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장서가 이의현] 外

2016. 4. 9. 22:38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당쟁의 희생자 박세당]

 

주자학에 통달한 인물을 이단이라니…
오류 바로잡는 새로운 해석 빌미로 노론 측이 탄핵 … 사실은 송시열 비난한 데 따른 역공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박세당 영정.

 

   지난번 허균에 대해 쓰면서 조선은 이단이 없었던 사회라고 했는데, 이단이 아니면서 이단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있으니 이 또한 희한한 일이다.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그 사람이다. 박세당은 이른바 국학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이름이다. 그런데 왜 박세당은 주자학의 이단으로 몰리게 됐을까?

 

이단은 경전의 해석에서 생긴다. 경전이란 무엇인가. 경전은 최초의 발언이란 영광을 쓴 텍스트일 뿐,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텍스트는 아니다. 다만 뒷날 거룩하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경전은 고대의 말씀이다. 아득한 옛날 말의 의미를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는가. ‘구약성서’를 읽으면 그 심오한 의미가 환히 떠오르는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당신의 해석에 다른 사람이 동의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전을 설(說)한 사람은 이미 먼지가 됐다. 말씀은 입에서 귀로 떠돌다 어떤 이의 손에 의해 문자로 정착된다. 그런즉, 공자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육성을 그대로 옮기고 있을 것인가.

  


 

‘대학’ ‘중용’의 센텐스 다시 배열

 

   그래, 육성이라 하자. 그래도 말씀의 의미는 애매하다. 말씀이 이루어지던, 말씀을 가능케 했던 상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전의 주석이 이래서 생겨난다. 주석은 말씀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석가의 주장일 뿐이다. 다만 주석가의 주장이 권력과 결합해 비판의 목소리를 뭉갤 수 있으면 진리가 된다. 진리를 만드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일 뿐인 것이다.

 

‘사서(四書)’는 유가(儒家)의 경전이다. 한데 ‘사서’는 주자(朱子)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공자, 맹자 시대에는 사서란 말이 없었다. ‘논어’ ‘맹자’는 독립된 저작이었고, ‘대학’과 ‘중용’은 ‘예기(禮記)’의 일부분이었다. 주자는 ‘대학’과 ‘중용’이 짧지만 유가의 형이상학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예기’에서 떼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란 이름으로 묶었다.

 

   한데 이 중요한 텍스트들을 읽어보니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대학’의 경우 ‘예기’에 실린 대로라면 문리가 불통하는 곳이 적지 않다. 주자는 ‘대학’에 오자와 탈자, 그리고 착간(錯簡)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텍스트를 변개(變改)한다.

공자의 말을 증자가 기록한 것이라면서 먼저 경(經) 1장 205자를 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증자의 의견을 증자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면서 전(傳) 10장 1546자로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전(傳) 5장은 원래 있던 것이 없어졌다면서 몇 마디 써서 보충하기까지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센텐스의 위치 변동이었다. 그는 원래 텍스트에서 센텐스가 뒤섞여 있다면서, 자기 생각대로 센텐스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겼다. 이것이 주자의 업적이자, 또 문제였다.

 

   ‘사서’는 애초 기획된 책이 아니었고, 정제된 텍스트도 아니었지만, 주자에 의해 일관된 질서를 갖는 텍스트로 다시 태어났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보면 주석을 다는 것은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경전을 새로 쓰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주석은 경전의 원래 의미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사서집주’, 곧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는 주자가 쓴 새 경전인 것이다. 주자가 자신의 저작 중 사서집주에 가장 공력을 기울였던 것은 스스로 새 경전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의 희망대로 사서집주는 후세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세당이 은거 당시 즐겨 찾던 의정부시 장암동의 취승대와 궤산정.

 

   주자의 작업은 중요한 전례가 됐다. 주자가 ‘대학’의 순서를 바꾸고 나눈 것은 다른 사람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17세기에 조선 최초로 그 일을 한 사람이 등장했다. 바로 박세당이다. 그는 이렇게 이유를 댄다.

“‘중용’ ‘대학’이 모두 ‘예기’에 있지만, ‘예기’란 책 자체가 한유(漢儒)가 분서갱유 때 타고 남은 것을 주워 모았기에 착간이 많다. 그러니 ‘중용’과 ‘대학’이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이 때문에 ‘대학’의 착간을 지적해 바로잡은 사람은, 주자 전에는 이정(二程, 程와 程顥)이 있었고 주자 뒤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박세당의 학문적 작업 결과가 ‘사변록(思辨錄)’ 시리즈다. ‘사변록’은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 ‘상서사변록(尙書思辨錄)’과 미완성의 ‘시경사변록’으로 이루어진다.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은 ‘사서사변록’이었다. 여기서 ‘사변록’의 내용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한 가지 예만 들자. 간단히 말해 그는 주자의 방법을 반복했다. 예컨대 ‘대학’의 경우, 텍스트의 센텐스를 자기 생각에 따라 다시 배열했다. 그런가 하면 주자가 손을 대지 않았던 ‘중용’의 센텐스도 역시 다시 배열했다. 텍스트의 의미는 당연히 주자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논어’와 ‘맹자’ 역시 주자와 다른 해석을 가했다.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는 주자를 가장 잘 배운 사람이다.

 

고령의 나이와 병 때문에 유배 피해

 

   박세당이 쓴 서계유계(西溪遺戒)와 선조유필(先祖遺筆, 오른쪽). 서계유계는 박세당의 친필본이 아니라 후대에 자손들에 의해 전사된 책이다.

 

   ‘사변록’은 출판된 책이 아니었다. 초고본으로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이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 책에 가해진 더러운 폭력 때문이었다. 당쟁이 끼어든 것이다. 박세당은 숙종 28년(1702) 이경석(李景奭) 후손의 부탁으로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짓는다.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소론 박세당은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것은 당쟁사(黨爭史)에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여기서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

 

   노론은 발끈했다. 하지만 비문만으로 박세당을 공격하자니 뭔가 부족하다. ‘사변록’을 꼬투리로 삼았다. 노론의 주동자는 김창흡(金昌翕)이었다. 장희빈을 두고 숙종이 벌인 애정놀음에 노론이 축출된 사건, 곧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김창흡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과 백부 김수흥(金壽興), 그리고 스승 송시열은 유배 가서 죽거나 사약을 받아 저세상 사람이 된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김창흡과 그의 형 김창협(金昌協) 형제는 벼슬을 마다하고 초연한 삶을 산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김창협은 명리를 떠난 인물로 자처하면서도 조정 일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즉각 중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따지곤 했던 것이다.

 

   김창흡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한 것을 알게 되자, 박세당의 문인 이덕수(李德壽)에게 편지를 보내 박세당이 주자를 능멸했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는 박세당의 사유가 양명좌파 안산농(顔山農)이나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허균 같다고 비난했다. 안산농은 이른바 양지현성파(良知現成派)로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그대로 따를 것을 주장하여 감정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사상가였다. 인간을 통제할 것을 요구하는 주자학과는 대척적인 지점에 있는 것이다. 김창흡은 박세당 사상의 논리적 연장이 결국은 양명좌파와 동일한 이단으로 귀착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정부시 장암동의 서계종택. 박세당이 처음 이곳에 정착한 뒤 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해온 가옥이다. 건물 노후로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숙종 29년 4월17일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은 박세당의 ‘사변록’이 주자의 학설과 어긋나고, 그가 쓴 이경석의 비문에 송시열을 모욕한 말이 있다고 지적한 뒤, ‘사변록’과 비문을 압수해 불 속에 던져버리고, 성인과 현인을 모독한 죄를 처벌하라고 청한다. 숙종은 박세당을 삭출(削黜)하고 유신(儒臣)이 ‘사변록’의 오류를 조목조목 변파(辨破)할 것을 명한다. 홍계적이 무얼 믿고 상소를 올렸을까. 뒤에는 당연히 김창흡의 사주가 있었다. 김창협도 관계가 없을 리 없다. 숙종은 권상유(權尙游)에게 조목조목 변파하는 일을 맡겼던 바, 권상유는 김창협을 찾아와 물었고, 이에 김창협은 논리가 선명하지 못한 부분을 일일이 고쳐주었다.

 

   4월28일 숙종이 박세당을 옥과(玉果)로 귀양 보내라 명하자, 박세당의 문인 이인엽(李寅燁)이 상소를 올려 병든 사람을 옥과까지 보낼 수 없다고 애써 말린다. 숙종은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사람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다니 이상한 일이라 핀잔을 주면서도 박세당의 나이와 병을 고려해 명을 거둔다. 집으로 돌아온 박세당은 8월21일 사망한다.

 

  과연 박세당은 김창흡의 말처럼 주자에 반기를 든 이단이었던가. 그는 주자의 방법을 따라 경전에 대해 좀더 새로운 ‘주자학적’ 해석을 내린 것일 뿐이었다. 그것은 유가, 곧 공자 맹자의 진리성을 다른 방식으로 천명하는 것이었다. 말이 이상하지만, 박세당의 경학은 주자학의 발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박세당이 꿈꾸는 세상이 송시열이 꿈꾼 세상과 달랐을 것 같지도 않다. 흔히 박세당이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注解刪補)’를 지어 이단의 책인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주석을 가한 일을 두고 그가 주자학을 벗어난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노장(老莊) 사상가라고 할 수는 없다. 이이(李珥)도 비록 유가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노자’에 주를 붙여 ‘순언(醇言)’을 짓지 않았던가. 박세당이 아무리 나아간다 해도 그는 역시 유학자다. 그가 다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거나 구성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사변록’은 순수한 학문적 사색의 결과물

 

   명(明)이 세종 때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을 보내준 이래, 대전(大全)은 과거 공부의 필독서가 됐다. 사서에 대한 다른 주석본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자의 주석을 절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장유(張維)는 인조 10년(1632)에 저술한 ‘계곡만필’에서 중국에는 양명학·불학 등 여러 학문이 있지만, 조선 사람들은 성리학밖에 모른다고 개탄한다. ‘계곡만필’은 1643년에 인쇄된다. 이로부터 100년 전인 1543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이 인쇄된 해다. 이황(李滉)은 잉크 냄새 풀풀 풍기는 ‘주자대전’ 한 질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연구에 몰두한다. 이로부터 100년 뒤 장유는 조선 사람은 주자학밖에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장유의 말은 주자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심화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장유 당대에는 적어도 주자학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주자학에 대한 경직된 태도가 일반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유 이후 주자학으로의 경사는 더욱 심해졌고, 이에 비례해 주자학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송시열김창협, 박세당 등은 모두 주자학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주자학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수준이 높아지자, 새로운 안목이 열리기 시작했다. 경전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근원적으로 성찰할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자의 경전 해석에서 오류와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박세당의 ‘사변록’은 바로 이런 비판적 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주자학의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이었다. 식견이 있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 역시 같았다. 박세당을 편든 사람은 모두 ‘사변록’은 순수한 학문적 사색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었고, 그 속에서 이단성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앞서 ‘사변록’에 더해진 비난을 ‘더러운 폭력’이라고 말했다. 당쟁은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분쟁이다. 그 분쟁은 정치로 그쳐야 한다. 출판되지도 않은 책, 그러니 인간의 대뇌에만 존재하는 책을 끄집어내어 사상을 검증하고, 이단으로 고발하는 것이야말로 더러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문적 이설(異說)이 각립(角立)한다면, 토론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온당한 태도가 아닌가. 당쟁은 이단일 수 없는 박세당을 이단으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하기야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보장하랴. 학문적 집단이 이익집단이 되어 권력을 잡으면, 누가 무어라 해도 쇠귀에 경 읽기다. 우습다. 우리는 과연 중세를 벗어났는가.   (끝)

 

 

2006.10.17 556 호 (p 94 ~ 96)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장서가 이의현]

 

중국에 사신 행차 때마다 책 사는 데 올인
말단 관리 ‘서반’ 통해 전량 구입 … 1720년 방문 때 51종 1328권 사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이의현의 글이 새겨져 있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의 표충비(오른쪽)와 표충비각.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사명당 송운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로 유명하다.

 



   앞서 허균이 중국에서 책을 대량 구입했던 일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적잖이 미진했다. 그는 북경에서 책을 어떻게 구입했던가. 서점이었던가? 그러면 그가 찾아간 서점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던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사신단은 북경에서 책을 구입했지만 구입 경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 점을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예를 통해 검토해보자.

 

병자호란이 끝났다. 조선 조정은 앙앙불락(怏怏不樂)하며 북벌 운운하면서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해보는 말이었을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제국 청(淸)의 천하 경영이 안정의 길로 접어들자 현실을 인정하고 사대(事大)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시 사신단이 파견됐고, 책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한데 18세기 후반이면 북경 유리창(琉璃廠)의 서적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사신단이 거기서 직접 서적을 구매하지만, 아직 이의현의 시대는 아니었다.

 

사신들 북경 시내 나들이 자유롭지 못해

 

   이의현은 1720년과 1732년 북경에 파견된다. 1720년에는 예조참판으로서 동지사 겸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의 정사(正使)로 파견됐다. 동지사는 동지에, 정조사는 정조(1월1일)에 맞추어,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는 사신인데, 이때에 와서 청나라 측에서 번거롭다 하였으므로 한데 뭉쳐 파견했던 것이다.

 

1720년 연행(燕行) 때 이의현은 북경에서 42일 동안 체류했다. 지낸 곳은 조선 사신의 전용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이었다. 이곳에 여장을 푼 이의현은 북경 시내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었을까. 명대에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청(淸)의 치하인 1720년이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1765년에 청을 방문한 홍대용(洪大容)의 연행일기인 연기(燕記)에 의하면, 그 전까지 북경 시내 출입을 금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사신단의 정식 수행원은 공무 때문에 시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의현은 태액지(太液池), 창춘원(暢春苑), 정양문(正陽門) 밖의 시가를 본 적은 있지만 문산묘(文山廟), 천주당(天主堂), 망해정(望海亭), 각산사(角山寺)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1904년 박종우가 만든 ‘도곡선생문집(陶谷先生文集)’의 표지와 서문.

 

   하지만 그가 이런 곳을 방문했는지 여부는 별로 중요치 않다. 나는 그가 북경 시내에서 책을 구입했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는 1720년 연행의 일기인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북경 정양문 밖의 번화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가지 북경 정양문 밖이 가장 번화하고 고루가(鼓樓街)가 그 다음이다. …시가의 상점은 모두 목판(木板)을 달거나 세우고, 혹은 융으로 장막을 쳐서 좋은 이름을 붙였는데, ‘무슨 누(某樓)’, ‘무슨 가게(某肆)’, ‘무슨 포(某鋪)’라는 식이다. 일용의 음식, 서화(書畵), 기완(器玩)에서 백공(百工), 천기(賤技)까지 진열해놓고 팔지 않는 것이 없다. 희고 넓은 베를 가게 앞에 가로로 치거나, 깃대를 높이 걸어 거기에 어떤 물건을 판다고 크게 써 붙여, 행인이 언뜻 보고도 알 수 있도록 하되, 반드시 멋있는 이름을 붙인다. 예컨대 술이라면 난릉춘(蘭陵春), 차라면 건계명(建溪茗)이라는 식이다.

 

아마도 공무를 보기 위해 관부(官府)로 가는 길에 시내를 통과했을 것이고, 위의 묘사는 그때 본 모습일 터다. 하지만 그가 직접 상점에 들어가 물품을 구입했을 것 같지는 않다. 훗날의 박지원이 관광객이라면,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사절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1720년 연행 때 대량의 서적과 서화를 구입해 온다. ‘경자연행잡지’에서 책이름과 권수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51종 1328권의 서적과 서화 10종 15을 구입했다. 1732년에도 19종 346권을 구입했으며,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모두 20종의 책을 따로 구입한다. 1732년에는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와 ‘주제군징(主制群徵)’ 등 천주교 서적을 받아오기도 했다.

 

‘서반’들 책 독점 공급으로 이익 챙겨

 

   이 방대한 서적을 어떤 경로를 통해 구입했던가. 18세기 후반이면 당연히 유리창을 떠올릴 테지만, 1720년 연행일기에서 유리창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인사동과 교보문고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적과 서화를 구입할 수 있었던가. ‘경자연행잡지’ 끝 부분에서 그는 구입했던 서적의 목록을 죽 나열한 뒤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중에서 잡서(雜書) 몇 가지는 서반(序班)들이 사사로이 준 것이다.” 즉 점잖은 체면에 좀 무엇한 책들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아니라, 서반들이 공짜로 주기에 받은 것이라는 해명이다.

 

바로 이 서반이 서적의 공급자다. 서반에 대한 그의 증언을 보자.

 

   서반이란 곧 제독부(提督府)의 서리다. 오래 근무하면 간혹 승진해 지현(知縣)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북경의 사정을 알려면 서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그들의 집은 거개 남방(南方)이다. 서책은 모두 남방에서 오고, 이자들이 매매를 맡는다. 우리나라의 거간과 같다. 역관들이 중간에 끼여 있어, 사신이 책을 사려 하면 반드시 역관들을 시켜 서반에게 구하게 한다. 이들은 서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친분이 아주 깊다.

 

곧 서반이란 우리나라의 서리에 해당하는 축으로, 이들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서적을 전매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 사신이 구입한 책은 모두 서반을 통한 것이었던 것이다.

 

서반은 명대의 홍려시(鴻寺) 소속으로 궁정에서 예식을 거행할 때 백관의 반위(班位)를 정리하던 관원이었다(이 구실은 청대에도 같았다). 조선 사신단은 황제를 만나는 의식을 미리 연습해야 했던 바, 이 의식 절차를 익히도록 안내하는 이들이 서반이었던 것이다(이의현도 홍려시로 가서 청 조정에서 행할 의례를 연습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하면 중국 예부에서 서반 10명을 뽑아 배정해주었고, 이들은 의식의 연습뿐만 아니라 중국 관원과 조선 사신단 사이의 심부름을 맡았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허봉(許, 1551~1588)이 1547년 신종(神宗)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절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쓴 ‘조천기(朝天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서반들이 조선 사람들이 북경에서 구입하는 황자색(黃紫色) 비단이나 역사서적 따위는 국경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에 서반이 사실을 알고 협박해 뇌물을 요구한다.”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지만,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서반이 서적 구입에 개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의현의 말처럼 조선 사신단이 구입하는 서적의 판매를 독점하고 있었다. 홍대용은 그의 ‘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외성(外省)에서 선발되어 온 사람들로서 봉급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수십 년 이래 북경의 물화 중 조금 고상한 것은 서반에게 매매를 담당하게 하고 그 이문을 먹게 했다. 예컨대 서적이나 서화, 붓이나 먹, 향과 차 등은 다른 상인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상품 값이 해마다 올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건 값이 폭등하는 것을 괴로워하여 몰래 사고팔다가 온갖 욕을 보곤 한다.” 홍대용은 서반이 유리창융복시(隆福市)를 따라다니면서 책을 구입하는 것을 감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서반은 서적 등의 독점 판매를 위해 조선 사신단이 북경 시장에 나가서 직접 책을 구입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이런 식이었으니, 과연 북경에서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즉각 직접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인가. 궁금한 점이 적지 않다. 이쯤에서 덮어두자.

 

‘경자연행잡지’ 서반에게서 책을 구입하는 장면은 없지만, 서화를 구입하는 장면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신종(神宗) 그림이 있는 가리개는 값이 너무 비싸 사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역관 중에 서반과 친한 자가 있어 중간에서 흥정을 해보라 하여, 부채, 부싯돌, 어물(魚物) 등의 잡물을 주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고의로 위조해 높은 값을 받으려는 수작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서양화도 샀다. 남경의 중이 ‘오륜서(五倫書)’ 2투(套) 62책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흰 종이에 큰 글씨로 썼고, 책이 아주 길고 크다. 푸른 베로 표지를 했고, 권마다 안에 정통황제(正統皇帝)의 어보(御寶)를 찍었다. 아주 진귀한 것이었지만 너무 비싸 사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서반을 통해 명나라 신종 황제의 그림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책과 서화를 구입했던 것이다. 요컨대 서반은 조선의 지식인계에 중국의 서적을 공급하는 유일한 파이프라인이었으니, 뜻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책 많았지만 주자학 외에는 눈 안 돌려

 

   이의현이 산 책은 거질이었다. ‘책부원귀’ 301권, ‘속문헌통고’ 100권, ‘도서편’ 78권, ‘삼재도회’ 80권, ‘한위육조백명가집’ 60권, ‘전당시’ 120권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런 책은 조선에서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책이었다. 조선의 지식계와 서적시장은 워낙 협소해 출판과 구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 이의현의 장서에는 명·청대의 최신 서적이 즐비했다.

이탁오(李卓吾)원굉도(袁宏道), 서위(徐渭)양명학파 계열의 저자들이 끼여 있기도 했다.

 

이의현은 자신의 에세이집 ‘도협총설(陶峽叢說)’에서 자기 장서를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하지만 새 서적들이 그의 사유에 변화를 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도협총설’의 한 토막을 읽어보자.

 

나는 젊어서 최창대(崔昌大, 1669~1720)와 한원(翰苑)의 동료로 재직했다. 어느 날 최창대가 큰 소리를 쳤다.

“주자(朱子)의 학문은 취할 것이 없어!”

 

나는 너무나 놀라 그를 나무랐다.

 

“그대가 어쩌자고 이런 악한 말을 하는가. 저 하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그대 역시 세속의 논의에 빠진 사람이로구먼. 그대는 주자의 ‘태극문답(太極問答)’을 읽어보게. 단지 장사꾼의 말일 뿐이지 어디 수양하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이 조금이라도 있던가?”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다시는 그와 말을 하지 않았다.

 

주자의 학문이 볼 것이 없노라는 최창대의 말은 참으로 대담하다. 그는 인조대의 명신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의 증손이자, 또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아들이다. 배경이 있어서 말이 과감했던가.

 

이의현은 중국의 새로운 사유를 섭취했지만, 여전히 주자가 하늘이었다. 이것은 또 노론의 입장이기도 했다. 이의현은 영의정까지 지냈으니, 출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이세백(李世白) 역시 좌의정을 지냈으니, 부자가 정승에 오른 당대 최고의 명문이었던 것이다. 이의현은 ‘사변록’의 저자 박세당을 공격했던 김창협의 제자다. 그런가 하면 이세백은 송준길(宋浚吉)의 제자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 정권의 핵심이었으니, 이의현 역시 골수 노론일 수밖에 없다.

 

어떤 새로운 진리도 계급적·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면 소용이 없음을 이의현의 경우에서 확인한다. 새 책과 새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끝)

 

 

2006.10.31 558 호 (p 84 ~ 86)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성호 이익과 ‘성호사설’]

 

세상을 고민한 책, 실학의 고전이 되다
정치·경제·사회 모순 예리하게 분석 … 당시로선 최신 지식인 서양학도 소개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있는 성호기념관(왼쪽)성호 이익의 영정.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란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필경 교과서를 통해 배운 대로 ‘실학’ 이란 명사와 ‘성호사설(星湖僿說)’이란 책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호사설’의 내용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도대체 이름만 유명한 ‘성호사설’은 어떤 책인가?

 

‘성호사설’은 유서류(類書類)의 저작이다. 유서가 어떤 책인지는 이수광(李光)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다룰 때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다시 기억을 떠올리면 유서는 사전이다. 다만 가나다 혹은 ABC순이 아니라, 같은 부류의 사항끼리 모아서 분류한 사전이다. ‘성호사설’은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 등 다섯 부문으로 나뉘는데, 모두 3007개 항목이다.

 

총 3007개 항목 사전식으로 구성

 

   이익은 왜 이 방대한 사전을 썼던가. 그 내력을 탐색해보자. 이익의 집안, 곧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조선시대에 알아주는 남인가의 명문이다. 그의 집안이 불운의 길로 떨어진 것은 아버지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이 1680년 자당(自黨)의 허목(許穆)윤휴(尹)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주 목사로 좌천되면서부터였다. 연이어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되는 정변, 곧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이하진은 파직되고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숨진다.

 

   아들이 없었던 숙종이 숙원 장씨에게서 아들(뒷날의 경종)을 보자, 장씨를 희빈으로 삼은 뒤 아들을 원자로 봉하려 했다.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 민비의 아버지는 서인의 핵심인물인 민유중(閔維重)이다. 장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면 서인 세력이 위험에 빠진다.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서인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친 숙종은 서인을 내쫓고 다시 남인을 조정에 불러들인다. 이것이 1689년의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 때 이하진의 관작(官爵)이 복구된다. 하지만 숙종은 5년 뒤인 1694년에 민비를 복위시키고 서인을 정계로 다시 불러들인다. 남인은 또다시 축출됐고, 이익의 집안 역시 희망이 사라졌다.

 

이익의 ‘성호사설’.

 

   중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운 이익은 1695년 과거에 응시하지만, 녹명(錄名)에 문제가 있어서 회시를 치르지 못한다.

1706년 이잠은 성균관 진사로 상소하여 동궁, 곧 뒤의 경종을 보호할 것과 노론을 조정에 다시 불러들인 이면의 주역인 김춘택(金春澤) 등을 죽일 것을 청했다. 노론 정권하에서 이잠의 발언은 죽음을 자청하는 것이어서, 그는 소원대로 장하(杖下)의 귀신이 됐다.

 

   이제 집안이 결딴이 났다. 아버지는 당쟁에 휩쓸려 유배지에서 죽고 자신의 형은 장살됐다. 관로(官路)에 미련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벼슬에 뜻을 잃은 성실한 선비가 할 일이란 독서밖에 없다. 읽고 궁리하면서 울분이 삭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행히 집에는 풍부한 장서가 있었다. 그의 집안이 워낙 세가(世家)였고, 또 이하진이 1678년 진위겸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청(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양의 신서(新書)를 구입해 왔던 것이다. 그의 독서 이력에 보이는 서양 서적은 아마도 이하진이 구매한 책일 것이다.

 

방대한 가장(家藏) 서적을 읽은 결과물이 바로 ‘성호사설’이다. 이익은 자신의 저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호사설’이란 성호옹(星湖翁)의 희필이다. 성호옹이 이 책을 쓴 것은 어떤 의도에서였는가. 아무 의도가 없다. 의도, 곧 뜻이 없는데 어찌 이런 저작이 나오게 되었는가? 옹이 그냥 한가할 적에 책을 읽던 여가에 어떤 것은 전기(傳記)에서, 어떤 것은 자집(子集)에서, 어떤 것은 시가(詩家)에서, 어떤 것은 전문(傳聞)에서, 어떤 것은 회해(諧)에서 얻기도 하였는데, 웃고 기뻐할 만하여 남겨두어야 할 것들을 손 가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큰 더미를 이루었다.

 

‘사설(僿說)’의 ‘사(僿)’란 글자가 원래 ‘자질구레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얻은 낙숫거리라는 말이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똥거름이나 썩힌 풀은 지극히 천한 물건이지만, 밭에 비료로 쓰면 곡식을 기를 수 있어 부엌의 맛있는 찬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 책도 잘 읽는 사람에게 어찌 백에 하나 거둘 것이 없겠는가?”

 

같은 유서지만 ‘성호사설’은 ‘지봉유설’과 사뭇 달랐다. 이 책에는 ‘사회’가 들어 있었다. 체계가 없는 듯 보이는 글쓰기 속에 그는 자기 시대의 심각한 문제, 곧 정치와 사회, 경제의 모순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이 진지한 사유의 결과를 우리는 실학이라 부른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성호사설’에는 당시로서 최신의 지식인 서양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판토하(Pantoja)의 ‘칠극(七克)’, 삼비아시(Sambiasi)의 ‘영언여작(靈言勺)’, 아담 샬(Adam Schall)의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을 소개하고 비평했다. 여기에 더하여 서양의 지리·천문·과학 등을 다루었으니, ‘성호사설’이야말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의 극한치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벼슬에 뜻 잃고 학문에만 정진

 

   ‘성호사설’은 당시로서는 파천황적인 저작이었다. 생각해보라. 이 책이 쓰일 무렵 조선의 학계에서 학문이란 오로지 성리학뿐이었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중국에서 전해진 최신 서적을 읽고 당대 사회를 고민하면서 3000여 항목에 이르는 책을 써내는 일이 보통 일인가. 이 파천황적인 책의 내용을 여기서 몇 마디 말로 평가한다는 것은 참람스러운 짓이다. 차라리 이 책을 둘러싼 선인(先人)들의 논란과 평가를 검토해보자. ‘성호사설’의 3분의 1 축약본인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을 엮은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황덕일(黃德壹, 1748~1800)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는 이익의 묘와 사당.  

 

   ‘논어’는 성인(聖人)의 언행을 잡다하게 기록했지만, 지극히 정밀하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러쿵저러쿵 흠을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아무개가 헐뜯는 내용이 ‘성호사설’에는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설에 집착해 그 사람의 일생을 단정하고 심하게 모욕하는 것은 망령된 짓거리입니다.

 

‘성호사설’이 체계가 없는 것을 헐뜯고, 나아가 성호까지 비난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비난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실은 ‘성호사설’의 비판적, 진보적 내용에 대한 비난이었을 것이다. 안정복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선생이 높이 받드신 분은 공자·맹자·정자·주자였고, 배척한 것은 이단과 잡학이었습니다. 경전의 뜻으로 말하자면, 선유(先儒)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많이 찾아내었고, 이학(異學)에 대해서는 그 숨은 진상을 캐내어 빠져나갈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무개는 선생이 서학(西學)을 했다고 배척하였다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내가 그 점에 대해 ‘천학고(天學考)’에서 이미 밝혀놓았는데, 그대는 본 적이 없는지요? … 대저 서학은 물리(物理)에 밝아 천문의 계산이나 수학이나 음률, 기계 제작 등은 중국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자 역시 서방에서 온 승려를 존중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자도 서학을 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인지요? … 또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그 아무개가 유반계(柳磻溪, 柳馨遠)를 배척하였다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배척한 것인지요?

 

   우리 당(黨)의 선배에 반계와 성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전적으로 편당(偏黨)에서 나온 것으로, 반드시 옥과 같은 두 분에게서 험을 찾아내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좋은 마음이겠습니까?

 

이익이 서학, 곧 천주학을 했다는 의심, 혹은 서양학에 빠졌다는 비난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물론 이 비판의 속내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을 싸잡아 비판한 데서 볼 수 있듯, 이른바 진보적 개혁적인 학문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대감이 파당(派黨)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호사설’은 인쇄되지 않았지만 전사(轉寫)되면서 읽혔고, 격한 찬반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뭐라 해도 당대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익의 영향력, 곧 ‘성호사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익 학문의 최종적 계승자이자 완성자인 정약용(丁若鏞)은 귀양지 강진에서 아들 정학연(丁學淵)에게 책 읽기의 과정을 일러준다.

 

   자질구레한 시율(詩律)은 비록 이름이 난다 해도 쓸 데가 없다. 모름지기 올해 겨울부터 내년 봄까지는 ‘서경’과 ‘좌전’을 읽을 것이다. 두 글은 문장이 억세고 난삽하여 뜻이 깊지만, 주해가 있으니 차분하게 연구하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여가에는 ‘고려사’, ‘반계수록’, ‘서애집’, ‘징비록’, ‘성호사설’, ‘문헌통고’ 등의 책을 읽어 요점을 초록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 창작보다는 학문에 전념할 것, 그리고 학문하는 기초 과정의 하나로 ‘성호사설’ 등의 서적을 보고 학문의 재료를 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호사설’은 거의 고전급의 저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무슨 일이든 철저함을 추구하는 다산에게 ‘성호사설’의 서술 방식은 다소 불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 “‘성호사설’은 후세에 전할 만한 정문(正文)이 못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고인의 글과 자신의 견해를 뒤섞어 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 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체계와 서술이 엄밀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성호사설’도 유사한 예로 꼽았던 것이다. 다산과 같은 엄정하고 꼼꼼한 사람은 ‘성호사설’의 치밀하지 못한 구성,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손쉽게 펼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홍대용·박지원 등 많은 실학자들에 영향

 

   다산에게서 보았듯이 이른바 실학자라면 누구라도 ‘성호사설’의 영향력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 의하면 비록 학문적인 계보는 다르지만, 홍대용(洪大容)이 이익과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역시 ‘성호사설’을 읽었다고 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박제가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이른바 ‘허생전(許生傳)’의 말미에서 ‘성호사설’을 거론하고 있다.

 

‘허생전’에는 중봉(重峯)의 ‘봉사(封事)’, 유씨(柳氏)의 ‘수록(隨錄)’, 이씨의 ‘사설(僿說)’ 등이 말하지 못했던 바가 실려 있다. 문장이 더욱 소탕(疎宕)하고 비분하니 압록강 동쪽에서 손꼽을 만한 문자다.

 

‘성호사설’은 조헌(趙憲, 1544~1592)의 ‘동환봉사(東還封事)’ 유형원 ‘반계수록’을 계승하고 ‘열하일기’ 연결되는 책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실학의 계보이기도 하다.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끝)


 관련연재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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