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례도 중 어사례도 大射禮圖 중 御射禮圖

2017. 3. 29. 14:16건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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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도 중 어사례도 大射禮圖 중 御射禮圖





1743년, 화권, 비단에 채색, 60.0×282cm, 고려대학교 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대사

다른 표기 언어 大射禮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성격 국가의례
    유형 의식행사

    분야

             
    종교·철학/유학 
            

    요약 국가에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아 그 예의 도수[禮數]를 살피는 의례.

    개설

       행사하려는 것이 제사일 경우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힌 사람은 상으로 제사에 참례시키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로 제사에 참례시키지 않았다. 활쏘기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남자의 덕행을 수양하는 방법이며 심신을 단련하고 국가의 비상시를 대비하는 훈련 방법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사례에는 대사례와 향사례(鄕射禮)의 두 가지가 있다. 주관하는 곳에 따라 임금이 주관하면 대사례, 대부나 지방관이 주관하면 향사례라 하였다. 향사와 대사는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 성행한 의식으로, 사례를 행하기 전에 연례(燕禮)를 행하여 군신의 의리를 밝힌 뒤에 시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1477년(성종 8)성종이 처음으로 행하였다 한다. 성균관에 나와서 선성(先聖)들에게 석전(釋奠)의 예를 드리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제목을 내어 과거를 보인 뒤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행하였다. 그 뒤 1534년(중종 29)·1743년(영조 19)·1764년에 시행한 기록이 있다.

    행사내용

       대회에는 종친을 비롯해 3품 이상의 문무관원이 참가했으며, 과녁을 맞힌 자와 맞히지 못한 자를 동서로 갈라서 세우고, 맞힌 자에게는 상품으로 옷이나 채단 같은 것을 하사하고, 맞히지 못한 자들에게는 벌주(罰酒)를 주어서 후일을 경계하는 것이 통례였다. 쏘는 화살의 수와 참가 범위에 일정한 규정이 없었으나, 영조 때 오광운(吳光運)의 청에 따라 한 번에 쏠 수 있는 화살의 수를 4개로 정하였다. 참가 범위도 정2품 이상으로 확정시키고 종2품관은 정수가 부족할 때 충당시켰다.


       활을 쏠 때 「대사악장(大射樂章)」 7절의 음악에 맞추어서 활을 쏘게 되며, 제4절에 첫 살을 쏘아서 매 음절에 한 발씩 쏘아 7절이 끝나면 4시(四矢)를 모두 쏘았다. 대사례가 시작하기 전 대사의 의식이 있었다. 왕이 단소(壇所)에 도착하면 참가한 사관(射官)과 활쏘기를 돕는 행사관(行射官)·시위대(侍衛隊)·종친·문무백관·성균관유생들은 지정된 장소에 나열해 대기하고 있다가, 왕이 어좌에 앉으면 음악에 맞추어 4배로 알현의 예를 드리는 것으로 의식이 시작되었다.


       상호군 두 사람이 임금의 활과 살을 시중들고, 병조판서는 준비 여하를 점검해 시작을 알린다. 왕이 화살을 활에 먹이면 악공들이 일제히 음악을 연주해 3절과 4절 사이에 이르면 첫째 화살을 쏘았다. 맞혔으면 ‘획(獲)’이라 하고, 화살의 방향이 표적보다 낮으면 ‘유(留)’, 높으면 ‘양(揚)’, 왼쪽으로 갔으면 ‘좌(左)’, 오른쪽으로 갔으면 ‘우(右)’라고 소리쳐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제2시는 음악의 5절에, 제3시는 음악의 제6절에, 제4시는 음악의 제7절에 맞추어서 발사하고, 제1시와 같이 보고하였다. 이때 화살이 과녁에 명중되면 기를 들고 있던 자가 기를 휘둘러서 명중했음을 참관자에게 알린다.


       왕이 활쏘기를 마치면 음악도 그치고 상호군은 활을 돌려받는다. 왕이 자리로 돌아가면 시사관들이 5발씩을 음악에 맞추어 쏘고, 과녁에 맞혔으면 북을 쳐서 명중을 알린다. 쏘기를 마치면 모두 단 아래로 돌아와서 동서로 나누어 서며, 병조판서가 맞힌 자의 이름과 맞힌 화살의 수를 기록해 상줄 것을 청하고,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줄 것을 청한다. 시상이 끝나고 사용하였던 기구를 거두고 일제히 왕에게 4배함으로써 모든 의식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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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의례(儀禮)』
    • 『춘관통고(春官通考)』
    • 『태학지(太學志)』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사례(御射禮)

    등록일: 2012-06-11 11:19:32 , 등록자: 김민수


     김민수



    어사례(御射禮)

       조선 국왕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성균관(成均館) 대성전에 나아가 선성(先聖)에게 석전제(釋奠祭)를 올리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시제(試題)를 명해 선비들을 시취(試取)하였으며 사단(射壇)에 임하여 회례(會禮)를 베풀었다. 국왕이 활을 쏘는 어사례(御射禮)는 술이 세 순배(巡杯) 돌고 나서 국왕이 4발의 화살을 쏘아 한 발을 맞췄다. 활을 쏠 때에는 헌현(軒懸)들이 대사악장(大射樂章)이라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악차(幄次)에는 3개의 단을 설치하였으며 1단은 국왕의 자리, 2단은 순 자줏빛의 용문석(龍文席)을 깔아놓은 어사위(御射位),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 단의 동쪽에는 3개의 탁자가 놓였으며 1탁에는 국왕의 깍지와 팔찌를 담고, 2탁에는 어궁(御弓)을, 3탁에는 어시(御矢)를 담았는데, 탁(卓)과 함은 모두 붉은색이었다.

        동서 계단 아래에는 탁자 2개를 두었고 동쪽 탁자에는 상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弓矢), 탑견(搭肩:어깨걸이), 진요(搢腰:허리띠)를 놓았으며, 서쪽 탁자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놓았다. 바닥을 높여 사단(射壇)을 만들고 90보(108 M)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운 다음 후단을 쌓았다. 어좌 앞으로는 문무의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으며, 악차(幄次)는 차일과 휘장으로 사방을 막아 국왕을 엄호하였다. 뜰의 동서에는 홍살문을 설치하여 사례 의식의 신성함과 위엄을 더하게 하였으며, 홍살문 앞에는 헌가(軒架·악대)를 두어 행사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홍살문 너머에는 과녁을 설치하였고 국왕의 과녁으로는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표적으로 한 웅후(熊候)를,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과녁은 미후(麋候)를 설치하였다. 웅후(熊候)는 붉은 빛깔의 베로써 바탕을 만들고, 높이와 나비는 1장(丈) 8척(尺)으로 한다. 그 나비를 3등분(等分)하여 정곡(正鵠)이 그 1등분을 차지하는데, 정곡의 나비는 6척으로 하고, 흰 색을 칠한 가죽으로써 모지게 만들어 후(候)의 복판에 붙이고 곰의 머리를 그린다.미후(麋候)는 푸른 빛깔의 베로써 바탕을 만들고, 높이와 나비는 1장(丈) 8척(尺)으로 한다. 그 나비를 3등분(等分)하여 정곡(正鵠)이 그 1등분을 차지하는데 정곡은 사방이 6척이다. 흰 색을 칠한 가죽으로써 모지게 만들어 후(候)의 복판에 붙이고 순록의 머리를 그린다.

        과녁은 어좌에서 남쪽으로 90보(九十步: 108 M) 거리에 설치하였으며, 웅후로부터 동·서 각 10보 되는 지점에는 화살가림막 복핍(福乏)을 설치하고 복핍(福乏) 안에는 좌측에 7명, 우측에 6명의 획자(獲者)를 배치하였다. 웅후와 복핍은 훈련원에서 규격에 맞게 설치하였으며 훈련원 정(正)은 북 앞에 섰으며, 훈련원 정 뒤에는 국왕이 쏜 화살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복핍(福乏) 뒤에 서 있던 획자(獲者)들은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황색, 상변에 맞히면 적색, 하변에 맞히면 흑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우측에 맞히면 백색의 깃발을 올렸으며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채색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동쪽 복핍 앞에는 북을, 서쪽 복핍 앞에는 금(金)을 두고 화살이 적중하면 북을 치고 그렇지 못하면 금을 쳤다.

        활쏘기를 마치면 과녁을 맞춘 자는 동쪽에 세우고 맞추지 못한 자는 서쪽에 세운 뒤, 병조 판서(兵曹 判書)가 이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상벌을 청했다. 맞춘 자에게는 상으로 표리(表裏), 궁시(弓矢), 탑견(搭肩:어깨걸이), 진요(搢腰:허리띠)를 등을 내렸으며, 맞추지 못한 자에게는 벌주를 내리고 제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4명을 뽑아 방방(放榜)하고 백관의 진하(陳賀)를 받았으며, 내구마(內廐馬)를 하사(下賜)하여 유가(遊街)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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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활쏘기 시합 - 대사례의궤| 韓民族 傳統文化

    관운 | 조회 34 |추천 0 | 2016.08.12. 09:57



    국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활쏘기 시합 - 대사례의궤

                                                                                                                                                  

                                                                                                                                                 신병주(건국대 교수)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군신간의 예를 확인하는 행사로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대사례가 시행된 것은 1477(성종 8), 1502(연산군 8), 1534(중종 29), 1743(영조 19) 4차례로 

    확인된다. 그러나 대사례 외에 어사(御射)시사(試射)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 실시되는 향사례(鄕射禮)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사례(射禮)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은 기록화에서도 확인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8폭의 병풍으로 담은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중에는 정조가 득중정(得中亭)

    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인 모습을 담은 득중정 어사도(御射圖)가 남아 있어서 국가의 주요한 잔치에 활쏘기가 빠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조대의 대사례 실시는 왕권 강화를 위한 국왕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즉위 초부터 표방되었던 왕권 강화를 위한 탕평책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특히 1740(영조16) 노론 4대신이 복관되면서 

    노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어 영조의 탕평정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200여년 만에 대사례를 다시 실시토록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사례의궤1743(영조 19) 47

     

       성균관에서 대사례를 행한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사례의궤는 총 5건이 만들어졌다. 어람용 1책을 

    비롯하여 의정부, 사고(史庫), 예조, 그리고 대사례 실시 장소인 성균관에 1책이 보관되었다.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것은 

    국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행차하여 유생들을 격려하고 이들에게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그만큼 국가에서 거는 기대도 컸다.

     

       성균관 유생들이 전부 국가로부터 장학금과 각종의 물품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던 것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를 이곳에서 

    열었던 것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대사례와 함께 왕세자 입학례와 같은 의식도 

    성균관에서 열렸는데 국왕이나 왕세자가 주인공이 되는 이러한 행사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은 틀림이 없다.

    영조는 1743년 윤47일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집춘문을 통해 궁궐을 

    나왔다. 당시 국왕을 경호하던 병력의 배치 및 담당 임무, 도로 사정 등도 기록되어 있어, 막강한 권력의 상징인 국왕 행차시의 경호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어사례도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사례의궤의 앞부분에 그려진 세 장면의 그림을 통하여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세 장면의 그림은 왕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례도(御射禮圖), 신하들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시사례도(侍射禮圖)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로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행사의 모습이 각각 4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먼저 어사례도를 보면 악차(幄次)에는 세 개의 단을 설치한 것이 보인다. 1단은 국왕의 자리, 2단은 순 자주빛의 

    용문석(龍文席)을 깔아놓은 어사위(御射位),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 단의 동쪽에는 3개의 탁자가 놓였다

    1탁에는 국왕의 깍지와 팔찌를 담고, 2탁에는 어궁(御弓), 3탁에는 어시(御矢)를 담았는데, 탁과 함은 모두 붉은 

    색이었다. 동서 계단 아래에는 탁자 2개를 두었다. 동쪽 탁자에는 상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를 놓았으며, 서쪽 탁자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놓았다. 하연대에 바닥을 높여 사단(射壇)을 만들고 90보 떨어진 곳에 웅후(熊候:곰 머리)를 표적으로 

    하는 과녁을 세운 다음 후단을 쌓았다. 임시로 설치한 어좌 앞으로는 문무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악차는 

    차일과 휘장으로 사방을 막아 국왕을 엄호하였다.

    시사례도는 시사자가 두 명씩 짝을 지어 활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사례도와의 차이점은 과녁이 푸른색의 

    미후(麋侯:사슴머리)로 바뀐 점이다. 핍 뒤에 서 있던 획자들은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적색, 상변에 맞히면 황색, 하변에 맞히면 흑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우측에 맞히면 백색의 깃발을 올렸다.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채색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동쪽 핍 앞에는 북을, 서쪽 핍 앞에는 금()을 두고, 화살이 적중하면 북을 치고 그렇지 못하면 금을 쳤다. 아래쪽에는

    어사례 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자들이 절을 할 때와 활을 쏠 때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헌현(軒懸)들이 위치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사관상벌도는 시사를 마친 후 시상하고 벌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병조정랑이 관직과 성명을 부르면 해당자는 국왕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상물(賞物) 중 표리(表裏)는 군기시(軍器寺)에서, 궁시(弓矢)는 제용감에서 각각 준비하였으며, 벌주는 

    내자시(內資寺)에서 준비하였다.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표리와 궁시를 상으로 받았으며,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주를 마셨다

    담당관원이 동쪽 계단에 이르러 국왕께 맞춘자의 관직과 성명을 크게 아뢰는데, 맞춘자들은 동쪽 계단 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서고, 맞추지 못한 자들은 서쪽 계단에서 동쪽을 향하여 섰다. 풍악이 울리면 국왕께 사배한 후 시상을 받았다. 네발을 맞히면 

    표리(表裏)와 탑견(搭肩), 세발은 리()와 탑견, 두발은 궁시와 진요(搢腰), 한발은 궁과 진요를 상으로 받았다. 한편 맞추지 

    못한 자는 벌주를 마셨다. 예관이 해()로 술을 떠서 굽혀 풍()에 두면, 맞추지 못한 자가 풍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고

    왼손으로는 부린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해를 잡고 서서 마셨다. 비록 맞추지 못했더라도 술을 마시는 작은 벌칙만 둠으로써 

    행사 자체를 축제의 분위기로 이끌어나가려는 배려가 엿보인다.


       영조는 대사례가 끝난 후 병조판서와 동부승지에게 특별히 명하여 성균관에 물력옥자(物力屋子) 3칸을 만들어 행사에 

    사용된 제 용구들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으로 하여금 대사례의 시행과정을 적은 대사례기를 찬진하여 성균관 

    명륜당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행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행사 기록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랐다. 영조의 이러한 바람은 결국

     대사례의궤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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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랩] [동영상]2008 대사례의 "영조 임금,탕평의 활을 쏘다."| 전통 국궁

    악돌이 | 조회 78 |추천 0 | 2008.10.07. 09:57


    일 시 : 2008.9.26(금)~9.28(일) 오후2시

    장 소 : 경복궁

    주 최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문화재청


    조선 국왕의 활쏘기,

    대사례를 재현하며

        대사례(大射禮)는 "국왕이 주관하는 활쏘기 의례"를 말한다.이번에 재현하는 대사례는
    1743년(영조19) 영조가 50세를 맞이라여 성균관에서 거행한 활쏘기 행사이다.
    성균관(반궁)에서 시행 했다고 해서 '반궁대사례'라고도 하였다.

    예로부터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닦는 수단이었다.
    과녁에 맞추려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처음 시행된 대사례는 지방수령이 주관하는 향사례(鄕射禮)와 함께
    국가의례에 포함되었다.

    사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방의 소홀을 경계하기 위해 활쏘기를 국가 행사로 발전시킨 것이다.
    국왕과 백관이 참여하는 대사례는 성대한 국가의례이다.
    성균관 행차,공자참배,알성문과,대사례,알성무과,문무과 합격자 발표,환궁행차 등 여러 의식과 함께 이루어졌다.
    대사례 의식은 국왕의 활쏘기,신하들의 활쏘기,포상과 벌주(罰酒)를 주는 의식 등 3가지 절차로 진행된다.


       대사례는 예절을 갖추고 음악 연주에 맞춰 활을 쏘는 의례로써,
    예악이 잘 조화된 수준 높은 유교문화라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조선시대에 대사례는 모두 6차례 시행되었다. 그 가운데 1743년(영조19)의 대사례는 왜란과 호란 이후 사라진
    국가의례를 회복하여 왕조의 중흥을 꾀하려는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 특히,영조는 이 행사를 통해 임금과
    신하가 새로운 각오로 탕평정치에 힘쓰며 국정쇄신에 매진하기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왕실문화의 정수로 선 보일 이번 행사는 선조들의 활쏘기문화 속에 담긴 정신과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규장각 소장 대사례의궤와 영조실록에 전하는 기록을 토대로 재현하였다.


    대사례의 절차

    ◆진하의

    -어사례 준비절차를 알리는 타징 6회
    -노부의장 및 군사입장
    -협률랑이 전악과 악공을 인도하여 입장
    -집사관에 이어 인의의 인도로 3품 이하의 관리가 입장
    -국왕이 좌통례의 인도로 산과 선 등 국왕을 상징하는 의장의 호위를 받으며 사단으로 거둥
    -인의의 인도로 2품 이상 문무백관이 입장

    ◆어사례

    -국왕이 사위에 오르면 결(깍지)과 습(팔찌)을 함,활,화살을 받든 세명의 상호군이 어좌의 동쪽에 북향하고 섬
    -의례의 두번째 절차를 알리는 타징 6회
    -상호군이 국왕께 어궁을 받침
    -국왕은 모두 네발의 화살을 시사

    ◆시사례

    -시사례 절차를 알리는 타징 6회
    -시사관 두명이 함께 사석에 나아가 국왕께 부복하고 남향하여 섬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한 발식 시사(총8발)

    ◆시상관상벌례

    -병조판서는 맞춘자의 성명과 숫자를 기록하고 국왕에게 의식이 끝났음을 아룀
    -맞춘자의 직함과 성명을 불러 동쪽 계단 아래에서 서향으로 서게 함
    -맞추지 못한 자의 직함과 성명을 불러 서쪽 계단 아래에 동향으로 서게 함
    -맞춘자는 북향하여 꿇어앉아 상을 받고 자리로 돌아감
    -사옹원 관리가 치(뿔로 만든 술잔)에 술을 부어 풍(술잔 받침) 위에 놓으면,
    시사관은 그 남쪽에서 북향하여 꿇어앉아 마신 후자리로 돌아감

    ◆종료

    -인의가 종친,문무백관,시사관을 인도,배위로 돌아간 후 국궁사배
    -국왕이 사단을 내려와 악차로 거둥
    -종친 문무백관이 이어 호위군사와 의장이 퇴장


    ※ 과녁표시

    *국왕-상호군이 국왕께 화살의 방향을 알림.
    적중-획(獲), 위-양(楊),아래-유(留),좌-좌방(左方),우-우방(右方)

    *시사관-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면 북을,적중치 못하면 금(징)을 치고
    획자들이 각 방위의 깃발을 들어 표시.
    적중-적색기,위-황색기,아래-흑색기,좌-청색기,우-백색기








     


    관련

       

    cafe.daum.net/bowkorea/FIN/51   국궁1번지






    [스크랩] 영조의 대사례의| 자유게시판

    洛東亭 | 조회 25 |추천 0 | 2010.08.05. 21:43

     

       조선왕조 통치질서의 근간인 오례의(五禮儀)중 군례에 속하는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활쏘기를 통해 군신간의 예와 화합을 유지하고, 군왕으로서 국가통치의 중요한 덕목인 학문적 소양과 더불어 무예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조선 초부터 거행된 의식이다.

     

    조선왕조 통치질서의 근간인 오례의(五禮儀)중 군례에 속하는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활쏘기를 통해 군신간의 예와 화합을 유지하고, 군왕으로서 국가통치의 중요한 덕목인 학문적 소양과 더불어 무예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조선 초부터 거행된 의식이다.

     

    이번 행사는 문화재청에서 유네스코에 등록을 위해 올해 첫 영조시대 대사례의를 재현하였습니다.

    10월 13일 부터 15일 까지 오후 2시에 행사을 하였다는군요.

    이런 행사 문화를 빨리 재현 복원하면 우리 활쏘기 문화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사례(국왕이 활을 쏘는 예)






    웅후와 미후...(왕의 과녁, 신하의 과녁이 틀리죠!)








    전날 저녁에 과음을 하셔다는데... 임금님 얼굴이 많이 뿌석뿌석 합니당... 




    안전을 위해 박두(나무로 촉을 만듬)로 화살을 쏘았음


    시사례 侍射禮 (신하가 활을 쏘는 예)





    미후 麋侯 (사슴머리...)








    상벌... 못맞춘 사람은 각뿔에 술을 마심...좋겠당..안맞추는게 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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