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10)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 ①

2016. 4. 30. 13:57건강 이야기



      

[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10)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 ①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ㆍ제중원, 갑신정변 ‘몰수’ 집에 고종 ‘의지’로 속전속결 탄생


제중원 건물 일부(오른쪽)와 백송(왼쪽). 1930년대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500년이 넘은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만 서 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재동의 헌법재판소 북쪽 뜰 자리이다.

제중원 건물 일부(오른쪽)와 백송(왼쪽).

1930년대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500년이 넘은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만 서 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재동의 헌법재판소 북쪽 뜰 자리이다.



  ▲ 전통의술로 민중 돌보던 혜민서·활인서 폐지 2년 뒤 양반 거주지 북촌의 홍영식 가옥에… 현 외교부 해당 ‘외아문’서 관할


   1885년부터 1905년까지 20년 동안 존속했던 제중원(濟衆院)은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외국인들은 제중원을 왕립병원이나 정부병원이라고 불렀다. 미국인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과 헤론(John W. Heron)이 제중원에서 첫 1년간 활동한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의 명칭도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이다.


   제중원은 오늘날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 소속이었다. 지금처럼 보건복지부가 보건의료 업무를 주관하게 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중반 이후이다. 그 전에는 대체로 내무부(안전행정부)가 보건의료를 관장했으며 우리도 1894년의 갑오개혁 때부터 그러했다. 제중원이 설립된 1885년 무렵에는 외교와 통상뿐만 아니라 근대문물을 도입, 시행하는 업무를 대개 외아문이 담당했으므로 제중원이 외아문 소속 기관이라는 사실은 이상할 게 없다. 정부가 1885년 이래 큰 힘을 기울였던 우두(牛痘) 업무도 외아문 소관이었다.


   외아문의 독판(장관)이나 협판(차관)이 제중원의 책임자를 겸했고, 휘하의 관리들이 제중원을 운영했다. 환자 진료는 외국인 의사들이, 진료 보조와 간호는 조수격인 조선인 학도(學徒)들이 맡았다. 진료를 담당한 외국인 의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독교 선교였다. 그들은 의사이기에 앞서 선교사로 자임했다.


■ 외국인 의사들 ‘선교활동 제약’ 불만도


   선교의사들은 제중원이 선교의 거점이 되기를 바랐지만 조선정부는 허용하지 않았다. 점차 선교를 인정하는 추세였지만 공식적으로 금하고 있는 이상 국가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에서 선교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그에 따라 자신이 운영하는 시병원(施病院)에서 상당한 선교의 자유를 누리는 감리교 선교의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등과 비교했을 때 제중원 의사들의 불만은 작지 않았다. 헤론은 이렇게 표현했다. “정부병원 일을 가능하면 오래 잘하려고 합니다만, 우리 자신의 병원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요컨대 제중원은 1894년 9월 에비슨(Oliver R. Avison)에게 운영권이 이관될 때까지 명실상부하게 조선정부의 의료기관이었다. 운영권 이관 이전의 제중원을 선교병원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다. 외국인 의사들이 스스로 진료업무를 선교 활동이라고 여기는 것과 제중원이 선교병원이라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제중원이 갑신정변의 우연한 산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연 갑신정변과 그 과정에서 크게 부상당한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는 일이 없었다면 제중원은 세워지지 않았을까?


   근대식 병원을 세운 데에는 국왕 고종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한 점을 여러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선 고종은 외아문 협판인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서양식 병원과 의학교 설립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고종은 1884년 여름 조선을 잠시 방문한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이에 따라 감리교 선교의사 스크랜턴이 1885년 5월 조선에 와서 9월에 시병원을 개설했고 스크랜턴의 어머니이화학당을 열었다. 1884년 9월 알렌이 예정에 없이 조선에 오는 우발적인 일이 없었다면 스크랜턴이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에서 알렌의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알렌은 조선에 온 직후인 1884년 10월8일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미국 공사 푸트 장군은 곧, 아마 봄에는 기독교 학교와 의료 사업이 허락될 뿐만 아니라 은근히 장려될 것이라는 국왕의 사적인 확언을 받았다는 말도 했습니다.” 알렌의 기록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면, 갑신정변이나 민영익의 치료와 관계없이 근대식 병원이 1885년 봄에 세워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즉 갑신정변 ‘때문에’ 느닷없이 제중원이 설립된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정변에 따른 반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워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 민간서 시작한 우두 접종도 국가사업화


   1885년은 근대서양의료 도입 역사에서 획기적인 해이다. 제중원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우두 접종이 국가사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 말 지석영, 이재하 등 민간인들이 시작한 우두술이 불과 몇 해 만에 국책사업이 된 것이다. 더욱이 새로 전래된 서양식 우두는 강제적으로 보급된 반면에, 1800년 무렵 중국에서 도입되어 이미 80여년 동안 사용해온 인두(人痘)가 불법화된 것은 특기할 일이다.


   조선시대 한성(서울)에는 국립의료기관이 넷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과 왕족 등을 진료하는 내의원(內醫院)으로 궁궐 안에 있었다. 이어서 양반관료의 진료와 의학생 교육을 담당하는 전의감(典醫監)이 현재 조계사 자리(종로구 견지동)에 있었다. 그리고 일반 민중의 진료를 맡아보는 혜민서(惠民署)가 을지로 2가 네거리 북동쪽에, 역병(전염병) 환자를 가료하는 활인서(活人署)가 지금의 동소문동과 아현동에 있었다. 물론 이들 의료기관은 전통의술을 펼치는 곳이었다. 이 가운데 혜민서와 활인서는 1883년 2월에 폐지되었다. 근대적 개혁에 필요한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혜민서와 활인서를 없앤 일은 최소한의 대민 복지 기능마저도 포기한 것이었으며, 국왕의 인정(仁政)이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중원의 설립은 혜민서와 활인서를 대치하는 명분과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중원은 혜민서, 활인서와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달랐다. 제중원은 종래의 기관들과는 달리 근대서양의료를 시술했다. 고종과 정부가 근대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빨라야 1876년 문호개방 때부터이니 10년도 안된 시점에서 새 국립병원을 전통의료가 아닌 근대서양의료를 시술하는 기관으로 만든 것은 획기적이었다. 우두를 배타적으로 보급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조치였다.

또 주목할 점은 제중원의 위치이다. 혜민서가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에 있었던 반면, 제중원은 양반관료들의 근거지인 북촌에 세워졌다. (1년 반 뒤 지금의 명동으로 이전한 일은 다음에 다룰 것이다.) 혜민서를 대신하는 기관으로 세워졌지만 일반 민중들보다 오히려 양반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제중원은 갑신정변 때 쿠데타 세력의 세 거두 중 유일하게 망명하지 않고 남았다가 참살당한 홍영식(洪英植·1855~1884) 에 세워졌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몰수된 역적의 집이므로 따로 구입 비용이 들지 않고, 비교적 넓어서 병원으로 쓸 만하다는 점이다. 또한 제중원을 관할할 외아문 바로 옆에 있어 관리에 편리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1885년 1월27일 알렌이 ‘병원설립제안’을 조선정부에 제출함으로써 제중원 설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알렌이 그런 제안을 하게 된 데에는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하면서 고종에게서 얻은 신임이 크게 작용했다. 구체적인 정황은 육영공원 교사를 지낸 길모어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갑신정변이 있은 지 얼마 뒤 알렌이 국왕과 면담하는 중 서양의 병원 업무가 국왕의 관심을 끌었다. 의사가 병원의 운영방식 및 그 이점들을 설명하자 국왕은 매우 흥미로워했고 수도에 그러한 병원 하나를 세울 것을 제의했거나 의사 알렌의 그런 제안에 맞장구를 쳤다.” 고종이 먼저 제의했거나 아니면 알렌의 제안에 동의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알렌이 몇 달 전 의료사업에 대한 고종의 언질을 푸트 공사를 통해 전해받기는 했지만, 갑신정변으로 반동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가운데 병원 설립을 제안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길모어의 언급처럼 고종의 제의나 내락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실제 병원 설립이 알렌이 예상했던 6개월보다 훨씬 짧은 두 달 남짓 만에 완료된 사실도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 청·일 경계한 고종, 미국과 협력 도모


   고종이 소관 부서에 지시해서 근대식 병원을 세우면 될 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이니셔티브를 주는 방식을 취했을까? 여기에는 외교적 고려와 계산이 작용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을 겪으면서 고종은 일본과 청나라를 매우 경계하게 되었고, 다른 서양나라들도 신뢰하지 않았다. 오직 조선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여긴 미국만이 자신의 편이 되어 주리라고 기대했다. (고종은 평생 미국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청나라의 권고나 <조선책략>과 같은 책의 영향도 있었다. 요컨대 알렌을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미국과의 우호협력을 도모한 셈이었다.


   알렌의 건의가 있은 지 20일 뒤인 2월16일에 병원 설립 책임자로 임명된 외아문 독판 김윤식(金允植)은 이틀 뒤 미국공사관을 방문하여 홍영식의 집을 병원 건물로 결정했음을 통보했다.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3월 초만 해도 폐허 같았던 홍영식의 집이 불과 한달 사이에 근대식 병원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외아문은 이어서 <병원 규칙>을 마련했고 4월3일에는 새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공포했다. 그리고 1885년 4월14일 고종의 재가로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