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6> 박병제 '자갈치의 오후': 삶의 성화(聖畵)가 되는 푸른 그늘의 여인들

2017. 3. 23. 04:10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6> 박병제 '자갈치의 오후': 삶의 성화(聖畵)가 되는 푸른 그늘의 여인들


성스럽다, 어두운 퍼런 비릿한 자갈치 아지매의 영토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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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5-12-15 18:47:48
  •  |  본지 20면

   


   
자갈치의 오후- 박병제(1964~2009)의 1999년 작. 부산 서구 초장동에서 태어난 그는 자갈치, 산복도로, 골목 같은 삶의 현장과 그 속의 사람들을 그려 삶의 예술로 승화했다.



여인의 얼굴들은 삶의 파도에 깎여
둥근 자갈을 닮는다
그 고난과 억척이
한 개인의 얼굴을 벗어날 때
얼굴은 성화가 된다


   그곳에 우리 곁에 머물렀다 홀연히 떠나버린 화가 박병제(1954∼2009)의 시선과 넋이 떠돌고 있다.

자갈치, 그 선착장을 걸어가면 비린내와 함께 낡은 건물들과 정박한 배에 묻어 있는 녹슨 시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녹슨 배들을 폐선이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녹이란 살아온 시간의 고단한 여정과 상처의 흔적일 뿐. 상처 속에서도 삶은 끈질기다. 아니, 상처의 힘으로 삶은 다시 출항한다. 녹슨 배들은 언제라도 어깨에 쌓인 먼지를 털고 힘차게 뱃고동을 울리며 풍요의 바다로 떠날 것이다.

선착장을 빠져나와 박병제의 시선과 함께 자갈치 시장 골목을 온몸에 비린내가 배이도록 천천히 걸어가 보라. 이렇게 낡고 녹슬고 비릿하면서도 살아서 생동할 수 있는 곳, 자갈치다. 아지매들의 억센 사투리와 생선 비린내가 만들어내는 활기찬 소란 사이로 갈매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림에 순수하게 미쳤던, 그래서 그 외의 모든 일에 지독히도 무력했던 박병제는 아직 저 자갈치의 풍경 속에 살아 있다. 그는 비릿한 자갈치의 풍경을 가장 탁월하게 형상화했던 화가다. 천마산 산동네와 질펀한 자갈치 장바닥에서 그는 성장기를 보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바로 그 자갈치 아지매였다. 자갈치는 화가의 기억 저 깊은 곳에 정박한 녹슨 배이지만 언제나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하는 살아 있는 배였다.


■즉흥곡의 선율 같은 공간

   박병제의 공간은 즉흥곡의 선율처럼 율동 속에 있다. 그가 수없이 그린 산동네의 휘어지는 골목길이 그러하다. 온갖 못난 것들이, 못나서 그리운 우리 삶이 조금씩 마모되고, 따뜻하게 둥글어지고, 용서되는 공간이다. '자갈치의 오후'(1999)의 공간 역시 리듬을 타고 휘어진다. 이러한 공간은 기억의 시선에서 온다. 기억에는 삶의 달고 쓴 체험이 수많은 리듬과 파동으로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것들이 형상의 율동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 기억의 시선은 삶의 굽이와 굴곡을 악보처럼 하나의 공간으로 모으면서 형상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근대 회화가 중세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면, 박병제는 형상과 색채 속에 새로 삶의 이야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이며 또한 고단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박병제의 풍경은 '기억의 사실주의'다.

자갈치는 지금 겨울의 오후인 듯하다. 선착장을 끼고 굽이를 틀며 자갈치의 길이 화면의 앞(하단)으로 열리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 자갈치 시장길 한가운데에 세운다. 멀리 어스름 어둠에 싸이기 시작하는 부산대교를 지나서, 오후의 느린 햇살은 배가 정박한 곳을 비추다가 오른쪽 건물에 가려지면서 다시 그늘이 된다.

  풍경은 양지와 음지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햇살이 닿는 곳은 노랑이 주조색을 이루고 그늘은 파랑이 주조색이다. 노랑은 빛과 이어져 있으며, 파랑은 어둠과 이어져 있다.(괴테 '색채론') 좌판을 벌린 자갈치 아지매들은 대부분 푸른 그늘 안에 있다. 그곳은 그녀들의 영토다. 그늘진 곳, 가장 비릿한 곳, 그러나 삶이 가장 억척스러워지면서 신비스러워지는 곳, 자갈치 아지매들이 만드는 풍요로운 여성성의 영토다. 어쩌면 그곳은 그의 어머니, 모성의 공간일지 모른다. 물건을 나르는 사내가 그 경계에 이르고는 있지만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는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삶의 억척스러움과 신비는 이 그늘을 촉각의 공간으로 만든다. 무수한 층의 덧칠이 만드는 질감은 박병제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인데 그것은 풍경 속에 삶의 질감을 새긴다. '자갈치의 오후'에서 햇살이 비치는 공간이 시각의 공간이라면 그늘은 가장 두터운 질감을 형성하는 촉각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 거칠면서 따뜻한 질감을 촉감으로 더듬어야 한다. 그 촉감에는 삶의 비린내가 지문처럼 찍혀 있다. 기억의 촉수는 언제나 촉각과 후각이다. 그리고 모성의 공간 역시 촉각과 후각의 공간이다. 그것이 또한 박병제의 풍경이다.


■차갑고도 따뜻한 박병제의 흰색

   
행상- 박병제가 생선 파는 좌판 '아지매'를 정성스레 그렸다. 2002년 작.
'자갈치의 오후'의 여인들은 우리 삶의 길 한가운데 비늘이 퍼덕이는 푸른 공간을 열고 있다. 그녀들은 좌판에 작은 바다를 벌려놓았다. 그 바다에는 따뜻한 연민과 건강한 해학이 물고기처럼 몸을 뒤채고 있다. 연민은 푸른 그늘의 흰빛처럼 부유한다. 박병제는 흰색을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게 만들 줄 아는 작가이다.

양지에서 흰색은 하나의 색이지만 푸른 그늘의 질감 속에서 흰색은 흰빛이 되어 스멀거린다. 그것은 삶의 고단한 균열 사이로 새어나오는 알 수 없는 힘의 빛이다. 삶의 어둡고도 밝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모순을 견디어 내는 힘들고도 치열한 긍정에서 오는 감응의 빛이다. 또한 그러한 힘 속에서 가능한 해학은 자갈치 풍경뿐만 아니라 자갈치 아지매 같은 여인상들에서 익살스럽고도 강렬한 생명력을 획득하기도 한다.

'행상'(2002년)에서 아지매의 표정은 어두운 화면만큼 어둡지는 않다. 오히려 좌판 위에 한껏 입을 벌리고 있는 생선과 더불어 친근하고 익살스럽기까지 하지 않은가. 마치 하회탈처럼. 여기에 삶의 쓰라린 신산고초를 견뎌낸 끝에야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긍정이 배여 있다. 삶의 거대한 파도에 맞서 밤마다 수없이 무너지면서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부서진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는, 그리하여 끝끝내 그 억압적인 무게와 긴장을 이완시킬 줄 알게 된 웃음, "야야, 산다는 기 별 꺼가"하며 금세 구수한 사투리로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그 끈질긴 생명의 표정을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갈치 아지매다.

그녀들은 좌판과 함께 모두 앉아 있다. 그녀들 삶은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다. 사무치는 슬픔도 쓰라린 고통도, 더러 가끔의 작은 행복도 그녀들은 그렇게 앉아서 기다리고 맞이하고 견디는 것이다. 그녀들의 억척스러움은 이 끈질긴 기다림과 견딤에서 온다. 그것이 공간의 두터운 질감으로 새겨진다. 그런데 하단 중앙에 있는 여인은 묘하게도 상체만 그려졌다. 마치 그림의 틀에 두 팔을 짚고 그림 밖으로 상체를 반쯤 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는 앉아 있는가, 서있는가? 막 일어서려 하는 것인가? 그녀는 그림 밖의 우리를 그림의 기억 속으로 끌어들이는 지점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녀는 오랜 견딤 속에 앉아 있는 그림 속 여인들을 일으켜 세워 그림 밖으로 데리고 나올 작정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갈치는 기억 속에,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도 있게 된다.


■삶을 승화한 자리에 핀 그림

   
  화가는 앞에 있는 자갈치 여인 몇 명의 얼굴만을 대충 그렸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여인들의 얼굴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 얼굴들은 삶의 파도에 깎이고, 마모되면서 바닷가 둥근 자갈을 닮는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고난과 억척스러움이 한 개인의 얼굴을 벗어날 때, 그녀들의 얼굴은 성화(聖畵)가 된다. 비린내 나는 그대로 삶의 성스러움이 된다.

한 교회의 신자이기보다 예수의 진정한 제자이고자 했던 그는 생전에 많은 성화를 제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의 형상을 직접 그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우리 삶을, 삶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따뜻한 사랑을 치열한 예술혼으로 승화(성화)시켰다. 그의 자갈치는 '삶의 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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