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과 사색당파>

2017. 5. 9. 06:39우리 역사 바로알기



<붕당과 사색당파>|♡자유 게시판

장주호 | 조회 19 |추천 0 |2016.03.1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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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과 사색당파>



우리 선대들의 부끄러운 사색당파 싸움이 몽고군의 침략이 있어서 항복을 했고

그 뒤에도 정신 못 차리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임진 왜란이 있었고 이런 혼란 속에서

왜구는 차근 차근 전쟁준비를 해서 조선은 일사천리로 처들어 왔는데도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부끄럽게도 도성을 버리고 피난이라는 명분을 세워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치인들 어떤가요? 완전 6색당파입니다. 한술 더 뜨는 거죠.

이순신 장군이 다시 태어나시면 몰라도 나라가 어지러울 것 같습니다.


지금 아니 오늘도 북한은 무었을 하고 있나요?



<붕당과 사색당파>




   붕당이란 결론적으로 자신의 학문 성격이나 이념적 성격에 따라서 파가 갈리는 거죠.


지금의 정당정치와 비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물론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랑 조선의 정치는 다릅니다만) 개인적으로 조선이 망한 이유가 붕당정치 때문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색당파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싸잡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당파의 계보는 대략 이렇습니다.


서인=>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


영조 때 사도세자의 처형을 둘러싸고 벽파와 시파로 갈려 대립.(서인, 특히 노론이 사실상 조선 후기의 정치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동인=>1591년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


북인은 광해군 폐세자론을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은 몰살, 소북은 자연 소멸.


남인은 인조반정 당시 서인의 파트너로서 정권에 참여하여 서인과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공존하기도 했고,  숙종 이후로는

서인과 피비린내나게 싸웠습니다.  정쟁에서 패한 서인의 주요인물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청남과 탁남으로 갈리게 되는데

청남이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갑술환국(1693)에 의해서 정치주도권을 영원히 잃게 됩니다.


 

 



 



     


 

 

   주된 흐름은.......


동인VS서인: 당시 중요한 관직이었던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싸움, 그리고 선조의 외척이었던 기성세력인 심의겸에 대해서

진보적인 선비들이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면서 붕당이 생깁니다.)


남인VS북인(동인이 두갈래로 분당됨)VS서인: 1589년에 벌어진 기축옥사(정여립 반역 의혹 사건) 당시 정여립과 친했던 많은

동인계 인사들을 처벌한 서인의 주요인물인 송강 정철의 행동에 대해서 동인에서는 맞대응해야 한다는 쪽과, 정여립이 모반한

것은 사실이니 그냥 자숙하자는 의견이 대립. 정철은 2년 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진언했다가

밉보이고 강화도로 유배당하는데 이 당시 정철의 처벌 강도를 둘러싸고 동인이 두 패로 갈려서 대립함으로서 북인/남인으로

선이 그였죠.)


대북VS소북(북인이 분당됨):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실권을 잡게 됩니다.

선조 말년에는 서자인 광해군의 세자자리를 빼앗고 이를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물려주려던 소북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북이 대립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대북이 승리하게 됩니다. 광해군 즉위 이후 소북은 광해군에게 숙청당하죠.

이 당시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대북이 쥐고 있었습니다.) 


남인VS서인 <공존기>: 인조반정(1623년)에 의해서 대북은 제대로 말살, 도살당합니다. 소북은 얼마간 근근히 명맥 유지하

다가 자연소멸합니다.(북인 몰락) 남인과 서인은 한동안 평화적으로 공존했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서인이었으니

만큼 실권은 서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인VS서인 <대립기>: "효종의 계모가 죽은 효종을 위해서 몇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시작한 현종 때의

예송논쟁.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문제이지만 이것은 [왕은 특별하다]는 남인과 [왕도 신하랑 다를 게 없어야 한다]는

서인의 이념적 대립이 숨어있는 것이었고, 효종 같은 경우는 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소현세자를 미워

했던 아버지 인조의 개입으로 인해 정식 상속자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젖히고 새치기로 왕위에 오른 만큼 정통성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효종의 장남이었던 현종에게도 공통되는 문제였죠.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합니다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남인의 발언권이 강화됩니다.


탁남VS청남(남인이 분당됨):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그 후로도 서인 쪽에 불리한 스캔들이 거듭되어 터지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 서인의 처벌문제(특히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죽이느냐, 봐 줄거냐)를 둘러싸고

온건파인 청남과 강경파인 탁남으로 갈라집니다. 청남은 허적이, 탁남은 윤휴와 허목이 우두머리였죠. 이 싸움에서는

온건파인 청남이 승리합니다. 덕분에 송시열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노론VS소론(서인이 분당됨): 1680년에 숙종은 장인인 김석주의 도움을 받아 남인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합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청남의 허적, 탁남의 윤증이 처형당함으로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은 하루

아침에 작살나버립니다.  서인은 송시열을 비롯한 원로들의 주도하에 숙종의 브레인이었던 김석주와 손을 잡고 정국을

주도합니다. 당시 김석주의(왕권강화를 위했다고는 하나) 역모날조사건과 공작정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놈은 모두

<사문난적>이다"는 식으로 남인들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하는 송시열의 독단성에 반발하여 서인 온건파였던 윤증을

중심으로 당파가 쪼개져 나갑니다. 이것이 소론으로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존서인들은 노론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당시 소론의 힘은 약했고 남인은 식물인간 상태였기에 노론은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노론VS남인: 남인계의 후궁이었던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임신하자 크게 기뻐한 숙종은 그 아이(훗날의 경종)를 원자로

책봉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에 노론 쪽에서는 서인계의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어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집요하게 태클을 걸었고, 숙종은 이를 무시하고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옥정을 장희빈

으로 봉했습니다. 이 때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은 숙종의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논지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가

숙종을 미치도록 노하게 만듭니다. "한 나라의 원로라는 놈이 끝난 일을 가지고 불씨를 지핀다"고 노한 숙종은 남인들을

기습적으로 등용, 송시열을 탄핵케 하여 제주도로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처형하고, 그 후속조치로 노론계 대신들을

몰아냈으며, 노론계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후에 봉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합니다.

이 때 남인들의 노론에 대한 보복은 경신환국 못지 않게 잔혹했습니다.(이로서 남인이 다시 정국 장악)


   5년 후, 서인계에서 일어난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남인들이 탄압하는 데에 태클을 건 숙종은 남인들을 조정 요직에서 모두

쫓아내거나 몰아내고 그 자리에 소론의 중심인물들인 박세채, 남구만 등을 등용합니다.  그리고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다시 복위시킵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하는데요. 이 사건에서 숙종에게 제대로 밟힌

남인은 다시는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합니다.(남인 쇠퇴)


노론VS소론: 노론과 소론은 인현왕후 저주혐의로 심판대에 오른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됩니다.

노론은 장희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장희빈을 살려줘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노론이 승리하여 장희빈은 사약을 받습니다.


   숙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1721년) 장희빈의 아들.경종에 대해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를 후계자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넣고, 자신들이 지지한 연잉군에게 실권을 주어 경종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에 소론이 노론을 [불충한 무리] 로 탄핵하고 경종이 소론의 편을 들어 노론인사 일부를 축출함으로서 정국 주도권이

소론 쪽으로 기웁니다. 이를 신유옥사라고  합니다. 1722년 소론은 공작정치를 벌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을 일으켜 노론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노론의 우두머리 4명을 처형합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1724년 사망) 연잉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서 정국은 다시 노론이 장악하게 됩니다.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붕당정치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여 노론, 소론, 남인들을

고루 등용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영조의 지지기반이 노론에 있었기에 시작부터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은 소론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난의 된서리를 정면으로 받은 영남 지방

(경상도)선비들은 과거 응시를 금지당했습니다. 그리고 1755년에는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벼슬길이 끊긴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역적모의사건이었는데, 이 사건도 소론을 난감하게 했죠.


벽파VS시파(사도세자 사건): 영조의 의향을 받들어 사도세자를 처형해야 한다는 벽파(노론 강경파)와 사도세자를

살려줘야 한다는 시파(노론 온건파, 소론, 특히 남인)의 대립입니다. 결국 벽파의 입장이 우세하여 사도세자는 죽음을

당합니다.(사실 사도세자의 처형 당시에 벽파와 시파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 생긴 단어로서, 정조의 대對 사도세자 정책에 찬동하는 사람을 (시류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비앙조에서)

시파라고 불렀고, 정조의 사도세자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벽파라고 부른 거죠. 


   정조의 탕평정책과 개혁정책이 좌절되고, 정조가 의문사한 이후 노론 벽파가 재집권하여 시파를 대청소하면서 조선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노론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세도정치의 시작이며, 붕당정치는 여기서 사실상 종막을 맞이한다고

보셔도 무관합니다. 반대당이 없어지고 노론이 벼슬자리를 독차지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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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색당파의 이해| 조┠▒살며생각하며▒┨

淸白吏 | 조회 143 |추천 0 | 2015.02.28. 05:40


조선의 사색당파의 이해

 

사색당파

1575(선조   8)  이조전랑 자리 때문에 동인서인으로 갈리고,

1591(선조 24)  임란 후  세자책봉 문제로 물러난 서인 영수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1599(선조 32)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남이공(南以恭)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다시 대북소북으로 

1683(숙종  9서인은 숙종의 외척(광산김씨 김익훈)에 대한 처분을 두고 노론소론으로

1762(영조 38노론은 사도세자 문제 때문에 다시 시파벽파로 갈렸다

 

1804(순조5)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벽파 경주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김귀주(金龜柱)의 형제)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을 축출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전개된다 

 

벌열 가문(閥閱家門)

   벌열이란,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랜 동안 세력을 누리며 지체를 유지해 온 가문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벌열은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을 오로지하며, 특히 왕실과의 통혼 관계 속에서 세도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벌열 가문은 학벌, 인맥, 지연 등에 의해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정쟁이 치열해지고, 마침내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구되면서 그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벌열 가문으로는

숙종 때청풍 김씨, 광산 김씨, 여흥 민씨,

영조 때남양 홍씨, 경주 김씨,

세도 정치기안동 김씨, 풍양 조씨,

그리고 고종 때여흥 민씨 등의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흐름도

 

 

<서인>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정릉)에 있었고, 김효원(金孝元)의 집은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인현동)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지지자들을 서인과 동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초기 서인의 구성원은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구사맹(具思孟홍성민(洪聖民신응시(辛應時성혼(成渾조헌(趙憲남언경(南彦經이귀(李貴) 등이었다. 특히 이이와 성혼의 제자는 이후에도 서인의 주요학맥이 되었다.

 

   서인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중앙정계에서 활약해온 명문가문 출신과 기호지방 사림출신들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 지역에 든든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은 조선 후기 중앙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서, 세력이 위축·실각했을 때는 있으나 완전히 축출된 적은 없었고 정계에서 항상 일정한 기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도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때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거치면서 왕권의 지나친 비대화나 외척의 일방적 성장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윤원형을 제거한 뒤에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을사 사화 희생자들의 신원을 주장하고, 경상도·전라도 사림의 등용을 주선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토지문제를 위시한 국정혁신 정책에 대해서는 동인보다 소극적인 편이었다.

 

   1588(선조 21)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의 동인에 대한 탄압은 서인·동인 간의 대립을 굳히고 동인을 남인·북인으로 분리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591년 정철이 세자책봉 건의로 노여움을 사게 되어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진출했다(建儲議事件). 그러나 서인 실각의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등극이었다.

 

서인은 선조 때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군제 붕괴와 초반 패전에 책임이 있었다. 물론 전쟁 중에 대명외교를 성공시켜 명나라의 원조를 얻어냈고, 의병활동에서 조헌·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의 활약이 있었으나 전반적인 공로는 남인과 북인이 앞섰다.

 

또한 서인은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으므로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광해군 때 서인은 비교적 중도적 입장을 유지했던 이항복(李恒福)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광해군 후반기에 대북정권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위와 서양갑(徐洋甲) 사건(七庶事件)을 빌미로 일어난 계축옥사로 서인은 일대 위기를 맞았으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킴으로써 위치가 공고해졌다.

 

인조반정 뒤 서인은 소수의 남인과 소북(小北중북(中北) 일부를 등용하는 한편, 광산김씨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을 주축으로 한 기호사림을 포섭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이후 서인의 내부에 여러 번 당()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분당이라기보다는 유력인물을 중심으로 한 계파(系派)로서 김유(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심명세(沈明世구굉(具宏) 공신·외척 세력을 포함한 훈신세력사림인사로 구분된다.

 

인조 초기에는 반정공신 세력인 훈서(勳西또는 功西)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김상헌(金尙憲)의 청서(淸西)로 구분되었다.

 

훈서는 다시 김유를 중심으로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노서(老西)이귀·장유·나만갑(羅萬甲)소서(少西)로 나누어진다. 이는 남인인사를 등용하는 문제로 갈라진 것인데, 각 당파의 인물을 어떻게 등용할 것이냐를 놓고 이외에도 여러 번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에는 반정공신계보다 사림계인 김상헌·김장생 등이 더욱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인조 후반에 김집·송시열 등이 중용되면서 서인정권은 최후의 공신계열인 원두표의 원당(原黨), 김자점의 낙당(洛黨), 김육(金堉신면(申冕)의 한당(漢黨), 사림계인 산당(山黨)으로 구분되었다.

 

한당산당김육·김집이 대동법 시행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발생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촉구한 김육의 집이 한강 이북에 있고, 산당은 연산(連山회덕(懷德) 지역의 사림들이므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효종 때 광산김씨 김집이 이조판서가 되어 송시열·윤선거·이유태(李惟泰)를 천거한 것을 계기로 서인 내부의 사림은 세력을 확충하여 송시열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외에도 이때의 주요인물로 김수흥(金壽興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민유중(閔維重민정중(閔鼎重김만중(金萬重윤선도(尹善道남구만(南九萬) 등이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자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여, 주자의 명분론에 기초한 신분제와 지주전호제의 안정을 기축으로 한 사회재건을 추구했다.

 

동시에 주자도통계승운동과 율곡의 문묘종사운동을 일으켜 주자·율곡(기호학파)으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학문적 계보와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하여 당시 최대의 정적이었던 남인에 대항하는 한편, 일부 진보적 학자들에게 도입된 반주자학적 경향과 토지개혁론에 대처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신들의 국정주도를 강조하며 왕실의 비대와 척신정치(戚臣政治)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서인 내부에서 훈서·한당 계열 인물과 산당 송시열계의 대립이 깊어졌다.

 

   결국 현종 때 예제논쟁을 시발로 척신인 김석주(金錫胄)윤휴(尹鑴허적(許積)을 대표로 하는 남인이 연합하여 정계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인도 개혁론과 다른 당파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노론·소론으로 분리되었다. 인맥과 정책으로 보면 서인의 주류는 노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숙종~경종 때의 정국은 출척(黜斥)과 환국(換局)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론은 숙종 때 송시열이 사형당하고, 소론의 지지를 받는 경종이 즉위하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위기를 겪지만 영조 즉위와 함께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노론>

   분당의 계기는 1680년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과 허적의 서자 견()의 역모사건으로 남인이 대거숙청된 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비롯되었다.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반대한 소장파 한태동(韓泰東) 등은 김익훈을 탄핵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노장파는 김익훈에 대한 탄핵상소에 반박하면서 소장파와 대립하였다.

 

특히 노장파의 거두였던 송시열이 그의 문인인 윤증(尹拯)과 개인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분파작용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를 노론이라 부른다. 노론에 속하는 당인(黨人)들은 본래 예학(禮學)의 태두였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들이었으며, 청렴과 의리를 중시했던 산림(山林) 사림들의 정치집단이었던 산당(山黨)에 속하는 서인들이었다.

 

노소분열 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은 약 10년간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1689년 희빈 장씨 소생, 왕자 윤()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송시열·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이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기사환국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부활하여 숙종 말 이래의 정국은 노·소론의 정쟁(政爭)이 중심을 이루었다.

 

경종·영조 때에는 노·소론의 당세(黨勢)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상을 띠기도 하였다.

 

특히 경종·영조 때의 노론의 당세는 노론 출신의 4대신이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 때의 4대신으로는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이이명(李命조태채(趙泰采) 등이 꼽히고, 영조 때의 4대신은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정호(鄭澔홍치중(洪致中)이다.

 

나중에 노론은 1762(영조 38)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사건(賜死事件)으로

다시 벽파(僻派)시파(時派)로 나누어졌다.

 

벽파(영조/순조)는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당파이다

시파(정조)는 세자의 불행한 죽음에 동정하는 당파이며,

 

영조말에는 주로 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조 때에는 시파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계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자,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1801(순조 1) 신유사옥을 계기로 노론 가운데서 시파와 소론·남인 등이 몰락하게 되고,

그후에는 노론 벽파의 독주시대가 계속되었다

 

<소론>

   서인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숙종 즉위초에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패하여 남인에게 밀렸다가 1680(숙종 6)경신대출척 (庚申大黜陟)을 계기로 정권을 회복했다.

 

당시 숙종의 외척으로서 남인정권 때부터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김익훈(金益勳) 이 경신대출척의 과정에서 원훈(元勳) 1등공신이 되어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계에 재등장한 서인들은 훈척의 정치참여에 대한 입장에 따라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타협세력에는 주로 노성한 인물이 많았고, 비판세력에는 신진사류가 많았다.

 

그뒤 김석주·김익훈 등이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남인 유생인 허새(許璽)가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게 하여 남인의 잔당세력을 제거했다. 이때 소장파인 한태동(韓泰東) 이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는 김익훈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송시열(宋時烈)이 김익훈을 두둔하고, 박세채가 소장파를 후원했다. 이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각기 하나의 당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는데, 소론은 한태동·박세채 중심의 소장파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처벌에 강경파가 노론이었던 데 비해 신진사류들로 구성된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尹拯) 사이에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불리는 불화가 있었는데, 윤증이 소론에 속함으로써 명분의 시비를 빌미로 분파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

 

그런데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 (己巳換局)을 계기로 소론은 노론과 함께 정치일선에서 남인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뒤 1694갑술옥사 (甲戌獄事)를 계기로 노론·소론이 정계에 재등장했는데, 이때 남인출척문제와 장희빈 처리문제에 있어서 소론은 세자(뒤의 경종)를 보아서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온건론을 폄으로써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노론과 다시 충돌했다.

 

이후 1715년에 일어난 가례원류시말사건으로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치열했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소론 편을 들었다가 이듬해인 병신년에 노론 편을 들어 소론이 일시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717년부터는 세자인 경종이 대리청정(代理廳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과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그러다가 경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경종이 후사를 갖지 못하자 1721(경종 1) 8월에 노론대신들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자고 주장한 데 이어 경종의 신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제의했다. 소론은 왕세제의 청정에 대해 반대하여 노론측과 격렬한 분쟁을 일으켰고, 이 기회에 소론인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한배하(韓配夏심수현(沈壽賢) 등이 소를 올려 대리를 추진한 노론을 공격했다.

 

또한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이 대리청정을 추진한 노론 4대신은 왕을 군부로 대접하지 않는 역신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 이를 빌미로 결국 소론은 노론을 차례로 파직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1722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모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소론은 노론 4대신을 위시한 60여 명의 노론이 처벌되었던 신임사화(辛任士禍)를 계기로 소론은 집권했다.

 

이때 소론4대신은 유봉휘·이광좌·조태구·최석항이다.

이때 소론 내에서도 노론치죄함에 있어서 강경파인 준소(峻小)와 주모자만 처형하자는 온건파인 완소(緩少), 또한 왕세제의 보호를 표방하던 청류(淸流) 등으로 분열되었다.

 

그뒤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함으로써 소론은 노론에게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은 남인과 연합, 이인좌를 중심으로 무장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에서도 강경파였던 준론(峻論)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이인좌의 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영조는 왕권마저 위협당하자 탕평책 으로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고자 했지만, 소론에게는 상황이 불리했다. 영조는 이광좌나 조태억을 대신으로 임명해, 그들이 목호룡의 역모사건의 조작자로 발각된 김일경 등의 준소 일파를 단제하게 했다. 이는 노소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탕평책을 통해 소론의 불만을 달래가면서 노론의 공세를 유도해 준소를 제거하고 여타의 소론을 불안하게해 점차 노론세력의 대두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비록 준·소의 구별이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소론자체의 명분이 약화되었고, 정계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벽파>

   붕당간의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조는 이를 지지하는 노론계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의 형제인 김귀주(金龜柱)를 중심으로 결집한 이들은 남당(南黨)으로 불린 척신당을 형성했다. 한편 죽은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손(뒤의 정조)의 보필을 맡게 된 홍봉한(洪鳳漢) 일파는 북당(北黨)으로, 남당과 대립하며 또다른 척신당을 이루었다.

 

당시의 양당은 1762(영조 38)의 사도세자사건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정치관에 있어 영조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노론 척신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노론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사도세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었으므로 당시 노론 대신의 처신도 큰 잘못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한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남인은 사도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한 죄는 되지 않았는데 정국의 전권을 장악했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정파의 분립으로 구체화된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정조는 즉위 후 왕권확립을 위해 의리와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峻論)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 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했다. 아울러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자신의 친위학자군으로 삼았다.

 

1788(정조 12)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비노론계가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고, 1792(정조 16)에는 영남 남인들이 사도세자사건의 명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론 집권층은 왕권강화정책에 의해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는데다가 사도세자 문제가 재론됨으로써 정치적 정통성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자 강경파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사건과 관련된 기왕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이들이 벽파를 형성했다.

 

    벽파의 주류는 역시 노론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심환지(沈煥之)였다. 그는 신임의리(辛壬義理)의 고수를 표방하고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성토에 앞장섰으며, 소론계의 서명선(徐命善)도 공격하여 벽파의 선봉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여기에는 일부 타()당파의 인물도 참여했지만 이들의 참여는 개인적 차원의 것이었을 뿐 소속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벽파와는 반대로 우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타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부의 노론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하여 벽파에 의해 시파로 불렸다.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구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의 즉위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자파의 김관주(金觀柱) 등을 조정에 진출시키는 한편, 벽파의 정국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세력을 비롯한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追崇)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했다.

 

또한 1801년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했으며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세력인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했다.

 

그러나 1804(순조 4)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은 김조순이 주도하는 시파의 반격을 받았다. 김달순(金達淳)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는 등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완전히 패배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가 실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왕권이 유약해지면서 왕권문제를 초점으로 하여 발생한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파·벽파의 분파는 끝났고, 이후 정국은 극소수의 노론 중 이름있는 외척가문 중심으로 전권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김조순이 딸을 왕비로 책립하여 국구(國舅)의 위치에 올라 정국의 주도권을 서서히 잡아가고 있었는데, 그는 정조 때 발탁되어 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시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김조순은 자신의 일족이면서도 벽파였던 김달순(金達淳)을 사사하고 김관주를 유배시키는 등 다수의 벽파를 축출했다.

 

시파는 마침내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시파와 벽파의 분쟁은 끝이 나고 전개되기 시작했다.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벽파

 

<동인>

 

김효원을 지지하던 다수의 후배사류들은 동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인은 처음부터 서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모였기 때문에 그 구성원의 성분, 학문적 전통, 정치인식, 사회경제적 기반이 매우 다양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상좌도에 기반이 있던 유성룡(柳成龍김명원(金命元김성일(金誠一우성전(禹性傳이경중(李敬中한준겸(韓浚謙정경세(鄭經世),

 

조식(曺植)의 문인으로서 경상우도에 기반이 있던 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산해(李山海이발(李潑),

 

이황과 조식의 양쪽 문하에 드나들던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김효원,

 

그리고 이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거나 인척 관계에 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허엽(許曄홍진(洪進정여립(鄭汝立)·홍여순(洪汝諄송응개(宋應漑정지연(鄭芝衍유영경(柳永慶) 등이었다.

 

이들은 척신정치의 잔재 청산에 강경한 입장이었고, 정국 운영에 있어서 비교적 원칙론에 철저하고자 했다.

 

이들의 정치의식을 보면 이황 문인들을 중심으로 후에 남인(南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으로 다른 붕당의 존재에 긍정적이었고, 이들 사이의 시비·정사의 분별을 엄히 하기보다는 조정의 진정을 위한 상호 협력을 더 중시했다.

 

반면에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후에 북인(北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원칙론적 입장을 중시하여 엄정한 시비의 분별을 내세우고 중도적인 입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정여립이나 정개청과 같이 성리학적인 정치의식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동인이 서인에 반대한다는 입장에서는 공동보조를 취했지만, 위와 같이 그 구성원의 성격이 다양했기 때문에 일단 정국의 주도권을 쥐자 정치적인 입장이나 현실 인식에 차이가 생겼다.

 

결국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이후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동인은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이후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되었고,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골북(骨北육북(肉北중북(中北) 등 다양하게 분리되어 붕당으로서의 동인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동인은 선조 말년에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남인은 이황(李滉)과 유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 사람이었고,

북인중앙에서 이산해(李山海)와 이발(李潑), 지방에서 조식(趙植)의 문인인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사림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북분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이들은 동인시절부터 현실인식과 대서인(對西人) 정책의 강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남인계가 온건파라면,

북인계는 서인의 영수인 정철의 효수(梟首)를 주장했을 정도로 서인 비난의 강도가 높았다.

 

서인의 반격이었던 기축옥사(己丑獄事)에서는 북인계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북인의 서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 굳어졌으며 남북인의 분열이 확고해졌다.

 

북인은 임진왜란과 광해군 즉위를 계기로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집권층인 서인과 남인은 임진왜란의 발발과 초반 패배에 책임이 있는 반면,

북인은 의병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3(선조 26) 전국 의병의 반이 경상우도의 병력이었으며, 정인홍·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은 실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를 기반으로 북인은 종전(終戰)과 함께 임진왜란중의 정책실패와 왜군과의 화의가 정유재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 유성룡의 남인정권을 퇴진시키고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경상우도 사림은 중앙정계에 큰 기반이 없었다.

 

이후의 북인정권은 서인이나 남인 중에서 비교적 당색이 약했던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을 정승으로 내세우고, 경상우도 사림과 유영경(柳永慶) 같은 왕의 척신(戚臣),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이이첨(李爾瞻홍여순(洪汝諄) 등과 같이 서인과 반목한 중앙의 여러 인물이 결합한 형태였다.

 

이런 사정으로 학적·지역적 순수성이 떨어지고 같은 북인이라도 배경과 현실인식이 달라 분열과 이합집산이 심했다.

 

 1599년 경상우도 사림과 이산해의 문인, 홍여순계와 이이첨, 허균(許筠) 등이 연합한 대북

남이공·김신국·유영경 계열의 소북으로 분열했다.

 

 대북은 1600년에 홍여순의 권력확장을 두고 이산해와 홍여순이 대립했는데,

이산해계를 육북(肉北),

홍여순계를 골북(骨北)이라고 했다.

 

선조말에는 소북이 다시

남이공계의 청북(淸北 : 또는 南黨)

유영경계의 탁북(濁北 : 또는 柳黨)으로 나뉘었다. 이때 탁북은 영창대군의 세자옹립을 지지하며 서인과 결합해 대북을 축출했으나

 

   대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유영경을 처형하고,

청북과 유희분(柳希奮) 등 광해군의 척신세력과 연합하여 광해군 초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대북이 중심이 된 북인정권은 지지부진하던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는 등 전후복구 사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의 사회적 기반이 강고함에 따라 정책은 의도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정계에서 청요직(淸要職)과 이조판서, 전랑(銓郞) 등의 관직은 북인이 차지했으나 정승직과 비변사 대신은 끝까지 서인과 남인의 중도파 인사들이 장악했다. 이에 대북은 붕당의 폐해는 군자당과 소인당이 공존하는 데 있으므로, 붕당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소인당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먼저 유당(柳黨)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고 북인계에 치중한 인사를 계속 단행했다.

 

1611(광해군 3)에 정인홍은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 상소를 올렸고 이어 조식의 시호추증과 문묘종사를 건의했다. 이런 과정에서 대북은 서인·남인뿐만 아니라 소북 및 이항복·이원익 등의 현임대신들과의 대립도 커졌다.

 

1613년 서양갑(徐洋甲) 등이 주동한 칠서사건 (七庶事件)이 발생하자 대북은 이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으로 확대하여 서인탄압의 계기로 삼았다. 이어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를 단행하고, 이항복 이하 당시까지 정계에 남아 있던 서인들을 제거했다.

 

이때 북인 내부에서도 유희분·유몽인(柳夢寅기자헌(奇自憲남이공·박승종(朴承宗) 등을 중심으로 폐모론의 반대파가 생겼는데, 이를 중북(中北)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기존의 소북계 인물과 함께 정온(鄭蘊이경전(李慶全문경호(文景浩) 등 정인홍의 문인들도 일부 가담했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대북정권은 몰락했다. 이후 북인은 철저히 위축되어 다시는 중앙정계에 등장하지 못했다.

 

<대북>

 

   선조 초기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났고,

1591(선조 24)에는 세자책립 문제로 해서 서인 정철(鄭澈)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동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인의 탄핵문제에 있어서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분립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집권하게 된 북인은 1599년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정랑 남이공(南以恭)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분당했다.

 

이산해(李山海홍여순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허균(許筠한찬남(韓纘男이명(李溟이성(李惺백대형(白大珩구의강(具義剛홍식(洪湜유몽인(柳夢寅) 등이 속했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에 영의정이 된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이 대립함으로써 이산해계는 육북(肉北), 홍여순계는 골북(骨北)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대북당은 선조말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함으로써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당과 분쟁을 벌였다.

 

1608년 선조가 죽고 왕세자인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대북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대북당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소북인을 몰아내라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려 대북인을 계속 등용케 함으로써 삼사(三司)의 관원마저 대북당인이나 대북당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했다.

 

 그리고 이어서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이때 대북 중에서도 유몽인을 중심으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한 사람들은 중북(中北)으로 분파했다.

 

그리하여 광해군 즉위 10년 만에 서인은 물론이요 남인과 소북인마저도 야당으로 되었고 대북 중에서도 중북이 분파함으로써 대북집권의 정부는 고립되어갔다.

 

이에 1623(광해군 15) 3월 서인이 대북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업고 반정을 일으킴으로써 대북은 제거당했다. 즉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이 살해되었으며 200여 명이 유배당함으로써 대북의 집권기는 끝이 났다.

유몽인 등 중북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끝내는 죽음을 당했다

 

 <남인>

 

   동인이 남인과 북인(北人)으로 나뉜 것은 서인 정철(鄭澈)의 세자책봉 문제제기로 동인 내부에서 생겨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에서 기인하였다.

 

분당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당시 집권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것은 집권당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현상이었다.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를 따른 일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을 따른 일파를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서울 남산 밑에 있었고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남인은 이이(李珥)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을 제외하고는 이황(李滉) 문하의 영남학파 출신이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은 북인과 갈린 이후 우성전·유성룡·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북인이 1602(선조 35) 유성룡을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탄핵, 사직하게 한 뒤 정권에서 밀려났다.

 

서인을 중심으로 북인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반정 때,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자 남인과 서인 사이에는 유대가 성립되었다.

 

인조 때 당파세력은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과 연합하는 형세였고, 북인 중 소북(小北)의 일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조 때의 남인으로는 유성룡의 문인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당시 영의정 이원익과 이광정(李光庭이성구(李聖求이준(李埈장현광(張顯光정온(鄭蘊)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남인과 서인 사이의 유대관계는 점점 이완되어 서인과의 알력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성리학의 논쟁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서인 주기파(主氣派)와 남인 주리파(主理派)의 논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효종 이후 북벌 등을 내세워 정국을 주도하는 서인과 그를 비판하는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남인은 현종 때 효종의 상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쟁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바로 1659(현종 즉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그뒤 다시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을 둘러싸고 다시 예송이 전개되었을 때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물러나게 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예송에서 남인의 주장은 대체로 왕실의 예와 사족의 예가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서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남인이 다시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를 탁남(濁南), 후자를 청남(淸南)이라 불렀다.

 

온건파 허적(許積)을 수령으로 하는 탁남에 대립하여 서인의 죄를 강력하게 추궁해서 문죄하자는 청남에는 허목(許穆)이 수령격이었다.

 

탁남을 중심으로 한 남인정권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군문을 확보하면서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1680(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정권을 잃은 뒤 서인(노론·소론)과 정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탁남과 청남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후 탕평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오광운(吳光運) 등 탕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단과 소극적인 집단으로 나뉘기도 하고,

 

정조년간에 채제공(蔡濟恭)이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경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남인집권기는 도래하지 않은 채 중앙정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남인들의 주장이 탕평책과 연결된 것은 그들의 붕당론에서 왕의 정치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과 연관된다.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기반을 유지하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실학자'들 가운데는 남인계가 많으며 18세기말에 천주학이 일부 남인계를 중심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上)]

김정희와 초의선사, 그리고 우암 송시열


    입력 : 2016.01.21 14:24


       기인이사 32편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대흥사’편에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선생

    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보고 추사는 “그는 우리 글씨를

    망친 인물”이라고 화내며 초의선사에게 현판을 떼라고 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라”고 했습니다. 사가(史家)들은 이

    일화를 “자기 필체를 최고로 여겼던 추사가 귀양살이 후 겸손해졌다”고 평가하는데 당시 그 글에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짐작하듯 ‘동국’은 우리나라, 즉 당시의 조선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체’는 무엇일까

    요?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왕희지체니 뭐니 하는 중국의 서법(書法)을 모방했습니다. 17세기 후

    반들어 조선에도 ‘우리 식의 독자적 서체’가 나옵니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옥동(玉洞) 이서(李緖·

    1662~1723) 선생을 선구자로 꼽습니다. 이서는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사설’의 저자 성호 이익(李

    瀷·1681~1763) 선생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벼슬이 낮았지만 서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글씨가 보고 싶다면 전남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가볼 것을 권합니다. 윤선도 선생

    의 집안인 녹우당은 뒤 덕음산에 빼곡한 비자나무가 바람이 불 때 비오는 것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 붙은 이름인데 ‘녹우당’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입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원래 서울 명동에 있던 것을 통째로 실어날라 세운 것이라고 한다.
    여기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이서의 글씨가 걸려있다.


       그가 남긴 ‘필결(筆訣)’이라는 책은 최초의 글씨 비평서이자 이론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서맥(書脈)은 이후 공재 윤두서(1668~1715),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원교

    (円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게 이어졌습니다. 더 정확히 계보를 따지는 이들은 동국진체

    의 전수를 공재 윤두서와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외증손 다산 정약용, 방산 윤정기, 춘계 윤홍혁

    의 줄기와 윤두서윤순이광사로 내려오는 줄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첫째 줄기는 해남 윤씨 계열이지요.

    역사가들은 대체로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원교 이광사를 꼽습니다. 원교 이광사는 명문집안 자손

    이었습니다. 그의 선조가 조선의 두번째 임금 정종의 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이었으며 원교는 넷째 아들이었지요. 호는 원교,

    혹은 수북(壽北)을 썼습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에 걸린 '예업'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이다. 예술의 본향이라는 뜻이다.


       원교의 일생은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열일곱되던 해 아버지 이진검은 노론(老論) 4대신을

    탄핵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아 경남 밀양으로 유배됐습니다. 이진검은 거기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노론 4대신’이 누구인지를 살펴봅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말합니다. 그들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아들없

    이 병치레를 자주하자 국본(國本), 즉 세자를 빨리 정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세

    자로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밀었다는데 있지요. 그러자 노론과 반대편인 소론측은

    반대 상소를 올리는 한편 “노론 4대신이 경종을 시해하려했다”며 무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에 걸린 '정관'이라는 글씨도 이서의 것이다.
    선비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노론 4대신은 역모죄로 처형됩니다. 훗날 노론 4대신 무고사건은 당시 승지였던 김일경(金一鏡)

    이 목호룡이라는 사람에게 사주했음이 드러납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김일경 부자(父子)와 훈련

    대장 윤취상 등 수백명이 노론의 반격을 받고 제거됩니다.


       이때 훈련대장 윤취상의 아들이었던 윤지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전남 나주로 옮겨 귀양살이를

    계속했습니다. 윤지는 부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755년 나주괘서사건,

    나주벽서사건, ‘윤지의 난’이라 불리는 ‘을해옥사’를 일으킵니다. 나라를 비방하는 격문을 벽에

    붙인 일이 발각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소론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습니다. 이때 50살이던 이광사는 큰아버지 이진유(李眞儒)

    가 나주 괘서사건으로 처벌을 받게 되면서 연좌돼 이듬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됩니다.

    원교는 그때 죽임을 당할 뻔 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의금부에 끌려가자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요”라고 애원했다

    는 것입니다. 영조는 그 이야길 듣고 그를 살려줬습니다.



    녹우당은 비자나무 숲에 바람이 불 때 비오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이광사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던 것이 ‘선동죄’로

    몰려 이번에는 전남 완도군 신지도(薪智島)라는 곳으로 다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때 이광사

    의 나이는 58세, 그는 거기서 15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이광사가 죽은 다음해 2월 원교의 아들

    형제가 유해를 경기도 장단 송남(松南)으로 옮겨 어머니 류씨와 합장하지요. 원교의 무덤은 군

    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사람들이 갈 수 없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불운하게 살았으면서도 그는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하 윤순에게 글씨를 배운

    그는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통달했고 마침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

    습니다. 글씨뿐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등에도 능했습니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유배할 때 길러낸 제자가 많습니다. 이가운데 해남 대흥사에 그의 필법이

    전해지게된 것은 즉원(卽園·1738~1794)스님, 아암(兒庵)스님같은 제자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

    오는 아암스님이 다산과 교우하는 훗날의 혜장스님이며 그 제자가 추사와 친교를 맺은 초의선사

    였습니다. <中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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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中)]

    원교가 수체(水體)로 현판을 쓰자, 절에 화재가 멈춰


      입력 : 2016.01.21 14:25


       <上편에서 계속>

         지리산에는 유서깊은 3대 사찰이 있지요. 구례쪽 화엄사, 하동쪽 쌍계사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구례 천은사(泉隱寺)는 신라 덕흥왕 3년(828년) 인도 승려 덕운조사가 창건했습니다. ‘샘을 숨

      기고 있다’는 이름처럼 처음에 이 절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습니다. 절에 ‘샘’이란 말이 붙

      은 것은 전설 때문입니다.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에 걸린 현판이다. 이광사의 작품이다.


        천은사는 조선 숙종 5년때인 1679년 단유선사에 의해 중건됐는데 샘 주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

      났습니다. 한 스님이 무심코 그 뱀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절에서 살생을 한 여파는 컸습니다.

      그후 샘이 말라버려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샘이

      마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주었습니다.


         원교는 글씨를 물흐르는 것 같은 수체(水體)로 썼다고 합니다. 그후 이 절에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

      다고 합니다. 천은사에는 절의 입구격인 일주문에 붙은 ‘지리산 천은사’부터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등 세곳에 원교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극락보전에 모두 13마리의

      용(龍) 장식이 있으며 좌우에 황룡과 청룡의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

      다고 합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보제루(普濟樓)는 원교의 제자인 창암 이상만이 썼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

      니다. 재주가 뛰어난 창암은 하루에 1000자 쓰기를 꼭 채웠는데 그로 인해 벼루가 세개나 구멍이

      났고 붓은 1000자루가 닳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지리산 천은사를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리산 천은사로 가는 길에 있는 수홍루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평이 나있다.

         원교의 글씨는 전남 해남 대흥사에도 있습니다. 대웅보전과 대웅보전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침계
      루(枕溪樓), 천불전(千佛殿), 해탈문(解脫門)입니다. 대웅보전의 원교 글씨 옆 불당엔 앞서 말한
      것처럼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이 걸려있지요.

      전남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이다.
      이광사의 글씨를 본 추사 김정희가 떼어내라고 했다가 다시 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오랜 유배를 끝내고 풀려난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주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네. 유배되지 않았으면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거야.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쫓다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법일세. 제주도가 그걸 가르쳐줬네.”

      이 말에 초의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습니다. “추사께서 성불(成佛)하려나보오.”

      그러자 추사는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초의. 내가 지난번 제주도로 가기 전에 떼어

      내라고 한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혹시 지금도 있나?”

      초의선사는 “그거 어딘가 헛간 구석에 있겠지. 나는 잘 버리지않는 성미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추사는 “그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땐 내가 잘못보았네”라고 말했습니

      다. 이게 헛간에 있던 원교의 글씨가 살아난 과정입니다.


      전남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글씨도 이광사의 것이다. 지금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가 여기 머물고있다.


         원교의 글씨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명부전, 만경루(萬景樓) 현판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남의 유서깊은 두 사찰인 대흥사와 백련사가 모두 원교의 글씨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창 선운사의 천왕문(天王門), 선운사 성보(聖寶)박물관에 보관 중인 ‘정와

      (靜窩)’라는 글씨도 원교의 것입니다. 정와는 ‘조용한 작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변산반도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과 설선당(說禪堂)도 원교의 작품이지요.


         그런데 기인이사 시리즈를 취재하며 전국을 다니다보니 원교 못지않게 글을 남긴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을 쓰

      면서 저는 경이롭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교가 살아 생전 고초를 겪은 것이 노론과의

      불화한 집안 내역 때문인데 그 노론의 영수가 송시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쟁사가 복잡하기

      짝이 없어 며칠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잠시 사색당파의 분화과정을 요약

      해봅니다.

       <下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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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下)]

      뿌리 깊은 한국의 사색당파 계보| _____ ◆자유게시판

      笑泉/양현후 | 조회 78 |추천 0 | 2016.03.17. 07:26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下)]

      뿌리 깊은 한국의 사색당파 계보


        입력 : 2016.01.21 14:25


         <中편에서 계속>

           동인, 서인은 조선 초 분화됐지만 연원은 고려 말기로 넘어갑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

        하자 선비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킨 사림파(士林派)와 새 나라 건국에 협조한 훈구파(勳舊派)로

        나뉩니다. 당연히 조선 초는 요직을 장악한 훈구파의 것이었지요.


           정몽주를 흠모해온 사림파는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인재를 축적합니다. 그러다 선조 대에

        들어 훈구파를 제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사림파가 갈라진 것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인데 선조 초기에 이 벼슬을 놓고 갈등이 벌어집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

        겸이 “김효원은 훈구파였던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반대하지요. 이때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

        쪽인 동대문, 심효원의 집이 한양 서쪽인 서대문쪽이어서 양쪽을 동인-서인으로 불렀습니다.


        소쇄원 부근에 있는 환벽당은 우리 정자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동인은 선조 22년, 즉 1598년 일어난 정여립의 난으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립니다. 동인에

        속했던 이발이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정여립의 난 후 처형됐는데 당시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유성룡이 외면했다는 이유지요. 이발의 죽음에 동정적인 인물들은 북인,

        유성룡을 따른 인물들은 남인으로 분파되는데 이는 이발의 집이 한양 북악(北岳)에, 유성룡의

        집이 경북 안동에 있었기에 남인으로 불려진 겁니다. 이후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남인은 갑술환

        국으로 몰락합니다.


           갑술환국은 1694년의 사건을 말합니다. 중앙 정계에서 수세에 몰려있는 남인은 1689년이 기사환

        국(장희빈을 둘러싼 서인과 숙종의 갈등)으로 기사회생했는데 불과 5년이 안돼 다시 치명상을 입

        습니다. 이유는 역시 장희빈의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숙종으로부터 폐출된 인

        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려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에게 의존하

        던 남인은 서인들의 민씨 복위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뿌리부터 끊어놓으려 시도하지

        만 실패합니다. 권력의 정점이던 숙종이 이미 장희빈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

        해 남인의 영수 민암이 사사되고 중심 인물들은 유배를 떠납니다. 여기서 요약하자면 동인에서

        나뉘어진 북인은 남명학파(조식), 남인은 퇴계학파(이황)로 불립니다.


        소쇄원 제월당의 글씨도 우암의 작품이다.
        우암은 조광조를 존경했으며 학포 양팽손을 통해 양산보 일가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서인은 숙종 때의 경신환국(1680년) 때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데 경신환국은 남인의 영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 잔치에 왕만이 쓸 수 있는 용봉차일, 즉 기름을 먹여 비가 새지않는 천막을 임금

        의 허락없이 냉큼 가져다 쓴데서 비롯되지요. 비가 오는 것을 알고 허적의 집에 용봉차일을 보내려

        던 숙종은 허적이 벌써 가져간 것을 알고 남인을 실각시키고 서인을 중용합니다. 몰락한 남인에 대

        한 처벌을 놓고 강경파(노론-송시열), 온건파(소론-윤증, 윤휴)로 갈리며 서인도 분화한거지요.

        소론은 이인좌의 난으로 몰락하고 노론은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비판적

        인 벽파로 나뉘었으니 한국사회는 서인의 나라, 그중에서도 노론의 나라였던 셈입니다. 그러고보

        면 우리 보수의 맥도 상당히 그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암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파싸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본디 서인이었으

        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노론의 영수(領袖)격인 인물이 그이기 때문입니다. 우암은 효

        종, 현종 두 임금이 세자시절에 스승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

        夫子)같은 명칭으로 격상됐지요. 그는 1633년 경릉참봉으로 벼슬길에 나서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행판중추부사 등의 요직을 지냈습니다.


        낙화암이라고 쓰여진 붉은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우암이 유명하게된 것은 조선시대의 각종 논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

        즉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숨졌을 때 효종이 몇년 상을 치러야하는 지를 놓고 격론이 붙었을

        때 1년동안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했지요.


           우암은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에 반대하다고 숙종의 미움과 남인의 사

        주로 전북 정읍에서 사사(賜死)됐습니다. 하지만 1756년(영조 32년) 영의정에 추증됐고 평소 그를

        존경하던 정조는 우암을 송자(宋子)로 격상시켰습니다. 공자-맹자-순자-묵자와 같은 반열이 된 거

        지요. 그가 남긴 유고(遺稿)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됐는데 조선 유학

        자가운데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인물은 우암뿐입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만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지요.


           우암의 글씨 가운데 제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충남 부여 낙화암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巖)’, 전남

        담양 소쇄원에 있는 제월당(霽月堂),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소쇄원 근처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정암 조광조선생 유허비 등입니다.



        전남 승주에 있는 조광조 선생 유허비문도 송시열이 직접 쓴 것이다.
        글씨가 모범생의 것처럼 보인다.


           우암은 서예도 도학(道學)의 한 갈래로 생각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글씨를 아름다움보다는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보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했다고 합니

        다.

        그런 그의 자세는 퇴계의 글씨를 평한데서 잘 나타납니다. 우암은 퇴계의 서첩을 보고 이렇게

        평했지요.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


           재미있는 것이 조선일보 이한우 선임기자의 평입니다. 이 기자는 “우암은 평소 길이 정해지면

        옆을 쳐다보지않은 인물이었다. 글씨를 봐도 그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일체의 기교가 없는 정

        법(正法), 마치 모범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은 필체다.” 저도 그의 견해에 상당부분 동감했

        습니다.

        우암의 글씨는 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에 집중적으로 남아있다고 하니 그곳도 나중에 돌아볼

        생각입니다. 저는 서예에 대한 지식이 깊지는 않지만 전국의 유적을 다니다 때때로 발견하는

        옛 선인들이 남긴 글씨도 훌륭한 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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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정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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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정당의 역사 

           현존 정당 중 가장 오래된 정당은 어디일까요. 한나라당입니다. 1997년 11월 창당했으니 11년7개월쯤 됐군요. 제1 야당인 민주당은 불과 1년3개월여 됐습니다. 사실 1945년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이래 수많은 정당이 명멸했습니다. 1000년은 갈 거라고 장담했던 정당이 2년여 만에 반 토막이 난 일도 있습니다. 63년 발족한 중앙선관위가 세고 있는 정당이 141개라고 하네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과 비교하면 일천한 ‘생명력’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정당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졌지만 저류를 관통해 온 게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한나라당이 박정희 정부의 공과에 웃었다 울었다 하고, 지금의 민주당이 55년 해공 신익희 선생의 민주당에서 적통을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지금 정당의 뿌리를 살펴볼까요.

        고정애 기자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 현존하는 이들 정당의 이력엔 나이테처럼 과거 정당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들여다보면 현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 지금 갈등하는지 고심은 뭔지, 또 어딜 지향하는지도 드러난다.

        3당 합당 때 민정·민주계, 한나라까지 이어져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90년 2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할 때 통일민주당의 김영삼(YS) 총재가 한 말이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이란 216석(전체 299석)의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신민주공화당은 곧 이탈했지만 민정계와 민주계의 결합은 한나라당으로 변신한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한나라당으로선 큰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다. 근거지가 영남 전체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대구·경북에선 여권 정서가 강해졌다. 반면 YS의 근거지였던 부산·경남은 야당 성향이었다. 하지만 YS의 선택 이후엔 한데 묶였다. 영남의 의석(현재 68석)은 호남(31석)의 두 배가 넘는다. 한나라당이 ‘곤궁했던’ 야당 시절에도 100석 이상의 정당일 수 있었던 건 영남 덕분이었다. 그림자도 있다. ‘한나라당=영남당’이란 실체다. 상대적으로 민심에 덜 신경 쓰는 풍조가 생겼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공천권을 쥐고 있는 권력자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졌다. “민심에 둔감하고 권력 싸움에만 골몰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과거부터 있었다.

           YS 대통령 시절 이후엔 수도권 공략을 본격화했다. 민주화운동 경험을 가진 인사들이 15대 총선 때부터 한나라당에 발을 들여놓았고 지난해 18대 총선에선 오히려 영남을 압도했다(지역구 의원 150명 중 83명). 수도권은 민심이 언제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51 대 49의 싸움을 한다. 조금만 달라져도 천양지차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수도권 의원들이 민심에 예민한 이유다. 이런 시각차가 갈등을 낳기도 한다. 최근 여권 내 쇄신 논쟁이 그 예다. 의당 수도권 의원들이 더 적극적이다.

        동교동·상도동계 각축…민주당은 지금 “전국 정당화”

           김성수·신익희·조병옥·윤보선…. 초기 야당사를 빛낸 인물들이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누가 뭐래도 대표적 정치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YS였다. DJ의 동교동계, YS의 상도동계(또는 민주계)는 양대 세력이었다. 각각 호남과 영남을 대표했다. YS가 여권으로 가면서 야당 진영에서 영남이 떨어져 나갔고 호남이 주축이 됐다.

           야당으로선 텃밭에만 안주하기엔 호남이 작고 좁았다. DJ가 97년 김종필(JP)과 손잡고 공동 정부를 구성키로 약속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수도권을 충청권으로 이전한다는 공약을 한 바 있다. 이른바 호남·충청 연대다. 수도권 민심도 늘 살폈다. 민주당식 표현으론 ‘전국 정당화’다. 근래 4·29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호남 출신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에게 공천을 주지 않은 것도 같은 명분에서다. 노무현 대통령이 DJ의 민주당에서 갈라서 열린우리당 실험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이래 충청당의 시작은 JP에게 있다.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두 차례 돌풍을 일으켰다. 16대 총선에선 “태양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잔잔한 일몰에 있다.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고 했으나 충청도민이 외면했다. 근래 충청 민심은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총재란 대안을 찾았다.

        같은 이름, 다른 정당
        60년대 민정당은 정통야당, 80년대 민정당은 집권여당


           민정당. 1980년대를 산 사람들에겐 ‘민주정의당’의 약칭을 뜻할 거다. 81년 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창당한 정당 말이다. 사람에 따라선 대통령 단임 약속을 지켜냈고 정권 재창출에도 성공한 정당으로, 아니면 정반대로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당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집권여당이었다는 점이다.

           60년대 사람들에게 ‘민정당’은 전혀 다른 이미지다. 정통 야당 중 하나였다. 당시 시대상은 이랬다. 5·16 군사정부가 63년 기성 정치인에 대한 해금 조치를 풀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도 포함됐다. 이들이 만든 게 민정당이다. 이후 다른 야당 세력과 결합해, 70년대 제1야당인 ‘신민당’이 됐다.

           이렇듯 우리 정당사엔 ‘동명이당(同名異黨)’이 많다.

           민주당이 대표적이다. 50년대부터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에 맞서는 정통 야당이었다.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선생이 몸을 담았다. 60년 4·19 혁명 이후 짧게나마 집권 경험도 있다. 민주당이란 이름은 이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90년대엔 너무 여러 개가 등장해 헷갈릴 지경이다. 우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YS) 총재가 90년 3당 합당을 결정하며 여권으로 옮겨가자 남은 이기택 의원이 창당한 민주당이 있다. 이른바 ‘이기택 민주당’이다. 1년여 만에 김대중(DJ) 총재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다시 붙인 이름이 민주당이다.

           95년 DJ가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따라가지 않은 민주당 사람들은 ‘통합’이란 두 글자를 이름 앞에 붙인다. 하지만 오히려 야권의 분열상만 드러낸 이름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선 ‘꼬마 민주당’으로 불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당 소속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 열린우리당과 갈라서서 야당 생활을 했던 민주당이 있고, 돌고 돌아 다시 열린우리당과 합당한 지금의 민주당도 있다.

           신민당도 다섯 차례, 주요 정당 기준으로 세 차례 등장한다. 61년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당이 첫 번째다. ‘새로운 민주당’이란 의미에서 신민당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두 번째 민주당이 바로 70년대 신민당으로 DJ와 YS가 경쟁했던 정당이다. 80년대 민주화 열기와 YS와 DJ의 정치 재개 움직임과 맞물린 게 선명 야당을 내세운 ‘신한민주당’인 신민당이었다. 85년 12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의 견고한 3당 체제를 깨는 돌풍을 일으켰다.

        정당 누가 많이 만들었나
        DJ 네 번, JP 네 번, 허경영 네 번


           창당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현재 5개 이상의 시·도당에 각각 1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과거에는 훨씬 더 까다로웠다”고 전한다.

           너끈히 그것도 여러 차례 창당한 정치인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중앙선관위가 관리를 시작한 1963년 이후 정당 대표자로 등재된 경우가 네 차례로 가장 많다. 87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을 때, 91년 이기택 의원이 주도하는 민주당과 합당해 다시 민주당을 만들었을 때, 95년 정계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설립했을 때 등이다. 대통령 시절인 2000년 총선을 앞두고도 새천년민주당을 꾸렸었다. 비공식 기록도 있다. 85년 이민우 총재 이름으로 등록한 신한민주당이나, 87년 ‘김영삼(YS)’을 대표로 등록한 통일민주당의 창당 작업 역시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게 당시 정치인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반대 진영에선 그를 ‘창당 전문가’라고 부른다.

           공식기록상으론 김종필(JP) 전 총리도 네 차례로 등재돼 있다. 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이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설립한 게 포함됐다. 95년 민자당에서 탈당하면서 자유민주연합이란 이름으로 두 차례 창당한 기록도 있다.

           DJ의 라이벌인 YS의 기록은 의외로 단출하다. 87년의 통일민주당과 민주자유당 창당 단 두 차례에만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군소정당의 창당 전문가는 지난 대선에서 ‘엽기 후보’로 불렸던 허경영씨다. 92년 진리평화당을 시작으로 공화당(97년), 민주공화당(2000년), 경제공화당(2007년)을 창당했다고 선관위에 등록했다.

        2009. 6. 15, 중앙일보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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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보수정당으로, 1997년 11월 21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당명은 한나라당으로 하여 창당하였고, 2012년 당명을 바꾸면서 새누리당이 되었다.

        1997년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두 차례 패배하여 집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유효표의 48.7%를 득표하며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집권 여당이 되었다. 이후 201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유효표의 51.6%를 얻으며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 이어서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에서도 과반수를 넘는 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뿌리[편집]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3당 합당[편집]

        보수의 분열[편집]

        제14대 대선 이후[편집]

        제17대 총선 이후[편집]

        2011년 재보선 이후[편집]

        • 선진통일당 :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에서 충청남도에서 지역구 3석(논산·계룡·금산, 서산·태안, 아산), 비례대표 정당투표 득표율 3.2%로 비례대표 2석을 획득했다. 당은 총선결과를 패배로 보고, 지도부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일괄 사퇴했다. 2012년 4월 16일 이인제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2] 2012년 5월 20일, 이회창 전 대표는 당명 개정 이전에 당을 떠난다고 선언, 당을 탈당한다고 밝혔다. 5월 29일, 제1차 전당대회를 통해 이인제 비상대책위원장을 대표로, 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된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개정했다. 일부 언론에서 선진통일당 대표 선출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측이 당선을 위해 부정을 저질렀다는 보도가 나왔다.[3]
        2012년 8월 31일, 충남 아산을 지역구로 하는 이명수 의원과 세종특별시의 시장 유한식이 선진통일당을 탈당,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 2012년 10월 25일, 새누리당과의 합당을 선언하였다. 단, 합당을 의결했을 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식으로 신고하지는 않았다. 11월 16일, 새누리당에 흡수합당되어 소멸하였다. 약 한달간 합당이 지연되었는데, 일각에서는 이것이 정당 국고 보조금 지급을 노린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4]
        • 새누리당 :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1997년 이후 15년간 존속해오던 한나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 되었다. 현재 당대표는 김무성 의원, 원내대표는 이완구 의원인데 공교롭게도 2013년 4.24 재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다.

        역사[편집]

        창당 배경[편집]

        민주자유당1992년 거대 여당을 기반으로 김영삼이 당선했으며 집권초기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등록, 자방자치제 전면실시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펴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한보사태 등 경제비리와 차남의 정치개입 등으로 통치에 난맥상을 보였다. 게다가 1997년 말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IMF 비상사태를 초래했다.[5] 이에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은 김영삼 대통령의 허수아비를 불태울 정도로 김영삼 정부와의 차별화 전략을 보였고, 11월 17일 DJP연합의 부당성과 3김의 정치구도를 지적하며 통합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순과 후보 통합을 하며, 합당 또한 합의에 이른다.[6] 11월 19일 무한히 큰 나라와 모두가 하나되는 나라라는 뜻에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정하고 당 마크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큰 한국의 힘과 대통합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으로, 파란 바탕색은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하고, 가운데 흰 부분은 한반도의 웅비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7] 11월 21일 전당대회를 거쳐 정식으로 당 통합을 이루게 된다.

        1997년 대선 실패와 야당의 시작[편집]

        창당부터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 이회창은 한나라당에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당이 창당되었지만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뒤 4일 만에 불거진 ‘아들 병역면제 의혹’은 새정치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에게 2주 만에 역전 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8] 게다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건[9] 그리고 후보측이 국세청장, 차장과 공모하고 세금을 불법 갈취해 대선 자금으로 이용한 ‘세풍(稅風)’,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측에 휴전선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총풍(銃風)’사건[10] 등 일련의 사태는 한나라당으로서는 위기감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인제 지지는 곧 김대중 당선’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과 ‘이회창과 한나라당 IMF 책임설’,‘김대중 IMF 심화설’ 공방에 [11] 에 양자 대결 구도로 서서히 좁혀지면서 11월 24일의 5.8% 격차가 그 후 4.3%(12월 5일), 1.6%(12월 17일)로 줄어들었고 급기야 선거당일 출구조사에서는 소수점을 다투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으며 문화방송을 제외한 다른 신문사나 방송사는 예측조사를 내놓지조차 못했다.[12]

        개표 초반 경상북도 지방의 개표가 이루어지자 이회창의 독주였으며 3배 이상 따돌리며 선두를 질주했으나 8시 부터 격차가 좁혀지더니, 불과 30분이 지나자 1%대의 격차가 되풀이됐다. 전라남도, 전라북도 지역의 집계가 시작되었을 때는 ‘0.1%’의 격차로 혼전을 거듭했으나[13] 결국 ‘1.5%’ 40여만표라는 박빙의 차이로 패배하여 36년 만에 처음으로 집권 여당에서 물러났다.

        20, 30대의 지지율의 차이 등 여러 패배 이유가 있었지만 아들의 병역 문제 등 여러 의혹이 불거지면서 ‘법적’대응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 ‘도덕적’인 여론의 심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서 그동안 쌓아올린 이회창의‘대쪽’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불신’의 이미지를 심었다는 주장이 있다.[14] 처음으로 패배한 대통령 선거인 만큼 ‘정신적 공황상태’가 많았지만 원내 1당이자 165석의 거대 야당을 지녔다는 자부심으로 별다른 내분과 인책론이 없이 야당 준비를 하게 된다.[15]

        1998년[편집]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원내 과반수 의석을 보유한 거대정당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전후로 야당에 대해 "나라를 살리는 데 초당적으로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으나[16], 한나라당은 김종필을 총리로 임명한 것은 DJ-JP간 밀실야합으로 이뤄진 내각제 개헌 추진을 위한 수순으로써 권력나눠먹기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김종필 본인에 대해서는 '정경 유착의 뿌리이자 정치생명연장을 위해 지역감정을 선동했던 전력이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총리 인준동의안을 무산시켰다.[17][18] 이로 인해 국정 공백이 우려되었으나 김종필이 일단 총리서리로 취임하여 정부 업무를 보면서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었다.[19]

        하지만 이후로도 한나라당은 총리서리제가 위헌이라며 헌소를 제기하였고(이후 각하 판결이 내려진다.)[20][21] 가뜩이나 최악인 국정상황은 검찰의 북풍 수사가 시작되면서 한나라당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성토하자 더욱 꼬여만 갔다.[22] 정부는 초기에는 정계개편에 대해 미온적인 시각을 보였으나 국민 다수가 정계 재편을 해서라도 정국 안정을 실현, 국난을 극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밝히며[23]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통해 국정혼란을 수습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기획하게 된다.[24]

        우선 김대중 대통령이 대구경북 지역 의원 영입이라는 ‘지역연합’과 한나라당내 민주계 영입이라는 ‘민주대연합’ 두 가지 큰 틀을 제시하였는데, 한나라당내의 민주계 의원들은 김영삼계가 주류를 차지해서 김대중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반면에 문민정부 시절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던 대구경북 지역 민정계 의원들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추진했던 김대중에 대한 감정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리하여 여권은 우선 박세직, 권정달 등의 대구경북 지역 민정계 의원들을 여권으로 영입하였고, 그외에 수도권과 충청권의 의원들도 국민회의나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그 결과 한나라당에서 공동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자민련으로 옮겨간 의원은 40여 명에 달하였고,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수 의석을 상실하였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25](참고로 한나라당에서 여당으로 옮겨간 소위 ‘정치철새’ 의원은 대부분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한편, 1998년 6월 4일에 치러진 제2회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자민련으로 대표되는 여권은 외환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인 한나라당을 심판하자는 주장을 폈고, 한나라당은 정권 초기 여러 실책을 지적하며 정부 및 여권을 견제하자는 주장을 폈다. 특히 한나라당은 정국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수도권 3개 지역의 광역단체장을 반드시 석권하고자 하였으나, 실제 개표 결과 부산·대구 등의 영남 지역과 강원 등의 6개 지역에서만 승리하고 수도권 3곳에서는 전패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전부터 계속되던 지도부 책임론은 지방선거의 참패로 인해 터져나왔고 결국 조순 총재를 비롯한 지도부가 사퇴하였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을 8월 31일 총재로 선출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곧이어 터진 세풍[26] 과 총풍 사건[27] 은 한나라당에 시련이 되었다. 이회창 중심의 한나라당은 여권의 사정에 항의하기 위해 장외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경제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장외집회로 인한 국민 여론의 악화와, 이를 우려한 일부 의원들의 의견 제기로 이회창 총재는 조건없는 국회등원을 선언하였다.

        1999년[편집]

        1999년 초에 터진 옷로비 사건으로 인해 여권의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반면에 한나라당에는 기회를 되었다. 또한 내각제 개헌 여부를 놓고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자민련의 갈등이 서서히 표면화되면서 정국 주도권은 서서히 한나라당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2000년[편집]

        2000년 4월 13일 총선을 2개월 정도 앞둔 2월, 이회창 총재는 소위 ‘개혁 공천’이라는 명분으로 현역 의원 및 측근 상당수를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오세훈, 원희룡 등의 개혁 인사를 적극 등용한다. 그러나 공천 탈락자들의 거센 반발이 시작되었고, 결국 조순, 김윤환 등의 중진 인사가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때 한나라당은 영남 지역에서 의석을 잠식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민국당 찍으면 DJ를 도와주는 격”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결국 영남 지역에서 울산 동구(정몽준)를 제외한 모든 의석을 석권하게 되었다.

        총선 결과 한나라당은 총 133석을 얻어 원내 제1당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만, 호남 지역에서는 단 한 석도 얻지 못한데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서 새천년민주당에 패배하였다.


        2002년[편집]

        2002년 3월부터 시작한 ‘노풍’으로 인해 한때 노무현 후보와의 지지도 격차가 20~30%에 달했지만, 연이어 터진 대통령 아들 및 측근 비리로 인해 한나라당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된다. 특히 6월 13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호남 지역 및 제주도, 충청남도를 제외한 11곳에서 승리하고, 9월 정몽준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여 노무현의 표를 상당 부분 잠식해 나가자 사실상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노무현정몽준의 후보 단일화가 성공하여 노무현과 팽팽한 접전을 하게 되자 한나라당은 당혹스러워했으며, 이후 치열한 공방이 지속되었다.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정몽준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내심 기대했으나, 오히려 노무현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2.3%차로 노무현에게 패하게 된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1997년에 이어 또 다시 대선에서 패해 야당 생활에서 벗어날 기회를 잃었으며, 이회창 역시 5년간의 절치부심이 단 하루 만에 물거품으로 돌아온 격이 되었다. 대선 다음날인 12월 20일 이회창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2004년[편집]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을 주도하여 국민적 지지를 잃어 당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았으나, 새로이 선출한 대표 박근혜의 필사적인 유세 그리고 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 시비로 인해 영남권을 중심으로 지지도가 상승하였다. 그리하여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초 목표인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는 121석을 얻어 국회 제1 야당의 자리를 지켜냈다. 그러나 43년 동안 유지하고 있던 국회 제1당의 지위는 열린우리당에게 내줬다.

        2006년[편집]

        2006년 2월 20일에는 자유민주연합과의 통합을 선언했으며, 같은 해 5월 31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박근혜의 인기에 힘입어 재보선 41:0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2007년[편집]

        2007년 1월 31일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 탈당으로 인해 한나라당이 다시 국회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8월 18일, 열린우리당 탈당파와 시민사회세력이 주도하여 결성한 대통합민주신당열린우리당과 합당하면서 다시 국회 제1당의 자리를 내주었다.

        8월 21일 이명박-박근혜 후보 간의 치열한 경선이 이명박의 신승으로 끝났다. 이명박은 박근혜에 1.5%차 신승을 거두며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고, 패배한 박근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는 깨끗한 모습을 보여 국민의 호감을 받고 당내의 안정을 불러왔다.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 선거 결과 지지율 고공 행진을 이어오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각종 의혹을 딛고 50%에 못미친 48.7%를 득표하며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이명박 후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로 나타나, 이명박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역대 사상 최대 표차인 531만여 표차로 2위 정동영 후보에 22%차 압승을 거둔 한나라당은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이 김대중에게 1.5%차로 패배하며 야당이 된 이후 1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내며 여당이 되었다.

        2008년[편집]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당선자가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3월 24일 총선 공천을 두고 친 박근혜 성향의 의원들이 반발하여 한나라당을 탈당, 친박연대를 창당하였다. 박근혜 전 대표는 여러 차례 공천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지만, 친박 연대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8대 총선에서 자신의 측근인 한나라당 후보들에게만 영상 편지를 보내고, 이외의 선거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친박 의원들의 행보를 사실상 묵인했다.

        4월 9일 제18대 총선에서 153석의 의석을 얻어 과반의석을 확보한 원내 제1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애초에 한나라당에서는 당을 탈당해 친박연대 및 친박 무소속 연대로 출마한 사람들의 복당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결국 7월 10일에 일괄 복당을 허용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한편, 이명박의 대표적인 측근이었던 이재오이방호는 각각 창조한국당문국현, 민주노동당강기갑에게 패배해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다. 통합민주당의 대표적 정치인인 손학규, 정동영과 대결했던 박진, 정몽준은 다시 한번 국회의원이 되는 데 성공했다. 진보신당 노회찬에게 여론조사 내내 뒤져있던 홍정욱 역시 여론조사를 뒤집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5월 31일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한 제18대 국회가 개원하였다.

        서울, 경기 지역에서의 압승[편집]

        역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신한국당 시절의 15대 총선을 제외하고는 수도권에서 고전했었고 특히 지난 17대 총선 당시에도 수도권 99석 가운데 76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면서 패배했지만 18대 총선에서는 수도권 111석 가운데 한나라당이 73석을 차지하며 압승, 전체 승패를 갈랐다. 특히 민주당의 전통적 강세 지역인 서울 도봉.노원.중랑.성북.강북 등 북부 벨트가 무너졌고 우세를 예상했던 마포 등에서도 한나라당이 승리했다.[28] 이에 대해 강북지역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데는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시절 추진한 ‘강북 뉴타운’이 주효했다는 분석도 있다.[29]

        충청 지역에서의 참패[편집]

        제18대 총선 여론 조사에서 과반이 예상되던 한나라당은 충청 지역의 자유선진당 바람도 저지할 겸 해서 24석이 있는 충청 지역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천·단양송광호만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을 뿐 나머지 23개 지역구는 모두 낙선해 제17대 총선에 이어 또 다시 충청 지역에서 1석밖에 얻지 못했다.

        제17대 총선에서 충청 지역 24개 지역구 후보 중 유일하게 당선되었던 예산·홍성홍문표는 자유선진당의 총재 이회창과 격돌하여 크게 패배했으며, 박근혜의 지원에 힘입어 당선을 노리던 대전 중구강창희도 제17대 총선 라이벌이었던 자유선진당의 권선택에게 또 다시 패배했다. 제17대 총선에서 낙선 운동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기적적으로 당선에 성공한 부여·청양김학원(17대 총선 당시 자유민주연합 소속)도 여론 조사 내내 자유선진당의 이진삼을 앞섰지만 결과는 적지 않은 표 차이의 패배였고, 보은·옥천·영동심규철 역시 여론 조사에서 자유선진당의 이용희를 앞서다가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오히려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다 공천 탈락 후 자유선진당으로 당적을 옮겨 출마한 대전 서을이재선은 당선에 성공했다.

        전국정당화 실패[편집]

        충청 지역(제천·단양 제외)과 더불어 제주특별자치도와 또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지역에서도 한나라당 및 한나라당 계열의 인사는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텃밭인 영남지역에서 통합민주당 2석(부산 사하을, 경남 김해을), 민주노동당 2석(경남 창원을, 사천) 등 총 4석을 내줬다.

        2009년 이후[편집]

        전임 주요 당직자[편집]

        조순 시대의 집단지도체제
        이회창 시대의 단일지도체제
        이회창 이후의 집단지도체제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전일순 논산시장 당선 무효 - 오마이뉴스
        2. 이동 자유선진당 지도부 사퇴...이인제 비대위원장 체제로 YTN 2012년 4월 16일
        3. 이동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377809
        4. 이동 http://news1.kr/articles/896316
        5. 이동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414쪽
        6. 이동 이회창-조순 합당합의 선언문, 1997.11.08
        7. 이동 통합당명 「한나라당」 조선일보, 1997.11.20
        8. 이동 지지율 함정 한국경제, 2007-03-27
        9. 이동 적과의 동침, 이회창 “이인제 사랑합니다” 중앙일보, 2007-12-17
        10. 이동 어~ 어~ 방심하다가 아 ! 아 !당한후보들 헤럴드경제, 2007-01-06
        11. 이동 대한민국 50년사2 임영태
        12. 이동 투표일 가까울수록 이회창 회복세/여론조사 지지율 추이 문화일보, 1997-12-19
        13. 이동 역전­재역전 “짜릿한 드라마”/「12·18」 선택 세계일보, 1997-12-19
        14. 이동 강미은, 통하고 싶은가?, 매일경제 신문사
        15. 이동 “이것만 됐더라도” 장탄식… 잇단 대책회의서 결속다져 1997.12.20
        16. 이동 김대중대통령 취임사 정치분야: 보복.차별없는 정치 1998.02.25
        17. 이동 내각제-정경유착 뿌리둔 옛사람 조선일보, 1998.02.17
        18. 이동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무산 1998.02.25
        19. 이동 김종필 총리서리 취임 1998.03.03
        20. 이동 김종필 총리서리 임명 둘러싼 위헌 공방 1998.03.26
        21. 이동 총리서리제 위헌성 놓고 헌법재판소, 각하 결정 1998.07.14
        22. 이동 한나라당,북풍 수사에 강력 반발 문화방송, 1998.3.6
        23. 이동 김대통령 「정계재편」 발언록
        24. 이동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 정계개편 방침 공개 선언 1998.04.21
        25. 이동 與野 바뀐 10년 전에도 비슷한 혼선 조선일보, 2008.08.19
        26. 이동 국세청 동원 대선자금모금 사건 - 유죄로 확정되었다.
        27. 이동 대법원에 의해 무죄로 확정되었다.
        28. 이동 무너진 東西분할… 지역주의 극복 새 희망을 쐈다 헤럴드 경제 2008-04-10 14:16
        29. 이동 MB 뉴타운이 강북벨트 점령 내일신문, 2008-04-10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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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역대 선거 득표 (1971–2016)[1][2]
        50%
        40%
        30%
        20%
        10%
        0%
        역대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국회 의석 비율 (1948–2016)[3]
        70%
        6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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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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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대한민국 정당사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회자유주의, 민주주의세력, 재야 운동권세력, 학생 운동권세력, 중도진보 세력 등이 서로 이합집산하면서 수차례 정계개편을 통해 이어져 온 자유주의 정당의 한 계통이다. 현재의 민주당계 정당의 기둥은 평화민주당 계열과 민주화 운동의 주축을 이루어 온 386세력이 이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김대중 정부까지는 군사정권독재, 권위주의의 반대를 포함한 온건보수 및 반권위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색채, 재야 운동권에 대한 호의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4]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2003년 이후의 노무현 정부부터는 진보적 색채가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015년 9월 18일,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를 1955년에 창당되었던 민주당으로 규정하고, 창당 6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5] 그러나 민주당계 정당의 시발점은 1945년 9월 2일 창당된 한국민주당과 그 후신인 민주국민당이다.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목차

         [숨기기

        역사[편집]

        평화민주당 창당에서 정권 교체까지[편집]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정통 야당의 맥과 역사는 1955년 자유당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 때 범야권의 결집으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현재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야당의 가장 큰 맥은 통일민주당이라 할 수 있다.[6]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에 반대하던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탈당한 뒤 1987년 4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통일민주당은 당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 항의하는 야당으로써 활동해 왔다. 한편 이러한 통일민주당의 시발점은 신민당과 1955년에 창당된 민주당의 모태인 민주국민당과 그 전신인 한국민주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한민주당 시절 때부터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던 양김이 독자적으로 창당한 이 통일민주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 결과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6] 그러나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와 김대중이 이끄는 동교동계의 마찰이 계속됐고, 결국 대선을 눈앞에 두고 동교동계가 탈당하였다. 이들이 창당한 정당이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실질적인 뿌리가 되는 평화민주당이다.[6] 그러나 여기서 시작된 야권 분열은 물론, 부정선거로 추정되는 행위 등으로 인해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결국 대선에서 참패하고 말았으며,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도 처참하게 패했다. 평민당은 3위의 득표율에도 원내 2당이자 제1야당으로 떠올라 정부를 견제할 힘을 얻었지만, 다른 야당이던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민주정의당과 합당하면서 그 힘을 잃게 되었다(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개헌선을 초과한 218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일부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독자 행보를 걸고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평민당은 이후 신민주연합당으로 개명한 뒤 줄곧 활동해 왔으며, 이후 1992년 꼬마민주당을 흡수한 뒤 민주당을 창당했다. 새로운 민주당은 1992년 총선에서 패했으나 민자당의 위기 속에서 나름 선전을 했으며, 이후 같은 해 대선에 김대중을 후보로 내세워 도전했으나 패하여, 야당으로 계속 남게 되었다. 김대중의 은퇴로 김대중은 모든 당권을 내놓았으나, 동교동계의 당권 장악은 계속되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선전했고, 이어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일대가 탈당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국민회의는 1996년 총선에서 부진했으나 1997년 대선에서 자유민주연합과의 연대로 승리하여,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헌정 이후 최초이자 1960년 이후 38년만에 민주당계 정당이 집권하였다.

        분당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창당까지[편집]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의 취임으로 '국민의 정부'가 탄생했고, 선거 당시 연대한 자유민주연합은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더불어 여당이 되었다. 당시 거대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국민회의와 자민련을 괴롭혀왔으나,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사 1998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다. 이어 '의원 빼가기' 작전 끝에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국회과반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두고 여권 분열이 있었고, 여러 스캔들이 터져 민심 이반이 일어났다. 국민회의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으로 개편되어 해체되었고, 이어 총선에서 의석수는 늘어났으나 한나라당에 밀려 패했다. 이후 김대중은 리더십을 잃었고, 공동여당 공조 파기까지 일어나면서 정권의 국정 운영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민주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패했고, 결국 김대중은 탈당하였다(2000년 총선 전 새천년민주당 창당). 그러나 동교동계는 여전히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국민 경선제가 동교동계의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당시 '노풍'의 결과로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동교동계 후보 한화갑은 몰락했다. 결국, 대선 후보로는 노무현이 선출되었다. 대선 결과, 노무현의 당선으로 민주당은 정권을 연장했으나, 당시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동교동계와 노무현 간의 관계 악화는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 소위 '친노'라고 불리던 개혁파 당원들이 탈당하였다. 이들은 한나라당 탈당파들과 연대한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한편 노무현열린우리당 창당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다가, 2003년 9월 30일 탈당하였다. 이로써 새천년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였고,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하는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인 여당 역할을 하였다). 노무현은 2004년 총선 직전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이에 민주당은 한나라당, 자민련과 함께 '선거중립 위반'을 이유로 노무현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샀으며,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여 과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역으로 한나라당은 물론 비주류 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에게조차 밀려 9석짜리 미니정당으로 전락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은퇴까지 이어져 3김 시대는 끝났고, 동교동계도 정치적 실권을 잃게 되었다. 대신 새로 떠오른 열린우리당이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다. 열린우리당은 친노무현 세력과 비노무현 세력으로 분류되었는데, 비노 계열의 경우 개혁 성향의 친김근태계 및 친고건계와 실용주의 성향의 친정동영계로 분류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입당으로 정식 여당이 되었고, 이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으나, 계파 갈등과 야당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었다. 보수주의 및 우익 세력들은 노무현을 종북이라고 비난했으며, 진보주의 및 좌익 세력들은 노무현을 친미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민심 이반이 일어났으며,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여 과반이 붕괴되었다. 게다가, 미니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2005년 '새천년'을 뺀 민주당으로 개명)이 차츰 힘을 얻었고, 결국 열린우리당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게도 밀리는 참패를 당했다(호남에서도 패했다). 이후 2007년 열린우리당은 계파 분열로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으며, 8월 합당으로 원내 1당의 위치를 되찾았으나, 역으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어 자동 해체되었다. 또한 일부는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은 당시 실추된 민심의 결과로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에게 패배하여, 다시 야당으로 되돌아갔고, 이어 2008년 민주당을 흡수해 통합민주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활약했으나 참패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미국산 소고기 문제로 반정부 시위가 터졌고, 이어 노무현의 자살로 인해 한나라당 정권의 지지율이 타격을 입어, 때마다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어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민주당은 2011년 민주통합당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2011년 재보궐 선거 무렵부터 안철수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물론 2012년 총선에서 활동은 하지 않았고, 대신 대선에 출마하여 화제를 모았으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중 돌연 사퇴하였다. 야권의 실질적인 단일 후보가 된 문재인은 안철수의 지지 유세 속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패배하여, 계속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이미 '유력 대권주자'까지 부상했고, 이에 민주통합당은 2013년 보궐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영입을 고려했으나 거부당했다. '안철수 신당' 창당설이 나돌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11월 신당 창당을 본격 선언함으로써 '안철수 신당'은 구체화되었다. 이미 '안철수 신당'의 가상 지지율은 민주당의 지지율을 추월했고, 신당의 이름까지 '새정치연합'으로 결정되었으나, 결국 민주당과 연대를 선언하여 신당 창당은 무산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야권의 연대가 이루어졌고, 드디어 2014년 3월 26일 민주당(2013년 개명)과 새정치연합이 만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했다.

        연표[편집]

        1987년 ~ 1997년 : 삼김시대[편집]

        1997년 ~ 2002년 : 집권여당[편집]

        2003년 ~ 2006년 : 세력분열[편집]

        2007년 ~ 현재 : 다시 야당으로[편집]

        목록[편집]

        해방 이후[편집]

        고려민주당 (1945년)[편집]

        1945년 8월 18일원세훈 등이 창당한 최초의 한국 우익정당이다. 김병로백관수도 정당 결성 준비를 하자, 원세훈은 고려민주당을 해체하고 이들과 합작하여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 (1945년)[편집]

        1945년 8월 16일 이인, 윤보선 등이 만든 정당

        조선민족당 (1945년)[편집]

        1945년 8월 28일 조헌영, 조병옥 등의 고려민주당계와 김병로계, 신간회 경성지회계, 윤보선, 이인계 등이 참여한 정당.

        한국민주당 (1945년)[편집]

        1945년 9월 16일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만든 보수정당으로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약칭은 한민당이다. 사실상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격이다. 미군정의 실질적 여당으로 초기에는 한국독립당대한민국임시정부에 우호적이었으나, 임정 계열에서 송진우장덕수를 연이어 암살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6월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적극 찬성하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내각에서 배제당하자 야당화되었다.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 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해체되었다.

        민주국민당 (1949년)[편집]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이 대한국민회, 신익희 세력, 대동청년단(지청천 세력) 등과 통합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국당이다. 수 차례에 걸친 개헌 파동 등 난관과 억압을 받다가 1955년 9월 19일 민주당에 흡수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신익희, 김도연, 이영준, 백남훈, 서상일, 조병옥 등이 있다.

        민주당 (1955년)[편집]

        1955년 자유당사사오입개헌 사건을 계기로 민주국민당의 보수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 등의 범 야권 세력이 모여 호헌동지회를 결성한 뒤, 호동을 중심으로 9월 18일 창당하였다. 그러나, 구 한민당-민주국민당 출신 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의 내부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1956년 대선 후보 선출 전 곽상훈의 중개로,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워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신익희는 선거 직전 사망했고, 장면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등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구파와 신파간의 분당, 당내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산되었다. 구파의 주요인물로는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김준연, 김성수가 있었고, 신파의 주요인물로는 장면, 곽상훈, 박순천 등이 있었다.

        통일당 (1957년)[편집]

        1957년 11월 18일, 민주당에서 제명당한 김준연의 주도로 창당하였고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해체되었다.

        신민당 (1960년)[편집]

        민주당의 구파가 분당하여 1960년 12월 14일에 창당하였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편집]

        민정당 (1963년)[편집]

        윤보선김병로 등을 중심으로 신민당·자유당·민주당·무소속 등 4개 세력의 단일야당으로 모여 1963년 6월 28일 창당하였다. 그 해 5대 대선에서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1963년 11월 26일 김준연의 자유민주당을 흡수하였다. 6대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었다. 이후,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반대투쟁에 나서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1965년 5월 11일 제2야당인 민주당과 함께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반대투쟁을 단일화하기 위해 민중당을 신설합당하여 소멸하였다.

        민주당 (1963년)[편집]

        1963년 7월 18일, 박순천 등을 중심으로 민주당이 재건되었다. 같은 해에 실시된 6대 총선에서 11석을 얻어 제2야당이 되었다. 1964년 6월에는 김병로국민의당을 흡수하였다. 1965년 5월 11일에는 원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함께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반대투쟁을 단일화하기 위해 민중당으로 신설합당하여 소멸하였다.

        자유민주당 (1963년)[편집]

        1963년 9월 3일 김준연 주도로 창당하였고 1964년 11월 26일 민정당에 흡수되면서 소멸하였다.

        국민의당 (1963년)[편집]

        1963년 9월 5일 민우당신정당 그리고 민주당과 민정당의 일부 의원과 무소속 참여하여 창당하였고 이범석 등 자유당 탈당파 일부도 참여하였다. 뒤에 이범석 등은 탈당하였고 1964년 9월 17일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소멸하였다.

        민중당 (1965년)[편집]

        1965년 5월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민주당한일기본조약체결의 반대투쟁을 단일화하기 위해 통합하여 창당하였다. 그러나, 박순천계와 윤보선계의 계파갈등이 지속되었고, 결국 윤보선을 비롯한 강경파는 탈당하여 독립했다. 1967년 2월 11일, 6대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를 위하여 신한당과 함께 신민당으로 신설합당하여 소멸하였다.

        신한당(1966년)[편집]

        1966년 3월 30일,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입장 차이로 윤보선 등의 강경파가 민중당에서 독립하여 창당했다. 1967년 2월 11일, 6대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를 위하여 민중당과 함께 신민당으로 신설합당하여 소멸하였다.

        신민당 (1967년)[편집]

        1967년 2월 7일, 민중당신한당을 중심으로 분열된 민주세력을 모아 창당했다. 1969년, 연임금지조항 삭제 등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에 반대를 당론으로 하고 있던 중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의원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헌법개정안 가결 정족수는 117명 이었는데, 이 3명의 의원이 개헌안을 지지하면서 개헌안 찬성 서명의원이 122명이 되었다. 이에 유진오 총재는 9월 긴급 전당대회를 열어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낸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44명을 제명하고 당을 자진해산함으로써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냈던 의원의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무소속이 된 44명의 의원은 원내교섭단체인 신민회를 구성하여, 1969년 9월 22일 다시 등록하였다. 1970년 1월 26일에는 자유당 잔존파를 흡수합당하였고, 같은 해 2월 3일에는 한국독립당 잔존파를 흡수합당하였다. 김대중 후보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선 이후 신민당은 유진산파와 김대중이 지지하는 김홍일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1972년 9월 20일 유진산이 이끄는 소위 진산계만으로 시민회관에서 전당대회가 강행되어 유진산을 당수로 선출하자, 반 진산연합계는 효창동의 김홍일 자택에서 단독 전당대회를 열고 김홍일을 당수로 선출함으로써 두 개로 쪼개졌다. 그런 분당 상태에서 유신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신민당은 충격을 받고 재통합하면서 유진산을 당수로 추대하였으며, 유진산은 선거 실시 전에 잠시 사임하였다가 선거 후 다시 당수로 복귀하게 되었다.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해 자동해산되었다.[7]

        국민당 (1971년)[편집]

        1971년 1월 6일 김대중 후보가 신민당의 대통령후보로 결정되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당 구파 계열인 윤보선, 박기출 등을 중심으로 창당하여 활동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으로 해산되었다.

        민주통일당 (1973년)[편집]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후, 신민당의 반유진산계 (김홍일, 양일동, 윤제술 등)가 중심이 되어 1973년 1월 27일 창당하고 양일동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기본노선은 보수정당에 바탕을 두고 혁신적·진보적인 정강정책을 추진하였다. 약칭은 통일당이었다. 197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의석 3석 달성하였고, 1978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의석 3석 달성하였다. 1980년 2월 당간부 30여 명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해산되었다.


        5·18 광주민주항쟁 이후[편집]

        민주한국당 (1981년)[편집]

        1981년 1월 유치송을 총재로 하여 창당되었다. 약칭은 민한당이다. 같은 해 2월 제12대 대통령선거에 유치송을 후보자로 내세워 참여하였으나 7.7%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실시된 11대 총선에서는 총 81석의 의석을 확보하여 제5공화국의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민한당은 안기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창당된 사실상의 관제야당으로, 정권을 견제한다는 야당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84년,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제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자 소속 의원 10여 명이 탈당하여 옮겨갔으며, 1985년 12대 총선에서 35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쳐 신한민주당에게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었고, 그 후 소속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져 국회의원 3명의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였다. 마침내, 1988년 13대 총선에서 총재 유치송을 비롯한 후보자 전원이 낙선하여, 정당법에 따라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신한민주당 (1985년)[편집]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인사들이 1984년 12월 정치활동금지에서 해제되면서, 선명성을 지닌 정통 야당이 되살아나 전두환 정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해금 인사들과 일부 민한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신당 창당을 결의, 새로운 야당 신한민주당을 1985년 1월 18일 창당했다. 약칭은 신민당이다. 이후 민한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이 신한민주당에 가세하면서 의석수가 103석으로 늘어났고, 명실상부한 제1 야당으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두환 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먼저 단행할 경우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파가 이민우 구상에 대해 반발하였고, 이철승, 이택돈 등의 내각제 개헌파가 이에 반박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결국 1987년 4월 양김이 자파 의원 74명을 이끌고 집단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야당 돌풍의 주인공인 신한민주당은 존립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 1988년 4월 26일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철승 등의 일부 인사들이 분전했지만 결국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었다.

        통일민주당 (1987년)[편집]

        1987년 5월 1일, 김영삼김대중을 중심으로 창당했다. 약칭은 민주당이다. 신한민주당이 내분에 빠지자, 김영삼김대중이 새로운 야당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자신의 지지파 의원 (상도동계, 동교동계)들을 신한민주당으로부터 탈당시켜 창당하였다. 창당과정에서 이른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도 발생하였다. 양김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하기도했다. 통일민주당은 개헌논의의 중지를 선언한 전두환 대통령의 4·13조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6월 항쟁을 유발하였다. 그 결과 민주정의당 대표인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승리를 거둔 통일민주당은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자 선출문제를 놓고 대립하다가 김대중계 의원 (동교동계)들이 10월 29일 집단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분당되었다. 이후 통일민주당은 상도동계가 중심이 되어 김영삼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고,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참여하였으나, 유효투표의 28.0%를 획득하는 데 그쳐 36.6%를 획득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하여 민주자유당이 창당됨으로써 소멸하였다. 3당 합당에 반대하는 잔류파들은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 (1987년)[편집]

        평화민주당은 1987년 10월 29일 통일민주당에 참여했던 동교동계 인사들이 탈당해 1987년 11월 12일 김대중을 총재 및 대통령선거 후보로 추대함과 동시에 창당됐다. 약칭은 평민당이다. 김대중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7.0%의 득표로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다. 그 뒤에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 대체입법안, 5.18 진상조사 등 민주화 관련 법안에서 공조하기도 하였다. 신민주공화당과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에 동조한 이후 평민당은 이우정, 신계륜, 장영달 등의 재야운동가를 영입한 뒤 1991년 4월 15일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1991년 9월 16일,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일명 꼬마 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민주당 (1990년)[편집]

        1990년 6월 15일 삼당합당을 반대하는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의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과 박찬종, 이철 등의 무소속 의원 등을 중심으로 창당했다. 보통 꼬마 민주당으로 불린다. 1991년 9월 16일 신민주연합당과 함께 민주당으로 신설합당되어 소멸하였다.


        문민정부 수립 이후[편집]

        민주당 (1991년)[편집]

        평화민주당이 확대 개편된 신민주연합당삼당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등의 민주당의 합당으로 1991년 9월 16일 창당되었다. 1990년의 민주당과 구분해서 보통 통합민주당으로 부른다. 1995년 3월 7일에는 새한국당을 흡수합당하고 1회 지방 선거에서 선전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탈당하여 제2야당으로 추락하였고,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신설합당되어 소멸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 (1995년)[편집]

        14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던 김대중이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하자,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에 참여하면서 국민회의는 창당과 함께 제1야당이 되었다. 1995년 9월 5일 창당하고 1995년 9월 11일에 공식 등록되었다. 약칭은 국민회의이다. 1996년15대 총선에서는 야당 분열의 결과로 정대철, 이종찬, 김덕규 등의 중진 국회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참패하여 299석 중 7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으나, 1997년 12월 18일15대 대선에서 자유민주연합과의 공조를 통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집권여당이 되었다. 16대 총선을 3개월 앞두고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해산되었다.

        통합민주당/민주당 (1995년)[편집]

        1995년 12월 21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세력이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15대 총선에서 제4당으로 전락하였다. 1996년 6월 13일에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고 결국, 1997년 11월 24일신한국당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신설 합당하여 소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발한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 당원 일부가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새천년민주당/민주당 (2000년)[편집]

        2000년 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개편해서 창당하였다. 각종 게이트 의혹과 아들들의 비리 연루로 김대중 대통령이 2002년 5월 탈당하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집권 여당이었다. 국민 경선을 통해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되었고, 16대 대선에서 당선이 되어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노무현을 비롯한 당내 개혁세력이 탈당하여 당세가 약해지고 야당이 되었다.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였다가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그로 인해, 17대 총선에서 9명의 의원만이 당선되어 원내교섭단체에서 제외되었다. 2005년 5월 6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마침내, 2007년 6월 29일 민주당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당하여 박상천, 김한길을 공동대표로 하는 중도통합민주당이 출범하였다.

        개혁국민정당 (2002년)[편집]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 친노계열의 인사들 주축으로 창당되었고, 한나라당에서 김원웅 등이 뒤에 합류하였다. 2003년 11월, 전국상임위원회 당내회의를 개최하고 모바일 투표 결과를 검토하여 당을 해산시킨다는 방침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12월, 유시민 의원은 한나라당, 민주당내 개혁파 의원들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입당하였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가 인터넷을 통한 해산 결의는 무효라고 결정하였고 잔류를 주장하는 당원들과 잡음이 있었으나, 2004년 9월 13일, 개정된 정당법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공식 해산하였다.

        참여정부 수립 이후[편집]

        열린우리당 (2003년)[편집]

        2003년 11월 11일개혁국민정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내 정당 개혁, 정치 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 세력들이 모여 창당한 정당이다. 약칭은 우리당이다. 같은 해 11월 17일에 정당 등록하였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일시적인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의 여파로 17대 총선에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원내 1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여 집권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참패하였다. 지지도는 계속해서 떨어졌고 잇따라 의원들이 탈당하여 과반이 무너졌다. 결국, 2007년 8월 18일에 신당인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합당하였다.

        중도개혁통합신당 (2007년)[편집]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강봉균, 김낙순, 김한길 등 국회의원 23명은 2007년 2월 12일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을 만들었고 창당에 반대한 노웅래 등을 제외하고 신국환, 유필우가 추가로 합류하여 국회의원 20명으로 김한길 의원을 대표로 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6월 29일민주당과 함께 중도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였다.

        중도통합민주당/민주당 (2007년)[편집]

        2007년 6월 29일 중도개혁통합신당민주당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하였다. 그러나 8월 3일 중도개혁통합신당 계열이 탈당하여 8월 9일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입당하였다. 그래서 2007년 8월 13일 당명과 로고를 민주당으로 원상복구하였다. 17대 대선에서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를 내세웠으나 미미한 득표율로 낙선하였고 이듬해 2008년 2월 17일 대통합민주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여 소멸하였다.

        대통합민주신당 (2007년)[편집]

        2007년 8월 5일열린우리당의 탈당파와 중도통합민주당의 탈당파,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를 중심으로 하는 선진평화연대 세력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의 미래창조연대 등 크게 4가지 세력이 뭉쳐 창당한 정당이다. 같은 해 8월 18일, 열린우리당을 흡수하는 형식으로 열린우리당과 합당하여 원내 1당이 되었다. 정동영을 후보로 내세워 2007년 대선에 참여했다. 부단히 친(親)노무현 이미지를 벗기위한 명분없는 차별화를 시도했으나, 이에 대한 국민들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여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명박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친노 세력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한나라당 출신의 손학규를 당 대표로 세우고, 이명박 신정부에 대한 견제 활동을 계속 하였다. 그 후 2008년 2월 17일 민주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여 소멸하였다.

        통합민주당/민주당 (2008년)[편집]

        2008년 2월 17일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이 합당하여 창당하였다. 이 합당으로 열린우리당 출범부터 있었던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18대 총선에서 원내 2당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6일에 열린 제1차 정기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 통합민주당에서 통합을 뺀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하였다. 이후 각종 재보선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등 보수정당을 압도하며 대표 야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범야권 단일화를 필두로 여당을 제치고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 장악했으나 7.28 재보궐선거와 10.27 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당세확장이 주춤했다. 결국, 2011년 12월 16일 시민통합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함께 야권중통합의 일환으로 민주통합당으로 합당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동영, 김근태, 추미애, 천정배, 한명숙, 정세균, 손학규, 박지원 등이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편집]

        국민참여당 (2010년)[편집]

        열린우리당을 흡수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과의 합당때 합류하지 않은 친노직계 세력이 주축이 되어 2010년 1월 17일 창당한 정당이다. 창당 추진 당시 '친노정당'이라고 불렸다. 사실상, 2002년에 창당되었던 개혁국민정당의 후속격이다. 참여정부국민의 정부의 가치와 노선 계승을 표방했다. 2011년 12월 6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와 함께 야권소통합의 일환으로 통합진보당으로 합당했다. 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시민, 이병완, 천호선, 권태홍, 박무 등이 있다.

        민주통합당/민주당 (2011년)[편집]

        2011년 12월 16일 야권중통합의 일환인 민주당, 시민통합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합당으로 출범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주당이다. 이번 합당으로 사실상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상징색은 기존의 민주당계와 비슷하게 노란색을 주색으로 하고 초록색을 보조색으로 사용했으나, 2013년부터는 기존의 민주당계와는 다른 파란색을 사용한다. 2012년 총선에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이후, 완전국민경선을 통해 18대 대통령 후보를 문재인으로 정하여 대선을 진행하였다. 이후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인적쇄신 요구가 일어나게 되자 대선을 한달여 앞두고 이해찬을 비롯한 2기 지도부 전원이 총사퇴를 했다. 대선 후보가 대표 권한 대행도 동시에 겸하는 체제가 되었다.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노렸으나 낙선하여 야당으로 계속 남게 되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유지하다가 2013년 5월 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당명을 민주당으로 개명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재인, 김한길, 한명숙, 문희상, 김진표, 정세균, 박영선, 신경민, 박원순, 송영길, 최문순, 안희정, 원혜영, 박지원, 박기춘, 문성근 등이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편집]

        새정치민주연합 (2014년~2015년)[편집]

        2014년 3월 26일 민주당새정치연합(창당준비위원회)이 합쳐 출범한 정당이다. 통합 방식은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인 새정치연합과 민주당과 통합을 하고, 그 이름을 새정치민주연합을 하여 3월 26일에 안철수와 김한길을 공동 대표로 하여 통합 창당 하였다.[8] 이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열린우리당을 흡수합당하였던 과정과 비슷하다.[9]

        • 대표

          • 1기 : 안철수, 김한길 (2014년 3월 26일 ~ 2014년 7월 31일)
          • 국민공감혁신위원장 : 박영선 (2014년 8월 4일 ~ 2014년 9월 17일)
          • 비상대책위원장 : 문희상 (2014년 9월 18일 ~ 2015년 2월 8일)
          • 2기 : 문재인 (2015년 2월 9일 ~ 2016년 1월 26일)

        더불어민주당 (2015년~현재)[편집]

        2015년 12월 28일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당명 변경 이후 지속적으로 '인재 영입'을 해오고 있으며, 또한 국민의당으로의 탈당도 이어졌다. 1월 14일 문재인 대표가 직접 조기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1월 28일 문재인 대표의 사퇴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2016년 2월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정의당과 함께 진행하였으나, 2월 29일 오후 11시 50분경 중단을 발표하였다.


        역대 당 지도부[편집]

        역대 선거 현황[편집]

        역대 대선 결과[편집]

        실시년도대수후보자득 표득표율결과당락
        1952년2대이시영764,715표
        10.9%
        3위낙선
        1963년5대윤보선4,546,614표
        45.1%
        2위낙선
        1967년6대윤보선4,526,541표
        40.9%
        2위낙선
        1971년7대김대중5,395,900표
        45.2%
        2위낙선
        1971년7대박기출43,753표
        0.4%
        4위낙선
        1987년13대김영삼6,337,581표
        28.03%
        2위낙선
        1987년13대김대중6,113,375표
        27.04%
        3위낙선
        1992년14대김대중8,041,284표
        33.82%
        2위낙선
        1997년15대김대중10,326,275표
        40.27%
        1위Presidential Standard of the Republic of Korea.svg
        2002년16대노무현12,014,277표
        48.91%
        1위Presidential Standard of the Republic of Korea.svg
        2007년17대정동영6,174,681표
        26.14%
        2위낙선
        2007년17대이인제242,914표
        0.7%
        6위낙선
        2012년18대문재인14,692,632표
        48.02%
        2위낙선


        역대 총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선거지역구 당선자 현황비례대표 당선자 현황국회 정원
        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득표율당선자 수당선비율
        1950년2대24/210
        11.43%
        9.8%
        24/210
        11.43%
        1954년3대15/203
        7.39%
        7.9%
        15/203
        7.39%
        1958년4대80/233
        34.33%
        34.2%
        80/233
        34.33%
        1960년5대175/233
        75.11%
        41.7%
        175/233
        75.11%
        1963년6대27/131
        20.61%
        14/44
        20.1%
        41/175
        23.43%
        1963년6대9/131
        6.87%
        5/44
        13.5%
        14/175
        8%
        1963년6대6/131
        4.58%
        3/44
        8.1%
        9/175
        5.14%
        1963년6대2/131
        1.53%
        8.8%
        2/175
        1.14%
        1967년7대28/131
        21.37%
        17/44
        32.7%
        45/175
        25.71%
        1971년8대65/163
        39.88%
        24/51
        44.4%
        89/214
        41.59%
        1971년8대1/163
        0.61%
        4.1%
        1/214
        0.47%
        1973년9대52/146
        35.62%
        32.5%
        52/146
        35.62%
        1973년9대2/146
        1.37%
        10.1%
        2/146
        1.37%
        1978년10대61/154
        39.61%
        32.8%
        61/154
        39.61%
        1978년10대3/154
        1.95%
        7.4%
        3/154
        1.95%
        1981년11대57/184
        30.98%
        24/92
        21.6%
        81/276
        29.35%
        1985년12대26/184
        14.13%
        9/92
        19.7%
        35/276
        12.68%
        1985년12대50/184
        27.17%
        17/92
        29.3%
        67/276
        24.28%
        1988년13대46/224
        20.54%
        13/75
        23.8%
        59/299
        19.73%
        1988년13대54/224
        24.11%
        16/75
        19.3%
        70/299
        23.41%
        1992년14대75/237
        31.65%
        22/62
        29.2%
        97/299
        32.44%
        1996년15대66/253
        26.09%
        13/46
        25.3%
        79/299
        26.42%
        1996년15대9/253
        3.56%
        6/46
        11.2%
        15/299
        5.02%
        2000년16대96/227
        42.29%
        19/46
        35.9%
        115/273
        42.12%
        2004년17대5/243
        2.06%
        4/56
        7.1%
        9/299
        3.01%
        2004년17대129/243
        53.09%
        23/56
        38.3%
        152/299
        50.84%
        2008년18대66/245
        26.94%
        15/54
        25.17%
        81/299
        27.09%
        2012년19대106/246
        43.09%
        21/54
        36.45%
        127/300
        42.33%
        2016년20대110/253
        43.48%
        13/47
        25.5%
        123/300
        41%


        역대 지방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도지사시장읍장면장도의원시의원읍의원면의원
        1956년 1/30 9/544 98/437 54/416 57/990 231/16051
        1960년 6/10 12/26 23/82 297/1359 195/485 129/420 142/1055 2510/15376
        실시년도선거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기초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광역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기초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당선비율
        1995년1회4/15
        26.67%
        84/230
        36.52%
        353/875
        40.34%
        1998년2회6/16
        37.5%
        84/232
        36.21%
        271/616
        43.99%
        2002년3회4/16
        25%
        44/232
        18.97%
        143/682
        20.97%
        2006년4회2/16
        12.5%
        20/230
        8.7%
        80/733
        10.91%
        276/2888
        9.56%
        2006년4회1/16
        6.25%
        19/230
        8.26%
        52/733
        7.09%
        630/2888
        21.81%
        2010년5회7/16
        43.75%
        92/228
        40.35%
        362/762
        47.51%
        1025/2888
        35.49%
        2014년6회9/17
        52.94%
        80/226
        35.4%
        349/789
        44.23%
        1157/2898
        39.9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지방선거는 광역의원 선거결과 표시
        2. 이동 국민의당 미포함
        3. 이동 여기에 포함된 정당은 다음과 같다. 1대 : 한국민주당, 2·3대 : 민주국민당, 4·5대 : 민주당+통일당, 단 5대 국회 의원은 민의원과 참의원을 합쳤음. 6대 : 민정당+민주당+자유민주당+국민의당, 7대 : 신민당, 8대 : 신민당+국민당, 9·10대 : 신민당+민주통일당, 11대 : 민주한국당, 12대 : 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 13대 :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 14대 : 민주당, 15대 :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 16대 : 새천년민주당, 17대 : 열린우리당+민주당, 18대 : 통합민주당, 19대 : 민주통합당, 20대 : 더불어민주당
        4. 이동 한민당 외에 강력한 보수주의, 반공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정당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참고할 것.
        5. 이동 심혜리, 새정치민주연합 창당 60년...새 엠블럼 공개, 경향신문, 2015년 9월 8일
        6. 이동: 새전북신문 (2014년 3월 27일). “[사설〕 막 내린 60년 민주당”. 2014년 3월 29일에 확인함. 
        7. 이동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이 헌법 시행과 동시에 이 헌법 시행당시의 정당은 당연히 해산된다. -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7조
        8. 이동 박상휘, 발기찬 발기인 대회 마친 통합신당…창당까지 남은 절차는?, 뉴스1, 2014년 3월 16일
        9. 이동 심원섭, 김-안 ‘제3지대 창당’ 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모델, CNB뉴스, 2014년 3월 3일