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2) 정선의 ‘인왕제색도’

2017. 3. 25. 06:59美學 이야기



      

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2) 정선의 ‘인왕제색도’
조선 산수화의 開闢 … 만년의 난숙한 기량 발휘
2006년 05월 02일 (화) 00:00:00홍선표 이화여대 edit@kyosu.net


▲인왕제색도 ©



   고려때 북송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조선시대 가장 활발히 그려진 산수화 중에서 미술사가들은 초기의 안견과 후기의 겸재를 ‘최고의 산수화가’로 꼽았다. 안견은 곽휘풍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독창적 화풍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겸재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호에서는 겸재의 산수화를 먼저 짚어보기로 한다.

仙界와 靈地를 상징하는 산악문에서 발생한 산수화는 지형이나 지세를 도상화하는 단계를 거쳐, 자연의 조화경 그림을 보면서 유람하는 문사들의 臥遊物로 가장 성행했다. 문사들의 중세적 감상화인 와유물 산수화는 고전화된 경관을 다룬 정형산수화와 이상적인 실물 경관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나눠 볼 수 있다. 


정형산수화와 진경산수화는 내셔널리즘과 모더니즘과 같은 근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자를 모화주의와 관념경, 후자를 주체의식과 현실경으로 규정하고 양자를 대립적 관계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문사들의 중세적인 문화 관습과 상식으로 보면, 고인을 배우고 조화를 배웠듯이(‘師古人 師造化’), 고전적 조화경인 정형산수화와 실물적 조화경인 진경산수화는 탈속의 古意를 습득하고 이를 직접 실행해 ‘自得’하는 상보적인 관계로 기능한 것이 실상이다. 문인화가와 화원화가 모두 이들 산수화를 겸비해 그리는 것이 하나의 화습이었으며, 당시 동아시아 회화조류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정형산수와 진경산수를 모두 즐겨 그렸으며, 이런 풍조가 조선후기를 유행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17~18세기 동아시아 미술의 조류로 풍미한 서화 애호풍조와, 천기론과 결부된 창생적 창작의 실천과, 남종문인화를 정통으로 삼은 신고전주의 화풍을 토대로 조선의 산수를 문사취향의 와유물로서 새롭게 창출하고 ‘동국산수화의 개벽자’로 화명을 날렸다. 정선의 미술사적 명성은 이처럼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성자로 더욱 각별하며, 그 중에서도 ‘인왕제색도’가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비온 후의 인왕산 경관을 제재로 삼은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 되던 해인 영조 27년(1751) 윤 5월 하순에 그린 것이다. 진경산수화에서 정선은 중장년 시절을 통해 주로 금강산을 비롯한 강원도와 영남 지방의 명승명소지를 다루다가, 노년을 보내게 되는 인왕산 바로 아래 동네 순화방 인왕곡(지금의 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으로 이사한 후인, 60대 무렵부터 거주지 주위의 한양 경관을 그리면서 자신의 화풍 확립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왕제색도’의 창작 경위에 대해서는, 제작일이 이병연의 타계일 며칠 전이었다는데 의거해, 수십년간 시화를 교환하며 친숙했던 그와의 평생 추억을 함축하고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평상시 함께 노닐며 내려다보던 북악산 줄기에 올라, 그 아래 쪽 육상궁 뒤편에 있던 이병연의 제택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정선이 자신의 제택인 인곡정사와 그 주봉인 인왕산의 경관을 기념비적 와유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선은 1745년 1월, 5년여 간의 양천현령직에서 물러나온 후, 그동안 그림값 등으로 벌어 모은 재부로 솟을대문을 세우는 등, 명문가 부럽지 않게 증축한 다음,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필적이 있는 외조부댁 소장의 ‘주자서절요서’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이황과 송시열의 유거처와 함께 외조부의 ‘풍계유택’과 자신의 ‘인곡정사’를 그려 합철함으로써 그동안 벌열가에 비해 차별되어 온 명문의식을 드높게 표명한 바 있다. ‘인왕제색도’는 그 연장선상에서 속진을 씻어내듯 비가 쏟아진 후 인왕산의 우렁찬 기세와 비안개 걷히는 인곡정사의 유현한 운치를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은 이와 같이 자신의 세거지 경관을 주문화가 아닌 문인화 본령의 자오자족적 차원에서 다양한 기법과 절정에 이른 만년의 난숙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키게 된다. 세거지 주변은 내려다 본 시각으로, 인왕산은 그 곳에서 올려다 본 ‘상관하찰’의 역상적 방식으로 경관을 포착함으로써, 과학적인 일점투시법과 달리 보는 사람에게 그린 사람이 받은 감흥을 더 생생하게 전해준다. 구도는 명말청초 소운종의 ‘태평산수도’에 수록된 명산도와 원림도들처럼 화면 가득히 배치함으로써 천하의 조화경으로 이상화해 나타내려 했다. 그리고 한 덩어리의 거대한 흰색 화강암으로 이뤄진 주봉을 중량감 넘치는 逆色의 짙은 먹으로 힘차게 칠해 내려, 비에 씻겨 말쑥해진 상태로 압도할 듯 눈앞에 성큼 다가선 괴량감의 감동을 극명하게 살려냈다. 소운종도 즐겨 사용한 넓고 긴 붓자국의 장쾌한 묵면들이 경관의 박진감과 생동감을 더 해주며, 부드럽고 성글게 구사된 남종문인화법의 피마준과 태점이 조화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산허리를 감도는 비안개를 여백으로 처리하고, 세거지 주변의 송림을 정선 특유의 물기 배인 횡점들과 함께 빠른 편필로 나타낸 다음, 담묵으로 번지듯 우려서 유현한 정취와 운치를 자아냈다. 대상물의 자연적 취세와 교감하고 이를 우주적 생성화육의 원리인 음양의 조화로 구현한 창생적 창작의 극치로, 자연의 경치를 인위가 아닌 천취처럼 그리려 했던 작가의 창작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왕제색도’에서 달성한 정선의 예술적 성과는 당시 창생적 창작론의 주창자였던 이하곤의 평처럼, 기존의 한가지 방식으로만 거의 상투적으로 획일적이고 좁은 안목에 의해 그리던 조선 산수화의 병폐와 누습을,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무덤을 이룰 만큼 많은 붓을 사용해 직접 그 기세를 실사하며 체득한 ‘自家胸中成法(자신의 가슴 속에 이룩한 법)’으로 바로잡은 ‘조선 산수화의 개벽’과 같은 것이었다.


   자연에서의 실물 상태가 아닌 이상적으로 정형화된 산수의 이미지를 조합해 그림으로 해서 대상물과 자아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배제된 채 형식과 기교에 치중한 조선초기의 명작 ‘몽유도원도’와는 창작관을 달리하는 것이다. 정선의 동네 지기로 이웃해 살던 문인화가 조영석도 그가 인왕산 아래 유거하면서 산을 마주 대하고 준법과 필묵법 등을 자신의 가슴으로 직접 터득하여 그린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인왕제색도’는 이와 같이 ‘熟覽’과 ‘凝神’에 의한 물아일체의 경지를, 새로운 동아시아 문예사조로서 대두된 반모의적 차원에서 직접 실천한 창생적 창작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形神不相理’의 원리에 의해 형상을 닮게 묘사해 그 신을 옮겨내는 形似的 傳神法의 가장 뛰어난 사례로도 각별하다. 정선의 성공에는 ‘通變’론에 의거해 ‘古’의 인습화와 세속화를 회복하기 위해 고전의 습득에 의한 ‘통’과 자득적 체득에 의한 ‘변’을 통해 ‘古’를 계승하고 ‘今’을 타개하려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의 이러한 국제조류 수용에 대한 전진적 자세와 역사적 성찰력이 자존적인 명문의식과 결부되어 집약된 그의 작가 생애 최종의 득의작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