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여(金天汝), 김명국 金明國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신필이라 불린 화가

2017. 2. 25. 03:18美學 이야기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신필이라 불린 화가

김명국

김천여(金天汝), 金明國



요약 테이블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대표작 〈달마도〉, 〈나귀를 탄 사람〉, 〈설중귀려도〉, 《사시팔경도》 등
시기 조선 중기

   

   굳세고 거친 필치와 분방한 붓놀림으로 호쾌하게 그린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김명국은 인조와 효종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의 대표작인 〈달마도〉나 〈나귀를 탄 사람〉 등은 누구나 한 번쯤 접했을 만큼 유명하다. 굳세고 거친 필치와 분방한 붓놀림으로 호쾌하게 그린 그의 작품들은 마치 붓이 가는 대로 일필휘지로 그린 듯하여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내내 ‘신필(神筆)’이라고 불렸는데, 조선 후기 미술 평론가 남태응은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했다.



〈달마도〉
                       

   생몰년이나 생애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본관은 안산,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취옹(酔翁)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의궤에 기록된 이름도 명국(明國), 명국(命國), 명국(鳴國) 등 세 가지 이름을 섞어 쓰고 있다.

도화서 화원으로 종6품 교수와 정6품 사과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화단을 대표해 조선통신사행 화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은 일본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명성이 일본에까지 미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도 1627년부터 1661년까지 약 35년간 도감(都監)에서 일하며 궁중 행사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소현세자 혼례, 원종과 황후의 입묘 행사, 효종 왕세자 혼례, 효종 장례 등을 그렸으며, 의식에 사용하는 용구를 제작했고, 1648년 저승전 준수 공사 때 단청 작업을 지휘했다.


   그에 관한 동시대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기행과 성품, 그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독특한 화풍으로 수많은 전설이 탄생하면서 후대에 많은 이야기가 남겨졌다. 호방한 성품에 농담을 좋아하고, 한 번에 몇 말씩 마실 정도로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술에 취하지 않으면 붓을 잡지 않았다고 하여 스스로 호를 ‘취옹(酔翁)’이라고 지었다. 또한 술에 미친 듯이 취하면 걸작이 탄생했으며, 그에게 그림을 청하고 싶다면 큰 술독을 지고 가면 된다는 말이 장안에 돌 정도라, 세인들은 그를 ‘주광(酒狂)’이라고 불렀다.

술에 관한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지옥도〉(이 그림은 전하지 않으며, 일화로만 남아 있다)에 관한 것이다. 한 승려가 김명국에게 〈지옥도〉를 그려 달라고 큰 사례를 하며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는 술을 마시며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릴 비단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한 붓에 지옥도를 그렸다. 생생한 색채와 선명한 필선이 진짜 지옥을 방불케 했는데, 재미있게도 그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모두 승려였다. 이에 승려가 한탄하자 술을 더 사오라고 하더니 그 술을 다 마시고 잠깐 사이에 그림을 고쳐 놓았다고 한다.

그의 신묘한 그림 솜씨에 대해 이런 일화도 전한다. 한번은 공주가 빗감에 그림을 그려 오라고 명했는데, 김명국이 바친 빗에는 아무리 봐도 그림이 없었다. 공주가 의아하게 여기자 그는 다음 날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 하고 물러갔다. 다음 날 공주가 빗에 붙은 이를 손톱으로 눌러 죽이려 했는데 그것은 이가 아닌 그림이었다고 한다.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으로서 각종 기록화를 그렸다. 이런 그림들은 당대 높이 평가받던 사대부의 문인화와 달리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 및 도화서의 양식화된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비공식적인 그림들과 화풍이 매우 다르다.

조선 중기 화단은 안견풍의 그림과 중국 명나라 시대의 대진 및 그의 추종자들이 형성한 절파계 두 가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안견풍은 치밀하고 세심한 묘사로 궁중에서 선호한 화법이었고, 절파는 거친 필묵과 여백 활용, 율동감 등을 강조하는 화풍이었다. 절파는 후대로 갈수록 지나칠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그려 ‘미치광이 같은 나쁜 취미’라는 의미의 ‘광태사학파(狂態邪學波)’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김명국은 도화서의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가 주가 되는 양식화된 작업에서도 유감없이 솜씨를 발휘했으나 기질에는 잘 맞지 않았던 듯하다. 도화서 화원으로 안견풍에도 탁월했으나 절파화풍에도 통달해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은 사계절의 경치를 두 폭씩 총 여덟 폭에 담은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화첩이다.

《사시팔경도》와 같이 궁중에서 요구하는 양식이 아닌 그림을 그릴 때는 절파화풍의 산수인물화를 즐겨 그렸고, 당시 흔치 않던 소재인 달마나 포대화상(布袋和尙) 등의 선종화도 종종 그리는 등 개성 있는 작품 세계를 이룩했다. 그가 그린 자연은 준엄함과 장대함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며,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들은 대상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며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작품에서의 대담하고 간결하며 자유분방한 필치는 당대 보기 드문 파격이었던 탓에 광태로 취급된 명나라 오위와 장로의 화풍에 비견되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은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끌며 일본 화단에 영향을 주었다. 김명국은 1636년 조선통신사가 파견될 때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수행 화원의 자격으로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신선이나 달마를 그리는 선화(仙畵)가 유행했는데,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일본식 선화에 비해 선이 굵고 호방한 그의 선화들은 일본인을 흥분시켰다.

당시 통신부사였던 김세렴이 쓴 사행일기 《동명해사록》에 따르면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김명국은 울기까지 할 뻔했다.”라고 한다. 또한 이후 동래부사를 통해 그의 그림을 사가려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7년 뒤에 김명국은 다시 한 번 조선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때는 일본 정부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고 특별히 청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가 재개되면서 한 화원이 일본에 두 번 간 예는 김명국밖에 없다.

이 일은 당대 조선인에게도 큰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인다. 남태응의 《청죽화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도 일본에서 그가 활약한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전하는데,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조선의 자존심을 김명국이 그림 하나로 일으켜 세웠다고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김명국은 그가 살았던 당대보다 후대로 갈수록 더욱 높은 평을 받았다. 그는 종래 화인들과 달리 인위적인 기술을 중시하거나 특정 양식을 따르며 그리기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친 조선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 전하는 작품 수는 적으며, 기록으로는 남아 있으나 전하지 않는 그림도 많다. 현재 전하는 대표작으로는 《사시팔경도》 화첩,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달마도〉, 〈노엽달마(蘆葉達磨)〉, 〈수성노인〉, 〈수노인도(壽老人圖)〉 등이 있으며, 많은 선화들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설중귀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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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많은 작품을 직접 만나기 위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해외 미술 서적들을 국내에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대중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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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의 작품세계| 갤러리

               

돌뫼 | 조회 76 |추천 0 | 2005.07.05. 01:36



< 김 명국(金 明 國)의 미술 세계 >


기려도(騎驢圖)


   조선시대 제2기(1550경~1700경) 에 해당되는 시기에 화단을 이끌던 이는 김시,이경윤과 더불어 또 한사람의 대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 명국(1600~?)이다. 김명국은 본관은 안산(安山)이며,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김 명국은 절파계 화풍을 구사했던 화가인데 더불어 안견파 화풍을 쓰기도 했다. 그가 주로 사용했던 절파화풍은 거칠고 과장된 기운이 감도는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에 가까운 화풍이었다. 일화에는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밤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한다.


   김 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몹시 좋아하였고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특이한 버릇이 있어서 그의 작품들은 취중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호방한 기질은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굳세면서도 매우 호방하고 거친 필법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조선 전기의 안견파 화풍을 보이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사학파적인 산수인물화이다.  산수화나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가 주류를 이루는데, 대담하고 간략한 붓질로 표현하면서도 작품의 대상에 내면적 세계를 잘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보기

설경산수도

탐매도

(探梅圖)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1662년 (만춘)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1662년  (초하)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1662년 (만하)

달마절로도강

(達磨折蘆渡江)

달마도

(達磨圖)

 

cafe.daum.net/ansansusuk/4Ag4/59   단원 수석회





세계 최고의 달마도(達磨圖) 김명국(金明國·1600∼1662)의 작품세계| 갤러리

               

hongyeol | 조회 44 |추천 0 | 2016.09.16. 13:24
  


세계 최고의 달마도(達磨圖) 김명국(金明國·16001662)의 작품세계

 

    

 



김명국 (金明國/?~?)

조선 중기의 화가.

본관 안산. 자 천여(天汝). 호 연담(蓮潭국담(菊潭취옹(醉翁).

일명 명국(命國). 도화서 화원을 거쳐 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1636(인조 14)43년 두 차례나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인물·수석에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였는데,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대비가 심한 묵법,

자유분방한 감필법,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유작은 안견파의 화풍을 따른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파(狂態派)에 속한다.

작품으로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를 비롯하여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기려도(騎驢圖)》《관폭도(觀瀑圖)》《투기도(鬪碁圖)

은사도(隱士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등이 있다.




김명국의 달마도(達磨圖) 감상

 

조선 중기의 화가 연담 김명국의 작품.

지본수묵. 58×8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와 인물을 모두 잘 그린 김명국은 사람됨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술에 몹시 취하여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은

취중에 그려진 것이라 한다.

그의 호방한 성격은 거칠고 힘찬 필치의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물화인 달마도에서도 명대 절파계의 후기양식인 광태사학파의 화풍에서와 같은 거칠고 활달한

필치가 보인다.

필선에 농담과 살을 붙이고 할필과 독필을 사용하여 강렬한 인상을 준다.

신자하는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하여 백 년 이내에는 겨룰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담묵으로 처리된 달마의 표정에서 고도로 응결된 내면적 정신세계가 표출되어 있다.

 

 

설경산수도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취한 후에 그려진 것이다.

설경산수도에도 김명국의 이러한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다른 그림에 비해 화면이 약간 정리된

듯하지만 활달성은 한층 심화되어 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겨울 새벽녘인 듯한 시각에 사립문에 기대어 전송하는 동자와 뒤를 돌아다보며

길을 떠나는 나귀 탄 고사(高士)와 종자(從者)의 송별 장면이 눈 덮인 설경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중경에 그려진 넘어질 듯 솟아 오른 산의 무게를 대각선상에서 받치면서 화면의 변각구도를 보강해 주고

있는 다리와 그 위의 기려(騎驢)인물은, 패교를 건너 설산으로 매화를 찾아 떠났다는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을 연상케 한다.

 

   언덕과 눈 덮인 산기슭과 앙상한 나뭇가지와 인물들의 옷 주름에 가해진 힘차고 날카롭게 각진

윤곽선이라든지 거친 묵법 등은 광태파 화풍과의 유관함을 보이면서 어둡고 차가운 설경 속

화중인물의 심의(心意)를 승화시키고 있다..



 


 


 

탐매도(探梅圖)

 


   탐매도에는 김명국의 광태적 화풍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산등성이와 암괴(岩塊)는 굵고 힘찬 필치로 대담하게 묘사되었으며,

지팡이를 비스듬히 잡고 서 있는 은사(隱士)와 그 옆의 시자(侍者)

의습선들은 분방하면서도 날렵하여 김명국 특유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강한 필치가 연두색 등의 연한 담채에 어울려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며,

화면 전체에 서정적인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다만, 포치(布置)가 다소 옹색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다.


 

 

선승1


 

 

선승


 

 

기려도 1


 

 

기려도2


 

 

기려도3


 

 

기목관수도


 

 

비급전관도


 

 

관폭도(觀瀑圖)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


 

달마의 초상이나 행적은 선종화에서 즐겨 다루었던 소재였는데,

이 그림도 그의 행적 중의 하나를 묘사한 것이다.

6세기 초 중국에 건너간 달마가 양() 나라 무제에게 최초로 설법하였지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갈대잎을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한 줄기 갈대에 몸을 싣고

서 있는 달마의 얼굴은 광대뼈와 매부리코, 치켜 올라간 눈매로 매우 강하면서도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담묵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된 얼굴에 비해, 의복부분은 죽죽 그어댄 활달한 농묵의 필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주춤거리는 곳이 없는 빠른 속도의 감필묘(減筆描)는 김명국의 세련된 기교를 말해준다.

이같이 대담한 필선은 예리한 눈매와 더불어 달마의 농축된 선기(禪氣)를 성공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진전하는 듯한 인상이면서도 옷자락의 끝단이 왼쪽으로 날리게 처리한 것은

필선 자체의 추상적 리듬에 치우쳐 사실적인 묘사에 위배된 부분이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1662(초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1662(만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1662(만하)



   이금산수(泥金山水)는 사계절을 8폭에 담은 화첩 중 초춘. 만춘. 초하. 만하의 네 폭이다.

각 계절마다 두폭씩 8폭으로 꾸며졌다.

도판의 그림은 두 폭씩 한 쌍을 이루되 각기 좌우에 치중하여 중앙을 비우는 화면 구성을 이루고 있다.

화첩이 오른쪽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초춘은 오른쪽에 비중을 둔 그림이다.

춘경에는 수면을 비교적 좁게 나타냈고 물결이 잔잔하며, 전경에 나타난 수종은 덩굴이 감긴

노송(老松)으로 되어 있다.

만춘에 이르면 버드나무가 전경에 크게 부각되어 사방이 트인 옥내에 있는 인물 역시 크게 나타나 있다.

초하는 도롱이를 입고 귀가 중인 두 인물이 전경에 등장하여 우중(雨中)임을 알려주고 물살이

다소 높아져 있다.

 

   만하는 야경으로서 보름달이 중천에 떠 있으나,

전경의 나무들은 바람에 크게 흔들리며 사뭇 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화첩은 또 다른 6폭의 산수 인물첩과 필치 및 구도면에서 유사점이 많아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김명국은 산수에 있어 소방(疎放)한 절파계 화풍만이 아니라 전기화단의 안견화풍도 오히려 노년기에

접어들어 그리고 있어 <사시팔경도> 화첩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기려도(騎驢圖)>

 


기려도는 그의 김명국의 <산수인물화첩> 중의 한 폭으로,

그 기법에 있어서 선종화적인 풍취가 깃든 작품이다.

갓을 쓰고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를 그린 소경산수인물도에서는 오랜 여행길에 몹시 지쳐 보이는

나귀와는 달리 시상에 잠겨 있는 선비의 모습을 김명국 특유의 재빠른 붓질로 잘 표현되고 있다.

배경의 산수는 절벽에 덩굴풀이 흘러내리도록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림의 초점이 중앙의

나귀 탄 인물에 있음을 알려준다.



 

 

수노인 (壽老人)


 

 

설경별리도


 

 

설중행려도(雪中行旅圖)


 

 

은사도(隱士圖)


 

 

설중귀려도


 

 

노승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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