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색당파의 이해
사색당파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 자리 때문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1591년(선조 24년) 임란 후 세자책봉 문제로 물러난 서인 영수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1599년(선조 32년)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남이공(南以恭)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1683년(숙종 9년) 서인은 숙종의 외척(광산김씨 김익훈)에 대한 처분을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1762년(영조 38년) 노론은 사도세자 문제 때문에 다시 ‘시파’와 ‘벽파’로 갈렸다
1804년(순조5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벽파 경주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김귀주(金龜柱)의 형제)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을 축출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전개된다
벌열 가문(閥閱家門)
벌열이란,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랜 동안 세력을 누리며 지체를 유지해 온 가문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벌열은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을 오로지하며, 특히 왕실과의 통혼 관계 속에서 세도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벌열 가문은 학벌, 인맥, 지연 등에 의해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정쟁이 치열해지고, 마침내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구되면서 그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벌열 가문으로는
숙종 때의 청풍 김씨, 광산 김씨, 여흥 민씨,
영조 때의 남양 홍씨, 경주 김씨,
세도 정치기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그리고 고종 때의 여흥 민씨 등의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흐름도
<서인>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정릉)에 있었고, 김효원(金孝元)의 집은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인현동)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지지자들을 서인과 동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초기 서인의 구성원은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구사맹(具思孟)·홍성민(洪聖民)·신응시(辛應時)·성혼(成渾)·조헌(趙憲)·남언경(南彦經)·이귀(李貴) 등이었다. 특히 이이와 성혼의 제자는 이후에도 서인의 주요학맥이 되었다.
서인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중앙정계에서 활약해온 명문가문 출신과 기호지방 사림출신들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 지역에 든든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은 조선 후기 중앙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서, 세력이 위축·실각했을 때는 있으나 완전히 축출된 적은 없었고 정계에서 항상 일정한 기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도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때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거치면서 왕권의 지나친 비대화나 외척의 일방적 성장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윤원형을 제거한 뒤에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을사 사화 희생자들의 신원을 주장하고, 경상도·전라도 사림의 등용을 주선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토지문제를 위시한 국정혁신 정책에 대해서는 동인보다 소극적인 편이었다.
1588년(선조 21)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의 동인에 대한 탄압은 서인·동인 간의 대립을 굳히고 동인을 남인·북인으로 분리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591년 정철이 세자책봉 건의로 노여움을 사게 되어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진출했다(建儲議事件). 그러나 서인 실각의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등극이었다.
서인은 선조 때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군제 붕괴와 초반 패전에 책임이 있었다. 물론 전쟁 중에 대명외교를 성공시켜 명나라의 원조를 얻어냈고, 의병활동에서 조헌·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의 활약이 있었으나 전반적인 공로는 남인과 북인이 앞섰다.
또한 서인은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으므로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광해군 때 서인은 비교적 중도적 입장을 유지했던 이항복(李恒福)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광해군 후반기에 대북정권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위와 서양갑(徐洋甲) 사건(七庶事件)을 빌미로 일어난 계축옥사로 서인은 일대 위기를 맞았으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킴으로써 위치가 공고해졌다.
인조반정 뒤 서인은 소수의 남인과 소북(小北)·중북(中北) 일부를 등용하는 한편, 광산김씨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을 주축으로 한 기호사림을 포섭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이후 서인의 내부에 여러 번 당(黨)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분당이라기보다는 유력인물을 중심으로 한 계파(系派)로서 김유(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심명세(沈明世)·구굉(具宏) 등 공신·외척 세력을 포함한 훈신세력과 사림인사로 구분된다.
인조 초기에는 반정공신 세력인 훈서(勳西:또는 功西)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김상헌(金尙憲)의 청서(淸西)로 구분되었다.
훈서는 다시 김유를 중심으로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의 노서(老西)와 이귀·장유·나만갑(羅萬甲)의 소서(少西)로 나누어진다. 이는 남인인사를 등용하는 문제로 갈라진 것인데, 각 당파의 인물을 어떻게 등용할 것이냐를 놓고 이외에도 여러 번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에는 반정공신계보다 사림계인 김상헌·김장생 등이 더욱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인조 후반에 김집·송시열 등이 중용되면서 서인정권은 최후의 공신계열인 원두표의 원당(原黨), 김자점의 낙당(洛黨), 김육(金堉)·신면(申冕)의 한당(漢黨), 사림계인 산당(山黨)으로 구분되었다.
한당과 산당은 김육·김집이 대동법 시행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발생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촉구한 김육의 집이 한강 이북에 있고, 산당은 연산(連山)·회덕(懷德) 지역의 사림들이므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효종 때 광산김씨 김집이 이조판서가 되어 송시열·윤선거·이유태(李惟泰)를 천거한 것을 계기로 서인 내부의 사림은 세력을 확충하여 송시열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외에도 이때의 주요인물로 김수흥(金壽興)·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민유중(閔維重)·민정중(閔鼎重)·김만중(金萬重)·윤선도(尹善道)·남구만(南九萬) 등이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자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여, 주자의 명분론에 기초한 신분제와 지주전호제의 안정을 기축으로 한 사회재건을 추구했다.
동시에 주자도통계승운동과 율곡의 문묘종사운동을 일으켜 주자·율곡(기호학파)으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학문적 계보와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하여 당시 최대의 정적이었던 남인에 대항하는 한편, 일부 진보적 학자들에게 도입된 반주자학적 경향과 토지개혁론에 대처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신들의 국정주도를 강조하며 왕실의 비대와 척신정치(戚臣政治)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서인 내부에서 훈서·한당 계열 인물과 산당 송시열계의 대립이 깊어졌다.
결국 현종 때 예제논쟁을 시발로 척신인 김석주(金錫胄)와 윤휴(尹鑴)·허적(許積)을 대표로 하는 남인이 연합하여 정계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인도 개혁론과 다른 당파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노론·소론으로 분리되었다. 인맥과 정책으로 보면 서인의 주류는 노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숙종~경종 때의 정국은 출척(黜斥)과 환국(換局)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론은 숙종 때 송시열이 사형당하고, 소론의 지지를 받는 경종이 즉위하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위기를 겪지만 영조 즉위와 함께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노론>
분당의 계기는 1680년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과 허적의 서자 견(堅)의 역모사건으로 남인이 대거숙청된 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비롯되었다.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반대한 소장파 한태동(韓泰東) 등은 김익훈을 탄핵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노장파는 김익훈에 대한 탄핵상소에 반박하면서 소장파와 대립하였다.
특히 노장파의 거두였던 송시열이 그의 문인인 윤증(尹拯)과 개인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분파작용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를 노론이라 부른다. 노론에 속하는 당인(黨人)들은 본래 예학(禮學)의 태두였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들이었으며, 청렴과 의리를 중시했던 산림(山林) 사림들의 정치집단이었던 산당(山黨)에 속하는 서인들이었다.
노소분열 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은 약 10년간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1689년 희빈 장씨 소생, 왕자 윤(昀)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송시열·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이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기사환국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부활하여 숙종 말 이래의 정국은 노·소론의 정쟁(政爭)이 중심을 이루었다.
경종·영조 때에는 노·소론의 당세(黨勢)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상을 띠기도 하였다.
특히 경종·영조 때의 노론의 당세는 노론 출신의 4대신이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 때의 4대신으로는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이이명(李命)·조태채(趙泰采) 등이 꼽히고, 영조 때의 4대신은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정호(鄭澔)·홍치중(洪致中)이다.
나중에 노론은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사건(賜死事件)으로
다시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로 나누어졌다.
벽파(영조/순조)는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당파이다
시파(정조)는 세자의 불행한 죽음에 동정하는 당파이며,
영조말에는 주로 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조 때에는 시파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계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자,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을 계기로 노론 가운데서 시파와 소론·남인 등이 몰락하게 되고,
그후에는 노론 벽파의 독주시대가 계속되었다
<소론>
서인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숙종 즉위초에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패하여 남인에게 밀렸다가 1680년(숙종 6)의 경신대출척 (庚申大黜陟)을 계기로 정권을 회복했다.
당시 숙종의 외척으로서 남인정권 때부터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김익훈(金益勳) 등이 경신대출척의 과정에서 원훈(元勳) 1등공신이 되어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계에 재등장한 서인들은 훈척의 정치참여에 대한 입장에 따라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타협세력에는 주로 노성한 인물이 많았고, 비판세력에는 신진사류가 많았다.
그뒤 김석주·김익훈 등이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남인 유생인 허새(許璽)가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게 하여 남인의 잔당세력을 제거했다. 이때 소장파인 한태동(韓泰東) 등이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는 김익훈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송시열(宋時烈)이 김익훈을 두둔하고, 박세채가 소장파를 후원했다. 이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각기 하나의 당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는데, 소론은 한태동·박세채 중심의 소장파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처벌에 강경파가 노론이었던 데 비해 신진사류들로 구성된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尹拯) 사이에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불리는 불화가 있었는데, 윤증이 소론에 속함으로써 명분의 시비를 빌미로 분파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
그런데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 (己巳換局)을 계기로 소론은 노론과 함께 정치일선에서 남인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뒤 1694년 갑술옥사 (甲戌獄事)를 계기로 노론·소론이 정계에 재등장했는데, 이때 남인출척문제와 장희빈 처리문제에 있어서 소론은 세자(뒤의 경종)를 보아서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온건론을 폄으로써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노론과 다시 충돌했다.
이후 1715년에 일어난 가례원류시말사건으로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치열했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소론 편을 들었다가 이듬해인 병신년에 노론 편을 들어 소론이 일시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717년부터는 세자인 경종이 대리청정(代理廳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과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그러다가 경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경종이 후사를 갖지 못하자 1721년(경종 1) 8월에 노론대신들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자고 주장한 데 이어 경종의 신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제의했다. 소론은 왕세제의 청정에 대해 반대하여 노론측과 격렬한 분쟁을 일으켰고, 이 기회에 소론인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한배하(韓配夏)·심수현(沈壽賢) 등이 소를 올려 대리를 추진한 노론을 공격했다.
또한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이 대리청정을 추진한 노론 4대신은 왕을 군부로 대접하지 않는 역신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 이를 빌미로 결국 소론은 노론을 차례로 파직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1722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모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소론은 노론 4대신을 위시한 60여 명의 노론이 처벌되었던 신임사화(辛任士禍)를 계기로 소론은 집권했다.
이때 소론4대신은 유봉휘·이광좌·조태구·최석항이다.
이때 소론 내에서도 노론치죄함에 있어서 강경파인 준소(峻小)와 주모자만 처형하자는 온건파인 완소(緩少), 또한 왕세제의 보호를 표방하던 청류(淸流) 등으로 분열되었다.
그뒤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함으로써 소론은 노론에게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은 남인과 연합, 이인좌를 중심으로 무장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에서도 강경파였던 준론(峻論)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이인좌의 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영조는 왕권마저 위협당하자 탕평책 으로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고자 했지만, 소론에게는 상황이 불리했다. 영조는 이광좌나 조태억을 대신으로 임명해, 그들이 목호룡의 역모사건의 조작자로 발각된 김일경 등의 준소 일파를 단제하게 했다. 이는 노소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탕평책을 통해 소론의 불만을 달래가면서 노론의 공세를 유도해 준소를 제거하고 여타의 소론을 불안하게해 점차 노론세력의 대두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비록 준·소의 구별이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소론자체의 명분이 약화되었고, 정계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벽파>
붕당간의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조는 이를 지지하는 노론계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의 형제인 김귀주(金龜柱)를 중심으로 결집한 이들은 남당(南黨)으로 불린 척신당을 형성했다. 한편 죽은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손(뒤의 정조)의 보필을 맡게 된 홍봉한(洪鳳漢) 일파는 북당(北黨)으로, 남당과 대립하며 또다른 척신당을 이루었다.
당시의 양당은 1762년(영조 38)의 사도세자사건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정치관에 있어 영조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노론 척신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노론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사도세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었으므로 당시 노론 대신의 처신도 큰 잘못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한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남인은 사도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한 죄는 되지 않았는데 정국의 전권을 장악했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정파의 분립으로 구체화된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정조는 즉위 후 왕권확립을 위해 의리와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峻論)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 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했다. 아울러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자신의 친위학자군으로 삼았다.
1788년(정조 12)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비노론계가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고, 1792년(정조 16)에는 영남 남인들이 사도세자사건의 명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론 집권층은 왕권강화정책에 의해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는데다가 사도세자 문제가 재론됨으로써 정치적 정통성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자 강경파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사건과 관련된 기왕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이들이 벽파를 형성했다.
벽파의 주류는 역시 노론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심환지(沈煥之)였다. 그는 신임의리(辛壬義理)의 고수를 표방하고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성토에 앞장섰으며, 소론계의 서명선(徐命善)도 공격하여 벽파의 선봉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여기에는 일부 타(他)당파의 인물도 참여했지만 이들의 참여는 개인적 차원의 것이었을 뿐 소속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벽파와는 반대로 우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타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부의 노론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하여 벽파에 의해 시파로 불렸다.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구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의 즉위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자파의 김관주(金觀柱) 등을 조정에 진출시키는 한편, 벽파의 정국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세력을 비롯한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追崇)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했다.
또한 1801년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했으며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세력인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했다.
그러나 1804년(순조 4)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은 김조순이 주도하는 시파의 반격을 받았다. 김달순(金達淳)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는 등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완전히 패배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가 실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왕권이 유약해지면서 왕권문제를 초점으로 하여 발생한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파·벽파의 분파는 끝났고, 이후 정국은 극소수의 노론 중 이름있는 외척가문 중심으로 전권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김조순이 딸을 왕비로 책립하여 국구(國舅)의 위치에 올라 정국의 주도권을 서서히 잡아가고 있었는데, 그는 정조 때 발탁되어 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시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김조순은 자신의 일족이면서도 벽파였던 김달순(金達淳)을 사사하고 김관주를 유배시키는 등 다수의 벽파를 축출했다.
시파는 마침내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시파와 벽파의 분쟁은 끝이 나고 전개되기 시작했다.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 벽파
<동인>
김효원을 지지하던 다수의 후배사류들은 동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인은 처음부터 서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모였기 때문에 그 구성원의 성분, 학문적 전통, 정치인식, 사회경제적 기반이 매우 다양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상좌도에 기반이 있던 유성룡(柳成龍)·김명원(金命元)·김성일(金誠一)·우성전(禹性傳)·이경중(李敬中)·한준겸(韓浚謙)·정경세(鄭經世),
조식(曺植)의 문인으로서 경상우도에 기반이 있던 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산해(李山海)·이발(李潑),
이황과 조식의 양쪽 문하에 드나들던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김효원,
그리고 이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거나 인척 관계에 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허엽(許曄)·홍진(洪進)·정여립(鄭汝立)·홍여순(洪汝諄)·송응개(宋應漑)·정지연(鄭芝衍)·유영경(柳永慶) 등이었다.
이들은 척신정치의 잔재 청산에 강경한 입장이었고, 정국 운영에 있어서 비교적 원칙론에 철저하고자 했다.
이들의 정치의식을 보면 이황 문인들을 중심으로 후에 남인(南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으로 다른 붕당의 존재에 긍정적이었고, 이들 사이의 시비·정사의 분별을 엄히 하기보다는 조정의 진정을 위한 상호 협력을 더 중시했다.
반면에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후에 북인(北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원칙론적 입장을 중시하여 엄정한 시비의 분별을 내세우고 중도적인 입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정여립이나 정개청과 같이 성리학적인 정치의식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동인이 서인에 반대한다는 입장에서는 공동보조를 취했지만, 위와 같이 그 구성원의 성격이 다양했기 때문에 일단 정국의 주도권을 쥐자 정치적인 입장이나 현실 인식에 차이가 생겼다.
결국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이후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동인은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이후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되었고,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골북(骨北)·육북(肉北)·중북(中北) 등 다양하게 분리되어 붕당으로서의 동인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동인은 선조 말년에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남인은 이황(李滉)과 유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 사람이었고,
북인은 중앙에서 이산해(李山海)와 이발(李潑), 지방에서 조식(趙植)의 문인인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사림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북분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이들은 동인시절부터 현실인식과 대서인(對西人) 정책의 강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남인계가 온건파라면,
북인계는 서인의 영수인 정철의 효수(梟首)를 주장했을 정도로 서인 비난의 강도가 높았다.
서인의 반격이었던 기축옥사(己丑獄事)에서는 북인계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북인의 서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 굳어졌으며 남북인의 분열이 확고해졌다.
북인은 임진왜란과 광해군 즉위를 계기로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집권층인 서인과 남인은 임진왜란의 발발과 초반 패배에 책임이 있는 반면,
북인은 의병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전국 의병의 반이 경상우도의 병력이었으며, 정인홍·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은 실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를 기반으로 북인은 종전(終戰)과 함께 임진왜란중의 정책실패와 왜군과의 화의가 정유재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 유성룡의 남인정권을 퇴진시키고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경상우도 사림은 중앙정계에 큰 기반이 없었다.
이후의 북인정권은 서인이나 남인 중에서 비교적 당색이 약했던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을 정승으로 내세우고, 경상우도 사림과 유영경(柳永慶) 같은 왕의 척신(戚臣),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이이첨(李爾瞻)·홍여순(洪汝諄) 등과 같이 서인과 반목한 중앙의 여러 인물이 결합한 형태였다.
이런 사정으로 학적·지역적 순수성이 떨어지고 같은 북인이라도 배경과 현실인식이 달라 분열과 이합집산이 심했다.
1599년 경상우도 사림과 이산해의 문인, 홍여순계와 이이첨, 허균(許筠) 등이 연합한 대북과
남이공·김신국·유영경 계열의 소북으로 분열했다.
대북은 1600년에 홍여순의 권력확장을 두고 이산해와 홍여순이 대립했는데,
이산해계를 육북(肉北),
홍여순계를 골북(骨北)이라고 했다.
선조말에는 소북이 다시
남이공계의 청북(淸北 : 또는 南黨)과
유영경계의 탁북(濁北 : 또는 柳黨)으로 나뉘었다. 이때 탁북은 영창대군의 세자옹립을 지지하며 서인과 결합해 대북을 축출했으나
대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유영경을 처형하고,
청북과 유희분(柳希奮) 등 광해군의 척신세력과 연합하여 광해군 초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대북이 중심이 된 북인정권은 지지부진하던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는 등 전후복구 사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의 사회적 기반이 강고함에 따라 정책은 의도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정계에서 청요직(淸要職)과 이조판서, 전랑(銓郞) 등의 관직은 북인이 차지했으나 정승직과 비변사 대신은 끝까지 서인과 남인의 중도파 인사들이 장악했다. 이에 대북은 붕당의 폐해는 군자당과 소인당이 공존하는 데 있으므로, 붕당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소인당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먼저 유당(柳黨)과 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고 북인계에 치중한 인사를 계속 단행했다.
1611년(광해군 3)에 정인홍은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 상소를 올렸고 이어 조식의 시호추증과 문묘종사를 건의했다. 이런 과정에서 대북은 서인·남인뿐만 아니라 소북 및 이항복·이원익 등의 현임대신들과의 대립도 커졌다.
1613년 서양갑(徐洋甲) 등이 주동한 칠서사건 (七庶事件)이 발생하자 대북은 이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으로 확대하여 서인탄압의 계기로 삼았다. 이어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를 단행하고, 이항복 이하 당시까지 정계에 남아 있던 서인들을 제거했다.
이때 북인 내부에서도 유희분·유몽인(柳夢寅)·기자헌(奇自憲)·남이공·박승종(朴承宗) 등을 중심으로 폐모론의 반대파가 생겼는데, 이를 중북(中北)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기존의 소북계 인물과 함께 정온(鄭蘊)·이경전(李慶全)·문경호(文景浩) 등 정인홍의 문인들도 일부 가담했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대북정권은 몰락했다. 이후 북인은 철저히 위축되어 다시는 중앙정계에 등장하지 못했다.
<대북>
선조 초기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났고,
1591년(선조 24)에는 세자책립 문제로 해서 서인 정철(鄭澈)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동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인의 탄핵문제에 있어서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분립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집권하게 된 북인은 1599년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정랑 남이공(南以恭)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당했다.
즉 이산해(李山海)·홍여순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허균(許筠)·한찬남(韓纘男)·이명(李溟)·이성(李惺)·백대형(白大珩)·구의강(具義剛)·홍식(洪湜)·유몽인(柳夢寅) 등이 속했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에 영의정이 된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이 대립함으로써 이산해계는 육북(肉北), 홍여순계는 골북계(骨北係)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대북당은 선조말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함으로써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당과 분쟁을 벌였다.
1608년 선조가 죽고 왕세자인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대북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대북당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소북인을 몰아내라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려 대북인을 계속 등용케 함으로써 삼사(三司)의 관원마저 대북당인이나 대북당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했다.
그리고 이어서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이때 대북 중에서도 유몽인을 중심으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한 사람들은 중북(中北)으로 분파했다.
그리하여 광해군 즉위 10년 만에 서인은 물론이요 남인과 소북인마저도 야당으로 되었고 대북 중에서도 중북이 분파함으로써 대북집권의 정부는 고립되어갔다.
이에 1623년(광해군 15) 3월 서인이 대북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업고 반정을 일으킴으로써 대북은 제거당했다. 즉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이 살해되었으며 200여 명이 유배당함으로써 대북의 집권기는 끝이 났다.
유몽인 등 중북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끝내는 죽음을 당했다
<남인>
동인이 남인과 북인(北人)으로 나뉜 것은 서인 정철(鄭澈)의 세자책봉 문제제기로 동인 내부에서 생겨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에서 기인하였다.
분당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당시 집권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것은 집권당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현상이었다.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를 따른 일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을 따른 일파를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서울 남산 밑에 있었고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남인은 이이(李珥)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을 제외하고는 이황(李滉) 문하의 영남학파 출신이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은 북인과 갈린 이후 우성전·유성룡·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북인이 1602년(선조 35) 유성룡을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탄핵, 사직하게 한 뒤 정권에서 밀려났다.
서인을 중심으로 북인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반정 때,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자 남인과 서인 사이에는 유대가 성립되었다.
인조 때 당파세력은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과 연합하는 형세였고, 북인 중 소북(小北)의 일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조 때의 남인으로는 유성룡의 문인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당시 영의정 이원익과 이광정(李光庭)·이성구(李聖求)·이준(李埈)·장현광(張顯光)·정온(鄭蘊)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남인과 서인 사이의 유대관계는 점점 이완되어 서인과의 알력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성리학의 논쟁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서인 주기파(主氣派)와 남인 주리파(主理派)의 논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효종 이후 북벌 등을 내세워 정국을 주도하는 서인과 그를 비판하는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남인은 현종 때 효종의 상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쟁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바로 1659년(현종 즉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그뒤 다시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을 둘러싸고 다시 예송이 전개되었을 때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물러나게 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예송에서 남인의 주장은 대체로 왕실의 예와 사족의 예가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서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남인이 다시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를 탁남(濁南), 후자를 청남(淸南)이라 불렀다.
온건파 허적(許積)을 수령으로 하는 탁남에 대립하여 서인의 죄를 강력하게 추궁해서 문죄하자는 청남에는 허목(許穆)이 수령격이었다.
탁남을 중심으로 한 남인정권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군문을 확보하면서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정권을 잃은 뒤 서인(노론·소론)과 정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탁남과 청남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후 탕평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오광운(吳光運) 등 탕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단과 소극적인 집단으로 나뉘기도 하고,
정조년간에 채제공(蔡濟恭)이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경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남인집권기는 도래하지 않은 채 중앙정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남인들의 주장이 탕평책과 연결된 것은 그들의 붕당론에서 왕의 정치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과 연관된다.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기반을 유지하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실학자'들 가운데는 남인계가 많으며 18세기말에 천주학이 일부 남인계를 중심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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