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와 茶文化] 14. 우리 차문화의 중심, 화개동(上)

2016. 9. 21. 18:06차 이야기



      

[茶와 茶文化] 14. 우리 차문화의 중심, 화개동(上)
2005년 09월 09일 () 14:04:00 webmaster@mjmedi.com
  
 

                                                                   김동곤(쌍계제다 대표)

   우리 차의 역사 2000년! 유구한 우리 차의 역사는 지리산 차의 역사이고 차 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화개가 있었다. 끝으로 화개를 중심으로 한 우리 차의 문화약사(略使)를 되짚어볼까 한다.


♠ 가락시대

    가장 앞선 시대의 차 기록이다. 이능화 선생의 [조선불교통사]에,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개의 차는 가락 허왕후의 7왕자가 외삼촌인 보옥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 화개동으로 와서 칠불사의 전신인 구름 위의 집 -운상원(雲上院)- 을 짓고 수도하며 심은 차의 유종(遺種)이라 한다. 이 때가 서기 101년으로 2년 후 7왕자는 모두 성불하였다.

♠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하였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조의 기록이다. 이후 화개동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차씨를 심고 가꾼 곳이라 하여 쌍계사 장죽전을 “차시배지(茶始培地)”라 명명하고, 문화재 ‘지정기념물 경남 제 6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차의 화개 시배설을 의심하고, 화엄사 시배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대렴 당시(828년) 화개동은 사찰도 없는 심산유곡으로 주민도 없었다. 반면 화엄사는 진흥왕 5년(544년)에 창건한 명찰이라 차 씨앗을 화엄사 장죽전에 심은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화엄사의 창건은 진흥왕 때가 아니라 경덕왕 14년(755년) 경임이 학계에서 밝혀졌고, 쌍계사 지구에는 723년에 삼법, 대비 두 스님이 중국 6호 혜능의 선법과 머리뼈를 가지고 절을 지었다. 그러니 쌍계사의 창건이 30년 빠르다. 화엄사의 장죽전도 [해동호남도 지리산대화엄사 사적] -1969년 정병헌- 에는 절의 뒤편이라고 하였으나 일제시대의 답사기록이나 최근에 조성된 장죽전은 화엄사 아래쪽 시내 건너편으로 가신성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조선이 개국하고 국가가 안정되어가자 통치 자료의 필요가 생겨 백여년의 노력 끝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게 되었다. 화개동이 속한 진주 부분에 [삼국사기]의 차전래 기록인 흥덕왕과 대렴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차의 최초 전래지는 경상도 진주목에 속한 화개 부곡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곡’은 천한 노역에 종사하는 무리들을 한 곳에 모아 지역 특산물이나 특정 물건을 만들어 조정에 바치는 곳으로 화개는 차를 만들어 진상하던 부곡이었다.
대렴이 차씨를 심은 2년 후, 중국유학 구법승인 진감선사가 선과 차문화와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비는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지었는데 차에 관한 기록이 있다. 진감, 고운 두 분은 모두 훌륭한 다인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 고려시대

   800년 전에 활동한 이규보 선생<영정>은 당시 화개동 차를 알게하는 귀중한 장편시들을 남겼다. 시·금·주(詩·琴·酒)를 사랑한 삼혹호(三酷好)라고도 불린 선생은 차도 좋아해 화개차를 극찬하였다.

선사는 어디서 이런 귀중품을 구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는 구나….
입에 닿자 달콤하고도 부드러워
어린아이의 젖냄새 비슷하구나.

화개차를 맛보고 즉석에서 최고의 향내라는 배냇향이 난다하여 “유차(孺茶)”라 이름지었다. 당시 화개차는 섣달에 노약자까지 징발하여 겨울 차 눈을 따서 덩이차를 만들었다.
이렇게 노약자까지 징발하여 산 속의 맹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섣달의 눈 속에서 황금 같은 노란 차눈을 따고, 서둘러 차를 만드는 이유는 음력 2월까지는 머나먼 서울-개성-까지 차를 등짐으로 날라 조정에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천개의 가지에서 따 모은 차눈이 겨우 차 한 모금이 되었으니, 선생은 화개사람들이 차 때문에 겪는 고초에 눈물을 흘렸다.
“차는 화개사람들의 애끓는 고혈이니, 화개의 산과 들에 불을 질러서 차세금을 금지하면 화개사람들이 편히 쉬게 되리라”고 노래하였다.



♠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하연 선생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경상도 관찰사(당시는 진주에서 근무)와 좌·우·영의정을 지냈다. [경상도 지리지]를 편찬하여 경상도와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를 잘 아는 분이셨다. 선생이 읊은 화개동차 시 한편.

향기로운 차는 금옥 같이 귀중하니
마음 깊이 감사아며 차로써 전별한다오.
듣자니 화개 골짜기는
맑기가 양이산과 같다고 하오.

판서 민의생이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날 때 화개 차를 선물한 시 [민판서의생 조천화개차신](閔判書義生 朝天花開茶신)이다. 차의 종주국인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에게 중국 명차 못지않은 우리 화개차를 자랑하라고 선물한 것이리라.
시에서 양이(陽이)는 중국 최고 차의 산지(현 강소성 의홍)이자 최고급 차를 가리킨다. 중국차의 고전인 허차서의 [다소(茶疏)]에
“당나라 사람들은 양이차를, 송나라 사람들은 건주(建州)차를 가장 귀중하게 첫머리로 쳤다. 지금까지 이 두 지역의 자공납이 유독 많았다.”
고 적고 있다. 양이차는 당나라의 최고 명차이자 화개차와 같이 조정에 공납하던 자순차를 말한다. 일곱잔의 차노래로 유명한 노동의 차시에도 양이차가 나온다.

천자에게 양이차를 맛보게 하려고
모든 화초들 감히 앞서 꽃피우지 않았다지
부드러운 바람에 봉오리 맺혀
봄에 앞서 노란 차싹 피워 낸다네.

하연 선생은 화개차를 양이 자순차와 견주며 우리차 자랑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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