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궤(儀軌)를 통해 본 조선의 왕실축제


   머리말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실에 중요한 행사, 축제, 잔치가 있으면 그 현장의 모습을 담은 의궤(儀軌)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의궤에는 기록만이 아니라 주요한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 당대의 모습을 보다 생동감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을 뜻하는 용어로 주요한 의식이 시행되면 이것을 모범으로 삼아서 후대에 있을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방지하고자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의궤 자료의 그림에 나타난 조선시대 왕실문화의 축제적 성격과 그 화려함은 먼저 ‘반차도’라고 지칭된 기록화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 모습을 담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업무를 수행하는 각 인물과 각종의 물품, 다양한 의장기들이 매우 정밀하게 그려져 있어서, 마치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 축제에 직접 참석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왕과 왕비의 가마, 행렬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 이들이 들고가는 의장기, 행사에 동원된 각종 색깔의 말들의 모습에서 조선시대 왕실 결혼식의 규모를 직접 접할 수 있다.

   1795년에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책의 앞면에 그려진 반차도를 통해서는 국왕 행차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구체적로 느껴볼 수가 있다. 또한 반차도 외에 화성행차의 모습을 담은 기록화를 통해서는 임금의 행차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행렬이 주변에는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등 흥겨운 축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때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주교(舟橋:배다리)는 당시의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의궤라는 책에 정리된 각종 기록과 ‘반차도’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그림자료, 왕실 행사의 모습을 담은 기록화에는 전통시대 조선시대 왕실 행사의 축제적인 분위기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왕실행사에 동원된 각종 가마와 의장기를 비롯한 물품은 전통의 멋과 품격을 한껏 표현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물품과 문양들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활용한다면 전통의 현대적 창조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의궤에 기록된 자료들 중에는 이처럼 조선시대의 왕실문화의 생생한 현장 모습과 함께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자료들이 많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이러한 자료들이 그렇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궤를 찬찬히 훑어보면 당시의 시대상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 시대 문화의 면모를 읽어볼 수가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전통시대 왕실문화의 축제적 모습이 기록과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는 자료로 의궤가 다수 남아있음을 주목하고, 의궤에 나타난 기록과 그림을 통하여 조선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모습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의궤는 비록 왕실 행사를 기록한 것이지만 그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면 왕실의 행사에 참여한 하급 장인이나 화원들의 모습, 왕실을 호위하던 군사병력의 배치, 물품의 조달과정, 급료 등 조선시대 생활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왕실 축제에 참여한 각 계층 사람들의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의궤란 무엇인가 

          

                

   의궤는 ‘의식과 궤범(軌範)’을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의 전범(典範)으로 삼고자했던 뜻을 함축하고 있다.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참고함으로써 후대에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려는 것이 의궤를 만든 주요한 목적이었다. 의궤는 행사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특히 의궤에 첨부된 그림들은 당시의 생생한 현장모습들을 보여준다. 의궤에 남겨진 기록화들은 오늘날의 사진이나 비디오 테이프와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의궤에 나타난 다양한 시각자료는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당대의 현장상황을 전달하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정신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의궤는 문자 그대로 의식의 궤범을 만들어 뒷날의 사람들이 그 전례를 따르도록 한 것으로서 후대인들이 앞 시기의 의궤를 참고하여 , 국혼(國婚)이나 국장(國葬)등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원활하게 치룰 수 있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의궤에 기록된 주요 행사는 왕실의 혼인을 비롯하여 왕과 왕세자의 책봉, 왕실의 장례, 제사, 잔치, 활쏘기, 태실(胎室)의 봉안, 국왕의 행차, 궁궐 건축, 친농(親農)·친잠(親蠶) 행사, 중국 사신의 영접 등 국가나 왕실 행사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도표 참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의궤는 조선전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의궤들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으며, 현재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의궤들이 규장각,장서각,파리국립도서관, 일본의 궁내청 등에 소장되어 있다.

왕실의 주요 행사를 의궤의 형태로 남긴 것은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형식의 의궤가 발견되지 않는다. 의궤는 우리나라에서만 비롯된 독특한 형식의 책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의궤에 기록된 내용은 행사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한 전교(傳敎) 등 각종 공문서의 내용을 비롯하여 업무의 분장, 담당자의 명단, 동원된 인원, 소요된 물품, 경비의 지출, 유공자에 대한 포상 등에 관한 내용이며, 필요한 경우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와 건물 및 기계의 설계도 등을 첨부하여 당시 행사의 구체적인 절차나 건축물의 모습을 생생하고 입체감 있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의궤에는 행사의 내용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의 실명(實名), 각각의 물품에 사용된 재료의 수량 및 비용, 그리고 실제 들어간 물품과 사용 후 남은 물품을 되돌려준 사실 등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내용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행사 참여자의 실명제는 작업자의 잘잘못만을 가리자는 취지는 결코 아니었다. 무명의 장인 한명 한명의 실명을 국가의 최고 공사보고서에 기록해줌으로써 그들에게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적극 작업에 참여하게끔 했던 것이었다.



(도표) 규장각에 소장중인 주요한 의궤의 유형

분야

주요 의궤

주요 내용

종묘, 사직

종묘의궤, 사직서의궤 등

종묘, 사직의 연혁과 구성

가례, 하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등

왕실의 결혼 의식

국장, 상례

정조국장도감의궤 등

왕실의 장례 의식

부묘(廟)

공성왕후부묘도감의궤 등

삼년상후 신주를 모시는 의식

빈전, 혼전

경종빈전도감의궤 등

왕실의 관을 모시는 의식

장태(葬胎)

원자아기씨장태의궤 등

왕실의 태실 봉안 의식

능, 원, 묘

강릉개수도감의궤 등

왕릉과 원·묘의 조성과 이장

묘호, 시호

선조묘호도감의궤 등

왕실 묘호, 시호 내리는 의식

존숭, 추존

명성왕후존숭도감도청의궤 등

왕실의 존숭, 추존 사업

보인(寶印)

보인소의궤 등

왕실에 소요된 보인의 내용

어진, 영정

어용도사도감의궤 등

왕실 어진의 제작 경위

영접

영접도감군색의궤 등

외국 사신의 접대 의식

저궁책례(儲宮冊禮)

경종세자책례도감의궤 등

세자의 책봉 의식

진연(進宴)

자경전진작정례의궤 등

왕실의 잔치 의식

녹훈

녹훈도감의궤 등

공신의 녹훈 과정과 절차

선원보(璿源譜)

선원보략수정의궤 등

왕실의 족보 제작

실록, 국조보감

경종대왕수정실록의궤 등

실록의 제작 과정

친경, 친잠

친경의궤 등

국왕의 친경 및 왕비의 친잠 의식

행행(行幸)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왕실의 능행 행사

제사

대보단증수소의궤 등

국가의 제사 의식

영건(營建), 궁궐건축

화성성역의궤,

창덕궁영건도감의궤 등

화성 건축, 궁궐의 조성 및 수리

기타

악기조성청의궤

궁중에 필요한 악기 조성의 과정


대사례의궤

국왕 주체의 대사례 행사

           

(2)의궤의 제작과 보관

1)의궤의 제작           


                

   의궤에 기록된 각종 행사를 위해서는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가 먼저 설치되었다.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이 달랐다. 즉 왕실의 혼례의 경우에는 가례도감, 국왕이나 왕세자의 책봉의식에는 책례도감, 왕실의 장례에는 국장도감, 사신을 맞이한 행사일 경우에는 영접도감, 궁궐의 건축과 같은 일을 행할 때는 영건도감 등과 같은 이름을 붙였으며, 이들 임시기구인 도감에서는 각기 맡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올림픽 조직위원회, 월드컵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도감은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이므로 관리들이 겸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감의 직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되었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3~4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실무 관리자들인 도청(都廳) 2~3명, 낭청(郎廳) 4~8명 및 감독관에 해당하는 감조관(監造官) 6명은 당하관의 벼슬아치들 중에서 뽑았으며, 그 아래에 문서작성, 문서수발, 회계, 창고정리 등의 행정 지원을 맡은 산원(算員), 녹사(錄事), 서리(書吏), 서사(書士), 고지기(庫直), 사령(使令) 등이 수명씩 임명되었다. 도감에서는 행사를 지휘하는 관리자들과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을 고르게 배치하였으며, 행사의 성격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다. 



  행사의 성격에 따라 구성된 각 도감에서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등록(謄錄)을 먼저 만들고 이를 정리하여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는 보통 5부에서 9부를 만들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의궤 1부는 규장각에 올리고(고종대 이후에는 황제와 황태자용 의궤를 비롯하여 2부 이상의 어람용 의궤를 제작하였다.), 나머지 의궤는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지방의 각 사고(史庫)에 나누어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의궤의 표지에 ‘정족산상(鼎足山上)’ ‘오대산상(五臺山上)’ 등으로 쓰여있는 것은 각각 정족산 사고와 오대산 사고에 보내져 보관되어 온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2)의궤의 보관처 

          

              

   사고는 의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 역대의 중요 자료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사고는 대개 왕실관계 자료를 보관한 선원보각(璿源寶閣 그림 자경전진작정례의궤 )과 실록 등을 보관한 사각(史閣)으로 구성되었으며, 사고를 지키는 수호 사찰을 꼭 설치하였다.
1872년에 그려진 무주부 지도에는 적상산 사고의 모습 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지도에는 선원보각과 사각을 비롯하여, 수호사찰, 참봉전, 군기청 등 사고를 구성하는 주요한 건물의 위치와 이름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사고는 2층의 목조건물로 구성되었고, 방화를 위하여 2중으로 된 방화벽을 설치하는 등 세심한 신경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에는 사고가 꼭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조선시대에 사고가 중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아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를 그리면서 오대산사고를 포함시킨 것에서 조선시대인들에게 사고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해방기를 거치면서 사고는 우리의 관심 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나마 최근에 와서 조선후기의 4대 사고들이 복원되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의궤는 편찬이 완료되면 실록과 마찬가지로 춘추관과 지방 네 곳의 사고에 분산 보관되었다.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라 하면 우리는 얼른 조선왕조실록을 떠올리지만, 실제 사고에는 실록만이 아니라 의궤를 비롯하여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나,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된『고려사』, 『동국통감(東國通鑑)』,『여지승람(輿地勝覽)』,『동문선(東文選)』 등과 같은 역사서, 지리서, 예서들도 함께 사고에 보관되었다.

    조선시대의 사고체제는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후기 이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지방의 충주사고라는 2원 체제로 운영되다가, 다시 세종대에 이르러 경상도 성주사고와 전라도 전주사고를 추가하여 4사고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4사고는 교통의 요지인 서울과 지방관이 거주하는 읍치(邑治)에 위치해 있어서 화재나 도난에 의한 서책의 훼손 가능성이 언제나 제기되었다. 실제 중종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 화재가 발생하여 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책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읍치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왜적들의 주요 침입루트가 된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그 존재가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吳希吉)과 전주 지역 유생인 손홍록(孫弘綠), 안의(安義)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역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사고들이 산으로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를 지역별 안배를 가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현재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에 보관된 의궤의 대부분은 현재의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어졌고, 적상산사고의 의궤들은 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이처럼 사고를 산간지역에 둔 것은 무엇보다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특히 전란 속에서 사고가 훼손되자 무엇보다 적의 침입에 노출되지 않은 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사고 옆에 수호 사찰을 두어 승병들로 하여금 사고를 지키게 한 것도 이러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의 접근도 용이하지 않는 지역을 선택 함으로써 화재나 도난과 같은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우리가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어람용의궤 이외에 대부분의 의궤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조선후기에 사고를 가장 안전한 곳에 배치한 선인들의 지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어람용의궤의 보관처 외규장각

   의궤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왕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제작된 ‘어람용 의궤’이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열람한 후에 규장각에 보관하였다가 1781년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한 후에는 이곳에 옮겨 보관하였다. 어람용 의궤는 종이로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고 사자관(寫字官)이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어람용은 장정 또한 호화로왔다. 놋쇠 물림(경첩)으로 묶었으며, 원환(圓環), 박을정(乙丁) 등을 사용하여 장정하였다. 표지는 비단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서 왕실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어람용이 아닌 분상용 의궤(사고 등에 나누어 보관되었기 때문에 분상용 의궤라고 한다)에는 초주지 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되었으며, 검은 선을 두르고 삼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한 만큼 일반 의궤의 장정이나 글씨도 뛰어나지만 어람용 의궤의 그것을 보면 문외한이라도 그 화려함과 품격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아래의 도표는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를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를 대체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어람용 의궤

 

구분

재료

단위

책표지감

초록경광주(草綠經光紬)

2척 2촌

제목감

백경광주(白經光紬)

길이 7촌 너비 1촌

홍협(紅挾)감

홍경광주(紅經光紬)

길이 7촌 너비 5푼

면지감

초주지

2장

후배(後褙)감

옥색지

1장

가장자리 부분

두석(豆錫)


기타

국화동(菊花童) 박철원환(朴鐵圓環)


              


▶분상용 의궤

               

구분

재료

단위

책표지감

홍정포(紅正布)

2척 2촌

배접감

백휴지(白休紙)

6장

면지감

저주지

2장

후배(後褙)감

옥색지

1장

기타

정철, 변철, 박철원환(朴鐵圓環), 합교말(合膠末)

* 합교말 3승

       

              

   정조대 이후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친히 열람한 후에 규장각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규장각은 궁궐의 한 복판에 위치하여 규장각에 보관된 자료들이 외침이나 정변에 안전지대가 될 수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에 영명한 군주 정조는 고려시대 이래로 국가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주목받던 강화도에 규장각의 분소(分所)를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1782년(정조 6)에 정조의 명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이 완공되고 이곳에 어람용 의궤를 비롯하여 어제(御製)·어필(御筆)·어화(御畵) 등 왕실에 관련된 물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관하였다.

   그러나 국방상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외규장각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철저히 파괴되었다.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은괴 상자와 함께 외규장각 소장 자료 중 특히 의궤류들을 집중적으로 약탈하였다. 벽안의 눈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장정과 화려한 채색그림이 지닌 어람용 의궤의 가치가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리라. 프랑스에 의궤를 약탈당한 것은 우리 근대사의 또다른 비운이었다. 의궤 중에서도 국왕이 친히 열람했던 어람용 의궤들 상당수는 현재 이국땅인 프랑스의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파리에 보관된 어람용의궤의 보관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297책 중 10여책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비단 표지가 훼손되어 재 장정된 점이 무척이나 아쉽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각 사고나 관련 부서에 보관되었던 의궤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의궤에 나타난 각종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여전히 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의궤의 보고(寶庫)’라 할 만큼 조선후기에 제작된 각종 의궤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의궤를 제작하기 전 단계의 기록인 등록(謄錄) 자료를 포함하면 현재 약 600여종, 3,00여책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외규장각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가 1866년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라는 책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였다.

1993년 프랑스에서 의궤 2책이 반환되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의궤의 선명한 글씨와 아름답게 장식된 장정을 보고 프랑스인들의 자료보관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의궤가 원형의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의궤 자체가 뛰어난 종이질로 만들어졌고, 의궤에 첨부된 그림의 물감은 천연의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하여 그 색채의 생명력이 오래 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프랑스인의 보존에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우리 선인들의 우수성에 감탄을 해야만 옳았던 것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소장된 각종 도서 중에서 유독 위궤류만을 집중적으로 약탈한 것도, 의궤에 그려진 채색그림이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벽안의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외규장각은 정조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강화도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우리 문화의 보고(寶庫)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은괴 19상자와 함께 그들 이방인의 눈을 자극한 것은 채색 비단 장정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189종 340여책의 의궤는 이들의 퇴각과 함께 약탈당했으며, 당시 화염에 휩싸였던 외규장각은 그 흔적만을 남긴 채 백여년을 뛰어넘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1866년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의 해군장교 주베르가 ‘이 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고백했듯이, 조선인들은 누구나 책을 가까이 했으며 이러한 조선문화의 최선봉에 규장각과 외규장각이 있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를 담아왔던 외규장각! 이러한 문화유산의 현장을 복원하여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저력을 찾아보는 몫은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져 있다. 

          

(3)왕실축제의 모습이 잘 표현 된 의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1)가례도감의궤의 구성 

          

                

   조선시대의 의궤 중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은 왕실 결혼식의 모습을 담은 『가례도감의궤』이다. 조선시대에도 결혼은 인생에서 최고의 축제이며 경사였음은 틀림이 없었다. 특히 왕실의 결혼은 국가의 행사 중에서도 가장 큰 경사의 하나였으며, 왕실의 결혼을 가리켜 ‘가례(嘉禮)’라고 칭하였다.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는 소현세자의 가례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가례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가례도감의궤』를 통해서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특히 말미에 그려진 그림(반차도)은 축제의 기분을 한껏 표현해주는 생동감 깊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서 당시의 결혼식 행사에 직접 참여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반차도는 오늘날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효과를 안겨다 주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가례도감의궤 중에서 1759년(영조 35) 66세의 국왕 영조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하는 결혼식의 전 과정을 정리한 의궤인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당시 결혼식의 모습 나아가 왕실축제 행사의 단면을 조명해 보았다. 모차르트의 오페라곡으로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 또한 이시기와 비슷한 18세기 후반에 작곡되었다. 오페라로 워낙 알려져 세계 여러 나라에서 18세기 후반 유럽사회의 결혼식의 모습을 접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가로의 결혼’ 보다도 훨씬 짜임새 있게 기록된『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가 있다. 세계화시대에 우리 전통 결혼식의 모습을 널리 알려줄 수 있는 자료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영조대에 혼인 의식을 재정비한 『국혼정례』와 『상방정례』가 만들어진 후 이에 준거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의궤로서 조선시대 왕실결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의 최장수 집권왕 영조가 66세에 15세의 신부를 맞이한 사실도 흥미롭다.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는 순조대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하는 여인이다.

   『가례도감의궤』를 빼곡이 채우고 있는 당시의 기록들에서 왕실 혼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 국가의 정치, 문화, 경제적 역량이 한데 집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의궤 제작에 사용된 깨끗하고 질긴 종이, 정성을 드린 유려한 필체, 250여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깔끔하게 채색되어 전혀 변질되지 않은 그림 등은 문화재로서의 의궤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한다. 의궤는 우리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기록 유산으로서, 국제화 시대의 문화사절로도 손색이 없는 자료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의궤와 같은 자료는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 

          

                

과연 상상만큼이나 화려했을까? 왕비는 어떻게 뽑았을까? 국왕의 결혼식은 일반 백성들의 결혼식 풍습과는 어떠한 차 이가 있으며, 혼수품으로는 무엇이 오고 갔을까? 간택을 받은 왕비가 처음 국왕을 뵐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무엇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조선시대 왕실 결혼의 구체적인 모습을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가례 : 왕실 결혼의 축제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예법을 뜻한다. 가례의 총체적 개념을 표시하는 『주례』에도 ‘이가례친만민(以嘉禮親萬民)’이라 하여 가례가 만민이 참여하여 행할 수 있는 의식임을 설명하였다. 그만큼 가례는 상하 모두가 함께 행할 수 있었던 의례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기록된 『가례도감의궤』들이 모두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임을 볼 때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가례는 곧 왕실의 혼인 의식, 그 중에서도 특히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의식을 뜻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를 살펴보면, 왕의 가례가 9건, 왕세자의 가례가 9건, 왕세손의 가례 1건, 황태자의 가례가 1건이다.

   현재 소장된 가례도감의궤를 볼 때 왕실의 혼인 중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만을 특별히 가례라 칭했다는 것과, 이러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이를 기록으로 보존하는 취지에서 『가례도감의궤』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의궤는 다양한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왕실의 결혼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는 기록과 그림에서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배어난다. 따라서 기록된 내용들도 활기차고 신명이 나 있는 모습이며, 결혼 행렬을 그림으로 표현한 반차도를 꼭 부가하여 보다 생동감 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면면들에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의 의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함을 뽐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각 국왕과 왕세자의 결혼식이 시기적으로 연속되게 기록되어 있어서 의궤를 통하여 조선시대 결혼풍속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으며 각종의 혼수품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揀擇:왕비 후보의 선택)을 비롯하여, 납채(納采:청혼서 보내기), 납징(納徵:결혼 예물 보내기), 고기(告期:날짜 잡기), 책비(冊妃:왕비의 책봉), 친영(親迎:별궁으로 가 왕비 맞이하기), 동뢰연(同牢宴:혼인 후의 궁중 잔치), 조현례(朝見禮:가례 후 처음으로 부왕이나 모후를 뵈는 의식) 등 혼인의 주요 행사를 비롯하여,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와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하여 각 부서간에 교환한 공문서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화려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 의궤의 꽃이라 칭할 만하다. 전통시대의 혼인이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혼인의 의식절차에 큰 비중을 두었음은 의궤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는 육례라하여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되었다. 육례의 의식 중에서도 국왕이 왕비를 모셔오는 친영의 장면을 그린 반차도를 말미에 포함시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이나 사용된 복식이나 의장기(儀仗旗) 등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혼인을 위하여 『가례도감의궤』이 설치되고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조선전기의 의궤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현재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 중 최초의 것은 1627년(인조 5) 12월 27일 소현세자(1612-1645)가 강석기의 딸 강빈(姜嬪)과 혼인한 의식을 정리한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자료:소현세자 가례 반차도:규장각 도록)이며, 순종과 순종비의 결혼식을 정리한 1906년의 『순종순종비가례도감의궤』가 가장 나중의 것이다. 280년간 20건의 가례가 의궤로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가례도감의궤』가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는 곳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현재 규장각에는 20건 66종의 가례도감의궤가 소장되어 있으며(아래의 표 참조), 파리국립도서관에 13건이, 장서각에 11건 14책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은 의궤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을 정도로 56여종 2,500여책의 의궤를 소장하고 있는데, 가례도감의궤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가례도감의궤는 크게 1책으로 제작된 것과 2책으로 제작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영조 때 『국혼정례 國婚定例』(1749년)와 『상방정례 尙方定例』(1752년)가 만들어진 후 의식절차가 보다 정밀하고 체계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의궤의 내용도 한층 상세해지고 분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이후 2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화 되는 것은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의궤 중에서는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에서부터 사도세자와 『장조헌경후가례도감의궤』까지는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부터는 혼인 행사의 전 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2책으로 제작하였다.

이들 책은 특히 반차도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1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는 행렬이 8면에서 18면에 걸쳐 그려질 정도로 규모가 소략하고 왕비의 가마만이 그려진데 비하여, 2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에는 왕과 왕비의 가마가 함께 그려지면서 46면에서 92면에 이르는 긴 행렬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만큼 조선후기로 오면서 가례 행사의 규모가 커지고, 행사의 내용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 奎章閣에 소장된 嘉禮都監儀軌

1.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규13197,13198>1627년(인조 5) 1책

2. (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 <규13601> 1638년(인조 16) 1책

3. (顯宗明聖后)嘉禮都監儀軌 <규13071-13072>1651년(효종 2) 1책

4. (肅宗仁敬后)嘉禮都監儀軌 <규13078-13081>1671년(현종 12) 1책

5. (肅宗仁顯后)嘉禮都監儀軌 <규13084-13085>1681년(숙종 7) 1책

6. (肅宗仁元后)嘉禮都監儀軌 <규13089-13090>1702년(숙종 28) 1책

7. (景宗端懿后)嘉禮都監儀軌 <규13092-13093>1696년(숙종 22) 1책

8. (景宗宣懿后)嘉禮都監儀軌 <규13094-13096>1718년(숙종 44) 1책

9. (眞宗孝純后)嘉禮都監儀軌 <규13105-13107>1727년(영조 3) 1책

10.(莊祖獻敬后)嘉禮都監儀軌 <규13109-13111>1744년(영조 20) 1책

11.(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규13102-13104>1759년(영조 35) 2책

12.(正祖孝懿后)嘉禮都監儀軌 <규13114,규13115>1762년(영조 38) 2책

13.(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 <규13122-13124>1802년(순조 2) 2책

14.(文祖神貞后)嘉禮都監儀軌 <규13130-13133>1819년(순조 19) 2책

15.(憲宗孝顯后)嘉禮都監儀軌 <규13139-13141>1837년(헌종 3) 2책

16.(憲宗孝定后)嘉禮都監儀軌 <규13142-13146>1844년(헌종 10) 2책

17.(哲宗哲仁后)嘉禮都監儀軌 <규13147-13151>1851년(철종 2) 2책

18.(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 <규13153,13155-13157,15078>1866년 (고종3) 2책

19.(純宗純明后)嘉禮都監儀軌 <규13174-13178>1882년(고종 19) 2책

20.(純宗純宗妃)嘉禮都監儀軌 <규13179-13184,13186>1906년 (고종 33) 2책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원래 5부가 만들어졌다. 국왕의 어람용으로 1부를 바치고, 가례의 주무 부서인 예조에 1부, 4대 사고(史庫) 중에서 봉화의 태백산사고에 1부, 강릉의 오대산사고에 1부, 무주의 적상산사고에 각 1부씩을 나누어 올렸다. 어람용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현재는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2002년 1월 28일에서 2월 1일까지 외교통상부의 지원을 받아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에 대한 실지 조사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어람용으로 올려진『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기록된 글씨와 그림은 분상용 보다 우수해 보였으나 표지와 장정이 원래의 형태가 아닌 재장장된 모습이었다.

    규장각에는 예조,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에 보관했던 3부의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예조에 올린 도서번호 <규13104>본은 상책이 없는 결본이며, <규13102>본은 태백산사고 간행본, <규13103>본은 오대산사고 간행본으로 태백산사고 간행본과 오대산사고 간행본은 상, 하 2책으로 완질본이다. <규13102>본과 <규13103>본은 내용상에 있어서 미세한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는 필사과정의 착오라고 여겨진다. 책의 보존상태는 오대산사고본인 <규13103>본이 가장 양호하다. 필자가 이책에서 주 자료로 삼은 것도 바로 이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던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이다. 

          

(4)국왕 혼인 행차의 구성분석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를 중심으로

   본 연구에서는 우선 왕실 축제의 모습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는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班次圖)를 살펴보기로 한다. 반차도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혼인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오늘날 결혼식 기념 사진 또는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반차도를 통해 참여인원이라든가, 의장기의 모습, 가마의 배치 등 결혼식 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린 것은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하였다. 반차도는 오늘날 국가 행사나 군대의 작전 때 미리 실시하는 도상 연습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도 당시 친영일은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날 이미 제작되어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모두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을 가례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긴 때문이다.

  「반차」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반차도’는 행사의 절차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차도에는 국왕의 대가(大駕)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전사대(前射隊)를 비롯하여 주인공인 왕비와 국왕의 가마 이들을 후미에서 호위하는 후상(後廂), 후사대(後射隊) 등과 행사에 참여한 고위관료, 호위병력, 궁중의 상궁, 내시를 비롯하여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 행렬의 분위기를 잡는 뇌군(헌병) 등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한다. 이들 중에는 말을 탄 인물의 모습도 보이고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도 나타난다. 여성들의 모습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하여 침선비(針線婢)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은 뒷모습을 그린 것, 조감법으로 묘사한 것, 측면만을 그린 인물도 등 다양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을 묘사한 것에서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행렬의 모습에 악센트를 주어 보다 생동감있는 모습을 연출한 화원들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물은 각 신분에 따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이 이채롭다. 갖은 색깔의 옷의 모습과 너울을 쓴 여인의 모습이나 각종의 군복을 착용한 기병, 보병들의 모습은 당시의 복식 연구에도 귀중하고 생생한 자료가 될 것이다. 행렬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는 의장기의 모습도 흥미롭다. 행렬의 선두가 들고가는 교룡기와 둑기를 비롯하여 각종 깃발과 양산, 부채류는 당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해 주고 있다. 수백명이 대열을 이루어가는 이 행렬은 바로 당시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최대의 축제 퍼레이드였다. 그리고 이 행렬의 모습을 24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장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큰 행운인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말미에 총 50면에 걸쳐 그려진 반차도의 각면은 45.8x33Cm이며 총 길이는 1,650 Cm에 달한다. 

          

1)반차도의 제작자

   반차도의 제작은 당대의 유명 화원들의 손에 맡겨졌다. 화원들의 명단은 각 방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각방에 소속되어 필요한 업무를 수행했음 의미한다. 화원들의 명단은 의궤의 공장질(工匠秩) 부분에 다른 장인들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먼저 도청의궤의 도감공장별단(都監工匠別單)에는 화원 장벽만(張璧萬) 등 3인, 화원 현재항(玄載恒) 등 5인, 화원 허담(許) 등 8인이라 기록하여 참여 화원의 대체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방의궤의 공장질에는 현재항, 이최인(李最仁), 이복규(李復圭), 신한동(申漢棟), 이필한(李必漢), 이광필(李光弼), 신덕흡(申德洽) 등 7명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다 . 이방의궤의 공장질에는 장자징(張子澄), 한종일(韓宗一), 이필성(李必成), 김응환(金應환), 이도민(李道民), 이종욱(李宗郁), 허잡(許) 등 7명의 화원 명단이 보이며, 삼방의궤의 공장질에는 장덕홍(張德弘), 이필성, 한사근(韓師瑾), 장벽만 등 4인의 명단이 보인다. 이필성과 장벽만은 명단이 중복되기도 하는데, 이 명단으로 보아 대체로 16인 정도의 화원이 가례도감에 소속되어 반차도의 제작이나 각종 물품을 그리는 일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고 있는 감홍도와 신윤복도 화원 출신의 화가이다.
이처럼 반차도의 제작에 도화서에 소속된 전문 화가들인 화원이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이 없는 당시에 가장 생생하게 현장의 모습을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화원들의 참여로 행사의 모습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차도 제작에 전문 화원들이 참여함으로써 역사의 현장은 보다 정확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작품 활동 보다는 의궤나 지도제작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화원들이 남긴 일반 감상화는 국가와 궁중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방편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국가의 공식행사에서 차지하는 화원들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대우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화원들은 국왕이나 유력한 벼슬아치들의 영정(초상화)도 직접 그리면서 그들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

국가에 의해 화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화원직은 점차로 세습되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번성한 화원 가문은 양천 허씨와 인동 장씨, 경주 김씨, 배천 조씨 등으로, 이들은 17세기 이후 영향력 있는 중인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없던 그 시절에 기록물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욕구는 점차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국가적 욕구는 화원의 수요를 더욱 증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화원들의 활동은 당대의 역사적 산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조선정부의 의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화원들의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가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의궤의 반차도나 왕실의 기록화와 초상화, 지도에 보이는 그림 등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이 담겨져 있다.

    조선후기의 초상화에 보이는 인물 그림에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은 곰보 자국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어린 시절 홍역을 앓았다는 증거이며, 당시 고관직을 지낸 사람들도 다수가 홍역을 앓은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이 홍역으로 크게 곤역을 치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의서 편찬은 당시 사회의 이러한 질병들의 피해를 막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가던 상황을 기록한 병풍과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는 18세기 후반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의 행차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행렬이 주변에는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등 흥겨운 축제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때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주교(舟橋:배다리)는 당시의 높은 과학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화원들이 그린 작품 중 뛰어난 것으로는 1820년대에 100여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동궐도(東闕圖)』가 손꼽힌다. 『동궐도(東闕圖)』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가로 5.7m, 세로 2.7m의 초대형의 그림으로서, 서양화의 부감법과 평행사선 구도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東闕圖)』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경기감영도』도 뛰어난 회화 기법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대원군대에 작성된 1872년의 군현지도는 전국 각지의 화원들이 그 지방의 지도 제작에 참여한 사례이다. 그런데, 이 지도에는 당시의 국가정책인 쇄국정책의 이념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작은 군현에 이르기까지에도 서양과의 통교를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척화비를 그려 넣은 것이나. 국방상 요충지에 해당하는 섬과 진(鎭)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표시한 것 등은 이러한 예이다. 또한 해남과 진도의 지도에 표시된 거북선의 모습, 천안지도의 관아건물에 표시된 태극무늬 등도 문헌자료에서는 접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의궤의 반차도나, 지도와 기록화에 그려진 왕실 문화의 모습들은 현대에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보다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전해주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바로 역사의 전달자였던 것이다. 특히 왕실 결혼 축제의 모습을 담은 가례도감의궤 반차도를 제작한 화원들은 왕실축제의 또 다른 증인이자 기록자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화원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동원되어 국가의 기록화를 남기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현재 남아있는 각종 지도나 어진(御眞)의 제작, 국가의 기록화, 궁궐 단면도 등에 이들의 손길이 깊이 배어있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조선후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근한 김홍도는 국가의 기록화 제작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김홍도의 문하에 들어온 화원들은 ‘김홍도 사단’으로 불릴만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수원능행도 등 국가 행사를 정밀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화원들은 풍속화나 인물화를 제작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역할보다 국가의 행사기록이나 지도 제작에 자신들이 쌓은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조선시대의 실상을 보다 사실적으로 접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이나 국립중앙도서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에 소장된 화원들의 작품은 그 표현의 세밀성이나 정확성에 있어서 뛰어난 작품들이 많아 시각자료가 부족한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접해보는데 큰 도움을 준다. 각종 의궤에 기록된 반차도나, 대동강변에 냉면가(冷麵家)가 그려진 조선후기의 평양지도, 거북선이 표시되어 있는 진도(珍島) 지도 등은 화원들의 정밀한 눈을 통해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는 작품으로서 당시에도 평양에 냉면이 유행했다는 것과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 반차도는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다. 오늘날과 같은 물감이 없었던 당시 색채는 어떤 방식으로 낼 수 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의궤에는 반차도 제작에 사용된 재료가 나타나 있다. 의궤에는 화원뿐만 아니라 각종 장인들이 사용한 재료를 모두 기록하고 있어서 전통시대 우리선조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물품을 제작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가 있는데,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겨두는 우리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반차도 제작에 소용된 재료는 搗鍊紙(1권10장), 草注紙(1권), 楮注紙(4권), 出草白紙(1권), 太末(2升), 畵本次油紙(3장), 自作板(1닢), 黃毛(2오리), 紫硯(4面), 眞粉(10兩), 三碌(5량), 이靑(5錢), 3靑(5錢), 唐朱紅(3兩), 同黃(2兩), 靑花(3량), 片脂(2片), 稚羽(10개), 破油芚(1部), 土火爐(2坐), 아교(2兩), 白苧布(1尺), 白紬(1尺), 사기대접(沙大貼:10立), 沙鉢(3立), 貼匙(10立), 磁碗(2立), 沙莫子(2개), 보시기(甫兒:3개), 방구리(方文里:1개), 櫃(1部), 炭(7升), 黃筆(3柄), 眞墨(1丁) 등이었다. 이들 재료에서 삼록, 이청, 삼청 등은 천연물감에 해당되는 것으로, 칼라를 내는 데는 광물이나 식물의 천연재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차도의 그림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색되지 않고 천연색 특유의 색감을 나타내는 데는 이러한 천연 물감의 사용 때문일 것이다.

           

2)반차도의 구성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총 1,118명(보행인물 797명, 騎馬人物 391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반차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를 뒷부분에는 왕비의 행차를 그렸다. 王의 연은 임시 가마인 부연(副輦) 다음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비의 연 앞에는 왕비의 책봉과 관계된 교명(敎命),옥책(玉冊),금보(金寶),명복(命服)를 실은 교명요여, 옥책요여, 금보요여, 명복채여가 따르고 있으며 왕비의 연은 그림의 말미에 위치해 있다. 왕과 왕비의 연 전후에는 前射隊와 後射隊가 따르고 있다. 왕의 연은 사방을 열어 놓아 내부를 볼 수 없게 하였다.

   혼인 행사를 주관하는 관리들인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 등 의정부 대신들과 호위를 맡은 무관들은 왕과 왕비의 연과 함께 중심부를 이루면서 행렬을 선도하고 있으며, 인물,말,의장기,의장물,여,연 등을 목판으로 새겨 도장을 찍듯이 인쇄하고 채색한 것이 흥미롭다. 반차도의 채색그림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생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당시의 복식과 의장 등의 물품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의장으로 구체적으로 사용된 품목은 깃발,산(傘),선(扇),부(斧),모절(節),창(槍)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의장기는 국가와 왕실의 상징적인 표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장의 핵심을 이루며 이들을 장엄하게 위엄을 갖추어 정렬하였다. 의장물 역시 직접적인 권력의 표시가 될 수 있는 도끼,칼,창 등 군사적인 요소가 큰 것과 우산,부채 등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의장을 사용하여 절대적 통치자인 국왕의 위엄을 표시하였다.1)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인물들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왕과 왕비의 가마를 중심으로 하여 후면도, 좌측면도, 우측면도의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정조의 화성행차의 모습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 행렬의 모습이 모두 측면도와 그려진 것과도 대조적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인물의 모습을 그렸을까? 아마도 이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 각 부서의 인물을 구분할 수 있게 하여 담당 업무를 반차도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도록 했을 것이다. 반차도는 최초에 그려질 때 행사의 예행연습, 도상연습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차도라면 각 부서별,담당업무별로 인물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의 모습이 포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그려진 반차도는 한 각도에서 잡은 그림보다 훨신 생동감있고 입체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행렬이 정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메라를 여러 각도에서 잡음으로써 현장의 모습을 보다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과 같다. 국왕의 혼인이라는 거대한 축제의 행렬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의 모습을 담았던 당시인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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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명희, 1BB6 [궁중유물] 빛깔있는 책들 참조

              

3)반차도에 나타난 왕실의 결혼 모습

   왕실의 결혼 모습을 그린 반차도는 모두 왕이 친히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의식인 친영(親迎)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의 축제의 가장 핵심으로 여긴 때문이다. 친영 행렬은 크게 아래와 같은 모습을 구성되었다.
① 전반부: 왕의 행차를 앞에서 인도하는 선상군병(先廂軍兵)과 독(纛: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 교룡기(蛟龍旗:교룡을 그린 깃발, 교룡은 상상속의 큰 용) 등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로서 구성된 부분.
② 어가행차: 왕의 행렬을 이루는 부분 어가행렬의 앞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어가의 출현을 알리는 부분. 각종 기치(旗幟)와 의장물을 들고 가는 의장병과 내취(內吹:악대),시신(侍臣)과 친시위(親侍衛) 의물 및 고취악대 등으로 구성됨.
③ 수행행차: 문무백관 등 호위 배종 신하들로 구성된 부분 어가의 뒤편에서 수행하는 어가를 수행하는 모습을 띰
④ 왕비행차: 왕비의 책봉에 관계된 교명, 금보 등을 실은 가마와 왕비의 가마, 왕비를 배종하는 궁녀들로 구성됨.
⑤ 후반부:행차를 마무리하는 부분. 후미에서 국왕을 경호하는 후하대 등으로 구성됨



    한편 어가 행렬의 화려함과 함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각종 장치가 활용되었는데 세부 내용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의장기: 상징적인 표지 기능. 하늘, 해, 달, 산천, 사신도에 표현된 동물, 가구선인 등의 그림이 그려진 깃발.
② 의장물: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데 시각적인 것과 악기와 같은 청각적인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다시 창, 칼, 도끼 등과 같은 군사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실용성과 신선들이 주로 사용했다는 상징성을 겸비한 부채인 선(扇), 양산(陽), 개(蓋)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③ 악기: 청각적인 요소인 악기는 행렬에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행렬의 선후 간에 동작을 일치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함. 즉 오늘날 구령을 맞추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함. 그러나 혼례식에서는 악기를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음.
④ 의례복: 행사에 동원되는 사람은 신분과 맡은 임무에 따라 각기 특징 있는 의례복을 착용하였다. 의례복은 형태나 색채에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여성들 등 일부는 너울과 같은 가리개를 착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⑤ 말: 행렬에서는 오늘날의 차량에 해당하는 말의 모습도 주목을 끈다. 행렬도 에서는 높은 신분에 있었던 인물이 말을 탄 것이 나타나는데 일부 내시와 여인들이 말을 탄 모습도 주목된다. 말은 백마를 비롯하여 회색, 적색계통 등 서로 다른 색깔을 띠고 있어서 다양한 품종이 행사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행렬의 선두에 배치된 사람들

          

              

   먼저 선두에는 사령(使令)을 앞세우고, 당부관(當部官)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당부관은 조선시대 오부의 담당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혼인 행사가 거행되는 부(部)의 담당관리가 차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394년(태조 3)에 한성을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로 나누고 그 부내의 소송,도로,방화,택지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오늘날로 치면 구청과 같은 부서였다. 5부의 하부 행정단위로는 방(坊)이 있었는데, 중부 8방,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8방, 북부 10방의 49방이 있었다.(마지막 페이지 한성부 방제 도표 참조) 방은 오늘날로 치면 동(洞)쯤으로 볼 수 있다. 5부는 모두 호조의 소관이었으며, 5부체제는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다. 별궁인 어의궁이 동부의 연화방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당부관은 동부의 책임관리로 볼 수 있다. 당부관은 오늘날로 보면 구청장 급에 해당하는 인사라 할 수 있다.
당부관을 선두에 한 다음에는 사령과 서리 각 5명씩을 앞세운 경조당상, 예조당상, 호조당상의 말을 탄 모습이 선을 보인다. 경조는 한성부의 별칭이고, 당상관은 정 3품 당상이상의 관리가 해당되므로 한성부의 판윤(오늘날 서울시장)이나 좌윤·우윤(서울부시장)이 구청장 다음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어 예조와 호조의 판서, 참판급의 인물이 뒤따르고 그 다음에 소유(所由:사헌부의 이속)와 서리(書吏) 5명씩을 앞세운 사헌부 당상이 나타난다. 사헌부 당상 다음으로는 사령과 서리 각 5명씩을 앞세운 병조당상의 모습이, 그 다음에는 나장(羅將) 5명과 서리 2명을 앞세운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얼굴을 내민다. 오늘날로 치면 구청장 - 서울시장(또는 부시장)- 문화부장관(또는 차관) - 재정경제부장관(또는 차관) - 감사원장 - 국방부장관(또는 차관)- 검찰총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행사의 분위기를 돋구는 요소들

          

                

   행사에 직접 관련이 있는 부서의 장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 다음에는 전사대, 대기수(大旗手), 취기수(吹旗手)가 행렬에 나타난다. 전사대는 총을 멘 모습, 대기수는 깃발을 든 자세이며, 취기수는 그림상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맡은 악기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중앙과 좌우측면에 함께 그려져 있는데 중앙의 인물들은 후면도(後面圖)로, 좌우측의 인물들은 측면도로 각각 그려져 있다. 기수들 뒤에는 말을 탄 기고수차지(旗鼓手次知)가 보이는데 기수와 고수(鼓手)들을 지휘하는 인물이다. 기고수차지 뒤에는 북을 치는 2명과 금(金)을 치는 2명의 인물이 마주 선 상태로 행렬에 나타난다. 

   이들의 행렬 뒤로는 본격적인 호위병력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에 훈련대장을 선두에 두고 교련관 5명이 말 탄 모습으로 있으며, 그 다음에 낭청 1명이 말 탄 모습이다. 이어 말을 탄 중군(中軍)이 앞에 가고 뒤이어 교련관 3명(기행)이 따르는 모습이 보이며, 대기수 1명, 북과 금을 치는 사람 각 2명과 말을 탄 기고수차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훈련대장에서 기고수차지로 이어지는 이들 인물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좌우측에는 오늘날 헌병에 해당하는 뇌자(牢子) 좌우 각 2명을 선두로 하여, 순령수(대장의 명령,전달,호위를 맡고 순시기 또는 영기를 드는 군사) 각 2명, 대기수 각 4명, 취기구 각 3명, 뇌자 각 3명, 순령수 각 2명의 모습이 줄줄이 뒤를 잇고 있다.

   이어서 둑(纛)이 선을 뵌다. 둑은 어가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 깃발로, 큰 창에 소의 꼬리를 달거나 또는 창에 삭모(毛)를 달아서 만들며, 말을 탄 장교 한 사람이 이를 받들고 간다. 둑 다음에는 교룡기가 따른다. 교룡기는 어가행렬에서 둑 다음에 서는 큰 기로, 누런 바탕의 기면에 용틀임과 구름을 채색으로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는 화염(火焰)을 상징하는 붉은 헝겊이 달려 있다. 깃대의 머리에는 세 갈래의 창날이 있고 그 밑에 붉은 삭모가 달렸다. 군복을 입은 말 탄 장교가 잡고 4명의 군사가 깃대에 맨 줄을 한 가닥씩 잡아 다기는 모습이다. 둑과 교룡기는 국왕의 어가인 대가(大駕)가 나타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둑과 교룡기의 등장 이후 행렬의 숫자가 훨씬 늘어나고 그 모습도 보다 화려해짐은 화면에서도 금방 드러난다. 서서히 본격적인 어가행렬이 시작되는 것이다.

   행렬의 모습이 본격화되면서 이제까지 중앙과 좌우로 크게 3분되던 모습이 중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다 복잡하게 구성됨으로써 그림에 나타난 인물이나 의장의 모습도 조금씩 작게 그려지게 된다. 교룡기 다음의 중앙에는 주작기와 황룡기를 든 사람이 나타나며 이들 기수 좌우에는 홍개(紅蓋)를 든 2명의 사람과 금을 두드리고 북을 치는 사람 1명이 서 있다. 이어 보마(寶馬) 2필(갈색 1필, 흰색 1필)이 따르고 상서원 관원을 중앙에 두고 내시 2명이 말탄 모습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상서원(尙瑞院)은 궁중의 옥새,부패(符牌),절월(節鉞)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역마를 내어 주기도 했다. 상서원 관원은 옥새를 비롯한 궁중의 상징적인 물품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내시의 말 탄 모습이 주목되는데, 우리가 흔히 궁중의 최하위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내시에게도 엄연히 품계가 있었고, 이들은 품계에 따라 말을 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되었다.

    보마와 상서원 관원, 내시가 가는 좌우측에는 각종의 깃발행렬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화면상에 드러난 깃발은 가구선인기, 봉황기, 홍문대기, 백호기, 현무기, 정사기, 정미기, 정축기, 백택기, 백학기, 삼각기, 용마기 등이다. 깃발 뒤에는 표골타와 웅골타를 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표골타는 붉은 칠을 한 봉에 머리를 둥글게 하여 표범가죽을 씌운 의장이며, 웅골타는 표골타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표범가죽 대신에 곰 가죽을 씌운 것이다. 각각의 깃발과 표골타, 웅골타는 1인이 쥐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가죽모자)를 착용하였다.

    혼례에 사용되는 옷가지인 의대(衣)를 받쳐 든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이들 뒤에는 궁중의 옷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은 상의원 관원과 내시가 말을 탄 자세로 있다. 상의원 관원과 내시의 옆에는 청양산을 든 사람이 각각 따라가고 있다. 이어 중앙에는 천하태평기, 교의(交倚), 각답(脚踏), 군왕천세기(君王千歲旗), 각답, 관자(罐子), 우자(盂子) 등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 좌우에는 북과 청개, 홍개, 봉거(捧炬)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교의, 각답, 관자, 우자 등은 행사에 소용되는 물건들로서 말에도 싣지 않고 담당자가 직접 들고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교의는 의식에 사용되는 의자이며, 관자는 양푼같이 생긴 그릇, 우자는 주전자 모양의 그릇이다. 물품을 들고 가는 이들의 좌우에는 각 7쌍의 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말은 색깔이 서로 다른데 백마가 4필, 흑마가 4필, 갈색마가 6필이다. 

          

                

   행렬의 최 가장자리에는 역시 깃발과 각종 의장물을 든 사람들의 물결로 넘치는데, 영자기, 금자기, 기서봉, 은등자, 금등자, 금장도, 은장도, 주작당, 청룡당, 금립과, 은립과, 금횡과, 은횡과, 금작자, 은작자, 뇌(牢), 정절, 정, 금월부, 은월부, 봉선, 작선, 용선 등 각종 의장물이 행사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들 의장물은 국가와 왕실의 존엄성과 신성함을 상징하고 있다. 각종 양산, 부채류는 그것이 지니는 신성한 의미와 함께 햇빛을 가리는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행사에 필요한 의자나 각답을 손에 든 행렬의 뒤를 이어 중앙에 옥교(玉轎:임금이 타는 간단한 가마, 위를 꾸미지 않았음)가 나타나고 그 좌우측에는 부장(部將) 1명과 월도자비(月刀差備) 2명이 월도를 높이 쳐 든 상태로 화면에 선을 보인다. 그 뒤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선두로 하여 좌통례 1명, 인의(引儀) 2명, 우통례 말을 타고 뒤따른다. 사복시는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사복시의 책임자 정(正)은 정3품 직책이었다. 통례원은 국가의 의식이나 행사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좌통례, 우통례, 인의는 통례원의 관리들이다. 오늘날로 치면 의전 담당관으로 볼 수 있다. 국왕의 의전을 담당한 사복시정과 통례원 관리의 등장은 어가의 모습이 곧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가(御駕)의 등장

   이들의 뒤에는 바로 국왕의 가마인 연(輦)이 나타나지 않고 사고가 있을 당시를 대비해 제작한 빈 가마인 부련(副輦)이 따른다. 부련의 좌우측에는 각 10명의 창검군(槍劍軍)이 창을 높이 들고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부련의 뒤 중앙에는 수정장(水晶杖), 양산(陽傘), 금월부(金鉞斧)를 든 3명이 나란히 서고 이어 운검자비(雲劒差備) 2명, 인배(引陪) 2명이 뒤따른다. 그 뒤를 이어 옥당(玉堂)의 관원 4명이 말을 탄 자세로 가고 있고,그림 영조정순후가례도감 中 반차도 그 옆으로는 어마2필을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으로,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 사적,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자문하는 기능을 했다. 옥당의 관원 뒤로는 노란색 옷을 입은 내취(內吹) 8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앞에 선 2명은 나발을 든 모습이다. 이들이 부는 나발 소리는 행렬의 흥취를 돋구고 행렬의 발을 맞추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취의 좌우에는 별파진(別破陳) 각 7명이 포진해 있다.

   내취의 뒤를 이어서는 사금(司禁), 무겸(武兼), 선전관(宣傳官), 총부낭청(摠部郎廳), 병조낭청(兵曹郎廳), 오위장(五衛將), 병조당상(兵曹堂上), 패운검(佩雲劒), 봉보검(捧寶劍) 각 2명씩이 말 탄 자세로 뒤따르고, 그 다음에 별군직(別軍職) 6명이 기행자세로 가고 있다. 별군직 다음으로는 어가의 앞에서 북을 두드리는 전부고취(前部鼓吹) 8명과 장악원의 관리인 전악(典樂) 1명이 서고, 촛불을 손에 든 봉촉(捧燭) 10명이 뒤따른다. 봉촉 뒤에는 별감 12명과 총을 소지한 무예별감 18명이 뒤따른다. 이 부분은 어가를 직접 수행하는 행렬인 만큼 호위 병력도 많아지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등장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별군직, 전부고취, 봉촉, 별감 등이 중앙의 행렬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그 좌우에는 국왕의 경호 임무를 맡은 금군(禁軍)과 특별히 발탁한 군사들인 가전별초(駕前別抄), 장교복을 입은 호위군관, 가후별초(駕後別抄)가 말을 탄 자세로 수행하고 있고, 협연포수(挾輦砲手), 나장(羅將) 들이 창과 방망이를 들고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국왕의 행차 길에는 경호에 관계되는 각종 부대원들이 총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병력의 호위를 받은 채 드디어 국왕 영조가 탄 가마가 나타난다. 영조의 가마는 주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개방형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처럼 왕의 가마가 개방적인 모습을 하고 있음으로 해서 백성들은 이날 국왕의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당시 국왕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국왕의 모습은 화면에 그려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의식이나 행사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모습을 그려 넣지 않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행이었다. 

   국왕의 가마 바로 뒤로는 청선(靑扇)을 받쳐 든 두 사람이 지나가고 이어 후방에 배치하는 깃발인 현무기를 가운데로 하고 양쪽에서 후전대기(後殿大旗)를 든 사람이 지나간다. 청선과 깃발을 쥔 사람의 좌우측에는 금부도사 2명과 무반직인 파총(把摠) 1명과 초관(哨官) 1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의 뒤로는 가마의 뒤에서 흥취를 돋우는 후부고취(後部鼓吹) 10명이 붉은색의 복장을 한 상태로 행렬을 따라가며 협연장(挾輦將), 전악(典樂), 내시, 사복시에서 말과 수레를 담당한 내승(內乘), 행여 있을 지도 모를 국왕의 병환에 대비한 어의(御醫)의 모습이 선을 뵌다. 

   이어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관리들이 행렬을 뒤따른다. 사령 5명과 서리 5명을 앞세우고 비서실장격인 도승지가 나타나며 이어 승지 4명과 사관 4명이 말을 탄 자세로 나타난다. 사관 4명이 따르는 것은 이 행사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관의 뒤로는 약방 도제조와 제조가 뒤를 따르며 혹시라도 있을 국왕의 신병에 대비하였다. 이어 말을 탄 장교 1명과 4명의 병사가 끈을 잡은 표기(標旗)가 등장하며, 총부낭청과 총부당상, 병조낭청과 병조당상, 나장 5명을 거느린 금부도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들의 좌우측에는 창검군 20명이 좌우에 배치되어 긴 창을 들고 행렬을 따른다.

   금부도사 뒤로 화면의 좌측에는 동반 10명 서반 10명씩의 관리가 말을 탄 자세로 가는데 10번째에 해당하는 곳에는 각각 감찰이 말을 타고 있다. 이어 금부도사 2명이 말을 탄 자세로 나장 5명을 앞세우고 나타나며 국왕을 호위하는 후사대 병력이 좌우측에 배치되었음이 나타난다. 중앙에는 후사대기, 초관, 깃발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사대의 복장이 푸른 바탕에 붉은색 조끼 같은 것을 입은데 비하여, 후사대 병력은 푸른 바탕에 붉은색 조끼 같은 것을 입은 모습이다. 왕비를 호위하는 전사대, 후사대의 모습도 국왕을 호위하는 전사대, 후사대의 모습과 같다.



*왕비가마 행렬의 등장

  후사대의 병력 배치를 마지막으로 국왕 가마의 행렬이 일단 끝이 나면 왕비의 가마 행렬이 뒤를 따른다. 친영은 국왕이 별궁인 어의궁에 가서 이곳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이제 궁궐 안으로 모셔오는 의식이다. 따라서 전반부는 국왕의 가마 행렬로 후반부는 왕비의 가마 행렬로 채워지는 것이다.

   왕비 가마의 행렬은 전사대 깃발을 앞세운 전사대장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전사대장 뒤로는 전사대기를 든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들의 좌우측에는 전사대 병력이 화면을 채운다. 이어 왕비의 가마가 나타나기 전에 왕비의 책봉과 관련된 교명, 옥책, 금보, 명복을 담은 4개의 가마가 먼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왕의 혼인 명령에 해당하는 교명(敎命)을 담은 교명요여(敎命腰輿)가 나타나는데, 교명요여 앞에는 교명문을 놓아 둘 욕석과, 배안상을 들고 가는 사람과 충찬위(忠贊衛) 2명이 모습을 선보인다. 충찬위는 공신의 자손들로 편성된 군대로서 국가의 주요한 행사에는 이들 국가 유공자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충찬위는 집사의 역할을 하였다. 충찬위 뒤로 8명의 가마군이 멘 교명요여가 나타나고, 이들의 뒤에는 교명의 운반을 담당한 교명자비(敎命差備) 1명과 자리를 담당한 욕석자비(褥席差備) 2명,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2명및 내시 5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교명요여 다음으로는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을 옥에 새겨 놓은 간책(簡冊)인 옥책을 담은 가마가 나타난다. 가마의 앞에는 교명요여 때처럼 옥책을 읽는 독책상(讀冊床), 욕석, 배안상을 든 사람과 충찬위 2명의 모습이 선을 보인다. 이어 8명의 가마군이 멘 옥책요여가 나타나고 가마의 뒤를 이어 옥책을 담당한 옥책자비(玉冊差備) 1명과 자리를 담당한 욕석자비(褥席差備) 2명, 독책상을 담당한 독책상자비 2명,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2명과 내시 7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다음에는 금보채여가 등장한다. 채여는 채색의 무늬가 있는 가마로 요여 보다는 훨씬 화려한 맛이 있다. 금보와 같은 귀한 도장이나 명복과 같은 의복은 화려한 채여에 담고 있다. 금보채여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2사람이 보마(寶馬)를 끌고 가고 있고, 이어 금보를 읽는 독보상(讀寶床), 욕석, 배안상을 든 사람과 충찬위 2명의 모습이 선을 보인다. 이어 8명의 가마군이 멘 금보채여가 나타나고 가마의 뒤를 이어 옥책을 담당한 금보자비(金寶差備) 1명과 자리를 담당한 욕석자비(褥席差備) 2명, 독보상을 담당한 독보상자비 2명,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2명과 내시 7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이어 배안상과 충찬위 2명이 나타나고 명복채여(命服彩輿)가 모습을 드러낸다. 명복은 명에 따라 입는 의복을 지칭한다. 명복채여 뒤에는 명복자비(命服差備)와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5명과 내시 5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왕비의 가마에 앞서 지나가는 4개의 가마에는 왕비의 책봉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문서, 도장, 의복이 담겨있다. 왕비의 책봉을 신성시하는 의미에서 관련된 문서나 도장을 모두 가마에 담았던 것이다. 이들 가마가 먼저 지나가면 좌우측에는 호위 병력인 금군, 오위장, 선전관 등이 무장한 상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 중앙의 행렬에는 은관자, 은우자, 은교의, 은각답 등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직접 든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들의 옆에는 장마(仗馬) 2필과 청개, 홍개를 든 사람들이 행렬을 따른다.

또한 좌우측에는 국왕의 가마행렬과 마찬가지로 각종 의장기를 든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룬다. 백택기, 은등자, 금등자, 금장도, 은립과, 금립과, 은황과, 금횡과, 모절, 은월부, 금우러부, 작선, 봉선을 높이 쳐든 사람들은 모두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의장 행렬의 뒤 중앙에는 봉거(捧炬)를 밝힌 4명의 인물과 양산을 받쳐 든 사람이 따른다. 양산을 받쳐 든 사람 뒤로는 악공고취(樂工鼓吹)라고 하여 피리, 가야금, 나팔 등 각종의 악기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의궤의 기록에는 ‘다만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대로 따랐다면 이들은 의식에 필요한 악기만을 소지하고 연주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공의 뒤로는 물건을 멘 지가(支架) 4명과 별감 10명이 따른다. 봉거와 악공고취가 중앙의 행렬을 취하며 혼례의 분위기를 한껏 높이는 동안 그 좌우측에는 붉은 몽둥이를 든 내시와 나장, 금부도사, 궁중의 어린 내관인 귀유치(歸遊赤內官)와 보행내관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어 촛불을 밝힌 10명의 인물과 너울을 쓴 기행나인(騎行內人) 4명, 수줍게 걷고 있는 보행나인 8명, 너울을 쓴 기행 상궁 2명, 향자비(香差備) 1명, 별감 2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 바로 뒤에 오늘의 주인공인 왕비의 가마가 12명의 가마군에 의해 점차 화면의 중앙에 다가선다. 너울을 쓴 말탄 시녀 12명과 의녀 2명은 좌우측면에서 왕비의 가마를 거의 병렬해서 따라가고 있다. 왕비의 가마 뒤로는 청선을 높이 치켜 든 2명의 인물이 나타나며, 바로 뒤에는 연배여군(輦陪餘軍)이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12명의 가마군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한 예비 가마군이다. 이어 사복시정을 가운데 두고 내시 4명과 의관 4명의 말 탄 모습이 나타나며, 긍지 2명, 사관 2명, 병조당상과 낭청, 총부당상과 낭청의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의 좌우측에는 부장(部將), 수문장(守門將), 내금위(內禁衛) 등 호위 업무를 맡은 관리들이 행렬을 따르고 있다.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들

   왕비의 가마 후미에는 이 행사를 총괄적으로 준비한 가례도감 도청의 관리들의 모습이 선을 뵌다. 도감 사령 5명과 서리 5명을 선두에 두고, 사령 2명을 앞세운 도제조가 나타난다. 이 행사의 총책임자격인 우의정 신만이다. 이어 사령 5명을 앞세우고 제조 3명, 호조판서 홍봉한, 예조판서 홍상한, 병조판서 조운규가 말 탄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 사령 4명, 도청 2명, 사령 5명, 낭청 5명, 사령 5명, 이 행사의 감독관인 감조관 7명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관리·감독한 사람들의 실명(實名)은 의궤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들 행사의 준비자들 뒤로는 동반 9명과 감찰 1명이 행렬의 좌측에서 말을 타고 가는 모습과 서반 9명과 감찰 1명이 행렬의 우측에서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어 화면의 중앙에 후사대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탄 후사대장, 깃발을 들고 총으로 무장한 후사대 병력이 뒤를 따른다. 왕비 행렬을 후방에서 경호하는 후사대 병력은 이 반차도의 대미를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행렬에 사용된 각종 깃발과 의장

   행렬에 사용된 각종 깃발과 의장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세종실록』2)의 오례· 가례서례(嘉禮序例)의 노부 항목에는 조선시대부터 사용된 각종 깃발과 의장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어서 참고가 된다.

*국왕의 행렬이 지나가던 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국왕의 친영 행렬은 창경궁의 홍화문을 나와, 이현고개 앞을 거쳐 별궁이 있는 어의궁(현재 종로구 연지동)으로 가 친영 의식을 행하고 돌아올 때는 종묘 앞 동구와 파자전 앞 석교(지금의 단성사 부근)를 지나 창덕궁 돈화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지났다고 하고 있다. 즉 종루거리와 이현고개를 지났음이 나타나는데, 종루와 이현은 당시 최대의 시장이었다. 『경도잡지』의 시포(市)조에는 ‘서울 장안에는 비단,명주,종이,베 등을 파는 큰 점포들이 종가(鍾街)를 끼고 양쪽에 죽 늘어서 있고, 그 이외에는 각처에 흩어져 있다. 장을 보러 가는 사람은 대개 새벽에는 이현과 소의문(昭義門: 현 서울 서소문 근방) 밖으로 가고, 점심때는 종가로 모인다.’는 기록이 있고 『한경지략』의 시전조에도 ‘성안의 종루,배오개(이현)와 남대문 밖의 칠패, 팔패가 제일 큰 저자거리이다’라 하여 종로거리와 이현 일대는 조선시대에도 최고의 시장이자 번화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를 살아간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서울의 모습을 찬양한 시 『성시전도시(成市全圖)』에는 당시 종루 큰 길의 정경이 담겨져 있다.

원각사에 우뚝 솟은 흰 탑은
열 네 층을 공중에 포개었고

운종가에 있는 흥천사 큰 종은
큰 집 가운데에 날 듯이 걸렸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갔다가 또 오는 사람들
인해(人海) 망망(茫茫) 끝이 보이지 않네
만인의 마음을 내 알겠노니
가난한 자는 돈 구하고 천한 사람은 벼슬 구하네
어진 사람 어리석은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날이면 날마다
오극삼조3)(五極三條)로 개미떼처럼 모여든다
가벼운 초헌 지나는 곳에 노복들 소리치며 길을 피하게 하고
작은 가마 돌아갈 때 계집종들이 옹위한다
한가한 저 공자(公子) 어찌 그리 사치스러운고
말의 안장 휘황찬란 화려함을 다투네
... ...
거리 좌우로 늘어선 천간의 집에
온갖 물화 산가이 쌓여 헤아리기 어렵구나
비단가게에 진열한 울긋불긋한 것은
모두 능라(綾羅)이고 면수(綿繡)로다
어물가게에 싱싱한 생선은 살도 쪘네
갈치 농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 따위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飯果山)과 같구나
운자(雲子)같은 흰밥에 기름이 흐른다
술 파는 주점이야 본시 인간 세상의 것
웅백(熊白) 성홍(猩紅) 술빛깔 잔에 넘치네
행상하며 좌고(坐賈)하며 셀 수도 없이 많고 많아
자질구레한 물건이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네


(김영상, 1996 『서울육백년 4』 대학당 244-245쪽 참조)

    이처럼 18세기 중반의 서울 종루 거리는 인파가 들끓고 물산이 넘쳐 나는 활기찬 도시였다. 종루의 중심을 지났던 영조의 혼인 행렬은 수많은 상인과 관람객들에게 의해 그 모습이 목격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국왕의 결혼 축제 행렬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는 잡인의 출입을 엄금한다는 내용이 나타나 당시 밀려드는 인파들을 통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정조가 화성을 다년 온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8폭의 기록화 『수원능행도』에는 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화면에 담겨져 있다. 이들 관중들 속에 떡과 엿을 파는 떡장수 아주머니와 엿장수 총각이 쉽게 목격되는데 이러한 그림 속에서 왕의 행차는 하나의 축제였고 이러한 축제를 맞아 물건을 팔려는 행상들이 몰려들었던 상황을 생생히 확인할 수가 있다



*왕실축제의 의미

   이처럼 조선시대 왕실축제의 모습은 『가례도감의궤』로 대표되는 의궤의 기록과 당시의 핵심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반차도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었다. 왕과 왕비의 모습을 비롯하여 관리, 상궁, 나인, 내시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과 각종의 의장기와 악기의 실제 모습도 접할 수가 있었다.

이외에 의궤의 기록에는 결혼과 같은 왕실 축제 행사에 인원과 물품을 동원하는 과정이라든가 행사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려는 모습, 사관이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를 철저하게 기록하려는 모습 등 선조들의 문화와 사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화성행차를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와 『수원능행도』와 같은 기록화에는 왕실 축제에 인근의 백성이 참여하여 한껏 축제분위기를 돋구어 나간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왕실의 결혼이나 국왕의 행차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왕실문화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당시에 축제의 분위기를 고양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당대의 문화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왕실축제에 나타난 선조들의 전통문화의 장점과 우수성을 살려 현대에 재음미해 나가는 작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고취시켜 나가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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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지(志)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세종실록』은 163권 154책이란 방대한 분량의 기록이다 1권부터 127권까지는 다른 실록과 마찬가지로 전녀체 기록이지만, 나머지 36권은 지로소 오례(五禮), 악보(樂譜), 지리지(地理志) 칠정산(七政算)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는 주제별로 관련되는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여기에는 다수의 그림들이 포함되어 잇는 것이관심을 끝다. 실록은 한자만의 기록이 아니라그림자료도 함께 실려있는 자료인 것이다

3)당나라 사람의 시에서 유래한 말로 복잡한 시가를 표현함 


          

(5)궁중잔치의 멋과 화려함 : 「진연의궤」, 「진찬의궤」, 「진작의궤」

                

   의궤 중에는 궁중 잔치의 규모와 내용을 보여주는 의궤들이 있다.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의궤들이다. 『진연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며, 『진작의궤』는 왕이나 왕비, 왕대비 등에 대하여 작위를 높일 때 행한 의식을 기록한 것이다. 『진찬의궤』는 왕이나 왕비, 왕대비의 기념일을 맞이하여 음식물을 올린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서, 위에 설명한 의궤들은 왕실의 경사를 맞이하여 존호와 음식물을 올리면서 궁중에서 행한 잔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명칭은 다르지만 궁중잔치의 멋과 화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의궤라 할 수 있다. 이외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현륭원으로 행차한 상황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 중에도 회갑연을 베푼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잔치의 절차를 서식으로 간단히 기록한 각종의 홀기(笏記)나 [회연도(會宴圖)]와 같이 독립된 그림을 통해서도 궁중 잔치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궁중잔치의 모습을 정리한 의궤에는 잔치에 올린 음식물을 비롯하여, 잔치에 필수적으로 따랐던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각 무용을 공연한 기생들의 복장과 명단을 비롯하여 왕실에 바쳐진 꽃 등 조선시대 궁중 의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잔치 때의 참여자들의 위치를 미리 그려놓은 반차도와 궁중무용의 구체적인 모습, 연주된 악기와 복식, 그릇 및 상위에 올려진 꽃 등은 잔치 관련 의궤가 아니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자료들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잔치 행사를 기록한 의궤를 통해 당시인 들의 축제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1)궁중잔치는 언제 열렸을까?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생일을 축하할 때, 세자의 탄생이나 왕세자의 책봉을 기념할 때,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 동짓날이나 정초 등 여러 궁중의식 때 화려하고 웅장하게 베풀어졌다. 이러한 잔치를 일컬어 ‘연향(宴享)’이라 하였고, 연향의 업무를 주관한 부서는 예조였다. 연향의 ‘연’은 ‘악(樂)’을 뜻하고 ‘향(享)’은 헌(獻), 즉 봉상(奉上)한다는 뜻으로,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풍악을 울려 신하나 빈객을 대접하는 행사를 의미하였다. 『경국대전』의 예전 ‘연향(宴享)’조에 의하면 매해 정례적으로 행하던 연향으로는 회례연(會禮宴:신하들을 위로하는 잔치)과 양로연(養老宴:80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잔치)을 비롯하여 단오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행하는 잔치, 행행(行幸:왕의 행차)·강무(講武)와 같은 국왕 주관의 특별 행사 뒤에 행하는 잔치, 충훈부·종친부·의빈부·충익부에서 베푸는 연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조선시대 법전에 기록된 연향(宴享) 규정
1. 단오, 추석, 행행(行幸), 강무(講武) 후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잔치를 베푼다.(왕세자 및 왕세자빈의 生辰에도 같다)
2. 해마다 네 계절의 중간달에는 충훈부에서 잔치를 베푼다.(嫡長子孫도 또한 참석한다)
3. 매년 두 번 종친부와 의빈부에서 잔치를 베푼다.
4. 매년 한번 충익부(忠翊府)에서 잔치를 베푼다.
5. 매년 정조(正朝) 혹은 동지에 회례연(會禮宴)을 행한다.(왕세자 및 문무관이 모두 잔치에 참석한다. 왕비는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며 왕세자빈 및 내·외명부가 모두 참석한다)
6. 매년 계추(季秋)에 양로연을 행한다.(대소인원의 나이 80이상인 자가 잔치에 참여한다. 부인들에게는 왕비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푼다. 지방에서는 수령들이 내·외청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잔치를 행한다)
7. 관찰사·절도사·중국에 가거나 이웃나라에 가는 사신 및 진전원(進箋員:경사를 만나 진하하는 글을 올리는 관원)에게는 모두 왕이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다.
(진전원에게는 당하관이 접대한다)

  궁중 연향은 크게 왕이 주인공이 되어 왕세자·문무백관을 초대하는 잔치 의식인 외연과 왕비·왕대비·대왕대비 등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왕세자빈과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잔치에 초대하는 형식인 내연으로 구별되었고 두 행사는 각각 치러졌다. 남녀간의 내외를 위한 배려였으므로 외연과 내연은 행사장의 설비부터가 달랐으며, 행사진행자·무용수·악기 연주자 등에도 남녀의 차이를 두었다. 외연에서는 행사를 이끌어가는 집사와 차비(差備)들이 남자이고 정재도 무동이 담당하지만, 내연에서는 그 역할을 명부 중에서 차출된 여관(女官)과 여집사들이 맡고 음악 연주는 맹인 악사가 정재는 여령(女伶:여자 기생)이 공연하였다. 4)

   궁중잔치에는 당악(중국에서 전래된 음악)과 향악(우리 고유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정재(呈才)가 추어졌다. ‘정재’는 ‘재조(才操)를 드린다’는 뜻으로 국가의 경사, 궁중의 향연, 외국 국빈의 접대 때 공연된 궁중무용을 지칭한다. 연향이라 칭해진 궁중잔치는 왕이나 왕비를 비롯한 왕실에는 즐거움과 함께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선보이는 자리였으며, 악공·여기(女妓)·무동·가동 등 행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공연자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궁중잔치의 면모는 조선초기에는 『악학궤범』에 정리되어 있고, 조선후기에는 의궤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궁중잔치 의 면모가 의궤의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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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정혜2000 『조선시대궁중기록화 연구』 임지사 408 쪽 

          

2)궁중잔치 의궤에는 어떤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진연·진작·진찬 등의 잔치가 베풀어지면 진연도감이 설치되고 행사가 발의되어 결정되는 과정,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의 시문, 연회 실행시 소요되는 각종 물목과 연회 참석자의 명단, 악사들과 각 도에서 차출된 기생들의 명단과 이들의 소임에 이르는 제반 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를 작성하였다. 5)
현재 소장되어 있는 진연에 관련된 의궤들을 보면 정조대를 기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숙종대와 영조대에 편찬된 의궤에는 반차도나 행사도와 같은 그림이 없고 행사와 관련하여 국왕에 올린 문서인 계사를 비롯하여 각 관청간에 업무 협조를 위해 주고받은 이문·내관·감결 등의 문서와 각 부서에서 맡은 업무를 기록한 일방·이방·삼방·별공작·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추서 등으로 항목이 구성되어 있다.


   궁중잔치를 정리한 의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1795년에 있었던 화성행차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라는 왕실의 축제를 맞아 정조는 부친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이 행사의 전모를 기록하면서 잔치에 참여한 인원의 위치와 공연된 무용을 그림으로 상세히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계승되어 순조대 이후에 간행된 의궤에는 반차도나 행사도와 같은 그림이 예외없이 첨부되고 있다. 즉 앞부분에 [도식(圖式)]이란 항목아래 진연도(進宴圖)·정재도(呈才圖)·기용도(器用圖)·악기도(樂器圖)·복식도(服飾圖) 등을 그렸고, 이어 택일(擇日)·좌목(座目)·도식·전교·연설(筵說)·악장·치사·전문(箋文)·의주(儀註)·절목·계사·이문·품목(稟目)·감결(甘結)·찬품(饌品)·기용(器用)·수리(修理)·배설(排設)·의장(儀仗)·공령(工令)·악기풍물(樂器風物)·상전(賞典)·재용(財用) 등의 항목으로 잔치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항목만으로도 궁중잔치에 상당한 공력이 들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 의궤에 기록된 기생의 실명(實名)

  진찬의궤의 [공령(工令)]이라는 항목에는 각각의 궁중 무용이 공연될 때 이에 참여한 악공과 여령(女伶:기생)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한 예로 1829년의 진찬 의식에서 몽금척이 공연될 때 각 기생의 역할과 명단은 다음과 같은데 오늘날과도 유사한 기생들의 실명이 등장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봉죽간자(奉竹竿子): 영애(永愛), 춘외춘(春外春),
좌무(左舞): 선옥(仙玉), 진월(晉月), 금옥(金玉), 영애(永愛), 연심(蓮心), 임홍(任紅)
우무(右舞): 양대(陽臺), 운릉(雲綾), 홍강(紅降), 선옥(仙玉), 진향심(眞香心), 운영(雲英)
봉족자(奉簇子): 명선(明仙)
봉금척(奉金尺): 명옥(明玉)
봉황개(奉黃蓋): 순절(順節)

이처럼 왕실 최고의 의식인 진찬의궤에 신분적으로 천시된 기생의 명단까지 기록한 것은 이들에게 국가의 최고 행사에 직접 참여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부여한 배려였다고 파악된다. 하급 신분의 백성에게까지 쏟는 세심한 배려가 의궤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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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미선, 2000 「1785년 화성에서의 진찬과 양로연, 『원행을표정리의궤』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사 74쪽
6) 김종수, 2000 「장서각 소장 조선시대 宮中 樂문헌」 『장서각』 창간호 80쪽 

          

3)궁중무용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조선시대는 궁중무용의 요람기이자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때에 창작 또는 발생된 궁중무용이 무려 36종에 달하는데 이것은 조선말까지 춤추어진 정재(呈才:정재는 재조(才操)를 올린다는 뜻으로 궁중에서 잔치 때 하는 춤과 노래를 의미한다)가 총 53종인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시작된 궁중무용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에 창제된 춤으로는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錄)·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賀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곡파(曲破)와 같은 춤들이다. 이들 춤의 내용이나 부르는 가사들은 조선시대에 창작된 것으로서 사설 내용은 대개 선왕 또는 왕가의 융성을 그림 진연진찬진하병풍 中 신축진연도병7폭 여령정재 축원하고 왕업의 번영을 축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7)

  조선시대 궁중연회에서 연향의 첫머리에 등장한 무용은 <몽금척 夢金尺>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을 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세종 때 만들어진 몽금척을 처음 공연한 것은 건국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19세기 초반까지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무용은 <처용무>로서 신라시대의 처용설화에 바탕을 둔 처용무는 나쁜 귀신을 쫓고 태평성대를 희구하는 바람을 내포하고 있었다. <처용무>는 왕실의 번영과 안정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19세기 전반까지 궁중연회에서 그 대미를 장식하였다. 

          

                

   조선시대 궁중무용의 규모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은 18세기이후이다. 조선전기까지 활발히 공연되었던 무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다소 규모가 작아졌으나 영조·정조시대 이후 문화 중흥이 이룩되면서 전대의 위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순조대를 고비로 궁중무용은 정리되고 그 종목이 대폭 증대되어 50여종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1809~1830)의 정치 참여는 궁중무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무용에 관심이 컸던 익종이 대리청정을 하던 때에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8) 을 비롯한 20여종의 궁중무용이 새로 만들어졌다. 이때 창제된 정재는 춤의 외적인 요소보다 내적인 구성에 중점을 두고 춤다운 춤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즉 민족적 정서를 살린 고유한 예술성을 강조한 춤이 대량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순조 연간에는 새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많이 창제됨으로써 조선전기의 화려했던 궁중잔치의 풍류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춘앵전 春鶯> 9)·<무고 舞鼓>10)·<가인전목단>·<장생보연지무 長生寶宴之舞> 11) 등의 정재는 순조 때 재연되었던 것을 국립국악원에서 재연되었던 것을 국립국악원에서 전승한 궁중무용들이다. 


   한편 1829년에 행해진 진찬의식 때 공연된 정재는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외진찬정재도에는 초무(初舞), 아박(牙拍), 향발(響), 무고(舞鼓), 광수무(廣袖舞), 소수무(小袖舞)가 그려져 있고, 내진찬정재도에는 몽금척(夢金尺),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헌선도(獻仙桃), 무발(舞), 아박, 포구락(抛毬樂), 수연장(壽延長), 화황은(花皇恩), 무고, 연화무(蓮花舞), 검기무(劒器舞), 선유락(船遊樂), 오양선(五羊仙), 소수무, 춘앵전(春鶯), 보상무(寶相舞), 가인전목단, 처용무(處容舞)가 그려져 있어서 당시에 공연된 무용의 구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순조대에는 궁중무용이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잔치의 의식이 체계적으로 정리, 기록되었다. 1829년에 편찬된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를 통해 궁중잔치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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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경린 1885 「한국전통무용」 일지사 41~42쪽
8)중국의 송태조 때 도곡이라는 한림학사가 제작한 가인전목단을 본떠 순조 때 효명세자가 제작한 것이다. 무대 중앙에 활짝 핀 모란의 꽃병을 놓고 10인의 무원이 그대로 편을 짜서 꽃을 희롱하는 춤이다.

9)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보령 4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1명이 추는 점이 특징이다.
10)고려 충렬왕 때 시중 이혼이 영해에 유배갔을 때 바닷가에서 큰 뗏목을 얻어 그것으로 큰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굉장하였다. 후에 이 북을 사용하여 정재를 지은 것을 무고라 하였다.

11)중국 송나라 때 쓰이던 장생보연지악을 바탕으로 효명세자가 새로 만든 정재로소 무원은 죽간자 2인과 원무 5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6)궁중잔치의 이모저모           

                

『순조기축진찬의궤』는 1829년 순조가 40세가 되는 동시에 재위 3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푼 행사를 정리한 의궤이다. 본 행사는 1828년 11월에 세자가 예조판서 등과 더불어 국왕의 즉위 30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베풀 것을 논의하고 숙종대와 영조대의 전례를 찾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국왕은 순조였지만 1827년부터 세자인 익종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행사의 실질적인 주관자는 세자가 된다.    

   1829년에 행해진 진찬 의식은 크게 대전외진찬(大殿外進饌)·대전내진찬(大殿內進饌)·대전야진찬(大殿夜進饌)·왕세자회작(王世子會酌)으로 구성되었다. 외진찬은 외연, 내진찬은 내연에 해당한다. 외연은 군신이 주축이 되는 연향으로 대비·왕비 등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없지만, 내연은 대비·왕비·세자빈·공주 등의 여성이 참여하는 잔치로서 왕을 비롯한 종친·의빈·척신 등 왕실의 친인척인 남성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전외진찬은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서, 대전내진찬·대전야진찬·왕세자회작은 왕비의 거처인 자경전(慈慶殿)에서 거행되었다. 


  의궤의 내용을 항목별로 보면 권두의 「택일」은 행사의 주요 일정을 정리한 것이며, 「좌목」은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기구인 진찬소와 의궤청의 구성원들의 실명을 기록한 것이다. 「도식」은 행사장의 인원과 그 위치를 표 형식으로 제시한 반차도와 행사장과 행사 장면을 담은 그림, 의식에 소요된 악기, 복식, 물품 등을 구체적으로 밝힌 그림으로 구성되었다. 반차도는 실제 행사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미리 위치와 순서를 익히도록 한 것으로 도상연습에 해당한다. 각종의 그림에는 어좌를 비롯하여 악대, 여기 등 공연자들과 의장품, 참관자들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볼 수 있다. 도식을 의궤에 기록된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정전진찬반차도(明政殿進饌班次圖)
자경전진찬반차도(慈慶殿進饌班次圖)
자경전야진찬반차도(慈慶殿夜進饌班次圖)
자경전익일회작반차도(慈慶殿翌日會酌班次圖)
명정전도(明政殿圖)
명정전진찬도(明政殿進饌圖)
자경전도(慈慶殿圖)
환취정도(環翠亭圖)
자경전진찬도(慈慶殿進饌圖)
자경전야진찬도(慈慶殿夜進饌圖)
자경전익일회작도(慈慶殿翌日會酌圖)
왕세자소차도(王世子小次圖)
외진찬정재도(外進饌呈才圖)
내진찬정재도(內進饌呈才圖)
채화도(綵花圖)
기용도(器用圖)
의장도(儀仗圖)
정재의장(呈才儀仗)
악기도(樂器圖)
복식도(服飾圖) 

  위에서 항목별로 의궤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통하여 순조대에 베풀어진 궁중잔치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도식에 나타난 각종 그림들과 잔칫상 하나하나 마다 놓여진 꽃에 대한 기록이나 각종 공연에 동원된 기생들의 복장까지 세밀히 기록한 것을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현장 복원할 수 있다. 이 의궤는 모두 6부를 제작하여 규장각, 춘추관, 예조,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에 각각 보관되었다.


  19세기는 흔히 세도정치기로 규정되어 왔다. 외척들의 발호에 따라 왕권이 약해지고 국왕은 허약하기만한 존재로 인식된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에 베풀어진 궁중잔치 의식의 면모를 세밀히 정리한 『진찬의궤』에는 당시 왕실문화의 멋과 화려함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것은 결국 18세기 영조·정조시대를 거치면서 성숙되어진 조선후기의 왕실문화가 순조대 이후에도 여전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즉 19세기초반까지도 궁중잔치 의식을 통하여 왕실의 위엄을 더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실의 의지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정조의 화성행차와 8일간의 행사 : 「원행을묘정리의궤」

1)화성행차의 의미

                

  1795년 윤2월 9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을 향했다. 정조가 화성을 방문하는 것은 이 때은 처음이 아니었다. 정조는 1789년에 자신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水原府)가 있던 화산(花山) 아래에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한 이후 매년 이곳을 방문한 바 있었다. 그러나 1795년은 정조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던 것이다.

게다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더라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려야 하는 해이기도 했다. 또한 한 해 전에 공사를 시작한 화성(華城)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국왕이 직접 공사 현장을 둘러볼 필요도 있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자신의 권위를 펼쳐 보일 필요성도 느꼈다. 이에 따라 정조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고도 장엄한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다.



   정조가 국왕으로 있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도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시대였으니, 미국이 신생국가로 탄생하여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즉위하고,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근대 시민국가가 등장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는 건륭(乾隆, 1736∼1795) 황제가 즉위하여 청나라 최대의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때 정조는 아버지의 비극을 빚은 붕당정치를 극복하고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는 민국(民國)을 건설하며, 농업과 상공업이 함께 발전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구축하려 하였다. 또한 정조는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주자 성리학으로 도덕성을 높이며, 청으로부터 새로운 기술과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부강하고 근대화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이러한 꿈을 펼치는 시금석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을 자주 방문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현륭원에 참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성을 오가는 길에 일반 주민들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으며, 지방에 숨겨진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했다. 또한 경기도 일대를 직접 방문하여 수도권의 방위 체제를 점검하고, 수시로 군사들을 동원하여 단체 훈련을 시켰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그동안 이룩했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기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였다. 정조는 이 행사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하나로 묶고, 장차 화성을 중심으로 펼쳐가려고 하는 개혁정치의 구상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2)「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는 말 그대로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整理)한 의궤'이다. 정조는 1794년 12월에 이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란 관청을 설치한 바 있는데, '정리의궤'란 '정리소의 업무를 정리한 의궤'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정리의궤』는 또한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이다. 조선시대의 의궤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쓰고 그림을 그린 필사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정리의궤』를 널리 알리기 위해 활자로 인쇄할 것을 결정했고, 그 인쇄를 위해 특별히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1795년에 만들어진 이 활자는 '정리자(整理字)'라고 하는데, 이는 『정리의궤』의 인쇄를 위해 만든 활자라는 뜻이다. 정리자는 이러한 연유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후 정조와 관련이 깊은 서적을 인쇄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1814년에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정리자로 인쇄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정리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5권, 부록 4권 등 총 10권 8책으로 구성되었다. 권수의 내용은 주로 도식(圖式) 즉 그림이다. 여기에는 화성행궁의 전경, 봉수당(奉壽堂)의 잔치, 잔치 자리에서 공연된 무용, 잔치 자리에 사용된 조화, 그릇, 복식, 화성에서의 주요 행사 장면, 행사에 사용된 가마의 모양과 세부도, 그리고 행렬 전체의 모습을 그린 반차도가 나온다. 이 그림들은 『정리의궤』의 백미가 되는 부분으로 김홍도를 비롯한 궁중의 화원들이 그린 것을 목판으로 새겨서 인쇄한 것이다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행사에 사용된 글들, 의식 절차, 행사와 관련한 관리 및 관청의 보고서, 잔치 음식의 내용과 조달 상황, 국왕과 혜경궁이 타고 간 가마의 재료와 비용, 배다리 설치, 행사에 참여한 내빈(內賓, 여자손님)과 외빈(外賓, 남자손님) 및 군인의 명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정조의 화성 행차와 회갑잔치를 원형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는 것도 이처럼 풍부한 기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비의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정리한 재용(財用)에서는 모든 비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물가 동향을 이해하는데에도 크게 도움을 준다. 


          

              

   부편에는 혜경궁의 진짜 생일날인 1795년 6월 18일에 창경궁 연희당(延禧堂)에서 열렸던 회갑잔치, 1월 21일 사도세자의 회갑일에 사도세자의 신위(神位)를 모신 경모궁(景慕宮)에 정조가 참배한 일,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탄신 8회갑(480주년)을 맞아 정조가 영흥본궁(永興本宮)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린 일, 1760년 사도세자가 충청도 온양행궁에 가서 심은 느티나무가 35년만에 큰 나무로 성장한 것을 기념하여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우고 당시 세자를 수행한 관원에게 상을 내린 일 등을 정리했다. 이 네 가지 행사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정조의 화성행차에 관한 기록은 이외에도 많이 남아 있다. 『원행정례(園行定例)』라는 책이 있는데, 이는 1789년 이후 매년 있었던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사항을 정례화하여 정리한 것이다. 또한 1795년의 행사를 8폭의 그림으로 그린 『화성능행도』 병풍이 있는데, 이는 『정리의궤』에도 나오는 주요 행사 장면을 천연색으로 그린 명품이다. 『화성능행도』 병풍은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호암미술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박물관 등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수원행행반차도(수원행행반차도)'라는 천연색 두루마리 그림이 있다. 이는 『정리의궤』의 반차도와 같은 내용인데, 『정리의궤』의 그림이 행렬을 옆에서 본 모양을 그린 것이라면 이는 행렬을 뒤에서 본 모양을 그린 것이다. 최근에는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의궤』의 반차도에 채색을 한 『정조대왕화성능행 반차도』가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에 의해 제작되어 시중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3)7박 8일간의 주요행사

                

  1795년 윤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 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그러면 이 때의 행사는 과연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당시 화성에서 있었던 주요 행사를 날짜별로 살펴보자.

정조의 화성행차는 1794년 12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가마가 2개 제작되었고, 행사에 사용할 비단은 중국제를, 거울은 일본제를 사용하였다. 또한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 국도)를 새로 건설하고, 한강을 안전하면서도 적은 비용으로 건널 수 있도록 고안한 배다리가 건설되었다.

   본 행사는 1795년 윤2월 9일에 시작되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었으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되었다.

   둘째 날인 윤2월 10일에는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을 하였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길을 재촉하였고, 진목정에 이르러 잠시 휴식한 다음 저녁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하였다.


  다음 날인 윤2월 11일, 정조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하였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를 예행 연습하였다. 정조는 특히 나라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잔치에는 숙련된 기생을 쓰지 않고 바느질하는 종이나 의녀(醫女)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들의 춤 솜씨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윤2월 12일에는 아침에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의 슬픔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정조는 조급하고 당황해 하였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천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 날의 훈련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에게 엄청난 시위 효과가 있었다.


  윤2월 13일은 이번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회갑연이 거행되었다. 연회 장소의 좌석 배치와 가구들,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손님 13명과 남자손님 69명의 명단이 소개되었다. 또한 잔치에 쓰여진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된 상의 숫자와 음식, 소요 경비가 열거되었다.

   윤2월 14일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서울에서 정조와 같이 온 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하였는데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동일하였다. 양로연을 끝으로 공식 행사는 끝났다. 이후 정조는 휴식으로 들어갔는데, 한낮에는 화성의 축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활쏘기의 성적은 정조가 제일 좋았다.


  윤2월 15일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고, 윤2월 16일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시흥을 출발하면서 정조는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정조가 백성들을 만나 고충을 이야기 할 것을 권유한 끝에 금년에 호역(戶役)에 두 번이나 징발된 폐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정조는 이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4)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들

                

  『정리의궤』에는 정조의 행렬이 63면의 반차도로 정리되어 있다. 당대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金弘道)가 지휘하고 김득신(金得臣), 이인문(李寅文), 장한종(張漢宗), 이명규(李命奎) 등 당대의 일류 화원들이 제작한 이 그림은 절정기에 오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하는 이 행렬에는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이 참여하였고,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가 115명, 각종 의장용 깃발을 든 사람도 238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행렬은 전체적으로 질서정연하면서도 인물 개개인의 표정이나 동작, 깃발이 휘날리는 정도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실록에서는 정조의 정치가 '모든 일을 옳은 방향으로 처리하여 그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궁궐 안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면서도 화기(和氣)가 넘쳐흘러 각자 자기 도리를 다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반차도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제 반차도를 따라 그 날의 행렬을 살펴보기로 하자.

   제일 앞에 경기감사 서유방(徐有防, 1741∼1798)이 보인다. 서유방이 행렬의 선두에 선 것은 행차의 목적지가 그의 관할 구역인 경기도 화성이었기 때문이다. 서유방은 정리소의 정리사(整理使)이자 경기감사의 자격으로 행렬을 인도하였다. 그 다음에 1795년의 행사를 총괄했던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있다. 채제공은 당시 정조의 신임을 가장 크게 얻고 있던 정치적 실력자로서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복권시키고 화성을 건설하려는 정조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정조의 측근 인사였다. 채제공의 뒤로는 별기대(別騎隊) 84명과 각종 깃발을 든 군사가 따르고, 징, 나팔, 호적, 해금, 장고, 북, 피리 등으로 구성된 악대가 따른다. 정조의 행렬에는 악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전체 행렬의 보조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행렬을 웅장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다음에는 병기로 무장한 훈련대장(訓練大將)과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따르고, 차비선전관(差備宣傳官)의 호위 하에 국왕의 어보(御寶)를 실은 말이 지나간다. 그 뒤에 베일로 얼굴을 가린 18명의 나인(궁녀)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이들은 회갑 잔치에서 각종 무용을 공연할 무용수였다. 궁녀들이 궁궐 밖을 출입할 때에는 얼굴을 가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궁녀 뒤로 혜경궁의 옷을 실은 말이 차지장교(次知將校)의 호위 하에 지나가고 있다.

   이제 행렬은 국왕의 가마가 있는 곳에 이른다. 수어사(守禦使) 심이지(沈 之)가 50명의 기병을 선도하며 지나가고, 그 뒤에 각종 의장기가 늘어 선 사이에 정조의 가마를 끌고 갈 예비 말 4필이 있다. 다음에 정조가 타기로 예정되어 있는 어가(御駕)가 나타나는데, 실제로 정조는 이 가마를 타지 않았다. 국왕의 가마 뒤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용기(龍旗)가 나오는데, 규모가 커서 5명의 병졸이 함께 들었다. 다음에 51명으로 구성된 취주악대가 나타나는데, 이들은 행렬의 중앙부를 인도하는 악대로서 장용영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악대 뒤에는 훈련도감과 장용영의 초요기(招搖旗)가 있는데, 이는 군영의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깃발이었다. 정조가 왕릉을 행차할 때에 군사 훈련이 수시로 있었는데 초요기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깃발이었다. 이번의 행차에서는 화성 서장대(西將臺)에서 거대한 군사훈련이 있었다. 

          

                

  행렬의 중앙부는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이다. 먼저 혜경궁에게 제공할 음식을 실은 수라가자(水刺架子) 마차가 있고, 이를 감시하는 홍수영(洪守榮)은 공교롭게도 혜경궁의 친정 조카였다. 다음으로 혜경궁의 가마를 끌고 갈 예비 말 8필이 있고, 정조의 갑옷을 실은 2마리의 말이 있으며, 훈련도감 소속의 협련군(挾輦軍) 80인과 무예청 총수(銃手) 80인의 엄중한 호위 속에 혜경궁 가마(慈宮駕轎)가 나타난다. 혜경궁 가마의 측근에는 별감(別監) 6인이 호위하는데 이들은 모두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왕실의 주요 인물들을 호위했던 별감들은 대단한 위세를 부렸다.

   정조가 실제로 탄 좌마(座馬)는 혜경궁의 가마 바로 뒤에 있다. 말을 호위하는 30명의 무예청 군사와 30명의 순라군에 둘러싸고 있으며, 측근에는 역시 별감 6인이 경호하고 있다.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행차였으므로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으며, 말을 탄 국왕의 실체 형상은 그리지 않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오늘날 우리가 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진(御眞) 즉 왕의 초상화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정조의 어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조의 가마 다음에는 혜경궁의 두 딸이자 정조의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璿君主)가 탄 쌍가마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정조보다 2살, 4살 연하의 누이들로서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오빠와 함께 치르기 위해 이번 행렬에 동행했다. 그런데 이 행렬에는 시어머니의 회갑잔치에 당연히 있어야 할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효의왕후가 이 행사에 불참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 이유를 추정할 수는 있다. 당시 창덕궁에는 영조의 둘째 부인이자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살아있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정치세력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고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거행하는 행사에 동행하기는 곤란했다. 따라서 정순왕후는 궁중에 남았고 손자며느리인 효의왕후가 함께 남아서 할머니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행렬은 중심부를 지나 후반부에 이른다. 먼저 장용영 소속의 고위 군관을 앞세운 장용위 군사 96인이 5열로 줄을 지어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규장각신, 승정원 주서(注書), 예문관 한림(翰林) 등 문반 요직에 있는 관리들이 보이고, 오늘날 대통령 주치의라 할 수 있는 약물대령의관(藥物待令醫官)의 모습도 보인다. 그 뒤에 화려한 깃발 부대와 함께 장용대장(壯勇大將) 서유대(徐有大)가 장교 4인, 서리 2인, 아병 10인을 대동하고 행진하고 있다. 장용영은 1785년에 국왕의 호위를 전담하기 위해 만든 장용위(壯勇衛)에서 출발한 부대로 정조는 1793년(정조 17)에 이를 장용영이라는 독립 군영으로 발전시켰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고, 내영(內營)은 도성의 방어를 담당하고 외영(外營)은 화성의 방어를 담당했는데, 특히 장용외영의 우두머리인 장용외사(壯勇外使)는 화성유수가 겸직했다.

   장용영 군사 뒤로는 국왕의 비서실장인 도승지(都承旨) 이조원(李祖源)이 3인의 승지와 함께 가고, 그 뒤에는 규장각의 각리(閣吏)와 각신이 각 2인, 장용영 제조 이명식(李命植)이 경연관 2인을 대동하고 행진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용호영에서 차출된 가후금군(駕後禁軍) 50인이 따르고, 엄청난 크기의 표기(標旗)와 함께 각 군문에서 선발된 무사 9인이 따르며, 병조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장교를 대동하고 따른다. 마지막에는 다시 금군 25인이 5열을 이루고 따르며, 나팔, 호적, 북 소리와 함께 초군(哨軍)들이 따르면서 총 10리에 이르는 행렬의 대미를 장식한다. 

          

(8)화성의 벽돌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 : 「화성성역의궤」

1)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까닭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도읍을 서울로 옮긴지 꼭 400년이 되는 1794년, 정조는 수도권의 남쪽 요충지인 수원에 화성(華城)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공사 기간이 2년여,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 만명, 공사비가 80만냥에 이르는 거대한 공사였다. 

          

                

   정조가 화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한 1789년부터였다. 사도세자의 묘소는 원래 양주의 배봉산(拜峰山,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리)에 영우원(永祐園)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터가 좋지 않아 정조는 늘 마음이 편치 않다가 마침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화산(花山) 아래의 천하 명당으로 옮겼다. 그러나 현륭원이 조성된 자리는 원래 수원부의 읍치(邑治)가 있던 자리였으므로, 수원부를 지금의 화성으로 옮기고 장차 조선 최대의 행궁이 될 화성행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793년에 정조는 수원이란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이곳에 유수부(留守府)를 설치했다. 유수부란 지방 도시에 중앙의 고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한 것으로 오늘날의 직할시 개념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화성 이외에 개성(開城), 강화, 광주(廣州)에 유수부가 설치되었는데, 서울을 중심부에 두고 이들 4개 도시로 둘러싸인 지역은 바로 조선후기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794년의 화성 축성은 이를 뒤이어 나온 조치였다.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혜경궁 홍씨와 함께 60세가 되는 바로 그 해에 정조는 신도시 수원에 성곽과 행궁을 마련하는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화성 축성 공사는 집권 20년이 다되어 가는 정조의 안정된 왕권과 절정기에 이른 조선왕조의 문화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과시하는 대역사가 되었다. 

          

2)「화성성역의궤」의 편찬

  『화성성역의궤』는 정조가 화성의 성곽을 축조한 뒤에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화성의 축조 공사는 1794년(정조 1) 1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에는 공사 기간이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로 공사가 끝난 것은 2년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화성의 성역 공사가 이처럼 일찍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국왕 정조의 강력한 의지와 그를 돕는 관료들의 지혜가 결집되었고, 조선 왕조의 충실한 국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공사가 끝난 1796년 9월부터 의궤를 편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의 주요 행사가 끝나면 이내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고 의궤를 편찬했던 기왕의 관례를 따른 조치였다. 『화성성역의궤』는 일단 그 해 11월 9일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완성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체제가 맞지 않자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화성성역의궤』는 1800년 5월에 편찬이 끝나서 인쇄 작업에 들어갔으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결국 1801년 9월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마찬가지로 정리자로 인쇄했는데, 이는 정조와의 각별한 인연을 고려한 것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80만냥이란 거금을 투입한 대공사의 종합 보고서였으므로,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다. 또한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인 정조대, 그 중에서도 가장 전성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 만들어진 책이므로 그 내용이 상세하고 치밀한 것이 특징이다. 『화성성역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6권, 부록 3권을 합하여 총 10권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화성성역의궤』의 체제를 설명한 범례, 화성을 건설하고 의궤를 편찬하며 인쇄하는데 참여한 인원 명단, 그리고 도설(圖說) 즉 그림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화성의 전체 모습을 그린 화성전도(華城全圖), 화성의 4대문, 비밀 통로인 암문(暗門), 횃불을 올려 신호를 주고받았던 봉돈(烽墩) 등 성벽에 설치된 모든 시설물들의 세부도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또한 화성행궁, 사직단,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함), 영화역(迎華驛) 등 화성 주변의 건물이나 시설의 그림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975년에 정부에서 화성 성곽의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3년만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그림의 설명에 힘입은 바 컸다.

   본문의 처음에는 화성 건설의 기본계획서라 할 수 있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疇略)]이 있다. 이 글은 정약용(丁若鏞)이 작성한 안에다가 정조가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으로 성의 둘레, 높이, 재료, 성 주위의 도랑 등을 규정한 일종의 설계안이다. 그러나 실제 화성은 원안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어제성화주략]에서는 성의 둘레를 3,600보(步)로 규정했으나 실제는 4,600보로 늘어난 것이 한 예이다. 이처럼 화성의 둘레가 커진 것은 원래 성밖에 두는 것으로 계획했던 동문 주변의 민가(民家)들을 성안에 포함시키기 위해 성을 더 크게 지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성을 쌓는데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에게 준 상품, 각종 의식의 절차, 공사 기간 중 관련 기관 사이에 오간 공문서, 장인들의 명단, 소요 물품의 수량과 사용내역, 단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보이는 특징은 철저한 기록정신이다. 장인들의 명단에는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의 기술자 명단이 석수, 목수, 니장(泥匠, 흙을 바르는 기술자), 와옹장(瓦甕匠, 기와나 벽돌을 만드는 기술자), 화공(畵工) 등 직종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보면 최무응술(崔無應述), 안돌이(安乭伊), 유돌쇠(柳乭金) 등과 같이 하급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며, 이름 밑에는 근무한 일수를 하루의 반까지 계산하여 임금을 지급했다. 국가의 공식 기록에 천인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특이하지만, 이들의 작업량을 세밀히 정리하여 일일이 품삯을 지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록에는 화성에 관계되는 각종 건축물의 규모와 위치, 그리고 각각에 소요된 경비를 상세히 정리했다. 또한 1795년에 정조가 화성에 행차한 행사와 정조가 지었던 글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중복되는 부분으로 수정 과정에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화성성역의궤』는 1965년에 수원문화재보전회에서 1책으로 영인하였고, 1994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3책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또한 1978∼1979년에는 수원시에서 이를 번역한 『국역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하여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3)화성행궁과 화성의 주요 건물들

  화성의 도시 구조는 서쪽에 위치한 팔달산을 배경에 두고 성곽의 중심부에 화성행궁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는 형세로 배치되었다. 화성행궁은 평소에는 화성유수가 사무를 보는 관청이지만 국왕이 행차할 경우에는 임시 궁궐로 이용했다. 행궁의 주요 건물에는 봉수당(奉壽堂, 48칸), 장락당(長樂堂, 25칸), 경룡관(景龍館, 10칸 반), 복내당(福內堂, 20칸 반), 유여택(維與宅, 50칸 반), 낙남헌(洛南軒, 13칸), 노래당(老來堂, 7칸), 득중정(得中亭, 20칸), 신풍루(新風樓, 8칸)가 있다. 

          

                

  봉수당은 행궁의 중심 건물로서 '장수를 기원한다'는 이름에서 보듯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거행한 건물이다. 여기에는 원래 정조가 친필로 쓴 '壯南軒' '華城行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혜경궁 회갑잔치를 거행하면서 정조는 다시 '奉壽堂'이란 현판을 써서 걸었다. 낙남헌은 1795년에 수원과 인근의 유생을 모아 놓고 임시 과거를 보았던 곳이다. 낙남헌은 현재 신풍초등학교 담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조대에 지어진 화성행궁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노래당은 '늙어서 오는 집'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정조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여 와서 살려고 생각했던 건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약 5km에 이르는 화성의 성벽에는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루(內樓) 4__곳, 암문(暗門, 비밀 통로) 5곳, 수문(水門) 2곳, 적대(敵臺, 적의 동태를 살피는 곳) 4곳, 노대(弩臺, 석궁을 쏘는 곳) 2곳, 공심돈(空心墩, 적을 관찰하고 공격하는 곳) 3곳, 봉돈(烽墩, 봉화대) 1곳, 치성(雉城,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는 곳) 8곳, 포루(砲樓, 화포 공격을 하는 곳) 5곳, 포루( 樓, 군사대기소) 5곳, 장대(將臺, 군사지휘소) 2곳, 각루(角樓, 적군 감시와 휴식을 겸하는 곳) 4곳, 포사( 舍) 3곳이 모두 성벽에 있는 시설물이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군사지휘소로서 정조의 친필로 전해지는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화성과 그 외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1795년의 행차에서 정조는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총지휘하고 관람했다.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정자이면서 비상시엔 군사지휘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다'는 이름을 가진 절벽 끝의 정자 건물, 그 아래에 조성된 반달 모양의 용연(龍淵), 연못 한 가운데의 작은 섬에 심어진 버드나무가 서로 어울리면서 화성에서 가장 멋진 경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방화수류정에서는 화성의 서장대, 장안문, 동장대는 물론이고 멀리 광교산과 관악산 자락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화성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축성 방식에 중국에서 전해진 새로운 기술을 결합하여 만든 성곽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 나라의 성들은 흙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쌓아서 만든 석성(石城)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성곽의 건축에 사용되는 돌은 주로 화강암이었다. 우리 나라의 화강암은 내구성이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게가 무거워 운반하는데 힘이 들고, 돌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아 성을 쌓을 때에는 일일이 다듬어서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화성에서는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박지원, 박제가는 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한 학자인데, 이들이 청에서 도입하자는 문물 중에는 벽돌이 포함되어 있었다. 벽돌은 견고하여 오래 견딜 뿐만 아니라 규격이 일정하여 작업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화성의 4대문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은 벽돌을 사용하여 짓고, 성벽의 몸체는 종래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화성의 건설에는 또한 서양의 과학 기술을 활용하였다. 성곽 공사에는 많은 돌이 사용되므로 이를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했다. 그 대표적인 기구가 거중기(擧重器)와 녹로이다.
거중기는 여러 개의 활륜(滑輪, 도르래)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화성의 건설을 위해 처음 거중기를 만든 사람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독일인(중국명 鄧玉函)의 『기기도설(器機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했는데, 이 책은 정조가 1776년에 청나라에서 구입해온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거중기는 서양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과학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셈인데, 정약용은 상하 8개의 활륜을 사용하면 25배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녹로 역시 활륜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고 내리는데 사용하는 기구이다. 다만 거중기에서는 여러 개의 활륜을 사용하지만 녹로에서는 활륜을 하나만 사용한다는 점이 달랐다. 녹로는 화성 건설에 사용된 이후에도 각종 공사에 많이 이용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을 중건할 때나 국왕의 장례식에서 관을 땅속에 내릴 때 이용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4)화성복원의 밑바탕이 된 「화성성역의궤」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신도시 화성의 아름다움은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화성전도(華城全圖)]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화원 엄치욱(嚴致旭)이 그린 것인데, 화성의 성역에는 엄치욱 외에도 최봉수(崔鳳壽), 김필광(金弼光), 강치길(姜致吉), 지상달(池相達) 등의 화원과 승려들이 참여하여 그림을 그렸다. [화성전도]는 팔달산 기슭을 흐르는 수원천(柳川)을 중심으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비스듬히 내려다 본 모습으로 그리고, 성곽과 성안의 중요 시설물에는 그 이름을 써넣었다. 또한 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있고, 그 아래에 화성행궁이 있으며, 행궁 앞으로 장안문에서 팔달문 쪽으로 뻗은 대로변에는 이미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96년 8월 19일, 화성행궁에서는 화성의 완공을 축하하는 낙성식 잔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홍도가 그린 16폭의 병풍이 놓여 있었는데, 이는 화성의 이름난 봄 경치와 가을 경치를 각각 8가지씩 골라서 그린 것이었다. 이른바 화성춘팔경(華城春八景) 화성추팔경(華城秋八景) 그림 병풍이었다. 이 그림의 대부분은 오늘날 사라져 버렸지만 그 일부로 생각되는 것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전해진다. '화서문 밖의 가을 사냥(西城羽獵)'과 '미로한정의 국화 완상(閑亭品菊)' 2폭이 그것이다. 또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사라진 그림들의 잔영이 남아있다. 꽃나무가 우거진 만석거의 풍경을 그린 [영화정도(迎華亭圖)]를 통해 우리는 '만석거의 황금 들판(石渠黃雲)'을 상상할 수 있고, 영화역 건물과 후면의 들판을 거니는 말의 모습을 그린 [영화역도(迎華驛圖)]를 보고 '영화역에 뛰노는 말(華郵散駒)'을 볼 수 있다. 

          

(9)조선시대 어진(御眞)을 기록한 의궤 : 「어진도사감의궤」, 「영정모사도감의궤」

1)국왕의 초상화, 어진

                

   초상화란 특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인물을 그려내는 그림으로서, 크게 보아 인물화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회화의 시작과 인물화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각종의 인물 그림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의 초상화는 전체의 구도 속에서 인물이 구성요소가 된 성격이 짙다. 엄격한 의미에서 초상화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은 대개 통일신라이후에 출현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의 어진을 비롯하여 승려들의 초상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면 국왕, 승려와 함께 공신상(功臣像)과 여성상(女性像) 등이 널리 제작되었음이 각종 문헌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보급과 관련하여 서원이나 사당이 지역별로 늘어나면서 이곳에 봉안할 인물들의 초상이 다수 제작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보다 확산되어 명망있는 사대부라면 누구나가 자신의 초상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름있는 화원을 동원하여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서 그만큼 초상화의 수요가 늘어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들의 초상을 모아놓은 『선현영정첩』이나 『진신화상첩』과 같은 화첩(자료사진:규장각 명품도록)들이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명망가들에 대한 초상화 제작의 활성화는 화원들의 기량 향상 뿐만아니라 화원들의 경제적, 신분적 지위 향상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왕과 왕후, 공신, 승려, 일반 사대부, 부부상 등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이들 초상화에 대한 칭호는 왕의 초상의 경우 어진(御眞) 또는 어용(御容)이라 하였으며, 그 외에는 초상(肖像),화상(畵像),영정(影幀),도상(圖像),진상(眞像),진영(眞影),유상(遺像)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사용되었다12)
이들 호칭 중에서 '참 진(眞)'자가 특히 많이 사용된 것에서 터럭 하나, 곰보자국 하나라도 완전하게 표현하려 했던 우리 초상화의 성격을 읽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초상화는 정확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또한 인물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사람만의 특징이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여 화면에 담아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옮긴다'는 뜻으로 '전신(傳神)'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신이란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준말로서,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상의 인격, 기질, 품성 등 내면에 있는 정신까지 그려낸다는 것이다. 인물에 따라 정신이 반영되는 곳이라면 안면 근육이나 광대뼈, 입, 뺨 등 어느 한 곳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국왕의 경우 그 얼굴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터인데 그 성격과 정신까지 옮겨야 하니 어진 제작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야만 하는 작업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러한 초상화 제작의 분위기가 왕실에도 적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어진 관련 의궤이다. 국왕의 모습을 직접 그린 과정을 국가적 기록으로 남겨서 하나의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또한 초상화 제작에 관한 각종 문서나 화원들의 선발 과정, 소용 물품의 수량 등을 치밀하게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초상화를 제작할 때 그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예법에 맞게 초상화를 제작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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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이태호 1996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학고재 289-290쪽 

          

2)어진을 그린 사람들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어진은 당대 최고의 화가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강심장인 화가라도 최고의 권력자인 국왕 앞에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진땀이 흐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는 국가 기관인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공인 화가 즉 화원었다. 화원은 사대부 출신의 화가와 함께 조선시대 회화 발달을 이끌어나간 주축이었었다. 사대부 출신의 화가가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린데 비하여, 조선시대의 화원은 국가의 공식기구로 설치되어 있던 도화서에 소속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행하였던 사람들을 지칭하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서 직업으로 삼는 전문직 종사자인 셈이었다. 당시에는 도화서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람이나 도화서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을 모두 화원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화원들의 활동은 도화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개는 국가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림이나 기록화를 그리게 되었다. 화원들은 국왕의 초상이나 명망가들의 초상을 그리는 일도 있었으며,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국초부터 화원들의 몫이었다. 또한 기계류와 건축물의 설계도, 책의 삽화, 외교사절을 수행하면서 외국의 풍물을 그리는 일도 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화원들은 오늘날 주요 기록을 찍는 사진기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대통령의 동정에 관련된 일은 전문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최고의 사진작가나 촬영기사들이 맡는 역할을 조선시대에는 도화서의 화원이 수행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어진을 제작하는 화원은 크게 주관화사(主管畵師)와 동참화사(同參畵師), 수종화원으로 구분되었다. 주관화사는 국왕 영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맡은 화가를 말하며 동참화사와 수종화원은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어진 제작의 주관화사가 결정되면 영정을 도사(圖寫:생존한 국왕의 모습을 직접 그림)거나 모사(模寫:국왕 사후에 기존의 영정이나 자료를 토대로 그림)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작업에는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1~2명의 동참화사와 3~4명의 수종화원이 함께 참여하였다. 동참화사는 주관화사는 옷과 같은 부분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일을 맡았으며, 수종화원은 그림 제작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지원하면서 영정 제작 작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진 제작이 완성되면 화원들은 벼슬의 승급이나 말의 지급 등과 같은 포상을 받았다. 특히 어진 제작을 주관하는 만큼 주관화사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았으며, '어용화사'라는 영예가 주어졌다. 이들의 명망을 들은 쟁쟁한 사대부들은 이들에게 각종의 초상화를 주문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주관화사들의 신분적, 경제적 지위는 크게 상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진 제작시에는 당시 도화서 화가 이외에도 전국에서 초상화에 뛰어난 선화자(善畵者)를 구하여 그 가운데서 화가를 선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자료와 각종 의궤의 기록에는 화원이 선발되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정조대에는 일차로 완성된 어진 초본(草本) 3점을 놓고 정조와 대신들, 그리고 어진 제작에 참여한 이명기, 김홍도 등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어느 본이 가장 잘 그려졌는가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어진을 제작할 때 여러 초본을 그리고 이것을 평가하여 가장 완성도가 높은 어진을 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어진 제작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화원들의 총력이 결집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대개는 이미 실력이 검증된 도화서 화원이 발탁되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에서 수배된 일반 화가가 시험을 통하여 어진을 제작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 참고 자료: 국왕 초상화도 잘 그린 김홍도

   김홍도는 대개 서민의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은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인물, 산수, 선불(仙佛), 화조, 어해(魚蟹) 등 각 분야의 그림에서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으며, 영조, 정조대에는 국가의 각종 기록화나 초상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의 김홍도 전기에 의하면, '영조 때 어진을 그리심에 김홍도가 그 부름을 받아 일을 맡았고 또 지금 임금(정조) 때에도 명을 받들어 어용을 모사하니 크게 뜻이 맞는다고 칭찬하시고 특별히 역말을 감독하는 임무(찰방)를 내려 주셨다'는 기록과 '영조 말년에 어진을 그리도록 명령하시어 당시에 전신(傳神:내면까지 표현하는 초상화)을 잘하는 이를 뽑는데 김홍도가 실로 선택을 받을만하였다. 일이 끝나자 공로에 따라 사포서(식품 공급을 맡은 관청) 별제를 제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 기록에서 김홍도가 영조와 정조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하였다는 것과, 그 공로로 관직에 특별히 제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조선후기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의 모습을 그토록 친근하게 화폭에 담았던 김홍도의 눈에 비친 국왕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가? 그 실물이 현재 전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3)어진제작과정을 기록으로 보관하다

   조선시대에 어진을 그리는 일은 국가적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특별히 도감을 설치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작업이 마무리 된 후에는 의궤를 편찬하였다. 『어용도사도감의궤』, 『영정모사도감의궤』가 바로 이러한 기록을 모아 놓은 의궤이다. '도사(圖寫)'라는 용어는 '직접 그린다'는 뜻으로, 왕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직접 어진을 그린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모사(模寫)'는 '어떤 그림을 본보기로 그와 똑같이 그린다'는 뜻으로, 훼손된 어진을 복구하거나 새롭게 봉안하기 위하여 본 그림을 바탕으로 다시 그리는 것을 말한다. 국왕이 사망한 후 후대에 여러 자료를 활용하여 생전의 모습과 가깝게 그린 경우도 '모사'라 불렀다.

   영정을 그리는 일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계속 있어왔던 일이고 도화서의 화원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양난을 거치면서 많은 전각들이 파손되었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역대 국왕의 영정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보수를 하거나 옮겨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부분적인 보수만을 해오던 영정을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은 조선후기 국가 질서가 재정비되기 시작한 숙종대부터였다.

   어진 관련 의궤 중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88년(숙종 14) 태조의 어진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태조대왕)영정모사도감의궤』이다. 이것은 경기전에 모셔져 있다가 손상된 태조의 영정을 서울로 옮겨와 다시 그리는 작업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1713년(숙종 39)에 제작된 『어용도사도감의궤』는 숙종의 어용을 그리는 일을 기록한 것이고, 영조대에는 『(세조대왕)영정모사도감의궤』와 『(숙종대왕)영정모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이어 헌종대인 1837년(헌종 3)에 태조의 어진을 모사한 『영정모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고, 고종대에 태조의 어진을 모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가 3차례 제작되었고(1872년, 1901년, 1902년), 1902년에는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睿眞)을 직접 그린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아홉 건의 의궤 중 일곱 건의 의궤가 기존의 어진을 바탕으로 모사한 '모사도감의궤'이고, 2건이 생존해 있던 국왕의 모습을 담은 '도사도감의궤'이다.


* 조선시대에 제작된 어진 관련 도감의궤

의궤의 제목

제작연대

주요 내용

소장처

1. 영정모사도감의궤

1688년(숙종 14)

태조 어진 모사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2. 어용도사도감의궤

1713년(숙종 39)

숙종 어진 도사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3. 영정모사도감의궤

1735년(영조 11)

세조 어진 모사

규장각, 장서각, 파리국립도서관

4. 영정모사도감의궤

1748년(영조 24)

숙종 어진 모사

규장각, 장서각

5. 영정모사도감의궤

1837년(헌종 3)

태조 어진 모사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6. 어진이모도감의궤

1872년(고종 9)

태조, 원종 어진 모사

규장각, 장서각

7. 어진모사도감의궤

1900년(광무 4)

태조 어진 모사

규장각, 장서각

8. 영정모사도감의궤

1901년(광무 5)

태조 등 7조의 어진 모사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9. 어진도사도감의궤

1902년(광무 6)

고종의 어진, 황태자의 예진 도사

규장각, 장서각



  이처럼 어진의 제작 과정을 직접 기록한 의궤가 9건이 존재하고, 의궤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역대에 국왕의 어진을 제작한 사례로 미루어 보아 어진은 조선시대에 상당수가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3종의 어진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 1872년(고종 9)에 옮겨 그린 태조의 전신상(전주 경기전 소장)과 1900년에 그려진 영조의 반신상(창덕궁 소장)과, 타다 남은 철종의 어진(창덕궁 소장)이 그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직접 제작된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의 어진 3종에 불과하다.

   1934년에 편찬된 『선원전수개등록』에 의하면 당시까지 창덕궁에는 태조, 세조, 원종(인조의 부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순조의 아들),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봉안되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 많던 어진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했을 때 어진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가 불탔기 때문이었다. 13) 결국 조선시대인들이 직접 만든 어진은 현대에 와서 거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어진 관련 의궤 중에서도 '도사도감의궤'는 국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미가 있다. 현존하는 2건의 도사도감의궤 중 1713년 숙종 생존시에 그 모습을 직접 그린 과정을 기록한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에는 숙종의 초상화 제작 과정이 나타나 있지만, 어진에 관한 도설이나 반차도가 그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이책에는 4월 10일에 도감이 설치되어 5월 22일 참여인원들에 대한 포상까지 43일간의 행사기록이 실려있는데, 숙종의 어용은 2본이 제작되어 영희전과 강화도의 장령전에 각각 보관되었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1902년에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을 그린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는 어진도사도감의궤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숙종대의 의궤에 비해 내용이 훨씬 자세하고, 그림이 풍부하다. 황제와 황태자가 앉았던 용상(龍床)과 용교의(龍交椅)를 비롯하여 오봉병(五峰屛), 삽병(揷屛) 등과 왕실에서 사용한 각종의 도구들이 그림과 함께 크기와 길이가 표시되어 있으며, 완성된 어진을 봉안한 의식을 담은 「반차도」가 그려져 있어서 어진 제작의 정황을 보다 자세하게 접할 수 있다.

   어진 제작은 어진을 그릴 것을 지시하는 국왕의 조칙(詔勅)14)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도감의 관원들이 모여 전반적인 내용을 논의하고 황제의 결재를 받은 각종 문서, 행사에 소요된 물품의 종류와 비용, 참여인원, 유공자 포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초상화는 먼저 유지(油紙)에 그리고 채색을 한 다음 이를 비단에 옮겨 채색을 한 후 배접하고 장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의궤의 편찬 작업은 호위청 신영(新營)에서 이루어졌으며, 5건을 제작하여 규장각·시강원·장예원·강릉(오대산사고)·강화에 각각 보관하였다. 특별히 어람용으로 제작된 것은 규장각과 시강원에 보관하였음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15)



* 반차도를 통해 본 어진 가마 행렬

   어진 제작과 관련하여 또하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어진을 제작하여 봉안하는 행렬의 반차도를 그린 것이다. 봉안 의식이 그만큼 중대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어진도사도감의궤』의 말미에는 제작된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을 평양의 풍경궁(豊慶宮)에 봉안하는 행렬의 모습을 그린 반차도가 26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반차도를 통해 행렬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렬의 모습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반부에 황제의 어진을 담은 모습을, 후반부에 황태자의 예진을 담은 모습을 그리고 있다.

   먼저 황제의 어진을 담은 행렬의 모습을 보면, 선두에는 도로차사원(道路差使員)이 나서고 이어 지방관과 관찰사가 말을 타고 뒤를 따른다. 이들 3명의 뒤로는 앞선에서 경호하는 전사대(前射隊) 병력이 따르고 전사대의 후미에는 이들을 지휘하는 위관(尉官)이 모습을 드러낸다. 위관의 뒤로 시종(侍從)과 주사(主事)에 이어 노란색 복장으로 향정(香亭)과 용정(龍亭)을 받든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이들의 뒤로 금월부(金鉞斧), 황양산, 수정장(水晶杖) 등 의장물들과 함께, 운검(雲劒), 근장군사(近仗軍士)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근장군사 뒤로는 전악(典樂)의 지휘를 받는 전부고취(前部鼓吹)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요즘의 악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진을 봉안한 가마가 나타난다. 어진을 담은 가마 앞에는 사금(司禁)과 별감(別監)이 중앙에, 그 좌우에는 개성대(開城隊)라는 병력이 호위한다. 가마는 노란색 옷을 입은 가마꾼 18명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 가마의 뒤로는 후부고취(後部鼓吹)가 뒤따르고 있다.

   이어 황태자의 예진 봉안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인 구성은 황제의 그것과 같다. 다만 향정과, 용정, 예진을 담은 가마가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노란색으로 그려진 황제의 어진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란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로 인식되고 있는데 의궤의 반차도 제작에도 이러한 의식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행렬의 반차도는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오늘날 비디오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이처럼 반차도를 남긴 것에서 어진 봉안의 행사를 국가의 중대사로 인식했던 당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부가적으로 전통시대의 의장과 복식, 호위 병력의 규모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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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조선미 1983 『한국의 초상화』 열화당
14) 국왕의 명령이나 지시를 뜻하는 용어로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국왕이 황제로 격상되자 '조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칙' 이전에 국왕의 명령이나 지시를 뜻하는 용어로 '전교(傳敎)'가 사용되었다.
15) 이하 『고종어진도감의궤』에 대한 설명은 오수창, 1996 『고종어진도감의궤』(규장각) 해제 참조 

          


(10)국왕과 신하가 함께 쓰는 활쏘기 시합을 기록한 의궤 : 「대사례의궤」 

          

                

   활과 우리 민족의 인연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이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동이(東夷)라는 말의 '이(夷)'자는 활 궁(弓)이 포함된 글자로서 '동쪽의 활 잘쏘는 민족'의 뜻을 내포하였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오래전에 주변국으로부터 활쏘기에 능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이 활쏘기에 뛰어났던 사실이나 고구려 벽화에 기마 자세를 하면서도 뒤돌아 활을 쏘는 무사들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뛰어난 활쏘기 솜씨는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중국의 창, 일본의 칼과 견줄 우수한 무기로 활을 들고 있는데 이 기록도 우리 민족과 활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만을 시험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주례』에는 활쏘기(射)가 예(禮), 악(樂), 어(御), 서(書), 수(數) 등과 함께 육례(六禮)의 하나로 중시되었으며, 『논어』, 『맹자』, 『예기』 등의 유교경전에는 '사(射)'가 무엇보다 심신의 수양을 가져오는 행위로서 중시하였다. 또 활쏘기는 왕권의 강화나 국방강화를 위한 기본적인 덕목의 하나였으며, 이러한 취지에서 국왕이 문무관리들과 정기적으로 활쏘기를 하는 행사가 베풀어졌다. 국왕이 참석하여 신하들과 함께 하는 활쏘기 회동이 곧 대사례이며, 『대사례의궤』는 대사례의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1)대사례 실시의 의미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군신간의 예를 확인하는 행사로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서 대사례가 시행되었던 것은 1477년(성종 8), 1502년(연산군 8), 1534년(중종 29), 1743(영조 19) 등 4차례로 확인된다. 그러나 대사례 외에 어사(御射) 시사(試射)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 실시되는 향사례(鄕射禮)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사례(射禮)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은 기록화에서도 확인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8폭의 병풍으로 담은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 중에는 정조가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인 모습을 담은 득중정 어사도(御射圖)가 남아 있어서 국가의 주요한 잔치에 활쏘기가 빠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득중정어사도, 화성행궁)

   성종대에 대사례를 실시한 이유는 무엇보다 왕권의 과시와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대사례의 실시에 앞서 내린 하교에서 성종은 대사례의 전통이 말세가 된 이후 끊겼으나 국가가 여러해 동안 편안한 이때에 다시 대사례를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면서 대사례를 실시하고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줄 것을 신하들에게 호소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성종대는 조선전기 정치제도가 정비되어 사회가 안정되어가던 때로 성종은 대사례의 실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자신의 시대가 성세(盛世)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종이 대사례가 갖는 군사적 의미를 강조하였던 것은 대사례가 실시되기 직전인 7월부터 변경지방의 방비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등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성종은 백성들과 성세의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 향사례와 향음주례도 실시할 것을 지시하고 있어, 대사례를 단지 왕실의 행사가 아닌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적인 차원의 것으로 확대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대 실시된 대사례는 대사례의 전형이 되어 이후에 시행되는 대사례도 그 기본성격은 성종대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중종은 즉위 후 여러차례 대사례를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행하지 못하였다. 반정으로 즉위하고 기묘사화를 거쳤던 중종으로서는 민심수습책으로 대사례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의 필요성을 느끼고, 결국 중종 29년 8월에 이르러서야 그 시행을 보게 되었다. 중종은 특히 기묘사화로 인한 부담감을 많이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중종은 연산군대에 실시되었던 대사례가 군신의 연회로 끝났음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면서 유생들에 대한 공궤(供饋:국왕이 음식을 내려줌)를 매우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종대에는 6,229명의 유생들이 공궤를 받았다.

   영조대의 대사례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국왕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초부터 표방되었던 왕권강화를 위한 탕평책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특히 1740년(영조 16) 노론 4대신이 복관되면서 노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어 영조의 탕평정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200여 년만에 대사례를 다시 실시토록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대사례의 실시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직접 예전의 규례를 살펴보면서 대사례를 시행토록 한 점이나, 원래 대사(大射)는 천자의 예이지만 제후에게도 대사례가 있었다는 이유로 그대로 '대사례'로 부르게 하였던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조는 대사례가 시행되는 날 200년만에 조종의 구례를 회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자신의 나이가 50세가 되었을 때 이 행사가 열리게 되는 것을 매우 감격해 하였다. 또한 200년만에 맞는 대사례를 기념하기 위하여 각도의 관찰사 및 수령들에게 전국의 인재를 두루 뽑아 시상할 것을 거듭 명하였으며, 특별히 이 행사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영조대에 실시한 대사례 모습은 기록과 그림으로 남겨져 현재의 우리들은 이 행사가 구체적으로 전개된 장면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대사례가 갖는 왕권강화의 성격은 영조대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정조는 화성행차시에 득중정에서 직접 활쏘기 시범을 보였으며, 순조의 경우 대사례를 실시할 여유를 갖지는 못했지만 문무신들과의 각종 활쏘기 모임을 통하여 국정을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대사례는 조선사회에서 왕권강화라든가 민심수습 또는 군사적 필요 등에서 시행되었으며, 군신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정의 방향을 정하는 의미도 포함된 행사였다. 대사례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장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사례의궤』를 통하여 1743년 대사례가 열렸던 성균관으로 가 본다. 

          

2)「대사례의궤」의 주요내용

  『대사례의궤』는 1743년(영조 19) 윤 4월 7일 성균관에서 대사례를 행한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사례의궤』는 총 5건이 만들어졌다. 어람용 1책을 비롯하여 의정부, 사고, 예조, 그리고 대사례 실시 장소인 성균관에 1책이 보관되었다.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것은 국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행차하여 유생들을 격려하고 이들에게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그만큼 국가에서 거는 기대도 컸다. 성균관 유생들이 전부 국가로부터 장학금과 각종의 물품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던 것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를 이곳에서 열었던 것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대사례와 함께 왕세자 입학례와 같은 의식도 성균관에서 열렸는데 국왕이나 왕세자가 주인공이 되는 이러한 행사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은 틈림이 없다. 

          

                

   영조는 1743년 윤4월 7일 원유관과 강사포16)차림으로 창덕궁 영화당(暎花堂)17)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집춘문18)을 통해 궁궐을 나왔다. 당시 국왕을 경호하던 병력의 배치 및 담당 임무, 도로 사정 등은 아래와 같은데 아래의 기록을 통하여 막강한 권력의 상징인 국왕 행차시의 경호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궁궐을 나온 영조는 창덕궁과 연결된 성균관의 하련대(下輦臺)에 이르러 가마를 내렸으며 임시 숙소인 악차(幄次)에 들어가서 제복(祭服)인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은 후 성균관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대사례를 행하기 전 선현들을 참배하는 의식을 행한 셈이다.

   악차로 돌아온 영조는 익선관과 곤룡포19)차림으로 성균관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이곳에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과 유생들을 격려한 후 본 행사인 대사례 의식을 행하였다. 대사례를 마친 후에는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포상하는 시사(試士)가 뒤따랐는데,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격려하고 '희우관덕(喜雨觀德)'을 시제로 주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자 '희우'로 그 기쁨을 표시하고 유교 경전에 나오는 '관덕'이란 말을 시제로 삼은 것이다. 유교경전(예기)에는 '예로부터 활쏘기(射)는 덕을 보는 것(觀德)이며 덕은 그 마음에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활쏘기하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라 하여 활쏘기의 목적은 마음의 수양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관덕'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 영조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활쏘기가 함축하고 있는 '관덕'을 시제로 하여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인 것이다. 



   예로부터 활쏘기가 수양과 예의 회복에 비중을 두고 있었음은 다음의 자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 사(射)는 진퇴와 주선이 예에 맞고, 안으로 뜻이 곧고 밖으로 몸이 바른 연후에 궁시를 심고하게 잡아야 한다. 궁시가 심고한 연후에야 적중시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이로써 덕행을 볼 수 있다.
( 『예기』 제 46편 사의(射儀) )

나. 어질다는 것은 활쏘는 것과 같다. 활쏘는 것은 자신을 바로잡은 후에 발하는 것이다
( 『孟子』 공손추 상)

다.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는데 활쏘기보다 큰 것이 없다. 활쏘기를 반드시 학교에서 익히게 한 것은 그것으로 하여금 사람의 착함을 알아내고 선비의 재질을 가려 뽑아 교화 가운데서 함양되게 한 것이니 어찌 과녁 맞히기를 주로 하여 힘만 숭상할 뿐이겠는가' (『연산군일기』 8년 3월 2일)

   이처럼 활쏘기는 에로부터 사람의 품성을 바로잡는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그럼 대사레는 영조에게 어떠한 의미로 담아왔을까? 탕평정치의 완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의 교화에 진력하던 군주 영조에게 있어서 대사례는 단순한 활쏘기 행사가 아니었다. 대사례를 통해 관리들의 정신자세와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국왕의 교화가 만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함축되어 있는 바로 그러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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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遠遊冠과 絳紗袍 : 國王의 朝服. 朔望, 朝降, 詔降, 進表, 朝見 등에 착용함. 遠遊冠을 머리에 쓰므로 원유관포, 원유관복이라고도 함. 그림 참조.
17)暎花堂 : 昌德宮 부용지 동편에 있는 건물.
18)창경궁 동북쪽의 문. 성균관에 가장 가까워서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는 주로 이 문을 사용하였다.
19)翼善冠과 袞龍袍 : 翼善冠은 왕과 세자의 시무복인 곤룡포에 쓰던 관.(붉은 색) 袞龍袍는 왕이 집무시에 입던 正服으로 가슴과 등, 양 어깨에 용의 무늬를 금으로 수놓은 圓補를 붙힌 옷으로 '龍袍', '御袞' 등으로도 불린다. 세종 26년(1444년) 이후 착용함. 

          

3)도해(圖解)에 나타난 대사례절차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 부분에 그려진 세 장면의 그림을 통하여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세 장면의 그림은 왕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도(御射圖), 신하들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시사도(侍射圖)」,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로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행사의 모습이 각각 4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각각의 그림을 보면서 대사례가 열렸던 현장 상황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① 어사례도(御射禮圖): (자료:대사례의궤 도설)
   먼저 「어사례도」를 보면 악차(幄次)에는 세개의 단을 설치한 것이 보인다. 제 1단은 국왕의 자리, 2단은 순 자주빛의 용문석(龍文席)을 깔아놓은 어사위(御射位),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 단의 동쪽에는 3개의 탁자가 놓였다. 제 1탁에는 국왕의 깍지와 팔찌를 담고, 제 2탁에는 어궁(御弓)을, 제 3탁에는 어시(御矢)를 담았는데, 탁과 함은 모두 붉은 색이었다. 동서 계단 아래에는 탁자 2개를 두었다. 동쪽 탁자에는 상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를 놓았으며, 서쪽 탁자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놓았다. 하연대에 바닥을 높여 사단(射壇)을 만들고 9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운 다음 후단을 쌓았다. 임시로 설치한 어좌 앞으로는 문무의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악차는 차일과 휘장으로 사방을 막아 국왕을 엄호하였다.
뜰의 동서에는 홍살문을 설치하여 대사례 의식의 신성함과 위엄을 더하게 하였으며, 홍살문 앞에는 헌가(軒架:악대)20)를 두어 행사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홍살문 너머에는 과녁을 설치하였다. 어사에 사용된 과녁인 웅후(熊候)는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표적으로 그리고, 붉은 대나무와 붉은 줄을 사용하여 후단 위에 설치하였다. 원래 천자의 과녁으로는 호랑이 모양을 그려넣은 '호후(虎候)'를, 제후의 과녁으로는 웅후를 사용하였는데, 당시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왕의 과녁을 웅후로 삼은 것이다.

* 참고: 웅후의 크기와 재료
크기: 장 광 각 18 예기척(禮器尺)
모양: 홍칠포를 사용하고 백피를 가운데 대며, 3정(正)을 만든다.
재료: 마사(麻絲) 1냥, 회우피(灰牛皮): 1장 광 각 6척, 당주홍(唐朱紅) 4냥, 진분(眞粉) 4냥, 하엽(荷葉) 4냥(畵 3正 소입), 당주홍 1전, 진분 5전, 소연목(小椽木) 4개, 숙마조(熟麻條) 30파(把), 생저(生苧) 2전, 오승포(五升布) 175척

  과녁은 어좌에서 남쪽으로 90보(步) 거리에 설치하였으며, 웅후로부터 동·서 각 10보 되는 지점에는 핍(乏:화살가림)21)을 설치하고 핍 안에는 좌측에 7명, 우측에 6명의 획자(獲者)를 배치하였다. 웅후와 핍은 훈련원에서 규격에 맞게 설치하였다. 훈련원 정(正)은 북 앞에 섰으며, 훈련원 정 뒤에는 국왕이 쏜 화살을 처리하는 어사취시관(御射取矢官)이 배치되었다. 이외에도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자줏빛 두건과 옷을 갖춘 위사(衛士) 30인의 핍 전후에 배치되어 국왕에 대해 엄중한 국왕 경호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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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헌가는 대례(大禮), 대제(大祭) 등에 사용하는 음악으로 종, 경(磬), 고(鼓)를 주로 사용하였다.
21)화살을 쏠 때 화살이 맞고 안맞는 것을 알리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으로 만든 물건 


          

              

② 시사례도(侍射禮圖) (자료:대사례의궤 도설) 
  「시사례도」는 시사자가 두명씩 짝을 지어 활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사례도」와의 차이점은 과녁이 푸른색의 미후(麋侯:사슴머리)로 바뀐 점이다. 핍 뒤에 서 있던 획자들은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적색, 상변에 맞히면 황색, 하변에 맞히면 흑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우측에 맞히면 백색의 깃발을 올렸다.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채색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동쪽 핍 앞에는 북을, 서쪽 핍 앞에는 금(金)을 두고, 화살이 적중하면 북을 치고 그렇지 못하면 금을 쳤다. 아래쪽에는 어사례 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자들이 절을 할 때와 활을 쏠 때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헌현(軒懸)들이 위치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사자는 종2품 이상의 의빈과 종친 10명, 정1품 이하의 문신 10명, 정3품 이상의 무신 10명 등 총 30명이 참여하였다. 문신과 무신, 종친을 두루 망라한 셈이다. 이들 중 정3품 당상관 이상인 경우에는 사단 위에서, 정3품 당하관 이하인 경우에는 사단 아래에서 활쏘기를 했다. 직책에 따라 24명은 단상에서 6명은 단하에서 활을 쏘았는데, 『대사례의궤』에는 활을 잡은 손과 과녁에 맞힌 여부도 기록하고 있다. 전체 30명 중 왼손잡이가 12명(40%)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채롭다. 이처럼 실명(實名)과 함께 적중 여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평소에 활쏘기를 연마하라는 뜻도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③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
  「시사관상벌도」는 시사를 마친후 시상하고 벌주는 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병조정랑이 관직과 성명을 부르면 해당자는 국왕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상물(賞物) 중 표리(表裏)는 군기시(軍器寺)에서, 궁시(弓矢)는 제용감에서 각각 준비하였으며, 벌주는 내자시(內資寺)에서 준비하였다.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표리와 궁시를 상으로 받았으며,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주를 마셨다. 담당관원이 동쪽 계단에 이르러 국왕께 맞춘자의 관직과 성명을 크게 아뢰는데, 맞춘자들은 동쪽 계단 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서고, 맞추지 못한 자들은 서쪽 계단에서 동쪽을 향하여 섰다. 풍악이 울리면 국왕께 사배한 후 시상을 받았다. 네발을 맞히면 표리(表裏)와 탑견(搭肩)을, 세발은 리(裏)와 탑견, 두발은 궁시와 진요(搢腰), 한발은 궁과 진요를 상으로 받았다.
한편 맞추지 못한 자는 벌주를 마셨다. 예관이 해(解)로 술을 떠서 굽혀 풍(豊)에 두면, 맞추지 못한 자가 풍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고, 왼손으로는 부린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해를 잡고 서서 마셨다. 비록 맞추지 못했더라도 술을 마시는 작은 벌칙만 둠으로써 행사 자체를 축제의 분위기로 이끌어나가려는 배려가 엿보인다.

   대부분의 의궤에는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반차도로 표시한데 비하여 『대사례의궤』에 그려진 그림들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행사의 모습을 모두가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와도 유사하다 「준천시사열무도」는 영조대에 청계천 공사를 완성하고 유공자들을 치하한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영조대에는 국왕 주도의 국가적 사업이 빈번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대부터 활성화 된 기록화의 흐름은 정조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정조대에 화성 행차의 모습을 여덟폭의 병풍으로 담아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기록화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4)대사례이후의 행사

   대사례는 활쏘기 행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국왕의 활쏘기와 신하들의 시사(侍射)가 끝난 다음, 행사의 실무자인 인의(仁義)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여 나가고, 무시관(武試官)이 과거 응시자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배위(拜位)에 나아가 국왕에게 인사를 시켰다. 무과 응시자들은 세명씩 짝하여 쏘았는데, 김복규 등 60人이 뽑혔다. 이어 문시관(文試官)이 초고(初考)에서 합격한 약간명을 뽑아서 전시(殿試)에 참여시켰고 전시에서는 한광조 등 6人을 뽑았다. 『대사례의궤』의 기록에는 시관 및 유생들을 위하여 구급약을 준비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모습도 보이며, 문무급제자들의 관대(冠帶)와 기마(騎馬), 어사화(御賜花) 등의 준비를 지시한 내용들도 흥미를 끈다. 문무 합격자가 뽑히면 관례에 따라 방방(放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마무리 되었으며, 영조는 연을 타고 돈화문을 거쳐 환궁하였다. 영조는 대사례가 끝난 후 병조판서와 동부승지에게 특별히 명하여 성균관에 물력옥자(物力屋子) 3칸을 만들어 행사에 사용된 제 용구들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으로 하여금 대사례의 시행과정을 적은 『대사례기』를 찬진하여 성균관 명륜당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행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행사 기록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랐다. 영조의 이러한 바람은 결국 『대사례의궤』의 편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1)왕실축제의 역사적 의미 - 왕실의 태(胎)를 봉안하고 중수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 태실(胎室)관련 의궤

  왕실 축제의식을 대표적으로 정리한 자료로는 『국조오례의』와 함께 궁중기록화, 의궤 등이 있다. 이 중 의궤는 최근까지 주목받지 못했다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 1책을 국내로 가져오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이후 의궤 연구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고조되었고 무엇보다 베일에 싸여 있었던 왕실 행사의 다양한 면모들이 기록과 함께 기림으로 수록된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인식되었다. 무엇보다 의궤에 정리된 치밀한 왕실 의식과 입체적인 시각 자료는 당대 모습을 현장 속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의궤에는 이처럼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가 담겨져 있으며, 그 속에는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아간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다. 이 행사의 주인공이었던 영조와 정순왕후를 비롯하여 행사를 주관하고 준비했던 실무자들, 행사 물품을 정성껏 준비했던 화원과 장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축제의 행사에 참여했을 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외에 의궤의 기록에는 결혼과 같은 왕실 축제 행사에 인원과 물품을 동원하는 과정이라든가 행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려는 모습, 사관이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를 철저하게 기록하려는 모습 등 선조들의 문화와 사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795년(정조 20) 정조의 화성행차를 담은『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와 『수원능행도』와 같은 기록화에는 왕실 축제에 인근의 백성이 참여하여 한껏 축제분위기를 돋구어 나간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당시 백성들이 축제의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결혼이나 국왕의 행차, 왕실 잔치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왕실문화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당시에 축제의 분위기를 고양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당대의 문화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왕실축제에 나타난 선조들의 전통문화의 장점과 우수성을 살려 현대에 재음미해 나가는 작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고취시켜 나가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화의 구호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요즈음에도 전통과 기록문화를 중시했던 선조들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지혜를 우리는 왕실의 축제 의식을 표현한 여러 자료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이러한 뛰어난 전통 유산을 보다 적극적이고 알기 쉬운 방법으로 다양하게 소개하고 홍보하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 특히 의궤 등에 기록된 시각 자료는 식물이나 광물에서 채취한 천연 물감으로 그려져 있어서 우리의 전통 색채의 멋을 찾는데도 매우 유용하다. 이에 대한 색채 개발은 왕실 축제의 원형을 보존하고 왕실 축제의 멋을 보다 고양시켜줄 것으로 기대된다.

의궤와 같이 최근까지 묻혀져있던 전통문화의 진수들을 찾아 현대적으로 재개발하고 이를 후손들에게까지 전달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다양한 측면들과 그 우수성을 확인시켜 나가는 작업은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우리의 과제와도 부합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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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혜, 2000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 일지사
임미선, 2000 『1795년 화성에서의 진찬과 양로연,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사
김종수, 2000 『장서각 소장 조선시대 宮中宴享樂 문헌』 『장서각』 창간호
성경린, 1995 『한국전통무용』 일지사
이태호, 1996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학고재
김지영, 1994 『18세기 화원의 활동과 화원화의 변화』 『한국사론』
조선미, 1983 『한국의 초상화』 열화당
신병주, 2003 『영조대의 대사례 실시와 『대사례의궤』』 『한국학보』
김용숙, 1987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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