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과 백남준의 만남:문화로 세상을 바꾸다’ 전

2017. 2. 25. 03:46美學 이야기



     



               

낙천적 믿음 담긴 예술작품… 혼돈의 현실 어루만지다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문화로 세상을 바꾸다’ 전




   정치적 혼돈과 개인적 좌절이 아무리 무겁고 힘들더라도 옛사람들은 낙천적인 세계관을 잃지 않았다. 수많은 수난사를 이겨내게 해준 낙천주의야말로 우리 문화의 기제에 깔린 핵심적인 가치다. 요즘 겪는 ‘대통령발 절망’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조선시대화가 4명의 작품과 백남준 작품이 낙천주의 코드로 만난다. 9일부터 내년 2월 5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 문화로 세상을 바꾸다’ 전에서다. 사람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믿음과 이상향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자 했던 공통된 염원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역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나라의 기운과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마다 예술가들은 낙천성으로 시대를 위무했다.

   전시는 연담 김명국,현재 심사정, 호생관 최북, 오원 장승업의 작품이 백남준 작품과 매치되는 형식이다. 김명국은 불교의 선과 도교의 신선사상으로 이상향을 꿈꾸는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은 몽환적인 남종 산수로 이상향을 꿈꿨다. 최북은 유유자적하고 은일한 선비의 이상향을 사랑했다. 장승업은 도석인물화를 통해 인간의 무병장수·부귀영화·입신양명과 같은 세속적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현세를 초월한 신선의 삶에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암흑한 시대를 살았던 백남준도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예술과 기술이 조화를 이루고, 동서양 문명이 서로 통하여 인류문명 자체가 어우러져 발전되길 희망한 이상주의자였다.




최북의 ‘관수삼매’
◆그래도 삶은 희망이다 

   전시장엔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와 백남준의 설치 작품 ‘비디오 샹들리에 1번’이 함께 배열된다. 장승업의 그림엔 연꽃, 책상에 걸린 물고기, 향로와 수선화, 오래된 동 그릇과 가을 열매들이 화폭에 가득하다. 연은 군자를 상징하고 연뿌리는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 두 마리의 물고기는 경사스러운 일의 바람이다. 수선화(水仙花)는 이름 그대로 물에 사는 신선 같은 꽃이다. 신선처럼 향기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백남준의 샹들리에는 또 어떤가. 백남준은 1989년 ‘비디오 샹들리에 1번’을 제작하면서 샹들리에에 여러 대의 소형 TV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부유함의 상징인 샹들리에에 대중들의 정보의 창이자 즐거움의 소일거리인 소형 TV를 이용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사는 시대에 대한 기대로 해석할 수 있다.


심사정의 ‘촉잔도권’(부분)
간송문화재단 제공



◆이상향이 있기에 위무를 받다 

   심사정이 63세에 그린 ‘촉잔도권’은 국보급의 대형 두루마리 그림이다. 현재 중국 쓰촨성과 광시성에 해당하는 촉(蜀)나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여 시인 이백이 ‘촉으로 향하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림 속 굽이굽이 길은 우리네 인생의 역정을 닮았다. 그림이 끝나는 왼쪽 부분에선 평화로운 강 하구에서 돛을 단 배들이 순풍을 맞아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간다. 초반의 역경을 딛고 끝까지 살아간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말년의 여유를 상기시킨다.

함께 배치된 백남준의 ‘코끼리 마차’는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과거에 정보를 교환하려면 편지를 주고받거나 직접 먼 거리를 이동해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먼 옛날부터 이동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코끼리다. 코끼리는 상서롭기도 하다. 그 위에 노란 우산을 받치고 행차하는 부처님의 모습이 해학적이다. 부처님은 마차에 TV를 가득 싣고 있다. 정보는 원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이제 모든 사람이 TV를 통해 쉽게 정보를 공유한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는 이상향을 표현했다.




백남준의 ‘코끼리 마차’


◆달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백남준은 ‘달은 인류 최초의 텔레비전’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 ‘달에 사는 토끼’에서 나무로 만든 토끼는 TV에 비친 달을 한없이 응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달에 토끼가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달 속의 토끼를 상상하곤 한다. 과학적 사실과 시적 상상력, 이 둘의 우월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학기술이 만든 TV라는 틀을 채우는 내용은 우리의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달을 많이 그렸다. 오원 장승업의 ‘오동폐월’ 역시 그중 하나다. 보름달이 뜬 깊은 밤에 국화가 달빛을 받아 노란빛을 더한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오동 잎에 다가올 겨울이 두려운 것일까, 국화꽃이 이해 핀 마지막 꽃이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보름달 뜬 밤에 개는 고개를 돌려 국화꽃을 바라본다. 오원이 자신의 심정을 지나가는 한 마리 개에게 의탁했는지도 모른다. 시적 정취가 아름답다.

나란히 한 대가들의 작품은 우리의 상상력과 시적 감수성이 과거나 현재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미래를 알리는 파격과 일탈

   우리는 규칙과 질서 덕분에 살아간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끌었던 규칙과 질서의 엄밀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의미를 잃기도 한다. 변화란 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소리 없이 다가온다. 우리가 변화를 인식했을 때 그것은 이미 변화가 일어나버린 이후이다. 다만 예민하고 직관력 있는 소수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먼저 느끼고, 그 변화의 의지를 파격과 일탈이라는 방법으로 예술매체에 투사시킨다.

백남준의 ‘머리를 위한 선(禪)’은 작가의 머리카락에 잉크를 흠뻑 적셔 머리로 그은 선이다. 일종의 참선(參禪) 의식이다. 일상의 모든 시간을 참선 행위로 승격시키려 했던 대가의 일면이 묻어 나오는 걸작이다.

함께 전시된 김명국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 김명국은 호가 ‘취옹(醉翁)’일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고 격식이나 법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분방하고 개성 있는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 ‘철괴’는 도교의 팔선인(八仙人) 중 한 명을 그린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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