있었다. 고려시대의 거상은 육로보다는 주로 해상을 통해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의 거상은 정치사가 1170년(의종24) 무신란을 기점으로 전기후기가 구분하는 것과는 다르게 원간섭기를 전후로 하여 그 시기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원간섭기를 전후로 하여 상인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원간섭기 전에는 호족 세력을 위주로 해상무역을 통하여 상업이 발달했다면 원간섭기 이후에는 권력과 유착하여 세력을 확대하거나 조공무역, 밀무역을 통하여 성장한 거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 전기의 거상은 앞서 언급한 유천궁, 오다련, 박술희 뿐만 아니라 왕봉규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왕건과의 인연을 맺었던 해상세력이거나 호족이었다. 또 무인정권기에는 송유인이선, 이영진 등이 상업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상은 원간섭기 이후에 훨씬 많이 나타나며 그 양상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 거상(巨商)으로는 조윤통, 제국대장공주, 박경량, 손기, 왕삼석, 임신, 남궁신, 충혜왕, 임회, 윤장, 장자온, 위견, 백거마 등이 주목된다. 특히 충혜왕은 고려왕실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교역을 장악하여 대원무역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대원무역을 수행했던 거상들은 남궁신, 윤장, 임회 등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수량의 베와 무명, 금․은, 보초(寶鈔) 및 인삼을 취급하여 교역함으로써 고려 왕실의 재정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하였다. 나아가서 고려 거상으로서 정치,사회적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또 원간섭기라는 시대적 특성에 따라 고려의 관리들도 조공무역이나 밀무역을 통해서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송분, 한중례, 우제, 안익, 이숭인, 박돈지, 유원정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려 후기 거상들이 주로 교역했던 물품은 조윤통인삼, 제국대장공주 인삼과 잣, 박경량 베(布)와 쌀(米), 손기모시(苧布), 왕삼석한약재(漢藥材), 임신의 경우는 사기그릇(沙器), 남궁신베,무명,금,은,보초(寶鈔), 임회와 윤장내고(內庫)의 토산품(土産品), 장자온조공품(朝貢品)과 말(馬), 그리고 위견과 백거마금․은(金銀) 등이었다.

   충혜왕 같은 이는 왕실 자체에서 원나라와의 교역을 주도하면서 국가재정을 확충시켰다. 고려 거상의 활동을 인물을 기준으로 교역장소, 교역 물품 등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전기

순서인물교역장소교역로(국내외 육로, 해로)품목(물품의 수량)비고
1왕봉규(王逢規)명주(당)강주(진주)-완도-흑산도-명주  
2오다련(吳多憐)명주(당)나주-완도-흑산도-명주  
3박술희(朴述熙)장안혜성(면천)대진(大津)-백령도-등주-장안  
4류천궁(柳天弓)장안정주(개풍)-백령도-등주-장안  
5허선문(許宣文)한강국내 수로  
6권행(權幸)안동국내 육로  
7장정필(張貞弼) 국내 교역  
8두도제(杜道濟)명주벽란도-흑산도-명주 귀화인
9축연조(祝延祚)명주벽란도-흑산도-명주 귀화인
10송유인(宋有仁)명주벽란도-흑산도-명주  
11이선(李善)경주국내 교역소금, 체 
12이영진(李英搢)고령국내 육로생선 
13왕공(王珙)    


2.고려후기(원간섭기~고려말) 상업활동 관련 인물 목록

순서인물교역장소교역로(국내외 육로, 해로)품목(물품의 수량)비고
1조윤통(曹允通)원나라 북경(北京)국내외 육로 : 개경→의주→요양→산해관→북경 인삼(人蔘) : 수백 근대표적 거상(巨商)
2정향(丁香)고려 충주국내 육로 지방 상인
3임정기(林貞杞)고려 국내국내 육로백미(白米),과실(果實),화예(花蕊)를 매매?嬖臣의상업 활동
4송분(宋玢)여진(女眞)국내외 육로 : (史書 미발견) (상주→춘주→등주→화주?) 쌀(米穀)밀무역
5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 원나라 강남(江南)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항주?) 인삼(人蔘), 잣(松子) 대표적 거상(巨商)
6박경량(朴景亮)원나라 북경(北京)국외 육로 : (史書 미발견)베(布) : 10만 필(匹)
쌀(米) : 4백 곡(斛)
대표적 거상(巨商)
7손기(孫琦원나라 북경(北京)국외 육로 : (史書 미발견)모시(苧布)대표적 거상(巨商)
8최노성(崔老星)(원,고려)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거상(巨商)
9이인길(李仁吉)(원,고려)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거상(巨商)
10이노개(李奴介)고려 벽란도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거상(巨商)
11왕삼석(王三錫)원나라 북경(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한약재(漢藥材)?대표적 거상(巨商)
12백응구(白應丘)원나라 북경(北京)국외 육로․해로 : (史書 미발견) 거상(巨商)
13임신(林信)고려 개경(開京)국내 육로사기그릇(沙器)대표적 거상(巨商)
14송명리(宋明里)고려 개경(開京)국내 육로 嬖臣의 상업 활동
15남궁신(南宮信)원나라 유주(幽州) 북경(北京) 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백령도→등주→북경?) 베,무명(布木) : 2만 필
금(金),은(銀)초(鈔 : 寶鈔)
대표적 거상(巨商)
16영부금(寗夫金)고려 국내국내 육로인삼(人蔘)거상(巨商)
17충혜왕(忠惠王)고려 개경(開京)국내 육로베(布) : 48,000필(匹)
인삼(人蔘)
고려국왕,대표적 거상(巨商)
원나라 유주(幽州) 북경(北京) 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백령도→등주→북경?) 베,무명(布木) : 2만 필
금(金),은(銀)
초(鈔 : 寶鈔)
내탕(內帑)의 재물
18임회(林檜)원나라 북경(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백령도→등주→북경?) 내고(內庫)의 재물 대표적 거상(巨商)
19윤장(尹莊)원나라 북경(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백령도→등주→북경?) 내고(內庫)의 재물 대표적 거상(巨商)
20한중례(韓仲禮)원나라 蘭秀山 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蘭秀山?) 蘭秀山 해적선(賊船)을 구입함 밀무역
21우제(禹磾)북원(北元) 수도 국외 육로 : (史書 미발견)  밀무역
22지불배(池佛陪)고려 개경(開京)국내 육로 거상(巨商)
23변벌개(邊伐介)고려 개경(開京)국내 육로 거상(巨商)
24장자온(張子溫)명나라 남경(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남경?)고려의 공물(貢物), 말(種馬) 대표적 거상(巨商)
25위견(魏堅)명나라 요동(遼東) 국내외 육로 : (史書 미발견) (평양→의주→요양?) 금,은(金銀) 대표적 거상(巨商)
26안익(安翊)명나라 남경(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남경?) 사무역
27백거마(白巨麻)명나라 남경(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남경?)금,은(金銀) 대표적 거상(巨商)
28이숭인(李崇仁)명나라 남경(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남경?)백금(白金),모시(苧布), 삼베(麻布) 사무역
29박돈지(朴敦之)명나라 남경(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남경?) 사무역
30유원정(柳爰廷)명나라 남경(南京)국외 해로 : (史書 미발견) (벽란도→등주→양자강→남경?)  사무역
31박구(朴球)울주   

* 교역장소,교역로,품목은『高麗史』世家․列傳과『高麗史節要』에서 확실히 나타나는 것만 기입했음
* 교역로 항목에서 교역로가 史書에서 발견되지 않을 경우 ‘(史書 미발견)’으로 표기하였음
* 품목 항목에서 교역했던 품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빈 칸으로 그대로 놓아두었고, 구체적 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공물’이나 ‘어느 물품’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 그대로 반영하였음

   해상국가로 출범한 고려에는 얼마나 많은 거상들이 있었을까. 또 그들이 축적한 부는 국가경제에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국가재정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고려거상의 상도정신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등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에는 아직도 미흡하다.
   앞서 이야기 하였지만, 『고려사』등 사료에는 상업사 관련 기록이 극히 미미하여 이러한 우리의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사서, 문집 등의 기록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의 관련기록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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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토산차, 뇌원차(腦原茶)
프로파일 편안한 오후 2016. 3. 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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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뇌원차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주 생소하고 낯선 이름으로, 차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라 해도 잘 모를 수 있는 그런 차인데요...
쌍계명차 김동곤 명인의 저서, <다담설화>를 인용해서 말씀드리면
뇌원차(腦原茶)는 고려의 토산차로,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인 989년부터 문종(재위 1046~1083) 때인 1049년까지 6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기록에 나타나는 차(김동곤, <다담설화>중에서 인용)라고 합니다.
뇌원차는 문종 3년(1049)의 기록을 끝으로 도깨비같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요,
<고려사>에 총 5번 기록되었다고 하는 뇌원차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성종 8년(989) 수시중 최승로가 죽으니 왕이 매우 애통해하며 ...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유향 1백 근, 뇌원차(차의 일종이다) 2백 각, 대차(大茶) 10근을 부의하였다.'
 
'성종 14년(995) 4월에 평장사 최향이 죽으니 왕이 매우 애통히 여겨... 쌀 3백 석, 보리 2백 석과 뇌원차 1천 각을 부의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목종 원년(997) 7월, 대사령 서희가 죽으니 베 1천 필과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뇌원차 2백 각, 대차 10근과 매향 3백 량을 부의하고...'
 
등등의 기록이 있는데요, 아쉬울만큼 적은 분량의 기록이라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기록들로 몇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문일평 선생은 <차고사(茶古事)>에서
 
'그리고 뇌원차는 고려 성종 연간에 거란에 예물로 보냈으므로 토산차임이 틀림없으나 그 명칭의 유래를 알 수 없다 한다 '  하였고,
 
차 연구가 김명배 선생은 <다도학>에서 뇌원차
'보르네오, 수마트라에서 전래된 용뇌(龍腦)의 향기를 차에 흡착시킨 착향차(着香茶)' 라고 추정했는데
'송나라에서 용뇌의 착향차를 만든 시기(976~1053)와 거의 일치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초의 선사<동다송>에서
   '크고 작은 용단, 봉단은 정위가 만들기 시작해서 채군모가 완성하였다. 향기로운 약(香藥)을 섞어 덩이차를 만들고, 그 위에 용과 봉황의 무늬로 장식하였다. 임금에게 바치는 것은 금으로 장식하였다. 소동파의 시에, 자금색 덩이차 백 개에 일만 금을 들여서 만든다 하였다' 하고
뇌원차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용단, 봉단은 흔히 용봉 단차라고 하는 것으로, 차에 용뇌를 섞어서 황실의 상징인 용과 봉황을 새기고 금으로장식한 진상 전용차였다고 합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뇌원차거란에 조공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임금의 하사품으로 이용되기도 한 어용단차(御用團茶)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용뇌를 섞은 어용 단차처럼 호화로운 장식을 한 고급 단차였을 거라는 군요.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뇌원차는
1. 덩이차(團茶, 餠茶)이고,
2. 용뇌 향을 흡착시킨 착향차이며,
3. 먹을 때는 곱게 가루 내어, 끓인 물을 부어 거품을 내어 휘저어 먹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용과 봉황의 무늬로 장식하고, 자금색 덩이차 백 개에 일만 금을 들여서 만들었다니...

상상만 해도 후덜덜하지 않습니까? 



茶, 또는 餠茶 종류의 덩이차, 이런 덩이차에 용뇌를 착향한 것이 뇌원차라고 생각됩니다. (사진 : 한국제다 차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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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토산차, 원차(腦原茶)

2016.03.24





뇌원차|우리차

늘복 | 조회 86 |추천 0 |2007.09.14. 02:22 http://cafe.daum.net/cntea/Etaf/3 
 

   하동군 쌍계사입구에 차의 시배지비문이 있다.  시배지라함은 녹차를 처음 재배한 곳이라는 뜻인데, 중국사대주의와 왜의 

식민지 정책의 표상을 연상케 표상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우리 녹차는 동차(東茶)라함이 마땅하다.

동차는 두륜산(해남)일대 (대흥사)와 보성읍 징광사 그리고, 지리산의 고산 준령에서 고려 때부터 찬연한 자태와 내용으로 

발달되어 왔다.

대만의 「동방미인」이라는 상호(브랜드)가 붙은 넓적한 찻잎의 "오룡차"도 아니고, 순수 신차(新茶)인 「작설차」가 조선조

이후의 왕실전용차 이었으며, 고려시대는 녹차를 국가경영의 수단으로 삼았던 송(宋)나라와 교류되었던 각차(角茶)의 

「뇌원차」가 유명했다.

각차라하면 덩어리차를 의미하는데 보이차(푸알차)와 다르다.

묵은 찻잎이 곰팡이가 실어 발효된 「보이차」는 우연한 산물이었지 당초부터 잇던 녹차종류는 아니다.

중국 당나라 때부터 이름을 날렸던 황제만이 즐겼던 공차(貢茶)의 순종은 지금 중국에서도 「대홍포」라는 브랜드로서 그 

명맥이 전할 뿐인데, 우리 고려의 동차의 원조이자 암차(岩茶)의 토종일 소위 「뇌원차」는 안타깝게도 실종되고 말았다.

뇌를 맑게 해서 "뇌원차"인가? 아니면 보이현의 보이차같이 「뇌원」이라는 차 생산지의 고지명(옛 지명)을 따서 뇌원차라고 

불렀는지는 학계간의 논의가 분분하다.

중국 역대 황제만이 애용했던 공차(貢茶)와 대결했던 옛 고려의 자랑 「뇌원차」는 어떤 것이었을까?


   뇌원차를 찾아내는데 부수조건 즉 지남철은 

1)조선쑥을 알아야 되며 

2)토종 적송 소나무를 알아야 하며 

3)고려 산삼을 

투철하게 알아내야 수수께끼가 풀린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던 고로 고려 명차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차로서 마음을 씻고 성불했던 고승대덕과 그들이 머물던 고찰

 예컨대 쌍계사, 대흥사 그리고 징광사(보성 소재)를 검증해 봐야 된다.

원래 고급 녹차 즉, 공차(貢茶)는 불로장생의 원망과 염원이 침전된 양생목적 불로초였지 마시며, 노니는 기호품은 아니다.

진시황이 중국 토종 "녹차"가 없어 동방에 동남동녀 5백을 보내어 불로초인 녹차를 찾게 했던가? 실마리는 여기서 풀어야 된다.

우리나라 고지명(古地名)은 우리나라에 숨겨진 보배의 보물섬 찾기, 지도의 암호이다.  그것이 「왕실양명술」을 이경화선생

에게서 홀로 전수받은 필자의 비밀이다.

예컨대, 울진(경북)군은 예전엔 강원도에 속했으며,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지명은 "우진"이었다.  우는 아! 라고 소리치는 감탄

사요, 진은 보배진(珍)인데, 우진이 울진으로 변음이 된 것이다.

왜? 고구려인들이 만주 백두산일대의 산삼을 두고 남녘 울진 땅을 <아! 보배>라고 힘주어 말했던가? 그것은 미래지향적으로 

그곳이 금강송인 토종 적송나무의 고향이라는 뜻과 고려산 「자수정」이 매장되었다는 지명(地名) 암호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강원도 춘천 춘성군 동명 월곡리에서 연옥인 백옥이 채광되어 웬만한 가정에는 춘천옥 반지, 춘천옥

 팔찌 등이 다 있을 만큼 수년전까지 온 나라에 유행 보선 행세를 했다.

월곡(月谷)이란, 뜻은 바다를 연상시키는데 달의 인력관계로 바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고, 달의 리듬이 지구상 생명체의 

바이오리듬과 무관하지 않다.

즉, 백옥과 연옥은 고대로부터 바다 속에서 융기와 침몰을 반복했던 마그네슘성 규소광물이다.

춘성군 동면 월곡리 야산에는 토종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무성하다. 즉, 옥광산의 필수조건은 토종 소나무 숲인 것이다. 

호박색, 비취색, 쪽빛 물감의 색채는 이미 색채로 인간심층의 깊은 병뿌리를 치유하고, 안정시켰던 것이다.

옛 중국황제의 전유물인 공차(貢茶)인 신차(新茶)의 찻물빛깔은 은은한 호박색이었다.  호박은 엄밀하게 말해서 광물이라기

보다 큰 소나무 송진이 뿌리 부근에 수천년 이상 흘러내려 화석과 같이 된 "송진"의 변형이다.

호박보석 속에 모기 같은 벌레가 같이 화석이 되어 있음을 본다.


   일본인들이 일제 36년간 조선의 불가사의로 숙제를 가졌는데 

1)왜? 왕가에서 황토를 애지중지하고 궁전을 짓는 땅이 황토층이라야만 되었고, 왕이 행차(행궁)시 미리 약황토를 행선지에 

뿌렸던가? 

2)고려 시대 도자기(청자)와 함께 동방의 보물일 뇌원차」의 정체는 무엇이었으며 

3)고려청자, 이조백자의 도기 굽기의 비결은 무엇이고 

4)고려 유밀과는 어떻게 만들었던가? 

등 4대 숙제를 갖고 있었다.


   중국 송나라는 도자기 굽기가 녹차개발에 국력을 기울여 그런 풍조가 고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황제의 애용 

공차(貢茶)는 황실 재테크의 상징이었다.

중국 무이산 제6봉, 제7봉에서 아침 안개와 이슬을 먹고 자란 절벽위의 5백년 이상 된 차나무의 새순을 따서 만든 신차는 이런

 차가 움직이는 곳에 정치가 돌아간다.  즉, 권력의 향배가 결정된 1년에 1kg밖에 생산 안 된 「대홍포」라는 암차(岩茶)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도연명시인이 만년에 뽕나무밭 갖기를 소원했다면 모택동은 만년에 스스로 가꾸는 다원(茶園)에서 옛 황제의 하사차(下賜茶)

라는 암차(岩茶)-용정차-밭 가꾸며 이런 장생불로초로 90객의 건강을 가꾸려 했던 것이다.

스위스의 닐한스 세포 치료 연구소, 루마니아 장수 연구소, 소련의 여류생화학자의 중탄산수 장수법 같은 것을 전부 도입하고, 치료받았던 불로장수 마니아라면 모택동이 암차(岩茶)의 "불로장수효능"을 놓칠 리가 없다.

명나라시대 대표적인 공차(황제 전용 녹차)는 소주산 「호구차」, 「천지차」, 강소성산 「양차차」, 안휘성의 「송몽차」, 

강서성산 「백로차」등이어서 현재도 그 내림밥상인 「여산운무차」, 「계평서산차」등으로 브랜드가 남아있다.

그런데, 조선조 개국 초기 이성계, 이방원 부자에서 세종 임금 때까지 명나라 황제가 특히 탐냈던 대차, 각차, 뇌원차가 2백근

씩 명황제와 황태자에게 국가적 선물로 동지사 등을 통해 호송되었던 것이다.  가치 없는 조선차라면 명황제가 왜 몹시 탐을 

냈을까?

옛 송·원·명·청제국에서 환관 즉 내관에 의한 측근정치는 유명해서 정승과 황제를 조정·전복시킨 내관들의 행각은 권력게임의

 표본이었거니와 그런 내관들의 파워보다 한수 우위의 배우실력자는 바로 황제에게 공차, 하사차를 수집·납품했던 차장수

(차상(茶商))들이었다는 것이다.

중국황제는 그런 하사차 즉, 공차를 가지고 주변 강대한 호적(오랑캐)을 녹차선물로 다스리고, 자기 막료와 변방 도호부사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있었다.

고려의 황제는 개국공신 등에게 재물(財物)대신 대차, 각차를 하사했다.

중국의 예사 암차(岩茶)밭 무위산 골짜기에서 5백년 이상 된 차나무 새잎차는 현재 1년에 1kg을 생산하여 ⅓은 최고 권력자에

게 전해지고 ⅓은 동남아 VIP(경제왕들)의 선물로 전해지며, 나머지 ⅓은 국가공무원들이 보관했다가 봄철에 20g단위로 국제

입찰공매에 붙인다는데 20g당 이천오백만원에도 그런 「대홍포차」 순정품이 없어서 못 판다니 옛 고려홍삼의 희귀성은 

「공차」와 가격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중국차의 슈퍼브랜드인 녹차는 절강성산 「서호용정차」, 강소성의 「벽라춘차」, 안휘성산 「황산모봉」, 청차인 경우 

복건성산 「무이암차」, 황차로는 호남성의 「군산은침차」등이다.  옛 중국송담에 "정치가 움직이면 차(녹차)도 따라 움직인

다."는 말이 있다.

또, 이런 속담의 뒷받침으로 「흑면족」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즉 악랄한 상법으로 가짜차를 만들어 팔고, 호아제를 상대로 

농간을 부려 치부하는 차장수를 말했다.


   암차란 보랏빛 안개가 자욱한 지리산 천왕봉 부근 같은 환경하의 절벽바위틈에서 5백년이상의 수령을 가진 녹차나무의 봄의 

새순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그런 바위의 희귀원소(Trace Element)를 흡수한 생명나무를 뜻한다.  (중국 맥반석과 관계가 있다.)

분명 옛 「뇌원차」는 한국 서남해안 두륜산, 지리산의 절벽에서 채취했을 것이고, 계절풍을 타고 한반도로 약바람을 가장 먼저 맞이한 차나무였을 것이고, 거제도 기암괴석위의 천년송, 낙락장송같이 차나무의 나이가 5백년이상 되어야 했을 것이다.

혀바닥밑 침샘을 녹이는 듯한 그런 차의 「단맛」 이 맛이 인간의 몸을 알칼리성으로 돋구어주고, 만 가지 병의 뿌리를 삭혀 

없애며, 늙음의 원인인 체내 과산화지질을 분해·배출시키는 공능(功能)있는 그런 차라야 미래 한국의 달러박스를 채워 줄 수 

있다.

그런 분야에서 최전방에 나선 것이 중국 녹차 행정이고, 대만의 오룡차 대책이며, 일본이 혈안이 되어 세계적으로 개최하는 

시즈오까현 주최 오·차국제심포지엄이다.

기후는 완도, 보길도, 해남 암석은 화강암 사질토(운모성 점토광물)로 오대산, 설악산, 외금강의 암석 이런 환경조건이 딱 

들어맞는 곳에서 옛 「뇌원차」가 재발굴될 수 있겠다.   



                                                             원차

20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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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거상의 현대적 조명뇌원차 腦原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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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원차 腦原茶

    시기

    고려시대/고려전기

    이칭/별칭

    뇌원차(腦元茶)

    출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거란국지(契丹國志)』

    정의

    고려 중궁에서 음용하던 어용차

    주요내용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거란(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차(茶)의 한 종류이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뇌원차(腦元茶)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자료에 등장하는 뇌원차는 공을 세운 신하가 죽었을 때 하사하는 부의품(賻儀品)이나 장수(長壽)한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또는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물품으로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려 궁중에서 음용하던 어용차인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이른 기록으로는 989년(성종 8) 5월에 최승로(崔承老)가 죽었을 때 200각(角)을 부의품으로 하사한 것을 들 수 있고, 그 후 같은 성종 때 최량(崔亮)이 죽었을 때 1000각, 문종 때 80세가 넘은 국로(國老)인 최보성(崔輔成)과 조옹(趙顒)에게 각 30각을 하사한 기록이 보인다. 이 차를 세는 단위가 무게(斤)이 아닌 각(角)인 것을 들어 엽차(葉茶)가 아닌 떡차(餠茶 : 벽돌차)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고, 또한 차의 이름에 관해서도 용뇌(龍腦)를 섞어 만든 떡차라서 뇌원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전남지역에 있던 뇌원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집필자 의견

    집필: 송재웅

    참고문헌

    이용범(李龍範), 「여란무역고(麗丹貿易考)」(『한만교류사연구(韓滿交流史硏究)』, 동화출판공사, 1989)
    박한남(朴漢男), 「북방민족과의 관계」(『한국사』15, 국사편찬위원회, 1995)
    위지강(魏志江), 「遼金與高麗的經濟文化交流」(『중한관계사연구(中韓關係史硏究)』, 中山大學出版社, 2006)


    고려 거상의 현대적 조명 원차 腦原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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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일보

    [박정진의 차맥] <36>불교와 차의 황금기 ③ 대각국사 의천, 뇌원차 수출

    입력 2012.05.07. 18:13 수정 2012.05.0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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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명품 뇌원차 송나라로 수출.. 양국 문화교류 앞장


       [세계일보]이차돈의 죽음과 함께 불교를 공인하는 데 성공한 신라 23대 법흥왕은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왕위를 미리 선양하고 승려가 되었다. 법흥왕은 이름을 법공(法空)이라고 하고 신라에서 창건된 첫 사찰인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왕자들 가운데는 왕위를 얻지 못하면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승려는 왕족들의 신분에 걸맞은 귀족이었다. 신라 왕자 출신의 승려들은 중국에서도 특급대우를 받으며 대륙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무상선사김지장 스님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밖에도 여럿이 있다.


    선암사에 보존되어 있는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 진영.


       이러한 전통은 이어져 고려 문종의 네 번째 아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도 왕자의 신분으로 출가하여 천태종이라는 종파가 한국 땅에 존재하게 하는 연원이 되었다. 그는 중국 땅에서 지금 절강성 서호 부근의 혜인원에서 주석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의 출가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하루는 문종이 여러 왕자를 불러놓고 물어보았다.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도(道)를 닦겠는가."

    침묵이 흐른다.

    "어째서 말이 없는가."

    이때 4번째 왕자인 후(煦)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소자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습니다. 오직 아바마마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문종은 놀랍고 기쁜 얼굴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의천의 나이 11살이었다. 의천은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다. 출가한 뒤 송나라로 들어가 지자탑원에서 서원을 세운 바와 같이 고려에 들어와 천태종을 개창하고 법안종을 흡수하여 5대 선원을 세우고 선교쌍수의 정신을 이어 나간다. 대각국사가 열반하자 비석이 모두 3곳에 세워진다. 고려 인종 3년(1125) 개성 영통사(靈通寺)대각국사비가 세워지고, 고려 숙종 6년(1101)에 개성 흥왕사(興王寺) 대각국사묘지명칠곡 선봉사(僊鳳寺)에도 대각국사비석이 세워진다.


       최근 북한 정부개성 영통사 복원 일본 대정(大正)대학에 의뢰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한 바 있다. 발굴 결과 대각국사 의천의 석함과 묘탑이 발견되었다.

    개성 흥왕사에 세워졌던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 墓誌銘)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 터에서 발견되어 조선 총독부 시절에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해동 천태종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는 의천을 통해 송과의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의천은 고려의 차 문화를 한 단계 올린 승려로도 유명하다. 의천은 고려의 뇌원차(腦原茶)를 송나라로 수출하고 그 대신 송의 용봉단차(龍鳳團茶)를 수입하여 양국 간의 문화교류에도 앞장섰다. '대각국사묘지명'은 그가 중국에서 얼마나 추앙받는 인물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 道宗·1055∼1100)가 재차 경적(經籍)과 차향(茶香) 금백(金帛)을 보내와 국사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천우황제의천차의 스승으로 받든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 송 황실은 북쪽에 금나라의 세력이 왕성하던 시절이라 고려와의 친교가 절실하던 때였다. 어용차인 용봉단차는 당시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차였다. 용봉단차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던가를 송나라 휘종의 '대관다론'은 '천하의 으뜸가는 차'라고 칭송하고 있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쓴 서긍(徐兢)은 고려의 토산차와 송나라 차를 비교하기도 했다. 고려의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당시 귀하게 여긴 것은 용봉사단(龍鳳賜團)이라고 하였다. 의천은 송 황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으면 1년 7개월 동안의 구법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그때 스승은 그에게 차를 선물했는데 그 고마움을 표한 시가 있다.

       "북쪽 동산에서 새로 말린 차/동림에 계신 스님께서 선물했네./한가히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北苑移新焙 東林贈進僧 預知閑煮日 泉脈冷高永)


       중국 절강성과 한국의 차 문화교류는 신라 흥덕왕 때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서 지리산에 심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 뒤 의천 대각국사천태산과 인연을 맺으면서 교류는 더욱더 활발해진다.

    현재 경남 하동의 차는 천태산의 최고봉인 화정봉에서 발원된 귀운동(歸云洞)의 차나무와 DNA가 같은 것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차 전래도 절강성 천태산과 인연을 맺고 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송나라로 유학한 에이사이(榮西·1141∼1215) 선사는 중국 천태산 만년사에서 수행한 뒤 일본으로 돌아갈 때 차 씨를 가져가서 세부리산(背振山) 소후쿠지(聖福寺)에 심었다. 에이사이는 천태산 만년사에서 일본다도의 전적(典籍)인 '끽다양생기'를 썼다.

       일본 교토(京都)의 서북쪽 도가노산(梅尾山) 들머리에는 '일본최고의 다원'(日本最古之茶園)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가마쿠라 시대인 1206년 묘우에상인(明惠上人)에이사이 선사에게 받은 차 씨앗을 심은 곳이다. 그 차가 일본 우지(宇治)로 건너가 말차의 원조가 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산의 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에이사이보다 100여 년 앞선다. 이에 앞서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最澄)는 천태산에서 지관법(止觀法)을 배워 806년에 일본 천태종을 개창했다. 천태종의 성립은 일본이 빠르다. 천태종(天台宗)은 6세기(수나라, 594년) 천태(天台)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538∼597)가 고향인 형주(荊州)에서 옥천사(玉泉寺)를 열고,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천태 3대부(天台三大部)를 강의함으로써 비롯된다. 천태종이라는 명칭은 천태산에서 유래한다. 이 종파의 기본경전은 '법화경(法華經)'으로 '법화종'이라 불리기도 한다. 천태종의 기본적인 교의는 '삼제원융'(三諸圓融)'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천태종이 전해졌는데 백제의 현광(玄光)신라의 연광(緣光)이 중국에서 천태종을 배운 대표적 승려이다. 고려 광종 학승 제관(諦觀)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했다. 의천(義天)에 이르러 독립된 종파로서 천태종이 성립된다.

       의천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개봉과 항저우(杭州)를 왕복하면서 만난 승려와 정치가들은 모두 53명에 달한다. 화엄, 천태, 법상, 율종, 선종 등 당대의 주요 인물들을 망라하였다. 각엄사의 유성 법사, 상국사의 운문종 종본, 금산사의 불인요원, 해인원의 정원 법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교(敎)와 선(禪), 화엄과 천태의 융합을 시도했다.


       의천정원 법사의 만남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의천은 불인요원 선사에게 향로와 가사 경질을 선물하였다. 요원선사는 의천에게 게송을 주었다.

       "고려국 우세 스님이 향로를 주시니/범인, 성인, 용과 하늘이 모두 하나의 모범을 삼네./온 세계 태평하고 지극한 교화로 돌아갈 건데/ 불법공부는 다시 어디에 쓰시려나."


       의천 항주에 머물 때 항주 태수로 있던 소동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동파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 '논고려진봉장'은 고려 승려나 관리들이 송나라에 드나드는 것이 고려에는 이익이 되나 송나라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의천이 주석한 고려사 뒤의 옥잠산을 깎아 소동파 제방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혜인 고려사 절터에는 서동파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혜원사는 의천이 고려에 돌아간 뒤에 화엄종과 금 2000냥을 시주해 중창한 후 고려사로 바뀌었다.


       고려의 천태종은 중국에서 개창된 지 500여 년 뒤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개경의 국청사를 주 사찰로 삼아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걸고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는, 5교 9산을 융합하는 형태로 창시된다. 의천국청사에서 천태교관을 선포한 1097년이다. 한국·중국·일본 3국에 같은 이름의 종단이 있는 불교 종단은 천태종뿐이다.

    의천이 고려의 천태종을 세울 것을 발원한 지자탑원은 천태종의 개조 천태 지의대사의 육신을 모신 곳이다. 이 육신탑 앞에서 의천은 출가하였다(1086년 4월). 의천이 발원한 지자탑 뒤에는 천태종을 일으킨 조사들이 모셔져 있는데 고려의 보운의통 조사도 천태종 15대 조사에 들어 있다.


       2010년 4월 27일,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2010년 4월 23∼26일, 寧波)를 마친 뒤, 필자는 대각국사 의천의 부도와 가사, 진영을 보존하고 있는 선암사 승려 및 선차대회 참가자 일행들과 함께 지자탑원에 들러 영산재를 지낸 뒤 헌다를 하였다. 실로 의천 사후 910년 만의 일이었다.

    의천과 관련하여서는 역시 뇌원차가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차는 유차(孺茶)뇌원차(腦原茶)이다. 뇌원차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학계의 과제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뇌원차는 차의 수종이나 성분, 제조방법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차가 생산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뇌원차의 모양으로 짐작되는 단차(團茶)의 모습.



       고려의 뇌원차 수출을 문헌적으로 연구한 허흥식 박사는 뇌원차의 생산지로 전남 고흥군 두원면을 비정했다. 지금도 두원면 주변에는 야생차 군락지가 있어 이를 방증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뇌원차가 호남지역에만 생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풍속자료에도 "뇌원이란 차의 일종인데 고려 시대 전남지방의 지명으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차를 말한다. 후에 뇌선차로 바뀌었다. 그것이 충선왕(忠宣王)의 휘(諱)가 원(願)과 같다고 하여 변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고려의 뇌원차는 그 명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임금은 공신들에게 부의(賻儀)로 차를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공신들의 면모가 화려하다. 최지몽(崔知夢), 최승로(崔承老), 최량(崔亮), 서희(徐熙), 한언공(韓彦恭), 황포영(皇甫潁) 등 쟁쟁한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뇌원차가 200각에서 1000각까지 하사됐다. 뇌원차와 함께 대차(大茶)가 하사되기도 했다.


       허 박사는 "차의 이름으로 뇌원차(腦原茶)와 대차(大茶)의 두 가지로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차의 모양이나 이름, 그리고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거란의 기록에 쓰인 뇌환차(腦丸茶)는 뇌원차이고, 고려 후기에 충선왕의 이름을 피하여 뇌선차(腦先茶)로 실려 있다. 대차보다 고려차의 대명사처럼 쓰인 뇌원차는 고려의 최고급 차인가, 일반차인가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차의 생산지는 경남보다는 전남에 밀집되었고, 뇌원과 일치하지 않으나 가장 근접한 지명은 고흥군 두원면의 옛 지명인 두원현(荳原縣)이다. 두원현은 백제의 두힐현(豆?縣)이고 신라에서 회진현(會津顯)으로 고쳤다는 설과 경덕왕 시에 강원현(薑原顯)으로 고쳤다는 다른 설이 있다. 고려 대부분의 시기에 속현으로 머물렀으며, 이곳은 장보고가 활동한 청해진의 중요한 이웃이었다. (중략) 두원의 '두'는 콩을 의미하는 글자이지만 차와도 상통하며, 머리 두(頭)와 발음도 같으며 의미도 비슷하다. 머리는 뇌의 중요 부분이고 두원이라는 차밭의 의미와도 상통하기 때문이다. 두원은 최우 집권기 원오 국사 천영을 다비한 곳이고, 순천 송광산 수선사의 형지기는 "시납한 토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고흥반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두원면 계곡은 차밭으로 적격지이다. 정남으로 태풍을 맞는 정남의 해안보다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동향의 지형인 데다 보성만이 호수처럼 가까이 있어 밤이슬도 풍부하다.

    오늘날 두원면에서 뇌원차의 유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언어상으로 두원과 뇌원, 선승들이 왕래하면서 정착시킨 항구 이름, 차의 재배와 가공, 그리고 차의 재배조건과 같은 유자의 주도적인 생산, 보성차밭이 바라보이는 자연조건은 뇌원차의 기원을 말하기에 적합하다는 게 허 박사의 견해이다.


       뇌원차는 벽돌모양의 전차(磚茶)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부피를 재는 단위인 각(角)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뇌원차의 발상지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의천 대각국사가 머물렀던 전남 선암사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각국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절이라는 점이 유력하게 작용한 듯하다. 아마도 용봉단차를 즐겨 마셨던 고려의 대표적 차인 의천은 이곳에서 용봉단차에 필적하는 고려의 차를 만들기에 부심하였을 것이고, 끝내 고려의 최상품 차인 뇌원차를 만들어 수출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선암사 응진전삼탕수는 아직도 차의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문화평론가(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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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7 | 뉴스 > 세계일보  http://v.media.daum.ne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