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와 茶文化] 11. 茶房과 茶店

2016. 9. 21. 17:37차 이야기



      

[茶와 茶文化] 11. 茶房과 茶店
2005년 07월 15일 () 15:00:00 webmaster@mjmedi.com
  
 

                                                                                                                  김동곤 (쌍계제다 대표)

♠ 커피와 다방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하고
메스컷 와인보다 부드러운 커피
커피가 없으면 안되요.
저를 예뻐하시거든
오! 커피를 가져다 주세요.

   바흐의 “커피 칸타타”이다. 커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딸이 아버지에게 노래한 아리아의 한 구절이다. 17세기에 아라비아에서 유럽에 전래된 커피는 향긋한 향기와 카페인의 각성성분, 그리고 설탕의 달콤함을 빌려 단숨에 세계인의 기호음료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언제 커피가 전래되고 다방이 생겼을까?
구한말, 열강의 개방 압력에 많은 개화문물들과 함께 커피도 들어왔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등 갈수록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압력이 거세지자 고종은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하게 된다. 이 아관파천(播遷) 1년여 동안 고종은 많은 선진문물과 함께 커피를 접하게 되었다.

독일계 러시아 여인 손탁(Sontag)의 음식시중을 받으면서 이름도 모르는 검은색 음료의 향기와 달콤함에 푹 빠지게 되었고, 이후 가배차(가배茶)라 하였다. 왕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구락부를 하사하자, 1902년 손탁은 그 곳에 손탁호텔을 짓고, 호텔에 가배차-커피를 파는 다방도 함께 문을 열었다.

이는 서울 최초의 다방으로 외국인과 상류층 최고의 사교장이 되었다. 이후 많은 일본인과 문화계 인사들이 속속 다방을 개업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다방으로는 영화감독인 이경손의 “카카두”가 최초이고 배우 김용규의 “멕시코 다방”,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李箱)의 이름이 외설스럽기도한 “식스나인(69)” 등이 있었다.



♠ 다방의 최초 기록

    다방이 커피의 전래와 함께 백여년 전에 새로 생긴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보다 1천여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다방이 있었다.

“이부(裏部)에서 아뢰기를, ‘나이 69세가 되면 그 해 12월 말로 해직(解職)되는 것이 예인데 지금 다방(茶房)의 태의소감(太醫少監) 김징악(金徵渥)은 나이가 되었으니 파직시키는 것이 옳습니다.’고 하니 ‘징악은 명의(名醫)로 그 직책이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職在近侍)이니 수년간 더 그 자리에 있게 하라’하였다.” - [고려사] 권7, [고려사절요] 제4권의 문종 1년(1047년) 12월

“다방”이라는 고려의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태의소감 김징악은 69세로 정년이 되었지만 명의이고 “가까이서 모시다(職在近侍)”라는 기록으로 보아 어의의 직책을 가지고 있어서 수년 더 근무케하라는 어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는 다방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다방은 궁중의 약과 함께 꽃, 과일, 술, 채소 등을 관리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 사신의 접대에도 차를 올리는 진다(進茶)의식이 있었고, 이런 차와 관련된 업무를 다방에서 수행하였다. 다방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고려의 진다의식은 다례(茶禮)로 정착되었다.

고려의 다방은 지금의 다방과는 성격이 다른, 정부의 기관이었는데, 차를 팔고 마시는 곳은 없었을까?
오늘날의 다방은 다점(茶店)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茶店과 茶房

   고려시대에 주점(酒店)과 다점이 있었다.
“다점이나 주점 등 여러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그 전대로 돈(錢)을 사용하는 백성들 외에 사사로이 돈이 아닌 토산품으로도 돈 대신 물건을 매매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 [고려사절요] 제2권, 목종 임인(壬寅) 5년(1001년) 가을 7월조

다점이나 주점들에서 거래를 할 때, 옛 관습대로 돈 대신 토산품으로도 물물교환을 허용하라는 기록이다. 1천 년 전의 다점은 어떤 곳이었을까?

몸을 던져 평상에 누워 문득 이 몸을 잊었는데
한 낮 베개 위로 바람 부니 잠이 절로 깨네.
꿈속의 이 몸 머물 데가 없었는데
하늘과 땅이 온통 하나의 여관이었으니,
빈 누각에서 꿈 깨니 해는 지려 하는데
흐릿한 두 눈은 먼 봉우리 보노니.
뉘 알리. 숨어사는 이의 한가한 멋을
난간에서 자는 봄잠은 많은 녹봉과 맞먹으려니.

30대에 불우한 삶을 마친 천재시인 서하 임춘(西河 林椿) 선생의 “다점에서 낮잠(茶店晝睡)”이란 시이다.
고려의 다점은 차도 마시고 쉬어가면서 낮잠도 한숨 잘 수 있는 누각도 있었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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